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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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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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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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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만천(滿天)(4)

DUMMY

※※※



“......!!!”


공손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을 부릅뜬 그녀가 상석을 홱 돌아보았다.


“당무혁!”


날카로운 비명같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허나 그럼에도 상석에 앉은 천독은 무심히 경기장을 응시할 뿐이었다. 공손령을 비롯해 벌떡 일어난 당가 가솔들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외려 다른 이들이 더 놀란 표정을 짓는다. 개중에는 천독을 돌아보는 이들도 많았다. 종남장문과 점창장문이 경악성이 깃든 눈으로 천독에게 묻는다.


“당가주, 저것은......”

“어찌 당가 신공이 암화의 손에?”


다른 이들도 말로 하지 않을 뿐 제각기 얼굴에 의문이 가득 서려있다. 태연한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수염을 매만지며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와룡천견과 여전히 눈을 감고 일정한 주기로 콧바람을 뿜는 신승. 그리고 고개를 느릿하게 젓는 선극 정도.


“우리 제자님이 너무 커다란 사람을 지향점으로 삼은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 사이에서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평하는 서일화의 음성이 가볍다.


“어쩐지 불꽃이 매화 모양이더라니.”


자하신공은 안되는데-하며 덧붙이는 목소리는 장난스러웠다. 눈앞의 광경을 크게 개의치 않는 행색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콰아아아아-


점차 위로 떠오르며 사방 허공을 가득 채우는 암기의 폭풍. 그 사이로 어느새 분분히 튀어오르는 백색 뇌광이 섞여들어 진실로 폭풍우라도 된것마냥 휘돈다. 그 형태와 형세.


만천이다.


당가의 절세비기인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 무공을 펼치는 이가 당가 무인이 아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파 무림에서 무학을 훔치는 행위는 대죄(大罪)다. 만일 무맥을 잇지 않은자가 무공을 펼쳤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자가 어디로 갔던간에 쫓아가 처벌한다. 한 문파와 세가의 무학은 곧 그들을 규정짓는 것이기에.


무(武)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정파인 까닭이었다. 외려 이런 면으로는 사마외도보다 잔혹하고 엄격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하하.”


그 사이 끼어든 도홍이 슬쩍 웃음을 흘리며 소매로 입가를 감췄다.


“그냥 보아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겠군요.”

“그대의 말이 맞소. 곤륜파의 신성이 당가의 절기를 훔쳤다 하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닌것을.”


거드는 것은 초현진인이다. 그에 눈살을 찌푸린 서일화가 반문한다.


“훔쳤다라. 그리 보이는가요?”

“그렇지 않겠소? 대체 어디서 만천을 익혔는지. 아, 그러고 보니 당가 소가주와 친하다 했던가. 어쩌면 소가주가 친우를 챙겨준답시고......”

“점창의 장문께서는 보지않고 판단하시고, 듣지않고 말하시는군요. 제 눈에 저 아이는 무공을 미리 익혀온 것이 아닌것으로 보이는데.”

“그 무슨 말이오.”

“천하에 둘도 없을 자질의 차이라는 말이에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검신......!”


그때쯤 제갈가주의 눈에서는 안법 기파가 어느때보다 번뜩이며 유형화된 청광(靑光)을 흩뿌리고 있었고, 곁의 선극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늘을 수놓는 암기의 폭풍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조금 다르지 않은고.”


제갈가주가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혼잣말을 나직히 중얼거리는 것도 잠시.


“경기가 끝나면 크게 다뤄야 할 일이겠지요. 당가주께서는 무맥을 훔친 아이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시는지......?”


도홍의 물음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천독에게로 쏠렸다. 그때까지도 천독의 눈은 경기장을 뒤덮은 만천의 흐름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편에서 비명처럼 당가주의 이름을 불러대는 공손령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한 태도로.


“첨언하자면, 저희 모산파에서는 어떤 경로로든 모산의 술법이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잡아 뇌옥에 가둡니다. 소림만큼 엄격히 따져 단근참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당가에선 어찌 하실련지.”


옅은 웃음과 함께 속삭이는 말에 근처에 앉아있던 남궁유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들었고, 청운진인이 그 위로 불편한듯 헛기침을 덮었다. 백연과 어느 쪽으로든 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소년에게 은(恩)을 입었다고도 할 수 있는 이들. 자못 불편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다툼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훔쳤다라. 그렇게 보이나.”


한순간.


주변의 모든 기파가 먹먹하게 잠든다. 소란 속에서 훅 끌어당기는 듯한 낮은 음성이 울렸다. 메마른 어조가 막 도홍을 향해 입술을 비죽이며 무언가 말을 뱉으려던 검신마저 입을 다물게 만들고.


“그렇지 않다면 당가주께서 가르쳐 주시기라도 한겁니까? 만천을 가문의 외인에게?”


어느새 내리깔린 압박 속에서 태연히 말을 잇는 도홍을 향해 천독의 새까만 시선이 떨어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저갱같은 눈을 하고서 그가 입을 열었다.


“그 눈에는, 저것이 당가의 만천으로 보이나보군.”

“예? 저런 암기술이 세상에 둘이 있을리가......”

“눈을 뜨고 봐라.”


말과 함께 자연스레 경기장 위로 시선을 던진다. 천독의 고갯짓을 따라 다른 이들의 시선이 뒤따른다. 그때 아까부터 경기장 위에서 눈을 뗀 적이 없는 제갈가주가 옅은 감탄을 뱉었다.


“당가주.”


문득 희열마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저건, 무결(無缺)에 이를 초석이오. 어찌 저런......!”


천독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제갈가주의 의견에 동조하듯이.


“저건 다음이다. 무공을 익히고 성취를 높이는 것의 너머.”

“진기의 흐름을 완전히 역산해, 형(形)은 같으나 의념은 정반대요. 전(前) 남궁가주의 말이 진실이었소.”


눈을 부릅뜬채 푸른 안광을 흘리는 제갈가주의 표정이 더없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홀로 알지못할 말을 연이어 내뱉는다.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음성에 섞여든 희열이 선명했다.


“대종사의 자질.”

“가르쳐주고, 훔치고, 그렇게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지요. 저 아이는 지금.”


서일화의 가벼운 음성이 뒤따른다.


“눈 앞에서 상대가 펼친 무공을 역산하고, 그 구결과 의념을 해체해 새로운 무공을 만들어낸거에요. 만천에서 탈피한 무언가를.”

“그런, 말도 안되는. 가불가의 여부를 떠나 지극히 위험한 자질이 아닙니까......!”


여태껏 미소를 짓고 있던 도홍의 표정에 서서히 당황이 뒤섞인다. 그러나 천독은 이미 주변의 다른 모든것에서 관심을 거둔 뒤였다. 허공을 휘도는 암기의 폭풍에 눈을 고정시킨 그의 입매가 미미하게 움직였다.


“보여봐라.”


암기의 폭풍 한 가운데, 여상히 검을 들어올린 소년을 향한 중얼거림이었다.


“또다른 가능성을.”



※※※



한없이 무거웠다. 들어올린 검에 휘감긴 진기의 무게가 그랬다. 본래라면 느껴질 리가 없는 무게였다.


‘숫제 파도를 검 한자루로 통제하는 꼴인가.’


백연이 시선이 위를 향했다. 검끝에서 뻗어낸 기파가 사방의 암기를 휘감고 흩어진다. 검을 살풋 비트는 것 만으로도 철편들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새로운 흐름과 형태를 자아낸다.


미세한 차이가 거대한 흐름을 뒤튼다.


지금 이 순간, 백연은 호흡 한번으로 수백가지의 투로를 엮어낼 수 있었다. 그 스스로도 예측할 수 없는 변화.


쉴새없이 머릿속에 새로운 감각이 스며든다. 단지 만천을 펼친채로 서 있는 상황인데도 그랬다. 자연히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즐거울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대가 어찌......!”


당진천은 그렇지 못해보였다. 얼이 빠진듯한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더니, 혼란스러운 듯 손을 펼친다. 그의 몸에서 내공진기가 흐르듯 뿜어져 나오며 암기 몇자루를 회수하려 들었다. 허나 허공을 휘감은 거대한 흐름은 끊어지지 않았다.


뒤이어 그가 백연을 돌아봤다.


“그 몸으로, 나보다 감각이 우위라고? 어째서 다시 뺏어올 수가 없는......”

“틀려.”

“......음공 여파가 분명히 잔존할텐데. 어떤 수작을 부린 것인가?”


몇차례 시도하던 당진천은 이윽고 삽시간에 이성을 되찾으며 차갑게 가라앉은 분노를 드러내었다. 만천을 빼앗긴 충격을 극복하는 속도가 빨랐다. 아니면 너무 충격을 먹어 훼까닥 돌아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음공? 수작은 당신이 부려놓고 이제와서.”


백연이 천천히 이를 드러내었다.


“아직 그대로야. 생각보다 효용이 높군. 평소 내공 운용속도의 절반도 안나오나.”

“그럴리가 없네. 그런 감각으로 이럴수는......!”

“당신은 크게 착각하고 있군.”


비화 당진천.


깊은 당황을 드러내고 있다. 달리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빠르다고도 할법했다. 만천을 빼앗긴 이유에 대해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되찾아올 방도를 강구하는 것이 그랬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열아흐레동안 쉬지 않고 걸어본 적이 있나? 일곱 밤낮동안 내공을 소진하고, 운기도 하지 못하고 검을 휘둘러 본 적은? 며칠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격전을 반복한 적은?”

“......”

“감각은 무뎌지고 흩어지기 마련이지. 항시 칼날같이 준비된 상황 속에서 무공을 펼친다는 것은 허상이야.”


때문이었다. 백연이 만천의 효용성에 의문을 표한것은.


‘극히 비효율적이다.’


섬세한 감각이 필요한 무공이라 했다. 모든 암기를 일일이 지배하에 놓고 다루기에. 만독을 익힌 이들은 만천을 익히기 어렵다고.


말이 되질 않는다. 그렇다면 초대 당가 무인들은 어찌 만천과 만독을 만들고 익혔는지 알 수 없는 일.


그와 더해 만천은 광역 절기이다. 본디 다수를 상대하기 위한 절세 신공인데, 전장에서 활용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무공에 일일이 암기를 다루는 섬세함이 필수적이라 하는것은 모순.


“그렇기에 다른 방향성을 보면 어떨까 생각했고.”


모든 암기를 일일이 통제하며 다루지 않는다. 섬세한 감각을 통해 수백개의 무기를 동시에 다루는 것을 포기. 대신 만천의 구결을 뒤집어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엮어낸다. 당진천과는 전혀 다른 해답을 내놓은 것이다.


‘어렴풋이 알겠다.’


그가 비틀어낸 만천은 흐름의 무공. 전장을 휩쓰는 암기의 파도이나, 그 형태를 일일이 제어하지 않는다. 흐름을 이끌면 나머지는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


“그리고 애초에 암기에 국한될 필요도 없는 무공인 것을.”

“......뭐?”

“노친네가 하던 말이 있었지. 뛰어난 살수는 손에 쥔 것이 전부 암기라고.”


전대 무영방주 무허가 하던 말이다. 아마 농이었을 테지만, 그 말에 담긴 뜻은 백연도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펼치던 월영신공. 파도처럼 그림자를 이끌던 노인은 비도 없이도 비도술을 펼칠 수 있었다.


구애받지 않는다.


“만천의 꽃잎이 꼭 암기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있나?”


별안간 검을 비틀면서였다. 허공을 따라 진기가 물결처럼 퍼지는 순간.


화아아아악-!


시린 뇌광 사이로 시뻘건 불길이 빛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비도와 암기의 파편 사이를 채워나가며 몸집을 불리는 화화(火花)의 향연. 적양공 불꽃의 진기가 유형화된 꽃잎이 되어 만천의 흐름에 몸을 실었다.


어느 순간 붉게 물든 만천의 파도가 작열하는 불빛으로 두 무인의 머리 위를 가득 채웠다.


‘무엇이든 실릴 수 있다.’


그것이 설령 독(毒)이라 하더라도.


하지만 그것은 백연의 길이 아니었다. 그가 지금 손에 쥐고 있는것은 새로운 가능성과 방향의 단초. 지금 객석에 앉아있는 친우에게 보여주기 위한 선물이다.


“놈!”


사방을 채운 불꽃의 광채 아래 당진천이 분노가 깃든 눈빛으로 품에서 새로운 비도를 빼들었다. 만천의 주도권을 빼앗겼다 하더라도 끝은 아니었다. 양손에 비도를 역수로 쥔 그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백연을 향해 쇄도.


화악!


한순간 옷자락이 크게 흩날리며 백연의 코앞에 나타난 그가 회전하며 일격을 내친다. 양쪽을 동시에 베어 들어오는 비도를 본 백연이 그대로 검을 내리쳤다. 삽시간에 인지가 쪼개지며 여휘가 빛살같은 종격을 그려내고.


쩌엉!


두자루 비도를 교차시켜 검을 막아낸 당진천이 그대로 전진하며 각법을 올려쳤다.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소매에서 백연의 코앞에 한줄기 비도를 쏘아내는 것과 동시였다.


그 순간이었다.


“......!”


후욱.


백연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비도가 꿰뚫은 허공에 뇌광이 잔영처럼 흩어졌다. 백연은 어느새 당진천의 몸에 닿듯이 휘돌아 그의 등 뒤에 나타나 있었다.


뒤이어 벼락처럼 떨어지는 검격. 한순간 소년과 청년의 신형이 이지러지며 얽혀들고.


콰아앙!


당진천이 피를 흩뿌리며 튕겨나갔다. 뒤로 주욱 미끄러진 그가 눈을 부릅뜨며 백연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이전까지와 명백히 다른 움직임. 한순간에 투로가 뒤바뀌었다. 지금까지 당진천과 백연의 싸움이 성립하게 만들었던 가장 주된 요인이 사라졌다.


“어째서 움직임이 갑자기......!”

“아, 그랬지.”


소년이 여상히 중얼거린다. 여전히 만천을 허공에 붙들어 둔 채로 눈썹을 내리까는 모습.


“대련하는데 지켜보는 눈이 많던지라.”

“알고 있었다고......?”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낭인들에 이어 당가 무인들과 이어나갔던 대련의 연속. 그 속에서 백연은 신중한 싸움을 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지켜보는 눈들을 위해 똑같은 공격과 방어초식만 반복하는 것은.


“당신은 내 습관과 간합, 무공들을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했겠지.”

“......어째서인가?”


두번째의 물음. 이번에는 다른 의미였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속였냐는 물음이다. 그에 백연은 어깨를 가벼이 으쓱였다.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당신이 펼치는 모든 무공의 묘리와 구결. 전부 하나로 이어져 만천을 이루더군. 그 요결을 파악하고 끝까지 이끌어내기까지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


압도적 격차를 인지했다면 당진천은 다른 방도를 강구했을 것이다. 그리되면 이렇게 할 수 없다. 그는 처음부터 당진천의 만천을 빼앗아 당소하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이것은 친우를 위한 사사로운 감정이 담긴 행동.


일부러 당진천에게 그의 습관과 투로를 전부 알려준 척 숨기고, 실제 경기에서도 끝까지 보여줬던 투로만 사용한다. 음공에 당해 더 약해진 것은 계산 외였으나, 덕분에 더 아슬아슬하게 목적을 이루었다.


당진천이 승기를 완전히 잡았다고 생각하고 만천을 꺼내들게 만들었으니까.


“이제 되었어. 당신의 무공을 더 볼 필요는 없어졌거든.”


무감한 어조와 함께 검을 허공에 내리긋는다. 그 끝에 이어진 거대한 진기의 흐름이 뒤따르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잠시. 느릿하게 사방을 휘돌던 만천의 물결이 일제히 한곳을 향해 몸을 뒤틀고.


콰아아아아-!


철편과 화염의 꽃잎들이 허공 전체를 수놓으며 폭풍처럼 낙화(落花)하기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을 올려다보는 당진천. 두 무인의 시선이 얽혀든다.


그 순간이었다.


“아직이네. 안끝났어.”


일순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며 찰나가 수백으로 쪼개진다. 흩날리는 만천의 꽃잎이 저편 허공에 매달려 느릿하게 주변을 휘감는 사이.


문득 당진천의 손아귀에 들린 검은 호리병이 백연의 눈에 들어왔다. 처음 올라온 순간부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것이었다. 당진천이 그 병목을 한손으로 날리기까지가 전부 찰나의 사이.


안에 든 것을 그대로 들이킨다. 백연은 막지 않았다.


직후였다.


츠츠츳.


지독할 정도로 끈적한 기파가 사방을 잠식한다. 한순간 하늘 전체를 뒤덮으며 떨어지는 꽃비의 기세를 받아칠 정도로 거대한 기운의 파도.


독기(毒氣)였다.


“그대는 여기서 죽네. 반드시.”


기괴한 미소가 당진천의 얼굴에 깃들었다. 언뜻 고통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간극 속에서 나누는 대화는 짤막했으나, 그 살의가 담긴 의념은 섬뜩하리만치 선명했다. 그와 함께 당진천이 백연을 향해 손을 뻗었고.


“만독(萬毒).”


치익-!


본래 그의 것이 아니었던 독을 강제로 한번에 이끌어낸다. 그만큼 짙게 농축된 독단이었다. 호리병에 담긴 액체를 삼킨 것 만으로 주변의 기파가 요동친다. 단번에 당진천의 숨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극독.


허나 그 대가로 당진천은 한번에 힘을 얻었다. 이미 구결은 알고 있었다. 모든 심상과 요결도.


그가 만천의 정점에 닿기 위해 결코 손에 넣지 않았던 무공이다. 이제는 써야만 했다. 자신의 만천을 앗아간 소년을 죽이기 위해.


“개(開).”


치이이이익-!


청강석으로 된 경기장의 바닥에서 짙은 연기가 스친다. 압도적인 독기가 퍼져나가며 사방을 잠식. 숨결은 물론이요, 당진천의 온몸에서 흐르는 진기 파동조차 독기를 머금고 있다.


“저건......!”

“독공이다. 팽악, 도풍(刀風)이라도 펼쳐서 막아!”


가장 빠르게 그 무공을 알아본 당소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것은 정말로 위험하다. 빠르게 퍼져나가는 독기. 객석에 앉은 이들에게 만독의 여파가 닿는 순간 죽어나가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 외침에 도를 즉각 빼든 팽악이 그것을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아미타불.]


우우우우웅!


막대한 공력이 실린 음성이 사방을 뒤덮었다. 돌연 일어난 웅혼한 황금빛 광채가 만천은 물론이요 경기장 전체를 거대한 막(膜)처럼 뒤덮는다.


어느 순간.


상석의 정 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노승(老僧)이 눈을 뜨고 있었다. 그가 승복의 길다란 소맷자락을 늘어뜨린 채로 손을 펼쳤다가, 가벼이 박수를 치는 순간이었다.


키잉-!


압도적인 법력 기파가 독기를 포함한 모든것을 객석과 격리시켰다. 내공으로 된 거대한 성벽을 세운 셈이었는데, 말이 되지가 않았다. 경기장 전체에 호신강기를 뒤집어 씌운 꼴.


그렇게 물결처럼 퍼져나오던 독기가 신승의 진기 앞에 막혀 갇혔다. 객석은 안전해졌으나, 안쪽은 한없이 자욱한 독무(毒霧)가 가득 피어올랐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한 독안개.


옷자락 끝단이 녹아들어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의 독이다. 그러나 백연은 여상히 검파를 비틀어 쥐었다.


‘무엇이든 벨 수 있는 검.’


소년이 생각했다.


태청신공의 진기를 일으키면서였다. 별안간 여휘가 비스듬히 미끄러지며 흐린 백광이 일었다. 자욱한 독무 사이로 희끄무레한 빛살이 어슴푸레 일어나고.


문득, 맑은 하늘이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백연의 일검(一劍)이었다.


시야 사선 아래부터 하늘까지, 비스듬한 한줄기 선(線)이 그어졌다. 만독으로 피어났던 독무가 일거에 베여 사라지고, 신승이 펼친 황금빛 광채마저 분분히 갈라져 있었다.


“무슨, 검이.”


밑기지 않는듯이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내뱉는 당진천. 백연은 그를 향해 손을 가벼이 내리그었다. 아직 허공을 수놓으며 조금씩 낙하하고 있던 만천이 즉각 소년의 손짓에 반응하고.


콰아아아아아!


쏟아지는 화염과 철편의 꽃비가 당진천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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