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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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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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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2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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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쪽

8장-미해迷海 (7)

DUMMY

"티엘. 도약주문으로 아스트라의 사거리를 늘리면 어느 정도나 닿지?"

메이트리아크는 티엘 혼자 부담을 짊어지지 않도록 갖가지 수단을 떠올리며 물었다.

쓸 수 있는 수단이 하나라도 늘어난다면 다른 사람이 도와줄 방법도 그만큼 늘릴 수 있을 테니.

하지만 티엘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소의 두 배, 바람이 도와주면 두 배 반 정도에요. 그 이상은 조준이 흐트러질 가능성이 높아요."

단순히 날리는 것 뿐이라면 상관없지만, 지금은 발푸르기스가 두른 마력의 폭풍까지 감안해야만한다.

우룬의 신성(神聖)이 다하기 전에 괴물의 심장석을 찌르지 못한다면 소멸의 힘 역시 의미가 없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과 주문을 연계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서로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보지 않은 사람들이 정확한 순간 개입해줄 것을 바라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메이트리아크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바람을 갈라 길을 열면? 올로비스와 몇 차례 시도해본걸로 알고있는데?"

"아······. 성공하면 유효사거리가 네 배 정도로 늘긴 해요. 하지만 아직 성공률이 낮아서······."

"겨냥이 흐트러져도 좋다. 공간왜곡으로 실제 사거리를 늘리고 오차를 수정해주면 충분히 닿겠지. 이대로 저 녀석이 접근하는 걸 내버려두면 배를 지키는 것조차 힘들어질거다."

메이트리아크는 수중에 남아있던 마정석을 모두 꺼내들었다.

마안을 개방했던 여파로 상당량의 체력을 소진한 메이트리아크의 공격은 이미 평소의 날카로움도, 위력도 상당량 깎여있는 상태였다.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단은 이것 뿐이지만, 이제까지 통신에 사용하며 조금씩 소모한 탓에 남은 것은 고작 세 개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메이트리아크는 그리 넉넉치 않은 양이라도 남아있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아낌없이 남은 마력을 흡수했다.

"리아, '어스름의 휘파람' 펠렌 갈릴레이아아에 전언주문을 부탁한다고 전해라. 전원이 어렵다면 '뇌우의 인도자' 유리안, 나, 티엘은 반드시 포함, 그 외에는 백마법사들을 우선한다. 적의 공격을 막는 것은 소르위와 아드란에게 맡기고, 올로비스도 이쪽에 합류한다. 마이제 브라유, 당신에겐 각 배의 승무원들을 최대한 황금 창날로 모아주길 부탁해도 되겠나."

"지금 뭉쳐서 죽겠다는거에요?"

"최악의 경우 남은 네 척의 배를 모두 지킬수는 없지. 내 말이 틀렸나?"

메이트리아크는 다른 의견을 내기 위해서가 아닌, 반대를 위한 반대는 극도로 싫어했다.

특히나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시간을 소모하기만 하는,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 언쟁은 하책중의 하책이다.

때문에 한 순간이지만, 한 마디만 더 토를 달면 베어서라도 입을 막겠다는 살기에 가까운 위압감이 슬쩍 드러나고 말았다.

"······알았어요. 가면 될거 아녜요!"

평소라면 오히려 펄펄 뛰었을 마이제도 다행히 그 정도로 머리가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세 사람의 마법사는 빠르게 흩어져 메이트리아크의 지시에 따랐다.

그 자리에 남아있던 윤은 자기에겐 더 시킬 일이 없냐는듯 힘없이 웃으며 양 손을 펼쳐보였다.

"전 뭘 도와드릴까요?"

"부상을 돌볼 시간도 제대로 없지 않았습니까."

윤은 가까스로 출혈만 멈춰둔 눈 근처를 톡톡 건드렸다.

"이걸 걱정하시는걸 보니 역시 제가 할 일이 있긴 있었군요."

"······자칫하다간 남은 눈마저 잃습니다. 치유주문도 한계가 있지요. 그 눈, 완전히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래서, 여기서 눈 하나 살리자고 제가 빠지면 심장석은 어떻게 찾을겁니까. 불사계 속성을 둘이나 가진데다가, 저렇게까지 뒤틀린 놈이에요. 심장도 제 위치에 없을 확률이 높은데, 일단 살고 봐야지 않겠습니까?"

외눈의 사제는 씩 웃으며 발푸르기스를 향해 오른팔을 뻗고, 흔들리지 않게 왼손으로 팔꿈치를 받치며 마력을 흘려넣었다.

팔에 그려둔 피의 문양 사이로 새하얗고 날카로운 선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메이트리아크는 어쩔 수 없다는듯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쥔 태도를 어깨 너머로 치켜들었다.

"주의를 흩뜨려놓는건 일격이 한계입니다. 태세를 회복하기전에 주문을 끊는게 좋을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셋에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나, 둘, 셋!"

윤의 신호에 맞추어, 기나긴 칼날이 좌상단에서 우하단으로 장대하게 휘둘러져 공간을 찢었다.

세계 자체를 양단할 듯한 장절한 공간단열이 미처 피하지 못한 생령들을 집어삼켰다.

순수한 방어도, 주문을 막아내는 마력장벽도, 공간계 마력 앞에서는 의미를 잃는다.

한 번의 검격이 번뜩인 직후, 공간 째로 베어가른 발푸르기스의 상체가 쩍 갈라지며 몸통을 거의 절반은 찢어놓았을 듯한 깊고 커다란 상처가 생겨났다.

-크아아아악! 캬아아아아아!

영혼을 불사르는 끔찍한 비명이 온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십자가에 묶인 몸을 통째로 양단한 치명상에서 피 대신 끈적한 느낌을 주는 검붉은 기체가 격렬하게 뿜어져나왔다.

수백 년 이상 삼켜 엉망으로 변질된 마력의 분류였다.

그러나 폭발적으로 새어나오던 마력은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시간을 되돌리는 것처럼 다시 상처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심지어 메이트리아크가 베어낸 상처조차도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겨우 몇 초, 공간단열이 가져온 후폭풍이 아직 가라앉지도 않았건만, 이미 발푸르기스의 몸에는 작은 흉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경악스러운 재생력이었다.

메이트리아크는 갑판을 반쯤 파고들어있는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단 일격을 휘둘렀을 뿐인데도, 그 기나긴 검신은 불길에 휘감긴 듯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엘트리안이 만들었다는 전설적인 영장중 하나, '황혼의 인도자'조차 가까스로 버텨낼 정도로 과부하를 받았다는 뜻이었다.

강인한 재생력을 염려해 아예 절단면 근방을 잘게 다지다시피 벌려놨는데도 재생에 한 호흡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 이상의 공격이라도 얼마나 먹힐지, 기가 막힐 지경이다.

불멸의 불꽃.

본래 육신을 가진 자들에 비해 상처의 무게감이 얕은 생령에게, 그 이름처럼 말도 안되는 수준의 재생력을 부여하는 치유계 속성의 정점중 하나.

하지만 메이트리아크가 아는 한, 불멸의 불꽃 속성을 지닌 생령이라도 저 정도로 강력한 재생력을 보이지는 못한다.

필시 대정령이나 용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막대한 마력으로 재생력 그 자체도 어처구니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려진 모양이었다.

다른 마법사들에게 마력을 넘겨받아서라도 이격째를 날려야 할까.

그러나 채 식지도 않은 검으로 조금전과 똑같은 공격을 시도했다간 메이트리아크의 검도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버린다.

메이트리아크는 초조하게 윤을 돌아보았다.

마력의 저항을 이기지 못한 것인지 열 손톱 아래에서 피가 흥건히 배어나와 갑판으로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사제는 씩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찾았어요. 아슬아슬했네요."

멀쩡했던 오른쪽 눈가에도 가느다란 핏자국이 보였다.

다행히 눈을 잃지는 않았지만, 시뻘겋게 충혈된 눈은 어떤 방식으로든 타격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메이트리아크는 그의 헌신에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무안하게 그러지 마시죠. ······본체는 인간형의 육신이 아니라 등에 짊어진 저 십자가로 보여요. 그 중심부가 가장 마력이 짙습니다. 하지만 심장이 있을 위치 역시 마력이 상당히 뭉쳐있어요. 아마도 '부활의 심장'이 발동하는 조건이겠죠."

"두 지점을 동시에 꿰뚫으라는건가?"

그렇게 되면 위치 선정도 한결 더 어려워진다.

좀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 상황에 메이트리아크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때마침 미유시엘의 사제가 전언 주문을 완성했다.

머릿속으로 빈 공명음이 들리는듯한 특유의 감각이 연결되자, 메이트리아크는 곧바로 상황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유리안. 여기서 공세로 바꾸면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상황은 이해하지만, 공세로 전환하면 결계의 강도는 크게 떨어질거에요.'

"지금 적의 공격을 막는 두 사람을 믿어보는게 어떻습니까."

사실, 소르위라면 몰라도 아드란은 방어전엔 적합하지 않다.

그는 누구보다 먼저 달려나가 적진 한 가운데서 폭발해 큰 피해를 입히는, 옛 이야기에 나오는 광전사에 한없이 가까운 남자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은 채, 극도의 공격성으로 적을 모두 죽여 생환하는 거친 전투방식이 몸에 배어있다.

가능하다면, 리아를 소르위의 보조로 붙여주는 것이 좋을 터였다.

하지만 그 리아는 이미 격랑에 맞서 배를 엮는 것만으로도 위태로울 정도로 자신을 소모하는 중이었다.

아드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여기서는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이대로 소모전에 들어가면 누가 불리한지는 말할 것도 없지요. 알겠습니다. 라시엘 계열의 사제를 몇 명 붙여드리겠습니다.'

길게 심호흡을 하는 듯한 소리를 끝으로 유리안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황금 창날호의 갑판으로부터 종소리를 닮은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쏟아지던 빗소리마저 삼키며 경건하게 울리는 종소리는 다름아닌 망자를 애도하는 장례행렬의 그것이었다.

잘그랑, 잘그랑, 네 차례가 되었다는 듯 점차 다가오는 종소리에 등골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갑자기 엄습하는 오한에 뒤를 돌아본 티엘은 어느새 황금 창날의 갑판 끝까지 걸어나온 유리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두 팔을 높이 들어올린 채 눈을 감고 주문을 영창하는 그녀의 주위로 방대한 마력이 휘몰아치며 긴 머리를 정신없이 휘날렸다.

"티엘, 올로비스."

메이트리아크의 목소리가 티엘의 의식을 깨웠다.

"인간형의 심장부와, 그 뒤에 있는 십자가의 중심, 이 두 곳을 동시에 노려야한다. ······이럴 때는 참 어려운 일이지만, 긴장하지 말거라. 너희들의 뒤에는 내가 있으니까. 설령 조금 빗나가더라도 어떻게든 맞춰줄테니, 부담없이 전력을 다하도록."

"네······."

'그림힐트, 세일론, 일라냐, 마르네유, 이상의 네 명이 방어조에 가담할겁니다.'

"지금 언급된 인원 외의 사제들은 가능한 한 이 일대의 생령들을 섬멸하도록 부탁드리지요. 현 시간부로 결계 강도는 절반 이하로 떨어지니 반드시 막아내야 합니다."

불안한 상황에서도 누구보다 당당히 말하는 사람의 말은 보다 강한 설득력으로 사람을 움직인다.

발푸르기스라는 이름에 긴장하던 마법사들은 저 따위 마령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듯 당당하게 나서는 메이트리아크의 말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조금 전 발푸르기스를 베어갈랐던 강대한 마법사에 대한 경외감도 섞여있었다.

흔들림 없이 날카로운 메이트리아크의 지시, 그리고 주교 유리안의 협조와, 실패하면 어차피 죽는다는 절박함.

흑마법사를 꺼리던 일부 마법사들조차 이런 상황에 내몰린 이상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울 여유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사기를 한층 더 끌어올려줄 또 한 사람의 강력한 마법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 불편한 얼굴의 티엘을 눈치챈 유리안은 조금 씁쓸한 심정을 누르며 두 손으로 쥔 지팡이를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그녀가 준비한 주문은 천뢰(天雷). 발동하기 위해 '하늘', '벼락', 그리고 '신성'의 속성을 요구하는 백마법의 최고위 공격주문중 하나였다.

섬세하게 마력을 조절한 유리안은 마침내 지팡이를 힘있게 내려찍었다.

눈부신 백색의 빛기둥이 하늘 끝까지 치솟아 햇빛을 완전히 가로막는 두터운 운해를 꿰뚫었다.

심상치 않은 마력의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낀 것일까.

세워진 빛기둥을 향해 포효하던 발푸르기스가 그 거대한 두 쌍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질긴 피막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떠오른 수백 장의 검은 날갯깃이 검보라색의 불길을 길게 늘어뜨리며 배를 향해 쏟아져내렸다.

깃털 한 장 한 장은, 과거 아첼이 보여주었던 파드미엘의 아스트라를 연상케 했다.

아직까지 발푸르기스에게 먹히지 않은 수많은 생령들이, 겨우 그 한 장의 깃털에 꿰뚫리는 순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소멸하기 시작했다.

빗발치는 검은 비는 그렇게 잿가루의 폭풍을 만들며, 동시에 바다로 떨어져, 그렇잖아도 시커멓게 물들었던 바다를 한결 더 음험한 빛으로 물들였다.

"에기온, 니펠하이라!"

소르위가 목이 터지도록 고함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그와 함께 몇 명의 사제들이 동시에 마력을 일으키며 소르위가 날려보낸 마력에 자신의 주문을 겹쳤다.

끓어오르던 바닷물이 칼날처럼 치솟으며 곧바로 얼어붙어, 몇 겹이나 되는 거대한 빙벽이 방패처럼 일어났다.

그 사이로 깃털폭풍의 마력을 중화시키기 위해 방어계나 치유계의 주문이 빽빽하게 펼쳐졌다.

그러나 무수한 깃털은 제각기 불꽃을, 검은 번개나 새하얀 섬광, 또는 독살스러운 색의 연기를 피워올리며 손쉽게 얼음을 꿰뚫고 배와 바다에 쏟아졌다.

그물처럼 펼쳐두었던 리아의 은사 역시 평범한 실처럼 너무나 쉽게 녹거나 불타버렸다.

"날뛰어라, 이드칼! 끝까지 불태워보자고!"

끓어오르는 고함을 내뱉은 아드란은 악을 쓰며 강력한 벼락을 일으켜 깃털을 태워버렸다.

겹겹이 둘러쳐진 방벽을 넘어선 탓인지, 아니면 깃털 자체에 담긴 마력은 본체인 발푸르기스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인지, 플레일을 따라 어지럽게 뿌려진 이드칼의 검은 번개는 그 흉흉한 깃털들을 어렵지 않게 찢어발겼다.

그 모습을 본 소르위는 다시 제 2파로 날아드는 깃털폭풍을 향해 칼날같은 마력을 쏴 갈겼다.

어둠과 물의 이중속성을 지닌 에기온의 마력 역시, 날아들던 깃털을 가볍게 베어가르며 흉흉하던 깃털폭풍의 기세를 깎아내는 데 성공했다.

"요격하는 편이 효율적입니다!"

"그럼 전부 공격주문으로 전환해요! 결계는 제가 맡을테니까!"

유리안을 대신해 결계의 유지를 맡은 라시엘의 사제, '흰 천칭'의 샤를렌 상드리아는 자신의 주위에 결계를 위한 봉헌물을 설치하며 시시각각으로 부서져가는 결계를 조금이라도 보강하려 쉴새없이 주문을 외워갔다.

어디서도 보기 어려울 정도의 마법이 격렬하게 부딪히며 절망으로 얼룩진 바다를 혼돈으로 덧칠해갔다.

진노한 발푸르기스가 문득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 아래, 형형색색으로 얼룩진 기괴한 태양이 영글며 온 바다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바다가 온통 새하얗게 얼어붙다, 달군 철판에 떨군 것처럼 굉음을 내며 다시 끓어오르고, 그 사이에서 흐릿한 번갯불이 튀다 시커먼 기체로 변해 휘몰아쳤다.

얼마나 뒤섞였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뒤엉킨 마력이 그야말로 미쳐 날뛰었다.

이제까지의 가벼운 공격이 아닌, 저 괴물이 진심으로 살의를 담은 첫 번째 일격.

막는것이 가능할리 없다.

심지어 마력이 응집되며 공간까지 일그러뜨리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절망어린 비명을 내지르며 조금이라도 발푸르기스를 방해하기 위해 헛되이 주문을 날렸다.

"당황하지 마! 정해진 위치를 벗어나지 말고, 마력을 아껴!"

메이트리아크는 검을 뽑아든 채 갑판을 내달리며 소리높여 외쳤다.

"본체로부터의 공격은 내가 막겠다! 얼이 빠져서 힘 빼지 마!"

봉인했던 마안을 다시 풀어헤친 메이트리아크가 양 손으로 단단히 쥔 검을 뿌렸다.

이상현상을 일으키며 점점 부풀어가던 발푸르기스의 마력 덩어리가 마치 바람에 찢기는 구름처럼 억지로 찢어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방해하지 말라는 듯, 발푸르기스는 흩어지는 마력의 일부를 거두어 메이트리아크에게 광선처럼 쏘아보냈다.

그러자 메이트리아크는 혈루를 흘리면서도 다시금 공간을 찢어 그 공격을 흘려보냈다.

인지를 벗어나는 괴물과 단신으로 대적하는 그 모습에, 희망을 잃어가던 사람들이 경탄의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한 명의 인간으로서는 대단한 위업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유의미한 피해를 내지 못한 단순한 소모전에 불과했다.

그저 전의상실만을 막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그 와중에도 티엘은 올로비스와 함께 리아가 만들어준 발판 위에 선 채 활을 당길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중에 잔류한 마력을 머금은 빗물이 온 몸을 적시며 비릿한 냄새가 역하게 풍겼다.

이대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걸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듯한 광경을 눈으로 보며, 또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걸까.

일 분? 오 분?

몸을 낮춰 티엘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던 올로비스 역시 긴장으로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창끝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불안해할수록 티엘이 더욱 힘겨워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그가 느끼는 부담은 더더욱 컸다.

그렇게 영겁같은 시간이 흐르던 중, 갑자기 유리안이 만들어냈던 빛기둥이 사라져버렸다.

설마 주문이 실패한 것일까.

하지만 이를 악물려는 그 순간, 미쳐 날뛰던 이 바다 위에 뜻밖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비명도, 저항도, 무의미하게 스러져가는 그 가운데, 유리안이 너무나 오래 기다렸던 주문의 시동어를 읇조렸다.

"······페이드렐 일라카."

하늘의 섬광.

그 시동어처럼, 눈부신 빛의 한가운데서 거대한 빛의 날개가 장절하게 펼쳐졌다.

어느 왕국이 타락에 빠진 날, 하늘에서 강림해 왕국이 속한 대지를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불태웠다는 대천사장의 날개.

신의 창으로서 더럽혀진 것들을 단죄하는 신벌이 섭리를 벗어난 마(魔)를 향해 용서없이 떨어졌다.

미쳐버린 생령들을 닥치는대로 소멸시키던 불꽃이, 끓어오르던 바다가, 빗발치던 섬광과 얼음의 비가, 폭풍과 함께 단 하나의 색으로 물들었다.

무수한 이적(異跡)을 아우르는 태초의 섬광, 바람소리조차 삼켜버린 대천사의 빛이 순간 두터운 운해를 갈갈이 찢으며 시초여신 아이넬라를 상징하는 눈부신 일광을 저주받은 바다에 드리웠다.

그리고 그 찬란한 빛 속에서 영혼마저 불태워버릴 듯한 벼락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페이드렐 일라카는 그저 벼락의 비를 내리는 주문이 아니다.

일정한 영역을 지정해 그 안의 모든 존재를 벼락으로 불사를 것을 대천사 티르비엘에게 청하는 주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몸으로 대천사와 맞닿는 극히 위험한 금주(禁呪)였다.

사실상 칠대신언으로부터 한 발짝 정도를 남겨둔 주문이기에, 그 위력을 눈앞에서 접하고도 의식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서지고, 타올라, 사라진다.

죽음의 속성을 지닌 마력과는 전혀 달랐다.

춥고, 싸늘하며, 음험하게 녹아내리는 것과는 정 반대로 뜨겁고 순수한 분노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배의 무덤을 불태우는 저 빛은, 살아있는 존재들에게는 또 하나의 절대적인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메이트리아크가 필사적으로 고함을 질러 다른 사람들을 다독이려 애썼지만 아무것도 보이지도, 심지어 스스로의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는 아무런 효과도 볼 수 없었다.

배 위로 떨어지는 벼락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주문이 끝나 세계의 모습이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정신을 잃지 않은 사람은 전체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이 위력이면, 어쩌면 쓰러지지 않았을까?

덜덜 떨리는 턱을 꽉 깨문 채 힘겹게 버텼던 티엘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눈을 떴다.

어느새 다시 뒤덮여가는 구름으로 가늘게 새어들어오는 빛 아래에는 거대한 날개로 몸을 감싼 발푸르기스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타버린 날개 사이로 반쯤 녹아내린 듯한 십자가와 새카맣게 타버린 몸체가 언뜻 드러나있었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그 엄청난 벼락 속에서도 구속에서 풀려나지 못한 두 손이 뼈만 남은 채로 허공을 있는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발푸르기스는 시커멓게 탄 입을이 열고 또다시 지옥을 구현한 듯한 비명과 노래를 쏟아냈다.

마치 그 것으로 힘을 얻는다는 것처럼, 너덜너덜해졌던 몸의 상처가 다시 아물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속도는, 분명 메이트리아크가 공격했을 때에 비해서 확연하게 느려진 상태였다.

사선을 가리는 생령들도 지금은 없고, 재생에 전념하느라 마력장벽도 옅어졌다.

잠시 넋을 잃었던 티엘은 지금 이 순간이 기회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올로비스!"

"응. 간다! 솔페이람!"

올로비스는 세워쥔 창을 힘껏 끌어당겼다.

창대부터 날끝까지 맹렬하게 회오리치는 바람이 휘감겼다.

창끝이 바르르 떨릴 정도로 격렬한 선풍이었지만, 올로비스는 그것을 더더욱 창끝에 끌어모아 응축했다.

한계까지 압축한 폭풍은 그 자체로 형체를 가진 것처럼 날카롭게 벼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곁에서는, 어느새 시위에 걸린 아스트라가 칼라가스의 숨결을 머금은 채 싸늘한 광채를 뿌리고 있었다.

어떤 물체가 빠른 속력으로 날아간 궤적에는 짧은 시간 바람의 저항을 받지 않는 진공지대가 형성된다.

아스트라에 담긴 엘드리안의 신성은 무언가를 지워버릴 때마다 조금씩 소모되어 그 힘을 잃지만, 이렇게 공기저항을 억누르는 것으로 화살의 사거리를 끌어올리며 권능의 소실을 최대한 억누를 수 있다.

그러나 아스트라가 너무 빠르면 올로비스의 폭풍과 부딪혀버리고, 반대로 늦어지면 진공지대에 안착하지 못해 의미를 잃는다.

티엘은 불안하게 떨리는 자신의 호흡을 의식적으로 조절해 올로비스에게 맞추었다.

올로비스 역시 티엘의 숨소리에 맞추어 천천히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호흡이 같은 박자로 겹쳐졌다.

"지금!"

"칼라가스, 새벽의 창이여!"

올로비스가 창을 비틀어 찌르며 일갈하는 것과 동시에 매서운 폭풍이 눈부신 은빛의 화살을 달고 바다 위로 날아올랐다.

두 사람은 조마조마한 가슴을 누르며 주문을 살폈다.

성공이었다.

티엘의 아스트라는, 올로비스의 폭풍이 열어준 길을 타고 더 빠르고, 더 날카롭게 적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메이트리아크는 아스트라가 날아가는 방향을 유심히 살피다 다시 한 번 태도를 휘둘렀다.

공간이 왜곡돼며 아스트라가 다음 순간 엄청난 거리를 뛰어넘어 발푸르기스의 바로 앞으로 이동했다.

급소를 보호하기 위해 뭉클거리며 나타난 검은 마력의 소용돌이가 솔페이람의 폭풍과 맞부딪혔다.

잿빛 회오리바람은 찰나도 버티지 못한 채 흩어졌다.

하지만 그 뒤에 숨어있던 아스트라는 오히려 단숨에 어둠을 찢었다.

소멸의 신에게 건네받은 그 어떤 존재라도 지워버릴 수 있는 권능.

모든 것을 지워버릴 힘을 부여받은 화살은 순식간에 얇은 마력장벽을 가르고 발푸르기스의 육신을 파고들었다.

-쿠아아아악!

거칠게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는 발푸르기스의 가슴에서 언뜻 눈꽃을 연상시키는 여섯 갈래의 새하얀 마력줄기가 활짝 피어났다.

마력의 꽃잎에 닿은 육신은 처음부터 그런 모습이었다는 것처럼 깨끗하게 소멸하고, 그 상처에서 흘러나온 탁한 마력 역시 순백의 빛에 먹혀 자취를 감춰갔다.

자신을 좀먹는 빛을 내버려두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발푸르기스는 기어이 십자가에 단단이 묶여있던 양 팔을 억지로 뜯어냈다.

그를 묶은 천이나 사슬 역시 본질적으로는 그의 육체다.

일체화 되어있던 속박을 억지로 뜯어내며 질긴 피부가 엉망으로 찢기고, 그 상처에서역시 짙고 탁한 마력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부상을 각오하며 뜯어낸 팔로 가슴의 빛을 긁어내려던 순간, 한창 피어나던 백색의 마력이 그대로 폭발했다.

유리안이 만들어낸 것과 비견될 정도로 매서운 빛이 바다 위에 또 하나의 태양으로 영글었다.

다시 한 번 시야가 불타올랐다.

창세신이 아닌 소멸신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빛은 한껏 머금고 있던 엘드리안의 권능으로 발푸르기스의 저주받은 육신을 집어삼켜갔다.

그 끝이 향하는 것은 죽음조차 넘어선 무(無).

존재조차 허락하지 않는 철저한 공허 앞에 경악한 사람들의 시선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저것이······, 시원의 용······."

마이제의 경악한 목소리가 배 위에서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아, 아직······, 아직 긴장 풀면 안돼요. 곧 소멸의 힘이 다하면······."

정작 저 정도의 위업을 이뤄낸 티엘은 별의 서의 마력은 물론 자신의 마력까지 있는대로 짜낸 바람에 숨을 헐떡이며 가까스로 버티는 상태였다.

그러나 칼라가스의 마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는 마음놓고 쓰러질 수조차 없었다.

칼라가스의 숨결은 본래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강력한 빙결의 힘을 지닌다.

파괴신 엘드리안의 신성이 깃들었기에 소멸의 힘을 머금었을 뿐, 권능이 다한 뒤로는 그때아말로 최강의 빙결계 마력으로서 이 해역 전체를 얼려버릴것이다.

아스트라가 폭발하며 만들어진 광구가 천천히 내려앉으며 해당 지점으로부터 서서히 바다가 얼어붙는 것이 보였다.

"올로비스, 부탁-"

그러나 막 냉기로부터의 보호를 요청하려던 티엘이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다.

창백한 색의 광구, 그야말로 겨울의 심장이라도 부를 수 있을 혹한의 마력에서부터 별안간 두 쌍의 날개가 펼쳐졌다.

칠흑의 깃털과 순백의 피막.

자신을 묶어두는 얼음을 부수며 뻣뻣하게 굳어있던 날개살을 억지로 펼치는 두 쌍의 날개가 마치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칼라가스의 마력을 소중히 감싸안았다.

"그럴······, 리가!"

아직 소멸의 힘을 완전히 잃지 않은 마력은 두 쌍의 날개를 조금씩 뜯어삼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오히려 전보다 더 몸집을 키운 날개는 마력 덩어리를 찢으려는 것처럼 광구 안으로 힘껏 파고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치 흰 껍질을 부수듯 검게 뒤틀린 팔의 뼈대가 짓눌려가는 광구 안쪽으로부터 뛰쳐나왔다.

핏덩이에 가까운 팔은 고통스럽게 경련하며 비명을 대신하듯, 하늘을 움켜쥐었다.

"말도 안돼······. 말도 안됀다고! 시원의 용이란말야! 대체 어떻게 버텨낸거야!"

리아의 입에서 절망과 분노가 터져나왔다.

발푸르기스는 알에서 다시 태어나듯, 광구에서 완전히 재생해낸 몸을 뻗어올렸다.

물론 발푸르기스로서도 상당한 타격을 입어, 날개를 제외한 형체는 처음의 절반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부서진 십자가와 몸을 완전히 수복한 괴물은 더이상 붕대에 가려지지 않은 눈으로 격렬한 분노를 불태우고 있었다.

온 세상에 그 자신의 분노를 새기는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동시에 발푸르기스의 가슴 앞에 검붉은 마력이 뭉클거리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전까지의 공격과는 비교조차 되지않는 무거운 마력에 티엘의 입에서 숨막히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마력을 다 쥐어짜낸 바람에 적의에 실린 마력만으로도 짓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르위. 현 시간부로 단장대리의 권한을 맡기겠다. 생존자들을 데리고 전속력으로 빠져나가."

그 때, 메이트리아크는 그렇게 말하며 뱃전 끝에 올라섰다.

'퇴각입니까? 하지만 이대로 도망친다고 해도-'

"힘의 크기가 이 정도로 차이가 나는 이상 발목이라도 잡을 수 있는건 공간계 마력을 다루는 나 뿐이다. 다행히 여기엔 수류를 조작하고 바람을 움직일 마법사가 많이 있지. 가라. 남는것은 허락치 않는다. 단장으로서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검은 얼룩이 갑판 위로 툭 떨어졌다.

이미 메이트리아크의 눈에서 흐르는 것은 피라기보다는 살점에 가까울 정도로 진득한 핏덩이었다.

하지만 메이트리아크는 다시 눈을 봉하는 대신, 황혼의 인도자를 들어 방어자세를 취했다.

그녀가 익힌 검은 맹렬한 공격으로 적의 공격 자체를 틀어막는 공격 일변도의 영격술, 명도.

그런 그녀가 공격을 받아내려는 방어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그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메이트리아크는 망설임 없이 후퇴하라 말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말을 들은 리아는 금방이라도 울먹일듯한 얼굴이 되었고 올로비스는 침통하게 고개를 숙였다.

"······치사하십니다. 여기서 단장님을 버리고 가라면, 저희가 그럴 줄 아셨습니까!"

"버리고 가라고 누가 그랬나, 아드란? 적당히 시간을 벌면 전이주문으로 피하면 돼. 너희들이야말로 지금이 아니면 달아날 수 없다. 개소리 하지말고 빨리 가!"

"하지만 단장니-"

지지 않고 다시 반발하려는 아드란을 말린 것은, 다름아닌 소르위였다.

그는 이가 부스러지도록 악문 채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이주문이라고 해도 아무런 지원 없이 개인이 사용할 경우의 이동거리는 고작해야 시야가 닿는 거리 정도다.

소모하는 마력량까지 생각하면 아무런 방해가 없어도 바다 한 가운데 갇혀버린 것과 다름이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부하들을 생환시키려는 메이트리아크의 의도에 결국 아드란은 괴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플레일을 휘둘러 반쯤 가라앉은 갑판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은 아드란은 물기어린 눈을 불태우며 이를 갈았다.

"반드시 돌아오시는겁니다······!"

"그래. 조금 뒤 다시 보지."

유난히 쓸쓸해보이는 미소가 살짝 뒤돌아본 뒤 다시 사라져갔다.

다섯 명의 기사들은 비통한 마음을 억누르며 황금 창날 호를 향해 달렸다.

멀어져가는 발소리에 살짝 미소지은 메이트리아크는 마침내 완성되어 정면으로부터 달려들어오는 마력의 격류를 향해 검을 세웠다.

단순히 베어내는 것만으로는 저 막대한 충격량을 상쇄할 수 없다.

갈갈이 찢어 완전히 흩어버리려면 과연 생명력을 얼마나 깎아내야 할까.

'남은 생명을 전부 태워버려도 좋으니 다른 녀석들이 빠져나갈 시간을 벌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렇지 않아, 이슈바르?'

메이트리아크는 씁쓸한 독백을 곱씹으며 태도를 그어내렸다.

"신화시대의 괴물이라고 해도, 이 앞으로는 갈 수 없다. 피어라-!"

수평선을 반으로 가로지르던 수직의 궤적이 마치 만화경을 비추듯 수많은 각도로 갈라지며 그물처럼 펼쳐졌다.

그 하나하나의 선은 모두 공간을 찢어가르면서도 부분적으로 왜곡을 일으켜, 발푸르기스가 쏘아보낸 마력의 격류를 그대로 뒤집어냈다.

마치 스스로를 물어뜯는 뱀처럼 강제로 꺾여버린 마력이 자기 자신과 힘겨루기를 하며 급속도로 위력을 잃어갔다.

그러나 제대로 녹아들지 못한 채 멋대로 뒤섞인 마력은 메이트리아크의 계산을 다시 한 번 벗어나고 말았다.

애초부터 제어할 생각도 없이 단순하게 내뱉은 힘은 갑작스러운 장애물을 만나자 별다른 저항도 없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 기세는 단순히 흩어진다기보다는, 차라리 폭발하는 것에 가까웠다.

메이트리아크의 검격에 저항하는 대신 갈갈이 찢긴 마력 덩어리들은 제각기 방향을 멋대로 바꾸어, 무차별적으로 바다 위로 쏟아져 내렸다.

다행히 배 주변에는 티엘과 리아가 처음에 만들었던 방벽이 아직 조금이나마 남아있어, 몇 명의 마법사들이 방어주문을 쓰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은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중 겨우 몇 개, 채 열 손가락 안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 적은 몇개의 빛은 마법사들이 펼처둔 방어를 비집고 배에 상처를 새겨넣었다.

공교롭게도 그런 빛살중 하나가 티엘의 발밑을 무너뜨린 것은, 하필이면 티엘이 막 갑판으로 올라서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

갑판이 큼직하게 도려나가며 티엘이 딛고있던 발판이 밑으로 푹 꺼졌다.

반사적으로 선풍의 질주를 쓰려 시도했지만 이미 마력을 일으킬 수 없을정도로 체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이대로 떨어지면, 다음은?

다시 올라올 체력은 없고, 동료들이 사라진 티엘을 제때 눈치채지 못할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았다.

이를 악문 티엘은 가까스로 비죽 비어져나온 판자에 매달렸다.

부러진 판자를 고정해둔 못이 삐걱이는 소리가 불길하게 몇 번이나 울렸다.

티엘이 매달린 나무는 단단하게 고정된 판자가 아니라 단순히 배가 부서지면서 반쯤 뒤틀린 목재였다.

언제 못이 빠져 다시 추락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몸을 끌어올리거나, 옆의 다른 나무에 매달릴 힘은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부들부들 경련하는 팔은 더이상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여력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빼면 떨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도······, 도와줘요······!"

틀렸다.

무리하게 배를 움직이기 위해 일으킨 격렬한 파도소리에 묻혀 자신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희미한 목소리였다.

더군다나 메이트리아크가 발푸르기스의 공격을 막아내며 일어나는 격렬한 마력폭풍이 온 바다를 뒤흔들어, 더이상 잘 들리지도 않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신경써줄 상황도 아니었다.

매 순간 사람 키를 훌쩍 넘길 커다란 파도가 주위를 휩쓸어오며 한 순간 배가 격하게 흔들리고, 그 서슬에 못 하나가 빠져 티엘의 몸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행히도 뾰족한 단면에 질긴 제복의 옷소매가 걸려 놓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한 번만 그런 파도를 더 맞으면 그걸로 끝이다.

'이걸로 끝일까······.'

하지만 정작 죽음을 앞둔 상황이 되자, 이상하게도 미련이 남지 않았다.

도와달라고 소리치고 싶은 생각도, 어느새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얼핏 내려다본 바닷물은 허연 거품이 미친듯이 끓어오르며 격렬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부서진 배의 파편들이 거칠게 휘몰아치고있어, 자칫 빠지기라도 했다간 뼛조각 하나 남지 못할 듯 했다.

그런데도 도무지 위기감이 들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귀찮게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아니,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

요 며칠간, 무엇보다도 그녀를 힘들게 해온 문제 때문이었으니까.

한 사람에게 부정당한 것 만으로도 살아갈 의지를 잃고 만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 어처구니 없는 성격이다.

처음부터 그의 상냥함에 기대기만 했던 주제에, 무엇 하나 건네주지 못한 주제에, 이제와서 버림받았다고 아파하는, 참으로 뻔뻔한 태도이지 않은가.

질려버린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이 목숨을 던져 그를, 그리고 목숨을 버리려는 메이트리아크를 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대로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과, 점점 손끝에서 미끄러져 사라지는 기력 사이에서 지쳐가던 티엘은 이내 손에 힘을 풀었다.

잠시 멈춰있던 하늘이 다시 멀어지고, 파도소리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티엘은 눈을 꼭 감으며 문득 떠오르는 누군가의 이름을 지우고, 바람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갑자기 티엘을 부정하듯, 한 순간 모두 멈춰서고 말았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작가의말

오늘도 티엘은 땅을 파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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