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나만 목소리가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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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나에겐 정령술의 재능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잠깐 그렇다면...
“그럼 나도 정령술 배울 수 있는 거야?”
“어! 이 정도면... 일단 최하급은 충분히 계약하겠는데?”
“지금 당장 가르쳐줘! 아니, 가르쳐주세요. 스승님!”
“잠깐 기다려 봐 순서라는 게 있으니까. 일단 원소량부터 재검사해 보자. 이 상태를 보니까 그것도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네.”
아아!
심장이 두근거렸다.
없던 능력의 각성이라니!
역시 난 특별한 게 맞았다.
“요령은 알지? 움직이지 마.”
“넵!”
-땅, 불, 바람, 물. 원소의 힘이여 드러나라. 엘레멘트 인스펙션!
이번에도 심장부터 시작해서 온몸으로 뭔가가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근육통과 결합해 온몸에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게 했지만.
이틀간 미친 짓으로 단련된 덕분에 참을성이 늘었는지 몸이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후우. 이제 움직여도 돼. 근데 다른 곳에서 요즘 뭐 하고 있었어?”
“왜? 어땠는데?”
“자신 있게 말한 것 치곤 마나랑 원소 친화력이 저어어언혀 늘질 않아서. 노력하고 있는 게 맞나 싶어서.”
젠장.
하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그간의 노력이 아까웠지만, 마법은 망한 거 같으니 깔끔하게 포기하는 수밖에.
그래도 나에게는 정령력이 있다고 하지 않은가?
근데 정령력...
갑자기 왜 늘어난 거지?
“일단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주변에 정령이 모여있는 사이에 계약을 시도해 보자. 우선 너에게도 정령이 보일 수 있도록 준비할 테니까. 잠시 여기서 기다려. 괜히 움직였다가 정령이 사라지면 안 되니까.”
엘리나는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하며 초소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왔을 때는 흑요석처럼 생긴 검고 유리 같은 돌이 달린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었고 손에는 똑같이 생긴 돌을 쥐고 있었다.
“그건 뭐야?”
“이건 정령석이야. 이걸 들고 있으면 계약하지 않은 자연 중의 정령이라도 그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돼. 물론 너나 나처럼 정령력이 있어야 하겠지만... 와! 근데 진짜 무슨 일 있었어? 네 주변에 정령들이 대체... 몇이나 모여있는 거야?”
엘리나가 내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내게는 마치 VR고글을 혼자 쓰고 호들갑 떠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별 감흥이 없었다.
“빨리 너도 봐봐.”
하지만 엘리나가 건네준 정령석을 손에 쥐자.
“어?”
갑자기 눈앞이 번쩍하더니 내 주변을 둘러싼 크고 작은 알갱이들이 보였다.
그것은 이내 각양각색의 색상과 다양한 모습을 가진 생명들로 변했는데...
“이게... 정령?”
사람 같이 생긴 평범한 개체나 날개가 달린 요정같이 생긴 개체도 있었고.
강아지나 고양이 같이 귀여운 동물의 얼굴을 한 개체도 있고.
인간의 얼굴과 몸으로 네발로 기어다니거나, 짐승의 몸으로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어디서 본적도 없는 괴생명체의 모습을 했거나, 동물인데 가슴에 인간과 비슷한 얼굴이 박혀 있다든가.
그야말로 한 명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정령을 처음 보게 된 감상은 신기하고 특이하면서도... 좀 괴팍한 것 같다?
“개성이 강하네. 정령들은.”
“그렇지? 다들 완전 똑같은 모습은 거부하는 거 같아.”
엘리나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일부는 비슷하거나 완전 똑같이 생긴 것 같지만, 뭔가 하나.
최소한 입고 있는 옷의 색깔이라도 달랐다.
내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는 여성형 정령들만 해도 얼굴이 완전히 똑같이 생겼지만, 몸매가 완전히 다르게 생겼다.
그런데.
눈앞에서 그 두 여성형 정령이 하는 말이 귓가에 들려왔다.
=다들 왜 모여 있는 거야?
=얘가 걘가 봐.
=걔?
=어제 있잖아, 사람 없는 돌산에 올라가서 빨가벗고 덜렁덜렁했다는.
=아! 그 덜렁덜렁? 까르르르르! 그래서 다들 모여 있던 거였어? 구경하려고?
=응!
덕분에 정령들이 주변에 모여있는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빨개벗고 돌아다닌 사실을 엘리나에게 들키다니.
“야... 근데 대체 그동안 뭘 하고 다닌 거야?”
“알면서 왜 물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고작 2시간씩밖에 안 만났는데. 니 자유시간에 뭘 하고 다니는지 내가 일일이 감시하러 다니는 줄 알아?”
“어? 모른다고?”
왜 모르지?
=야. 얘 다음에 또 언제 벗냐?
=어제 너무 늦게 와서 돌을 너무 조금밖에 못 던졌어.
=바보야. 돌 말고 나뭇가지를 던져야지, 나뭇가지 같은 게 더 따갑다고.
=그래? 다음엔 그럼 나뭇가지로 던져야지. 헤헤
정령들이 이렇게 다 말해주고 있는데?
그나저나 이 새끼들 존나 악질이네.
어쩐지 바람에 돌하고 나뭇가지 같은 게 섞여서 날아오더라니...
“스승 혹시... 안 들려?”
“뭐가?”
“정령들... 아니다. 그냥 바람 소리 같은 거?”
“바람 안 부는데?”
엘리나는 긴 귀를 쫑긋 세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바람도 안 부는데 소리가 들릴 리가 있나?
그 사이에도 정령들은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대박이었다니까? 막, 팔을 이렇게 벌리면서 덜렁덜렁하는데 크크큭!
=그렇게 자신 있을 크기도 아니던데!
=그러니까 내 말이!
“나 아직 14살이라 더 클 수 있거든?”
시발...
=크크크큭, 야. 쟤 우리 말이 들리나 본데?
=뭐? 어떻게 사람이 우리 말을 들어? 모습을 보는 것도 도구를 이용해서 간신히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크크큭.
=하긴 보이고 들렸으면 정령들이 옆에서 그렇게 웃고 있는데 빨가벗고 발광을 하고 있진 않았겠지.
=쟤 그냥 미친 변탠가 봐. 난 그저께부터 지켜봤는데, 불에다가 자기 손을 굽고 회복시키고 굽고 하면서 놀고 있더라니까?
=그럼 벗는 걸 좋아하는 속성만 있는 게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것도 좋아하는 거야?
=와! 진짜 대단한 변태다!
=까르르르!
“왜 갑자기 네 나이를 얘기하는데? 내가 언제 너 키 작다고 놀렸어? 이상한 애네...”
상황을 보아하니 엘리나에게는 정령들이 하는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날 놀리려고 연기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이건 나만 들린다는 건데.
설마.
진짜 전생자 특전?
하지만 갑자기 없던 정령력이 생긴 것은 전생자 특전이 아닌 것 같았다.
지금까지 했던 수련을 빙자한 미친 짓이 정령들의 어그로를 끌었고.
그런 모습을 더 구경하려고 주변에 정령들이 몰려들었고.
그러다 보니 정령의 힘이 주변에 넘쳐나서 그 여파로 정령력이 생긴 건 아닐까?
“왜 그렇게 멍하게 서 있어? 원래 정령과 계약을 하려면 이 정령석으로 정령계에 있는 정령을 소환해야 하는데, 지금은 자연 중에 정령들이 나타나 있잖아? 정령석 없이도 계약을 할 수 있다는 소리야. 빨리빨리 계약해.”
“계약? 어떻게 하는데?”
“그냥 아무 정령이나 몸에 손을 대고 네 이름을 말하면서 나와 계약해 줄 수 있겠냐고 물어봐. 만약 속성이 잘 맞는 존재라면 바로 계약할 수 있을 거야.”
엘리나의 말에 고개를 돌리며 정령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꺄악! 변태가 가슴 만지려고 한다!
=피해! 변태다!
=키킥! 술래잡기다!
=쟤랑 계약하는 정령은 바보래요!
모든 정령들이 내 손을 피해 도망치면서 깔깔거렸다.
이것은 마치 한다고 한 적도 없는데 술래가 돼서 반 애들이 피해 다니는 왕따 피해자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계약한 정령은 정령석 없이 눈으로 볼 수 있어. 정령계로 돌아간 정령을 다시 소환할 때마다 정령력이 들겠지만, 정령 마법을 쓰는 게 아니면 소환된 이후로는 정령력이 들지 않고. 계약한 뒤에는 계약한 정령의 정령 마법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으로 직접 들어오게 되는데, 앞으로 본능적으로 정령사의 기척을 느낄 수 있게 되고 네가 얼마나 더 계약을 할 수 있는지 같은 사실도...”
엘리나는 이참에 정령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지금 정령들이 나를 피해 다니고 있는 게 안 보이나?
남의 속도 모르고...
=어유. 하여간 엘프들은 하프여도 재수가 없어. 재미도 없고 맨날 아는 척이나 한다니까?
=맞아. 쟤들은 진짜 재미없어. 조상이 정령신한테 축복을 받아서 계약해달라고 하면 꼼짝없이 잡혀서 계약해 주는 것도 모른다니까?
=우리 정령도 권리가 있는데.
=진짜 나도 이런 말 하긴 싫지만, 정령신님도 너무 무책임하시다니까? 자기는 계약 안 한다고! 우리만 뭐 돼봐라 이거잖아?
=그래그래!
정령들은 엘프와 정령신의 계약같이 처음 듣는 말을 떠벌이며 여유롭게 내 손을 피했다.
한 놈만...
제발 한 놈만 잡혀라.
계약만 하면 개 같이 부려 먹어 주마!
남은 진지한데, 정령들은 지금 이걸 놀이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얘는 지가 엘픈지 아나?
=백날 그렇게 해봐라. 잡히나.
=정령신의 계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령력도 제대로 사용 못 하면서. 우리가 맨손에 잡히겠어?
=꺄르르르.
“아니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열받아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설명을 하던 엘리나는 깜짝 놀라며 말을 멈추었다.
“야? 왜 그래? 난 니가 모르는 걸 알려주고 있었을 뿐인데...”
귀가 감정을 대신 전달해 주는 듯이 시무룩하게 처져버렸다.
“아니, 스승한테 말한 게 아니야. 보면 알겠지만, 정령들이 계속 도망 다니고 있었거든. 한 놈도 안 잡히니까 화가 나서...”
오해를 풀려고 변명을 하는데.
=어? 우연이 아니었나?
=나만 그렇게 느낀 건가?
=아니, 나도.
=혹시 다들... 얘가 우리 말을 알아듣는 것 같다는 생각 안 들어?
=들어.
도망 다니던 정령들이 멈칫하더니.
각기 서 있는 곳에서 획하고 내 쪽을 돌아봤다.
갑작스럽게 모든 정령의 이목이 쏠렸다.
목이 돌아가는 각도가 180도가 넘는 정령들도 있었다.
조금 소름이 돋는 장면이었다.
=너. 혹시 우리 말이 들리니?
“...”
쫄기도 했고 왠지 대답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대답하라고. 이 거기도 작은 변태 새끼야!
“뭐? 이 씨! 큰다고!”
아니!
나도 모르게 긁혀서 소리를 질렀다.
=들리네...
=들린다.
=우리 말이 들리는게 맞네.
=우리 말이 들리는 인간이 있다고?
=이거 진짜예요?
=야! 이 새끼 우리말 듣는다!
=동네 정령 여러분! 우리말을 듣는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정령들의 의심은 순식간에 확신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던 정령은 물론이고 멀리 떨어져 있던 정령들까지 모두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나랑 계약하자.
=오빠 계약 처음이지? 내가 잘해줄게.
=야! 다들 꺼져! 속성 못 느껴? 땅 속성하고 물 속성만 남아!
=아, 밀지 마! 나도 계약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정령들은 서로 계약해달라고 아우성을 질렀다.
새치기 밀치기는 물론이고 서로 앞으로 가려고 머리털이나 옷가지를 붙잡고 싸우기까지 했다.
하지만 인간과 달리 정령의 신체는 자유롭게 변형되었다.
머리를 붙잡힌 정령은 갑자기 대머리가 되고 옷가지를 붙잡힌 정령은 알몸이 됐다가 다시 옷을 입었다.
그러다가 모두 내 앞의 좁은 공간에 한 명이라도 더 설려고.
손가락만 한 작은 사이즈가 돼서 주변을 둥둥 떠다녔다.
그리고 어디선가 정령들이 속속들이 내 앞으로 날아왔다.
“너 근데 왜 아까부터 계속 큰다는 말을 하는 거야? 어? 잠깐만. 너 혹시 정령들한테 뭐 했어? 갑자기 정령들이 왜 작아져서 너한테 달려들지? 뭐야? 어디서 정령들이 계속 오는 거야?”
정령들의 대화 말고 내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엘리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조금 부러워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스승. 아무래도 나...”
고개를 돌려 엘리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정령술이 체질인 듯?”
너는 사기 종족이냐?
나는 전생자다!
- 작가의말
나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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