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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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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최근연재일 :
2023.11.0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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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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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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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사흗날(12)

DUMMY

“팔자가 답답하더니 전쟁통에도 갑갑증이 나네 원···.”


어려서부터 윤경순은 세상이 답답하기만 했다.

뚝심으로는 누구도 이길 수 있는데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샌님들한테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사방에서 잔소리들을 해댔다.


잠깐 군인이 될까 생각도 했었지만 곧 포기했다. 군인이 된다고 해도 남의 명령을 들어야 하니 답답하긴 매한가질 테고 남을 부릴 수 있는 윗전으로는 제 머리를 보나 성질을 보나 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몸 쓰는 데는 자신이 넘치고 남의 말 듣는 데는 자신이 전혀 없는지라, 임꺽정이나 홍길동의 옛 얘기를 들으면서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집안 식구들 얼굴을 봐서 화적질은 못하고 도성 안에서 배추 장사나 하면서 소일하다가, 거사에 참여하면 못 배운 상놈이지만 출세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청나라 놈들과 사대당을 때려잡는다는 얘기가 그의 귀에는 더 솔깃했다. 윤경순은 피에 주려 사람 죽이기를 원하는 미친 놈은 아니었지만, 사대당 두목들을 때려잡은 데 후회는 없었다.


‘뭐, 안 죽이고 주먹으로 맞서서 패주는 거였으면 속은 더 시원했겠지.’


상것들은 잘못 없이 매 맞고 죄 없이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물론 윤경순 자신은 누구도 함부로 못 덤비는 장안의 왈짜라 수염 돋은 다음부터 천대받은 적이 없었지만.


‘수도 없이 상것들 짓밟아온 양반놈들 우두머리니까 운 나쁘면 뒈질 수도 있어.’


그는 속으로 자신의 죄를 변명해 버렸다.

총알이 콩을 볶아대는 마당에 웬 재수 없는 생각이냐, 침을 퉤 뱉어 버리고 윤경순은 황용택에게 전투가 벌어지는 숙장문 바깥 쪽으로 가보자고 했다.

황용택도 그러자면서 또 다른 개화당의 행동대원 최은동을 불렀다. 세 사람은 칼을 들고 총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윤경순은 싸울 생각이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덤벼드는 뙤놈이 있으면 모두 도륙해 버리겠다는 게 그의 다짐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십팔 년 동안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집중력으로 정변 속 위험한 임무에 몰두하고 있었다. 칼을 몸에서 떼놓지 않고 지낸 그제 밤부터 일상과 동떨어진 극적인 순간들 속에 그는 완전히 빠져 있었다.


“뙤놈 새끼들 죄다 덤비라고 해. 포를 떠 버릴 테니까!”


하지만 총탄을 칼로 벨 수는 없었다.

숙장문 밖은 총탄이 난무하는 격전장이었다. 큰소리를 치던 세 사람은 어디로 몸을 숨길지 몰라서 쩔쩔맸다.

땅바닥에 담벼락에 나무 기둥에 기와 지붕에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총탄이 날아와 꽂혔다. 백병전으로 덤벼드는 청군이 있으면 몇 놈이든 마다하지 않겠다는 기개로 전장에 나왔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총탄들만 상대해야 했다.

곳곳에서 날아드는 총탄이 주변에 박히고 쌩쌩 윤경순의 귓전을 스쳤다.


숙장문에서 진선문으로 이어지는 공터는 길다란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행랑 형태의 남쪽 방이나 기둥 뒤 아니면 숨을 곳이 없었다.

진선문 바로 뒤에서 청군과 맞서던 일본군들도 수적으로 우세한 청군의 총탄 세례에 점점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신음을 토하며 쓰러지는 일본군도, 기고 뒹굴며 도망치는 겁에 질린 일본군도 보였다.


“뭐야 이게, 용택아! 조심해라. 돌아가자!”


그런데 황용택은 답이 없었다.

자기 뒤쪽에 쓰러져 있는 황용택을 본 순간 간이 큰 윤경순도 섬뜩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한 장사의 기운이 사라진 거였다.


“아악!”


옆에 서 있던 최은동도 다리에 총상을 입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제기랄.’

도무지 여기서는 자기가 할 일이 없다고 윤경순은 생각했다.

절명한 것 같은 황용택은 내버려두고 최은동만 부축한 채 그는 숙장문을 빠져나왔다. 문 밖으로까지 몇 발의 총탄이 날아와 곳곳에서 흙먼지를 날리고 있었다.


“에라, 모르겄다.”

윤경순은 최은동을 업고 달렸다.

후원 숲으로 들어가면 청군의 총탄을 피할 수 있고, 서쪽이나 북쪽 담장을 넘을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까짓 것. 안 되면 죽는 것이고.’



총탄은 어느새 중희당과 관물헌 앞까지 날아들기 시작했다.

창경궁 관천대의 일본군 방어선도 뚫려서 일본군은 낙선재까지 후퇴해 있었다. 중희당에 날아든 총탄이 등잔을 쓰러뜨렸는지 한쪽 방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김옥균의 하인으로 개화당의 연락책 역할을 하던 이서방도 윤경순처럼 지시받을 상관을 놓치고 자기 역할을 잃고 있었다.

그는 사방의 위험 요소를 살피며 빠져나갈 길을 탐색했다. 숙장문 방향이나 낙선재 방향은 이미 전장이 됐으므로 선택에서 제외했다. 북쪽 산에서도 간간이 포성이 울려오는 것으로 보아 갈 수 있는 방향이 아니었다.

창덕궁 동쪽 관물헌 옆에 있던 이서방은 궁궐을 가로질러 원동 쪽 서편 담장을 넘기로 작정했다.


마음을 먹은 즉시 그는 전력을 다해 달렸다.

눈에 보이는 청군은 없었지만 방향을 알 수 없는 총성은 계속 귓전을 맴돌고 있었다.

선정전을 지나 보경당에 다다를 무렵 쾅! 큼직한 포성이 들렸다.

저게 설마 여기 떨어질까 생각한 탓일까, 보경당의 지붕이 포탄을 맞고 산산조각이 났다. 놀라서 머리를 감싸고 달리는 이서방의 왼쪽 허벅지에 부서진 추녀의 나뭇조각이 날아와 꽂혔다.


“으악!”


비명을 지르면서 이서방은 땅바닥을 굴렀다.

지붕이 박살난 보경당은 불길에 싸여 있었다. 아아, 찢어지는 고통을 참으면서 이서방은 나뭇조각을 뽑아냈다.

피가 흘렀지만 지혈에 쓸 마땅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뾰족한 나무 끝이 다리뼈에 이르도록 깊이 파고들진 않았다.

조심스럽게 일어서 보니 왼다리에 힘이 덜하고 쑤셔 오기는 했지만 움직일 수는 있었다.


이서방은 절뚝거리는 다리로 뛰기 시작했다. 일단 궁궐을 빠져나가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다.

나무들을 붙잡으면서 숲길을 헤치고 나가 금호문에서 후원으로 들어가는 넓은 길에 이르렀다. 금호문 쪽에서 총을 들고 오가는 청군들이 작게 보였다.

청군의 눈에 띌 수 있는 넓은 길이지만 서둘러 가로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악물고 아픈 다리를 끌고 달리는데 소주방과 생물방 사이에 똬리를 튼 누런 물건이 보였다. 열 자 길이가 넘는 밧줄이었다.


담을 넘는 데 소용이 닿을 것 같아 집어 드는데 생물방 벽에서 흙이 튀어 올랐다. 금호문에서 후원 쪽으로 진입하는 청군이 달아나는 개화당을 발견한 거였다.

이서방은 밧줄을 손에 쥔 채로 바닥을 뒹굴었다. 핑핑 총탄이 지나가면서 바람을 갈랐다.

죽음을 피하려는 열망이 이서방을 몰아붙였다. 총알이 날아온 반대편을 향해 팔다리가 자동으로 움직였다.

달아나는 개처럼 사지를 움직이다가 아름드리 나무들이 보이자 일어나 뛰었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서야 바닥을 구를 때 왼 허벅지 아래 발목이 접질린 것을 알았다.

아픈 발목을 움켜쥔 이서방에게도 다행스런 일은 있었다. 그를 쫓아오던 총격은 그쳐 있었다.

무기도 없이 달아나는 개화당을 쫓아가 쏴죽이기엔 청군들도 바쁜 모양이었다.


이서방은 심호흡을 하고 나무 옆으로 목을 빼 뒤쪽을 살펴본 후 일어섰다.

왼 허벅지에서 핏방울을 뚝뚝 떨구면서 이서방은 삐끗했던 발을 조심스레 디뎌 경추문 쪽 담장을 향해 걸었다.



신이는 유대치의 집에서 포성을 들었다.

약방 심부름꾼이 신이를 맞아서 의원 어른은 한 시간 전에 나가셨다고 기다리면 곧 돌아오실 거라고 말했다.

심부름꾼의 말대로 기다리려고 하는데 동궐 쪽에서 포성이 들렸다. 그리고 총소리가 이어졌다.

어떤 상황인지는 두 가지 소리만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어지는 좌우영 군사들의 함성 소리까지도 태평방 유대치의 집까지 울려 왔다.

궁궐 뒷산으로 올라가던 대포, 청군영을 나서던 대병력, 왜놈당 역적을 죽이자는 백성들, 신이가 목격했던 불안한 장면들이 퍼뜩 떠올랐다.

현장을 보지 않았지만 신이는 개화당이 불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재작년 이태원에서 아버지가 죽을 때처럼 우리 편이 사냥감으로 쫓기는 처참한 살육전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신이의 가슴 속에서 심장이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맥박이 신이를 가만 있지 못하게 했다.

싸움의 소리가 신이의 귀를 움켜쥐고 몸을 잡아끌고 있었다. 어찌 할 도리가 없다고 해도 달려가야 했고 눈을 부릅뜨고 싸움터를 지켜봐야 했다.

머리가 결정하기 전에 자신의 발이 전장을 향해 먼저 움직이고 있음을 깨닫고 신이는 외쳤다.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금방 돌아올 거예요!”


함성 소리가 끝날 때 신이는 유대치의 집을 나왔다. 걸음이 빠른 소년은 자신이 빠져 나왔던 궁궐을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유대치는 남산 기슭에서 동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가지붕 너머로 어렴풋이 동궐의 지붕이 보였다. 또렷이 볼 수는 없었으나 포성과 총성, 고함 소리가 들리는 것은 분명했다.

유대치의 옆에는 이마에 난 검은 사마귀가 눈에 띄는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걱정했던 대로구만. 변서방. 역시 자네가 바빠질 것 같네.”

“그러게 말입니다. 저 같은 놈은 일이 없어야 세상이 편한 건데요.”


남산골에 사는 변서방은 종각 옆에 있는 감옥 전옥서의 옥리였다.

유대치는 개화당이 환궁한 이후 위기가 닥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궁궐에서 들려오는 총성은 그 예상이 적중했음을 알려주는 소리였다.


유대치가 남산골 사는 옥리를 찾아온 것도 정변의 위기 때문이었다. 정변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분명 전옥서에 붙들려 오는 개화당이 있을 터였다.

옥리 변서방은 유대치의 약방에서 중병을 고친 이후로 유대치를 은인으로 모셔온 사람이었다.

유대치는 변서방에게 엽전 꾸러미를 건네고 같이 일하는 옥리들에게 나눠 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창덕궁 환궁 소식을 들은 어제부터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물건들을 부지런히 팔고 있었다.


“난 내려가겠네. 기별이 가면 신경 써 주게.”

“예, 선생님. 험한데 살펴 가십시오.”


남산 비탈길 정도야 내려가기에 험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날은 유대치에게도 옥리 변서방에서도 살아온 중에 제일 위험한 날이었다. 유대치는 잰 걸음으로 비탈길을 내려갔다.



창덕궁으로 다가갈수록 총성과 고함소리가 점점 커졌다. 매캐한 화약 냄새를 맡으면서 신이는 불안한 지역으로 다가갔다.

돈화문 앞은 격전장이 돼 있었고 선인문 쪽에서도 연기가 오르고 총성이 들려왔다. 청군은 궁궐 안으로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개화당이 위험에 처한 것은 분명했다. 신이는 궁궐 서쪽 원동으로 돌아가서 담장 안 형편을 살펴보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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