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이리를 사냥하다(1)
“토쿠아쿠! 드디어 이 질긴 악연을 끊을 기회가 생겼군.”
편지 봉투의 입구를 거칠게 뜯어 엉망으로 만든 뒤, 급히 편지를 펼쳐보았다.
일시는 일주일 뒤. 장소는 인천아시아드주경기장.
“···경기장? 이 새끼 이거···. 이게 무슨 스포츠인 줄 아나?”
그레트헨은 나지막이 혼잣말을 내뱉는 나를 보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어디 봐.”
“자.”
“흠···. 아마도 세간의 이목을 덜 끄는 방향으로 정한 거겠지. 인천은 아직 커럽션 필드가 많이 남은 도시고, 여기 주경기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우거가 점령하던 곳이니까.”
“어쨌든···. 인제야 그놈이 왜 나의 목을 노리는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겠어. 일주일이라. 준비를 좀 해야겠는데. 그레트헨?”
“어?”
“버스비는 있지? 이 차는 내가 좀 쓰려고.”
“어디 가려고?”
“명옥이한테 갈 생각이야.”
“인천에?”
“응. 미리 가서 시차 적응도 좀 해야지.”
“엎어지는 코가 닿을 거린데 시차 적응은 무슨···.”
“그리고 명옥이에게 이것저것 부탁할 일이 있거든.”
다시 돌아온 신력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리려면, 나의 신력을 물려받은 허명옥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레트헨은 잠시 고민하더니, 머스탱 GT의 조수석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런 거라면 나도 갈래.”
“···섭섭하게 생각하진 말고.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그런데 굳이 따라오려고···?”
“섭섭하다.”
“아, 내 말은···. 내 문제에 너까지 끌어들이기 싫어서···.”
그레트헨은 말꼬리를 흐리는 나를 감싸 안으며 대답했다.
“난. 난 또다시 동료를 잃는 경험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아.”
“그레트헨···.”
“그래서 널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만약 그것이 티끌만큼 사소한 것이라도···. 적어도 이렇게 응원은 해주고 싶단 말이야.”
침울한 표정의 그레트헨을 부드럽게 떨어뜨리고 양어깨에 손을 얹고 웃었다.
“난 말이야. 지금까지 한 번도 누구에게 져본 적이 없어. 괴물이든 인간이든. 그러니 걱정하지 마.”
“···믿어도 돼?”
“당연하지.”
그제야 안심이 된 모양이다.
그레트헨은 고개를 끄덕이며 운전대를 잡았다.
***
수봉산 꼭대기에 있는 허명옥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명옥아. 명옥아?”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이상하네···. 제자라도 나와서 문을 열어줘야지. 다들 어디 간 거야?”
그레트헨은 나의 구시렁거림을 뒤로한 채, 굳게 잠긴 대문에 귀를 대었다.
“쉿!”
“···뭐해?”
“안에 사람이 있나 확인하는 거야.”
“그런다고 뭐가 들리겠냐. 이게 방문도 아니고.”
“앗! 누가 온다.”
끼이익-
“꺅!”
문에 밀려 휘청거리는 그레트헨의 등을 받아주는 동안 강윤서가 나타났다.
“대사부!”
“왜 이리 늦어? 내가 간다고 미리 연락까지 줬잖···.”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린코가, 린코가!”
“응? 린코가 뭐?”
“사라졌습니다!”
“사라져?”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어젯밤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던 린코가 오늘 아침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고 한다.
허명옥은 허공을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침입자가 있던 것은 아니에요. 그랬으면 진작에 제가 먼저 눈치챘을 테니.”
그녀가 손을 들어 부드럽게 흔들자, 정원에 심겨 있는 온갖 꽃과 나무들이 손을 따라 흔들렸다.
쏴아아-
잎사귀들은 서로 부딪히며 본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듯 억울함을 토해냈다.
“그렇겠지.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제 발로 나갔다는 건데···.”
“제 발로 나간 건 아닐 거야. 마땅히 어디 갈 곳도 없는 아이니까. 누구한테 협박받았다던가···.”
“흐음···. 뭔가 짐작이 가는 거라도 있어요, 아빠?”
“토쿠아쿠. 그놈의 짓일 거야. 하, 그놈도 어지간히 초조했나 보군.”
“무슨 말씀이세요? 그 일본인 헌터가 왜?”
“린코의 몸엔 야토노카미라는 뱀이 봉인되어 있어. 일명 뿔 달린 뱀. 너도 한 번쯤 봤을 거다. 린코의 팔에 새겨진 흰 뱀의 모습을.”
“아, 그 흰 뱀 문신에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전 그녀가 야쿠자들 사이에서 있었다고 하길래 그냥 한 건줄 알았는데.”
“야토노카미는 말이 뱀이지, 실상 용과 같은 존재야. 신이란 말이지. 귀신을 다루는 힘을 가진 내가 린코의 몸에서 녀석을 뽑아낼까 봐, 미리 손을 쓴 걸 거야.”
“그게 가능해요? 일본의 신을 다루는 게?”
“놈이 쓸데없는 걱정을 한 거지. 아무리 귀신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나라도 그런 재주는 없는데 말이야.”
“한데 그냥 딸 얼굴이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닌 거 같은데.”
“아, 네 얼굴을 보려고 온 것도 있지만, 부탁이 하나 있어서.”
“뭐죠? 그 부탁이란 거?”
“말보다는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해가 빠르겠지.”
청람 스미스에서 주문 제작한 작두를 틀에 끼워 바닥에 세웠다.
그다음은 가뿐하게 맨발로 그 위에 올라타 점프를 몇 번 하면서 말했다.
“얼마 전부터 내 신력이 돌아오기 시작했어.”
“호오? 정말이네요?”
작두에서 내려와 발바닥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허명옥의 곁에 앉았다.
“토쿠아쿠를 쓰러뜨리려면 내가 가진 힘 전부를 쏟아부어야 해. 기프트든 신력이든. 그러니 네가 내 스승이 돼주거라.”
“제가요? 제가 무슨 아빠의 스승이 되겠어요. 어불성설이지.”
“겸손해하지 말거라. 넌 최령군의 딸이야. 그러니 날 가르칠 자격이 충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느낌으로 시작한 무당 수업이었지만, 역시나 기분이 묘했다.
제자에게 교습받는 스승이라니.
***
결전을 하루 앞둔 어느 날, 수봉산으로 손님이 찾아왔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색채의 옷을 입은 여자, 후우카였다.
후우카는 알도 없는 안경을 고쳐 쓰며 나에게 진지하게 제안했다.
“그만둬. 토쿠아쿠는 그냥 너의 굴복을 원하는 것뿐이니까 기분만 적당히 맞춰주라고. 그러면 더는 널 위협하지 않을 거야.”
타악-
찻그릇에 찻잔을 세게 내려놓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다면?”
“꼭 피를 봐야겠어?”
“하나만 물어보자. 왜 나와 토쿠아쿠의 싸움을 막으려는 거지? 심지어 이건 내가 시작한 싸움도 아닌데. 막말로 내가 토쿠아쿠를 쓰러뜨리면, 네가 일본 넘버원이 되는 거니까 더 좋은 거 아닌가?”
“언제 또 제4차 대격변 같은 일이 터질지 모르는 일이야. 그런데 굳이 SSS급 헌터끼리 싸워서 뭘 얻으려는 거야? 우린 힘을 합쳐야 해.”
이 여자는 나와 타이요 그룹 사이의 악연이 어느 정도인지 이해를 못 하는 모양이었다.
‘머릿속이 꽃밭이로군. 누군 좋아서 이러는 줄 아는가 본데.’
도저히 설득할 엄두가 나지 않아 머리만 긁적이고 있을 때였다.
어디 숨어있기라도 했던 것인지, 판밍웨이가 나타나 한마디 거들었다.
“후우카 말이 맞아. 우리의 적은 몬스터지, 같은 인간이 아니야.”
“샤오판 그리고 후우카. 자세한 속사정을 말해줘 봐야 머리만 아프니까 핵심만 짚어줄게. 토쿠아쿠는 아니, 타이요 그룹은 내가 죽기 전까지 덤벼들 거야. 왜냐고? 그건 놈들에게 물어봐. 나도 피해자니까.”
후우카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양손에 너클을 끼었다.
“···역시 말로는 안 되나.”
마당 한가운데서 몸을 푸는 후우카를 보며 작두칼을 집어 들고 따라 일어났다.
“읏차. 역시 우린 이렇게 대화를 나눠야 맞아. 안 그래?”
판밍웨이는 심판이라도 된 것처럼 나와 후우카 가운데에 서서 외쳤다.
“둘 중 하나가 항복할 때까지 싸우는 거야. 우리 두 가지 정도만 꼭 지키자.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다른 하나는 서로 죽이지 않기. 만약 이 룰을 어기려 들면 내가 개입하겠어.”
후우카의 능력은 SSS급치곤 너무나 단순했다.
폭발적인 근력을 이용한 힘.
이 단순하고도 직관적인 능력에 내가 이리도 고전하리라 예상도 못 했었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왼쪽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하마터면 옆구리가 통째로 뜯겨나갈 뻔했어. 단순한 주먹질일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강한 거지?’
후우카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나에게 한 손을 건넸다.
“이제 포기할 거지?”
“후후···. 포기하냐고? 그럴 리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그렇다면···.”
부웅-
쾅-
있는 힘껏 내려찍은 그녀의 주먹이, 허명옥의 마당에 커다란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저 엄청난 주먹에 짓눌려 호떡이 됐을 것이었다.
‘서로 죽이지 않기로 하자더니. 이게 지금 말이나 되는 파워야?’
곁눈질로 바라본 판밍웨이는 대청마루에 다리를 꼬고 앉아, 다른 사람들과 참외를 먹고 있었다.
‘아, 그냥 해본 소리인가? 전혀 관심이 없네? 그렇다면 나도 적당히 말고 전력을 다해주지.’
옥황상제로부터 받은 회복력으로 다시 멀쩡해진 몸을 가다듬고 작두를 꽉 움켜쥐었다.
“후읍···.”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수봉산의 정기를 한껏 흡수하고 망아상태에 접어들었다.
슈욱-
총알보다도 더 빠르게 휘두른 작두칼의 궤적이 후우카의 머리카락 끝을 잘라내며 허공을 갈랐다.
후우카는 갑작스럽게 증가한 나의 전투력에 당황하여 식은땀을 흘렸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이곳 수봉산은 내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야. 산의 정기가 훌륭하거든. 그리고 상황을 보아하니 이건 단순한 대련 같은 게 아닌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나도 내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리라 각오했지.”
“그렇단 말은 지금까진 봐주고 있었다는 말이야?”
“그걸 인제야 눈치챈 건가? 자, 잡담은 이만하고 준비해. 한 번이라도 실수하거나 방심하는 순간이 너의 끝이니까.”
달아오르는 나의 몸과 함께 작두 칼날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히익!”
후우카도 더는 무리인 모양이었다.
철커덕-
작두칼이 박혀 부러진 너클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녀의 손에 피가 흘렀다.
상처 입은 손을 부여잡고 인상을 찌푸리는 후우카를 향해 작두칼을 겨누며 말했다.
“항복하겠나?”
“훗. 아직 안 끝났어.”
“그래?”
재빨리 자리를 피하려는 후우카의 속도를 상회하여 작두칼을 내려치려던 순간이었다.
판밍웨이가 용의 발톱으로 날카롭게 세워 힘겹게 받아쳤다.
깡-
“그만. 네가 이겼어, 최준원.”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어.”
“아니, 끝났어. 너도 그의 승리를 인정하지, 후우카?”
“그, 그래···. 하, 항복.”
“그렇다면 다음 상대는 판밍웨이, 너냐?”
나의 물음에 판밍웨이는 손톱을 긁적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후우카가 누군가와 싸워서 이렇게 압도적으로 밀리는 건 처음 봐. 그러니 비슷한 수준인 내가 덤벼봤자 별 소용없겠지.”
“현명하군.”
“이렇게 기어이 토쿠아쿠와 끝장을 보겠다는데, 내가 눈치도 없이 괜히 너의 힘을 빼게 할 수는 없지.”
판밍웨이는 작두칼을 검집에 도로 집어넣는 나를 보며 팔짱을 끼었다.
“조심해. 토쿠아쿠는 검 한 자루로 일본 전역을 평정한 괴물이야. 네 검술도 나쁘진 않지만 그 정도 수준으로는 모자랄 거야.”
“어차피 검술로만 끝장 볼 생각은 애초에 없어. 내 진짜 힘은 기프트니까.”
“하긴 생각해보니 넌 검사가 아니었지 참···.”
판밍웨이는 후우카를 일으켜 세워 부축하면서 작별 인사를 건넸다.
“어쨌든. 무운을 빌게. 이만 방해 그만하고 가자, 후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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