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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고 구르면 어느새 옷자락이 걸려있습니다.

뱀, 선악과 그리고 이브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완결

구름말이
작품등록일 :
2012.12.01 21:03
최근연재일 :
2016.10.24 02:57
연재수 :
12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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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670
추천수 :
568
글자수 :
81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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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22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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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9쪽

45-47. 이미 이룬 나락(5)

DUMMY

모르겠다. 나는 역시 이한이가 어떤 녀석인지 감도 잡지 못하겠다. 이해하려 할수록 오해만 깊어가는 그 무의미를 나는 지금까지 반복했던 것이다.

“그래, 그게 네가 준비한 답이겠지. 그런 식으로 고집을 부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나도 준비해왔어. 네가 꼭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말이야.”

녀석은 기어이 날 죽게 할 셈인가보다. 도저히 양보할 수 없다는 의지가 스멀스멀 발끝으로 기어올랐다. 나라는 존재가 그토록 고통스러운 것인가.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이미 차례는 이한이에게 넘어갔다.

“일단 나는 네 인식 하나를 바로 잡을 거야.”

이한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널 용서한 적이 없어.”

“······.”

“왜 그런지 알아? 애초에 용서할 일이 없었거든. 내 덕분에 한계를 떨쳐내? 그게 무슨 헛소리야? 아직도 이런 소문이 돌고 있다지? 네가 어렸을 때 내 아버지를 죽였다고. 넌 옛날부터 그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을 거야. 그렇지?”

“맞아.”

“하지만 그거 사실이야? 정말 넌 내 아버지를 죽였어? 잘 생각해보라고. 넌 그 사람의 죽음과 털끝만치라도 연관되어 있었어?”

“···사실 모르겠어.”

“그래, 그게 문제였던 거야. 사실 내 아버지의 사인은 자살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

이건 나도 짐작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넌 단지 그 사람을 너무 좋아했던 거야. 그래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그 죽음을 네 멋대로 포장했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물음에 단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음으로써 모든 상황증거를 왜곡시켰어.”

“내가 그랬다고? 그 어린 나이에?”

“너는 충분히 그럴만한 개자식이었으니까.”

“······.”

“덕분에 사람들은 오해했지.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소문을 듣고 너는 생각했겠지. 이제 죄책감을 느끼며 살면 되겠다고. 맞아, 의도된 착각이었던 거야. 넌 사실 아무 잘못도 없는 꼬맹이였어.”

“···그걸 다 조사한 거야?”

“놀고만 있진 않았거든.”

“최 아저씨는 왜 그런 일을 벌였어?”

“너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어른들의 일이야. 단지 그뿐이었어. 네가 끼어들 구석은 전혀 없었어.”

이것은 내 인생의 기반부터 흔드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리 충격을 받지 않은 내가 있었다. 그리고 깨닫는 것이다. 그렇구나, 이 녀석이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구나. 내게 죄 같은 건 없었다. 단지 최 아저씨의 그 죽음이 허망한 형태이지 않길 바란 것이다. 그 사람이 너무 좋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언젠가 걸려 넘어질 장애물 하나를 얻었다. 날조된 한계를 넘어섰고, 없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증명한 내 삶의 가치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도 거짓인가? 나는 살아선 안 되는 녀석이었던 건가?

아니다, 단지 남들과 같은 선상에 자신을 세우는 것뿐이었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그런 평균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만으로 날 죽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할 말은 끝났어?”

“당연히 아니지. 단지 네 인생에 있을 아름다운 추억 하나를 흠집 낸 것뿐이야.”

“······.”

“메인은 지금부터지.”

이한아, 나는 네가 어떤 두려움을 느꼈는지 잘 몰라. 하지만 지금 내가 두려움을 느낀다는 건 확실히 알고 있지. 아마도 너는 이 순간을 가장 충격적인 형태로 연출하고 싶을 거야. 나라도 그렇게 할 것 같거든.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준비한 거야.

“나희는 말이야, 너 때문에 죽었어.”

막연한 두려움은 밑도 끝도 없는 바닥에서 기어 올라와 분명한 형태의 경악을 털어놓았다. 익히 알고 있던 것들의 단순한 조합일 뿐이었지만 그것은 생소한 모습의 흉기가 되어 넋에 박혀 들었다. 불안의 끝자락이 비명의 웅덩이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나희의 죽음에 대해 네가 했을 생각은 뻔해. 아아, 나희는 집단 괴롭힘으로 인해 무척 괴로웠구나. 내가 그 고통을 빨리 눈치채줬더라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난 정말 커다란 책임을 느껴.”

“······.”

“하지만 틀렸어. 나희는 정말 너 때문에 죽었거든.”

강조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었다. 강조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부분이란 걸 알기 때문에 강조하는 것이다.

“도고른, 너는 나희가 왜 괴롭힘을 당했는지 알고 있어?”

“···짐작은 할 수 있어.”

“아주 자신 있게 말하는구나. 미리 말해줄게. 그건 틀렸어. 너는 나희의 화상 자국을 염두에 두고 있겠지만 그건 네가 나희의 피해망상을 대신 느끼고 있던 것에 불과해. 생각해봐. 지금이 어떤 시댄데 그런 흉터를 가지고 사람을 괴롭히겠냐? 너는 사람의 가식을 너무 얕보고 있는 것 같아.”

“그럼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데! 그 착한 애가 왜 그런 고통을 받아야 했는데!”

“말했잖아. 다 너 때문이라고.”

이한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이게 공포영화였다면 저 눈에서 핏줄기가 하나 흐르고 있었으리라. 여동생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이한이의 표정이 그렇게나 기괴했다.

“이쯤에서 네 인식을 하나 더 바로잡을 거야.”

이한이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너는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

“다른 건 다 치워버리고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자고. 넌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해. 덤으로 노래도 잘하고 성격조차 밝았지. 얼굴이 못났어? 그렇지도 않잖아. 그 정도면 봐줄 만해. 결정적으로 재벌 집 아들이잖아. 그건 다른 사소한 약점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요소지. 유일한 흠이 있다면 네가 어렸을 때 살인을 저질렀다던 소문이지. 하지만 너희 아버지가 보통 분이니? 그 시절에는 다 덮어버려서 우리가 다니던 학교에선 나를 포함한 직접적인 관계자를 빼곤 아무도 몰랐어.”

“그런가.”

“그러니까 넌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을 수 없었다는 거야. 오히려 과도할 정도로 좋았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본인을 인기 없는 남자라고 생각한 거야? 다른 건 다 알겠는데 그것만 모르겠더라.”

“···나도 모르니까 본론만 얘기해. 나희가 당한 괴롭힘하고 무슨 상관인 건데.”

“그런 상황에서 네가 나희와 친해졌잖아.”

“······!”

“누가 봐도 홀딱 빠진 것처럼 나희 주위에서 맴도는 게 너였잖아. 정작 사귀지도 않는 주제에 주인 앞의 개처럼 꼬리를 치며 매달렸잖아.”

아,

“그걸 본 여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 것 같아?”

아아,

“아까 사람의 가식을 얕보지 말라고 했지? 그거 질투도 마찬가지야. 특히 여자들은 더 무섭지.”

아아, 아아,

“괴롭힘의 시작은 거기서부터였어.”

아아아아아아아아,

“네 둔감함을 저주해라, 이 개자식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희는 마치 죽었다. 나희는 향해 얼굴에 화상을 나의 예수. 나희는 목소리가 예쁘다. 나희는 당했다. 이한이는 거짓말을 나희의 거야. 뇌수가 죽어버렸으면 나희가 떨어진다. 나는 왜 부는 이 사실을 모르고 괴롭힘을 옥상에서 않았다. 있었을까. 나희를 바닥으로 괴롭히던 년놈들이 하얗게 뱀, 모두 터뜨리지 좋겠다. 나는 정말 나희를 좋아해. 일찍 흩뿌려진다. 깨달았으면 분명 꾼다. 있었을까. 입었다. 건물 떨어지면 얼굴을 세찬 바람이 느낌일 나는 바람이 바뀌는 게 강한 날이면 항상 떨어지는 이 추궁은 꿈을 나의 이한이는 하지 아직 격정을 않았기에 않았다. 끝나지

“나희는 아마 견뎠을 거야. 분명 내 여동생은 널 좋아했으니까. 네가 곁에 있어 주는 것의 가치가 너무 커서 다른 고통은 신경 쓰지도 않았을 거야. 나희는 괴롭힘을 당했지만 그것을 죽음의 이유로 삼지 않았어.”

어지럽다. 토하고 싶다. 누가 저 입을 막아버렸으면 좋겠다. 끝까지 듣고 싶다.

“나와 다르게 사실 나희는 널 몰랐어. 정확히 말하면 네 과거를 몰랐지. 하지만 어느 날 우연히 소문을 들은 거야. 네가 어렸을 적에 누군가를 죽였다는 소문. 네가 우리의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였다는 말을 나희가 들어버린 거야. 나희의 정신이 부서졌지. 그게 나희가 건물에서 떨어지기 전날이야.”

이한이가 웃었다.

“도고른, 그 소문을 만들어낸 건 누구지? 같잖은 호감으로 자살을 타살로 왜곡한 그 새끼가 도대체 누구야? 괴롭힘을 참아가면서까지 좋아했던 남자를 순식간에 아버지의 원수로 만들어버린 그 개자식이 누구냔 말이다! 이제 알겠지? 그래, 너야! 그 쓰레기 같은 삼류 시나리오를 쓴 건 바로 너야, 이 찢어 죽일 새끼야!”

하늘이 노랗다. 아닌가, 이건 바닥인가. 그렇다면 구름처럼 일렁이는 저건 뭐지? 아, 토사물인가. 내가 게워낸 건가.

“나는 어렸을 적에 느낀 그 공포를 망각하지 말았어야 했어! 네가 그런 놈인 줄 알았다면 일찌감치 피했어야 했다고! 너는 네가 정해놓은 구원을 이루고, 네가 정해놓은 비극을 취하고, 네가 정해놓은 모든 것을 가져! 네가 멋대로 옮겨간 세상에 휘둘리는 우리는 도대체 뭐가 되는 건데!”

“······.”

“너 때문에 웃고, 너 때문에 즐거웠던 모든 기억이 지금에 와선 빠짐없이 굴욕적이야! 우리의 의미를 이유도 없이 잡아먹고 단지 형벌만을 공유하는 네가 그저 괴물로밖에 보이지 않아! 지금에 와서도 널 친구라고 생각해버리는 내가 미치도록 증오스럽다고······!”

“······.”

“그래서 겨우 죽어보려고 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진 않았지. 나보고 살라고? 그래, 알았어. 살아주마. 근데 곤란해. 나는 네가 살아있으면 정말 살기 곤란해. 나는 네가 있으면 못살아. 그러니까 죽어라, 제발. 내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 지금 여기서 죽어. 부탁한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손목을 긋고 죽어가던 이한이를 살려낸 것도 나였으니 말이다.

마음속으로 천칭 하나를 상상했다.

한쪽의 쟁반에 나의 삶을 올려본다. 거기에는 앞으로 내가 만들어갈 여러 이야기가 따라 올라갔다. 용배 아저씨와 재회해 술을 주고받는 내가 있었고, 상미를 맡아주라는 대훈 형의 부탁을 들어주는 내가 있었고, 마을의 새로운 트러블 메이커로 활약하는 이지 학생을 보며 전율하는 내가 있었다.

반대쪽에는 이한이의 삶을 올려본다.

거기에는 내가 없었다.

내가 없는 세상이 남았다.

평평하게 유지되던 균형이었건만 지금 이 순간 갑작스레 무너졌다. 쿵 소리가 나며 바닥에 부딪힐 정도로 한쪽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나는 들고 있던 문구용 칼의 날을 밀어 올렸다. 까드득 마찰하는 소리를 들으며 이한이에게 말했다.

“알았어. 네가 이겼어.”

최이한, 나는 손목을 긋는 정도의 소심한 짓을 하지 않아. 좀 더 확실한 부위가 있잖아. 붉게 녹슬었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칼날을 목젖 근처에 대었다.

“잘 가라.”

이한이의 인사를 들으며 칼을 횡으로 그었다. 힘줄과 혈관을 절단하는 날카로운 감각이 느껴진다. 아아, 세상은 이렇게나 뿌연 안개와 같았다.




*******************************

멀어지는 뒷모습을 향해 내가 외치게 해줘. 잘 가, 나의 뱀, 나의 예수.

********************************




보이면 소스라칠, 들리면 뒤틀릴, 만지면 상처 입을 모든 것들이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 두려운 것들은 언제나 제 발톱을 숨겨 새파랗게 날을 갈았다. 눈을 감으면 둘러싼 미지에 마음이 불안했고, 눈을 뜨면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런 세계에 남겨져 있었다.

이 어둠을 내가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들을 보고 싶지 않기에 그 어떤 시선조차 남겨두지 않았다. 내 눈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앞으로만 향해있었다. 두려운 것들을 등 돌려 외면한 채 한 방향으로만 걸어왔다. 발바닥에서 단단하게 포장된 길이 느껴졌다. 앞으로 걷는 일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언제나 앞으로만 걷고 싶었다. 외면한 것들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보고 싶지 않기에 어두운 것이었다. 억지로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듣고, 다른 것을 만졌다. 나는 역시 앞으로 걸었다. 뒤로 들어가 뭉개지는 풍경이 너무나 많았다. 쉬운 길을 따라 순조롭게 걸어왔지만 뒤에 남겨진 것들은 갈수록 무겁고 단단하게 뭉쳐지고 있었다.

점점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질량이 되어가겠지. 나는 내가 결국 당겨지는 힘을 거스르지 못하고 끌려갈 것을 알았다.

앞을 향해 모든 시선을 두었지만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둘러싼 어둠이 내게 뒤로 걸을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뿌리칠 수 없게 온몸에 달라붙어 날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뒤로 한 걸음 물러난 순간 나는 의지를 잃고 새하얗게 질렸다. 결국, 되돌아가게 되는 걸까. 여전히 앞을 바라보지만 뒷걸음질 쳤다. 더듬더듬 뒤로 걸었다.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면 되는 것이었다. 다 내가 알고 있는 길이었다.

나는 등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발톱을 숨기던 녀석들은 그제야 본색을 드러내며 날을 세운 그 빛을 휘둘렀다. 차마 시선을 가져갈 수는 없었지만 그것의 날카로움을 모를 수 없었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공기가 찢어졌고 조금 있으면 그 치명적인 발톱에 등허리부터 찢어발겨 질 것만 같았다. 쇠를 긁는 듯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소름 끼쳤다.

뒤로 걷고 싶지 않았다. 당장 땅을 박차고 뛰어나가고 싶었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아 다리에 몇 번이고 힘이 들어갔다. 그 시도가 처음이었다면 당장 그렇게 했으리라. 그러나 뒤에 뭉쳐진 과거는 어차피 뒤로 걸어야 할 내 미래를 암시하고 있었다. 거스를 수 없는 관성이 되어 뒤를 향했고, 그 증거들은 발자국으로 남아 길게 앞으로 뻗고 있었다. 아아, 그 끝없는 획마저 날카로운 어둠에 긴 허리가 잘려나갔다.

무거운 추를 매단 듯 힘겹게 한 걸음씩 물러났다. 분에 겨운 한 걸음에 한 번 주저앉았고, 애가 타는 두 걸음에 싫은 울음을 터뜨렸다. 끔찍한 것들에 금방이라도 닿아버릴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뛰어갈까, 헛되이 또 앞을 향해 걸어볼까. 내 안을 맴도는 수많은 말이 있었고, 어디 도망가 봐, 넌 돌아오게 되어있어, 뒤에서 누군가 울대를 긁으며 웃어댔다.

마지막이 될 한 걸음, 하지만 언젠가 모든 것의 발단이 될 첫걸음. 내 뒷걸음질은 시작으로 돌아와 처음 내가 바라보던 과거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마침내 되돌아온 낡은 사건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참았다. 숨 막힐 듯 머리가 뜨거워지고 끊어질 듯 가슴이 미어졌다. 그친 줄 알았던 눈물이 참은 비명의 틈으로 새어 나왔다.

울 자격이 없는 줄 알면서도 울었다. 자취를 감춘 양심으로 쓸모없는 자책을 했다.

나는 되돌아와야 할 과거에 있다. 여기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답은 정해져 있겠지. 입을 틀어막은 손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나머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밟은 곳은 허공이었다. 그대로 추락했다.

돌아오는 과정에서 겪어야 할 모든 고통을 경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지는 추락의 괴로움이 이곳에 있었다. 거센 바람이 아래에서부터 휘몰아치고 나는 참은 비명을 쏟으며 끊임없이 떨어졌다. 온몸을 할퀴고 지나가는 공기에 달아오르지만 숨 쉴 틈조차 없었다. 아래를 등지고 하늘을 보며 떨어졌다. 빠르게 다가오는 바닥을 차마 똑바로 마주할 수 없었다.

그렇구나. 나희는 그 소스라치는 광경을 바라보며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구나. 스치는 깨달음이 이미 터져버린 심장에 상처를 새겼다.

지금 바닥과 만나면 나는 어떻게 될까. 뼈와 살이 뒤틀리며 죽어버리겠지. 조금 더 나중에는 어떨까. 형체를 알 수 없는 반죽이 되어 바닥을 붉게 칠하게 될 거야. 그리고 이 곤두박질이 먼 훗날로 미뤄지면 결국 내 영혼마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려나. 나는 어쩌면 그것을 바라고 있을까.

추락은 길게 길게 이어지고 내 곁을 스치는 공기는 어느 순간부터 빨라지지 않았다. 주위는 아무것도 없는 살풍경, 뒤를 받쳐주는 강한 바람. 변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기묘한 상상을 하게 된다. 어쩌면 나는 추락하고 있는 게 아닌지도 몰라. 이 바람은 그 옛날부터 불어왔는지도 몰라.

어리석게도, 바람을 타고 상승하고 있다는 착각을 해버린다.

타고 오른다. 나의 착각을 빌미로 삼아 처음 떨어졌던 그곳을 향해 상승한다. 드디어 거슬러 올라온 자리. 그 자리에서 내가 겪을 일은 역시 다르지 않았다. 다시 뒷걸음질로 추락한다.

똑같은 소스라침으로 떨어지는 내가 있었고, 뒤따라오는 착각으로 상승하는 내가 있었다. 그렇게 되돌아오면 추락했고, 추락하면 되돌아왔다.

추락, 상승, 추락, 상승, 추락, 상승······. 추락은 시작되었다. 추락은 또 시작되었다. 추락은 계속 시작되었다. 추락은 끝까지 시작되었다. 추락은 언제까지나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시작되었다. 시작만이 단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추락은 시작되었다.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

시작이 주는 괴로움을 품었기에 그것은 나락이라 불려야 했다.


작가의말

저도 어떻게 섞어버렸는지 모르니까 원문 달라고 하지 마세요.

지금 저는 ‘라이트 노벨’로 분류된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거의 끝나가니까 여기서 하차하지 말아요.


그럼 복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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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45-47. 이미 이룬 나락(4) 16.10.21 302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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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45-47. 이미 이룬 나락(2) 16.10.19 366 3 13쪽
113 45-47. 이미 이룬 나락(1) 16.10.18 263 3 13쪽
112 40-44. 죄여오는 나날과 무의미(5) 16.10.15 312 3 16쪽
111 40-44. 죄여오는 나날과 무의미(4) 16.10.12 240 3 15쪽
110 40-44. 죄여오는 나날과 무의미(3) 16.10.09 390 3 13쪽
109 40-44. 죄여오는 나날과 무의미(2) 16.10.07 243 3 13쪽
108 40-44. 죄여오는 나날과 무의미(1) 16.10.05 248 3 16쪽
107 37-39. 순함과 순순함(10) +1 16.10.02 256 3 17쪽
106 37-39. 순함과 순순함(9) 16.10.02 232 3 15쪽
105 37-39. 순함과 순순함(8) 16.10.02 236 3 13쪽
104 37-39. 순함과 순순함(7) 16.10.02 234 3 12쪽
103 37-39. 순함과 순순함(6) 16.10.02 238 3 12쪽
102 37-39. 순함과 순순함(5) 16.10.02 206 3 13쪽
101 37-39. 순함과 순순함(4) 16.10.02 229 3 13쪽
100 37-39. 순함과 순순함(3) 16.10.02 237 3 18쪽
99 37-39. 순함과 순순함(2) 16.10.02 327 3 14쪽
98 37-39. 순함과 순순함(1) 16.10.02 236 2 10쪽
97 33-36. 뻔함과 뻔뻔함(10) 16.04.13 278 3 24쪽
96 33-36. 뻔함과 뻔뻔함(9) 16.04.13 284 3 22쪽
95 33-36. 뻔함과 뻔뻔함(8) 16.04.13 301 3 14쪽
94 33-36. 뻔함과 뻔뻔함(7) 16.04.13 295 3 16쪽
93 33-36. 뻔함과 뻔뻔함(6) 16.04.13 259 3 22쪽
92 33-36. 뻔함과 뻔뻔함(5) 16.04.13 301 3 16쪽
91 33-36. 뻔함과 뻔뻔함(4) 16.04.13 336 3 11쪽
90 33-36. 뻔함과 뻔뻔함(3) 16.04.13 247 3 13쪽
89 33-36. 뻔함과 뻔뻔함(2) 16.04.13 364 3 13쪽
88 33-36. 뻔함과 뻔뻔함(1) 16.04.13 278 3 17쪽
87 26-32. 도사리는 일상(6) 16.02.02 401 3 18쪽
86 26-32. 도사리는 일상(5) 16.02.02 409 3 18쪽
85 26-32. 도사리는 일상(4) 16.02.02 423 3 14쪽
84 26-32. 도사리는 일상(3) 16.02.02 297 3 12쪽
83 26-32. 도사리는 일상(2) 16.02.02 229 3 14쪽
82 26-32. 도사리는 일상(1) 16.02.02 748 3 13쪽
81 25. 밑천 드러난 날 15.06.13 358 3 18쪽
80 24. 감성의 모래시계(8) +1 15.05.14 298 3 16쪽
79 24. 감성의 모래시계(7) 15.05.14 346 3 12쪽
78 24. 감성의 모래시계(6) 15.05.14 588 3 13쪽
77 24. 감성의 모래시계(5) 15.05.14 530 3 15쪽
76 24. 감성의 모래시계(4) +1 15.05.14 352 3 17쪽
75 24. 감성의 모래시계(3) 15.05.14 546 3 15쪽
74 24. 감성의 모래시계(2) 15.05.14 328 3 14쪽
73 24. 감성의 모래시계(1) 15.05.14 275 2 14쪽
72 18-22. 노숙자가 물들이는 기억(5) 14.11.02 375 2 15쪽
71 18-22. 노숙자가 물들이는 기억(4) 14.11.02 545 2 15쪽
70 18-22. 노숙자가 물들이는 기억(3) 14.11.02 707 2 11쪽
69 18-22. 노숙자가 물들이는 기억(2) 14.11.02 650 2 10쪽
68 18-22. 노숙자가 물들이는 기억(1) 14.11.02 584 2 11쪽
67 17. 불 지피기(5) 14.09.19 492 2 12쪽
66 17. 불 지피기(4) 14.09.19 582 2 13쪽
65 17. 불 지피기(3) +1 14.09.19 626 2 20쪽
64 17. 불 지피기(2) 14.09.19 424 2 16쪽
63 17. 불 지피기(1) +1 14.09.19 515 2 14쪽
62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13) +1 13.10.14 576 3 13쪽
61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12) 13.10.14 324 3 20쪽
60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11) 13.10.14 647 4 28쪽
59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10) +1 13.10.14 703 3 16쪽
58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9) +4 13.09.01 644 3 20쪽
57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8) +2 13.09.01 691 4 10쪽
56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7) +2 13.09.01 684 3 12쪽
55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6) +4 13.08.08 644 4 23쪽
54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5) +2 13.08.08 663 4 9쪽
53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4) +2 13.08.07 854 4 22쪽
52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3) +6 13.07.31 1,009 5 17쪽
51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2) +4 13.07.17 1,417 6 23쪽
50 14-16. 참다운 유예를 위하여(1) +6 13.05.29 2,028 12 23쪽
49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11) +6 13.05.18 1,046 5 17쪽
48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10) +2 13.05.18 897 7 15쪽
47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9) +6 13.05.11 1,195 6 26쪽
46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8) +4 13.05.06 1,011 10 13쪽
45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7) +4 13.04.29 817 11 16쪽
44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6) +8 13.04.18 722 10 13쪽
43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5) +8 13.04.18 1,031 6 21쪽
42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4) +6 13.04.11 1,043 6 26쪽
41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3) +3 13.03.10 747 5 12쪽
40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2) +3 13.03.10 911 5 22쪽
39 13. 장맛비에 불어난 것(1) +6 13.03.07 790 5 17쪽
38 6. 또 하나의 정체전선(9) +7 13.03.04 928 8 13쪽
37 6. 또 하나의 정체전선(8) +7 13.03.02 857 5 18쪽
36 6. 또 하나의 정체전선(7) +7 13.02.26 1,250 7 14쪽
35 6. 또 하나의 정체전선(6) +6 13.02.23 954 5 14쪽
34 6. 또 하나의 정체전선(5) +5 13.02.20 782 4 20쪽
33 6. 또 하나의 정체전선(4) +6 13.02.17 776 4 17쪽
32 6. 또 하나의 정체전선(3) +4 13.02.14 1,058 5 16쪽
31 6. 또 하나의 정체전선(2) +10 13.02.11 963 6 13쪽
30 6. 또 하나의 정체전선(1) +6 13.02.08 942 6 9쪽
29 5. 땀 흘리는 노숙자(8) +8 13.02.05 983 6 10쪽
28 5. 땀 흘리는 노숙자(7) +8 13.02.02 1,052 12 18쪽
27 5. 땀 흘리는 노숙자(6) +8 13.01.30 911 4 15쪽
26 5. 땀 흘리는 노숙자(5) +6 13.01.27 993 4 16쪽
25 5. 땀 흘리는 노숙자(4) +6 13.01.24 897 10 16쪽
24 5. 땀 흘리는 노숙자(3) +4 13.01.21 1,190 7 12쪽
23 5. 땀 흘리는 노숙자(2) +4 13.01.18 871 6 12쪽
22 5. 땀 흘리는 노숙자(1) +3 13.01.15 1,004 6 11쪽
21 4.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4) +3 13.01.12 1,138 4 13쪽
20 4.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3) +3 13.01.09 815 7 9쪽
19 4.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2) +5 13.01.06 949 7 14쪽
18 4.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1) +2 13.01.03 1,257 4 15쪽
17 3. 한 꺼풀 벗기다(7) +2 12.12.31 947 6 11쪽
16 3. 한 꺼풀 벗기다(6) +3 12.12.28 863 6 14쪽
15 3. 한 꺼풀 벗기다(5) +3 12.12.25 940 9 12쪽
14 3. 한 꺼풀 벗기다(4) +4 12.12.22 1,019 4 13쪽
13 3. 한 꺼풀 벗기다(3) +3 12.12.19 1,088 6 14쪽
12 3. 한 꺼풀 벗기다(2) +3 12.12.16 1,405 11 17쪽
11 3. 한 꺼풀 벗기다(1) +3 12.12.12 904 8 15쪽
10 2. 전말 아닌 전말(6) +3 12.12.09 1,083 7 12쪽
9 2. 전말 아닌 전말(5) +2 12.12.09 1,294 8 16쪽
8 2. 전말 아닌 전말(4) +3 12.12.08 988 8 10쪽
7 2. 전말 아닌 전말(3) +4 12.12.08 1,028 7 12쪽
6 2. 전말 아닌 전말(2) +3 12.12.08 1,074 11 7쪽
5 2. 전말 아닌 전말(1) +4 12.12.07 1,422 8 15쪽
4 1. 첫날은 언제나 새로운(3) +3 12.12.06 1,473 11 16쪽
3 1. 첫날은 언제나 새로운(2) +3 12.12.04 1,526 8 14쪽
2 1. 첫날은 언제나 새로운(1) +4 12.12.03 1,511 16 12쪽
1 0. 디데이 +9 12.12.01 2,171 1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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