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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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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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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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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네가 돌아올 곳(4)

DUMMY

※※※



“이게 어떻게 된겁니까.”


깊은 밤. 고요해야 할 객잔 일층은 환히 불이 밝혀져 있었다. 사형들과 루주, 객잔 주인과 흑랑까지. 한데 모여 제각기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연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흑랑이었다.


“내 실수다.”


흑색 머리칼 사이로 냉막한 눈매가 살풋 찡그려졌다. 탁자를 톡톡 두들긴 흑랑이 중얼거렸다.


“팔영을 같이 보냈는데 그도 소식이 없다. 충분할줄 알았건만. 오판이었을 줄이야.”

“팔영이 같이 갔습니까?”

“그래. 도시에 입성할때부터 분위기가 좋지 않았으니 뒤를 살펴주라 했다만.”


그극.


흑랑의 손아귀에 집힌 탁자가 우그러들었다. 벽의 그림자가 살아있는 듯이 꿈틀거리며 길어졌다. 차가운 분노가 서린 목소리가 깔렸다.


“내가 갔어야 했군.”

“......아닙니다. 이리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제가 같이 움직일걸 그랬군요.”


백연이 중얼거렸다.


팔영이 따라갔다면 흑랑으로써는 충분히 대비한 것이다. 무영방의 살수인 노인. 그 정도 실력자가 흔하지 않다. 특히 해랑의 뒤를 따르며 보호하는 정도라면 더 뛰어난 적임자가 없다 봐도 좋을 일이다. 흑랑 본인이나 백연 자신이 가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다시 말해.


“잡 무인들이 끼어든게 아닌듯 하군요. 팔영이 따라 붙었는데도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 또는 집단.”


백연이 시선을 돌렸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객잔 주인의 방향이었다.


“혹시 의심가는 이들이 있습니까?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모, 모르겠습니다.”


객잔 주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본래 이 도시는 뇌음사의 승려들이 자주 머무는 곳입니다. 소뢰음사(小雷音寺)의 불도들이 잔인한 성정이긴 하나, 이유없는 살육을 즐기지는 않습니다요. 덕분에 정말 무도한 자들이 함부로 날뛰지는 못했는데.”

“무덤이 나타났군요.”

“예. 그 덕에 지금 이곳에 있어야 할 큰 무리들이 다 빠져나갔습니다. 그간 도시에 감히 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했던 이들도 한발짝씩 들어와 점차 도시가 소란해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백연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인신매매를 하는 이들이 있습니까? 해랑의 눈과 외모. 비싸게 팔리기 좋은 조건인건 아시겠지요. 팔영이 붙어있는 데도 아이를 노릴 정도라면 아무 이유가 없을리는 없을테니까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런 이들은 워낙 많지만, 따라가신 무인분을 제칠 만큼 강한 이들이......”


말을 하던 객잔 주인이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처들었다.


“그, 그러고 보니 하나 들은것이 있습니다! 어제 아이들이 실종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게 교(敎)의 일원들과 관련된 무인들의 짓이라고......”


객잔 주인의 말을 듣는 순간, 백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마교? 하지만 그들은 인신공양이나 인신매매를 즐기지 않는 것으로 안다만. 차라리 우호법처럼 도시를 쓸어버리고 힘을 키우는 성향이 아닌 이상에야.”


의아하게 묻는 흑랑의 목소리에 백연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마교가 아닙니다. 그들은 오직 교리와 힘만을 숭상하는 자들. 어울리지 않게 고상한 척을 하는 작자들이니.”

“그럼 무엇이지?”


백연이 입술을 베어물었다. 비릿한 피맛이 혀끝을 타고 느껴졌다.


그의 잘못이었다. 애초에 해랑을 그가 따라가서 지켰어야 하는 것인데. 유성의 상태에 집중하다가 중요한 것을 놓쳐버렸다.


“새외와 마도에서 교(敎)라 지칭되는 것은 두 부류. 하나는 마교이고, 다른 하나는 피를 탐하는 광인들입니다.”


인신매매와 인신공양을 즐겨하며, 피로써 힘을 탐하는 자들. 어린 아이들의 피를 가장 순수하며 강하다 여기는 그들이라면 모든게 들어맞는다.


“혈교(血敎)가 이 일에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



“사형들은 나오지 마.”


그의 말에 무진과 단휘가 한숨을 내쉬었다. 탐탁지 않지만 어느 정도 수긍하는 표정.


“......임마, 그렇게 말하면 마음이 안좋다.”

“미안. 하지만 사형들 몸 상태는 지금 싸울 상황이 아니야. 만전이었다면 분명 같이 갔을거니까. 오늘만큼은 여기 있어.”

“다치지 말고 조심해.”


무진과 단휘가 한마디씩 툭 내뱉는다.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백연이 시선을 살풋 옆으로 돌렸다.


“소홍 사형.”

“알아. 나.”


소홍이 허공에 손을 휙 휘둘었다. 내공 한 점 실리지 않은 주먹이 미약하게 날아와 백연의 가슴을 툭 밀쳤다.


“무공 못써. 지금은.”

“내가 준 약은 먹었어?”

“응. 운기조식도 해야하고. 내상은 좀 나았어.”


백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무덤 안에서 가장 많이 다친 이가 소홍이었다. 마교도의 장법이 내장을 진탕 뒤집어 놨는데, 백연이 들고 나온 무덤 속의 오래된 영단들이 아니었다면 소홍도 심하게 앓고 있었을 일이다. 그나마 영단의 약효로 이리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는 되나, 거기까지.


“빨리 돌아올게. 애초에 객잔 주인이 말한대로 이곳의 교는 작은 규모일테니까.”


혈교는 본디 이곳이 활동 영역이 아니다. 백여년 전 기준으로는 신강 위쪽, 외려 청해와 가까운 감숙의 기련산이 본거지였다. 그것이 바뀌지 않았다면 이곳에 걸음한 혈교는 소수의 몇몇 교도일 터.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의미다. 혈교의 본단이라면 어림도 없을테지만, 소수의 교도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애초에 뇌음사의 승려들이 도시를 비우고 나서야 들어온 자들이야. 그 정도 전력이라 상정하는게 맞겠지. 그리고-”


후욱.


백연의 옆에 기척이 훅 나타났다. 녹아내린 그림자가 성큼 일어서며 사람의 형상으로 변모했다.


“흑랑도 같이 가니까.”

“끝났으면 출발하지.”


흑랑이 주변을 슥 훑고는 손을 매만졌다. 소매속에서 번뜩이는 월영비도가 눈에 들어왔다. 그 사이에 신병이기를 자신의 무공에 완벽히 동화시킨 모양이었다.


“의원의 집이 어딘지는 알았습니까?”

“객잔 주인이 말해줬다. 우선은 거기부터 가야겠군.”

“언제 사라졌는지가 중요합니다. 혈교가 아닐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하고요.”

“그래.”


흑랑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백연이 몸을 돌렸다. 흑랑의 것과 비슷한 짙은 흑포로 갈아입은 채였다.


“기다릴게.”


들려오는 소홍의 목소리에 흑랑이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방주 대리의 날카로운 눈매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걱정 마라. 네놈들의 사제는 내가 보살필테니.”

“......그거 맞습니까?”

“아직은 맞다.”

“흐음.”

“그나저나 너는 참 사랑받는 사제로군.”

“제가 좀.”


흑랑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동시에 그가 백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흑포를 머리 끝까지 눌러쓴 백연이 그 손을 가벼이 맞잡는 순간.


후우욱!


주변의 감촉이 지워졌다. 삽시간에 시야와 감각이 차가운 어둠으로 물들었다. 세상이 색(色)을 잃고 녹아내린다. 객잔 안에 일렁이던 빛이 의미를 잃고 지워지는 것도 한순간.


‘월영신공.’


파앗-!


다시 인지와 감각이 돌아왔을때, 그들은 이미 객잔 바깥에 나와 있었다. 백연을 안아든 흑랑의 걸음이 더없이 쾌속했다. 귓가에 스치는 것은 거친 바람소리.


길쭉하게 늘어난 어두운 도시의 풍경이 일렁이는 그림자와 섞여 훅훅 스쳐 지나간다.


‘두번째인가.’


섬서에서의 일 이후로 월영신공을 몸으로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때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암야서고에 들어가기 위해 섬서로 향하던 기억을 잠시 되새기는 사이, 주변의 풍경이 점차 느릿해졌다.


이윽고 가벼운 착지와 함께 흑랑의 걸음이 멈춰서고.


“이 근처다.”


어두운 도시, 늘어선 전각들의 사이에 선 흑랑이 백연을 내려주었다.


“이번에는 미리 말하고 움직였네요.”

“아직도 경공을 안 만들었을 줄이야.”

“혹시 모르는 일이라고 했잖아요.”


과거의 일을 실없이 입에 담으면서도 감각은 날카롭게 세워둔다. 백연의 말에 어깨를 으쓱인 흑랑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이쪽이군.”

“......기척이 많네요.”

“밤에 움직이는 이들이 많다는건, 쥐새끼들이 많다는 소리지.”


슬쩍 시선을 들어올린 흑랑이 주변을 가늠했다. 까딱이는 그의 손끝에서 그림자가 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월영신공을 쉬지 않고 전개해두는 모습.


‘공력 소모가 적은건지, 아니면 축기량이 많은건지.’


항시 그림자를 몸에 두르고 다니는 흑랑이다. 그만큼 내공의 소모도 극심할 터인데, 여태껏 보아온 바로는 그가 축기량이 부족해 고생했던 적은 없는 듯 했다.


애시당초 이번에도 오랜 기간 마교에 쫓기면서도 무공을 사용해왔던 그다. 단순히 축기량의 영역이라기 보단, 월영신공 자체의 공능이라 봐야겠지.


그리 생각하던 찰나, 흑랑이 중얼거렸다.


“우리쪽과 관련 있는 쥐새끼들은 아닌 듯 하군. 이 도시에 날뛰는 놈들이 많다.”

“새외의 도시. 그것도 이 정도 크기의 도시는 흔치 않습니다. 부가 흐른다는 소리지요. 먹을 것이 많은 곳간에는 벌레들이 꼬이기 마련.”

“쯧. 어차피 무도한 놈들이니 걸리적거리면 전부 죽이고 가야겠군.”


그를 흘끔 돌아보는 눈빛이 동의를 구하는 듯 했다. 백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시원시원해서 좋군. 정파 무인들이 다 네놈 같으면 편할 것을.”


백연은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전각 사이를 한참 돌아나가던 흑랑이 걸음을 멈춰서고.


“여기다.”

“불이 켜져 있네요.”


두 사람이 다다른 곳은 한 전각이었다. 일층의 낮은 건물 사이, 얇은 창 너머로 은은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코끝에 닿아오는 약향이 이곳이 의원의 집임을 확신하게 해주었다.


“들어가보죠.”


백연이 먼저 걸음을 내딛었다. 한걸음 사이에 호흡이 짙어졌다. 순식간에 끌어올린 공력이 질주하며 혈맥을 가득 채웠다.


필요한 시간은 일보였다. 두번째 걸음과 함께 손을 문에 올리는 순간에는 이미 그의 몸을 따라서 백색 뇌기가 분분히 튀어오르고 있었다.


압도적인 내공 수발 속도. 태청신공의 뇌기를 두른 그대로 백연이 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익.


낡은 경첩이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백연이 건물 안으로 걸음을 딛었다. 이미 손은 검파 위에 올려둔 상태였다.


찰나.


화악 밝아져 오는 전각의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직후 눈이 빛에 적응하며 사방의 모든것을 인지하에 받아들였다.


작고 단촐한 전각. 벽면 한켠을 가득 채운 약재와 서랍장. 천장을 따라서 매달려 있는 것은 말려지고 있는 풀뿌리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뿔이나 녹용을 비롯한 물건들이었다. 동시에 시야 왼편에 자리잡은 것은 차를 마실때 쓰이는 작은 탁자였고, 오른편의 벽면에 붙어있는 것은 수백장의 종이였다.


그 가운데에.


“......무인분들?”


눈가에 검은 천을 두른 의원이 앉아 있었다. 탁자 앞에 비스듬히 걸터 앉아,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는 듯한 모습. 한켠에 쌓인 가루와 향을 통해 그것이 약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니군.’


태청신공을 일으킨 순간 반동이 상단전에 작렬했다. 그 여파로 활성화된 상단전의 신. 의원을 보는 순간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백연은 태청신공을 거뒀다.


동시에 백연이 입을 열었다.


“약을 만들고 계셨나보군요.”

“그것은 맞습니다만, 그럴때가 아니었던 듯 하군요.”


탁.


가벼운 손짓으로 약을 한켠에 쓸어 모아버린 여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분이 이 밤에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셔서, 예고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실 일이 하나밖에 생각나질 않습니다만.”


의원이 가벼이 손을 털어냈다. 여상한 태도로 의자에 걸쳐져 있던 백색 장포를 집어 두르는 손놀림이 날랬다.


“해랑이가 돌아가지 않은 모양이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방금 알았습니다. 두분의 기색이 급하고, 호흡이 빠릅니다. 들어오실때 무공을 일으키시는 것을 느꼈는데 단순히 저와 이야기를 나누려 오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 하면 남는 것은 아이밖에 없는데.”


장포를 걸쳐입은 그녀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찾으러 가시지요.”


별다른 상황 설명 없이도 한번에 일을 꿰뚫어본다.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 순간 그녀가 해랑을 납치한 것이거나, 협력자가 아닐지 의심이 될 정도로.


‘그건 아니야.’


그녀의 첫 기척은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녀의 말에서 백연은 진실을 읽었다. 그것은 뒤따라 들어온 흑랑도 마찬가지였던 듯 했다.


“......당신은 관련이 없나보군. 허튼 수를 썼으면 목을 치려 했는데.”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며 말하는 음성이 낮았다. 큰 키의 무인이 문 안에 발을 들이자 전각이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체격 때문이 아닌, 그가 두르고 있는 월영신공의 기파 때문이었다.


나직하게 깔린 분노. 기저에 서린 살기가 느껴졌다.


방주 대리라는 위치에 앉은이다. 스스로의 판단 때문에 팔영과 해랑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이 적잖이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듯 했다. 그가 자책할 일은 아니건만.


“......”


백연이 검파를 꽉 쥐었다. 흑랑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리 생각했다. 해랑과 팔영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때 가장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백연 자신이었다. 이곳은 그들의 땅이 아니었다. 항상 위험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마교의 손아귀에서 한차례 벗어났다고 안일해져 있었던 것이다.


“당신.”


백연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에 의원이 반응했다.


“화율(化律)이라 불러 주시면 됩니다.”

“화율. 일을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해랑이와 함께 이곳까지 오면서 따라붙었던 눈길이라거나.”

“하오문의 암검분을 제외하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해랑이와, 무인분께 손을 댈 이들이라면 짐작이 가는 것이 없지는 않군요. 함께 가면서 이야기 하시지요.”


말하면서 걸음하는 품새가 금방이라도 바깥으로 뛰쳐나갈 듯 했다. 담담한 말투와 달리 행동이 급했다.


그녀를 막아선 것은 흑랑이었다.


“어딜 가는거지? 추측한 것을 이야기 해주는 정도면 족하다. 아이를 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대는 짐만 될 뿐이야.”

“그것은.”


화율이 내뻗은 흑랑의 손을 가벼이 내리눌렀다. 동시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자연스레 움직인 그녀의 손길 사이, 번뜩이는 황금빛이 흘렀다. 사방을 휘감고 있던 그림자가 한순간 풀어헤쳐졌다. 더없이 정순한 파사(破邪)의 기운.


찰나 흑랑의 눈매가 꿈틀 움직일 정도로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살풋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탄식같은 음성이 흘렀다.


“법력(法力)?”


불문 무공의 황금빛 기운이 월영신공의 그림자를 흩어내는 것도 찰나. 한걸음으로 흑랑을 지나쳐 백연의 앞에 선 화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되지 않도록 할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불문의 사람이셨군요.”

“과거일 뿐입니다.”


백연이 그녀를 가늠했다.


소림이나 아미의 사람은 아니었다. 방금 전 짧은 순간에 뿜어져 나온 기파는 그들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림의 웅혼한 기세나, 아미의 검세와는 전혀 다른 무공. 천축에서 온 새외 문파중 하나라 보는게 옳았다.


‘어찌 되었든 좋은 일이다.’


불문 무공은 그 자체로 사마외도의 무인들에게 큰 효용을 발휘하는 기질이다. 직전 그녀가 보여준 수준의 무위라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새외에 맹인 의원이 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이유가 이거였군.’


그만한 실력이 있었던 것이다.


흑랑도 수긍했는지 별말 없이 돌아서는 모습.


“가지.”


짧게 뱉은 흑랑이 문 밖으로 성큼 걸어나갔다. 백연과 화율이 자연스레 그 뒤를 따랐다.


“근래 도시에 사이한 기운을 줄줄 흘리는 무인들이 잔뜩 들어왔습니다.”

“혈교 말입니까? 저희도 그쪽이 관련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확신하기는 어렵군요. 만일 그쪽이 아니었다면 시간만 낭비하는 꼴일테니.”

“맞을 겁니다. 확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말을 잇던 화율이 문득 고개를 들어올렸다. 검은 천 너머로 무언가를 바라보기라도 하는 듯이.


“뇌음사의 승려들이 자리를 비우고, 혈교의 교도들이 도시에 들어온 직후였습니다. 그들 중 몇이 제가 의원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더군요. 약을 주문할 수 없냐고 묻던데, 그 재료만 듣고 바로 거절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었던건가요?”

“예. 재료 각각은 문제가 없지만, 합쳐지면 혈교의 술법을 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과거에 몇차례 혈교와 맞붙은 적이 있었기에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술법을 구축하는 가장 중요한 재료는.”


중얼거린 화율이 손을 펼쳤다. 찰나 그녀의 손등 위로 번뜩이는 다섯개의 황금빛 원이 피어났다.


“어린 아이들의 피입니다. 그것도 아주 많은.”


화율이 말을 끝맺는 것과 함께였다.


백연의 눈이 번뜩이며 그의 발치에서 기파가 피어올랐다. 짧은 호흡 사이에 극성으로 전개된 태청신공. 뇌기가 온몸을 휘감는 것과 동시에 백연이 땅을 박찼다. 풀려나온 보법 구결이 그의 신형을 그대로 위로 떠밀었다.


용형보.


찰나 그의 신형이 백색 뇌광으로 화했다. 일보로 땅을 박차는 순간 대지 위로 실금이 새겨지고, 다음 순간 백연은 건너편 전각의 지붕 위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착지하는 발 아래 서까래가 옅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스릉.


물 흐르듯 뽑혀나온 여휘검을 그대로 휘둘렀다. 쾌속하게 허공을 가른 그의 검격이 한 남자의 목덜미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동시에.


우우웅!


번뜩이는 황금빛의 신형이 백연과 찰나의 간격을 두고 남자의 왼편을 점했다. 백색 장포를 펄럭이며 지붕에 선 화율이 손에 황금빛 기파를 두른채 곧바로 장법을 내칠 자세를 취했다. 그 뒤로는 언제 나타났는지 그림자를 두른 흑랑이 비도를 역수로 쥐곤 남자의 등을 점하고 있었다.


전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백연이 지붕 위에서 움직이던 수상한 기척을 감지하고 출수한 것도, 화율과 흑랑이 그에 마찬가지로 반응한 것도.


“무, 무슨......!”


바짝 굳어든 남자가 눈을 굴렸다. 그 사이로 언뜻 비치는 것은 사이한 붉은 기운이었다. 미미하게 광기가 흐르는 기색. 몸에서 흘러나오는 혈향이 짙은 남자는, 암적색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잘 되었군요. 자세한건 이자에게 물어보면 되겠습니다.”


그리 말한 화율이 손을 뻗는 것도 찰나였다. 한순간 휘어든 그녀의 손아귀가 자연스레 남자의 목덜미를 쥐었고. 직후 황금빛 광채가 터져나왔다.


콰앙!


백연이 채 움직이기도 전이었다. 강렬한 기파를 손아귀에 두른 채로 남자의 목덜미를 쥔 화율이, 그대로 남자의 머리를 발 아래 처박았다. 으득 갈리는 소리와 함께 전각의 기왓장들이 우수수 부서져 나갔다.


“크악!”

“혈교도.”


콰드드득!


담담히 중얼거리는 음성과 함께 남자의 머리가 다시 한번 발치에 처박히고, 이윽고 화율의 물음이 뒤따랐다.


“외팔의 노인과 녹빛 눈의 아이. 어디 있습니까? 아니, 다른걸 물어야겠군요.”


높낮이 없는 침착한 목소리가 남자의 신음소리 사이로 울렸다.


“지금 혈교가 술법을 준비하는 장소, 어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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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영물 +7 23.11.08 3,941 85 15쪽
114 네가 돌아올 곳(11) +5 23.11.06 3,835 89 17쪽
113 네가 돌아올 곳(10) +5 23.11.03 3,961 9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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