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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흠나양 님의 서재입니다.

야인무적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공모전참가작 새글

유한세상
작품등록일 :
2024.05.08 22:07
최근연재일 :
2024.07.06 18:30
연재수 :
6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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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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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
글자수 :
376,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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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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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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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협(俠)

DUMMY

북궁백이 칠우회에 대해 아는 것은 적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역사를 가진 중소문파이며, 강소성에서 활동하던 일곱 명의 무인들이 뜻을 모아 개회(開會)했다고 들었다.

내전과 수탈로 이웃과 가족을 잡아먹는 참상을 목도하고, 최소한 곡창지대인 이곳에서만큼은 이런 일이 없게 하자는 의협심의 발로였다.

그 의협심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무뎌진 것일까?


쿵쿵.


북궁백은 오래된 대문을 두드렸다.

이내 안쪽에서 힘없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안쪽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오?”


상대가 기력이 극도로 쇠한 노인임을 알아챈 북궁백이 목소리를 높였다.


“칠우회의 제자, 마송의 유언을 들어주고자 찾아왔습니다.”

“무어라? 마송?”


조금은 어눌했던 말에 힘이 들어가더니 문이 살짝 열렸다.

그 너머에서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 핀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길게 자란 백미를 잘게 떨며 물었다.


“마송. 마송이라 했소?”

“예. 저는 막북원정군 야인대에서 마송과 함께 복역한 북궁백이라 합니다.”

“그 이름은 들어보았소. 최근 들어 제자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더군. 최근 항주에서 만락광야를 꺾은 자와 이름이 같구려.”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부끄러우나 제가 그 장본인이 맞습니다. 소화방주 서막 또한 마송과 생사고락을 함께했습니다.”

“그렇구려. 그런데...유언이라 했소?”

“송구한 말씀이오나 마송은 함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노인이 지그시 눈을 감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그가 눈을 떴다.

풍파에 정기가 마모된 흐린 눈동자에는 옅은 물기가 어려 있었다.

곽가장의 노모처럼 격한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으나, 북궁백은 왠지 잔잔한 수면에 잠긴듯한 회한이 느껴졌다.


“미안하외다. 귀한 손님을 밖에 오래 두었구려. 안으로 드시오.”

“그럼.”


북궁백은 노인이 활짝 열어준 대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 직후, 그의 눈이 가라앉았다.

칠우회의 장원은 중앙에 연무장을 중심으로 세 개의 이층 가옥이 지어진 형태였다.

가옥들은 세심하게 관리한 노력이 엿보이나, 긴 세월의 흔적을 여기저기서 풍기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는 마구간이 없으니 문 근처에 묶어두시오.”

“예.”


북궁백은 흑파를 묶어두고 노인을 따라 정면에 보이는 가옥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외관처럼 낡고 단출했다.

여러차례 보수의 흔적이 남아있는 탁자에 앉아 있으니 노인이 다기를 가져왔다.

그는 탁자 위에 주전자와 찻잔을 내려놓으며 사과했다.


“보다시피 사정이 이러해 내올 것이 없구려.”

“괜찮습니다.”


북궁백은 낡은 잔을 들어 차를 들이켰다.

향은 거의 없고 떫은맛만 가득한 최하급 차였다.

맞은 편에 앉은 노인의 민망한 모습을 보면 대접이 미흡하다 투정 부릴 것이 아니었다.


“내 소개를 안 했구려. 노부는 마송의 사숙조되는 사람이오.”


북궁백은 조금 놀랐다.

마송의 사숙조라면 칠우회를 개회한 일곱 무인 중 한 명이다.

자신보다 네 살이 더 많았던 마송을 생각하면 적어도 고희를 넘어 희수(喜壽)에 가까운 나이다.

워낙 기력이 떨어져 무림인으로서의 기도가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강소성 비주에 살았던 북궁백이 그의 별호를 듣지 못한 걸 보면 높은 경지에 오른 무인은 아닌 듯 보였다.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늙은이니 첨 노인이라 부르면 되오.”

“예, 어르신. 제가 무엇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편하게 물어보시오.”


북궁백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까 듣기로는 제자들이 있다고 하셨는데 지금 장원이 비어있는 듯합니다만···.”

“모두 논밭에 나가 있소.”

“도적이라도 나타난 겁니까?”

“아니오. 일하러 나간 거요.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 하지 않겠소?”


그건 맞는데···.

북궁백의 의아한 눈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문파나 방회에 소속된 이들은 대부분 자체적인 사업체를 보유하고 있다.

도가나 불가 계열의 구파는 기부금으로 대체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속가제자가 운영하는 표국 등에서 벌어들인 돈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온전히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무림인은 사문을 떠나온 낭인들뿐이다.

그런 이들도 표사로 일하거나 호위 또는 의뢰를 받아 자신의 무예를 팔지, 농사일이나 힘을 써야 하는 잡일은 하지 않는다.


“우리 칠우회는 지주들이나 관원들의 눈 밖에 나서 써주는 곳이 없다오.”


첨 노인의 담담한 목소리에는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자부심과 긍지가 느껴지지만, 어떠한 후회와 의혹이 낭중지추처럼 삐죽 머리를 내밀고 있다.


“그래서 말인데···.”

“말씀하십시오.”

“북궁 대협만 허락한다면 제자들과 함께 듣고 싶구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대협이란 칭호는 당치 않습니다.”


첨 노인이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아직 노부의 귀는 먹지 않았소이다. 대협의 협행(俠行)은 칭송받아야 마땅하오.”


그 말에도 북궁백은 거북함을 숨기지 못했다.


“대협이란 말은 존경받는 정파 무인에게만 붙이는 칭호가 아닙니까? 저는 존경받을 만한 일도 하지 않았고 정파도, 사파도 아닙니다.”

“노부는 그리 대단치 않은 무인이나 오래 살아오다 보니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오. 한 번 들어보시겠소?”

“고견을 들려주신다면 새겨듣겠습니다.”

“고견까진 아니외다. 그저 정파와 사파의 구분에 큰 의미를 두지 마시오.”


첨 노인은 목을 축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파와 사파는 결과에 따른 인식에 불과하외다. 의도가 이롭다 하여 결과가 항상 선한 것은 아니오. 의도가 해롭다 하여 그 결과가 항상 악한 것은 아니오. 그 선과 악은 누가 판단하겠소?”

“군중들이겠지요.”


첨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군중들의 공감을 받는다면 선이요, 군중들의 지탄을 받는다면 악이오. 안타까운 사실은 팍팍한 세상에 지친 군중들이 그 의도까지 잘 살피지 않는다는 것이오.”

“...”

“협은 다르오. 협은 결과가 아닌 의도가 중요하오. 옳은 의도로 옳은 길을 따랐는가? 그 행함에 있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가?”


첨 노인은 시종일관 차분했다.

그러나 북궁백은 그 속에 담긴 뜨거운 열기와 하늘이 무너져도 변하지 않을 신념을 느꼈다.


“칠우회는 정파가 아니외다. 정사 중간이지. 예전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소. 우리는 양민들 착복하는 탐관과 지주들에 대항해 질서를 바로잡고, 배를 곯은 이들을 위해 곡식을 베풀었는데도 말이오.”

“어째서 그렇습니까?”

“곡식이 강소성을 빠져나가는 건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 방법만 정당하게 바뀌었을 뿐이오. 지주들은 남경이나 소주로 떠나고 관리인을 두어 상인들에게 곡식을 전부 팔아치웠지.”


첨 노인의 눈이 흐릿하게 과거를 좇았다.


“꽤 오래 번민에 시달렸소이다. 의형제들끼리 다투기도 했고, 제자들이 떠나기도 했지. 그러던 중 황명이 내려왔소. 제자 한 명을 차출하라고. 쉽지 않은 결정이었소. 피로 이어지지 않았으나, 길거리에서 손수 거둬 키운 자식들이었으니까 말이오. 그런데 마송이 자원하더군.”


북궁백의 머릿속에 마송의 얼굴이 떠올랐다.

육포와 곡물가루를 내려다보며 미소짓던 후덕한 얼굴이.


“녀석이 밤중에 찾아와 말하더이다. 거둬주신 은혜, 이제야 갚을 기회가 왔다고. 칠우회의 의협심이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말이오.”


적의 대군세 앞에서 덜덜 떨면서도 결의에 찬 얼굴이.


“그 순간 우리는 깨달았소. 군중이 우리를 어떻게 여기든 우리의 의와 행은 옳았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번민할 것이 아니라 자부심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이유 모를 자부심이 가득했던 얼굴이 말이다.

첨 노인이 물었다.


“그대는 왜 중원을 떠돌고 있소?”

“전우들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함입니다.”

“그 은혜를 갚으며 했던 일들이 그대에게, 전우들에게, 하늘에게 부끄러운 짓이었소?”

“아닙니다.”

“그러니 그대는 대협이오.”


첨 노인이 푸근하게 웃었다.


“군중의 시선은 신경 쓰지 말고, 그대의 길을 가시구려.”


* * *


첨 노인과 이야기를 나눈 후 북궁백은 흑파를 끌고 염성현 밖으로 나와 첨 노인이 알려준 농지로 향했다.

작은 농지에는 몸이 시커멓게 그을린 십여 명의 장정들이 농사일에 한창이었다.

그들은 빼빼 말랐으나 눈에서 정광이 번뜩이고 단련된 무인의 몸을 지니고 있었다.


“춘일아.”

“예. 사숙.”

“평구와 추일이 데리고 박현 내외 좀 돕고 오거라.”

“알겠습니다.”


세 명의 청년들이 농기구를 들고 다른 농지로 떠난다.

천천히 흑파를 몰아 그들을 쫓아가 보니 젊은 내외를 도와 물길을 트고 있었다.

그들은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었다.

그들이 농사를 얼마나 잘 지었든 수확한 대부분은 소작료랍시고 지주에게 돌아간다.

칠우회 제자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인데도 그들을 돕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얻는 것은 그저 고맙다는 인사뿐인데도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뿌듯한 미소를 매달고 돌아갔다.


“...”


그런 그들을 지켜본 북궁백은 말머리를 돌려 염성현으로 돌아갔다.

시전거리를 돌아다니며 흑파에게 먹일 건초와 미곡 한 섬, 갖가지 채소와 고기를 사 들고 칠우회로 돌아왔다.

첨 노인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게 다 무엇이오?”

“석식은 든든하게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래도 만만치 않은 가격일 터인데···.”

“괜찮습니다. 이미 값을 치렀으니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북궁백은 그리 말하며 식자재들을 주방에 옮겨놓았다.

잠시 후, 석양이 드리워지기 시작하자 칠우회 제자들이 농기구를 어깨 위에 걸치고 돌아왔다.

그들은 북궁백을 보고 경계심을 품었지만, 첨 노인의 소개에 경계심을 누그러트렸다.

이어서 주방에 쌓인 식자재를 보고는 그를 은인처럼 떠받들었다.


“식사를 준비하거라.”

“예.”


그들은 북궁백이 사 온 식자재의 반을 사용해 엄청난 양의 잡곡밥과 고깃국을 만들어 냈다.

그 후 이어진 행동은 북궁백을 놀라게 했다.

칠우회 정문 앞에 모여든 굶주린 아이들을 들여 그것을 나눠주었다.

나머지 반 역시 잘게 나누어 주변 인가에 전달했다.

한 제자는 북궁백에게 잡곡밥과 고깃국, 약간의 채소요리를 담은 밥상을 건네주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귀한 손님께 대접이 미흡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괜찮으니 심려치 마시오.”


북궁백은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활짝 웃는 저들의 모습을 보니 더없이 든든한 기분이었다.

북궁백은 누가 빼앗을세라 허겁지겁 밥을 먹는 아이들을 보며 속으로 물었다.


‘송. 이만하면 된 거지?’


그때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입가에 밥풀이 묻은 그 아이는 살짝 놀란 듯싶더니, 이내 듬성듬성 빠진 이빨을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북궁백은 순간적으로 멍하니 그 미소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선가, 그 미소는 육포와 곡물가루를 내려다보던 마송의 해맑은 미소와 닮아 있었기에.

이내, 정신을 차린 북궁백이 미소로 화답했다.


석식을 마치고 아이들이 돌아갔다.

뒷정리를 마친 칠우회의 모든 식솔이 북궁백 앞에 모여들었다.

첨 노인이 대표로 물었다.


“이제 마송의 유언을 알려주겠소?”


북궁백은 그들을 보며 말했다.


“마송의 유언은 조금 전, 그 광경을 대신 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자랑스럽게 여긴 칠우회의 의협심을.

칠우회의 식솔들은 말없이 눈을 부릅떴다.

잘게 떨리는 그들의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이윽고,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참았던 슬픔을 토해냈다.

돌아온다고 약속하지 않았냐며 화를 내기도 하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흐느끼기도 했으며, 조용히 눈을 감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들은 그렇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송을 기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북궁백은 처음 품었던 의문을 떨쳐냈다.

이들의 의협심은 무뎌지지 않았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미약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는 미봉책에 불과할지라도 찬사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이들의 의협심이 오래 이어질 수 있게 도울 방법이 존재했다.


* * *


다음 날 아침, 칠우회를 떠난 북궁백은 전날에 보았던 창천표국 염성지부를 찾아갔다.

간단한 신원확인 후 지부장과 대면한 자리에서 북궁백은 전낭을 꺼내며 말했다.


“이 주변 땅을 사주시오.”

“땅이요?”

“칠우회의 이름으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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