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4. 죄여오는 나날과 무의미(3)
“근데 뺀질이 오빠, 조폭이었어?”
한참 더 실랑이하다가 갑자기 상미가 그렇게 물어왔다.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대답했다.
“너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냐?”
“아니, 오빠는 복면 쓰고 칼을 들고 설치는 타입이잖아. 그러다가 경찰이 나타나면, ‘아, 연기자 지망생이에요. 연습 중이었습니다.’라고 하면서 바로 꼬리 내리겠지.”
“참 세밀하게도 비유한다! 너는 그 조폭이란 말 또 어디서 들었어?”
“그냥 가게 보고 있으니까 손님들이 와서 하는 말이지. 오빠가 그런 위험한 사람이니까 어울리지 말라고 하던데.”
이익! 이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주절거리기는!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할 수도 없었다. 만약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게 들통나버리면 아마도 좋지 않은 광경을 볼 것만 같았다.
“이 동네에서는 왜 이렇게 헛소문이 잘 퍼지나 몰라.”
“뺀질이 오빠 행실이 그런데 어떡해. 이번엔 어쩌다가 그런 소문이 났는데?”
“뭐, 그런 일이 있었어.”
상미의 질문을 대충 얼버무리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려고?”
“들를 데가 있어서 그런다.”
“백수 주제에 할 일은 또 많아요, 치이······.”
“친구 불러서 놀면 되잖아. 난 간다.”
“아, 잠깐만!”
이제 나가려는데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날 불러세우는 상미였다. 무슨 시답지 않은 얘기를 하려나 했는데 이번엔 싱거운 농담이 아니었다.
“아까 강남세탁소 아저씨한테서 전화 왔었는데 뺀질이 오빠한테 뭐 줄 거 있다는데?”
“잉? 뭔 일이래? 나보고 오라셔?”
“응, 오늘 저녁 전까진 오라고 했어.”
“알았다. 그럼 진짜 간다.”
“또 와.”
벌떡 일어나서 크게 손을 흔들어주는 녀석이었다. 저 살가운 배웅이 괜히 불편하게 느껴지는 내가 이상한 건가. 모태솔로가 어쩌니, 하면서 깎아내리기만 하던 녀석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친밀하게 대해오니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속에서 뭔가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원래 일정은 두안빌라로 찾아가 오랜만에 려은이를 만나는 것이었지만 일단 강남세탁소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얼마 전에 맡겨둔 옷을 찾긴 했는데 뭔가 빠뜨린 게 있는 걸까? 딱히 생각나는 물건은 없었다.
어김없이 꺼림칙한 시선을 보내오는 동네 사람들에게 일부러 친근한 인사를 건네며 걸었다. 이 안 좋은 이미지는 끝내 사라질 기미가 없네. 하여간 나는 뭘 하든 밉상으로 보이나 보다. 나처럼 선량한 시민도 없는데 다들 왜 그러시나 몰라.
강남세탁소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침 입구 근처에서 다림질에 열중하고 계시는 사장님을 볼 수 있었다.
“사장님, 저 왔어요.”
“헙! 노숙자······가 아니고, 청년 왔어요······?”
내 얼굴을 확인한 세탁소 사장님은 부른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소스라치는 모습이었다. 역시 조폭이라는 소문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 평소에 날 부르던 노숙자라는 호칭도 바로 청년으로 바꿔 버리는 사장님이었다.
“아니, 그렇게 놀라실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요······.”
“처, 청년이 갑자기 들어오니까 그렇지요······. 허허허!”
“왜 안 하던 존댓말을 하고 그러세요? 그냥 평소처럼 편하게 부르세요.”
“지금은 그냥 이게 편해서 그래요. 신경 쓰지 말아요, 어허허허허!”
전혀 편한 것처럼 안 보이는데요. 뒤에 붙인 웃음이 너무 억지스럽다고요. 잠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는데 그걸 또 알아보신 사장님이 찔끔거렸다.
“사장님, 무슨 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 조폭 아니거든요? 진심으로 맹세한다고요. 그러니까 평소대로 해주세요. 저, 진짜 불편하다고요.”
“아, 아알지이! 누가 청년보고 조폭이래요? 난 절대 그런 소문 안 믿어요. 허, 허허허허!”
“···그럼 존댓말부터 어떻게 좀 해주시죠. 닭살 돋으니까.”
“그, 그럴까아? 어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
말만 낮췄지 여전히 불편함을 물씬 풍기는 사장님이었다. 아주 심각한 상태잖아? 물론 내 이미지가 말이다. 내 진실한 맹세보다 날조된 소문의 신빙성이 높다니, 정말 어떻게 되먹은 거냐.
“왜 오라고 했어요? 뭐 줄 거 있다면서요.”
“아, 그, 그래. 잠깐만······.”
약간 퉁명스럽게 물어보자 사장님은 여전히 쩔쩔매는 기색이었다. 구석에 있는 책상 서랍을 열더니 어디선가 본 적 있는 편지 봉투를 가져오는 모습이었다. 사장님은 내게 봉투를 건네기 전에 눈에 힘을 주고 당부하듯 얘기했다.
“이거 받기 전에 알아둘 게 있는데, 난 절대 일부러 내용을 보지 않았다는 거야! 그냥 어쩌다 보니 뜯어져서 그런 거라고!”
“아아, 예······.”
“그리고 내가 늙었는지 눈이 침침해서 무슨 내용인지 확실히 읽지도 못했어! 난 여기에 뭐가 적혀있는지 전혀 몰라!”
“······.”
뜬금없이 변명을 폭풍처럼 늘어놓는 사장님의 태도에 의아해져 버렸다. 별말 없이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나서야 겨우 편지 봉투를 건네받을 수 있었다. 나는 손에든 그것을 보고 약간 놀라버렸다.
언젠가 대훈 형이 내게 부쳐달라고 건넨 그 편지였다.
“어어, 이거 제 옷에 들어있었던 거예요?”
“그, 그렇지. 세탁하기 전에 다른 물건하고 같이 모아뒀는데 그것만 깜빡하고 못 돌려줬거든······.”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건 털뚱보 남자가 우체국에서 부치라고 매일 건넸던 최초의 편지였다. 은골산의 양계장에서 도망친 닭을 잡다가 휴식을 취하는 중에 부탁받았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김인읍으로 돌아왔을 때가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부칠 수가 없었다. 털뚱보 남자는 그냥 버리라고 했지만 나중에 딴소리할까 싶어서 보관하고 있었다. 그때 입었던 옷을 세탁소에 한 번 맡기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돌려받다니.
“크, 크흠!”
눈치를 보아하니 세탁소 사장님은 이미 이 내용을 읽어버린 모양이었다. 도대체 뭘 봤길래 저런 반응이지? 확 호기심이 일었지만 잠깐 망설였다. 이거 허락도 없이 읽어도 되는 건가. 매일 꼬박꼬박 부치던 편지던데 말이지. 읽으면 바로 아르바이트에서 잘라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털뚱보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난 지금 아르바이트를 관둔 상태라 그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밀은 지킬 줄 아는 남자라 이거야! 미친 듯이 내용이 궁금하지만 난 참아내겠어! 그러니 어쩔 수 없군! 운명에 한 번 맡겨보는 수밖에!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아아닛, 미끄러진 손가락이 겉봉투를 찢어버렸잖아! 공교롭게도 내용물이 바닥에 떨어졌어! 엣취히이잇! 이럴 수가! 마침 재채기가 터져 나와서 그 날숨 때문에 편지가 활짝 벌어졌네!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나!”
크윽,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나는 이 편지를 읽어야만 하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난 모양이야! 어쩔 수 없군! 이게 내 운명이라면 피하지 않고 당당히 받아들이겠다······!
내 원맨쇼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사장님을 무시하며 재빨리 내용을 확인했다. 군데군데 잉크가 번진 부분이 있었지만 알아보기 힘든 수준은 아니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도신우 회장님께.’
종이를 쥔 손가락이 뻣뻣해졌다. 이제야 세탁소 사장님의 태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도신우는 우리 아버지 이름이었다.
********************************
나는 이 형벌의 땅에 남겠어.
“······.”
*********************************
‘도신우 회장님께.
오늘부터 아드님을 계속 관찰하고 이렇게 편지로 보고드릴 예정입니다. 요청하신 대로 오늘은 아드님이 지금까지 김인읍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간략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고른 군은 현금 수백만 원을 가지고 내려와 처음에는 절도범으로 몰린 적이 있습니다. 물론 오해를 풀고 빠져나왔지만 그게 좋지 않은 기억이 되었는지 경찰을 꽤 어려워하는 듯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다리 밑에서 노숙생활을 시작하였고 주민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터미널로 자리를 옮긴 후 지금까지 계속 그 상태를 유지 하는 중입니다. 아이들과 놀아주거나 고등학교 운동회에도 참가하는 등 비교적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나 본인의 이름은 가르쳐주지 않는 상황입니······.‘
편지를 접어 품에 넣은 후 나는 일단 세탁소 사장님을 무겁게 쳐다보았다.
“음, 사장님, 이건 비밀로 해주세요.”
“아, 알았다! 당연히 그래야지!”
“고맙습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 그래! 살펴가!”
내가 웃음기를 쫙 빼고 얘기하는 게 어지간히도 무서웠나 보다. 밖으로 나올 때까지 연신 쭈뼛거리는 사장님이었다. 예전에 날 막 대하던 태도와 비교하니 살짝 불쾌해지고 말았다. 재벌 아들이 무슨 벼슬이라고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이래서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드라마가 문제야! 돈 많은 집 자식들을 죄다 난폭한 놈으로 만들어 놓으니까 이런 거 아니야! 물론 내가 난폭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살인 멸구를 일삼는 쓰레기는 더더욱 아니란 말이다! 아버지는 연예인도 아니면서 쓸데없이 이름이 팔려가지고!
어쩐지 소름이 돋아버려서 머리를 쥐어뜯다가 간신히 정신 차리고 생각했다. 이 편지는 분명 털뚱보 남자가 우리 아버지한테 보내는 일종의 보고서였다. 내용은 물론 나에 대한 것이다. 경호원들만 나를 감시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털뚱보 남자는 나와의 친분을 이용해 더욱 가까이에서 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허어, 이 무슨 등잔 밑이 어두운 경우란 말인가.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시기를 생각하니 경호원들이 감시를 시작한 시기와 얼추 들어맞았다. 아주 둘이서 짜고 날 농락했다는 얘기네? 엉?
속에서 열불이 올라오기 시작한 나는 바로 대울청과에 쳐들어갔다.
“대훈 형!”
“어? 뺀질이 오빠?”
익히 보아온 자세로 마루에 벌렁 드러누워 있던 상미가 갑자기 들이닥친 날 보고 깜짝 놀라 일어났다. 서둘러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다듬는 모습이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대훈 형은 지금 어딨어!”
“아직 안 들어왔는데? 왜?”
“언제 들어오는데!”
“아, 씨! 뜬금없이 소리를 질러? 나도 몰라!”
상미가 대뜸 발끈해버려서 살짝 찔끔했지만 여기서 물러나는 건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모르면 알 수 있게 다른 합리적인 수단을 제시하란 말이야! 후에에엥!”
“···이 오빠가 왜 이래? 저녁 먹을 때쯤엔 올 테니까 기다려 보든가.”
“후에에에에엥! 싫어! 지금 봐야 한다고! 으앙앙앙!”
“평소보다 더 꼴불견이야······.”
내가 발을 동동 구르며 떼를 쓰자 상미는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저런 표정 잘 안 짓는데 진짜 기분 나쁜가 보다. 녀석은 마루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줍더니 내게 툭 던졌다.
“전화해보든가.”
상남자 스타일로 고갯짓을 한 번 하더니 마루에 털썩 앉아버리는 상미였다. 쟤는 거리낌도 없이 자기 스마트폰을 넘기네? 비밀도 없는 녀석인가. 상미의 스마트폰은 잠금이 되지 않아서 곧장 전화번호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음, 뭐가 대훈 형 번호지?”
‘말미잘’
이, 이건 누구야? 별명인 건가? 어떻게 생겼길래 별명이 이래? 영상통화로 확인해보고 싶다······가 아니지! 정체가 궁금하지만 내가 찾는 번호가 아닌 것 같으니 일단 넘어가자.
‘아저씨 발’
그러니까 누구냐고! 비하할 의도가 분명하게 느껴지는 별명이잖아! 다른 건 모르겠는데 뒤에 ‘냄새’라도 붙여주라고! 띄어쓰기 실수하면 큰일 나는 거 알아, 몰라!
‘Germany(젊은이)’
와아, 이건 난해하다. 도대체 뭘 표현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이런 별명이 지어질 에피소드가 전혀 생각나질 않아. 이것도 대훈 형이 아니란 것만 확실히 알겠어!
상미 녀석은 무슨 전화번호부를 이렇게 복잡하게 관리하는 거야. ‘조물조물주’, ‘크림슨소스 스파게티’, ‘섞어라테스’ 등등의 기괴한 별명들을 주르르 넘기고서야 겨우 원하는 번호를 찾을 수 있었다.
‘살찐 공처가 지망생’
“이거다!”
아주 확실한 단서를 남겼구나! 털뚱보 남자가 나중에 결혼해서 꽉 잡혀 살 거란 예상은 분명 누구나 할 수 있겠지! 게다가 살까지 쪘다면 이보다 확실할 수 없다고!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왜 전화했어?
이 목소린 털뚱보 남자가 틀림없었다. 상미의 작명 솜씨에 살짝 감동하며 일단 소리를 꽥 질렀다.
“나다, 이 사기꾼아!”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