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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고 구르면 어느새 옷자락이 걸려있습니다.

뱀, 선악과 그리고 이브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완결

구름말이
작품등록일 :
2012.12.01 21:03
최근연재일 :
2016.10.24 02:57
연재수 :
12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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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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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8
글자수 :
81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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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2.17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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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6. 또 하나의 정체전선(4)

DUMMY

- 덜커덕, 투칵!

“하아, 정말 대단하다. 집념만큼은 인정해주마.”

육감을 써먹을 녀석이 또 있었군. 어이, 스토커 양반, 이번엔 뭘 떨어뜨리셨나? 아마 우산하고 스마트폰일 거라 생각되는데 말이야. 우산은 그렇다 쳐도 휴대폰은 또 왜 괴롭히는데? 비도 많이 쏟아지는데 오늘은 그냥 집에 돌아가도 좋지 않을까? ‘반지와 아이스크림’사건만으로도 내 띨띨함은 어느 정도 증명되지 않았나 싶어.

저 녀석이 도대체 나한테서 어떤 정보를 얻고 싶은 건지 불가사의다.

그제 후덕챔피언에게서 들은 협박전화에 대한 이야기, 어제 오지랖챔피언에게서 들은 수상한 외지인에 대한 이야기. 그 둘을 종합하면 지금 나를 미행하는 녀석에 대해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결국 용배아저씨 등골 빼먹으려 작정한 그 불량배 놈들이 원인이겠지.

용배아저씨네 정육점 앞에서 놈들이 행패를 부린 게 벌써 보름을 훌쩍 넘었나. 터미널에서 막 잠에서 깼는데 이상한 소문이 들려 비몽사몽으로 찾아간 게 첫 만남이었지. 유리로 된 미닫이문이 잠겨있자 요란스럽게 두드려대던 불량배들의 인상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그 집 사모님과 따님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자 저들끼리 낄낄거리는데, 그걸 보고 있으니 기분이 잡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요, 오늘은 장사를 안 하는 모양인데 그만두시죠.’

동네사람들은 용배아저씨가 볼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지만 시커먼 남정네들이 대여섯씩이나 모여 하는 짓거리를 그냥 두고 볼 내가 아니었다. 감히 노숙하는 성인군자 앞에서 미풍양속에 먹칠을 하다니, 처음에는 그런 생각으로 놈들에게 다가갔더랬다.

‘이 새끼는 또 뭐여? 참견하지 말고 꺼져, 썅.’

참 도발적인 어휘를 구사하는 분이었지. 자신이 사용하는 말에 참뜻을 담을 줄 아는 사람은 몇 없는데 콧잔등에 반창고를 붙인 형씨는 확실히 그 표현력이 놀라웠다. 나보다 서너 살 정도 위였을까, 자칫 그 반창고로는 수습하기 힘들 녀석으로다가 얼굴에 하나 더 박아주려다 겨우 참았던 것이다.

‘지금 많이 흥분하신 것처럼 보이는데 일단 조금 진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용배아저씨를 만나시려는 거면 동네사람들 눈도 있으니 조용히 기다리시는 편이…….’

‘그랑께 참견하지 말라고, 썅노무 새끼야! 지금 우리가 시퍼 보이야? 고릴라같이 등치만 큰 새끼가 뭘 믿고 껄떡대고 지랄이여?’

난 정말 조용히 돌려보내고 싶었다고? 그래서 잘 쓰지도 않는 공손한 어투로 살살 달랬단 말이야. 안 그래도 이 동네에서 무식한 이미지가 팽배한데 불량배들하고 시비라도 붙어봐, 건달도 아닌 아예 생양아치로 낙인찍힐 위험이 있다고.

‘…지금 말 다했습니까?’

하지만 영장류 중 하나를 언급한 것은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결국 말싸움이 붙어버렸다. 원래 나도 그다지 참을성이 없는 녀석인데 어차피 예견된 그림이었다. 아마 전라도에서 들을 수 있는 모든 비속어를 배울 계기가 되었지? 주먹만 날아들지 않을 뿐이지 그 불량배들의 기세는 정말 험악했다. 놈들이 악을 쓰며 동시에 달려들었다면 난 분명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을 거다. 뭐, 그런 상황이 된다면 그거대로 약을 바짝 올려줄 자신이 있지만 말이다.

나도 나지만 그놈들도 상당히 열을 받았던 것 같다. 내가 또 여차하면 입이 알아서 잘 나불대잖아. 다소 거친 어투를 빌어 상대방의 정체성을 유전자단위로 폄하하는 행위는 높은 효과로 놈들의 얼굴을 시뻘겋게 달굴 수 있었다(단언하건데 김인목욕탕에 있는 옥돌사우나의 그것을 상회했다). 여섯 명과 한 명의 싸움이었지만 어느 정도 팽팽했던 걸 보면 그 불량배들이 얼마나 한심한 놈들이었는지 알만하다.

그러다가 아마도 놈들의 인내심이 먼저 바닥났나보다. 여섯 명 중에 키가 가장 나와 비슷했던 놈이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는 것이었다. 물론 그걸 가만히 맞아주지는 않았다. 주먹을 피해 뒤로 물러나다 일부러 의자에 걸려 넘어지는 척 뒤로 쓰러지면서 그놈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차 버렸다. ‘퍽!’하는 소리가 나는데 참 많이 아팠겠지. 운동화의 앞굽에 제대로 얻어맞은 그 녀석은 한동안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야, 이 새끼야! 디지고 잡냐!’

‘왜 그러세요? 쌤통이긴 하지만 고의가 아니었다고요.’

물론 실실 웃으면서 그런 소릴 했기에 신빙성이 떨어졌다. 곧이어 코에 반창고를 붙인 그놈이 덤벼들기에 휴대폰을 일부러 떨어뜨려 줍는 척 허리를 숙여 주먹을 피했다. 일어나며 벌어진 가랑이 사이를 휴대폰으로 찍어버리니 무척 인상적인 괴성이 터져 나왔더랬다. 남자만이 알 수 있는 고통에 휩싸인 모습이 조금은 안쓰럽기까지 했지.

‘아아, 정말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쪽과 닮은 막돼먹은 후손이 태어나지 않을 테니 값진 희생이네요.’

아마 이때 용배아저씨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나는 나머지 놈들도 차례차례 때려눕혔을 것이다. 그다지 폭력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망설임 없이 손을 썼을 정도로 그때는 기분이 정말 엿 같았다. 어쩌면 후덕챔피언은 내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는 걸 눈치 챘는지도 모르지. 나와 불량배놈들을 필사적으로 뜯어말린 그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정답이었다. 곧 경찰이 왔으니까 말이다.

으으, 그때 잘못 주먹을 휘둘렀으면 정말 큰일 났을 거야. 언젠가 한 번 찍힌 이후로 난 경찰아저씨들이 무섭다고.

놈들은 그렇게 물러갔지만 두어 번 정도 더 정육점 앞에 얼씬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나타나면 슬그머니 사리지는 것이었다. 어쩌면 불량배 나름의 육감으로 노숙하는 성인군자의 위험성을 감지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도 결과적으론 옳았다고 할 수 있었다.

난 아예 경찰에 잡혀가는 시나리오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거든.

그 후에 용배아저씨를 붙잡고 꼬치꼬치 캐물어서야 겨우 전말에 대해 알 수 있었다(이때부터 용배아저씨는 나를 오지랖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후덕챔피언은 쑥스럽게 코밑을 문지르며 예전에 자신이 ‘멧골파’라는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지금의 사모님을 만나 개과천선하긴 했는데 자신이 나간 후 조직이 허물어졌다고 한다. 그 때문에 떠돌던 몇몇이 정육점을 하고 있는 용배아저씨에게 들러붙는다나 뭐라나.

‘그냥 싸그리 감방에 처넣어요!’

‘옛날에 내 밑에 있던 동생들이라 차마 그건 못하겠다.’

어째서 놈들이 용배아저씨에게 들러붙는지는 물을 필요도 없이 자명했다. 후덕챔피언은 쓸데없이 사람이 좋았다. 이번 일로 놀란 부인과 딸에게 미안하지만 그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이 안쓰럽단다.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러는 중에 갑자기 방해하던 노숙자를 처리했느니 하는 말을 들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용배아저씨도 참 딱한 사람이었다.

“‘처리했다’라…….”

처음 협박전화에 대해 들었을 때는 그 불량배놈들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아예 보내버렸다던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혹시 놈들이 사실을 말했다고 한다면 그건 확실히 일이 복잡하게 된다. 어쩌면 그 불량배들은 무고한 사람을 나로 착각하고 건드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내게 커다란 책임이 생기게 될 것이다. 이 무거운 어깨에 또다시 ‘죄’를 짊어지게 된다. 하아, 빌어먹을. 확실히 진상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거기 스토커양반, 어서 미행을 관두고 집에 돌아가지 않으면 가장 먼저 내 조사대상이 될 거란 말이야. 아마 유쾌한 경험은 아닐 거라고 장담하지.

어쨌든 오늘 할 일은 먼저 마쳐야 했다. 우체국에 먼저 들러 털뚱보 남자의 편지를 부친 후 곧장 두안빌라로 향했다. 이지학생의 말로는 토요일도 학교에 나가 늦게까지 공부를 한다고 했으니 지금쯤 려은이 혼자만 집을 보고 있을 터였다. 내가 두안빌라에 들어서자 스토커 녀석은 차마 따라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거렸다. 물론 저런 녀석이 흠뻑 젖어 감기에 걸리건 말건 내 상관할 바가 아니기에 무시하고 403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문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역시 려은이었다. 물방울이 맺히듯 총총한 음색은 오늘 겪은 정신적인 고통을 묘하게 완화시켜주는 느낌이었다. 나 역시 녀석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경쾌한 목소리를 냈다.

“나야, 스네이크 요원.”

역시 몇 초간의 짧은 침묵.

“미행은요?”

“기관의 녀석들은 따돌렸다.”

- 띠리릭, 철컥!

“들어오세요.”

“…점점 그냥은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 같구나.”

녀석이 하는 말이 묘하게 상황과 일치해서 순간 반응하지 못할 뻔했다. 밑에서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스토커 녀석이 들었다면 아마 심장마비에 걸렸을지도 모르지. 다른 건 몰라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녀석의 기막힌 거리감만큼은 인정해주련다.

“재킷이 조금 젖었네요?”

“아, 이거? 뭐, 조금 비 맞을 일이 있었어.”

“왜요, 길바닥에서 네발로 기어 다니기라도 했어요?”

“그게 핵심이긴 했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리자 려은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방정맞게 골룸 놀이를 하다 재킷이 젖었다고 얘기하기는 조금 껄끄러웠다. 아마 녀석은 하일좀도 모자라 골룸의 등에도 업히고 싶어 할지 모른다.

건조대에 올려두겠다는 말에 겉옷을 벗어 녀석에게 건네니 베란다까지 쪼르르 달려간다. 꽤 방음이 잘 되는 곳이야, 쏟아지는 폭우가 무색하게 집안은 고요했다.

“일단 내 방으로 들어가요.”

“에에, 그러지 뭐.”

으으, 려은이 방은 별로 내 취향이 아닌데……. 녀석이 손을 잡아끌고 앞장을 서니 어쩔 수 없이 삐걱거리며 뒤를 따랐다. 다시 찾은 방은 역시나 분홍빛이 감도는 벽지가 인상적인(동시에 상당히 거북한) 곳이었다. 낮잠 중에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닌 모양인지 침대 위에는 이불이 평평하게 정리되어있었다. 방금까지 컴퓨터를 하고 있었나,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의 화면에 하얗게 불이 들어와 있다.

“한 시쯤에는 온다더니, 조금 늦었네요?”

정말 컴퓨터를 하고 있었나보네. 의자가 밖으로 당겨져 나와 있었다. 그 위에 거꾸로 앉은 려은이는 책이 빼곡히 들어찬 책장을 구경하는 내게 책망어린 시선을 보냈다. 내일 찾아오겠노라고 어제 헤어질 때 얘기하긴 했지만 설마 낮잠마저 거르고 기다린 건가.

“아, 미안.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처리하고 오느라 늦어버렸네. 혹시 많이 기다렸어?”

“별로요. 사십 분 정도야 기다리는 축에도 못 끼죠. 옛날엔 남편 기다리다 돌로 변한 부인도 있었잖아요.”

“많이 기다렸구나.”

…하필 망부석과 비교를 하다니, 그렇게 거창한 기다림이었냐. 내가 돛단배 타고 바다라도 건너간 거냐.

“어? 다리에 감각이 없어요! 석화가 진행되는 것 같은데요!”

“쥐났겠지! 자세를 바르게 하는 걸 권하고 싶다.”

기다리느라 짜증났다고 솔직히 얘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빙글빙글 돌리는 네 말을 따라가다 내 머리에도 쥐가 나겠다고. 오늘 실컷 정신적으로 수난을 당했다만 그건 무척 색다른 고통으로 느껴진단 말이야.

“자! 그래서 오늘은 무얼 사왔죠?”

으악, 게다가 전환마저 너무 빨라. 난데없이 잔뜩 기대어린 표정으로 손을 내밀고 있다고. 결국 날 기다린 게 아니라 선물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냐! 내가 지금까지 네 버릇을 잘못 들인 거냐!

“왜 이래. 내가 봉으로 보이기 시작했니?”

“이런, 아무 것도 없어요?”

“뭘 그렇게 기대했다는 눈으로 봐? 미안하지만 오늘은 빈손이다.”

“우웅, 그건 좀 아쉽네요…….”

금방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던 녀석은 곧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게 또 안쓰러워 지금이라도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사다 줄까하다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도시에서 살던 때처럼 신용카드라도 들고 다녔으면 모를까, 지금은 현금카드에서 찔끔찔끔 나가는 돈에도 벌벌 떨어야 할 처지이지 않은가. 내가 노숙자라는 탈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선물에 눈 먼 사람 같은 소리는 하지 말라고. 네 나이 때의 귀여움을 손상시키는 행위란 말이야.”

“누가 선물에 눈이 멀었다고 그래요? 단지 오빠가 손님으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예의범절을 저버리지 않을까 걱정했을 뿐인데요.”

“명백히 네 걱정으로 보였다고! 자산증식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잖아!”

“인생은 부르마블이에요. 결국 돈 넣고 돈 먹기라고요.”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지 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네가 그런 말을 몰랐으면 좋겠어! 넌 초등학생이라고! 삶에 찌들어 부자들 욕으로 위안을 삼는 아저씨가 아니라고! 노력하면 반드시 꿈은 이루어진다는 순진한 믿음이 아직 필요한 나이란 말이야!

“어쨌든 오늘 빈손이라는 얘기죠?”

“…그렇지.”

“괜찮아요. 방금 얘기는 농담이었어요.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선물을 사오면 오히려 부담스러워요.”

“으음, 그건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로 들려.”

“그렇죠? 자! 그럼 이제 얼굴도 봤으니까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요.”

“내가 잘못했어!”

오늘따라 농담이 살벌하다. 뭔가 마음속에 불만이라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불만이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기 어려울 뿐이랄까, 이번엔 내가 말을 좀 돌려야겠다.

“응? 글이네? 뭐 적고 있었어?”

“아, 아니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별 생각 없이 방을 둘러보다가 노트북을 바라본 참이었다. 화면이 많이 하얗다 싶더니 한글문서에 뭔가 줄줄이 적혀있었다. 호기심에 내가 책상으로 다가가자 려은이가 과도한 반응을 보이며 노트북을 급하게 닫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녀석 답지 않게 숨기는 티가 팍팍 난다. 이런 모습으로 컴퓨터의 모니터를 가리는 녀석을 보면 꼭 안 좋은 버릇이 나오고 말았다.

“뭔데 그래? 나는 보면 안 되는 거야?”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요.”

“아무 것도 아닌데 그렇게 숨겨? 혼자만 재밌는 거 보지 말고 같이 좀 보자.”

내 안 좋은 버릇이라 함은 그랬다. 숨어서 뭔가 글 같은 걸 적고 있는 녀석이 있으면 기어코 그것을 뺏어서 읽는 것이었다. 그다지 글 솜씨가 없는 탓에 직접 쓰지는 않지만 남들이 몰래 쓰고 있으면 그게 그렇게도 읽고 싶었다. 유달리 독서를 좋아해서? 그건 당연히 아니었다. 그냥 글을 읽고 있으면 왠지 쓰는 사람의 평소 숨기는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유난히 소설에 집착하던 그 녀석에게 질기게 달라붙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지.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고, 공감하고 싶다. 이한이는 내게 그런 친구였다. 녀석은 보여 달라며 떼를 쓰는 내게 냉소하면서도 곧잘 자신의 소설을 읽도록 허락해주었다. ‘실은 보여주고 싶으면서 내숭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한이의 글을 질리도록 읽었다(내 어처구니없는 말투의 유래라면 유래였다).

어쩌면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넌 결코 날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게 순순히 자신의 소설을 건넸던 것일까.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아직도 녀석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기에 오해할 수밖에 없다. 녀석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생각은 멀어지는 것 같았다. 이한이는 그걸 노렸을지도 몰랐다.

“어! 바퀴벌레다!”

“예? 어, 어디에요!”

푸흐흐, 걸려들었어. 아무리 초등학생답지 않은 녀석이라도 여자아이는 여자아이, 바퀴벌레가 나타났다는 거짓말에 깜짝 놀라 내가 손가락을 가리키는 곳에 고개를 돌린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칠 내가 아니지. 려은이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재빨리 노트북을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따옴표들, 소설임이 틀림없었다.

“어어, 무슨 짓이에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잖아요!”

헹, 내가 그 말을 믿을 줄 알고? 아무것도 아니면 그렇게 필사적으로 달려들면 안 되지. 어디 좀비소녀의 탄생에 일조한 그 창의력을 한 번 견식해 볼까? 려은이가 쓰는 소설이라니, 엄청 기대가 됐다.



“하일좀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하품 나올 정도로 일처리가 늦어 세상을 좀먹는 녀석을 말하지.”

“ㅋㅋㅋㅋㅋㅋㅋ”



낚였다.



작가의말

으아아!


결국 연재가 비축분을 따라잡고 말았어요!


능률에 대해선 할 말이 없지만 어쨌든 그럭저럭 퇴고를 하며 올렸는데....


다음 연재엔 초고가 바로 올라오지 않을까 싶어요. 만약 오타 같은 지적사항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살짝 불안하네요. 안 그래도 이번 챕터가 조금 삐걱거리는 감이 있는데 말이죠.


그래도 열심히 쓰렵니다. 저는 행복한 착각에 빠져 사는 글쟁이니까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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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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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3.02.17 14:49
    No. 1

    개인적으론 이번 편이 전편들보다 더 좋은데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구름말이
    작성일
    13.02.18 01:04
    No. 2

    우왓, 그렇게 생각해주시다니 왠지 기쁩니다. 주인공의 독백에 자꾸 예전 버릇처럼 냉소적인 문체가 튀어나오려고 해서 조금 고민을 했거든요. 일화환님의 댓글에 일단 안심을 해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2 비밀리이드
    작성일
    13.02.17 19:22
    No. 3

    저 스토커도 징하다, 징해.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구름말이
    작성일
    13.02.18 01:09
    No. 4

    감각이 둔하면 끈기라도 있어야겠죠. 원래 바보같이 성실한 사람은 미워하기 힘든 법이잖아요. 물론 노력을 쏟아야 할 일을 현명하게 선택하지 못하면 저 스토커 꼴이 나는 겁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6 레몬티한잔
    작성일
    13.02.18 02:03
    No. 5

    ㅋㅋㅋ 아주좋소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구름말이
    작성일
    13.02.18 20:30
    No. 6

    아하하하... 황송하옵니다. 댓글로써 계속 글을 써야할 명분을 얻는다는 사실이 무척 행복하네요. 저는 참 행운아인 것 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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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33-36. 뻔함과 뻔뻔함(7) 16.04.13 295 3 16쪽
93 33-36. 뻔함과 뻔뻔함(6) 16.04.13 259 3 22쪽
92 33-36. 뻔함과 뻔뻔함(5) 16.04.13 301 3 16쪽
91 33-36. 뻔함과 뻔뻔함(4) 16.04.13 336 3 11쪽
90 33-36. 뻔함과 뻔뻔함(3) 16.04.13 247 3 13쪽
89 33-36. 뻔함과 뻔뻔함(2) 16.04.13 364 3 13쪽
88 33-36. 뻔함과 뻔뻔함(1) 16.04.13 278 3 17쪽
87 26-32. 도사리는 일상(6) 16.02.02 401 3 18쪽
86 26-32. 도사리는 일상(5) 16.02.02 409 3 18쪽
85 26-32. 도사리는 일상(4) 16.02.02 423 3 14쪽
84 26-32. 도사리는 일상(3) 16.02.02 297 3 12쪽
83 26-32. 도사리는 일상(2) 16.02.02 229 3 14쪽
82 26-32. 도사리는 일상(1) 16.02.02 748 3 13쪽
81 25. 밑천 드러난 날 15.06.13 358 3 18쪽
80 24. 감성의 모래시계(8) +1 15.05.14 298 3 16쪽
79 24. 감성의 모래시계(7) 15.05.14 346 3 12쪽
78 24. 감성의 모래시계(6) 15.05.14 588 3 13쪽
77 24. 감성의 모래시계(5) 15.05.14 530 3 15쪽
76 24. 감성의 모래시계(4) +1 15.05.14 352 3 17쪽
75 24. 감성의 모래시계(3) 15.05.14 546 3 15쪽
74 24. 감성의 모래시계(2) 15.05.14 328 3 14쪽
73 24. 감성의 모래시계(1) 15.05.14 275 2 14쪽
72 18-22. 노숙자가 물들이는 기억(5) 14.11.02 375 2 15쪽
71 18-22. 노숙자가 물들이는 기억(4) 14.11.02 545 2 15쪽
70 18-22. 노숙자가 물들이는 기억(3) 14.11.02 707 2 11쪽
69 18-22. 노숙자가 물들이는 기억(2) 14.11.02 650 2 10쪽
68 18-22. 노숙자가 물들이는 기억(1) 14.11.02 584 2 11쪽
67 17. 불 지피기(5) 14.09.19 492 2 12쪽
66 17. 불 지피기(4) 14.09.19 582 2 13쪽
65 17. 불 지피기(3) +1 14.09.19 626 2 20쪽
64 17. 불 지피기(2) 14.09.19 424 2 16쪽
63 17. 불 지피기(1) +1 14.09.19 515 2 14쪽
62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13) +1 13.10.14 576 3 13쪽
61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12) 13.10.14 324 3 20쪽
60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11) 13.10.14 647 4 28쪽
59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10) +1 13.10.14 703 3 16쪽
58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9) +4 13.09.01 645 3 20쪽
57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8) +2 13.09.01 691 4 10쪽
56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7) +2 13.09.01 684 3 12쪽
55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6) +4 13.08.08 644 4 23쪽
54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5) +2 13.08.08 663 4 9쪽
53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4) +2 13.08.07 854 4 22쪽
52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3) +6 13.07.31 1,009 5 17쪽
51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2) +4 13.07.17 1,417 6 23쪽
50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1) +6 13.05.29 2,028 12 23쪽
49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11) +6 13.05.18 1,046 5 17쪽
48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10) +2 13.05.18 897 7 15쪽
47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9) +6 13.05.11 1,195 6 26쪽
46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8) +4 13.05.06 1,011 10 13쪽
45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7) +4 13.04.29 817 11 16쪽
44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6) +8 13.04.18 722 10 13쪽
43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5) +8 13.04.18 1,031 6 21쪽
42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4) +6 13.04.11 1,043 6 26쪽
41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3) +3 13.03.10 747 5 12쪽
40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2) +3 13.03.10 911 5 22쪽
39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1) +6 13.03.07 790 5 17쪽
38 6. 또 하나의 정체전선(9) +7 13.03.04 928 8 13쪽
37 6. 또 하나의 정체전선(8) +7 13.03.02 857 5 18쪽
36 6. 또 하나의 정체전선(7) +7 13.02.26 1,250 7 14쪽
35 6. 또 하나의 정체전선(6) +6 13.02.23 954 5 14쪽
34 6. 또 하나의 정체전선(5) +5 13.02.20 782 4 20쪽
» 6. 또 하나의 정체전선(4) +6 13.02.17 777 4 17쪽
32 6. 또 하나의 정체전선(3) +4 13.02.14 1,058 5 16쪽
31 6. 또 하나의 정체전선(2) +10 13.02.11 963 6 13쪽
30 6. 또 하나의 정체전선(1) +6 13.02.08 942 6 9쪽
29 5. 땀 흘리는 노숙자(8) +8 13.02.05 983 6 10쪽
28 5. 땀 흘리는 노숙자(7) +8 13.02.02 1,052 12 18쪽
27 5. 땀 흘리는 노숙자(6) +8 13.01.30 911 4 15쪽
26 5. 땀 흘리는 노숙자(5) +6 13.01.27 993 4 16쪽
25 5. 땀 흘리는 노숙자(4) +6 13.01.24 897 10 16쪽
24 5. 땀 흘리는 노숙자(3) +4 13.01.21 1,190 7 12쪽
23 5. 땀 흘리는 노숙자(2) +4 13.01.18 871 6 12쪽
22 5. 땀 흘리는 노숙자(1) +3 13.01.15 1,004 6 11쪽
21 4.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4) +3 13.01.12 1,138 4 13쪽
20 4.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3) +3 13.01.09 815 7 9쪽
19 4.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2) +5 13.01.06 949 7 14쪽
18 4.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1) +2 13.01.03 1,257 4 15쪽
17 3. 한 꺼풀 벗기다(7) +2 12.12.31 947 6 11쪽
16 3. 한 꺼풀 벗기다(6) +3 12.12.28 863 6 14쪽
15 3. 한 꺼풀 벗기다(5) +3 12.12.25 940 9 12쪽
14 3. 한 꺼풀 벗기다(4) +4 12.12.22 1,019 4 13쪽
13 3. 한 꺼풀 벗기다(3) +3 12.12.19 1,088 6 14쪽
12 3. 한 꺼풀 벗기다(2) +3 12.12.16 1,405 11 17쪽
11 3. 한 꺼풀 벗기다(1) +3 12.12.12 904 8 15쪽
10 2. 전말 아닌 전말(6) +3 12.12.09 1,083 7 12쪽
9 2. 전말 아닌 전말(5) +2 12.12.09 1,294 8 16쪽
8 2. 전말 아닌 전말(4) +3 12.12.08 988 8 10쪽
7 2. 전말 아닌 전말(3) +4 12.12.08 1,028 7 12쪽
6 2. 전말 아닌 전말(2) +3 12.12.08 1,074 11 7쪽
5 2. 전말 아닌 전말(1) +4 12.12.07 1,422 8 15쪽
4 1. 첫날은 언제나 새로운(3) +3 12.12.06 1,473 11 16쪽
3 1. 첫날은 언제나 새로운(2) +3 12.12.04 1,526 8 14쪽
2 1. 첫날은 언제나 새로운(1) +4 12.12.03 1,511 16 12쪽
1 0. 디데이 +9 12.12.01 2,171 1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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