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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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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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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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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11장-투영透影 (1)

DUMMY

뱃전의 난간에 올라선 티엘은 무심결에 자신의 활을 내려다보았다.

시위를 놓을 때마다 손끝을 스치는 감촉이 미묘하게 거칠었다.

자신과 키가 비슷할 정도로 거대한 활을 다루면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는건 조금 불안한 감이 있었다.

익숙하게 반복해온 동작을 하면서도 매끄럽지가 않고, 미묘하게 손끝이 무뎌진다.

활을 바꾼 탓일 것이다.

티엘의 활은 기사단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성능이 뛰어난 영장이었고, 그런 활을 삼 년이나 사용하며 스스로를 활에 완전히 맞춰둔 상태였다.

브론딜은 그런 영장을 잃게 된 티엘을 위해 여러 모로 신경을 써 새 활을 만들어주었다.

마력의 저항을 받아내야 할 활 몸은 생령의 뼈를 깎아 만들고, 그 위로 수많은 이사드와 마법진을 우룬의 사슬로 새겨넣었다.

직접적으로 아스트라와 접촉하는 시위 역시 한 올 한 올 세심하게 마력처리를 한 뒤 꼬아 얹었고, 빙결 속성의 마력을 자주 다루는 만큼 북부 설원에 서식하는 마물에서 채취한 아교로 각 부품을 접합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활은, 분명 브론딜이 스스로도 흡족해할 정도로 빼어난 영장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브론딜이 애를 쓴다고 해도 시간마저 맞춰줄 수는 없다.

남은 것은 티엘이 이 활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 뿐이었다.

하지만 벌써 몇 달이나 써왔지만 그 크기도, 무게도, 하다못해 시위를 놓은 뒤의 반동조차도 손에 익질 않았다.

때때로 자신의 몸이 이 활에 익숙해지길 거부하는 것 같다고 느낄 정도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쯤 되면 익숙해질 때도 되었을텐데.

오히려 활 자체에 익숙해진 것은 처음으로 활을 배우던 때가 더 짧았던 것만 같다.

'활에 의존하면 안된다는건 알지만, 역시 위력이 떨어지는 건 곤란한데······.'

조금 전 날려보낸 아스트라의 흔적을 더듬은 티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좋은 영장은 오랫동안 사용할 수록 더 강력해진다.

긴 세월 마력으로 단련되며, 사용하는 과정에서도 조금씩 세공을 더해 그 힘을 더해가는 것이 바로 영장이다.

특히나 아첼의 활은 티엘이 물려받기 전에도 아첼이 십여 년 가량이나 사용해오며 세공한 역작이었다.

브론딜의 말로는 최소한 5,6년, 길면 10여 년 이상은 사용하며 꾸준히 관리를 해줘야 비로소 이전의 활과 비슷한 수준에 근접할 수 있을 거리 충고했다.

조금은 아쉬운 일이다.

물론 칼라가스 덕분에 순간적인 위력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지만 장기전으로 밀려버리면 예전보다 더 주의해야한다.

게다가 마법을 단순히 파괴 목적으로만 사용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리광 부리지 말자.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니까.'

부족한 분량은 자신이 채운다.

언제까지나 미련을 안고 있을 수는 없다.

짧게 한숨을 쉰 티엘은 갑판 위의 상황을 주의깊게 살피다 또다른 표적을 찾아냈다.

어색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시위가 당겨지는 속도는 빨랐다.

묵직한 반동과 함께 또 한 발의 아스트라가 습기 찬 공기를 갈랐다.

매끄럽게 날아든 화살이 쌓여있던 상자들을 부수자 파편과 내용물이 우르르 쏟아졌다.

막 갑판 아래로 도망치려던 세 명의 남자는 앞이 막히자 욕설을 한무더기 쏟아냈다.

상자 안에 들어있던 자루나 뭔지 모를 큼지막한 덩어리들, 그리고 부서진 상자 자체가 멋지게 무너져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들이 돌아갈 길은 아스트라가 부숴버려 어디 한 곳 부러질 것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 그리 도망치기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비장한 눈길을 교환한 남자들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눈앞에 생긴 장애물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상자를 붙잡고 허우적거리는 사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가느다란 은사가 그들의 발밑으로 미끄러져갔다.

워낙 가늘어 발목에 웬 실이 휘감긴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한 남자가 가까스로 무너진 파편의 산 위로 올라섰다.

그 순간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리며 세 사람이 우스꽝스럽게 팔다리를 휘저으며 목각인형처럼 동시에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러고보면 공화국에는 공을 굴려 막대들을 쓰러뜨리는 경기가 있다고 했던가.

티엘은 무심하게 감탄하며 시선을 조금 옆으로 돌렸다.

한 손에 은사를 휘감은 채 씩 웃는 리아가 '좋았어!'라며 주먹을 움켜쥐고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토끼 몰이, 고마워!"

"저 악마같은 여자가아아악!"

"와하하! 저건 너를 부르는걸까, 아님 나한테 하는 말일까?"

"그거 구분해봐야 의미 있나요."

리아는 깔깔 웃어대며 뱃전에 널려있던 질긴 밧줄을 끌어당겼다.

은사로 묶어두면 풀기야 어렵겠지만, 아무래도 마력으로 짜내는 것이라 장시간 묶어두자면 쓸데없이 마력을 낭비하게 된다.

마침 배에는 튼튼한 밧줄이 많으니 대체품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리아는 문득 불만스런 눈으로 뱃전 너머를 흘겨보았다.

막 출항하려는 배를 잡아둔 채로 표적을 노려야 하는 임무에서 이 정도의 수고는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도와주는 손이 있다면 조금은 편해진다는 것도 사실이다.

뱃전 너머로 보이는 항구에는 새하얀 제복에 금색의 휘장을 단 기사들이 사병들과 도시 경비대를 거느린 채 배 주위로 포위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검은 가지 기사단과 함께 피앙투스의 무력을 책임지는 황금 가지의 기사들이었다.

흑마법사만으로 편성되는 검은 가지와는 달리,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대신 영격술을 중점으로 다루는 일반병과인 그들은 흑마법사의 색출은 맡기겠다며 배 위로는 단 한 명도 올라오질 않았다.

물론 양지로나 음지로나 잘 섞이지 않는 것이 두 기사단 사이의 전통이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무를 집행하는 곳에서도 이렇게 치사하게 나올 때는 자연스레 열이 오른다.

밧줄의 매듭을 지을 때 괜히 꽉꽉 잡아매는 것이 아니었다.

차마 아프다는 말도 못 꺼내는 밀수범들은 조금이라도 아픔을 덜기 위해 몸을 뒤챘다.

하나의 줄에 나란히 묶여있다보니 세 명이 각자 버둥거리며 모양새가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리아는 그들이 발버둥칠 수록 더더욱 음산하게 웃으며 남자들의 오금을 걷어차 바닥에 앉혔다.

그리고 허리를 깊숙히 숙여, 그들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자아, 마약 밀수하느라 수고 많은데 뭣 좀 물어볼까 해요. 협조좀 해주면 고맙겠는데."

"히이이익! 사, 살려줘!"

"······그런 말 하려거든 좀 전에도 한 번이나 더 생각하고 말할 것이지. 젠장, 길게 안물어볼테니까 빨랑 말해. 그 자식 어디에 있어? 선실 안쪽? 아님 딴데 둥지 틀었나?"

"누, 누구 말입니-"

"당연히 늬들 부려먹은 흑마법사! 여기 있는 놈들은 죄다 일반인이잖아, 제기랄!"

나긋나긋하게 말하던 리아가 갑자기 발을 뻗어 곁의 술통 하나를 힘껏 걷어찼다.

굉음과 함께 단단한 오크 통이 쇠망치로 내려찍은듯 박살나버렸다.

물론 선원들의 얼굴도 한층 더 창백해졌다.

리아도 아예 통이 터져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눈을 끔뻑거리다 티엘에게 하소연하듯 고개를 돌렸다.

"······밀수품 담는 통이 뭐 이리 약해?"

"화풀이는 적당히 해요. 지금 심문 하려는거지 화풀이 하려는게 아니잖아요."

"그래두우, 그 따위 쓰레기 하나 때문에 우리도 싸잡아서 욕을 먹는거잖아아악!"

"네에, 네에."

리아를 진정시키길 포기한 티엘은 리아가 부숴버린 통에서 흘러나온 물건을 하나 집어들었다.

윗부분에는 밀가루나 귀리 따위가 들어있는 작은 자루가 쌓여있었지만, 조금 파헤쳐보니 그 아래에는 가죽이나 질긴 종이로 꽁꽁 싸매둔 납작한 꾸러미가 가득했다.

단검으로 수상쩍어보이는 포장지를 살짝 찢자 짙은 갈색을 띈 덩어리 몇 개가 삐져나왔다.

길이는 검지손가락 정도에, 굵기는 그보다 조금 더 굵다.

살짝 냄새를 맡아본 티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물건을 포장지째 내팽개치고 발로 밟아 짓이겼다.

"겨우 황금 가지 쪽에서도 제대로 거래현장을 잡았네요."

티엘이 밟아 으깬것은 건조한 대마를 굳힌 덩어리, 그것도 환각계 마력으로 성능을 강화시킨 물건이었다.

일반적인 대마에 비해 각성효과도, 중독성도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이런 물건은 한 번이라도 손대게 되면 다시는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거기에 마력의 영향으로 독성도 급격하게 강해져 순식간에 육체 또한 망가뜨린다.

리아는 이를 갈며 검을 뽑아 세 명의 범죄자 사이에 푹 찔러넣었다.

위협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사람 한 명쯤 찔러버릴 듯한 표정에 비명도 지르지 못한 세 사람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귀 옆에 꽂힌 칼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부터 질문하니까 잔말말고 대답해라. 그 놈 어딨어? 또 모르는 척 하겠다면 어디 한 군데쯤 잘라내도 된다는 말로 알아듣지."

"자, 잘 모······."

"그래? 그럼 우선 다리 하나. 티엘."

티엘은 군소리 없이 단검을 뽑아 리아에게 던져주었다.

손 안에서 단검을 돌려쥔 리아는 그대로 한 사람의 다리를 내려찍으려는 듯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아직 동이 트지도 않은 않은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도 서슬푸른 칼날의 반사광이 세 남자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으아아아악! 그, 그만둬! 말하면 돼, 돼잖아! 제길, 배, 배 밑창에 있어요! 으, 아아아악!"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예리한 단검은 멈칫거리는 일조차 없이 똑바로 떨어졌다.

남자는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단검은 손잡이만 남긴 채 갑판에 깊숙히 꽂혔다.

자신의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빗겨간 단검을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라보던 남자는 잔뜩 얼어붙은 채 리아가 단검을 뽑아내는 광경을 지켜봤다.

"두 번째는 안봐줄거야. 밑창에 있다고? 객실이 아니고?"

"자, 작업실을 두려면 밑창이 좋다고 그 쪽으로 달라고 했어요. 지, 진짜에요!"

쯧, 하며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공포스러운 심문이 끝났다.

칼을 뽑은 리아는 묶여있던 세 남자를 발로 차서 일으킨 뒤 갑판쪽을 가리켰다.

남자들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하나둘 발판을 통해 경비대에게 인계되어 땅으로 내려갔다.

"다행히 배에 실은 건 얼마 없으니 금방 끝나겠네. 굳이 안옮겨줘도 되겠지?"

"옮겨달라고 요청해도 무시할 생각이죠?"

"흥, 이쁜 짓을 해줘야 이뻐해주지. 그나저나 로비는 뭘 하길래 안보여?"

티엘의 눈매가 조금 사나워졌다.

배 위에 올라오기 직전에 분명 설명해줬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위에서부터 내려가면 중간에 샐지도 모르니 애초부터 중간지점에 잠입한다고 했잖아요."

"아하하하, 그랬지, 참. 그럼 로비는 배 옆구리를 뚫고 들어간거야, 지금? 그럼 빨리 지원 가야지."

"······지원이요?"

아스트라는 목표물에 맞으면 폭발하며 주위로 마력을 확산시킨다.

그런 아스트라를 주력으로 쓰는 사람더러 좁은 배 안에서, 그것도 근접전 위주로 싸우는 사람을 지원하라는 것은 무슨 심보일까.

그러나 리아는 자신의 검을 툭툭 치며 씩 웃었다.

"걱정 마, 얘. 일을 크게 벌려서 그렇지, 마약에 남아있는 마력은 그리 강하진 않았잖아. 로비가 질 것 같진 않으니까 가서 응원이나 해주면 되겠지."

그런 건 지원이라기보다는 구경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러나 리아는 티엘이 뭐라 대답하는 것조차 기다리지 않은 채 은사를 풀어 무너진 잔해들 사이에 발판을 만들고 있었다.

이제와서 반대해봐야 듣지도 않을거라는 사실을 잘 아는 티엘은 한숨을 푹 내쉬며 탐색의 주문을 외웠다.

금빛의 마력이 둥그렇게 퍼져나간 뒤 배 안의 모습이 어렴풋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갑판까지 포함해서 남아있는 사람은 고작 넷.

리아와 자신을 제외하면 마약을 만들어낸 흑마법사와 올로비스 뿐일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의 위치가 가까운 것을 보면 지금 대치중인 것은 확실해보였다.

근방의 마력 흐름이 상당히 정체된 것을 보면 아직 직접 전투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항복 권유라도 하는 것일까.

"가죠."

선내는 갑판 위를 제외하고도 네 층이나 되었고, 혹시라도 배가 파손되어 물이 들이칠 것을 고려한 것인지 각 층마다 몇 개의 구획으로 나뉜 격벽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덕분에 바로 최하층까지 내려가는데도 제법 빙빙 돌아야 하는 불편한 구조였다.

올로비스에게 가는 길이 늦어지는 것을 걱정하던 두 사람의 발걸음이 조금씩 다급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다행히 삼층에 이르자 마침내 뭔가 부서지고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 기사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지막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제법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한 것인지 조금 전까지는 깨끗하던 공간도 적대적인 마력이 부딪히며 일어난 마력의 난기류로 뒤덮여 상당히 어지러운 상태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리도 요란하게 마력이 부딪히는데도 그 여파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상하네. 제대로 싸우는 거 맞나?"

의문이 풀린 것은 두 사람이 계단을 내려간 직후였다.

서글프게도 우스운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벼락처럼 내질러진 창이 춤을 추듯 움직이며 날아드는 공격을 막고, 베어내, 떨군다.

솔페이람의 힘으로 불러일으킨 바람이 시야를 가르고 적의 마력을 흩어놓는다.

올로비스는 여전히 군더더기라고는 보이지 않는 깔끔하고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진지한 모습을 우스꽝스러운 농담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다름아닌 그와 싸우는 적의 모습이었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히는 줄로만 알았던 쇳소리는 어처구니없게도 날아드는 실험기구를 쳐내는 소리였고, 올로비스가 불러내는 마력도 공격을 위해서가 아닌 적당히 힘을 흘려주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머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도가니를 맨손으로 받아 어깨너머로 휙 던진 올로비스는 문득 도가니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로 도가니를 어렵잖게 잡아챈 리아가 잔뜩 실망한 투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저기, 지금 뭐하는거야?"

"보이는 것 그대로."

비실비실 날아오는 화염을 바람으로 꺼버린 올로비스가 지쳤다는 시늉을 했다.

흑마법사라고 전부 전투에 능한 것은 아니다.

보아하니 이번 사건의 주범은 현장에서 영장을 휘두르는 것 보다는 연구실에서 악재를 손질하거나 시약을 주물럭거리는 쪽에 가까운 사람인 듯 했다.

"써, 썩 꺼져! 저리가! 비, 빌어먹을, 나, 날 잡아가진 못할, 못할걸!"

황당하게도 남자가 쥐고 휘두르는 것은 시약을 휘젓는데 쓰던 것으로 보이는 큼직한 국자였다.

영장도 아니고 가정집에서 요리할 때 써도 될 물건이지만 그나마 황동으로 만들어져 어느 정도는 마력을 잘 머금는다는게 유일한 위안일 것이다.

딱하게 바라보는 세 사람의 시선에 항의라도 하듯, 흑마법사가 파랗게 질린 채 휘두른 국자 끝에서 거무스름한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환각계의 마력이었다.

올로비스가 있는 곳 근처까지 걸어간 티엘은 느릿하게 퍼져가는 안개에 살짝 손을 내밀어 보았다.

같은 환각계라고는 해도 정령급인 애냐의 마력에도 미치지 못한다.

마법사 본인이 가진 마력의 고유속성이거나, 혹은 이제 막 속성발현이 시작된 요정급의 어린 생령의 마력이다.

애초에 '문'에 소속되지 않은 채 불법으로 흑마법을 쓰는 자라고는 하지만, 설령 문에 들었다고 해도 어엿한 마법사라 봐주기에는 조금 아슬아슬한 수준이었다.

당장 자신을 위협하는 인물이 셋으로 늘었으니 가장 자신있는 공격을 퍼부었을텐데도 이 정도가 고작이면 사실 견습이라고도 봐주기 어렵다.

"애냐."

티엘의 손에서 피어난 검은 안개가 힘이라곤 하나도 없는 상대의 안개를 집어삼켰다.

상극인 슈니엘의 마력보다도, 오히려 같은 환각계인 애냐의 마력쪽이 소모가 적은 정도로 약한 마력이다.

올로비스가 왜 애를 먹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필사적으로 마력을 뿜어대며 저항하는 상대에게 무방비하게 다가갈 수도 없지만, 정작 올로비스의 마력은 지나치게 파괴력이 강해 의도치 않아도 상대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이렇게 약한 상대라면 제풀에 지쳐 쓰러지도록 유도하는 쪽이 온건한 편이다.

그러나 정작 흑마법사는 나름대로 올로비스와 대등하게 맞섰다고 여겼던 것인지, 올로비스보다 한참 어린 소녀가 자신의 마력을 손쉽게 뚫고 들어오자 극도로 당황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리아는 혀를 차며 은사를 한 가닥 뽑아들고 티엘의 뒤를 따랐다.

스펠글로스의 마력을 머금은 은사 역시 상대의 어설픈 환각 안개 따위는 가볍게 찢어발겼다.

"이, 이 지옥에서 올라온 마귀들같으니······! 어떻게 그렇게 쉽게······!"

"그거 위에서도 몇 번이나 들었어요, 이 사람아. 그리고 댁도 흑마법사잖아? 피차 마찬가지인데 뭘 이제와서 그런 소리야? 쯧, 유배 가기 싫으면 우리쪽으로 와. 잘 됐네, 티엘. 막내 받으렴."

"그래놓고 심부름은 저 시키려는거 다 알아요."

"아, 들켰어? 아차, 실수했네에."

리아는 되는대로 내뱉으며 손아귀의 은사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얼굴에 가득했던 장난기를 싹 걷어냈다.

"운 좋은 줄 알아. 단순 토벌이 아니라 이번처럼 흑마법사가 연관된 경우 열 건 중에서 일곱은 전투중 범인의 사살로 끝나. 너처럼 어설픈 놈이라면 자멸하는 경우도 많지. 살아남은 걸 다행으로 여기지 그래? 성실하게 사는 다른 흑마법사들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눈앞의 마법사가 이런 잔챙이가 아니라, 어느 정도 전투에 익숙한 숙련된 흑마법사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살려둔 채로 구속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워지고, 만에 하나 잡아들이는데 성공하더라도 기사단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다면 각인을 파기시킨 뒤 영구 정화지역이 설정된 유배지로 보내진다.

문득 티엘은 처음 리아나 올로비스와 만날 당시, 솔페이람에게 크게 다쳤던 것을 떠올렸다.

그 직후 메이트리아크에게 덤벼들긴 했어도 기사단에 들어갈 뜻을 보녔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지, 만일 끝까지 메이트리아크가 티엘의 입단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마찬가지로 각인을 파기당하고 유배지로 떠나야 했으리라.

그러나 사실 선택지를 강제받는 상황을 달갑게 받아들일 사람은 별로 없다.

부들부들 떨며 다가오는 리아를 피해 뒷걸음질 치던 마법사는 갑작스레 몸을 돌려 벽면에 몸을 던졌다.

물론 선저에 마련된 공간이기에 바깥은 바닷속이고, 수압과 하중을 견디기 위해 벽 역시 두텁고 단단한 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맨몸으로 벽을 부수고 나가기도 어려울 뿐더러, 설령 가능하다 해도 깊은 바닷속으로 몸을 던지는 격이다.

하지만 상대 역시 마법사는 마법사.

어떤 주문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든 리아는 재빨리 은사를 휘둘렀다.

그러나 마법사는 용케도 은사를 피하며 한 손에 한가득 마력을 끌어올렸다.

"누가 흑기사단 따위에 들어갈까보냐아아아아아!"

마법사의 손이 벽을 강하게 찍었다.

순간 그의 손을 중심으로 짙은 자색의 마력이 퍼져나가며, 동시에 마법사의 모습이 이상하게 왜곡돼기 시작했다.

마법사를 묶으려던 은사가 일제히 진저리를 치며 튕겨져나왔다.

마력에 밀려난 것이 아니다. 왜곡된 공간으로 인해 마법사에게 닿지 못하고 빈 공간만 휘감은 것이었다.

공간계 마력이었다.

"갑자기 저런게 어디서 나온거야!"

말할 필요도 없다. 마법사 본인이 다루지 못하는 마력이라면, 영장이나 특정한 마도기, 혹은 마정석을 이용하면 된다.

낄낄 웃는 마법사의 몸이 점점 흰 빛으로 뒤덮여가는 것을 본 티엘은 눈을 질끈 감으며 칼라가스를 불렀다.

공간을 비틀어버린 이상, 같은 공간계 속성의 마력이나 공간왜곡을 무시할 수 있는 특수한 수단이 아니면 왜곡면 안쪽에 닿지 못한다.

예외라면 소멸의 권능을 담은 아스트라 정도 뿐이다.

그러나 시위를 놓으려는 순간,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막대한 압박감이 손을 잡아챘다.

"앗!"

겨우 한 순간의 동요였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도망치려는 자에겐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뒤늦게 마법사의 팔을 노리는 아스트라가 시위를 떠났지만, 아스트라가 왜곡면에 닿기보다 먼저 눈부신 빛이 마법사의 발 아래에서 터져나왔다.

잠시 후, 마법사의 몸을 감싼 빛이 사라졌을 때는 그 곳에 있던 마법사 본인의 모습도 더이상 찾을 수 없었다.

전이주문으로 도망친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기운이 쭉 빠지는 상황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아직 아스트라는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미처 주문을 파기할 틈도 없이 뒤늦게 벽에 부딪힌 아스트라는 소리도 없이 주먹만한 구멍을 뚫어놓은 채 깊은 바다 속으로 휘익 날아가버렸다.

마법사는 놓치고, 나가는데 한참 걸리는 배엔 구멍을 뚫어놓았다.

세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탄식이 쏟아졌다.

"젠장, 일 났네."

리아는 머리를 헤집으며 아스트라가 뚫은 구멍을 살폈다.

다행히 아스트라가 폭발하며 생긴 구멍이 아니라 소멸의 권능으로 지워진 흔적이었기에 구멍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티엘은 재빨리 다가와 물이 분수처럼 새어들어오는 구멍을 막고 다시금 칼라가스를 불렀다.

바깥쪽의 물이 얼어붙어 일종의 뚜껑처럼 변해 구멍을 틀어막았다.

"죄송해요. 제가 머뭇거려서······."

"네가 뭘. 그 개자식이 나쁜거지. 일단 나가자고!"

세 사람의 다급한 발소리가 계단을 올랐다.

그러나 얼마 달리지 않아, 그들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무판자들이 조금씩 힘을 받는 것처럼 뒤틀리는 소리였다.

잔물결에 흔들리는 것 치고는 삐걱이는 소리가 제법 무거웠다.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던 올로비스가 벽에 귀를 가져갔다.

묘하게 날카로워진 파도 소리와, 바람을 가득 안은 돛의 끝자락이 파르륵 떨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단순한 착각일까.

"솔페이람!"

현 위치는 배의 흘수선보다는 높다.

때문에 올로비스는 망설임 없이 배의 옆면을 폭풍으로 날려버렸다.

그러나 벽이 박살난 순간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라티앙의 항구 대신 어디까지 펼쳐져있을지 모르는 푸른 수평선과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흰 물거품이었다.

어느새 항구를 떠난 배는 질주하는 말 이상의 속도로 맹렬하게 바다 한가운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배가 왜 출발을······? 젠장, 닻은?"

올로비스가 창을 뻗어 흐느적거리는 닻줄을 건드려보았다.

창날 끝에 걸려 올라온 것은 중간에서 거칠게 뜯겨나간 밧줄토막 뿐이었다.

"바람을 딛어라!"

티엘은 곧바로 구멍 밖으로 몸을 던지며 연속으로 주문을 발동해 망루까지 날아올랐다.

배가 얼마나 미친 속도로 달리는지 마치 성난 용의 숨결같은 바람에 눈을 뜨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애써 망루에 올라 가까스로 눈에 담은 육지는 이미 손가락으로도 충분히 가려질 정도로 멀어진 상태였다.

리아의 도움으로 뱃전에 연결한 은사를 통해 갑판으로 넘어온 올로비스는 급하게 후미로 달려가 있는 힘껏 타륜을 돌렸다.

급선회를 시도하다 배가 뒤집어질지도 모르지만, 닻이 없는 지금 속도를 줄일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올로비스의 입에서 거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리아, 돛!"

"알아!"

티엘은 뒤이어 갑판으로 올라온 리아와 함께 은사와 얼음조각을 휘둘러 돛을 찢었다.

다행히 마법으로 바람을 붙잡아둔 탓인지 질긴 돛에 작은 칼집만 내 주어도 저절로 찢어지며 어지럽게 너풀거린다.

하지만 반대로 올로비스는 크게 당황하며 뱃전에 몸을 기댔다.

타륜을 돌리는 감각이 지나치게 가볍다 싶더니, 키와 연결된 부분이 부서진 것인지 방향타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제기랄. 그 변태자식, 마약 팔아서 어지간히 돈 쳐발랐구나. 로비, 솔피로 역풍을 만드는건 가능할까?"

"그 전에 배가 부서질거에요. 일단 얼음으로 붙잡아서라도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볼게요. 그 전에 방법을 찾지 않으면······."

티엘은 말꼬리를 흐리며 뱃머리를 향해 눈을 돌렸다.

이제는 아득하게 멀어져가는 육지와 태양의 방향으로 가늠해보면, 뱃머리 너머에 있는 것은 어림짐작해볼 수 있다.

어디까지나 꼬일 생각인 것일까.

하필이면 뱃머리는 제국, 더 정확히 말하자면 레가야를 향하고 있었다.

"······원치 않게 제국땅을 밟게 될지도 몰라요."

그나마도 그 때까지 버틸만큼 식량이 있다는 낙관적인 전제 하에.

생략된 뒷부분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금새 눈치챌 수 있었다.

배를 움직이는 주문은 용골에 걸려있는 듯 했다.

즉, 당장 주문을 깨뜨렸다간 바다 한 가운데 가라앉는 꼴이 될 터였다.

하지만 과연 이 주문이 레가야까지 유지는 될까?

재수 없으면 바다 한 가운데 갇힌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물 위냐, 아래냐의 차이일 뿐.

올로비스는 굳은 얼굴로 항상 가지고다니던 작은 금속조각을 뜯어내 근처에 뒹굴던 물통에 던져넣었다.

그들이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작가의말

저런 상황에서면 르비아의 영향권에 들어가는걸 걱정하는것보다는 배가 침몰하거나, 바다 한 가운데 조난당할 상황을 걱정하는게 우선이겠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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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10장-기원祈願 (7) 19.09.10 71 3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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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10장-기원祈願 (5) 19.09.08 72 2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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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8장-미해迷海 (3) 19.08.20 81 3 26쪽
60 8장-미해迷海 (2) 19.08.19 82 3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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