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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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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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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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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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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25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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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쪽

8장-미해迷海 (8)

DUMMY

뜻밖의 목소리에 눈이 띄였다.

스스로 판자를 놓아버렸던 손이, 부서진 판자 틈을 통해 억지로 몸을 꺼낸 나셀의 손에 잡혀있었다.

천천히 눈을 들어올려, 자신을 붙든 사람을 확인한 티엘은 순간 멍해진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그 고운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너, 왜 아직 여기에 있는거야? 대피 안하고 뭐 하고 있-"

"너야말로, 방금 왜 손을 놓아버린건데?"

티엘을 내려다보는 나셀의 얼굴도 평소와는 달리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기 목숨의 무게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남을 걱정······. 아니다. 일단 도와줄테니까 우선 올라와. 이야기는 그 다음이야."

티엘은 흐릿해진 눈을 찡그렸다.

나셀이 버텨선 판자 역시 커다란 균열이 가,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조금씩 판자가 벌어지고 있었다.

얼마 못 가 나셀이 있는 곳도 무너질 가능성이 너무나 높았다.

"이러다 너도 떨어져. 너라도 빨리 피해!"

"너는 떨어져도 된다는거야?"

"난 이미 마력을 다 써버렸어. 이 상황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고, 내 역할은 이걸로 끝이야. 너랑은 다르잖아. 서펜트들을 달랠 수 있는 사람도, 여차할때 주가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도 너 뿐이야. 나 한 사람보다는, 너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줘. 그게 올바른 일이야."

차가운 목소리는 스스로의 목숨까지 냉정하게 재단해, 그 가치를 매기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판단에서 가장 먼저 잘라버리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까지 생각해보면 오히려 섬뜩할 정도의 냉정함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가치를 그저 목숨의 수로만 세는 비정한 판단을 들은 나셀은 당연하게도 더욱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손에서 미끄러지려는 티엘의 손을 꽉 움켜쥐며 뜨거운 일갈이 터져나왔다.

"그런 말 듣는다고 물러나줄 것 같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널 희생하고 싶은 생각따위는 없어!"

놀랍게도 인형처럼 축 늘어져있던 티엘이 점차 끌려올라가기 시작했다.

평소에 따로 단련한 것도 아닌 나셀의 근력으로는 무리한 일이다. 조금 놀라워하던 티엘은 곧 나셀이 작은 소리로 무언가를 빠르게 중얼거리는 것을 눈치챘다.

주문과 달리, 주가는 정해진 방향성이 없다.

그 자신의 힘을 강하게 만들거나, 혹은 티엘을 떠오르게 만들거나, '티엘을 끌어올리고 싶다'는 일념으로 부르는 주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이루어준다.

낮고 잔잔한 노래를 듣던 티엘은 한층 더 어두워진 얼굴로 발 아래 끓어오르는 바다를 내려보았다.

'내 곁에 머무를수록 두렵다면, 더이상 내 마음을 흔들지 마. 제발, 더이상 아지랑이를 잡으려 발버둥치고 싶지 않아······!'

지금 저 필사적인 얼굴이 가식이라면, 단순히 티엘을 위해 뒤집어쓴 가면이라면, 그런 그의 얼굴을 더이상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셀은 기어이 홀로 티엘을 배 안으로 끌어올리고 나서야 헉헉대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저 노래하는 것만으로도 대량의 체력을 소모하는 주가를 부르며 사람 한 사람을 끌어올렸으니 지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새 땀으로 젖어버린 머리를 휙 쓸어넘긴 나셀은 바닥에 누운채로 헐떡이며 눈을 돌렸다.

끌어올려진 티엘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눈을 피하고 있었다.

지금 몸을 적신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의 피로감이 나셀의 심장을 눌렀다.

"요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너 배에 오른 뒤로 쭉 이상했어. 내가 뭔가 잘못한게 있다면 말을 해달라고."

조금은 투정을 부리는 듯, 조금은 탄식을 삼키는 듯, 무어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 볼멘 소리로 흘러나왔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어?"

"배에 오른 뒤 우리가 제대로 얼굴 마주한게 오늘이 처음인거, 알아? 다섯 척이나 된다고 해도 결국 좁아터진 배 안이야. 피하려고 해도 결국 마주치게 돼. 그런데 그 때마다 날 피했지?"

나셀의 목소리는 상당히 격앙되어 있었다.

무엇때문에 저렇게 화를 내는 걸까.

정말, 티엘 자신 때문인걸까.

"처음에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걸까,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식으로 고민은 아닌 것 같은데, 내 말이 틀려?"

"평소랑 똑같네. 하하······."

씁쓸하게 웃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머리 위에서는 아직도 급하게 달리는 소리나 마력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있었기에, 그 부자연스러운 침묵은 한결 더 무겁게 두 사람을 짓눌렀다.

말해도 될까.

이대로라면, 거짓으로나마 이제까지처럼 지낼 수 있다.

하지만,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이상 이전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놓아주는게 낫다.

망설이던 티엘은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가까스로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굳게 닫혔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렇게 무리할 거 없어."

"······무리?"

"이젠 억지로 웃을 필요 없어. 난 괜찮아. 그러니까······."

중언부언하며 말을 흐리던 티엘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더이상 도망칠 수는 없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타이르기 위한 작은 의식이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며 느껴지는 쓰라린 통증을 낙인삼아, 모른척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기어이 제 자리로 되돌려놓는다.

싫다고 울며 거절하는 심장조차 억누르며 돌이킬 수 없도록 쐐기를 박는다.

"미안해. 너와 아드란이 나누던 대화, 들어버렸어."

나셀의 눈이 조금 흐려졌다.


창고 구석에서 아드란과 이야기를 하던 도중 미세하게 들렸던 발소리, 그리고 아드란이 희미하게 느꼈다던 마력의 잔향.

혹시 모를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아드란이 경고했던 대로였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나셀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티엘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티엘은 그를 돌아보는 일 없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갑판 위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깊어봐야 2층, 어쩌면 한 층만 올라가도 바로 갑판으로 닿을것이다.

일단 올라가기만 한다면, 다음에 할 일도 이미 정해져있다.

칼라가스의 완전현현이라면 충분히 시간을 끌고, 동시에 바람과 파도를 일으켜 선단을 먼 바다까지 보내줄 수 있으리라.

남은 생명력을 모두 태워버린다면, 적어도 칼라가스가 마령으로 전락해버릴 일도 없을 것이다.

그거면 됐다.

충분하다.

"걱정 마. 덕분에 쉬면서 마력도 조금 회복했어. 단장님한테 가세하면, 이 배 정도는 지킬 수 있을거야."

계단 앞에서 서 돌아보는 티엘의 옆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전에 없을 정도로 화사하고 밝은, 마치 지금 이 순간이 자신에게 있어 최고의 순간이라는 듯한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러나 그 밝은 얼굴은 오히려 지독한 슬픔을 머금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유리가면으로 상처를 덮어봐야 의미가 없다는 것을, 티엘은 과연 알고있을까.

"잘······, 지내······."

마지막 인사를 남긴 티엘은 흐트러지려는 숨소리를 숨기며, 매정해보일 정도로 망설임없는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억지로 틀어막은 심장은 아직까지도 미련을 다 버리지 못했던 것일까.

기세좋게 내딛은 첫발을 끝으로, 그 다음 걸음은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뭐야, 나.'

쓴웃음이 나왔다.

겨우 한 걸음뿐인 각오였나? 겨우 한 걸음뿐인 용기였나?

지금도 배는 시시각각 부서지고 있었다.

마력이 타는 소리가 파도를 넘어 들리고, 전투의 충격이 때때로 주변을 뒤흔들었다.

등 뒤로 넘긴 활시위조차 일대를 휩쓰는 마력에 반응해 웅웅 울었다.

마안을 개방한 메이트리아크는 오 분도 버티기 어렵다.

당장이라도 올라가지 않으면, 지나치게 생명력을 소모해버린 메이트리아크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서버린다.

그러나 끝없는 망설임이 그녀의 몸을, 마음을, 너무나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 미련은······.

'이럴 줄 알았더라면, 조금만 솔직해져볼걸 그랬지? 아······. 이젠, 상관 없으려나.'

이 미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텐데.

안타까웠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불티가 되어 눈앞을 스쳐갔다.

즐겁게 이야기하던 순간들, 그의 노래를 들으며 웃던 날들, 함께 했던 이야기들, 모두가 혼자만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아니, 얼마 못가 불살라버릴 생명이니 아무 것도 남지 않으리라.

툭.

턱끝에 방울진 무언가가 떨어졌다.

가슴이 아팠다.

마법의 후유증과는 다른,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기묘한 아픔이었다.

'멈추면 안돼.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움직여. 멈추지 마.'

끝없는 채찍질에 발목을 잡고있던 미련이라는 이름의 자신이 점점 부서져갔다.

하지만, 다시 한 발을 내딛기에는 이미 망설임이 너무 길었다.

살아있는 따뜻한 손길이 그녀를 따라잡아, 다시 나아가려는 걸음을 막았으니까.

"올라가서 뭘 할 생각이야?"

나셀에게는 낯설게만 느껴지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의 손에 잡힌 손목도 부서질 것처럼 아파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평소 상냥하고 따뜻하기만 했던 나셀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무심결에 들었다.

티엘은 입술만 소리없이 움직여 '놔'라는 한 마디를 뱉었다.

그러나 나셀은 손에 힘을 더하며 티엘의 바람을 무시했다.

"돌아올 수 있는거야?"

"놔."

"이스티엘!"

"놔!"

거칠게 손을 뿌리치며 싸늘한 냉기가 주위를 휘감았다.

물에 젖은 나무판자들이 얼어 뒤틀리며 끔찍한 소리와 함께 부스러졌고, 아직 물기가 뚝뚝 떨어지던 두 사람의 옷 역시 단단하게 얼어붙으며 버석거리는 듣기싫은 소리를 울렸다.

그러나 이미 온기가 사라져버릴 정도로 차갑게 식은 나셀의 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비틀어도, 잡아채도, 대답을 듣기 전엔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끝없이 따라붙었다.

"놓아 줘······."

울먹이는듯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뿌리치려고만 했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근력을 강화해도 좋고, 단순히 마력으로 밀어내도 충분하다.

독하게 마음을 먹는다면, 자신의 손목을 잘라버리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목숨을 버리려는 판국에, 팔 하나 정도가 무슨 대수일까.

하지만 티엘은, 마치 말려달라는 것처럼 맥없이 그 한 마디만을 반복했다.

"네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단단히 잡혀있던 손목이 자유롭게 풀려났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는 것보다 먼저, 나셀의 두 팔이 티엘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안았다.

다시는 느껴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온기가 단숨에 등을 타고 심장까지 미쳤다.

"어째······서?"

"언제까지 바보처럼 굴 생각이야. 진심으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 바보가 어디있겠어."

"하지만-!"

"이럴때는 정말 바보같다니까. 곤란하잖아, 정말."

갑작스러운 한기로 인해 하얗게 물든 한숨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티엘은 천천히 나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애정을 담아 티엘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내가 무서운거······아니었어······?"

"처음 만날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알잖아. 그리고 설령 그런 말을 들었다면 나한테 화를 내야지, 왜 혼자 앓다가 멋대로 스스로를 내던지는 건데, 이 바보가."

"······바보라는 말 그만 해."

"그럼 뭐라고 할까? 화를 내야 할 상대조차 모르고, 책망할 사람조차 모르는 바보를."

나셀은 만지면 지문이 찍혀버리는 금 세공품을 어루만지는듯 조심스럽게 티엘을 돌려세웠다.

눈가가 조금 붉어진 티엘이 아직도 불안한 얼굴로 나셀을 올려보고 있었다.

안타까운 심정을 담은 손길이 조심스럽게 티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해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혼자서만 힘들어하지 마.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지 마. 네가 슬퍼하면 같이 슬퍼할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걸 잊지 말아줘."

부드러운 손길로 티엘의 머리칼을 정리하던 나셀은 몸을 숙여 티엘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이것도 주가의 힘일까.

온기가 전신에 부드럽게 스며들며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던 추위가 사라졌다.

바람이 드나들던 가슴의 통증도 어느새 가라앉았다.

그동안, 그토록 티엘을 괴롭게 해온 아픔이 눈 녹듯 사라져갔다.

티엘은 팔을 들어 나셀을 꼭 안았다.

이 사람은, 너무 상냥하다.

그 상냥함에 자신도 모르게 기대게 되버릴 정도로.

매몰차게 거절하리라 다짐하던 마음조차, 녹아버릴 정도로.

"있잖아, 그거 알아? 넌 너무 친절한 녀석이라는 거."

언제까지라도 이렇게 서로의 체온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포옹은 짧았다.

살짝 나셀을 밀어내 그의 품에서 빠젼온 티엘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고개를 숙여 얼굴에 떠오른 웃음을 감췄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 그러니까 잠깐 다녀올게."

"다녀'온다'는 말, 꼭 지켜."

티엘은 대답하듯 활을 치켜들며 빠르게 계단 위로 달려갔다.

몸을 누르던 피로는 여전하고, 한 번 바닥까지 퍼냈던 마력 역시 아직은 부족했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이상할 정도로 몸에 힘이 넘쳤다.

한 걸음을 딛을 때마다 새로운 피와 활력이 솟아나듯, 점점 더 빠르고 경쾌한 걸음으로 갑판에 오른 티엘은 이내 분주하게 움직이며 미처 다 막아내지 못한 발푸르기스의 마력을 방어하던 리아를 발견했다.

"티엘? 다행이야. 갑자기 안보여서 걱정했어."

티엘은 빙그레 웃었다. 발판이 부서져서 떨어졌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보다, 상황은요?"

"안좋아. 폭풍우에 배들이 엉키면서 배를 빼는게 어려워. 급한대로 유리안 주교랑 샤를렌 사제가 단장님을 지원하고 있지만······."

'뇌우의 인도자' 유리안, 그리고 '흰 천칭'의 샤를렌. 함께 온 백마법사 가운데 가장 강력한 두 사람의 이름이다.

티엘은 초조한 눈을 들어 격전중인 세 사람과 그 뒤의 발푸르기스를 살폈다.

처음에는 메이트리아크 혼자서 시간을 끌려 했던 것이, 지금은 이미 세 명의 마법사가 붙어서야 가까스로 버텨내는 판국이었다.

아니, 그마저도 조금씩 방어측이 밀려나고 있었다.

방어에 능한 라시엘의 사제가 쳐둔 강력한 방어결계 너머의 바다는 말 그대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샤를렌은 산더미같은 해일이 밀어닥칠 때마다 턱이 부서져라 이를 악물며 악을 쓰고 있었고, 유리안과 메이트리아크는 그런 샤를렌을 지키기 위해 상대조차 되지 않는 발푸르기스에게 끝없이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을 한층 더 악화시키는 것은 파도 아래에서 일렁이는 희끄무레한 형체들이었다.

오랜 세월 소금기에 씻겨 새하얗게 탈색된 뼛조각들.

물론 깊고 깊은 대양 한가운데서 갑자기 나타난 그 뼈들이 진짜 희생자의 것일 가능성은 낮다.

그것은 아마도 발푸르기스의 속성, '불멸의 불꽃'의 영향으로 구현된 망자의 기억이었을 것이다.

이피안의 땅으로 떠나지 못한 채 이 땅에 묶인 사령(死靈)들을 다루는 것은 금기라고 하지만, 애초에 발푸르기스가 의도적으로 그들을 불러 일으켰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세 사람을 건너뛰어 배에 남아있는 사람들마저 노리고 있다는 것 뿐.

"하악!"

식은땀을 흘리며 은사를 조종하던 리아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무릎을 꿇었다.

"리아, 괜찮아요? 더이상은 위험해요. 잠시 쉬어야······."

무리하게 생령의 마력을 끌어올리다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지금처럼 강한 마력에 오랫동안 노출되며 생령을 장시간 부리면 일종의 과부하가 일어난다.

그것은 마법사 뿐만 아니라 생령도 마찬가지고, 그러다 어느 선을 넘어서면 급격하게 영체가 역류해 생령이 계약자를 침식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육체를 빼앗긴 마법사는 마령이 되어, 동료들의 손으로 사살할 수밖에 없다.

하얗게 질린채 빠르게 달려온 아드란은 재빨리 품에서 마력 중화제가 담긴 약병을 꺼냈다.

"이거 먹어, 빨리! 너 생령에게 먹히기만 해봐!"

"우리 나티······, 무시하지 말아줬음 하는데? 크읍, 그리고 지금 상황에선 뭘 어째도 위험한 일 뿐이라고. 곧 다들 한계에 부딪힐거야."

파리한 얼굴로 이마를 훔치던 리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배에 오른 마법사들의 마력량은 대부분 비슷한 수준이었고, 리아가 나가떨어진 이상 다른 사람이라고 상황이 좋을리 없었다.

부상자들을 돌보던 마이제 사제는 이미 반쯤 기절한 상태에서 반사적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을 뿐이었고 소르위의 경우에는 마력이 완전히 고갈되어 아예 마력조차 두르지 못한 검을 휘둘러 배에 얽힌 파편들을 후려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방법이라면 아직 남아있어요."

티엘은 어깨에 걸었던 활을 다시 손에 쥐었다.

그러나 리아는 이미 텅 비어있는 별의 서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이미 다 써버리지 않았느냐는 투였다.

"네. 별의 서는 이미 다 썼어요. 하지만······, 칼라가스에겐 아직 한 번의 숨결이 남아있어요."

조금 전의 일격에서 소모한 것은 별의 서에 저장해둔 것.

아직 칼라가스 본체가 쓸 수 있는 한 번의 숨결은 온존해둔 상태다.

물론 상황은 아까에 비할 바가 못된다.

이미 적은 방심을 버린채 압도적인 힘으로 이쪽을 찍어누르고 있는 반면, 티엘을 보조해줄 수 있는 메이트리아크나 올로비스도 소모될대로 소모된 상태다.

거기에 티엘 자신의 마력도 얼마 없다.

그러나 한없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형세를 뒤집을 수 있는 것은 거대한 기적을 일으킨다는 대이적마법, 칼라가스의 숨결 뿐이다.

"성공률은-"

"아, 됐다. 그거 들어봐야 속만 타지. 어차피 그거말고 방법 없지? 그럼 뭘 기다려. 하자고."

아드란은 지친 얼굴로도 제법 멋지게 웃어보였다.

"내 마력 전부 받아가. 저 소리만 질러대는 얼간이놈 면상을 멋지게 구겨주라고. 어이, 올로비스!"

"열린 귀 있다. 허락된 동의가 나를 이끌어. 가자."

초췌해진 올로비스도 씩 웃으며 티엘을 따라 나설 기세였다.

그러나 티엘은 고개를 저으며 올로비스를 막아세웠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올로비스도 제게 마력을 나눠주시는 쪽으로 부탁드릴게요."

"어째서?"

"지금 상황에선 아까처럼 폭풍을 방패삼아도 금새 요격당하겠죠. 모자란 사거리는, 제가 선풍의 질주로 직접 이동해서 충당할거에요."

당연하게도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스스로 발푸르기스의 사거리 안으로 들어간다는 위험천만한 이야기였으니까.

이대로 다 죽는다고는 해도 직접 사지로 걸어들어가겠다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하지만 정작 티엘은 밝게 웃으며 자신있게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걱정 마세요. 오늘은 죽지 않아요. 분명히."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거야?"

"후훗, 비밀이에요. 그저 한 번만 믿어주시면 안될까요?"

결국 이만 바득바득 갈던 아드란쪽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부드럽게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 말하던 티엘은 티엘은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는 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까 심장석으로 추정되는 곳은 확실히 소멸했습니다. 이스티엘씨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심장석을 제대로 찾지 못한 제 책임이에요."

"이제와서 그런걸 따질 생각은 없어요. 어디를 노리면 될까요?"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윤은 다시 소매를 걷어올렸다.

처음 그가 피로 그렸던 문장 주위의 피부가 역류한 마력으로 새카맣게 타들어간 것이 그대로 보였다.

하지만 윤은 그런 몰골을 하고서도 다시 세 번째로 발푸르기스에게 손끝을 향했다.

그 직후, 그의 마지막 한쪽 눈에서 탁한 혈루가 끈적하게 흘러나오다, 이내 끔찍한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핏방울을 튀겼다.

"크어어억!"

"사제님······!"

"지, 지금은, 크윽, 사소한······, 사소한 일입니다. 하, 하하······. 그, 그보다 노릴 곳은 다,다시 두 군데, 두 군데에요. 하, 하나는 십자가. 중심을 뚜, 뚫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체를 하, 한번에 없애야 할지도 모,모릅니다. 그, 그리고 나머지 한, 한 곳은 그 위. 어, 어째서인지 모르게, 하늘 위, 위에 마력 반응이 있, 있어요."

두 눈을 모두 잃은 사제는, 그런 얼굴로도 애써 웃어보였다.

"미, 미안해요. 제가 보, 볼 수 있었던 건, 그게 저,전부입니다."

"······감사합니다. 절대로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아, 아이넬라의, 가, 가호를."

윤은 밝게 웃는 얼굴로 리아의 부축을 받아 마이제에게 치료를 받으러 떠났다.

남아있던 두 사람은 즉시 티엘의 등 뒤에 나란히 앉아 마력을 보낼 준비를 했다.

본래라면 마력이 충돌할 것을 우려해 한 사람씩 천천히 마력을 보내는 것이 맞지만, 언제 방어가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티엘의 주장으로 무리한 짓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일차적으로 아드란이 올로비스의 마력을 받아들이며, 다시 자신의 마력을 티엘에게 건넨다.

중간의 아드란이 일종의 거름망이 되어 마력의 반발을 최대한 억눌러줄테지만, 최종적으로 셋이나 되는 전혀 다른 종류의 마력을 몸 안에서 녹여내야 할 티엘의 부담은 아드란에 비할 바가 못된다.

그것을 아는 아드란은 마지막으로 티엘을 향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제길. 무리라 생각되면 바로 그만둘거다. 알았지?"

"네. 시작해주세요."

티엘은 품안의 활을 끌어안으며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드란은 초조한 가슴을 억누르며, 가만히 티엘의 등 가운데 자신의 손을 짚었다.

그와 함께 등으로부터 심장을 향해 아드란의 마력이 밀려들어왔다.

아드란의 고유마력은 드물게도 속성발현이 되지 않은 무속성의 마력이었다.

그가 중간에서 완충작용을 한 것도 딱히 다른 속성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이런 특성 때문이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올로비스로부터 흘러들어온 벼락속성의 마력은 아드란이 상당히 기세를 꺾어놓았는데도 절반 가량의 힘을 온존한채 티엘의 몸 안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겨우 이십 시안 정도만 흘러들어갔을 때 결국 견디다못한 티엘이 기침과 함께 끈적한 핏덩이를 토했다.

"계, 계속 해-쿨럭!"

"야! 뭘 계속해! 그만 하자. 너 이러다 정말 큰일난다고!"

"전 괜찮으니까 계속해, 큭, 계속해 주세요!"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에 물러났던 손이 다시 다가왔다.

잠시 끊어졌던 연결이 이어지며 몸 안을 불태우는 벼락이 다시금 활력을 되찾아갔다.

수천 개의 바늘로 온 몸을 헤집는듯한 격통에 머릿속이 아득해져갔다.

입술을 깨물어도 고통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부서질듯한 몸을 활에 의지하며 그저 버티고 또 버틸 뿐.

악문 이 사이로 피가 흘러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던 티엘은 점차 전신을 갈갈이 찢던 아픔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몸 어딘가가 완전히 고장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누군가가 뭔가 치유술을 걸어준 것일까.

물론 확인할 시간따위는 없다.

몸이 망가졌다 해도 지금 당장 살아남지 않으면 걱정할 의미가 없다.

'진정해. 진정하고, 천천히. 한 번에 시도하지 말고, 조금씩 이끌어, 녹여내. 천천히, 천천히······!'

피범벅이 된 입가를 닦아내는 티엘의 눈이 점점 싸늘하게 가라앉아갔다.

마침내 세 가닥의 마력이 한데 모여 한 덩어리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연결을 유지하면 마지막 화살의 준비가 끝난다.

칼라가스는 티엘이 혼신의 힘으로 정련해낸 마력을 삼키며 다시 그 마력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였다.

팔선, 인간은 본래 다룰 수도 없는, 인간의 이지를 넘어선 수준의 마력.

감히 계측조차 할 수 없는 시원의 마력이 티엘의 지친 몸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가여워라.

순간 티엘에게 흘러들어오던 마력이 엉망으로 엉켰다.

다시 한 웅큼의 핏덩이가 갑판을 적셨다.

간신히 통제해오던 마력이 폭주하며 내상을 일으켰다.

활을 쥔 손이 저려오며 바들바들 떨렸다.

저렇게 독약처럼 귓가로 스며드는 목소리는 이미 알고 있다.

환각계의 속성, 지배의 목소리.

아르비주시에서 만난 아이셀레니처럼, 타인의 생령이나 마력에 개입할 수 있는 마력.

다행히 올로비스나 아드란, 또는 다른 마법사들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인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의 그 목소리는 아마도 티엘 한 사람,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자를 노린 것일지도 몰랐다.

티엘은 마력저항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몸에 마력을 둘렀다.

그러나 적도 이미 그럴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한층 더 날카롭고 무거운 목소리로 티엘의 저항을 어렵지 않게 비집고 들어왔다.

-가엾게도 고통스러워하고 있구나.

-그렇게 아파할 필요는 없단다. 자, 이리로 오렴. 돌아가자.

"크헉! 쿨럭! 쿨럭!"

목소리가 한 번 들려올 때마다 내장이 폭발하는 듯한 격통과 함께 몇 웅큼이나 되는 피가 목으로 역류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티엘은 마령이 들려주는 목소리가 점점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로 변해간다는 것을 눈치챘다.

누구?

그립고 그리운, 그러나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다.

고통으로 얼룩진 눈을 들어올리자 아스라히 먼 곳에 보이던 발푸르기스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대신 쓰러진 티엘에게 한 손을 내밀고있는 갈색 머리의 여인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첼?"

"그래, 나야."

어느새 주위에서 파도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배의 흔들림도 없었다.

폭풍도, 삐걱이는 배도,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다.

계곡 근처에 세워진 아담한 오두막집과 함께 아스트라를 연습하며 나무를 몇 그루쯤 박살내곤 했던 그리운 숲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매일같이 등을 기대고 쉬던 아름드리 나무도, 해질녘이면 아첼이 앉아 졸던 의자도, 함께 더위를 식히던 정자도, 모두 기억하는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펼쳐져있었다.

마치, 이 장소만 시간의 흐름을 빗겨나가 있는 것처럼.

"원, 수행하라고 자리 비워줬더니,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정신까지 놓고있니."

곁에 서 있던 아첼은 빙그레 웃으며, 주저앉아있던 티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 년이나 지났을텐데도, 그녀의 모습은 그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아하하하하······."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의지도, 각오도, 그 모든 것들이 과거라는 달콤한 꿈에 부서질만큼 약했던걸까.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선명한 그리움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것을 본 아첼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몸을 숙여 티엘을 품에 안았다. 익숙한 향기가 티엘을 적셔왔다.

"우리 꼬맹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또 우는거야."

알고 있다.

이것이 거짓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죽은 아첼을 제 손으로 묻고 마을을 떠났던 것은 아직도 조금 전의 일인 양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몸을 감싸는 기괴한 마력도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고, 여전히 몸 안을 감도는 올로비스와 아드란의 마력도 인지할 수 있었다.

아마도 순수한 환각계의 마력이 아닌, 이리저리 뒤섞인 마력으로 인한 꿈인 탓이리라.

하지만 티엘은 이 꿈을 쉽게 거부할 수 없었다.

언제나 바라왔던 꿈, 목숨을 불태워서라도 이루어지길 원했던 소망.

티엘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금 물리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잃어버린 그녀만의 낙원이었다.

"응······. 꽤 긴 이야기가 있어서······. 아첼이 정말 좋아할 이야기인데, 다 해주긴 어려울 것 같아······, 아쉬워졌어."

그러나 티엘은 더이상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곁에는, 끊어버리기엔 너무나 소중한 인연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 숨쉬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라는 이름의 무딘 칼이 끊어내기에는, 너무나 질기고 소중한 인연이다.

티엘은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된 활을 움켜쥐며, 아첼을 겨누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렇게 눈을 들어올린 순간, 어째서인지 자랑스러워하는 아첼과 서로 시선이 마주쳤다.

공교롭게도, 아첼의 얼굴은 티엘이 기억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각도였다.

티엘의 키가 그 시절보다 꽤 큰 탓이었다.

"어리광이 많이 줄었네. 그래도 아직 애는 애구나."

"아첼 앞이니까. 언니한테 어리광부리는 건 동생의 특권이잖아?"

그러나 아첼은 여전히 그녀가 열 세 살 꼬마인 것처럼 걱정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배어나왔다.

나는 이렇게 자랐는데 아첼은 그대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웃음은 슬퍼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편안했고 즐거워보였다.

내가 이렇게 자랐어요, 하고 가슴을 펼 수 있는 웃음이었다.

"꿈이라는게 아쉬워. 이렇게 만나는 거 말이야."

"그렇다면 즐기면 돼."

하지만 그 말과는 반대로, 아첼은 티엘에게서 멀어졌다.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듯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며 춤을 추기도 하고, 때로는 빈 의자에 앉아 따사로운 눈으로 티엘을 바라본다.

마력으로 빚어진 환영이라기보다는, 티엘이 기억하는 아첼의 모습에 더욱 가까운 행동이었다.

"내가 왜 너를 잡아두려 하지 않는지 궁금한거지?"

"조금은."

티엘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푸르기스의 마력에 의한 환상이라면 어떻게든 그녀를 꿈속에 묶어두려 할 터였다.

그러나 지금의 환상-아첼-은 티엘의 발을 잡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여전히 이 꿈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활에 겨눠진 아첼은 의자에 앉은 채로 한가로이 두 무릎을 감싸안았다.

"꿈은 꿈꾸는 자의 것. 마력의 주인이 통제할 생각이 없다면, 환각이나 환영으로 인한 꿈이라 해도 마찬가지야."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아첼의 머리카락이 우아하게 흩날리며 시선을 빼앗아갔다.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은 이내 어깨 위로 쏟아져내렸다.

아첼은 흐트러진 머리칼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다시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하얗고 섬세한 손이 물살을 가르듯,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눈을 가리던 머리칼이 치워지며 아첼의 평온한 눈과 티엘의 흔들리는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리고 그 꿈이란건 결국 기억의 산물이지. 즉, 이렇게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나는, 네가 기억하는대로의 '아첼레란도 라피다멘테'겠지. 아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아첼이라고 할 수 없는 반쪽짜리."

아첼의 손끝에서 가벼운 마력이 일어나 작은 불꽃모양을 만들었다.

불꽃은 산산조각 나며 흩어진 뒤, 펼쳐진 손바닥으로 모여 다시 원래의 모습을 취했다.

손을 쥐어 불꽃을 없애버린 아첼은 다시 고개를 돌려 티엘을 보았다.

티엘은 뭐라 해야할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숙여버렸다.

"미안······해."

한참만에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 한마디 뿐이었다.

아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티엘은 침울하게 신음소리를 냈다.

마음 깊이 덮어두었던 상처들이 하나 둘 일어나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속에 고여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티엘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속마음을 내뱉었다.

"그 날, 아첼을 죽인건 바로 나였어. 내 실수, 내 부주의가 그 비극을 만들어버린거야. 그 날부터 언제나, 아첼에게 사과하고 싶었어. 미안해."

툭, 투둑. 흙바닥에 젖은 자국이 나타났다.

한 방울 한 방울,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죄책감이 흘러넘쳤다.

"아직도······자책하고 있는거야?"

아첼이 굳은 표정을 지으며 물어보았다.

그러나 티엘은 고개를 저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것은 겨우 한 순간 뿐이었다.

애초에 아첼을 애도하기 위한 눈물은 이미 충분할 만큼 흘렸다.

남은 것은 미안함, 그리고 그리움 뿐.

"자책이라기 보다는, 아직 남은 미련일거야. 그것도 이걸로 끝났지만."

티엘은 쓱쓱 눈물을 닦아냈다.

아직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있었지만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이젠 어리기만 한 열 세살짜리 꼬마가 아니었다.

시간은 어느새, 그녀의 상처를 씻겨내고 있었다.

"미안. 하지만 이렇게라도 사과한걸로 만족해, 아첼."

두 마법사의 얼굴에 서로를 쏙 빼닮은 미소가 번졌다.

"생각보다는 많이 자랐구나. 응, 이젠 안심이네."

해맑은 미소였다.

아마 진짜 아첼이 지금의 그녀를 보았더라도 같은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결국 티엘은 활을 내리며 달려가, 아첼의 환영을 끌어안았다.

비록 환영일지라도, 그 포옹은 진짜처럼 따스했다.

하지만 그것은 온기에 취하지 않는, 작별을 뜻하는 인사였다.

"갈게."

"기다리는 사람, 있는거지?"

아첼은 예전처럼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티엘의 이마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좋은 친구를 사귄 것 같네. 네 응석 정도는 잘 받아줄 것 같은걸."

"응. 이젠 아첼에게 기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좋은 녀석이야."

"후후후후, 그럼 이제 울보라고 놀리면 안되려나?"

"이젠 안 우는걸. 그러니까 울보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

"당연히 그래야지. 누가 가르치고 키웠는데?"

티엘은 해맑게 웃는 아첼을 보며 입꼬리를 추어올렸다.

지금의 이별은 슬프지 않아. 그러니, 웃어. 끊임없이 속으로 되뇌는 말이었다.

물론 그래봤자 아첼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아첼은 티엘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조용히 웃었다.

"그런데 아직도 울고싶은 표정인데?"

미련은 미련. 그리움은 그리움.

미련은 사라져도, 남겨진 그리움은 어쩌지 못한다.

그러나 티엘은 굳이 숨길 것도 없이 아첼을 꼬옥 끌어안았다.

"울지만 않으면 돼잖아."

"바보같기는. 무리하지 말라니까."

"응."

가슴이 떨렸다.

그러나 잠시 후, 티엘은 아첼을 가만히 밀어낸 뒤 당당하게 뒤돌아섰다.

한 순간 스쳐가며 본 아첼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잘못 본 것인지, 마치 예상한 대로라고 말하는 듯한 미소였다.

하지만 티엘은 그것을 확인하려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대신 등을 맞대고 서는 듯한 발소리에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었다.

"고마웠어."

"알았으면 천천히 와라, 말썽쟁이야."

"갈게."

"잘 가."



밤을 넘어서 한 조각 별에게

바라건대 이 꿈이 끝이 아니기를

새벽녘을 지키는 그 눈빛에 한없이 기도했네


먼 하늘 수평선, 터오는 새벽 빛

이 바람이 하늘끝에 닿는다면

사그라든 별빛, 위로할 수 있을까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한 걸음을 떼는 순간, 세계를 덮은 환영을 뚫고 한 줄기의 노랫소리가 닿았다.

티엘은 고개를 들어 아득한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노래는 그 곳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영혼의 이정표처럼, 그렇게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점차 걸음이 빨라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간 뒤, 티엘은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갈색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멀어져가던 마법사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뒤돌아서며 잘 가라는 듯 크게 팔을 흔들었다.

거리가 멀어서일까.

무슨 말을 하는 지 잘 들리지는 않았다.

표정 역시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티엘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표정을 지었을지 알 것 같았다.

"걱정 말라니까! 그러니까 웃어!"


불러다오, 바람결에 잊혀진 이름을

덧없이 내린 비 안개를 거두고

흩어진 이름, 돌이켜 숨을 삼키니


안아다오, 긴 세월 거슬러온 마음을

어둔 밤 흰 파도로 물드는 새벽의 때

내리는 이슬, 그리운 품에 잠드니


노래를 들으며 달리는 동안 점점 주위의 환상이 깨지기 시작했다.

본래 환영의 불꽃과 지배의 목소리는 강대한 대정령마저 붙들어맬 수 있는 위험한 조합이다.

게다가 다른 술식이나 운용이 아닌, 단순한 마력량만으로도 폭풍을 일으킬 정도인 발푸르기스의 마력은 가볍게 일으킨 환상조차 철벽의 요새로 뒤바꾸어 버린다.

그러나 그런 적을 노려보는 티엘의 입가에는 이제 실소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 자신은 어떠한 이성도 남아있지 않으면서, 아무리 냉철한 이성이라도 함락시키는 치명적인 맹독이 그의 무기라니, 우습지 않은가.

하물며 지금은, 그 한 점 흔들림 없을 철벽을 뚫고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닿고 있기까지 했다.

그것은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노래였다.

어떤 감정이라 잘라 말할 수 없는, 무수한 마음이 담긴 노래였다.

비록 발푸르기스의 마력을 완전히 걷어내진 못했지만, 적어도 티엘이 현실로 돌아오기 위한 이정표의 역할은 충분히 해 낼수 있었다.

티엘은 환영을 완전히 깨버리고 마침내 절망의 바다로 되돌아왔다.


작가의말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는 동생이로군요 :)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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