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6.15 18:10
연재수 :
288 회
조회수 :
1,507,312
추천수 :
30,253
글자수 :
2,199,617

작성
23.10.16 18:10
조회
4,471
추천
92
글자
20쪽

네가 돌아올 곳(2)

DUMMY

※※※



“......조하(朝霞:아침노을)구려.”


팔영의 중얼거림과 함께 비탈을 따라 오르던 일행의 걸음이 멈춰섰다. 앞서 걷던 백연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밝아오는 하늘을 보며 백연이 뇌까렸다.


“벌써 일출이.”


하아.


내쉬는 백연의 숨결이 희끗하게 공기중에 묻어났다. 하늘을 점차 물들여오는 붉은빛의 운기(雲氣)가 희끄무레한 숨결 사이로 아롱지며 색을 더했다.


잠시 하늘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보았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시야 저편 아래로 깔린 성도. 가득한 건물들과 성벽 너머로 흐르는 강물과 펼쳐진 길이 보인다. 숲과 협곡 사이에 자리잡은 도시 위로 떠오르는 햇살이 가옥들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문득.


마음이 일렁였다. 고요한 바람결 사이로 느릿하게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감정이 파문을 그리며 섞여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경치 좋구나. 대체 누가 살았던 곳인지. 별천지가 따로 없구만.”

“그래도 신강 아닙니까. 저는 곤륜이 더 좋습니다. 마교를 옆집에 두고 사는 것은.”

“나도 곤륜이 더 좋다. 내 의도를 곡해하지 마라, 단휘야.”


백연의 한쪽 어깨를 턱 눌러오는 무게가 있었다. 어깨를 덮은 무진의 솥뚜껑만한 손을 보며 백연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 무진이 씩 웃었다.


“많이 컸다? 분명히 눈높이가 내 가슴 언저리였는데. 이게 그 노화순청이냐?”

“환골탈태입니다. 무진 사형. 다른거라니깐.”

“흐음. 단휘야. 너 내기한 것 잊지 않았겠지? 마교 모가지를 내가 더 많이......”


투닥거리는 단휘와 무진. 어느새 머리에 열을 올리며 자신들의 공적을 셈하고 있는 것이 우스웠다.


그들을 보며 피식 웃는 백연. 그때 곁에 와 닿는 온기가 있었다.


“생각이 많아.”

“소홍 사형?”

“네 과거.”


소홍이 백연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의 투명한 시선이 백연의 얼굴을 타고 떨어졌다. 약간 졸린듯한 눈매가 인상적인 사형.


이번 일에서 꽤 크게 다쳤다. 백연 자신과 방주 대리를 지키다가 그랬다고 했다. 청화단의 정예 둘을 단신으로 격살했다고. 지난 밤 마교도의 장법에 맞은 여파가 아직도 선명할 것이다. 온몸에 고통이 상당할텐데, 내색하지도 않는 모습이 못내 미안했다.


“우리가 아는건 없지만.”


말하며 자연스레 손을 뻗어 백연의 볼을 매만진다. 부드러운 손길이 쓸듯이 백연의 눈가를 스쳤다.


사형의 손끝에 묻어나오는 옅은 물기. 그것을 알아챈 백연이 눈을 깜빡였다.


‘언제부터.’


잠시 일어난 감정의 파문이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었다. 어째선지.


“그래도 괜찮아.”

“......사형.”

“곤륜은, 다들 그래.”


톡. 소홍의 손가락이 백연의 눈꼬리를 가볍게 두들기고 떨어졌다. 무표정하던 소홍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정리는, 끝났어?”


잠시 백연의 시선이 멀리 향했다가, 가까이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가득했던 도시.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한때 그의 집이자 모두의 마을이었던 곳은 세월 아래 잠들어 사라졌다.


그가 돌아갈 장소는 더 이상 이곳이 아니었다.


백연의 시선이 사형들에게 가 닿았다. 어느새 검을 꺼내어 허공에 휘두르고 있는 단휘와 무진, 백연의 곁에 딱 붙어 그를 바라보고 있는 소홍까지.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래전에 끝냈어야 할 일을. 이곳을 떠나던 날 아침, 그 순간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지금이라면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듯 했다.


“이쪽입니다.”


잠깐의 휴식이 지나고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깊고 깊은 협곡을 전부 올라왔을 때쯤, 하늘 저편에서는 막 모습을 드러낸 태양이 밝게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여긴가?”


흑랑이 물었다. 그의 시선이 사방을 더듬었다.


“기운이 독특한 장소군.”


여느 산길과 같은 비탈을 쭉 올라온 뒤였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산등성이의 언덕이었다. 온통 나무로 둘러쌓인 공간, 그 너머에 작은 벽이 자리했다. 머리 위로 십여장 이상 치솟은 절벽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이.


“기가 흐르는 방향이......이상해. 말도 안되는군. 이리 비틀린 상태로 조화를 이룬다니.”


손을 뻗어 공기를 가늠하던 흑랑이 미간을 좁혔다. 그의 말에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겁니다. 사방 산지의 기운이 전부 이곳에서 뒤틀리니까요.”


백연이 손가락으로 몇군데를 가리켰다.


“저기 저편, 목(木)기를 이은 나무입니다. 저 끝은 폭포와 강쪽으로 이어지는 수(水)기를 엮어 붙들어맨 흔적. 저편은 풍(風)기의 방향을 임의로 조정한 술법......”

“허어, 일평생 이런 것은 처음 보는구려.”

“그럴겁니다. 아마 다시 보기 어려울 천재가 만든 장소이니까요.”


검귀의 휘하에 들어왔던 제갈세가 출신의 무인 제갈소백. 기문진에 더없이 탁월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백연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일대 전체에 술법진을 구현한 그 능력은 가히 기적에 가까운 업적.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무덤 일대를 뒤덮은 모든 기문진의 흐름을 한 자리에 엮어놓은 장소. 열쇠가 바로 이곳입니다.”


눈에 보이는 작은 호수, 커다란 나무, 그 사이로 흐르는 바람과 일련의 여러 기운을 엮어낸 흔적들.


제갈소백의 능력은 그러했다. 전장에서도 적절히 돌맹이를 던져 즉석으로 환혼진을 엮어내던 놈이었다. 누가 보면 사이한 술법을 익힌것이 아니냐 생각할 만큼 진법에 있어서는 탁월한 자였다.


그를 아는 이들은 복룡(伏龍) 제갈공명의 환생이 이놈 아니냐고 장난스레 말할 정도의 인물.


외려 그 능력과 성격 때문에 가문에서 배척 받은 것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전부 지탱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


천천히 걸음을 옮긴 백연이 이윽고 절벽 앞에서 멈춰섰다. 그들의 머리 위로 치솟은 암회색의 바위 덩어리는 깎아지른 듯이 가팔랐다. 수직을 넘어 그들의 머리 위로 살풋 휘어진 거대한 자연물.


“......저건.”


그때 백연의 곁에 다가온 흑랑이 중얼거렸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가 살풋 떨렸다.


“설마 검흔(劍痕)인가?”


그의 말에 일행의 시선이 쏠렸다. 어느새 절벽으로 다가온 사람들의 눈이 한군데로 향했다.


깎아지른듯 떨어지는 절벽의 사이 수직으로 그어진 거대한 선이 있었다. 눈으로 알아보기도 힘들만큼 예리하게 잘려나간 모습. 자연적이지 않은 흔적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누군가의 단 일검(一劍)이 남긴 잔흔.


“이건 대체......설마 이게.”


흑랑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의 눈에 살풋 어린 경악과 감탄이 선연했다.


“이곳이 검귀의 무덤이라 했지. 이게 그자의 검흔인가?”

“그렇지요.”

“......그렇군. 처음 들어보는 별호였기에 의심하고 있었는데.”


흑랑이 옅은 웃음을 흘렸다. 냉막하던 그의 눈이 검흔을 올려다보며 경탄의 빛을 내보였다.


“이게 귀(鬼)의 검이로군. 어울린다.”

“그런것도 가늠합니까? 안법이 좋네요.”

“필수 덕목이다. 무영방의 일원으로써 가장 먼저 훈련받는 것이 보는 법이지. 헌데 이건.”


흑색 장포 사이로 뻗어낸 손이 절벽에 천천히 가 닿았다. 검흔의 옆을 스치듯 매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그야말로 괴물이다.”

“그렇습니까?”


백연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흑랑의 평가가 생각과는 달랐던 탓이다.


전생에 그가 검객으로써 경지에 다다른 것은 맞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저번 생에 마주쳤던 절대자들이나, 이번 생에서 만난 검왕같은 초월적인 무인들에게는 닿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홀로써 만군을 상대하는 강호의 정점들.


그에 비하면 검귀는 부족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흑랑의 말투는 그것과는 조금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노부도 동의하오.”


그때 팔영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절벽을 살피는 눈매가 예리했다.


“이 검격. 일검에 대체 얼마만큼의 고민이 담겼는지 알아보기 어렵소.”

“팔영의 말이 맞다. 검흔에 남은 기파, 검이 지나간 궤적, 여파, 힘을 압축한 정도까지.”


한걸음 물러선 흑랑이 감탄을 흘렸다.


“적어도 검에 한해서 이자는 초월의 격을 지녔다.”

“그리 됩니까? 검왕이라면 이 절벽을 가볍게 갈라버릴 텐데요.”

“......검왕. 그가 강한 무인은 맞다. 허나.”


흑랑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백연을 바라보는 눈에 담긴 옅은 희열. 그 속에서 언뜻 호승심 같은 감정이 엿보였다.


“그 무공의 초월적인 힘과, 검을 다루는 기예는 별개의 것이지. 이자는 진정으로 검의 귀신이다. 과연 검에 얼마나 미쳐야 이런 일격을 남기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군.”


백연이 눈을 깜빡였다.


그랬나. 그리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애초에 본인을 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하는건지.’


물론 저들이 그것을 알 턱은 없었으니.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절벽을 살피기를 잠시. 이윽고 흑랑과 팔영이 아쉬운 표정으로 한걸음 물러서고.


“자, 그럼 어찌해야 하지? 그 문을 닫는다는 것은.”

“별것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십시오.”


백연이 앞으로 나섰다. 자연스레 검을 빼들면서였다.


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이 여휘검의 검신에 닿아 아롱지며 흩어졌다. 검을 비스듬히 든 채로 백연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운이 좋은건가.’


일전이었다면 무덤의 문을 닫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검귀 본인이 닫을 것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기문진의 파훼법. 태청신공을 익히기 전이라면 힘을 끌어모아도 어려웠을 일인데.


하지만 지금이라면 달랐다.


스윽.


생각을 흘리는 것과 동시에 오른발을 움직였다. 자연스레 뻗어나간 발끝이 반보 앞에 멈춰서며 온몸을 이끌었다. 여상히 늘어뜨리고 있던 검끝은 어느새 머리 위로 치켜져 올라가 있었다.


찰나 옆에서 짧게 들이키는 숨소리가 들렸다. 흑랑의 것인듯 했으나 그마저도 곧 귓가에서 지워졌다. 의식이 가라앉는 것과 함께 감각이 사라졌다.


한 호흡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주변의 모든것이 지워지며 눈앞의 절벽만이 인지 속에 남았다. 무아(無我)였다. 손끝을 타고 휘도는 뇌기가 어렴풋이 느껴졌는데, 언제 태청신공을 일으켰는지도 알기 어려웠다.


그저 그의 의지에 반응해 무공이 일어났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동시에 백연의 눈이 번뜩였다. 머리 위로 치켜든 여휘검이 희끄무레한 기파로 물들었다. 잘게 늘어난 시간 속에서 검이 그대로 낙하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백연의 팔은 여전히 치켜 올라간 자세 그대로였다.


한순간 눈에 보인 종격의 환영. 그 수가 세기 어려웠다. 수천, 수만번이 넘게 반복했던 동작. 이미 검로(劍路)는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찰나 수없이 많은 검로의 환영이 눈앞에 스치고, 그 일격이 전부 한 점으로 합쳐져 졀벽 위의 검흔에 완벽하게 겹쳐지는 순간, 백연의 검끝이 낙하했다. 희끄무레하게 일어난 뇌기를 혜성의 꼬리마냥 매단채였다.


직후.


감각이 돌아왔다. 어느새 치켜 들었던 검끝은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백연 자신의 몸은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있는 상태였다. 동시에 치켜든 시야 속, 허공에 옅은 파문을 그리며 분분히 흩어지는 경파 조각들이 보였다.


‘성공했다.’


감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절벽 위로 새겨진 검흔. 검귀가 남긴 흔적과 정확히 일치하는 궤적으로 그어진 검격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 백연이 오른편을 쳐다보자, 알아보기 어려운 표정의 흑랑이 입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후우우욱-


“......”


문득 입을 열려던 백연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한순간 그가 검을 그어낸 장소를 따라 모여있던 대기가 흩어졌다는 것을.


그것을 알아챈 순간 느껴지기 시작했다. 허공을 감도는 거대한 기파. 주변 일대를 포옹하듯 뒤덮고 있던 온갖 종류의 막대한 기운이 풀려났다.


동시에, 시야 가장자리에 자리한 거대한 나무가 살풋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여태껏 치켜들고 있던 굵직한 나뭇가지들이 힘이 빠진듯 조금씩 늘어진다. 일정한 모양을 그린채 늘어선 바위의 위로 쩌적 금이 가고, 눈앞에 자리잡은 작은 호수의 위로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그렇게 고요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변화를 인지하는 것도 잠시.


콰아아아아!


“읏......!”


맹렬한 바람이 몰아쳤다. 짧은 순간 자리를 비웠던 대기가 일제히 제자리로 돌아오며 광풍이 일었다. 머리칼을 사방으로 흩어놓으며 불어닥친 바람이 일대를 휩쓸고 지나쳤다.


이윽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백연이 머리칼을 매만지며 시선을 들어올리자 그를 쳐다보고 있는 흑랑과 눈이 마주쳤다.


“......끝인가?”


물어오는 목소리가 이상했다. 백연은 가만히 주변을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기문진은 파훼되었습니다. 이제 곧이어 이곳이 무너져 내리겠지요.”


균형을 맞춰 유지되고 있던 기문진. 그 조화가 방금 부서졌다. 그 증거로 이곳에 감돌던 비틀린 기운의 감각이 사라졌다.


지금쯤 이 여파가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있을 것이다. 이 주변 일대를 뒤덮은 기문진의 흐름이 깨어졌으니.


“무너진다고?”


흑랑이 의아하게 중얼거리는 순간.


쿠구구궁.


멀리서부터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번쩍 고개를 들어올린 흑랑이 안법을 발해 저편을 응시했다.


“협곡이.”


흑랑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부서져 떨어져 내리고 있는 거대한 바위들이었다. 협곡의 벽을 따라 거미줄처럼 이어지는 금들. 그 사이가 쩌적 갈라지며 서서히 아래로 낙하한다.


“정말 무너지고 있군.”

“문을 닫았으니 말입니다. 이제 시간에 걸쳐 이곳은 다시 들어올 수 없게 사라지겠죠.”


백연이 뒤를 힐끗 하고는 검을 거뒀다.


“그 전에 나가도록 하지요. 이쪽입니다.”


절벽 왼편으로 돌아나가는 작은 길. 동혈(洞穴)로 이어진 어두운 길목을 따라 일행이 걸음을 옮겼다.


가장 앞서 걷는 백연,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를 따라 사람들이 하나둘씩 움직이고.


“흑랑님. 가시지요.”


맨 뒤편에 처진 흑랑이 잠시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그 자리에 새겨진 검흔을 보면서였다.


“팔영, 보았나.”

“......보았습니다.”

“녀석의 검격이 저 검흔과 정확히 일치했다. 적어도 그걸 내치는 순간만큼은......”


흑랑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뇌리에 선명히 새겨진 직전의 일검. 벼락같은 일격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를 않았다.


“궁금하군. 검귀라는 자가 대체 누구인지. 그리고 저놈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중요합니까?”

“개인적인 호기심이다. 어쩌면 선대인 무허님의 기록을 찾아보면 무언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분께서 검귀와 안면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이니 말이다.”

“그렇습니까.”


흑포를 펄럭이며 돌아선 흑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래도 돌아가면 방주님을 한번 뵈어야겠군.”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절벽의 왼편으로 돌아나오는 동혈은 깊고 길었다. 어두운 길을 따라 조용히 움직이는 것도 한참. 백연이 띄워올린 적양공의 희미한 불빛이 다할때쯤, 눈앞이 점차 밝아져 왔다.


이윽고 어두운 동굴의 길을 벗어나자 탁 트인 하늘이 그들을 맞이했다.


어느새 해가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밝은 오전의 햇살이 환했다.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내쉬는 호흡이 청명했다.


“밖이군요.”


루주 선화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옅은 안도감이 실려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귀에 담으며 백연이 조용히 품 안의 서책을 매만졌다.


“갈때도 올때와 비슷하게 움직여야 하겠습니다. 마교가 진을 치고 있는 것을 알았으니.”


백연의 말에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당연히 여기고 따르는 모습이었다. 문득 느껴지는 어색하면서도 익숙한 감각에 눈을 깜빡인 백연이 걸음을 내딛었다. 그 무게가 더없이 후련했다.


“서장에서 말을 구해야겠습니다.”

“그 도시로?”

“응. 그게 최선일 것 같아. 검룡을 살필 의원도 구해야 하고.”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일행이 무심히 기파를 일으켰다. 무인들이 제각기의 보법을 엮어내었다. 이윽고 백연의 걸음과 함께, 일행의 신형이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편으로 이어지는 보법 여파가 선연했다.



※※※



“......밖이 소란하네요.”


객잔 문가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던 소년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본래라면 객잔이 북적북적 했을 시간이건만, 지금은 조용히 구석에서 잔을 홀짝이는 사람 두엇밖에 없었다.


“이놈아. 나가지 말라고 했잖냐.”


그때 다가온 기척이 그의 머리를 툭 치며 타박했다. 객잔의 주인이었다. 풍채 좋은 주인장의 얼굴에 어린 것은 근심어린 기색이었다.


그것을 본 소년이 녹빛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나가지는 않았어요.”

“말이나 못하면. 오늘은 그냥 안에서 있어라. 느낌이 별로다. 저 손님들 나가면 하루쯤 쉬는 것도 좋겠지.”

“......쉰다고요?”

“그래.”


객잔 주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근래 도시에 감도는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본디 새외 무림인들이 많이 오가기에 죽고 죽이는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는 도시라지만, 나름의 질서는 존재했다.


그런데 요 며칠간 분쟁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무인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다반사요, 어제는 아이들 몇명이 별안간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항상 말하지만, 너는 더 조심해야 한다. 그 눈이 너무 눈에 띈단 말이다.”

“아하하. 알겠습니다. 주인 어른.”


그때였다.


갑자기 객잔의 문이 탁 열리며 바깥 바람이 불어들어왔다. 미간을 팍 찌푸린 객잔 주인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더 이상 손님을 못 받으니......”

“그렇습니까? 그럼 다른 곳을 찾아야 하나......”


문가를 쳐다본 소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그곳으로 들어온 것은 무인들 여럿이었다. 제각기 검을 걸치고 있는 모습. 어디서 구르다 왔는지 온몸에 잔뜩 먼지와 흙을 묻히고 극도로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그 기품은 그대로였다.


아니, 한명만 조금 달라져 있었다.


“대협!”


소년이 외치며 달려나가자 맨 앞의 무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를 보며 소년이 눈을 깜빡였다. 이리 키가 컸었나? 분위기도 조금 달라진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외양과 느낌은 그대로였다. 그에게 단검 한자루를 건네주던 친절한 무인.


“며칠 묵을 곳이 필요한데.”


싱긋 웃으며 품속에서 동전을 꺼내는 모습이 여전했다. 그에 객잔 주인이 반색하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본래는 안 받으려고 했습니다만. 안면이 있는 분들이시니.”


그 말에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결정되자 일은 빠르게 해결되었다.


“여기 이곳으로......”


객잔 주인의 안내에 따라 방을 받고, 짐을 풀었다.


선화 또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 도시가 있어 다행이네요.”

“좀 길게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검룡의 상태는 어떤지요?”

“여전해요. 사흘이라 했던가요. 이제 하루 남았군요.”


백연이 눈매를 좁혔다. 그들이 신강에서부터 여기까지 달려오는 것에 꼬박 이틀이 걸렸다. 잠도 자지 않고 내달렸건만, 말을 타고 꾸준하게 움직이는 것보다 빠르게 올 수는 없었다. 제각기 지치고 부상을 입은 탓이었다.


“의원이 필요합니다. 정 시간이 부족하면 귀식대법의 지속 시간을 어떻게든 연장해보겠지만,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닐테니까요.”

“그런데, 이 도시에 알고 있는 의원이 없으니 수소문을 해야 할텐데......”


선화가 걱정스레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저기.”


곁에서 조심스레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녹빛 눈동자를 반짝거리는 소년. 그가 객잔에 도착하고 여태껏 졸졸 따라다니던 소년이었다. 저번의 일 때문일까. 그에게 더없이 호의적인 눈을 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아니면 천성이 그런건지.


“의원이 필요하신 거죠?”

“그렇죠.”

“......제가 한명 알고 있는데.”


소년이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보였다.


“불러드릴까요?”


찰나 백연과 선화의 시선이 동시에 모여들었다. 빠르게 눈짓을 교환한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년이 싱긋 미소지었다.


“지금 바로 나갔다 올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곤륜환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42 철야방(8) +4 23.12.22 2,996 84 19쪽
141 철야방(7) +4 23.12.21 3,008 83 17쪽
140 철야방(6) +4 23.12.20 2,986 83 17쪽
139 철야방(5) +4 23.12.19 2,999 84 19쪽
138 철야방(4) +4 23.12.18 3,130 79 18쪽
137 철야방(3) +5 23.12.16 3,199 80 15쪽
136 철야방(2) +3 23.12.15 3,123 83 15쪽
135 철야방 +4 23.12.14 3,118 86 16쪽
134 재회(3) +5 23.12.13 3,210 87 19쪽
133 재회(2) +4 23.12.12 3,214 86 16쪽
132 재회 +5 23.12.11 3,307 88 17쪽
131 성화방주(3) +7 23.12.09 3,293 79 15쪽
130 성화방주(2) +5 23.12.08 3,284 85 20쪽
129 성화방주 +5 23.12.07 3,360 89 16쪽
128 사천(4) +8 23.12.06 3,337 88 19쪽
127 사천(3) +8 23.12.05 3,355 92 22쪽
126 사천(2) +5 23.12.04 3,426 87 17쪽
125 사천 +8 23.12.01 3,554 87 15쪽
124 월동(越冬)(5) +6 23.11.29 3,524 88 17쪽
123 월동(越冬)(4) +5 23.11.27 3,456 89 17쪽
122 월동(越冬)(3) +6 23.11.24 3,524 84 15쪽
121 월동(越冬)(2) +5 23.11.22 3,587 82 16쪽
120 월동(越冬) +5 23.11.20 3,687 91 15쪽
119 영물(5) +7 23.11.17 3,768 87 19쪽
118 영물(4) +6 23.11.15 3,627 91 15쪽
117 영물(3) +7 23.11.13 3,653 86 15쪽
116 영물(2) +7 23.11.10 3,814 86 18쪽
115 영물 +7 23.11.08 3,941 85 15쪽
114 네가 돌아올 곳(11) +5 23.11.06 3,835 89 17쪽
113 네가 돌아올 곳(10) +5 23.11.03 3,959 92 1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