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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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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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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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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9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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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16)

DUMMY

“서른여섯, 서른일곱, 서른여덟, 서른아홉, 마흔···.”


하도감 청군 군영 건너편 언덕 집의 지붕 위에서 바우는 바짝 긴장한 채 숫자를 헤아렸다. 총검으로 완전 무장한 청군 마흔 명이 군영을 나서고 있었다.

말을 탄 사관의 지휘를 받으면서 청군 일개 소대가 도성 안 어디론가 출정하는 순간이었다.


바우는 속이 바짝바짝 탔다.

엇저녁에 감시를 시작한 이래 개인적인 출입이 아닌 부대 단위의 움직임은 처음 목격한 것이었다.

이쯤 되면 계동으로 달려가서 개화당에게 보고를 해야 할 사항이었다. 그런데, 막상 필요할 때 신이란 놈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 이놈 자식은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거야? 지금 한 명은 여기 남아 있어야 되는데······.’


대열의 후미가 초가집들 사잇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청군들이 어디로 행군하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도성 밖으로 통하는 흥인문 쪽으로 가지 않는 것은 확실했다.

빨리 쫓아가서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고 첩보를 전하러 달려가야만 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가자!’


바우가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신이 놈이 돌아오면 볼기짝을 걷어차 주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바우는 온힘을 다해 행군 대열의 후미를 쫓아 달렸다.



“갈색 말을 타고 다니는데 말 이마에 하얀 점이 있고요. 옆에 턱하고 목에 불에 덴 자국이 있어요. 검정 두루마기에 작은 갓을 썼고요.”


신이는 흥인문에서 종묘로 가는 길의 싸전 주인에게 현명의 인상착의를 말하고 있었다.


“군사들하고 같이 다녔던 사람인데··· 청국 군사들하고도 얘기가 통하고 알고 지내는 사람이에요.”

“역관을 찾는 겨? 군관을 찾는 겨?”

“뭐 하는 사람인지는 저두 잘 모르는데요···.”

“아, 이 총각아, 지두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남한테 찾아 달라는 겨?

흥인문 사는 김서방 찾는 게 더 빠르겄네.”

“돌아가신 즈이 아버지랑 알던 어른이라 찾는 거예요.

검정 두루마기에 갈색 말, 얼굴이 불로 흉진 사람이요, 검정 말 탄 사람이랑 둘이 짝패로두 잘 다녀요.”

“오늘 군인들이 와서 쌀섬이나 팔아주긴 했는데, 글쎄 그런 이는 온 적 읎었거든······.”


싸전 주인은 모르겠다며 돌아 앉아서 담뱃대를 물었다.

쌀가마를 나르는 지게꾼 아이가 부싯돌을 주인에게 건네면서 끼어들었다.


“말 탄 이들은 요 앞에 마전교에 가면 많이 있는데······.”

“아, 이놈아 마전교 옆에가 마소 파는 장거리니까 말 탄 이야 주야장천 있지.

이 총각이 말 탄 사람 구경하자는 게 아녀.”

“그게 아니고요, 지가 아까 쌀지게 지구 가다 보니까 마전교 밑 공터에 병졸 옷 입은 군사들허구 상사내들하구 오늘따라 떼루 모여 있더라구요.

말 탄 이두 있구. 사람 많은 데 가서 묻구 찾구 하면 수월하지 않겠어요?”

“마전교 밑에? 지금도 모여들 있어?”


저보다 몇 살 안 많아 보이는 신이가 급하게 묻자, 지게꾼 아이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그렇다니까. 가 보든가······.”


신이는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계동이나 궁궐로 가지 않은 군사들은 우영에서 본 군사들처럼 개화당의 반대편일 터였다. 신이가 쫓고 있는 검은 두루마기 사내 역시 청군과 가까웠으니 개화당에 반대하는 군사들과도 가까울 거라 추리했다.

청계천의 마전교는 한달음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었다.



“새로 지은 우정총국이 홀랑 타버리고 잔치에 왔던 손님들은 칼 든 자객들한테 쫓기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더구만.”

“아니라니까. 내가 아침에 전동에 갈 일이 있어서 그 앞을 지나갔는데 우정국이 불탄 게 아니라 그 앞에 초가집들이 시커멓게 타버렸더라고.”

“그런데 우정총이라는 데는 뭐하는 덴가? 못 들어본 덴데.”

“으이그 이러니까 무식한 상놈 소리를 듣지. 우정국은 편지를 갖다 주면 대신 전해주는 신식 파발 역참이라구.”


지게꾼 아이 말대로 마전교 아래 공터에는 오십 명은 넘어 보이는 사내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황소 두 마리와 망아지 두 마리가 매물로 나와서 말뚝에 묶여 있었지만, 우마를 거래하려는 사람은 없고 온통 지난 밤 이야기를 듣고 보태느라 여념들이 없었다.


멈추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온 신이는 숨을 고르면서 한 명 한 명 사내들의 얼굴을 살폈다. 병졸 옷차림도 몇 명 있었지만 무기를 들고 근무를 하는 군사는 아니었다.

화상 자국이 있는 검은 두루마기도 그와 같이 있던 덩치 큰 장사도 보이지 않았다. 신이는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왜놈당이 도성 수비하는 영사들을 잡아 죽이느라고 불을 놓았다는 거야?”

“그려. 내가 듣기로는 부마 박영효를 왕으로 삼겠다고 임금님을 감금하고 있다는데.”

“설마, 상감마마를 어찌 감히 감금하겠나, 그저 뜬 소문 아닌가?”

“왜놈 공사가 신식 총들을 빌려줘서 민씨 양반들을 죄 쏴죽이게 했다는데 그것도 거짓부렁인가?”

“일본 공사관 병정놈들이 왜놈당이랑 짜고서 충신들을 잡아 가둔 건 확실해. 그건 사실이라니까.”


신이가 듣기에 실제 정변과 비슷한 이야기도 있고 엉뚱한 이야기도 있었다.

공통적인 것은 다들 정변 세력에게 악감정을 품고 떠든다는 것이었다. 대체 어떤 이들이 개화당을 미워하나, 한 사람 한 사람 누구를 뜯어봐도 다들 별 볼 일 없는 상놈들이었다.


‘양반도 아니고, 청나라 사람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원수가 졌다고 개화당을 욕하는 걸까?’


자기가 아는 너그러운 개화당과 이 사람들이 욕하는 왜놈당은 분명 같은 사람들인데, 어찌 그렇게 다르게 말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 생각과는 영 딴판인 세상의 인식을 접하다 보니 신이는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왜놈당이라 욕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그 양반들이 평소에 악행을 저지르는 걸 보았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게 답답한 어지럼증에 시달릴 때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신이는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두 마리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눈 한 번 깜빡할 동안 자기가 쫓던 두 사람으로 착각을 했다. 하지만 말을 탄 사람은 둘 다 군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워워 말을 천천히 가라 달래면서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로 들어왔다. 사람들 속에 섞여 있던 병졸 차림 세 사내가 군관들 앞으로 다가왔다.


“너희는 어느 군영 소속이냐?”

“예. 좌영 병졸로 오늘 저녁에 번을 설 차롄데, 난리가 났다고 해서 어디로 갈지 몰라 오락가락하고 있었습니다요.”

“서둘러서 하도감 옆 친군 우군영으로 가라. 좌영 군사들도 그리 합류하는 중이다.”


명령을 들은 병졸들은 마전교 아래 공터를 떠났다.

말 탄 군관 중 한 명이 품에서 두루마리 문서를 꺼내 펼쳤다. 웅성거리던 사내들이 저게 뭔가 보려고 조용해졌다.


“이것은 우의정 심순택 대감께서 내리신 군령이다.”


신이가 보기에 이 군관들과 우의정 대감은 개화당의 반대편이 분명했다.

신이는 긴장해서 군관의 입에 주목했다.


“역적의 무리가 일본군과 연합하여 친군 영사들을 살해하고 주상전하를 억류하고 있다. 전후영 군사들은 역적에게 부화뇌동한 일부 군관들로 인해 역모에 이끌려 들어갔다.

친군 사영의 모든 군사들은 즉시 우군영으로 집결하라. 전후영 군사도 역적으로부터 빠져나와 합류하라. 거리낄 것 없이 한 데 모여 역적을 없애러 나서라.”


고균 아저씨와 이서방 아저씨 넓게는 유대치 선생님과 진홍 누이까지··· 신이가 아는 개화당은 그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역적으로 보고 그 역적을 없애러 나서자고 도성 가운데서 군관이 외치고 있었다.

아아, 자기도 모르게 신이의 입이 벌어져 신음이 새나왔다.


“도성 백성들은 군사들을 보거든 우의정 대감의 이 군령을 전해 빠짐없이 우군영에 집결하도록 도우라! 알겠는가!”


알겠소이다, 암만요, 옳소, 마전교 아래 모인 사내들은 군관들의 지시에 열렬히 호응했다.

신이는 오금에 힘이 쭉 빠졌다. 이 일을 어떡해야 하나, 알 수가 없었다. 신이는 흔들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고 버티다가, 두 군관이 떠나는 것을 보고는 발을 옮겼다.


‘저 군관들을 쫓아가야돼. 얼른 따라가 봐야 돼.’


군관들을 따라간다고 현명과 부리를 만난다는 보장은 없었다. 신이는 저절로 이끌리듯이 두 마리 말의 꼬리를 보면서 휘청휘청 걸었다.



어쩌면, 평소처럼 장딴지에 힘을 주고 팍팍 땅바닥을 박찰 수 있었다면, 저자 거리를 슬슬 달리는 두 마리 말쯤은 따라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순간 신이의 다리는 흐물흐물 풀려 있었다. 신이는 멀어져 가는 두 마리 말을 힘겹게 쫓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눈앞에서 놓쳐버리겠구나 생각하는 순간에 말들이 멈춰섰다.


군관 한 명이 내리더니 담벼락에 뭔가 붙이는 게 보였다. 벽에 붙은 종이를 목표로 삼아 신이는 걸었다.

곧 군관과 말들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허위허위 다가가 보니 벽에는 언문으로 된 글이 붙어 있었다. 내용은 아까 마전교 아래 공터에서 군관들이 읽은 우의정의 군령이었다.


신이는 고개를 휘저어 주변을 살폈다. 오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급하게 벽서를 뜯어내서 잘게 찢어댔다. 그러다가 옆 골목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자 종이를 움켜쥔 채 뛰어 달아났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면서 힘없이 달리다가 또 벽서를 발견했다. 이번에는 두 장이 붙어 있었고 여러 사람이 그 앞에 서 있었다.

뜯어내서 찢을 수 없으니 지나쳐야 했다.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신이가 걷는 곳은 우물이 깊어 물이 먹물같이 보인다는 먹정골, 묵정동이었다.

우물이 어디 있었지, 그 속엔 정말 먹물이 들어 있나, 실없는 생각이 허한 몸뚱이에 실리고 있었다.



“왜놈당이 왜놈 군대와 손을 잡고 역모를 저질렀소!”


목청이 갈라져 귀를 긁는 외침이 들려왔다. 신이는 정신을 붙잡으면서 걷기를 멈췄다.

싸리 울타리를 친 주막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주막 맞은 편 기와집 담장에는 또 벽서 두 장이 붙어 있었다. 역시 둘 다 언문이었고 한 가지는 아까의 군령이었으나 하나는 다른 글이었다.


‘왜놈당이 왜놈 군대와 손을 잡고 역모를 저질렀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이 왜놈당의 주모자다.

임금님과 대왕대비마마를 가두고 충신들을 죽이고 있다.

백성들아 모여서 왜놈당을 쳐부수자.’


주막 안에서는 민상투 차림의 털북숭이 사내가 동네 사람과 길손들에게 외쳐대고 있었다. 왜놈당이 역적이니 왜놈당을 쳐부수자는, 벽서에 적힌 글귀를 언문을 못 읽는 이도 들으라고 반복해서 소리치는 중이었다.

그리고 듣는 이들은 모두가 양반 아닌 상사람들이었는데, 가슴을 치며 분개하는 노인과 눈물을 찍어내는 아낙도 있었다.


‘이런, 이런······, 어떻게 해야 하지? 고균 아저씨는 양반 상놈의 구분을 없앨 거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청나라 군인놈의 칼에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도 병졸이었고······, 아버지도 종놈이었는데······.’


신이는 벽서가 붙어 있는 담벼락 끝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종놈이었던 아버지, 병졸이 되었다고 좋아하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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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튿날(16) 23.10.19 7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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