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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흠나양 님의 서재입니다.

야인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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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세상
작품등록일 :
2024.05.08 22:07
최근연재일 :
2024.06.26 18:30
연재수 :
5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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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7,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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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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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보타암-2

DUMMY

북궁백은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 사찰 옆으로 암자가 모여 있는 산 중턱에 도착했다.

암자로 들어가는 문이나 현판조차 없는 이곳이 바로 보타암이다.

행자인 보타암의 제자들은 이곳에서 숙식하며 날이 밝으면 보타산 곳곳에 있는 사찰로 흩어져 승려들의 일손을 돕거나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사찰을 보호하고 해가 진 후에 돌아온다.

해가 지기 직전인 지금, 보타암은 한산해야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얼마 전, 해적의 대규모 침략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장문 사백. 혜련 사매의 손님을 데려왔습니다.”


북궁백을 안내한 지안이 공터 앞에 홀로 나와 있는 노파에게 합장했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파는 굉장히 연세가 많아 보였다.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그래서 그런지 무언가 허허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초탈한 사람처럼 보였다.

노파가 딸을 맞이하는 늙은 어머니처럼 푸근한 얼굴로 마주 합장하며 말했다.


“수고했다. 이 시주는 내가 안내할 터이니 너는 다른 아이들을 도와주거라.”

“예.”


지안은 북궁백을 곁눈질하며 자리를 떠났다.

북궁백은 노파에게 포권을 취했다.


“복건성에서 온 북궁백입니다.”

“아미타불. 보타암의 장문 직을 맡고 있는 송서월이라 합니다. 주변에선 송 파파라고 부르지요.”


통성명을 마친 송 파파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에 가련함을 담아 북궁백의 눈을 바라보았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머나먼 타지에서 피가 흐르는 가시밭길을 걸어왔다고요.”

“지나간 일입니다.”

“성관음께서 시주를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북궁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성관음을 모시는 불자가 악의 없이 건넨 말이었으나 그에겐 거슬리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자신이 살아남은 건 성관음의 자비가 아니라 전우들이 넘겨준 진원진기 덕분이다.

북궁백은 절대로 그 사실을 잊지 못한다.

불요성승의 은혜로 딸의 절맥을 치료하였으나 그것과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철저히 구분해왔다.

그렇기에 여생을 전 중원을 떠돌며 전우들의 유언과 유품을 전하는데 보내려 하는 것이다.


“내가 괜한 말을 했나 봅니다.”

“...사담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이제 정혜련 행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북궁백이 말을 돌리자 송 파파는 불호를 외우며 몸을 돌렸다.


“성관음께서 시주를 이곳으로 이끄셨으니 이 또한 운명이겠지요. 혜련이는 저곳에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세요.”


송 파파가 데려간 곳은 보타암에서 외진 곳에 있는 작은 암자였다.

송 파파는 문 앞에 서서 외쳤다.


“혜련아. 들어가도 되겠느냐?”


대답 대신 문이 열리고 면사를 쓴 여자가 비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드러난 건 눈매가 전부였으나 그것만으로도 여자의 미색이 대단하단 걸 알 수 있었다.

송 파파는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혜련이 이것아. 몸도 안 좋은데 뭣 하러 나오는 것이냐?”

“쿨럭.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당연히 나와야지요.”


기침을 토해낸 정혜련은 잔뜩 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북궁백을 바라보았다.


“시주께서 수랑의 유품을 들고 왔다는 말이 진정 사실입니까?”

“그렇소.”

“제게...보여주시겠어요?”

“그 전에 그대가 내가 찾는 정혜련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겠소?”


정혜련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송 파파는 그런 제자를 가여운 눈으로 바라보며 등을 쓰다듬었다.

이내 정혜련이 눈을 떴다.

그녀의 눈은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지요.”


방은 굉장히 좁았다.

북궁백 같은 이가 두 명이 들어가 누우면 꽉 찰 정도로.

그렇기에 내부는 굉장히 단출했다.

침상은 물론 책상도 없었고, 나무 불상이 올려져 있는 불단이 전부였다.

송 파파는 정혜련을 펴놓은 침구 위에 앉히고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차를 가져올 테니 북궁 시주와 이야기를 하고 있거라.”

“스승님. 제가···.”

“몸도 성치 않으니 잔말 말고 따르거라.”


그렇게 말하며 송 파파가 방을 나섰다.

두 사람만 남은 방 안에 적막이 흘렀다.

정혜련은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꺼내려 했지만, 도통 마음처럼 되지 않는지 입을 다물기를 반복했다.

북궁백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대강은 알고 있기에 과거를 꺼내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와 수랑은 어렸을 때부터 붙어 지냈어요. 저는 장주의 딸이고 전랑은 왜구의 약탈을 당한 마을에서 주워온 시동이었죠.”


시작은 분명 그랬다.

남녀가 함께 자라다 보면 자신들도 알 수 없는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한수가 무공을 익히고 헌앙한 미남으로 자라나고 정혜련의 외모가 물이 오르면서 달라졌다.

신분과 친구를 넘어서 서로에게 연정을 품었다.


“문제가 있었죠. 저에겐 아버님이 정해둔 혼처가 있었어요. 우리는 선택을 해야 했죠. 이대로 헤어질 것인지, 혹은 몰래 해간원을 떠나 함께 살아갈 것인지···. 그때 황실에서 황명이 내려왔어요.”


당시 어렸던 두 사람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정혜련과 이야기를 나눈 한수는 해간원 장주를 찾아가 원정군 차출에 자원했다고 한다.

자신이 돌아오면 정혜련과의 혼인을 허락해달라고.

정혜련도 둘의 연정을 밝히며 아버지를 설득했다고 한다.


“아버님은 승낙했어요. 수랑을 아꼈거든요. 술김에 딸이 하나만 더 있었으면 이어주었을 거라고 말하기도 할 정도로.”


그렇게 한수가 막북으로 떠났고, 혼약은 파기되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평해위 지휘첨사가 저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죠. 혼약을 맺은 가문이 관에 연줄이 있어서 억누르고 있었는데 파혼하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진 거예요.”


그 이후로는 지옥의 시작이었다.

왜구와 결탁했다는 모함을 당해 가문이 멸문하고, 모녀가 나체로 인시 경매장에 서는 치욕을 당했다.

지휘첨사에게 팔린 후에는 어머님의 목숨 때문에 거의 매일 그의 침실로 끌려가야 했다.

그건 다른 모습의 지옥이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해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그 즉시 벌을 내렸다.

그렇게 일 년을 보냈다.


“왜구와 결탁한 사실이 드러나 지휘첨사를 참형에 처했어도 우리는 여전히 노예였어요. 반드시 주인이 있어야 하는.”


정혜련과 그녀의 어머니는 배에 태워졌다.

얼핏 듣기로는 항주의 기방으로 간다고 했다.

그러던 중 해적을 만나 그들에게 사로잡혔다.


“정말 힘들었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자결을 고민할 정도로.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더욱 그랬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어요. 수랑이 언젠가 돌아온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게 버티다가 보타암의 제자들에게 구출되었다.

송 파파의 제자로 들어갔고, 지금까지 한수를 기다리며 살아왔다.


“이제 됐나요?”


이야기를 마친 정혜련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처럼.

허나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텅 비어버린 그녀의 눈에서 음울한 감정이 둑이 터진 것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북궁백은 그녀가 자신이 찾는 정혜련이 맞다고 생각했다.

구 할 정도는.

나머지 십 할을 채워야 했다.


“한수에 대해 말해보시오.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어떤 말투와 습관을 지녔는지.”


정혜련이 대답했고, 그 대답은 북궁백의 기억과 대부분 일치했다.

확신이 생겼다.

북궁백은 품에 손을 넣어 한수의 유품을 꺼냈다.

금이 가고 빛이 바랬지만 순수한 연정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옥가락지를.


“한수가 그대에게 전해달라던 유품이오.”


정혜련이 멍하니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이 옥가락지와 가까워질수록 떨림이 생겨났다.

덜덜 떨리는 손이 옥가락지를 집었을 때, 그녀의 눈에서 소리 없이 굵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이윽고, 두 손으로 옥가락지를 소중히 감싸 가슴에 품었다.

하염없이 흐른 눈물이 면사를 적셔 그녀의 입을 막아 울음소리를 감췄다.

내상을 입은 몸에 심적으로 큰 충격이 가해져서였을까?

그녀는 웩하는 소리와 함께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러자 문이 벌컥 열리며 끝까지 자리를 피해주었던 송 파파가 들어와 정혜련을 살폈다.


“지금 바로 치료를 해야 합니다. 지안이에게 방과 식사를 마련하라 일러두었으니 시주께선 이만 여독을 푸시지요.”

“알겠습니다.”


북궁백이 암자에서 나오자 지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식사와 침구가 준비된 한 암자로 들어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세요. 식사는 남기지 마시고 그릇은 밖에 내놓으시고, 밤에는 돌아다니지 마세요.”


간단한 주의사항을 알려준 지안이 암자를 나가려는 그때, 북궁백이 물었다.


“배는 언제 내어줄 수 있소?”


북궁백은 보타암으로 올라오기 전, 해적들의 처분을 지안에게 넘겼다.

지안은 그 대가로 배를 내어준다 했으니 그 배를 받은 대로 보타암을 떠날 생각이었다.

이곳에 온 목적은 이루었고 오래 머무를 이유도 없었다.

정혜련이 가련하긴 하지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전무하다.

홀로 인내하든, 불심에 의지하든, 세월에 흘려보내든 혹은 자결하든···.

오롯이 그녀가 결정할 몫이다.


“내일 오전 내로 준비해드리죠.”


벌컥.

지안이 암자를 나갔다.

북궁백은 밥을 먹고 몸을 뉘였다.

그대로 잠을 청하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한수, 정혜련에 대한 생각과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쳐 도저히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막북에서 전우를 잃을 때면 가끔 이렇게 되곤 했다.

처음에는 상념의 꼬리를 잘라내지 못하고 밤을 지새웠으나, 나중에는 방도를 찾았다.


“...”


방에서 나온 북궁백은 언월도를 들고 십팔반무예 월도법의 투로를 펼쳤다.

해가 진 시각에도 암자와 암자를 오가며 부상자들을 보살피는 보타암 제자들의 황당한 눈빛을 느꼈으나 괘념치 않았다.

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몇 번이고 펼칠 뿐이다.

그러면 하나의 해답이 남는다.


* * *


다음 날 아침, 북궁백은 정혜련의 암자를 찾았다.


“작별을 고하러 왔군요.”

“예.”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인 송 파파가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정혜련이 있었다.

면사를 걷어낸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북궁백은 멈칫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곧바로 몸을 움직인 북궁백은 정혜련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삶의 의지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공허한 눈.

북궁백은 그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사시오.”


정혜련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대가 받은 옥가락지에는 한수의 마음뿐만 아니라 내 전우들의 생명이 담겨 있소. 그들은 당신이 이것을 받기를, 그리고 살아가길 원했소. 그러니 살아가시오.”

“...”


정혜련의 눈에 약간의 빛이 돌아왔다.

대답도, 반응도 없으니 그녀의 생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떠나야만 하는 북궁백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스윽.


북궁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암자를 나와 걸어가는데 뒤에서 송 파파 외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았다.

방문 앞에 정혜련이 원통한 얼굴로 서 있었다.


“살라고요?”


원망에 가까운 말을 내뱉으며 말릴 틈도 없이 승복을 풀어헤쳤다.

활짝 열린 승복 사이로 풍만한 나신이 드러났다.

그녀의 얼굴처럼 처참한 흉터로 가득한.


“이 몸으로 지금껏 살아왔던 건 수랑과 재회할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어요. 그 희망조차 날 떠났는데도 살라고요?”

“...사시오.”

“그런데 어쩌죠? 곧 해적과 왜구들이 몰려올 거고 보타암은 그들을 막아낼 전력이 부족하거든요. 제가 당신의 말을 따라 살고자 해도 살 수 없게 됐어요.”

“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오.”

“승려들에게 불상과 절을 버리고 피하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요? 저 혼자 이곳을 떠나면 그 죄책감으로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나요?”


북궁백은 입을 다물었다.

정혜련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보타암을 도와주세요. 내가 살아갈 수 있게.”


이어서 묵직한 한마디를 던졌다.


“누군가는 그들을 기억하고 망축 해야 하지 않겠어요?”


북궁백의 눈에 파문이 일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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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노예의 행방-2 +1 24.06.12 912 18 13쪽
36 노예의 행방-1 +1 24.06.11 918 19 13쪽
35 정파와 사파, 그것이 이유요-3 +2 24.06.10 943 21 13쪽
34 정파와 사파, 그것이 이유요-2 +2 24.06.09 937 20 14쪽
33 정파와 사파, 그것이 이유요-1 +2 24.06.08 963 21 13쪽
32 남창살인사건 -2 +2 24.06.07 964 20 13쪽
31 남창살인사건 -1 +2 24.06.06 971 22 13쪽
30 이별과 만남-5 +2 24.06.05 993 23 14쪽
29 이별과 만남-4 +2 24.06.04 1,008 25 13쪽
28 이별과 만남-3 +2 24.06.03 1,047 26 16쪽
27 이별과 만남-2 +2 24.06.02 1,063 24 14쪽
26 이별과 만남-1 +2 24.06.01 1,111 26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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