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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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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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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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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21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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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쪽

8장-미해迷海 (4)

DUMMY

항구를 떠난지도 어느새 일 주일 정도나 흘렀다.

이미 바다 한복판으로 나와, 어느 방향을 보더라도 육지는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첫 번째 이정표라고 할 수 있는 암초군 역시도 아직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파도도, 바람도 드물게 잔잔하다보니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노을로 물든 수면을 가르는 다섯 척의 배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잔잔한 바다에서도 뱃멀미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조금 창백해진 티엘은 먼 수평선만 바라보며 헛구역질을 하다, 완전히 녹초가 되어 조금 전까지 매달려있던 난간에 등을 기댔다.

다행히 애냐의 마력으로 미약한 마비 주문을 걸어둔 덕에 멀미는 전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그나마도 파도가 심하질 않아 그런거라며 리아가 쯧쯧 혀를 차긴 했지만, 처음 피앙투스를 향하던 배를 타며 죽을 고생을 했던 것에 비하면 눈물이 날 정도로 편안한 상태다.

그저 안색이 조금 창백해진 정도로 그친 것은 충분히 행복한 일이다.

차분히 심호흡을 하던 티엘은 바다로 녹아가는 태양을 향해 몸을 조금 틀었다.


그토록 멀미에 힘겨워하고는 있지만, 바람을 가득 안은 돛이 나란히 펼쳐진 뒤로 온통 붉게 물든 바다의 모습은 좀처럼 눈을 떼기 어려운 장관이다.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육지의 노을도 좋지만,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서로 녹아들며 격렬하게 타오르는 광경은 숨이 막혀올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짭짤한 바닷바람이 머리에 내려앉아 반짝이는 소금결정을 만드는 것조차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로.

뱃멀미만 없었더라면 조금 더 저 풍경을 즐길 수 있었을텐데.

어쩔 수 없는 아쉬움에 조금 쓴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니, 오히려 신경쓰이는건 저쪽이려나.'

머나먼 수평선을 향했던 시선이 조금 가까운 곳으로 움직였다.

붉은 노을을 배경삼아 드리워진 줄지어 늘어선 그림자들은 다름아닌 조사선단의 선수상들이었다.

역광 속에서 보기에는 단순한 얼룩 덩어리일 뿐이지만, 승성하기 전 보았던 그 형태는 흑마법사에게는 조금 거북한 존재였다.

생령과 비슷하게 신의 권속으로 태어낫으나 그 근원은 정 반대인 아이넬라에 닿아있는 자들, 천사.

더군다나 배를 수호하는 다섯 천사들은 이름없는 평범한 천사들이 아니었다.

이마에 새겨진 이사드와 그 손에 들린 물건들로 보아, 여신이 직접 창조했다는 다섯 대천사를 나타낸 조각상이었다.

성창을 비스듬히 세워든 대천사장 티르비엘을 위시하여 거울을 받쳐든 미유시엘, 하늘거리는 긴 천을 휘감은 사라엘.

그 뒤로 가늘고 긴 양손검을 세워쥔 아즈미엘과, 방패와 깃털을 엇갈려 들고있는 라시엘까지.

심지어 그것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닌, 각 대천사들의 주교급 이상 사제들이 직접 축성한 강력한 성물이었다.

그러나 천사들의 얼굴은 조금 섬뜩할 정도로 딱딱한 무표정이었고, 덕분에 노을에 젖은 그들의 표정은 조금은 무섭고 잔혹하게 다가왔다.

마치 생령, 엘드리안의 권속들과 가까이 지내는 흑마법사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것처럼.

티엘은 그 엄격해보이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매서운 얼굴을 보면서도 자애롭다는 말을 믿기에는, 티엘의 신앙심은 그리 깊지 않았다.

휘이익-!

그 때 문득 옆쪽 배의 갑판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옆 배에 타고있던 리아였다.

잠시 파도를 가늠하던 리아는 카르나의 사슬을 뻗어 두 배 사이를 엮었다.

쉽사리 끊어지지 않는 실로 만든 가교는 겨우 두 뼘 정도의 넓이밖에 되지 않았지만, 리아는 겁도 없이 경쾌한 달음박질로 배 사이의 허공을 내달렸다.

거미줄을 타고 나무 사이를 건너는 거미처럼 순식간에 티엘 옆으로 날아든 리아는 갑판 위로 폴짝 뛰어내리며 손을 뻗어 티엘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또 혼자서 구질구질하게 뭐하고 있어?"

"흐, 흔들지 마세요······!"

"나 참, 수시로 벽이나 천장으로 날아다니는 녀석이 뱃멀미라니, 우습지도 않아요. 나스도 좋은 기회를 놓치네. 이럴 때 딱 나타나서 찐하게 안아주면 점수 딸텐데."

"그거 언제까지 우려먹을 생각인지 궁금하네요."

지금 두 사람이 타고있는 배, '황금 창날'은 조사선단의 기함 역할을 하고 있었고, 메이트리아크나 나셀같은 중요 인사들은 당연히 이 배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니 티엘이 기함에 배치되어있다는 것을 들은 리아가 그걸로 얼마나 놀려먹었는지는 이미 셀 수조차 없다.

티엘의 반응이 시큰둥해진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재미없는 반응에 실망한 리아는 티엘을 놓아주며 조금 전 티엘이 그랬던 것처럼 난간에 몸을 기댔다.

"천사라. 우리랑 별로 안맞는 것 같은데. 말하자면 악마과잖아, 우리는?"

"제발, 리아. 여기 우리만 있는거 아니에요."

단순한 농담에 괜히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뜨끔한 리아가 슬쩍 돌아보니 우연히 조금 떨어진 곳으로 지나가던 사제 한 사람이 조금 불편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정식으로 성품성사를 치르지 않은 준사제였다.

물론 진지하게 적의를 드러내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리아가 악마 운운하는 순간 그 눈매가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었다.

꼭 아이넬라의 준비자들 같은 과격파가 아니더라도, 흑마법사를 꺼리고 혐오하는 백마법사는 있다.

무신경하게 흘린 말 한마디가 소소한 말썽의 씨앗이 될 가능성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고, 그제서야 사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멀어져갔다.

"얘는, 미리 좀 알려주지 그랬어."

"이 배에 티르비엘의 대사제가 있는거 아시잖아요. 괜한 마찰은 피하는게 좋아요."

"······나, 나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의심으로 가득찬 눈이 리아의 양심을 찔렀다.

스스로 감각을 차단해 억누른다고 해도 멀미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티엘이다.

그런 그녀에게 평소만큼의 너그러움은 기대할 수 없었다.

따끔거리는 시선을 피하려 배시시 웃어봐도 별 효과는 없었다.

"오늘도 사고의 원인이었냐?"

순간 쩔쩔매던 리아의 머리에 주먹이 가볍게 내려꽂혔다.

아프다며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숙이는 리아의 등 뒤로, 난간에 매달린 채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있는 올로비스의 모습이 나타났다.

맨손으로 뱃전을 기어올라온 올로비스는 가벼운 반동으로 난간을 휙 넘어 갑판 위에 올라섰다.

얼굴에 찰싹 달라붙은 더벅머리를 대강 쥐어짠 모습이 어딘지 비맞은 강아지를 연상시켜 조금 우스운 꼴이었다.

엄살을 부리며 끙끙 앓던 리아는 눈을 흘기며 입을 쭉 내밀었다.

"로비! 너 좀 전까지 4번선에 있었잖아? 여기 어떻게 왔어?"

"너도 동행 상태에 있었지."

"나야 카르나의 사슬로 넘어왔지만 넌 그런것도 없잖아?"

"다른 수 없지. 건넜다, 바다."

검은 가지에서 파견온 기사들 중 아드란과 올로비스는 배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단이 없었다.

메이트리아크는 공간계 마력으로 단거리 이동주문을 쓸 줄 알고, 소르위도 물의 속성을 지닌 생령을 통해 임시 통로를 만들 수 있다.

티엘의 선풍이 질주는 발동 자체에 별다른 속성제한이 없지만, 애석하게도 체계적인 이론보다는 감으로 사용하는 주문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주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만일에 대비해 메이트리아크가 각 단원들에게 단거리 이동 주문을 새긴 일회성 영장을 지급하긴 했지만, 그걸 아무때나 써버릴 만큼 무책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해도 바다에 뛰어내려 범선을 기어오르는 식으로 넘어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올로비스도 어지간히나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작 물살을 가른 올로비스는 지친 기색도 없이 양 어깨를 풀고 있었다.

아직 만족할만큼 움직이지 못한 기색이었다.

"티엘 괴로운 상황은 멈춤이 좋아보이는데. 아니면 내 대련에 상대할래?"

"괴롭힌 적은 없······. 아니, 조금밖에 안됄······걸?"

가볍게 툴툴거리는 소리가 구차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 쫑알거리던 소리도 올로비스가 눈에 힘을 주자 뚝 그쳤다.

리아는 카르나의 사슬을 뿌려 다섯 척의 배에 가교를 만들어둔 뒤 원래 자신이 있던 배 안으로 쏙 사라졌다.

짐짓 엄한 눈으로 리아를 지켜보던 올로비스는 그제서야 티엘의 어깨를 두드리며 피식 웃었다.

"많은 고난을 가지고 있네. 지치면 수면을 가지는게 좋아."

확실히 몸이 힘들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어색한 그의 말투가 유난히 귀에 걸렸다.

본래 올로비스는 리가르트 왕국 출신이었다.

한때는 하급 무관까지 올라 나름대로 안정된 삶을 살았지만, 오랫동안 왕국을 분열시켜온 내전과 암투로 인해 가족들을 잃은 뒤에는 쓸쓸하게 고국을 버렸다고 했다.

그렇게 정처없이 대륙을 떠돌던 끝에 공화국에 발길이 닿은 그는 그 곳에서 까마귀와 가시나무의 성표를 받드는 기사가 되었다.

문득 티엘은 그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갈 곳 없이 떠돌다, 이 바다를 건너 검은 가지의 '뿌리'에 몸을 두지 않았던가.

동질감, 그리고 약간의 장난기가 떠오른 티엘은 배시시 웃으며, 일부러 평소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입을 열었다.

"에 츠펜 나크퉁. 귄데, 올로비스(아직은 괜찮아요. 고마워요)."

티엘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공화국어가 아닌 왕국어였다.

올로비스는 뜻밖에 들은 모국어에 눈을 크게 뜨다, 이내 티엘의 출신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티엘은 고위 귀족, 그것도 국제 무역을 통해 바다의 패자로 군림하는 레가야의 대공가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외국어는 질리도록 배웠으리라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왕국어도 할 줄 알았구나. 능숙한걸."

올로비스도 모처럼 고국의 말로 티엘의 말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배웠으니까요. 복잡한 대화는 자신없지만, 간단한 회화라면 가능해요."

오히려 스무살이 넘은 뒤에야 뒤늦게 공화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올로비스가, 조금 버거워할 뿐 듣기에는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 더 대단할 것이다.

평소에는 조금이라도 말에 익숙해지려 힘겹게나마 공화국어를 쓰던 올로비스였지만, 오래간만에 바다로 나와 들은 고향의 말은 그런 철칙을 조금은 비틀어준 모양이었다.

느긋하게 난간에 기댄 올로비스는 물기가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잔잔하게 웃었다.

"어떻게 보면 너랑 리아는 좀 닮았어. 방식은 달라도 남을 챙기려 드는 모습이 정말 거울같지."

"처음 만났을때도 그랬죠. 제멋대로에 짓궂으면서도, 아무런 의욕도 없던 절 일으키려 애써줬어요."

리아가 인형처럼 앉아있던 티엘을 억지로 끌고나가 옷을 사 주던 장면을 떠올린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스스럼없는 녀석이지. 그 녀석이 불러대는 애칭들, 그 하나하나가 녀석 나름대로의 애정표현이야. 물론 로비라고 부르는건 그만둬줬으면 좋겠지만."

올로비스 뿐만이 아니라, 메이트리아크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사들은 리아에게 제 이름을 듣기 어렵다.

그리고 그 중에는 리아가 붙인 애칭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올로비스나 소르위가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올로비스는 다시 한 번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째서인지 조금 씁쓸한 쓴웃음으로 흐려지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녀석은 다른 사람의 속내를 밝힐 때도 거리낌이 없어. 가령, 당사자가 인지하지 못한 마음이라던가, 아니면 애써 묻어두려는 속내라던가말이야."

"묻어둔 속내라면?"

"이유는 몰라도, 네가 불안해한다는 것 정도는 보여."

티엘은 몇 번 정도 눈을 깜빡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정곡을 찔렸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조금 흘리며 갑자기 난간위로 훌쩍 뛰어 올라섰다.

물론 갑자기 떨어지더라도 도약주문으로 다시 올라올 수 있겠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은 저도 모르게 긴장할만큼 불안정한 자세였다.

그 상태로 뒷짐까지 진 티엘은 천천히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헛딛으리라는 걱정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움직임에 오히려 올로비스가 심장을 졸일 정도였다.

"혹시 제가 겁먹은 티를 냈나요?"

목소리만 듣는다면 저녁에 뭘 먹을지 묻는 것처럼, 지극히 태연하고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하지만 올로비스는 티엘이 등 뒤로 돌린 손을 보며 조금 착잡한 눈빛을 보였다.

손 자체는 등 뒤로 감추었지만, 가늘게 떨리는 옷자락은 다 숨겨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평소보다 조금 더 긴장한 정도일 뿐이었어. 그보다는 네가 항상 뱃전에 붙어있는게 마음에 걸렸지. 멀미때문이라면 차라리 잠들어있는 편이 덜 지칠텐데, 유심히 살펴보니 항상 서쪽 수평선을 살피고 있는 모습이 조금 어색했거든. 아까 리아가 찾아온것도 아마 그것 때문이었을거야. 긴장 풀어준다고 장난부터 친 모양이지만, 이번엔 잘못 짚은 것 같아서 그만 살짝 참견을 해 버렸어."

"이런 곳까지 와서 보살핌을 받는 기분이네요. 하하하, 조금 죄송한데요."

좁은 난간 위에서 재주좋게 균형을 잡으며 몸을 돌린 티엘은 반 조각도 남지 않은 태양을 손아귀에 넣을 듯 한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의 마지막 햇살을 배웅하는 그 손 위로, 홀연히 나타안 백은빛 깃털을 가진 용이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칼라가스는 흔히 하던것처럼 티엘에게 얼굴을 부비며 애정을 표현하는 대신, 조금 오싹할 정도로 정적을 유지하며 수평선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수평선 뒤에 뭐가 있을지 걱정하는건 제가 아니에요. 저로서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읽은 칼라가스의 경고에 나름대로 대비하려는 거죠."

"······언제부터?"

"출항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모아쥔 티엘은 평지에 선 것처럼 자연스럽게 뒷걸음질을 했다.

제법 높은 난간인데도 가뿐하게 착지하는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거친 바닷길에 체력이 깎여나가는 가운데도 싸우기 위한 감각만큼은 예리하게 다듬어져있다.

게다가 천으로 감아 등 뒤에 걸고있어 몰랐을 뿐, 활과 별의 서 역시 몸에서 떼어놓지 않은 것을 뒤늦게 눈치챌 수 있었다.

올로비스는 4번선의 갑판에 놔두고 온 자신의 창을 떠올리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바닷물에 젖는 것을 걱정했다는 것은 변명이다.

아직까지 별다른 사고가 없어 해이해져버렸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메이트리아크가 이 광경을 봤더라면 뭐라고 했을까.

"단장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지?"

"주위에 사람들이 없을 때 마안까지 풀어 살펴보셨지만 별다른 이상은 찾지 못하셨어요. 조용히 아즈미엘의 사제에게도 탐색을 요청했지만 소득은 없었다고 들었고요. 결국 지금으로선 만일에 대비하면서 칼라가스를 통해 조금씩 더듬어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죠."

거기까지 말한 뒤, 어째서인지 조금 미묘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선원들이나 다른 마법사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일단 셋만 알고 있기로 한 이야기지만 올로비스라면 괜찮겠죠?"

"알았어. 이 이야기는 잊어둘게. 대신,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줘. 육안으로 확인하는거라면 내가 대신 해줄수도 있으니까."

올로비스는 손끝에서 작은 바람을 만들어 날려보냈다.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솔페이람의 거친 바람도, 최대한 약하게 짜낸다면 흐르는 땀을 식혀주는 부드러운 미풍이 될 수도 있다.

칼라가스의 날개깃을 살짝 스치고 티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넘긴 바람은 아득한 하늘 끝까지 날아올라 사라져갔다.

"한 가지 물어볼게. 지금 하고싶은 건, 따로 없어?"

"하고 싶은 것?"

"그래. 해야 하는게 아니라 하고싶은 것."

짐짓 무거워졌던 분위기가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으로 뒤바뀌었다.

빙그레 미소짓는 올로비스는 엄지손가락을 꺾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책임감을 느끼는건 좋아. 나쁘진 않지. 하지만, 무엇을 해야하는지, 그 생각에만 끌려다니면 기계나 다름없어. 지치고, 깎여 쓰러지기 쉽지. 그러니 스스로에게 의무를 지울땐, 하나쯤 네가 하고싶은 일을 상으로 끼워줘."

"하지만, 딱히 하고 싶은 일은-"

"있잖아. 일 주일이나 못만났지?"

푸근한 웃음을 남긴 올로비스는 티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준 뒤 리아가 만들어놨던 가교 위로 올라섰다.

"천천히, 길게 생각을 가져 봐. 정돈된 마음 닿으면 움직여. 마음 가는 대로."

다시 서툰 피앙투스 어로 말을 마친 올로비스는 느긋한 걸음으로 자신이 있던 배를 향했다.

좋은 시간 보내라는 듯, 가볍게 손을 흔들며 떠나는 모습이 참 여유로워보였다.

그러나 티엘은 올로비스가 사라진 뒤에도 한참이나 우두커니 갑판에 남아있었다.

'하고 싶은 일······.'

무심결에 움직인 손바닥이 가슴을 덮었다.

힘차게 뛰고있는 심장의 고동.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조용히 마력을 머금은 각인의 숨결.

서로 다른 두 감촉이 제각기 손을 두드렸다.

자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걸까.

배에 오른지도 어느새 일 주일. 그 사이 이런저런 핑계로 나셀과 엇갈려 제대로 얼굴을 대면한 적은 없었다.

만나고 싶은가?

스스로를 향해 던지는 단순한 질문에도 대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차르륵.

난간 너머로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팔 위에 앉아있던 칼라가스는 살짝 날아올라 난간 위로 자리를 옮겼다.

붉은 수면 위로 뾰족한 삼각형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림자는 선단을 경계하듯 느릿한 속도로 몇 번이고 주위를 맴돌았다.

그 수도 조금씩 늘어 이내 다섯 개의 그림자가 불규칙적으로 나열되어 원을 그리고 있었다.

"서펜트······. 곧 엘리칼사이그 근처라는 걸까?"

다행히 아직 서펜트들은 직접적인 적의를 보이지는 않았다.

아직 몇 마리 없을 때 아스트라로 겁을 줘 쫒아보내는 것이 나을까 싶었던 티엘은 우선 실체화하는 것만으로 마력을 소모하는 칼라가스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애냐의 마력을 끌어올려 모습을 숨기며 조용히 활의 시위를 걸었다.

그러나 막 시위를 당기려는 순간, 활시위보다 한결 더 팽팽하게 당겨진 실이 가늘게 떨리는 소리가 갑판 위를 울렸다.

팔현금의 현으로부터 퍼지는 가느다란 음색이었다.

겨울 한복판, 때로는 바닷물도 얼어붙는 강추위 속에서 번식을 위해 경쟁하며 신경이 날카로워진 서펜트들은 때때로 인식 저해 주문조차도 무시하고 이빨을 들이민다.

하지만 제아무리 독기를 품은 서펜트라도 음악소리를 들으면 잠잠해진다는, 의외의 대처법이 있었다.

굳이 군인도, 상병도 아닌 민간인 음유시인을 배에 태운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즉, 나셀의 역할은 서펜트들의 공격성을 잠재워 불필요한 전투를 피하고, 동시에 마법사들의 소모를 줄이는 것이다.

섬세한 손가락이 여덟 가닥의 현으로 솜털처럼 부드럽고 편안한 선율을 짜올렸다.

막 이를 드러내려던 서펜트들 사이에서 위협적인 휘파람 소리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꼿꼿이 치켜세운 머리가 하나둘씩 수면에 잠겨가는 모습을 본 티엘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활 시위를 풀었다.

그리고 다시 난간에 몸을 기대며 고고하게 바다를 떠도는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연속적으로 튕겨진 음이 꼭대기까지 치달았다 여운과 함께 되돌아온 선율 위로, 마침내 티엘이 기다리던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돌아가라, 푸른 요람으로 돌아가라

가혹한 찬 바람이 내려앉은 이 바다에서

드넓은 가슴 헤치고 자유를 꿈꾸는

바람과 물의 아이들이여


드나드는 파도의 아래에 영혼을 맡기고

끓어오르는 하얀 거품에 내일을 머금어

가장 높은 파도를 이고 물살을 이끄는

바람과 물의 아이들이여


은빛의 물방울, 부서지고

쓸쓸한 바람, 흐드러지며

한없는 외로움 여명에 잠든다

천 년을 달려온 끝에, 스러질텐가?



주가는 아니었다.

지난 번 들었던 것처럼, 영혼을 송두리째 삼켜버릴 듯 아름다웠던 신비한 노래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서펜트들은 나셀이 건넨 노랫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선율에 맞춰 휘파람을 부르고, 수면을 두드리다, 하나 둘씩 물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심지어 마지막 서펜트는 답례라도 하듯 물 위로 튀어올라 아름다운 곡예를 보여주며 깊은 바닷속으로 사라져갔다.

"엘리칼사이그-! 엘리칼사이그가 보입니다!"

저 높은 망루에서 엘리칼사이그가 보인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서펜트의 영역에 들어선다는 소리였다.

나셀은 조금 전보다 한결 더 소리높여 연주와 노래를 이어갔다.

티엘은 조금 자리를 옮겨 나셀의 얼굴이 보이는 위치까지 움직였다.

예상대로 나셀은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바람은 잠들고 물은 잊혀지매

그대들이 꿈꿔온 바다는 어디인가.

이름을 버리고 안식을 취하기에는

이 겨울은 길다. 사무치도록.


때를 기다리는 바람이 되어

비를 기다리는 구름이 되어

찬 서리, 잊혀지고

찬 파도, 녹아내리거든


돌아오라. 그대들의 푸르른 심연에서 다시 돌아오라

이토록 끝없는 바다, 자유로이 다시 열리는 날

마지막 한 숨까지 삼키며 끝없이 달릴

바람과 물의 아이들이여


서펜트를 쫓아내거나 억지로 돌려보내려는게 아닌, 서펜트들이 다치지 않길 바라며 노래하는 듯한 얼굴.

말없이 나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티엘은 투명화를 풀고 나셀 곁으로 가고싶다는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나셀과 가까운 곳에 서있는 사제 한 명이 조금 거추장스러웠다.

티르비엘 계열의 백마법사인 주교 유리안.

이 정도 거리에서라면 환각령인 애냐의 마력을 알아차리지는 못할테지만, 고위 마법사인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면 위화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굳이 사제와 얼굴을 마주할 생각이 없었던 티엘은 조금 떨어진 곳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곧 엘리칼사이그 해역에 들어갑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들 하십쇼!"

배 곳곳에 설치된 금속관을 통해 조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갑판이 크게 기울며 다섯 척의 배가 제각기 방향을 바꾸었다.

뱃머리를 나란히 둔 채 달리던 배들이 일사분란하게 돛을 접거나 펼치며 순식간에 일렬로 늘어서고 있었다.

억센 파도에 저항해 방향을 틀며 배를 이루는 나무판들이 삐걱이는 비명을 질렀다.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의 이유는 선체의 양 옆에 흩어져있었다.

'엘리칼사이그(무질서의 노래)'라는 이름 그대로다.

미친듯이 들끓어오르는 파도 사이로, 수면 바로 아래 감춰진 수많은 바위들이 제멋대로 흩뿌려진 채 숨죽이고 있었다.

이 해역에서 배가 지날 수 있는 공간은 매우 좁았다.

조금만 방향을 잘못잡아도 암초 위에 배가 걸리거나, 밑바닥이 크게 파손돼 가라앉는다.

더군다나 때때로 물 아래에서 머리를 내미는 서펜트들이 꼬리로 해수면을 때리며 신경질을 부리는 모습은 꽤나 섬뜩한 광경이었다.

불규칙한 암초로 인해 뒤엉키는 물살, 독 오른 서펜트들이 내는 물소리와 울음소리 등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이름 그대로 혼란스러운 노래가 온 바다를 뒤덮었다.

나셀의 노랫소리가 한순간 묻힐 정도의 소란에 기껏 잠잠해졌던 서펜트들이 조금씩 더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힘 내세요."

나셀과 유리안은 좀더 힘을 쏟아 엘리칼사이그의 소음을 억누르려 했다.

그 사이 배 위로 올라온 마법사들은 각자의 마력으로 파도를 억누르며 조타수를 도와 배의 방향을 틀기 위해 애를 썼다.

억지로 방향을 바꾼 파도가 배의 움직임을 돕기 위해 거칠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히려 마법사들이 부른 파도 덕분에, 그렇잖아도 갈팡질팡하는 물살이 한층 더 격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거칠게 흔들리던 배들이 무언가를 붙잡지 않으면 균형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이대로는······, 너무 흔들······려······.'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진 티엘은 입을 틀어막으며 애냐의 마력에 의지하다, 기어이 도약주문을 응용해 보이지 않는 발판 위에 올라서고 말았다. 그 짧은 시간동안 식은땀이 흥건하게 배어나왔다.

'······티르비엘계의 마법사래도 내겐 별 도움이 안되네······.'

물론 티엘의 멀미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대천사들의 수장인 티르비엘이 관할하는 속성은 얼음과 물, 번개와 바람, 안개, 그리고 폭풍이다.

고대부터 가장 두려운 자연현상으로 손꼽히던 그 힘들은 분명 바다 위에서 무엇보다도 튼튼한 방패였다.

백마법사들은 이를 악물고 조타수들에게 맞춰 마력을 재배열했다.

아직 호흡을 맞춰본 적 없던 이들이 가까스로 교차점을 찾아내며 겨우 적당한 바람과 해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제멋대로 들끓던 파도와 물살이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

열 명이나 되는 준사제가 모두 티르비엘계라면 작은 폭풍 정도는 잠재울 수 있을터였다.

한 번 요령을 잡아내자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익숙해진 그들은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물살을 열어젖혔다.

마침내 다섯 척의 배가 순풍을 맞은 듯 제법 빠른 속도로 암초지대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좌측에서 달려오는 파도를 조심하십시오! 이대로라면 암초에 바닥이 긁힙니다!"

탐색의 주문으로 주위를 살피던 아즈미엘의 사제가 2번선의 갑판에 고함을 내질렀다.

"제가 가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계속 진로를 맡아주십시오!"

2번선의 갑판에서 검은 그림자가 바다 위로 뛰어내렸다.

얇고 긴 검을 뽑아든 그는 바다에 빠지는 대신 수면에 한 손을 짚으며 매끄럽게 멈춰섰다.

검푸른 마력을 머금은 칼날은 반회전하며 수면을 살짝 베어내는 긴 호를 그렸다.

"에기온!"

물 그림자의 소르위, 그 이름의 유래가 된 기사급의 생령 에기온의 마력이 거대한 파도를 일으켰다.

검게 물든 파도는 아슬아슬하게 암초에 닿으려던 2번선 '은거울'호를 밀어젖혔다.

뜻밖에도 사제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어느새 사제들과 제법 친분을 쌓은것일까. 백마법사와 협력이 중요하다고 몇 차례나 강조하던 소르위 다운 모습이었다.

서펜트를 피해 물계단을 만들어 뱃머리 근처까지 올라온 소르위는 여유롭게 타륜을 쥔 조타수에게 다가갔다..

"파도가 생각보다 거칩니다. 이대로 진행하면 되는겁니까?"

"해류 두 개가 맞부딪히는 지역이라 암초가 아니더라도 물살은 개판이죠. 암초지대만 벗어나면 파도도 제법 잠잠해질겁니다."

서펜트같은 대형 해양생물이 다수 군집하는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엘리칼사이그에는 암초가 많아 몸을 숨기고 둥지를 짓기 좋기도 하지만, 두 개의 해류가 뒤섞이며 조경수역이 형성되어 먹을 것이 풍부하다는 점도 작용한다.

서펜트 자체는 나셀이 억제하고 있지만, 꽤 속도가 있는 해류가 충돌하며 물길이 제멋대로 날뛴다는 문제는 남아있는 셈이다.

그러나 조타수의 얼굴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이 해역은 인적이 그리 드문 항로가 아니다.

물길을 다루는 마법사와 합을 맞춰 통과한다면 돌아가는 것에 비해 하루 이상 시간을 앞당길 수 있는 일종의 지름길이다.

상단 소속의 마법사가 아니라 처음은 조금 헤멨다고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손이 맞기 시작했으니 두 번째 해류에 대해서 언급만 해주면 충분히 지나갈 수 있다.

서펜트의 번식철에 지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 서펜트들로부터도 안전을 보장받는 이상 지나치게 긴장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맨 앞에 선 '황금 창날'호부터 점차 속도를 붙이며 이리저리 꼬여있는 물길을 타고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가면 되겠습니까?"

"들어서는 입구쪽 잘 넘겼으니 한동안 크게 위험할 일은 없을겝니다. 아까처럼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파도만 막아주시면 충분해요. 한두 번 다녀본 길도 아니니까."

"그렇습니까? 그럼 암초지대를 빠져나가려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특별한 이상이 없으면 한 시간, 길게 잡아야 한 시간 반 정도. 마법사님들이 물길이랑 바람을 잡아줘서 평소보다 빨라서 편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해두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티엘은 허탈하게 웃으며 머리를 감싸안았다.

한 시간 반이라니, 이런 지독한 흔들림을 그 정도나 버텨야 된다면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2번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갑판을 가로질러 멀어져가는 소르위의 등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티엘은 울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으로 어마어마하게 흔들리는 뱃전에서 눈을 돌렸다.

동료들처럼 배의 움직임을 도와줄 여유는, 이미 티엘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 * *



그로부터 딱 한 시간 뒤.

악몽같은 시간을 건너 마침내 최후미의 5번선까지 암초지대를 빠져나왔다.

나셀은 더이상 주위에 서펜트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천천히 노래를 멈췄다.

무려 한 시간이나 쉬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도 목이 잠기지 않은 것은 평소부터 꾸준히 노래를 불러온 덕분이었다.

그러나 단지 목소리가 쉬거나 잠기지 않았을 뿐, 턱끝에 맺힌 땀방울이나 발갛게 변한 손끝만 보아도 체력적으로는 상당히 무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친 얼굴로 땀을 닦는 나셀의 눈앞으로 문득 한 장의 손수건이 내밀어졌다.

곁에서 나셀의 연주를 증폭시켜주었던 사제, 유리안이었다.

"노래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아뇨, 저보다야 사제님께서 더 고생하셨죠."

유리안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성호를 그렸다.

나이 지긋한 사제의 얼굴 역시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마력으로 한 줌 정도의 물 덩어리를 만들어 가볍게 얼굴을 닦은 사제는 돛을 부풀게 만드는 바람을 향해 돌아섰다.

얼굴에 남아있던 물기를 바람에 말리며 지친 몸에 약간의 활력을 불어넣는다.

"바람이 차네요. 아윌로스는 들어가 쉬는게 좋아요. 앞으로 사흘 정도는 느긋하게 보낼 수 있겠지만, 사람 일이라는게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저는 잠시 바람좀 쐬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사제님도 너무 늦게까지 계시지는 마세요. 감기 걸릴지도 몰라요."

"네, 고마워요."

나셀은 조금 지친 발걸음으로 선실을 향해 들어가버렸다.

티엘은 한참 전부터 애를 태우던 자신의 속내도 모른 채 들어가버리는 나셀을 차마 잡지도 못한 채 속만 태웠다.

따로 약속을 한 것도 아니지만 괜히 나셀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됀 이상, 조용히 나셀의 뒤를 따라 들어가는 것이 간편할 것이다.

그러나 선실쪽으로 발을 떼려는 순간, 티엘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선 유리안이 가볍게 두 팔을 벌렸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얼굴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애냐를 꿰뚫어봤어?'

굳이 갑판에 남아있던 것은 숨어있던 티엘을 눈치챘기 때문이었을까.

티엘은 순순히 투명화를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아셨죠?"

"모습은 감춰도 부딪히는 바람소리는 들린답니다. 힘겨워하는 숨소리도 희미하게 들렸고요."

사제는 어린 딸을 대하듯 푸근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번처럼 두 계열의 마법사가 함께 협동하는 임무에 흑마법사를 혐오하는 사람을 책임자로 불러들일 일은 거의 없겠지만, 이렇게 친근한 반응을 받으니 오히려 티엘쪽이 괜히 위축되는 느낌이었다.

스스럼없이 다가온 유리안은 창백한 티엘의 얼굴을 보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저런, 안색이 안좋아요. 잠시 손을 보여주겠어요?"

조긍 망설이던 손이 쭈뼛쭈뼛 사제의 손을 쥐었다.

티엘의 손을 양 손으로 감싸쥔 유리안은 살짝 눈을 감고 빠르게 기도문을 읇조렸다.

손가락을 따라 따스한 온기가 흘러들어오며 뒤틀리는 것만 같았던 속이 깨끗하게 가라앉았다.

"가, 감사합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한 주 동안 먼 발치에서 지켜보니 멀미로 고생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답니다. 사제들을 너무 어려워하지 말고, 힘들면 언제라도 말해요."

티엘의 손을 놓아준 유리안은 느릿한 발걸음으로 뱃전을 향해 걸어갔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한 분위기에 조금 미련이 남은 눈으로 선실쪽을 곁눈질하던 티엘은 이내 마음을 정리하고 유리안의 뒤를 따랐다.

거친 파도를 피하며 암초군을 빠져나오는 사이, 어느새 해는 바다 밑으로 사라진 뒤였다.

끄트머리만 발갛게 남아있는 서쪽의 수평선을 조금 아쉬운 듯 바라보던 유리안은 티엘이 곁으로 다가오는 소리에 살짝 손가락을 까딱였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미약한 회오리바람이 형성되며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을 차단했다.

마력량이 적은 티엘로서는 부러울 정도로 부드럽고, 여유 넘치는 주문 사용법이다.

"바닷바람은 피부에 별로 좋진 않지요. 이 나이먹은 아줌마라면 몰라도, 라피다멘테처럼 고운 피부는 지금부터 관리해야한답니다."

"······사제님도 그리 늙진 않으셨어요."

빈말에 가까울 정도로 무심한 말투에도 사제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쾌활하게 웃음을 터뜨리던 유리안은 눈을 둥그렇게 뜨는 티엘을 향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후후후후, 그건 기쁘군요. 하지만 신의 뜻에 몸을 바치는 저와, 아직 가슴뛰는 인연이 기다리는 라피다멘테는 다르지 않겠어요? 그 소년, 좋은 사람이더군요. 아마 라피다멘테가 힘들 때, 누구보다도 가까운 곳에서 힘이 되어 줄 사람. 쉽게 만나기 어려운 인연이에요. 솔직히 부러울 정도랍니다."

갑자기 나셀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무엇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리안의 말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동의하는 정도가 아니다.

"너무 사람이 좋은 것도 문제에요."

"그런가요?"

"······분명 나셀이 착하고 상냥하다는건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거에요. 하지만 그 때문에 자기가 위험해질게 뻔한데도 아무렇지 않게 발을 들이미는 바보같은 면도 있어요. 걱정되는건 이쪽도 마찬가지라는걸 알아주질 않는, 그런 바보에요."

푸념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느새 심중에 품고있던 불만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사제의 포근한 분위기에 거리감이 줄어든 탓일까, 아니면 나셀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공감대가 만들어진 탓일까.

사제 역시 이해할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스스로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하지만 슬프게도, 그런 사람들은 비극을 맞는 경우가 많아요.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며 희생하지만, 그로써 사랑하는 이들에게 슬픔을 안겨준다는 것을 미처 모르지요.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런 사람을 지켜주는게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겠지만요."

사제는 조금 말꼬리를 흐렸다.

미묘한 말이었다.

마지막 한 마디에 조금이라도 웃음기가 보였다면 격려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상하게 웃고있던 유리안의 얼굴은 검게 물들어가는 하늘과 비슷할 정도로 어두워져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티엘은 불길한 통보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입술을 살짝 깨물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아직 젊고 앳된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건 알지만······. 그와 함께하는 것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는, 라피다멘테도 어렴풋이 알고 있겠죠."

티엘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밀랍을 빚어 만든 인형처럼,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만큼.

더욱이 티엘의 입을 틀어막은 것은 다름아닌 유리안의 표정이었다.

차라리 경멸하거나, 무심한 얼굴로 뱉은 말이었다면 화는 날지언정 무시해버릴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나이 든 사제는, 이런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미안하고 괴롭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다시 입을 열었다.


작가의말

전 어렸을 땐 차멀미가 상당히 심해서 고역이었죠. 

어째 제 경험중 안좋은 것들만 티엘에게 투영한 듯한 느낌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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