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6.15 18:10
연재수 :
288 회
조회수 :
1,507,789
추천수 :
30,263
글자수 :
2,199,617

작성
23.09.29 18:10
조회
4,585
추천
106
글자
21쪽

네가 만든 마을(8)

DUMMY

※※※



“여기가.”


백연이 시선을 들어올리며 뇌까렸다.


“심상.”


시야에 담긴 풍경. 재해(災害)였다. 인세를 벗어난, 한없이 불가해에 가까운 광경.


눈에 담긴 시야 한 가운데를 기점으로 온 세상이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쿠르르릉.


작열하는 화염이 대지를 휩쓴다. 시야 왼편의 시뻘건 불꽃. 지저에서부터 창공까지 끝을 모르고 치솟으며 몸을 꿈틀거린다. 보이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먹어치우며 전진한다. 세상을 불태우는 불꽃.


쩍쩍 갈라진 대지가 열기를 견디다 못해 녹아내리고 불타버린 세상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인세에 보기 어려운 광경. 불문에 나오는 지옥도를 형상화 하면 이리 될까. 호세팔천(護世八天:불교의 호법신)의 일익인 화천(火天)이 지상에 강림한 듯한 형상.


그 열기로 인해 사방 대지가 녹아내리다 못해 하얗게 달아오르고 있다. 저편 끝자락에서 느릿하게 고개를 치켜드는 하얀 불꽃.


그대로 내버려 두면 이 세상 전체를 삼키고도 남을 화염이다. 종국에는 심상이 주인을 먹어 치우고 집어 삼킬테지.


그러나.


불꽃은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시야 왼편 전체를 불태울 정도로 거대해졌음에도 심상을 넘어 백연 스스로의 몸을 집어삼키지 못하는 이유.


쿠구구궁.


지천이 울렸다. 반으로 갈라진 세상의 오른편. 그 높이의 끝을 알 수 없는 해일이 몸을 서서히 일으킨다.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검은 바다. 한없이 깊고 어두운 대해(大海)가 그 거대한 몸을 느릿하게 들어올린다.


속도가 느리다. 쾌(快)와는 거리가 멀다 할 수 있는 움직임. 그러나 대해의 힘은 본다 해서 막거나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격에 지천을 뒤흔들 힘이니.


찰나 시야에 스친 것은 짙푸른 창공. 반으로 갈라진 세상 사이, 화염과 파도의 중앙에 새겨진 하늘이 있었다.


그곳을 기점으로 작열하는 화염과 거대한 파도가 부딪히는 순간.


쩌저저정!


뇌성이 창공을 찢었다. 일순 피어오른 강렬한 백광이 시야를 선명히 물들이며 세상에서 색을 지운다. 연속해 터져나오는 우렛소리가 귀청을 가득 채우고 청각을 먹먹하게 만든다.


한순간 백연이 눈을 감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빛.


직후 세상을 채운 뇌광(雷光)이 흩어지고, 백연이 다시 눈을 뜨자 한결 가라앉은 풍경이 보였다. 일렁이는 화염과 꿈틀거리는 바다.


간간히 부딪히며 자그마한 뇌명을 일으킨다. 먹먹해진 귓가에 이명이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백연이 숨을 가다듬었다.


“이런 것이었나.”


백연이 나직히 중얼거렸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 인세를 벗어난 듯 보이는 그 광경의 근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눈에 담는 순간 깨달은 것이다.


그가 익힌 두가지 내공운용법. 적양공과 현음공. 각기 화기와 수기를 다루는 무공이다. 지금 그의 심상에 자리잡은 것은 두 무공의 가능성의 한계까지 닿은 미래. 나아가고자 하는 길이다.


“......검왕과는 다르네.”


하령의 시험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제대로 발을 들인 그의 심상. 검왕의 심상에 들어갔을 적의 경험과는 많이 달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검왕은 위계를 뛰어넘어 완성됨에 가까워진 초월자. 이미 하나의 의념이 굳건하게 자리잡은 것이다. 백연 자신은 아직 그렇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의 심상속 의념에 담긴 것은 가능성의 잔영들.


본디, 무인을 넘어 사람을 이루는 근간은 세가지가 있다. 정기신. 신체와 기운, 그리고 영성.


무공은 그런 세가지 근간을 구결로 엮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힘을 현실에 불러내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 구결을 이끄는 것은 무공에 담긴 의념과 생각. 추구하는 목적.


본래 무공의 근간이 도가나 불문의 수행자들이 만든 수련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무공은 단지 강해지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구결에 새겨넣은 의념을 통해 스스로의 한계를 넘기 위한 방법이니.


그렇기에 무공을 배우고 익히는 행위, 무공의 갈래들을 모아 무학(武學)이라 일컫는다.


심상은, 그런 의념과 생각을 담는 공간.


원래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하기 어려운 곳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어렵듯이. 심상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은 위계를 뛰어넘어 나아가는 무인들에게만 허락된 경지.


“하령한테 감사를 전해야 하나.”


백연이 허공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술법무공은 여타 무공과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상단전을 이용해 불가해에 가까운 기예를 펼치는 것인데, 그 공능이 이적에 가깝다. 본래라면 아직 그가 발을 들이기 어려운 심상에 이리 들어올 수 있는 이유.


하령의 술법무공을 통해 편법에 가까운 방법을 사용했다. 하령의 피로 적힌 종이라는 귀중한 매개까지 사용해가면서. 이리 미완의 심상을 직접 목도하게 된 것이다.


쉬이 찾아오지 않을 귀중한 기회.


“이제......”


백연이 손을 뻗었다. 어느새 나타나 손에 잡힌 한권의 서책. 청휘가 써낸 비급이 심상 속에서 그대로 백연의 손에 들렸다. 그 안에 담긴 구결들을 머릿속으로 되뇌인다.


동시에 몸을 따라 휘도는 영단의 기운이 느껴졌다. 운기요상으로 몸의 내상을 치유하고 있는 과정. 뇌리를 두개로 쪼개어 각기 다른 일을 수행하는 기분이다. 그런 복잡한 과정을 행하면서도 백연은 침착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인다. 가능성이.”


쩌정!


대기를 가르는 벼락의 줄기. 화염과 파도가 부딪히는 창공의 백광을 눈에 담았다.


‘반동은 정(精)과 신(神)으로 나누어 담는다. 하단전 기운을 뽑아 중단전에서 충돌시키고, 상단전 백회혈을 이용해 흡수.’


뇌까리며 기운을 끌어올린다. 내공이 부족하지 않았다. 심상에 진입하기 직전 삼킨 자소단.


화산의 절세 비약을 몸에 품었다. 노을처럼 부드러이 내려앉은 막대한 양의 내공. 그 양이 더없이 거대하다. 전부 담아내지 못하면 역으로 주화입마에 이를 수 있을만한 힘.


“후.”


숨결에 노을이 아롱진다. 눈을 가벼이 쓸어내리는 순간, 눈동자가 짙은 자색으로 뒤바뀐다.


안법 자령안을 일으킨 백연이 발끝에 기파를 둘렀다. 보법 화신풍을 일으키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동시에, 펼쳐든 서책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심상세계에서 나타나는 것은 전부 백연 자신의 마음에 담긴 행위. 뇌리에 새겨놓은 청휘의 구결이 촤르륵 풀려나오며 그 모습을 형상화시킨다.


아롱지는 기파가 백연의 시야 주변을 따라 유형화된 글자로 새겨지는 모습.


[일하곤륜(日下崑崙)의 새벽은 구름에 잠겨, 삼청(三淸)의 풍광을 그려내니. 이른 새벽의 무인은 고요한 검격으로 하늘에 닿고자 하고.]


그와 함께 반으로 갈라진 세상에서 화염과 파도가 모여들기 직전.


쿠웅.


소년의 걸음이 진각을 밟았다. 보법이 풀려나오며 새하얀 장포와 자색 안광이 혜성의 꼬리마냥 길쭉하게 뒤편으로 늘어진다.


찰나, 휘몰아치는 화염과 거대한 파도가 재차 부딪히고.


쩌저저정!


눈을 시리게 만드는 새하얀 백광이 대기를 가르는 순간. 허공에 백연이 손을 뻗었다. 손아귀에 뇌광을 휘어잡을 듯이.



※※※



“검룡이 가능할거라 보시오?”


지붕 위. 외팔의 노인이 흑포를 펄럭이며 시야를 가늠했다. 조용한 물음을 입에 담으면서였다.


“상대는 청화단주인 것을.”

“......아니요. 불가능해요.”


곁의 루주가 답했다. 그녀의 손끝에 쥐어진 철선이 지는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고아한 얼굴. 뭇 남성을 쉬이 홀릴법한 그녀의 눈매가 걱정으로 휘어든다.


“전력으로 부딪히면 일각(一刻:15분). 시간을 끈다 해도 이각 정도겠죠.”


그녀의 눈이 도시 저편을 응시했다. 직전 화산파의 기재가 장포를 펄럭이며 달려나간 방향이었다. 그가 있던 자리에 암향표 내공에서 흘러나온 옅은 향만이 잔영처럼 남아있었다.


“검룡의 무위가 제가 아는 것 그대로라면. 한시진을 버티는 것은 불가(不可).”


담담한 선언이 뒤따랐다.


하오문 천라방의 일원인 루주 선화. 정보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개방과 비견되는 자들이다. 오히려 양은 적으나 질에 있어서는 더 우위라고도 불리는 이들.


승패를 가늠함에 있어 이보다 정확한 눈을 찾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녀가 저리 말한 이상, 그것이 사실이라 봐야할 터.


그러나.


“......허면. 백연 공자가 금안나찰을 격살할 가능성은 얼마나 되었소?”


뒤따르는 팔영의 물음에 루주가 눈을 깜빡였다. 예상치 못한 물음에 당황한 모습.


“무슨 의미인가요?”

“말 그대로요. 당시의 백연 공자. 암화라는 별호를 얻기도 전이지. 그 어린 소년이, 금안나찰을 상대해 목을 베었소. 그 전은 또 어떻고. 혈사귀를 단신으로 격살했는데.”

“그야......”


루주가 팔영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불가. 입니다.”

“그렇소?”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이야기 하겠죠. 후대에도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릴만한 기적.”


루주의 말에 팔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는 그런 사람이오. 목숨을 걸고 백이면 백 정해져 있다 말할 결과를 뒤집는데.”


팔영의 눈이 도시 저편을 향했다. 여전히 거칠게 치솟으며 하늘을 물들이는 푸른 화염. 그 기세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점차 강해지며 느릿하게나마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


“그렇다 하면, 검룡 또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겠소?”

“동의하기 어렵네요. 공자는 특별한 사람이에요. 물론 화산의 검룡도 더없이 특출난 기재라 하지만......”

“검룡은, 배우고 싶다 했소. 공자의 싸우는 방식을.”


팔영의 말에 루주가 지그시 시선을 돌렸다. 점차 하늘을 물들여오는 노을. 그것을 배경으로 펼쳐진 푸른 화염.


“공자는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변화시키는 재능이 있소. 나는 믿어보고 싶구려.”

“청화단주를 상대로 한시진.”


루주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에 빛이 번뜩였다. 서서히 일어나는 그녀의 안법.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주변의 청화단원들이 많아요. 홀로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인데.”


루주가 팔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어느새 하나 남은 손으로 비도를 뽑아든 팔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간, 우리도 벌어야 하지 않겠소.”

“오랜만이네요. 일선에 나서는 것은.”


루주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철부채를 허리춤에 꽂은 그녀가 품에서 검을 꺼내었다. 짧고 기다란 두 자루의 검. 하나를 역수로 쥐는 독특한 형태의 이검이다. 언뜻 검이라기 보단 암기에 가깝다 느낄 정도로 얇은 두 자루의 연검을 쥔 루주가 호흡을 가라앉혔다.


“갈까요.”

“내가 뒤를 보겠소.”

“보통 그럴땐 먼저 나서겠다 하지 않나요?”

“노부는 암검에 불과한 것을. 루주 그대의 검이 더 고강한 것을 잘 알고 있소.”


루주가 웃음을 지었다. 동시에, 그녀의 옷자락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끌어올린 기파가 풀려나오며 유형화된 기세로 분출되는 모습.


“등을 맡기겠습니다.”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소.”


다음 순간, 두 하오문의 무인이 진각을 밟았다. 찰나 피어오른 팔영의 조용한 기파. 유령같은 몸놀림으로 뛰어오른 하오문의 암검이 그대로 거리 사이를 질주해 내달린다.


동시에 내딛은 루주의 걸음은 더 강렬했다. 지붕에 내리찍은 진각에 기왓장 조각이 몇자락 후두둑 흩날리고.


끼이익.


기둥이 옅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바람같은 몸놀림으로 루주가 이미 사라지고 난 직후였다.


그 소리에 한켠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던 무진과 단휘가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잠시 하오문의 무인들이 있던 자리를 응시한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했다.


“왔나본데.”


무진이 검을 꽉 쥐었다. 팔을 따라 툭툭 튀어나오는 근육. 손에 들린 장검이 작아 보인다. 그간 혹독하게 수련해온 결과 무진은 이미 용력으로는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누가 보면 외공을 전문적으로 수련한 팽가의 무인인줄 알 정도로.


“우리도 손을 보태는게 낫지 않습니까? 사형.”


반면 검을 어깨에 걸쳐 늘어뜨린 단휘는 여전히 호리호리한 모습이다. 허나 일전에도 보법을 극한까지 연마한 단휘다. 백연과 천주산에 다녀온 이후로 더욱 무공 수위가 올랐는데, 잠깐이지만 금원방주와 손을 나누고 칠룡들과 합공을 겪은 경험이 컸던 것이다.


간극에 진입해보았다는 경험.


그로 인해 단휘의 무위는 강하다 말할 수 있는 경지를 넘보고 있었다.


“마교도들 머리 따는걸로 겨루자고 했으면서.”

“좋지. 헌데 방주 대리와 백연이를 놔두고 그냥 가는 것도......”

“가.”


휘익.


옅은 기척이 일었다. 순간 깜짝 놀란 무진이 한걸음 물러날 정도로 조용한 움직임. 어느새 그들 사이에 나타난 보법이 귀신같다. 작은 키의 소년이 검을 쥔 채로 단휘와 무진의 사이에 서서 그들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얌마,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수련 부족. 단휘를 봐.”


소홍의 지적에 단휘가 어깨를 으쓱였다. 방금 전 소홍의 움직임은 그조차도 아슬아슬한 시점에 알아차렸으니까.


“......무튼. 네가 혼자 있겠단 말이냐? 우리가 최대한 앞에서 막을 거지만. 혹여나 놓치면 네가 너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데.”

“내가.”


소홍이 담담한 눈으로 무진을 응시했다.


“지켜.”


재차 말을 하려던 무진이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한다.”


세 소년들의 시선이 잠시 얽혀들었다. 잠시간 서로를 눈에 담는 무인들. 한해 전만 해도 이리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을. 곤륜에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한 소년으로 인해 모두의 삶이 뒤바뀌었다.


다음날의 먹을것을 걱정하던 뇌리에 새로운 무공의 고민이 담기고, 저잣거리 싸움박질 외에는 모르던 손에 천지수를 논하는 검이 들렸다. 평범한 일신은 단련되어 날카롭게 다듬어졌다.


그리고.


무학을 펼쳐보였다. 어지러운 청해의 사파를 상대로 검을 내치고, 옥수의 질서를 만들었다. 아는 이 없던 곤륜파라는 이름이 이제 옥수에 드나드는 모든 상행의 입에서 울린다.


“......많이 왔구나.”


무진이 중얼거렸다.


“중원의 대방파들도 마교를 상대로 싸워 본적은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누구를 만나도 떠들만한 이야기 아니겠냐.”

“조만간 비무제전이 열린다는 소리도 있던데. 거기가서 자랑 좀 해보게 많이 잡아보죠.”

“초청을 받아야 가니 말이다.”

“암화가 있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위명을 들었으면 초청장 하나 정도는 오겠지요.”

“하핫.”


대화를 나누며 기파를 휘감은 무진과 단휘. 소홍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보법을 밟는다.


투웅.


가벼운 소리와 함께 두 무인의 신형이 그대로 달려나가며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따로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싸움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잠시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소홍이 이윽고 걸음을 옮겼다. 다시금 백연이 들어앉은 집 앞에 선 소홍.


그가 집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직 안법의 경지가 미숙함에도 눈에 보였다. 집에서 이따금 튀어오르는 강렬한 기파. 피부를 따갑게 만드는 뇌기를 느끼며 소홍이 천천히 기척을 가라앉혔다.


“힘내.”


나직한 목소리가 울리고, 직후 소홍의 기척이 완전히 잦아들었다. 그림자처럼 나무에 기대선 소홍이 검을 빼든채로 눈을 감았다.



※※※



“지저분하군. 쥐새끼 같은 놈들이.”


콰아아아.


짙게 타오르는 청색 화염의 줄기가 사방을 뒤덮었다. 강렬한 불길에 휩싸인 가옥들이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해 사라진다. 작열하는 열기가 도시에 휘도는 바람마저 집어삼키고 먹어치운다.


여태껏 침입자들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던 기문진.


점차 힘이 약해지고 있었다.


“술법진에 뛰어난 자가 만든 듯 하군요. 대체 무슨 세력이었기에 이런......?”

“그래봤자 과거의 패배자들. 이런 장소까지 만들어 숨은 이들이다.”


주변을 살피며 중얼거리는 단원의 목소리에 냉막한 음성으로 답하는 남자.


뻗어낸 손끝에서 강렬한 기운이 터져나온다. 허공에 닿는 순간 푸른 화염으로 화하는 내공 기파. 그 기세가 한없이 강렬하다. 작열하는 열기를 눈앞에 두고 휘두르면서도 차가운 시선이 주변을 쉼 없이 훑는다.


풀어헤친 머리칼이 기파의 반동으로 줄기줄기 흩날리고, 산발이 된 머리칼 사이로 빛나는 눈은 붉게 물든 암적색이었다.


언뜻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날카로웠다. 달리 수려하다고도 할 수 있을 외양. 그러나 그의 한쪽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는 붉은 흉터가 그리 말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눈부터 턱까지 그어진 커다란 흉터.


완전히 문드러진 반쪽 얼굴의 형상 사이로 움직이는 눈동자는 언뜻 광기를 담고 있었다.


마교 청화단의 단주였다. 화천귀제의 염혈신공을 직접 전수받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제자.


“이 안에 하오문의 쥐새끼가 있다는 것. 확실하겠지.”

“예. 그리고 화산파의 무인으로 보이는 자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인도 몇 있습니다.”

“척후를 거의 몰살시켰다라.”


청화단주가 뇌까렸다. 문드러진 그의 입꼬리가 칼로 찢어낸것 마냥 길쭉하게 올라갔다. 미소를 짓는듯이.


“강한 놈들이겠지?”

“그럴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화산의 무인. 자하신공을 펼쳤다고......”

“하, 하핫.”


비틀린 웃음이 허공을 저몄다.


“좋다. 더없이 좋아. 전부 집어삼키면 내 불꽃도 한층 더 고강해질 터. 그렇게 언젠가......”


광기와 흥분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푸른 불꽃에 비춰져 번뜩였다.


“화천(火天)의 위(位)를 이몸이 가져오는 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더해 우호법은 아직 현천검제와의 싸움에서 얻은 부상이 다 낫지 않았지 않습니까.”

“멍청한 늙은이. 언제까지 우호법의 자리에서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을것이라 생각하는 건지. 얌전히 물러났다면 장로의 한 자리라도 받아 여생을 누렸을 것을.”


청화단주가 비웃음을 흘렸다. 하늘 저편에 아롱지는 노을을 등지고 뿜어내는 청색의 화염이, 그의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였다.


문드러진 얼굴에 푸르고 붉은 빛이 번갈아 일렁이는 그때.


“조금 더 하면 기문진이 파훼될 것 같습니다.”


우웅.


청화단원의 목소리 너머로 옅은 진동이 울렸다. 찰나 일어난 미미한 기파. 그러나 그것을 인지한 청화단주가 즉시 시선을 치켜올리고.


“제가 먼저 진입해 확인할테니 단주님께선......”


청화단주의 시야 너머. 그가 쏟아내던 푸른 불꽃의 뒤편 하늘을 물들인 노을이 직전보다 조금 진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이었다.


가슴을 바짝 펴고 청화단주를 향해 이야기하던 단원의 어깨에, 옅은 분홍의 꽃잎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음?”


단원의 의아한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청화단주가 눈을 부릅뜨며 손을 내뻗었다. 삽시간에 손아귀를 뒤덮은 푸른 화염의 줄기가 다섯으로 갈라지며 제각기 검의 형상으로 변모했다.


그 순간.


“매화만개(梅花萬開).”


청화단주의 시야 너머 하늘, 노을에 섞여들었던 연분홍의 기파가 눈에 들어왔다. 하늘을 가득 메운 수백, 수천에 달하는 경파의 조각. 검로 하나 하나를 쪼개 나눈 꽃잎같은 경파가 일제히 낙화(落花)하고.


콰아아아앙!


지천을 울리는 폭음이 뒤따랐다. 흩날리는 수천장의 꽃잎이 사방을 휩쓸며 푸른 화염을 집어삼켰다. 하나 하나가 살기가 실린 공격. 그러나 어느 것이 진짜 공격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검식이 대지를 휩쓸었다. 변(變)과 환(幻)의 극에 달한 무공. 화산파의 매화검법.


그 안에 휘말린 청화단원 몇의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흩날리는 핏물이 눈에 비치는 것도 잠시. 붉은 핏물은 이윽고 뒤따라 내려오는 매화 꽃잎에 가려 사라지고.


직후 낭랑한 목소리가 사방을 저몄다. 정순한 기파가 실린 음성.


“마교의 종자들은 언제나 서로 집어삼키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더니.”


타닥.


내려앉는 유성의 걸음이 가벼웠다. 암향표로 착지하는 몸놀림이 유려했다. 검을 치켜든 그가 침착한 시선으로 앞을 응시했다.


“사실이었군요. 우호법의 휘하에 있다는 자가 상관의 목을 노리는 꼴이.”

“흐하하핫!”


콰아아아!


그와 거의 동시에 허공을 휘감은 분홍빛의 경파 사이로 푸른 화염이 분출되었다. 찰나 일으킨 청염으로 검기를 찢어발기며 뛰쳐나온 청화단주가 광소를 흘리며 기파를 뿜어냈다.


“찾아가서 사냥하려 했는데, 이렇게 나와주는군. 내 신공의 제물로 삼아주마!”

“그 목을 베어 스승님께 가져다 드리면 좋아하겠습니다.”


후웅.


화염의 꼬리를 끌며 돌진한 청화단주가 그대로 손을 뻗었다. 손아귀에 형성된 한자루 창의 형상. 푸른 화염으로 이루어진 창을 돌진하는 속도 그대로 내뻗는다. 흉포한 일격.


그것을 마주한 유성의 눈이 번뜩였다. 한순간 끌어올린 기파. 직전 켜켜이 쌓아둔 자하신공의 기운이 검끝에 매달려 외부로 발현되고.


쩌어엉!


노을의 검기와, 청염의 창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작가의말

즐거운 명절 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7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곤륜환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42 철야방(8) +4 23.12.22 2,996 84 19쪽
141 철야방(7) +4 23.12.21 3,008 83 17쪽
140 철야방(6) +4 23.12.20 2,986 83 17쪽
139 철야방(5) +4 23.12.19 2,999 84 19쪽
138 철야방(4) +4 23.12.18 3,130 79 18쪽
137 철야방(3) +5 23.12.16 3,199 80 15쪽
136 철야방(2) +3 23.12.15 3,123 83 15쪽
135 철야방 +4 23.12.14 3,119 86 16쪽
134 재회(3) +5 23.12.13 3,210 87 19쪽
133 재회(2) +4 23.12.12 3,215 86 16쪽
132 재회 +5 23.12.11 3,308 88 17쪽
131 성화방주(3) +7 23.12.09 3,294 79 15쪽
130 성화방주(2) +5 23.12.08 3,286 85 20쪽
129 성화방주 +5 23.12.07 3,361 89 16쪽
128 사천(4) +8 23.12.06 3,338 88 19쪽
127 사천(3) +8 23.12.05 3,355 92 22쪽
126 사천(2) +5 23.12.04 3,426 87 17쪽
125 사천 +8 23.12.01 3,554 87 15쪽
124 월동(越冬)(5) +6 23.11.29 3,524 88 17쪽
123 월동(越冬)(4) +5 23.11.27 3,456 89 17쪽
122 월동(越冬)(3) +6 23.11.24 3,524 84 15쪽
121 월동(越冬)(2) +5 23.11.22 3,589 82 16쪽
120 월동(越冬) +5 23.11.20 3,689 91 15쪽
119 영물(5) +7 23.11.17 3,768 87 19쪽
118 영물(4) +6 23.11.15 3,628 91 15쪽
117 영물(3) +7 23.11.13 3,653 86 15쪽
116 영물(2) +7 23.11.10 3,814 86 18쪽
115 영물 +7 23.11.08 3,942 85 15쪽
114 네가 돌아올 곳(11) +5 23.11.06 3,836 89 17쪽
113 네가 돌아올 곳(10) +5 23.11.03 3,962 92 1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