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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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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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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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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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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용의 머리(14)

DUMMY

※※※



“......여기서 뭐하나.”

“응?”


백연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반쯤 문이 열린 텅 빈 전각 안이었다. 홀로 앉아 종이를 뒤적거리며 붓을 물고 있었는데, 비스듬히 햇살이 스며드는 문틀 너머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으으읍?”

“그 입에 문건 좀 내려놓고 말하지? 너 정도면 허공섭물도......”

“붓에 누가 허공섭물을 써. 집중도 떨어져서 떨굴라.”


입에 물고 있던 붓을 내려놓은 백연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하령은 쓰긴 하던데.”

“성화방주?”

“응.”

“재미있군.”


물으며 터벅터벅 방안으로 걸어들어오는 사람은 당소하. 녹빛 장포를 차려입은 말끔한 복식이 눈에 띄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이 여기에 무슨 일인지 알기 어려웠다. 백연 자신이 경기장에 가지 않은 것이야 그럴 수 있다지만, 이놈은 당가의 소가주인데.


“그런데 혼자 청승맞게 방에 처박혀서 뭐하나. 오늘 경기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할일이 좀 있어서. 근데 너야말로 경기장에 있어야 하는거 아니야? 당가주도 없는데, 너라도 가서 자리를 지켜야......”

“다른 사람이 가 있다.”

“누구?”


당소하가 가벼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 백연의 미간이 좁혀졌다.


“설마......”

“첫째 형님이 바람을 좀 쐬고 싶어 하더군. 알아서 하라고 놔두었다.”

“그 사람을 왜?”

“누군가는 가서 앉아 있어야지. 당백건에게 맡길수는 없으니 말이다.”

“아니, 애초에 왜 너는 안간건데?”


뭐하는 짓거린지 알기 어려웠다. 백연 자신이 비화 당진천을 쓰러뜨려 기반을 날려버린게 바로 며칠 전의 일인데. 이리 다시 얼굴을 내밀 기회를 주다니.


아무리 제멋대로인 녀석이라지만......


“나도 이유가 없지는 않다.”


그때였다.


당소하가 가볍게 손을 펼쳤다. 그 위로 무언가 살포시 떠올랐는데, 자세히 보니 작은 모래알 같은 조각들이었다. 허나 그 형태가 눈길을 잡아 끄는 것이 있었다. 자연스레 시선이 빨려들 수 밖에 없도록.


“......뭐야.”


백연이 중얼거렸다.


비스듬히 흩어지는 햇살 아래, 펼쳐진 소년의 손 위로 흡착과 발산의 기운이 회전한다. 그 기파를 타고 빛살에 반짝거리는 모래알이 제각기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손바닥 위를 유영한다.


그 속에 깃든 변화의 수.


알아보기조차 힘들다. 한순간에도 물결치듯 한 방향으로 쏠렸다가 이내 복잡한 형태를 그리며 모이고, 다시 흩어졌다 몸을 일으키길 반복한다. 그 형태를 정의할 수 없는 불꽃처럼.


이윽고 지극히 길게 느껴진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당소하가 기운을 거두며 모래를 바닥에 뿌렸다.


“감각을 수련중이라 말이지. 지금 경기장에 올라 있는 두 놈의 무공은 너무 기감에 영향을 크게 준다. 쓸데없이 진기 파동만 커서.”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백연이 헛웃음을 지었다.


만천의 방향성을 잡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만의 감각을 찾아가며 조정 중인가본데, 그렇다면 경기장에 가지 않은것도 이해가 된다.


당소하의 말대로 유성의 자하신공과 연화의 혼원일기공을 기반으로 한 현천복마검법은 진기 파동을 크게 일으키는 무공들이었으니까.


그 범위가 가히 술법의 권역에 필적한다. 평소라면 괜찮겠지만, 감각을 체화하기 위해 수련중이라면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 둘이 충돌중인 이상에야.


“그런거다. 덕분에 경내 산책이나 다니는 중이었는데, 있으면 안되는 기척이 여기 남아있더군.”

“있으면 안될 정도야?”

“당장 네 경기가 반시진 간격으로 있는 것 아닌가. 그걸 제외하고 생각해도 검룡과 현월의 경기는 보는 것이 나을텐데. 누가 올라올지 정도는......”


백연의 표정을 본 당소하가 말끝을 흐렸다.


“너, 이미 결과를 확신하고 있군.”

“당연하지.”


어깨를 으쓱인 백연이 태연하게 붓을 다시 집어들었다. 그에 당소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누구라 생각하나?”

“검룡이지. 너는 달라?”

“......그리 단정하기는 어렵지 않나.”

“무공의 우위는 확고하잖아. 자하신공으로 엮어낸 강기공을 손에 쥔 이상 유성이 한 수는 위야. 갑자기 현월검룡이 천뢰복마신공이라도 익혀온 것이 아니라면.”


공동파의 절세 신공. 그 무학에 대해서는 백연도 이름만 들어봤다. 마교에서 가장 극도로 경계하는 무학이라고.


진기 자체에 마기를 압제하는 공능이 있다 했는데, 정말로 그러하다면 백연도 배워보고 싶을 정도였다.


‘교주를 상대할 일이 있다면......’


잠시 창천과 대지를 뒤덮고도 남아 넘쳐 흐르던 끈적거리는 기운을 떠올린 백연이 고개를 저었다. 기분 나쁜 기억이었다. 다시 되짚어보고 싶지도 않은.


“허나 네 지론은 무공의 고하가 승패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일텐데.”

“두 사람의 무공 고하가 반대였다면 나도 모른다고 답했을거야. 하지만 유성은......”


실전도, 경험도, 모든게 앞선다. 매화검수로 섬서를 수호하며 누비던 과거. 그 뒤로도 신강을 거치며 마교도 뿐만 아니라 청화단주 본인과도 잠시나마 동수를 이루며 싸웠다.


이미 사선을 수십번은 족히 넘나들었다고 봐야 했다. 생사결로 간다고 했을때 유성보다 경험이 앞서는 무인을 쉬이 찾을 수 있을까.


‘그럴리가.’


다시 말해, 모든 방면에서 유성이 위였다.


“물론 현월검룡의 무공도 견식하고 싶지만, 그보다 내 일이 우선이니까.”

“......일이라?”

“마지막으로 정리할게 있거든.”


스윽.


백연의 손이 움직였다. 붓을 쥔 길다란 손가락이 종이를 꾹 눌러 펼치며 그 위로 글씨를 주욱 써내려간다.


곁에 털썩 주저앉은 당소하. 백연이 글을 써내려가는 것을 잠시간 지켜보다 입을 연다.


“비급인가?”

“맞아.”

“......일전에 보여줬던 것 같은데.”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당진천을 상대로 승리했던 날, 당소하가 찾아왔을때 보고 간 적이 있다. 그때는 아직 미완의 검법이었지만-


“설마 완성한건가?”

“맞아. 여기만 쓰면 끝이야.”


그에 당소하가 입을 딱 다물었다. 그 또한 새로운 무공 비급이 완성되는 순간을 보는 것은 처음인 까닭이었다.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잠시간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다. 백연의 붓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만이 바람처럼 주변을 내리눌렀고.


어느 순간 길게 늘어진 햇살이 백연의 손을 타 넘어 붓자락 끝에 먹처럼 길게 매달리던 그때.


“끝났다.”


소년의 손이 멈추었다.


어느새 자색으로 물든 눈이 종이를 길게 훑는다. 이윽고 써내려간 어구에 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백연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제서야 조용히 앉아있던 당소하가 입을 열었다.


“헌데 왜 갑자기 지금 비급을 마무리 지은 것인지 궁금하군.”

“오늘 예린을 상대하니까.”


백연이 담담히 답했다. 이어 가벼이 덧붙였다. 나름의 각오 같은 거야-라며.


“각오?”

“스스로의 검을 되짚어보는 느낌이지. 그녀는 분명 자신이 가진 최고의 절초를 꺼내들테고, 나도 그렇게 하길 원할테니까.”

“쯧. 하긴 뇌룡은 원래 그런 놈이니. 전에도 나한테 매번 만독을 꺼내서 싸우자고 그렇게......”

“......그건 생사결 아니야?”


백연의 말에 당소하가 한숨과 함께 픽 웃었다.


그 사이 먹이 말라 흘러내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백연은 종이를 모았다. 임시로 꿰어낸 가죽끈으로 종이를 묶어 갈무리하고, 덮어내자 그럭저럭 비급의 형상을 한 결과물이 나왔다.


“나름 모양새가 있군.”

“처음 만들어보는 건 아니라서.”

“흐음, 평소에도 비급을 네가 제작하나?”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사숙이 금지시켰어. 이건 초본이기도 하고 미완이라 내가 작업한거고.”

“호오라. 현명한 사람이시군.”


진심이 깃든 당소하의 말에 백연이 입술을 비죽였다. 왜 사람들은 그의 글씨를 못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 정도로 악필은 아닌데.


“알아보기만 하면 된거지.”

“진지하게 못 알아볼지도 모른다.”

“한번 보고 이야기 하던가.”

“전에도 봤......”


얼떨결에 품에 비급을 떠안은 당소하가 헛웃음을 짓고는 비급을 펼쳐 주르륵 넘겼다. 빠르게 내용을 훑는 그의 표정이 점차 미묘하게 변해온다. 일전에도 그랬듯이.


이윽고 중간쯤 비급을 넘기던 그가 그것을 탁 덮었다.


“그만 읽지.”

“왜, 글씨 때문에?”

“그건 반쯤 농이었고, 그런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이 검은......”


그가 말끝을 흐렸다. 무언가 할 말을 신중하게 고르듯이.


“......타인에게 함부로 보여줘서는 안될 물건인듯 해서.”

“너니까 보여주는 건데.”

“그건 고맙다만, 계속 읽다간 내게도 영향이 오겠군. 의념이 강하다. 한없이 깊이 새겨져 있는데 벼락처럼 뇌리를 파고들어. 나를 위해서라도 안 읽는게 나아 보이는군.”

“그런 이유라면 뭐.”


백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소하의 눈에 이 무공이 어찌 비칠지 그는 모르는 일이었다. 백연의 심상에는 이미 의념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으니까. 그것을 그대로 담아낸 것 뿐인데 타인에게도 그것이 선명하게 보이는건가.


아니라면 당소하의 자질이 뛰어나기에 오히려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어구 몇개로 의념을 인지하고 그것이 심상에 영향을 줄 정도라면.


“헌데 아직 제목이 없군. 검법 비급으로 이해했다만, 이름은 있나?”

“응. 이미 정해놨어.”


비급을 다시 건네받은 백연이 붓을 들어올렸다.


“내가 느낀 의념대로라면. 빛을 가르는 폭풍인가.”


짧게 감상을 툭 내뱉는 당소하. 그에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정확히 알아봤네.”


대답하며 손을 놀린다.


먹을 잔뜩 머금은 붓자락이 비급의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검을 쥐듯이 길게 늘여잡은 손가락이 붓을 종이 위로 이끈다.


끝에 담긴것은 검법에 그가 새겨낸 의념 그 자체.


그리 먹 자욱이 검기를 흩뿌리듯 길쭉하게 늘어져 내렸고.


스윽-


한없이 짙은 선이 시야를 갈라낸다. 붓질과 검로가 합치되어 이지러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소년의 손끝에서 의념이 피어나 새겨지며 그 흔적을 완성시킨 순간.


쩌저저저정!


사방을 우렛소리가 채웠다.


어느새 백연은 경기장 위에 서 있었다.


비급을 마무리 짓는 순간부터 경기장에 오르기까지, 시간을 마치 잘라낸 듯 훌쩍 건너뛰었다. 전부 한순간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지금 이 순간 백연을 향해 짓쳐오는 악예린의 거친 창격마저도 그렇듯이.


쩌엉!


창격 여파가 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길쭉하게 떨어져 내린 일격을 백연은 검을 비틀어 쳐내었다. 직후 보법을 밟으며 거리를 벌린 악예린이 입을 열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네요.”


나름의 걱정이 실린 음성. 백연은 태연히 답했다.


“잠깐 심상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시간을 좀 드려야......?”

“그건 제 사정이니까요. 경기는 경기고 말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제 끝났으니.”


백연이 가벼운 호흡을 뱉었다. 손아귀에 저릿한 감각이 휘돌았다. 온몸을 타고 분분히 튀어오르는 뇌기. 태청신공을 단숨에 끌어올린 탓에 백회혈이 작열하고 있었다. 악예린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손대중으로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니까.


“정리가요?”

“예.”

“심상에 무엇을 정리했는지 궁금하네요. 백연이라면.”


그 물음에 소년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새겼습니다.”


그리 말하며 검을 치켜든다. 백연의 검끝이 반원을 그리며 심장 부근까지 치솟았다. 끝에는 시린 백광을 매단채로.


“벼락을.”


작가의말

금일 분량은 다음 편과의 내용 연결 문제로 인해 부득이하게 짧게 마무리 지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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