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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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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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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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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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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네가 만든 마을(7)

DUMMY

※※※



-네가 어디서 왔다고 했지?

-청해 옥수입니다. 대장. 주변 사람한테 관심을 좀 가지십쇼.

-이 정도면 충분히 관심 있는거지. 그런데 옥수면 거기 곤륜애들 있는데 아니냐?

-맞습니다. 애초에 저, 곤륜파 출신인데요?

-뭐? 니가 그 늙다리 꽉막힌 노친네들 문파 출신이라고?

-음. 장로들께서 조금 답답한 면모가 있으시긴 하죠. 그래도......


머릿속에 대화가 빠르게 스친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와 같았다.


백여년의 세월 아래 낡아버린 책장. 내공으로 보호해 넘기고 있음에도 조금씩 끄트머리가 바스라진다. 책의 내용은 틀림없는 비급이었다. 곳곳에 청휘의 필체로 쓰여진 구결과 내공을 운용하는 법. 그리고 각종 첨언까지.


그러나.


그럼에도 비급이라 말하기 어려웠다. 잠깐 훑어보는 것 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비급이라기엔 너무 잡설이 길었고, 생각이 많았으며, 때때로 일기처럼 보이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연속해 적힌 질문과 고민. 대답없는 누군가에게 묻는 의문들.


그것은 탐구와 고민의 흔적이었다.


읽는 내내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린다. 여태껏 기억 깊은곳에 묻어놓은 목소리였다.


-대장, 이것 좀 봐주실 수 있습니까?

-뭔데.

-검법인데요. 심법을 응용해서 이렇게......

-귀찮은데. 일단 보여줘봐.


곳곳에 때로는 대화 내용이 적혀 있기도 했다.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여름날 검을 물어보던 청휘. 녀석과 나눴던 대화에 관한 내용이 그대로 책장에 새겨져 있다. 그날 바로 돌아오자마자 써내려 간듯.


[대장의 말이 맞다. 심법의 운용 주기가 너무 길기에 그 위력이 약해져 검법에 숨은 파괴적인 면모가 드러나지 않는다. 본래 곤륜파의 장로들께서는 막대한 양의 내공으로 그것을 해결하셨지만 나는 내공이 부족하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 한가지 생각으로는 소주천의 속도를 가속시키는 방법을 시도해보는 것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써내려간 문장들. 청휘의 고민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다. 아마 이 방안에 앉아 입술을 삐죽여가며 붓을 놀려댔겠지. 그러다가 생각이 안나서 막히면 문을 열고 앉아 바깥을 빤히 응시했을테고.


그러다가 지나가는 검귀를 향해 괜히 말을 툭툭 던져댔을 것이다.


-대장! 바빠요?

-바쁘다.

-그러지 말고 무공 한자락만 봐주세요. 이거 심법이 이런식으로 가면 어떨까 싶은데.

-왜 그리 그거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네. 쉬운거 해라 쉬운거. 쉽다고 약한거 아니다.

-그래도 곤륜 출신이잖아요. 무공에 애정이 있으니 개량도 시도해보는겁니다. 혹시 알아요? 천하에 둘도 없을 절세신공이 나올지?

-퍽이나.


촤르르륵.


넘어가던 책장이 멈춰섰다. 빠르게 내용을 훑은 백연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첫장으로 돌아왔다.


잠시 숨을 고른 백연이 책의 표지를 조심스레 넘겼다. 행여나 바스라질세라.


표지를 들춰내고 남은 첫장. 유독 유려한 필체로 힘주어 쓴 서문이 보였다. 그 면모에서 성정이 드러나는 것만도 같았다.


[가장 빛나는 별은 누가 이끌지 않아도 스스로 빛난다. 새벽녘 밤하늘에 걸린 천추성(天樞星: 북극성)이 그러하듯.


허나 그런 이들은 많지 않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앞서 나가는 별의 뒤를 좇으려 무던히 애를 쓰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빛나지 못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딪히고, 싸워내며, 끊임없는 고민을 통해 스스로를 불태운다. 그리하여 빛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과분하게도 청휘(淸輝)라는 이름을 받아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살려 노력하고 있다. 곤륜이라는 뿌리가 있고, 이끌어주는 별이 있으며, 등을 받쳐주는 친우들이 있다.


이미 셋을 마음에 품은 것이다. 합일이다. 달리 정기신(精氣神)이라고도 일컬을 수 있겠다.


내가 어릴적부터 몸담았던 곤륜파의 운연공(雲煙功)을 정(精)으로 삼는다. 본디 그릇이라는 것이 그렇다. 사형 사제들과 노닐던 기억이 곧 집이라 할 수 있겠다. 부서지지 않는 추억이다. 미진한 성취로도 육체를 바꿔주는데, 뒤따를 모든 무학이 몸에 해를 입히지 않도록 지켜줄 것이다.


뒤이어 이곳에 와 만난 동료들의 무학을 엮어 기(氣)로 삼는다. 친우들에게 일일이 물어보러 다닌 것을. 흔쾌하게 허락해줄 때마다 감사함을 갚을 길이 없다. 전장에 검을 들고 서면 언제나 누군가가 등 뒤를 지키고 서있다. 평시 투덜거리는 소백마저 그러하다. 항상 앞만을 보고 꼿꼿이 설 수 있게 해준다. 외치는 목소리 하나 하나가 기운을 북돋아주는데, 백알의 영단보다 가치있는 외침이다. 무학을 펼치는 이의 몸에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귀라 불리는 남자가 있다. 칠흑같은 묵령검(墨靈劍)을 늘어뜨리며 달려나가는 그보다 눈부신 검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스스로 빛나는 별이다. 모두를 이끄는 빛. 신(神)으로 추구하기에 그보다 더 알맞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제나 가장 앞에서 검을 내치고, 가장 뒤의 사람을 살핀다. 마음 한켠에 목표로 삼아 끊임없이 정진함에도 멀어지는 기분이 들 정도이다. 그런 그의 검식 한자락을 마음의 별로 새겨 꿈에 담고자 한다.


이 모든것을 모아 진기를 이끄는 의념으로 삼는다. 내가 미진하여 무학의 진정한 가능성에 닿지 못한다 해도 괜찮다. 그 뜻을 가슴에 새긴 것으로 족하다.


이것은 스스로를 불태워 빛나고자 함이요, 한발 더 나아가고자 하는 발버둥이니.


언젠가 내가 다다르고자 하는 태청(太淸)이다.]


“......”


짧은 서문의 끝에 다다른 백연의 손이 멈췄다.


글에 담긴 내용. 청휘의 속삭임을 그대로 듣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속에 품고 있던 마음. 나아가고자 하는 발버둥. 그러면서도 무공의 의념을 저리 삼는 것이 꼭 저의 성정과 같다 느껴졌다.


“이것, 곤륜파 사람이구나.”


천천히 서문에서 눈을 떼어내던 백연의 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태껏 글에 열중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사람. 소홍이 글을 훑고는 백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선배?”

“선배네.”

“무슨, 무공?”


물어오는 목소리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백연의 표정과 반응을 보았을 것임에도.


오히려 고마웠다. 비급을 넘기며 잠시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탓이었다. 무인에게 있어서 좋지 않은 일이다. 흔들렸던 호흡을 가라앉히며 백연이 비급을 다시 들어올렸다.


“살펴봐야 알 것 같아. 그런데 운연공을 기초 그릇으로 삼는다니. 진기 운용에 관한 무학인 것 같은데. 검법 응용에 관한 내용도 있어. 딱 하나의 무공을 정해서 적어놨다기 보단......”


비급이 두껍다. 두터운 종이의 양이 여타 비급의 배는 되는 듯 했는데, 그 안에 적힌 내용이 다양했다. 그러나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 말한 태청. 이게 이 사람이 만든 무학의 기본 의념인 것 같아. 이걸 기반으로 진기를 짜내고, 보법을 펼치며, 검법을 자아내는 것. 그러니 여러 무학을 집대성 해놨다고도 볼 수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은.”

“진기운용법.”

“그래. 그걸 기반으로 각 무학에 대해 본인이 생각한 바를 묻고 구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 하나의 구결을 선택해 익힐 수 있는 비급은 아니네.”


비급이라는 말에 부합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일기라 봐도 좋을까. 처음 써본 비급이라는 것이 너무 눈에 여실히 보여 옅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쓸것이라면 정리라도 하고 쓰지.


그럴 시간이 없었을련지.


‘그러고 보니 자꾸 나한테서 뭘 숨기더니, 이거였나.’


되짚어보면 갑자기 그를 만날때마다 뭔가를 휙 숨기던 청휘였다. 당시에는 그런 것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돌이켜보니 이 비급 외에는 딱히 그럴만한 것이 없었다.


“내용, 알려줘.”

“음......”


촤르륵.


백연이 책을 넘기다 한 지점에서 멈춰섰다. 가장 명확하게 구결이 적혀 있는 부분. 초반부 태청의 원리에 대해서 묻고 고민하다가 첫 구결을 써내려간 지점이었다.


“운연공 기초는 앞에 적어두니 생략하겠다. 운연공으로 일으킨 바람을 쪼갠다. 그것들에 각기 성질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한데, 하나는 소백의 소천성공(小天星功)의 성질에서 생각을 얻었다. 제갈의 무학은 그들의 성정마냥 유유자적 하면서도 짜임새 있다. 유(流)의 성질을 하단전 기해혈(氣海穴)로 뽑아내 위로 회전시킨다. 다른 한줄기 바람은......”


백연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의 눈이 빠르게 구결을 훑었다. 혈도를 다루는 방식, 움직이는 정도. 그것이 탁월하다 말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갈라진 모든 기운은 임독맥을 따라 한갈래로 합쳐든다. 앞으로 솟은 기운은 천돌혈(天突穴)을 통하고, 뒤로 솟은 기운은 옥침혈(玉枕穴)을 관통한다. 그리하여 상단전 백회혈(百會穴)에서 합일을 이룬다.]


발상이 있었다. 고민하고 부딪혀 만들어낸 생각.


[상단전은 지극히 위험한 부위이다. 그러나 역으로 자연지기와 호흡하는 통로기에 세 단전중 가장 단단하다 할 수 있다. 반동을 신(神)으로 흡수해 몸에 오는 부담을 줄인다. 그렇게, 태청의 기반이 마련된다.]


어처구니 없는 발상. 하지만 근거가 없지 않았다. 이어지는 첨언이 가벼웠다.


[곤륜의 무학은 영물에 이르는 길이다. 영성이 발달한 영물들은 상단전 신으로 기예를 떨친다. 그들의 불가사의함은 그런 곳에서 비롯되는데, 이를 무공에도 적용하고자 했다. 스스로의 몸으로 수천번 시도해보았으니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미친 자식.”


백연이 헛웃음을 지었다.


자칫하면 죽거나 주화입마에 빠질지도 모르는 무공을 수천번이나 시도했다니.


돌이켜 보면 무공을 연습할때도 그런 면모가 있었다. 대책없이 무식한 방식. 하지만, 그 결과로 지금 이 비급에 적혀있는 무학에 짜임새가 부여되었다. 서문에 적힌대로 한발 더 나아가고자 발버둥을 쳤기에. 끊임없이 반복해낸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백연?”

“이 무공, 익혀야 할 것 같아.”


탁.


비급을 덮은 백연이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에서 비급의 구결과 의념이 맴돈다. 어느새 마음을 파고들었다. 삽시간에 구결이 해체되고 흩어지며 다시 조립된다. 운연공을 기반으로 한 태청. 약간만 비틀어도 적용하기 어렵지 않을 듯 했다.


다만, 유일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너, 아직 다쳤잖아.”

“알아.”


걱정섞인 소홍의 목소리. 그 말이 맞았다. 지금 운기요상도 하지 않고 이 무공을 그대로 시도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각기 따로 행하기에도 시간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운기요상을 하는데에만 걸리는 시간이 적지 않다. 그리고 나서 태청을 기반으로 새로운 무학을 익힌다? 그때쯤 되면 이미 이곳은 전장일 것이다.


“안전할때, 익히는게.”

“사형. 흑랑이 상대할 수 없는 적이라 했어. 전패라고.”


지금의 무영방 방주 대리는 강하다. 전 무림을 놓고 보아도 그렇다. 아직 한참 어리다 말할 수 있는 청년. 약관을 벗어난지 그래 오래지 않았다. 칠룡과 견주어도 네댓살 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전 무림의 기재라 불리는 칠룡을 상회하는 무위를 지녔다.


아직 지금의 자신은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


그가 금안나찰을 격살하고 금원방주와 손을 겨룬 것은 맞다. 허나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는 것이 무위의 고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물며 그 상대가 흑랑을 가볍게 패퇴시키는 괴물이라 하면.


“마교의 호법 아래에 있는 단주야. 목숨을 내던지며 싸우는 전법에 있어서는 나와 동등하거나,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


과감함으로 무위의 부족함을 메꾸는 방식이 쉬이 통하기 어렵다고 봐야했다. 정사의 무인들은 기본적으로 목숨을 생각하고 싸운다. 마도는 달랐다.


필요하면 스스로의 목숨조차도 승리를 위한 판돈으로 거는 자들.


인정하기는 싫지만, 마교의 종자들은 싸우는 방식에 한정해서는 그와 동류(同流)인 면이 있었다. 아니면 검귀와 동류라 해야할까.


“그때 그 백광에 닿아야 해. 그래야 확실하게 모두와 함께 살아나갈 수 있을테니.”


찰나 풍백마저 당황하게 만든 일격. 태청을 보는 순간 느꼈다. 이 무학을 통해 그 백광을 잡아채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제멋대로야.”

“아하핫.”


불만스레 입술을 깨무는 소홍의 모습에 백연이 웃었다.


“운기요상을 하며 동시에 무학을 뜯어고칠거야. 심법의 깊은 부분을 파헤칠 생각인데. 아직 적양공과 현음공의 끝을 보지 못했어. 그것 때문에 준비한게 하나 있긴 한데.”


스윽.


백연이 품 안에서 종이 한장을 꺼내들었다. 새빨간 핏물로 적힌 글씨. 하령이 자신의 피를 제물삼아 제공해준 술법무공의 매개. 괴황지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물건이었다.


본래는 무덤에서 별일이 없다면 곤륜에 돌아가 쓰려고 했건만.


“이걸 쓸거야.”

“하지만, 내공이 충분해?”


묻는 목소리에 의문이 담겨있다. 근본적인 축기량을 지적하는 물음. 사형의 말이 맞았다. 지금 그는 세가지 행위를 동시에 도전하려 하는 것이었다. 운기요상을 해 내상을 치료하는 것은 물론이요, 술법무공을 일으켜 심상에 들어간다. 그리고 새로운 무학을 이끌어내기 위해 구결을 몸에 돌린다.


주화입마에 걸리기 딱 좋은 행위.


당장 백광의 검격을 펼칠때 끌어쓴 내공도 다 회복되지 않았는데, 직전 마교도들을 상대로 연이은 전투까지 치렀다.


“그 노인이 준 영단......”

“부족해. 그거, 내상 치료용이잖아.”


소홍의 지적에 백연이 입을 다물었다. 조금 떼서 먹어본 바로는 그랬다. 기운이 맑고 정순하긴 했으나, 내상을 치료하는데 탁월한 효과만 있을 뿐. 다른 영단처럼 축기량을 비약적으로 늘려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애시당초 약재 몇개를 섞어서 이런 물건이 나온 것부터가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영단들......”

“네가 오염된거라며.”

“오염이라니. 충분히 쓸 수 있어. 긴 세월동안 조금 불순물이 섞여들어가긴 했지만.”

“평소라면, 되겠지. 지금도 돼?”

“......어렵지.”


기운에 티끌만큼이라도 불순함이 있으면 어렵다. 복잡한 일이라서 그렇다. 본래 일반적으로 내공을 쌓는다 하면 영단에 약간의 불순물이 섞여 있어도 운기를 하는 과정에서 세밀하게 걸러낼 수 있다. 지금은 그런 과정이 불가능했다.


“그래도 다른 해결책이 없어. 영단을 섭취하고 나머지는 내가 섬세하게 조작하는 것이 가장 나아. 지금 정순하면서도 막대한 내공을 얻어낼 그런 방법은......”

“있지.”


후욱.


코끝에 옅은 향이 감돌았다. 주변을 따라 몰려든 기파. 흑색 무복을 늘어뜨린 유성이 언제 왔는지 집 앞에 서 있었다. 그새 운기조식을 끝내고 온 것인지, 서서히 낮아지며 하늘을 물들이는 태양을 등 뒤에 건채였다.


가벼이 손을 내미는 모습.


“엿들으려고 한 것은 아닌데, 귀가 좀 밝은 편이라.”


미소가 걸려있다. 그 손에 담긴 작은 비단 주머니는 본 적 있는 물건이었다. 곤륜산에서 농이랍시고 밥값 이야기를 꺼냈을때 유성이 들이밀어 자신을 당황시켰던 물건.


“자소단 정도면 네가 말하는 요건에 부합될 것 같은데.”


백연이 유성을 쳐다보았다. 얼굴에 담겨있는 표정은 잔잔한 진심이었다.


“......괜찮겠어?”

“말했잖아. 나는 쓸 생각이 없다고.”

“부담이 막대한걸.”

“부담을 따질 상황은 아니지 않나?”


말하면서 웃는다. 수려하게 휘어드는 눈매를 보던 백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입술을 깨문 그가 유성의 손에서 비단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고마워. 반드시 갚을게.”

“그건 돌아가고 생각하는 걸로.”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돌리자 그를 바라보고 있는 소홍의 눈길과 마주쳤다.


“지금, 할거야?”

“응. 더 망설일거 없으니까.”

“호법, 서줄게.”


담담한 소홍의 어투. 뒤이어 유성이 입을 열었다.


“얼마나 예상하고 있어?”

“늦어도 한시진. 그 안에는 마무리 지을거야.”


백연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의 머릿속을 따라 휘도는 구결. 비급을 집어든 백연이 청휘의 집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선을 교환한 소홍과 유성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눈앞에 놓인 것은 청휘의 비급과 하령의 종이, 노인의 영단. 그리고 화산의 자소단이었다.


잠시 심호흡을 한 백연이 비급을 집어들었다. 그 안의 의문과 고민. 태청의 구결이 적힌 장을 펼쳐든 백연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볍게 집어든 노인의 영단을 한입에 삼키고, 뒤이어 자소단을 입에 물었다.


동시에.


하령의 종이에 손을 올린다. 이미 운기요상은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일어난 맑은 기운이 쾌속하게 세맥과 혈도, 근육을 돌며 체내를 어루만진다. 그와 함께.


-술법무공의 구결. 잘 들어. 하나라도 틀리면 위험하니까.


머리 한 구석에 새겨둔 술법무공의 구결을 떠올린다. 삽시간에 상단전 백회혈이 뜨겁게 자극되어 오는 것만 같은 기분과 함께 기운이 줄기줄기 풀려나왔다. 귓가에 들려오는 촤르륵 소리. 수십, 수백장의 종이가 흩날리는 것 같은 환청을 느끼는 순간.


쩌저저정!


눈을 감았음에도 눈부시게 새하얀 백광이 시야를 물들였다.


직후 백연이 눈을 떴을때, 그가 있는 곳은 청휘의 작은 방 안이 아니었다.



※※※



문을 닫고 나온 소홍과 유성. 잠시 집을 응시하던 유성의 눈썹이 휘어들었다.


“기운이......”


대기를 따라 일렁이는 막대한 기파. 그 속에서 언뜻 섞여나오는 기파들은 여러 갈래였다. 수기, 화기, 풍기, 자소단의 향과 알지못할 여러 기파들까지.


전부.


합쳐져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저 어린 소년의 몸에서 저만한 기류가 일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


잠시간 그것을 응시하던 유성이 이윽고 몸을 돌렸다. 지금 그의 역할은 여기서 가만히 감탄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백연은 맡길게. 소홍.”

“응.”


짤막한 말을 남기고는 그대로 암향표를 펼쳤다. 잠시간 운기조식을 한 것으로 빠르게 회복한 유성이었다. 만전에 가까운 상태였는데, 몸이 매우 가벼웠다.


한달음에 먼 거리를 움직였다. 저편 건물들의 지붕 위에서 망부석처럼 서 있는 하오문의 두사람.


삽시간에 그들의 곁에 착지했다.


“뭐라도 보입니까?”

“흐음. 직접 보는게 좋겠구려.”


한손으로 턱을 쓰다듬는 팔영. 그의 눈이 가늘어진 것을 보며 유성도 고개를 들었다. 팔영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는 순간.


“......이런.”


유성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도시 저편. 늦은 오후의 거리를 푸르게 물들이는 강렬한 불빛. 거대한 화염이 압축되어 치솟고 있었다. 도시 전체를 불사르려는 양.


“청화라 했죠. 이름값을 하는군요.”

“아예 도시를 태우면서 전진할 생각이에요. 기문진의 근간을 부숴버리면 자연히 해제되니.”


딱딱해진 루주의 목소리가 거들었다. 검파에 손을 올린 유성이 천천히 기운을 일으켰다.


“백연이.”


강해져 온다고 했다. 유성의 믿음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러니.


“한시진 안에 온다 했습니다.”

“한시진. 기문진만으로는 그 시간을 벌기 어렵겠소만?”

“걱정 마시지요.”


어느새 해가 하늘 서편을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시간이 바람같이 흘러간 탓이다. 저편에 일어난 푸른 화염을 바라보며 유성이 검을 빼들었다. 금속의 마찰음이 아롱지며 흩어졌다. 하늘에 서서히 부서지며 노을을 이루는 햇살마냥.


“앞으로 한시진. 자하(紫霞)의 시간으로 만들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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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영물(4) +6 23.11.15 3,627 91 15쪽
117 영물(3) +7 23.11.13 3,653 86 15쪽
116 영물(2) +7 23.11.10 3,814 86 18쪽
115 영물 +7 23.11.08 3,941 85 15쪽
114 네가 돌아올 곳(11) +5 23.11.06 3,835 89 17쪽
113 네가 돌아올 곳(10) +5 23.11.03 3,959 9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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