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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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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4
추천수 :
664
글자수 :
2,473,044

작성
19.09.03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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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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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7쪽

9장-유산遺産 (8)

DUMMY

"생명을 찢는 안개, 산제물의 피를 삼키리."

"빙하의 바람, 달을 베어라!"

멀리 빗나간 검을 대신해 비어있던 손이 검은 안개 덩어리를 휘둘렀다.

티엘은 어깨로 상대를 들이밀며 눈보라를 휘감은 단검을 휘둘러 르비아의 주문을 가로막았다.

다시 한 번 마력이 부딪히며 폭풍이 일었다.

순간적인 풍압에 떠밀린 두 사람은 거울상을 그리듯 동시에 떨어지며 다시 거리를 벌렸다.

뒤늦게 불어닥친 후폭풍으로 인해 쌓여있던 눈더미가 어지러이 흩어지고, 하늘과 땅 사이엔 오로지 짙고 옅은 백색의 폭풍만이 가득 차올랐다.

겨우 몇 걸음 떨어졌을 뿐인데도, 순식간에 서로의 모습이 뿌연 장막 너머로 가려지고 말았다.

시야를 가리는 눈은 물과 얼음을 지배하는 용 칼라가스의 수족이나 다름없다.

노골적으로 시야를 가리려는 눈보라에 검을 고쳐쥔 르비아는 검을 뿌리며 순간적으로 마력을 폭발시켰다.

"마현의 꼭두각시."

그의 그림자와 검신에서부터 검은 빛을 띤 무수한 실이 휘리릭 풀려나오며 눈보라를 갈갈이 찢어발겼다.

형체 없는 바람조차도 베어내듯, 순식간에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잠잠해지며 눈 앞을 하얗게 물들이던 눈가루가 조용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팔 바로 아래쪽에서부터 티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티엘이 들고있던 단검과는 전혀 다른, 사람의 키를 넘길 정도로 거대한 대검의 칼날이 눈보라 속에서 둔한 빛을 뿌렸다.

놀랍게도 그 칼날은, 반대편 정면에서 느껴지는 티엘의 기척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부터 뻗어온 것이었다.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칼날은 막거나, 피할 여유조차 남겨두지 않았다.

육중한 칼날이 진흙을 가르듯 그대로 인형의 가슴을 베어갈랐다.

눈보라가 잦아들며 정적이 찾아들었다.

티엘의 손에 들린 검은 조각조각 갈라지며 먼지처럼 부스러지고 있었다.

그 칼자루에는 본래 보석이 박혀있었던 세 개의 구멍이 쓸쓸하게 비어있었다.

그 검은 브론딜이 만들어주었던 단검이었다.

상당량의 마력을 애냐에게 부여해 자신의 그림자를 만들고, 다시 브론딜의 단검에 마력을 담아 얼음으로 검신을 만들었다.

그것도 칼라가스의 마력을 검신이 버텨내지 못할 정도로 무리하게 밀어넣은,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

하지만 몰아치는 티엘은 일그러진 얼굴로 하얗게 질린 입술만 굳게 깨물었다.

레가야의 주인은, 일개 기사의 모든 것을 거는 것 정도로는 닿을 수 없을만큼, 너무나 먼 곳에 있었다.

"그 검, 한 순간만 더 버텨줬더라면 이대로 베어낼 수 있었을테지."

르비아의 손가락이 가슴에 난 상처를 따라 움직였다.

참격이 시작된 옆구리 부근은 깊숙히 찢어져 부서진 인형의 골격계가 살짝 보일 정도였지만, 가슴께에 이르러서는 가늘게 긁힌 생채기 정도만 겨우 남아있었다.

단검의 검신이 무너지며 순간적으로 형성한 마력칼날이 유지되지 못해 흩어진 탓이었다.

같은 공격은 이제 더는 불가능했다.

단검을 소실했을 뿐더러, 벌써 기습도 두 차례나 반복하고 말았다.

더이상 근접할 기회따위 바랄 수 있을리 없었다.

티엘은 르비아의 주위에서 너울거리는 검은 실을 노려보았다.

실을 이루는 것은 몸이 저릿거릴 정도로 짙은 마력이다.

저 실을 휘두르기만 해도 티엘의 접근을 막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더 나아가 티엘을 잘게 베어버리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말 그대로 공방일체의 주문이었다.

새삼스레 상대와의 격차가 뼛속까지 느껴졌다.

생령의 마력을 다루는 데 익숙치 않은 제국식의 흑마법을 익히고서도, 티엘 이상의 숙련도로 그란드리아의 마력을 제어해내고 있다.

힘의 크기도, 기량도, 따라잡기에는 절망적일 정도로 높은 경지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티엘은 다시 도약하며 르비아와의 거리를 벌렸다.

눈밭으로 착지한 그녀의 발치에는 조금 전 바닥에 내려놓았던 아첼의 활이 놓여있었다.

망설임 없는 발이 눈과 함께 활을 허공으로 차올렸다.

르비아는 조금 흐릿해진 눈으로 티엘의 손에 돌아온 활을 바라보았다.

그도 잘 안다.

저 활의 원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것이 티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 때문에 티엘이 다시 활을 당겨쥐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르비아는, 문득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활, 더이상 쏘면 부러질텐데. 괜찮겠느냐?"

티엘은 대답 대신 활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미 상당량의 마력을 소모해버린 인형의 움직임은 처음에 비해 상당히 무뎌져 있었다.

어느 정도 인형의 속도에도 익숙해진 지금이라면, 충분히 그 심장을 꿰뚫을 수 있다.

'아첼.'

단지 스스로를 달래기 위한 위안일 뿐이다.

마음 속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서도, 대답따위는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치 그 순간, 정말로 아첼이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 줄기의 따뜻한 바람이 티엘을 휘감았다.

아첼이 자주 그랬던 것처럼 티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바람은 이내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지만, 그 것만으로도 조금 멍해졌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이피안의 땅에서도 언제나 지켜보고 있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있지. 나, 친구도 많이 생겼어. 걱정해주는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잔뜩 생겼고, 내가 도와준 사람도 생겼고······.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어······.'

부서져가는 활의 겉면이 마른 나무껍질처럼 일어나다 기어이 바스라져 무너졌다.

은빛 장식쇠와 검은 활몸이 메마른 나뭇결처럼 갈라 터졌다.

어느새 티엘의 손에 들려있던 활은 모조리 바스라지고, 그저 응집된 마력으로 새하얗게 달아오른 심지만이 남아 호흡하듯 맥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활은 그 상태로도 영장으로서의 기능만은 그대로 살아남아,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맹렬한 기세로 마력을 삼켜 불태웠다.

이제 더이상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

마지막 한 발의 화살을 어느때보다도 강렬하게 쏘아보내겠다는 듯, 아첼의 활은 마치 또 하나의 태양처럼 눈부신 빛으로 타올랐다.

문득 티엘은 하얀 불꽃으로 이글거리는 활에서 누군가의 온기를 느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젠, 돌려줄게. 너무 늦었지만, 이제는 아첼이 지켜주지 않아도 괜찮아.'

부드럽게 웃은 티엘은 천천히, 처음 활을 쏘았던 날처럼 신중하게 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어느때보다도 진지한 마음을 담아, 활시위에 마지막 아스트라를 매겼다.

"새벽의 창, 사슬을 끊어라!"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시위를 떠난 눈부신 화살은 인형을, 그리고 해묵은 미련을 꿰뚫었다.

파편따위는 없었다.

칼라가스의 숨결, 그 정수를 담은 소멸의 화살은 과거에서 묻어난 얼룩을 깨끗이 지워버리겠다는 듯 단호하고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먼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화살이 시위를 떠난 순간, 간신히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던 아첼의 활 역시 마지막 섬광을 뿌리고는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그리고 마치 낙엽이 지는 것처럼, 손 안에서 조각조각 갈라지며 허망한 잔해가 되었다.

부서진 활의 조각이 떨어지는 소리조차, 쌓여있는 눈더미 사이로 숨어버려 들을 수 없었다.

빛이 사그라든 뒤, 아스트라에 의해 상체의 절반 정도를 내어준 인형은 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몸을 살폈다.

그리고, 고요히 쌓여가는 눈 위로 서서히 무릎을 꿇었다.

"그렇군.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너는 앞으로 나아가갔다는 것이냐. 추억이라는 이름의 꿈속에 잠겨있지는 않겠다는 것이로구나."

이미 환영을 유지할 힘은 잃었는지, 르비아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 하얀 가면같은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인형은 고개를 떨군채로도 잔잔한 목소리로 입을 달싹였다.

티엘은 점차 움직임을 멈춰가는 인형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문득 새하얀 입김을 내뱉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인형은 다 부서져가는 팔을 들어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대체 언제부터 속인 거였죠? 처음부터, 서로 얼굴을 맞댄 첫 순간부터, 난 당신의 장난감이었던 건가요?"

인형은 고개를 저었다.

아스트라가 꿰뚫어, 커다란 구멍이 나 버린 가슴 위를 떨리는 손길이 조용히 덮었다.

마치 심장에 걸고 맹세한다는 것처럼.

"네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믿기지 않겠지? 하지만 네가 내 심장에 활을 노리고 있더라도, 널 아끼고 사랑한 것을 부정하지는 않아. 그래, 지금 이 순간도, 나로서는 기쁜 마음이 드는구나. 예전의 너였다면 끝내 검을 들지 못했을텐데도······, 훌륭하게 벽을 깨뜨렸지. 자랑스러울 정도로구나."

점차 흐려지는 목소리에도, 비웃음을 삼키는 듯한 웃음기는 조금도 없었다.

"대공위를 원한 것도 아니었고, 나 하나의 원한은 그저 묻어둘 수도 있었겠지. 그럼에도 나는 항쟁을 택했다. 너와 서로 칼을 겨누게 될 것을 받아들이며 그 날 대공의 목을 쳤다. 너라면, 지금의 너라면, 아마 그 때의 나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겠지. 스스로의 심장을 억누르며 내 심장을 겨눌 수 있겠지. 슬피 울게 될지라도 서로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위태로운 춤을 추었을테지. 단순한 이야기다. 네가 소중했던 것 이상으로, 내가 바라는 것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얻은 것에, 과연 가치가 있나요?"

"글쎄······. "

뜻밖에도 르비아는 말꼬리를 흐렸다.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할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후회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 역시 그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결국 넌 다시 내 앞에 서게 되겠지. 원하건, 원하지 않건간에, 서로의 성좌를 걸고 전력으로 부딪히게 되겠지. 그 때가 온다면, 오늘 네가 듣지 못했던 것들을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어쩌면 그보다 먼저 서로의 심장에 칼을 찔러넣을지도 모르겠지만······."

인형이 악수를 청하듯 한 팔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미 마력을 모두 소진해버린 인형의 팔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힘없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기력이 다한 인간이 쓰러지듯 차츰 자세를 무너뜨리던 인형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올려 한 마디를 남겼다.

"적어도 오늘 밤은 좋은 꿈을 꾸길 바란다, 이스티엘."

대공왕의 의식이 인형을 떠났다.

이겼다고 해도 좋은걸까.

복잡한 심경으로 움직일 힘을 잃어 죽은 듯 쓰러진 인형을 바라보던 티엘은 조금 떨어진 곳에 반쯤 파묻힌 인형의 검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엎드려있던 인형을 뒤집어, 가슴에 뚫린 구멍에 칼을 밀어넣고 흉부의 이음매를 벌렸다.

맞물려있던 조각들이 벌어지며 심장부 깊숙한 곳에 부서진 보석 하나가 보였다.

아스트라에 의해 절반가량이 잘려나간 그 보석은, 잿가루로 부스러지면서도 아직 옅은 녹회색의 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티엘은 아련한 표정으로 돌을 집어들었다.

손끝에 바스러져가는, 하지만 제법 짙은 마력이 묻어났다.

마석, 아니, 가공하지 않은 심장석이다.

그것도 티엘에게 익숙한 생령의 심장.

"쉬피아네드······."

미노스티야 대공의 생령이었던 대정령, 바람의 대공 쉬피아네드.

거의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대정령이었으며, 성의 전체적인 방어를 맡았던 그는 때때로 티엘을 호위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묘한 일이다.

미노스티야는 티엘에게 자식으로서의 정을 조금도 주지 않았고, 때문에 티엘 역시 그를 아버지라기보다는 그저 대공으로만 여겼다.

그런 그가 막대한 양의 마력을 소모해가며 대정령에게 티엘의 호위를 맡겼던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뿐인 후계자라서?

그렇다고 보기에는, 그 후계자를 대하는 평소의 모습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 때보다 조금 더 세상을 보는 눈이 자란 지금도, 과거의 아버지만큼은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쉬피아네드가 미노스티야의 가장 강력한 생령중 하나였다는 것, 그리고 아마도 항쟁의 날 당시 목숨을 잃었으리라는 점이었다.

이미 레가야의 권좌에 앉은 자에게 도전해 그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것은 권좌의 주인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자 뿐이다.

르비아의 권호를 떠올린 티엘은 씁쓸하게 그가 불렀던 용의 이름을 되뇌었다.

시룡(屍龍), 그란드리아. 죽음의 속성을 가진, 칼라가스와 같은 시원의 용.

'다시 싸워야 한다면 이길 수 있을까.'

문득 티엘의 시선이 부러진 활에 닿았다. 영장으로서의 생명을 완전히 다해버린 파편들은 눈 속에 쓸쓸하게 파묻혀 있었다.

쉬피아네드의 심장석이 완전히 소멸한 뒤, 서둘러 걸음을 돌린 티엘은 활의 파편들을 하나하나 주워모았다.

다행히 눈더미가 바람을 막아주어 바람에 흩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작은 파편은 눈에 덮여 오히려 꼭꼭 숨겨져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기어이 슈니엘까지 동원해 작은 파편 하나까지 모두 회수한 티엘은 날 뿌리만 겨우 남아있는 단검으로 옷의 안감을 조금 찢어내 파편을 한데 모았다.

활의 잔해를 수습한 티엘은 다행히 전투에 휘말리지 않았던 아첼의 묘 앞에 편안하게 앉았다.

묘석 앞에는 몇 년 전 마을을 떠날때 두었던 작은 상자가 조금 색이 바랜 채 고이 놓여있었다.

조금 미안한 표정을 한 티엘은 활의 파편을 그 옆에 올려놓으며 묘석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참. 잊어버릴 뻔 했네."

계곡에 올라올 때 가져왔던 찻주전자에 생각이 미친 티엘은 잠시 주변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눈 아래 파묻혀버린 주전자를 찾았다.

다행히 조금 찌그러지기만 했을 뿐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다.

기름먹인 종이로 겨우 불을 피우고, 눈을 녹여 가까스로 주전자 가득 물을 끓인 티엘은 티몬이 챙겨준 찻잎과 설탕으로 우려낸 차를 두 개의 잔에 따랐다.

"아첼. 이거 티몬 아저씨가 챙겨준거야. 아첼이라면 술을 좋아하겠지만, 오늘은 좀 봐줘?"

말갛게 우러난 찻물이 얼어붙은 눈을 녹이며 차가운 묘석 위로 흘러내렸다.

티엘은 자신의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배시시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아첼은 다 알고 있지? 항상 지켜보겠다고 말했으니까."

티엘은 비어있던 아첼의 잔과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히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활은 부서졌어도, 아첼의 유산은 그대로 남아있다.

아첼이 지키고 싶었던 것,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며 티엘에게 남겨준 것. 그것은 바로 티엘의 삶 자체였으니까.

아첼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린 티엘은 될수 있는 한 가장 밝은 웃음을 지었다.

울지 않는다.

아첼이 바란 것처럼, 티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면 충분하다.

그 미소를 반기듯, 다시 한 번 불어온 바람이 티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 앞의 묘석이 조금씩 흐릿해져가기 시작했다.

날이 바뀌며 벌써부터 역류의 영향이 시작되는걸까, 아니면 고여있던 감정이 흘러나온 것일까.

그러나 티엘은 눈가를 훔치는 대신 옷깃에 달아두었던 보석을 살짝 깨물었다.

그 요란한 싸움에서도 끄떡없던 보석은 뜻밖에도 얇은 얼음처럼 쉽게 바스라지며 바람결을 타고 사라졌다.

"또 올게. 다시 볼 때까지 잘 지내, 아첼."



* * *



"며칠 더 머무르지 않아도 괜찮겠어? 일 년에 한 번 뿐인 귀향인데."

아첼의 기일은 15일. 오늘이 13일이니 아직 이틀은 더 머무르는 것이 좋았으리라. 그러나 린델의 품에 안긴 티엘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이걸로 만족할래요. 더 있는것도 조금 부담되고."

또 역류가 가까워 몸이 약해지는 시기에 마력을 펑펑 써댔다.

영체역류가 더 빠르게 찾아오고, 더 오래 지속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혼자서는 말을 탈 수 없을 만큼 시력을 잃은 티엘은 흔들리는 인형마에 몸을 맡기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이 하얀 설원 위로 제법 어울리게 휘날렸다.

사실 조금 급하게 마을을 떠난 것도 이 머리칼 때문이었다.

갑자기 하얗게 세었다가 며칠 뒤 도로 검게 물드는 머리카락을, 마을 사람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설명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제까지는 계곡 안쪽의 오두막에서 며칠을 보내며 숨겨왔지만, 이번에는 그 계획도 조금 틀어져버렸다.

결국 선택지는 몰래 마을을 빠져나온다는, 조금 어처구니 없는 방법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역시 내가 따라갔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어차피 내년에 또 올텐데요. 따로 위험한 일도 없었고요."

"위험한 일이 없기는."

"······단장님껜 비밀이에요."

그날 밤, 밤 늦도록 티엘이 돌아오지 않자 불안해졌던 린델은 슬쩍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마침 그 때 티엘이 부르는 것을 느낀 린델은 황급히 말을 타고 계곡으로 올라왔다.

한참을 헤멘 뒤에 말발굽 소리를 듣고 따라온 마을 사람들과 합류한 그녀는 가까스로 아첼의 묘가 있는 곳으로 찾아올 수 있었고, 하얀 눈밭에 엉망진창이 된 채 털썩 앉아있던 티엘을 발견했다.

거기까지 떠올린 린델의 입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뭇가지 아래에서 눈을 피하며 유유자적하게 린델을 기다리다 수많은 사람의 인기척에 당황하던 그 때의 얼굴이란.

그녀가 뭘 떠올리고 웃는지 짐작한 티엘 역시 불만어린 신음을 흘렸다.

'세상에, 티엘! 너 괜찮니?'

'저 괜찮아요. 그러니-'

'너 그 상처 어떻게 된거냐!'

'아니 그게-'

'어허! 어쩌다 다쳤냐고 물었다!'

결국 흥분한 마을 사람들은 티엘을 들쳐업다시피 계곡에서 끌고내려왔고, 티엘은 하는 수 없이 욕탕에 던져졌다, 마른 옷으로 둘둘 싸여 침대와 담요 속에 감금되었다.

매 끼니마다 그릇이 넘칠 정도의 식사를 받으며 침대에 붙들려있던 티엘이 가까스로 제 다리로 땅을 밟은 것은 꼬박 하루가 지난 뒤의 이야기였다.

덕분에 육체적인 피로는 거의 풀린데다 오히려 늘어질 지경까지 몰린 티엘과 린델이었지만 다행히도 점점 차오르는 달이 두 사람의 이성을 제 때 일깨워주었다.

애초에 지나친 호의가 이틀 사흘로 늘어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덕분에 티엘은 처음으로, 윌란 마을에 들어와 하루만에 다시 마을을 나가는 기록을 세우고야 말았다.

거의 빚쟁이 도망가는 듯 슬그머니 몸만 빼서 나왔으니 지금쯤 너무하다며 소리를 높일 사람이 적지 않으리라는 것이 눈에 훤했다.

아마 내년부터는 탈출도 쉽지 않으리라.

티엘이 속이 쓰리다는 얼굴을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제까지만 해도 혹독하게 몰아쳤던 눈보라가 잠잠하다는 것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티엘을 데리고 그 눈보라를 뚫고 가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기에, 날이 좀 맑다 싶으니 부랴부랴 뛰쳐나온 덕이다.

다행히 돌아올 때를 대비해 곳곳에 세워둔 피난처도 아직 튼튼하게 남아있었다.

티엘이 말 여행을 버텨낼 정도로 체력을 회복하면 올 때보다 더 빠르게 복귀할 수 있을 듯 했다.

물론 말을 모는 것은 린델이 전담하고 있었다.

덕분에 앞은 보이지 않아도 제법 여유가 있었던 티엘은 천천히 흔들리는 말에 몸을 의지한 채 머릿속으로 주위 풍경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델 시까지 가는 길이라면 이미 어렸을 때 여러 번 다니며 몸에 익었던 길이다.

얼마쯤 더 가면 칼라가스가 깨어나고 아첼을 잃은 곳에 다다를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미 흔적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이미 해가 세 번을 바뀌었고, 그 곳을 지나쳐간 사람도 결코 적지 않을테니.

그러나 또한 고작해야 삼 년 뿐이었다.

무언가 바뀌기에는 충분하면서도 모자라다는 생각이 드는 애매한 시간이지만, 그 세월 동안 이미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것을 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러고보니 활······, 결국 부러진거야······?"

문득 린델이 말을 꺼냈다.

티엘이 거의 분신처럼 여기던 그녀의 활, 언니로부터 물려받았다던 검은 대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묵직하게 어깨를 누르는 별의 서는 그대로지만, 허리 뒤쪽으로 걸고다니던 커다란 활의 감촉은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네. 언니한테 돌려주고 왔어요."

하지만 티엘은 손을 뻗어 활이 걸려있던 자리를 가볍게 건드렸다.

마치 활이 사라진 것을 다시 확인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말을 모느라 티엘이 뭘 하는지 돌아보진 못했지만 티엘이 움직이는 것을 느낀 린델은 쯧쯧 혀를 차며 티엘의 손등을 톡톡 건드렸다.

"괜찮은거니."

"아쉬워해도 어쩔 수 없죠. 돌아가는대로 브론딜에게 부탁해 새로운 활을 만들면 돼요."

"그게 아냐. 소중한 물건이잖아. 모양은 비슷하게 만들더라도 진짜는 아닌데, 그래도 괜찮아?"

린델은 평소 활이 다칠까봐 제 몸을 던져 상처투성이가 되던 티엘이, 아예 활을 잃어버렸는데도 지나치게 의연한 것이 못내 걱정스러운 듯 했다.

그런 린델의 심경을 들여다본 티엘은 잔잔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 혼자 남겨진 날에는 정말 그 활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의지할 친구도, 가족도 없이 끝없는 악몽 속을 헤메기만 하던 시간들은, 지금 돌이켜봐도 견딜 수 없을만큼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많은 것이 달라졌다. 다르게 말하자면, 티엘 역시 조금은 성장해 있다는 말이었다.

"소중하지만, 그것에 매달리지는 않을거에요."

"매달리지 않는다?"

"지나간 것에 매달려도 얻는게 없다는 걸 이젠 알아요. 이미 끝나버린 이야기를 끌어안고 상처를 되새기는건 이제 지긋지긋한걸요. 지금 내 곁의 사람들과 웃고, 이야기 하는게 더 좋아요."

티엘의 말을 들은 린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소리는 조금도 내지 않았기 때문에, 티엘은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티엘은 한참 뒤에 린델이 입을 열었을때서야 비로소, 그녀가 웃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응, 그렇네. 확실히 요 일 년 사이에 많이 자랐어. 칭찬해줄까?"

"어린애 취급이라도 하시는건가요."

"응."

린델은 불만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티엘을 보며 킥킥 짓궂게 웃었다.

두 소녀의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흩날리던 눈송이들만이 두 사람이 남긴 발자국 위로 사박사박 떨어져내렸다.



* * *



레가야의 수도, 란.

제국의 여섯 중심지중 하나인 이 도시를 한 번에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있다면 바로 레가야 공의 성이다.

르비아는 테라스의 난간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란의 중심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은 휴식시간의 대부분을 이렇게 나른하게 보내고 있으니, 제국에서 손꼽히는 권력가는 커녕 평범한 소시민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는 그 누구도 소탈해보이는 그의 모습에 대해 입방아를 찧지 않았다.

겨우 3년 사이, 봉신들은 물론 다른 대공국까지 거침없이 휘둘러 레가야의 국력을 빠르게 끌어올린 자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뇌물을 주고받은 두 명의 자작과 한 명의 백작에게서 작위를 몰수하며 백성들의 찬사를 받지 않았던가.

그러나 정작 르비아 본인은 아랫것들의 시선에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마치 레가야라는 거대한 나라를 움직이는 것이 단순한 유희라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느긋하다는 표현은 조금 어울리지 않았다.

이마를 짚은 채 조금씩 식은땀을 흘리던 르비아는 결국 자신의 곁을 지키던 생령을 불러냈다.

"야룬다. 있어?"

"뭔가 필요한거라도 있나요?"

르비아의 등 뒤에서 흰 안개가 빠르게 엉겨붙으며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흰 머리카락이 마치 얼어붙은 폭포수를 연상시키는 여인은 뾰족하게 솟은 귀 너머로 머리칼을 넘기며 르비아의 옆에 섰다.

계약이 이루어진지도 꽤 오래되어서일까. 이제는 자연스러운 모습도 종종 보여주는 그녀다.

"귀찮게 해서 미안하지만, 물 한 잔만 받았으면 하는데."

손을 뻗어 얼음의 잔을 만들어낸 야룬다는 그 안에서 찰랑이는 액체를 르비아에게 건넸다.

야릇한 향기, 무엇인지는 모를 그리움.

공기중의 수분을 끌어모은 단순한 물이지만, 오랫동안 숙성된 술처럼 특유의 향기가 있었다.

문득 잔을 받으려 내민 손에 작은 알약이 놓였다.

마력중화제였다.

"혹시나 해서 가져왔어요. 요즘 자주 찾더군요."

"의식을 연결한 상태에서 인형이 파괴되었으니까. 연결을 조금 더 강하게 걸었더라면 죽었을지도 모르지."

르비아는 중화제를 삼키며 스스로에게 약한 환각주문을 걸어 통증을 억눌렀다.

그러나 가슴 가운데 뭔가 틀어박힌 듯한 이물감과 오한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주문이 깨지고, 거기에 의사적인 것이나마 죽음을 경험한 반동이다.

쉽게 억눌러지는 편이 더 이상한 것이리라.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무시하는 르비아의 이마에 흰 손이 살짝 올라왔다.

약간 서늘한 감촉이, 조금은 기분 좋았다.

"그렇게까지 이스티엘님을 만나볼 필요가 있었나요?"

"내가 아는건 열세 살 꼬맹이였던 티엘 뿐이었으니까. 지금의 티엘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직접 내 눈으로 알아볼 필요는 있었어."

"그래서 그 결과는?"

"기대할만한 숙적······정도일까."

야룬다의 얼굴이 미묘한 빛으로 물들었다.

"보통 방해되는 것이라면 베어내는 것이 일반적이죠. 굳이 후환을 남길 필요가 있었나요?"

"······얼마 전에도 비슷한 대화를 나눈 것 같은데. 그 때의 대답만으로는 부족했었나?"

속죄를 위해 죽을 생각이냐는 야룬다의 질문에, 르비아는 분명 자신은 죽음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답했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어떤 설명도, 단서도 없이 그저 답만 제시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리가 없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당신들을 보아왔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네요, 인간이란."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하지 않으면 언젠간 느려진다는 이야기일 뿐이야."

르비아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잔을 손 안에서 굴렸다.

마력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대기중의 습기를 끌어모아 만든 얼음은 야룬다의 마력이 끊어진 후 조금씩 손 안에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쥐고 있는다면 얼마 못가 녹아내려, 내용물이 쏟아진다. 르비아는 피식 웃으며 남은 물을 절반 정도 들이켰다.

"난 달려야 해. 지금 보다 더욱 빠르게. 그렇기에 돌아갈 길을 끊어내며 내 목을 물어뜯을 맹수를 내버려 두는거야. 발이 느려져도 죽겠지. 지나치게 시간을 끌어도 그 동안 자라난 괴물은 날 따라잡아버리겠지. 말하자면, 어느 정도의 위험은 인간의 가능성을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거야."

그것은 어찌보면 스스로의 모든 것을 건 가장 치명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유희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미 르비아를 가로막을 존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대공국의 지배자라는 이름만으로도 감히 나란히 설 수 있는 자조차 손꼽을 정도로 줄어들며,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할 다섯 명의 대공들마저도 온갖 수를 사용해 그 세를 꺾어두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마찬가지로 신의 기적을 손에 쥔 자.

"그대가 달리려는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면서도, 그렇게까지 달리고자 하는가."

순간 르비아의 잔에 균열이 쫙 번지며 깨졌다.

반 가량 남아있던 물이 쏟아져 손을 적셨다.

흠칫 놀란 야룬다가 마력을 끌어올리며 뒤로 돌아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것도 없었던 어둠 속에 언제부터 그 곳에 있었는지 모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순례자들의 옷을 연상시키는, 하지만 윤기조차 흐르지 않는 짙은 흑색의 로브로 전신을 감싼 그들은 조금 섬뜩할 정도로 무거운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정적이 맴돌았다.

단순히 그들이 말을 아끼기 때문이 아니라, 아예 공간의 성격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마치 마력으로 가득 찬 공간처럼 하나의 개념이나 의미가 덧칠되는 느낌.

그러나 마력과는 다른, 친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분위기였다.

야룬다의 손톱에 소리없이 예리한 손톱이 자라났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손톱은 겉보기에는 손쉽게 부러질듯 연약한 모습이었지만, 사실 강철 방패조차 소리없이 베어버릴 수 있는 더없이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그러나 르비아는 야룬다의 손목을 잡아채며 막 뛰쳐나가려던 그녀를 말렸다.

"그만 둬, 야룬다. 네가 상처입을 일은 없겠지만, 그건 저들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내방자를 맞이하는 것은 주인의 의무겠지요. 검은 사제들께서 이런 곳까지 어쩐 일로 행차하셨는지, 감히 물어도 되겠습니까."

검은 사제. 그밖에도 가시지팡이의 예언자, 검은 까마귀의 주인, 그리고 죽음의 순례자.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집단이지만 많은 이명에 비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그저 불길하고 위험하며, 심기를 거스르면 안된다는 단편적인 이야기 뿐.

하지만 성좌의 주인인 르비아는 다르다.

그들은 검은 사제라는 이름 그대로, 그들은 신의 섭리를 따르는 성직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창조와 질서를 관장하는 여신 아이넬라 대신, 소멸과 혼돈을 다스리는 마신룡 엘드리안을 섬기며 그 율법을 펼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일생에 한 번 만나는 것도 어려우며, 만난다고 해도 매우 극소수에게만 일생을 가르는 예언을 들려준다는 그들이 이렇게 직접 찾아온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르비아는 사제들에게 다가섰다.

온통 검은 빛의 파도 한 가운데, 문득 이질적인 색이 그의 눈에 들었다.

중앙의 한 명, 명치에 닿을 정도로 길고 하얀 수염을 풍성하게 기른 사제의 손에는 검은 주목나무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다.

말라 비틀어진 몸체를 은빛의 사슬로 휘감고, 그 사이로 열 두개의 고리가 불규칙적으로 매달려 잘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지팡이 끝 부분에는 이형의 두개골과 함께 사신의 낫을 연상시키는 초승달 형태의 장식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검은 사제를 상징하는 물건이자, 그들의 수장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신물이었다.

두개골의 일그러진 시선을 받은 르비아는 얼굴을 조금 굳히면서도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이거이거······, 순례자들 중에서도 가장 짙은 날개깃까지 찾아오셨군요."

"처음부터 찾아올 것을 기다리지 않았는가."

일흔은 넉넉하게 넘길 노인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서는 노쇠한 기색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심약한 이라면 움찔 놀라 뒷걸음질 칠 정도로 무거운 기백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완전히 메마른 표정을 한 르비아는 말없이 그의 시선을 받아내다, 문득 조용히 검은 안개를 불러내 주위를 감쌌다.

아무리 힘을 억눌러도 그란드리아의 마력이 스쳐간 것들은 의미를 잃는다.

잉크는 마르고, 날붙이는 녹슬어 무뎌지며, 생물은 썩는다.

그러나 암석조차 부스러뜨리는 시룡의 마력은 검은 사제들의 주위로 감히 다가서질 못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사제들의 힘과 맞부딪히는 듯, 어느 선을 경계로 요란하게 들끓기 시작했다.

"다짜고짜 힘으로 누르려 하시다니, 신의 지팡이 답지 않으시군요."

"그대가 어떤 길을 걷는지, 우리가 모르리라고 생각했나. 짊어져서는 안 될 업까지 짊어지고, 걸어선 안되는 길을 걸으려는 자여."

르비아는 비수에라도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동요는 금새 싸늘한 비웃음 뒤로 사라졌다.

"기나긴 흐름을 넘어 이 때, 흑천의 날개가 눈을 뜨며 설원의 새벽이 자리를 찾았다. 무수한 세월 가운데서도 두 성좌가 만나는 일은 있기 어려울진대, 어째서 그대는 자신의 그릇을 벗어나려 하는가. 그 결말이, 그대의 생각대로 이루어지리라 생각하는가?"

르비아의 입에서 싸늘한 비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더이상 예를 차릴 필요도 없다는 듯, 말꼬리가 깨끗하게 잘려나간 반말이 태연스레 쏟아졌다.

"엘드리안의 혼돈은 모든 가능성을 품는다. 당신들은 길 잃은 자에게 그들이 택한 길을 보여주는 자들이지, 다른 자가 선택한 길을 판단하는 자들이 아닐텐데?"

"그대의 말처럼, 우룬의 율법은 모든 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허나 그대는 세계가 쌓아올린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않는가? 모든 가치를 박탈해 진흙탕으로 뒤섞어버리려는 그대는, 혼돈의 이름을 말할 자격이 없다."

무거운 시선이 전신을 찔렀다.

그러나 르비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들은 그를, 시원의 계약자를 공격하지 않는다.

세계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검은 사제들의 방식이다.

지금 이렇게 그들이 먼저 나서고, 이렇게 힘을 겨루는 것 자체가 이미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이상의 일탈은, 그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르비아는 주위를 억누르던 마력을 한 결 더 강하게 끌어올렸다.

보이지 않던 벽이 깨져나가며 검은 사제들의 옷자락이 거칠게 휘날리기 시작했다.

"세계따위 내 알바 아니야. 세계가 나를 부정한다면, 나 역시 세계를 부정할 것이다. 내게는 그럴 힘이 있지. 세계를 억누를 힘이 있지. 그러니 검은 사제의 장이여, 내게 신들의 낡은 규칙을 강요할 수는 없다. 우룬이 정한 혼돈이라면, 그 규칙이 깨질 가능성까지 품어야 하지 않겠나?"

"신의 땅을 꿈꾼들, 그대 자신이 신이 될 수는 없다."

르비아는 굳은 표정으로 오른팔뚝을 움켜쥐었다.

뿌리내린 마력의 각인이 은은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섬뜩하게 웃은 르비아는 오히려 각인을 더욱 자극하듯, 더욱 더 짙은 마력을 끌어올려 주위를 휘감았다.

"가시나무의 예언자들이여, 이미 화살은 쏘아졌다. 수레바퀴는 돌기 시작했어."

"어리석구나. 그 것이 무엇을 대가로 삼을지 아는가?"

"아득한 과거, 그토록 현명했던 고대 이피안 인들은 어디로 갔지? 미래를 위해 기쁘게 멸망을 받아들였나? 하지만 난 이피안 인이 아니야. 그대들처럼 미래를 볼 수 있는 자도 아니며, 이피안들처럼 미래를 예측할 정도로 현명한 자도 아닌, 어리석은 인간일 뿐이야. 그러니 나는 인간의 시야로 길을 정하겠어. 현명한 신의 인형이 되기보다는, 어리석은 인간으로서 뜻한 바를 이루겠다. 이미 내 영혼은 갈가리 찢었어. 더 잃을 것도 없겠지."

"이대로는 자멸할 것이다."

탄식이 섞인 목소리였다.

뜻밖에도 사제장이 르비아를 보는 눈은 경멸이 아닌, 동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돌아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정녕 후회하지 않을것인가? 남아있는 희망마저 버릴 것인가?"

"희망이라······. 아니, 구원이라면 내 쪽에서 거부하겠어. 이미 구원받을 자격 따위는 없을테니까."

무거운 눈으로 르비아의 말을 듣던 검은 사제의 장이 지팡이를 내려찍었다.

공간을 울리는 진동이 퍼져나가며 넘실거리던 그란드리아의 마력이 바람에 흩어지듯 깨끗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르비아는 재차 마력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미 서로가 할 말은 모두 끝냈다.

사제들이 더이상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영광도 파멸도, 오롯이 길을 걷는 자만의 것. 누구도 축복하지 않을 길을 고집한다면 더는 말리지 않겠다."

사제들은 일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나타났을 때처럼 아무런 흔적도, 소리도 남기지 않은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르비아는 잠시 그들이 있던 방향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허물어지듯 의자 위로 주저앉아버렸다.

야룬다는 르비아의 목을 감싸안았다.

육신을 가진 자의 넘치는 생명력이 맥박이 되어 생령의 피부를 두드렸다.

야룬다는 르비아의 요동치는 심장을 달래듯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직접 대면하는건 역시 무리였군요."

"죽음의 순례자들이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군. 하하하, 엿보기라니, 취미가 좋진 않아."

르비아는 식은땀이 잔뜩 밴 손을 억지로 쥐었다 펴며 실없이 웃었다.

하지만 여기서 돌아설 수는 없었다.

이미 물결에 잠길대로 잠겨버린 몸, 돌아간들 젖어버린 몸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니 나아갈 수밖에.

처음부터 딛지 않았더라면 후회하지 않았을까?

아니, 그건 아니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후회따위 하지 않는다 말했지만, 이 세상에 진정 후회없는 일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어떤 일이라도 후회를 남긴다는 것을 알기에 시작한 길이라면, 차라리 받아들이리라.

오만하게 웃으며, 예정된 파멸이라도 기쁘게 받아들이리라.

"모든 이의 저주를 등에 지고 파멸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간다면······, 그럼에도 같이 가줄건가?"

야룬다는 몸을 숙여, 지친 얼굴로 눈을 감는 계약자의 이마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추었다.

"기꺼이, 계약자여."


작가의말

유산편 종료입니다.

미해편이랑 함께 굉장히 여러 번 고쳤던 부분이네요.... 아무래도 장고끝에 악수 둔다는 느낌이 있습니다만....8^8

내일은 다시 새로운 에피소드로 찾아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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