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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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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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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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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용의 머리(4)

DUMMY

※※※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다. 조용한 사형은 언제나처럼 검을 짧게 잡은채로 느슨한 기수식을 취했고, 백연은 여휘를 들고 소홍을 응시했다.


서로 한두번 검을 맞대본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수련해오며 수백, 수천번이 넘게 합을 겨루었으니.


허나, 무언가 달랐다.


백연은 그리 느꼈다. 소홍의 눈빛이 평소보다 더욱 단단해졌다고.


그럼에도 그 자세는 여전하다. 한없이 편안하게 힘을 빼고 있는 것이 긴장한 듯 보이지는 않았다.


‘살수의 버릇.’


검을 짧게 잡고 무게중심을 높게 둔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힘을 겨루기 위해 무게중심을 낮추고 검을 길게 잡아 간합을 확보하지만, 살수들은 달랐다.


자유로운 움직임을 위한 무게중심과, 딱 한번의 기회에 찔러넣은 검으로 적을 확실하게 격살하기 위한 파지법.


정파 무인의 검이라 보기엔 어렵다. 하지만 백연은 소홍의 검을 굳이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검도(劍道)는 외길이 아니기에.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고.


‘온다.’


돌연 소홍이 한걸음을 내딛었다.


언제나와 같았다. 수련을 할때 백연은 사형들에게 반드시 초격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첫 일검을 통해 상대를 가늠하고 자신의 호흡으로 싸움을 이끌어가야 하니까. 소홍은 그가 가르쳐 준 것에 충실했다.


사박.


가죽신이 바닥을 부드럽게 스친다. 폭발적인 돌진도, 간합을 단숨에 좁히는 보법도 없었다. 다만 춤추는 듯 한없이 가벼운 걸음이 펼쳐졌을 뿐.


그러나 그 걸음의 끝자락에는 바람결이 걸려 있었고, 두번째 걸음이 땅을 디뎠을때 백연은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챘다.


‘운연동공(雲煙動功).’


용(龍)의 호흡을 본떴다는 심법. 천변만화(千變萬化)의 가능성을 지닌 곤륜파 모든 무맥의 뿌리이자 근원.


그리고, 그가 처음 곤륜산에 이른 날 엮어낸 무공.


백연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깃들었다.


무언가 보여주겠다더니, 이런거였나.


‘처음부터 전부-’


생각하며 마찬가지로 걸음을 내디뎠다. 소홍과 똑같은 보폭, 똑같은 자세로.


삽시간에 운연동공의 구결이 소년의 몸을 휘감았다. 일어난 바람을 타고 두 검객이 전진했다. 서로 합을 맞춰 검무를 추듯이.


그리 동공을 전개한 두 소년의 걸음은 경기장 정 중앙에서 마주쳤고, 두 사람의 신형이 얽혀드는 순간-


쩌엉!


검이 부딪혔다. 백연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종격. 검끝이 하늘로 향한 상단세의 천검(天劍). 소홍은 그와 반대되는 하단세에서 사선으로 올려치는 지검(地劍).


삼원검의 두 검로가 얽혀들었다 풀려난다. 이어지는 동작이 전부 물 흐르듯 이어지는 것은 수검(水劍)의 묘리. 동시에 반대로 회전한 백연의 좌권(左拳)에는 어느 순간 바람결이 나선으로 휘감겨 있었다. 급격하게 가속한 권격을 앞으로 내지르는 것도 찰나.


파바박!


권격 투로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한순간에 세번 두 소년의 주먹이 붙었다 떨어졌다. 거울처럼 똑같은 자세로 낙안권 초식을 펼쳐 백연과 겨룬 소홍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꿈틀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백연의 사고가 급격하게 가속했다. 눈을 크게 뜨며 호흡을 들이키는 순간, 백연은 권격 반동을 몸에 실어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검끝에 불티를 일으키면서.


화르르륵!


불꽃의 소리가 귓가를 저민다. 그 혼자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권격 여파를 반동삼아 검로를 구축한 것은 소홍도 똑같았다. 백연이 그동안 가르쳐 준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적양공 불꽃이 일어나는 속도가 가히 압도적이었다. 한호흡 하고 반을 더 뱉은 순간 이미 여휘의 검신 전체는 시뻘건 화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뒤따라 붙는 소홍의 검격도 거의 같은 시점에 치고 들어왔다.


파악!


좌하단에서 사선으로 올려친 검격을 몸을 비틀어 회피하며 불꽃이 실린 검을 찔러넣는 소홍의 동작이 유려했다. 그 검신을 좌장으로 내려쳐 튕겨내는 순간 전해져오는 불꽃의 열기. 백연은 그것을 무시하며 몸을 밀어넣었다. 회수한 여휘를 그대로 커다란 횡격으로 내치면서였다.


쩌정!


검격이 얽혀들었다. 불티가 폭죽처럼 터져나오며 시야를 물들였다. 찰나지간 두 소년이 동시에 앞을 향해 적화검류의 초식을 내쳤고.


쩌저저저저정!


여섯 차례의 검로가 거울상을 그리며 맞부딪혔다.


직후 반동을 몸에 실은 백연이 가벼이 발을 들어올려 진각을 찍어내렸다.


콰앙!


불꽃이 원을 그리며 터져나가는 순간, 한줄기 바람이 백연의 뺨을 스친다.


‘화신풍(花信風)?’


그 바람이 퍼져나가던 불꽃을 휘감아 바닥에 처박는다. 백연의 몸을 타고 유령처럼 움직인 사형은 어느새 그의 뒤편을 점하고 있었다. 공간의 기세를 가져오는 일보.


놀라운 움직임이다. 그러나 백연은 제자리에서 감탄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문득 소년의 신형이 물결처럼 이지러졌고, 다음 순간 백연은 발끝에 바람을 건채로 소홍의 옆에 따라붙고 있었다. 화신풍 구결을 몸에 장포마냥 두른채인데, 불꽃을 매단 검을 휘두르는 것도 그와 동시였다.


“......!”


간극 속에서 소홍의 눈이 커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약간의 놀람이 깃든 것 마냥. 하지만 크게 당황하는 일은 없었다. 검격을 인지한 즉시 자색 기파가 소홍의 눈에 깃들었고, 화신풍으로 유령처럼 반보 후퇴한 그의 호흡이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대기중에 짙게 묻어나오는 차가운 수기.


자령안 전개와 동시에 현음공을 끌어올리는 속도가 빨랐다. 백연의 검격에 맞대응해 반격초를 펼칠 정도로.


카가가강!


어느 순간 원형을 그리며 크게 펼쳐진 창명류수검의 검로에 여휘가 틀어막혔다. 두 검법의 완벽한 전환이었다.


“그거야.”

“......”

“잘하고 있어.”


짧은 중얼거림이 바람처럼 스친다. 백연의 칭찬에 소홍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이 순간 둘 모두 주변의 환경을 지워낸 상태였다. 이미 객석의 소리는 인지 저편으로 밀어놓은지 오래였다. 곤륜산에서 수련할때와 크게 다를바는 없었는데, 마음가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서로의 검을 받아내는 자리.


참을 수 없이 즐거워졌다.


카가가각! 쩌저정!


두 무인의 신형이 이지러졌다. 제각기 화신풍의 기파를 휘감은채로 검을 휘두르기를 찰나에도 수십차례. 검끝이 적양공의 불꽃과 현음공의 수기를 희끄무레하게 늘어뜨리며 수시로 교차하는 모습이다. 멀리서 보면 검으로 된 폭풍이라도 되는 듯 했는데, 그 합이 마치 연습이나 한듯 딱딱 맞아 떨어지고 있다.


혹자에겐 극히 위험한 검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의 검을 받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성립이 불가능한 춤사위.


그러나 백연은 소홍을 알고 있었고, 소홍도 백연을 알고 있었다.


‘끝까지.’


바람에서 시작해 불꽃을 두르고 파도를 내친다. 여태까지 소홍이 수련해온 일련의 과정들이 차례차례 펼쳐진다.


단순히 무공뿐만이 아니었다. 백연이 가르쳐준 습관, 투로, 검을 휘두르는 방식과 사소한 움직임까지도.


소홍은 배웠고, 수련했고, 고쳐나갔으며 결국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소홍이 일년여간 쌓아온 노력과 시간의 집합.


그대로 백연에게 내친다. 하나도 빠짐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의 모든것을 보여주겠다는 양 펼치는 검격이 담백하면서도 화려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검격이 교차되기를 한참.


태청신공과 용형보를 제외한 모든 무공이 소홍에게서 수백가지의 다채로운 투로를 그리며 풀려나왔고.


쩌저정!


“후.”


백연이 짧은 호흡과 함께 소홍의 마지막 종격을 받아쳐 밀쳐낸 직후였다. 검격 충돌의 여파로 멀찍이 밀려난 소홍은 느릿하게 숨을 뱉었다. 문득 검을 쥔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깨달았는데, 이미 간극에 진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령안을 일으키고 있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게, 최선.”


최선을 다했다. 여태껏 익혀온 모든 검로와 초식을 풀어냈고, 백연이 알려준 사소한 싸움 방식까지도 전부 이용해먹었다.


그가 지금까지 배워온 모든것을 전부 쏟아냈다.


그럼에도.


“괴물이네, 백연.”


소홍이 중얼거렸다. 옅은 웃음기를 머금은 음성이었다. 그의 시선이 반대편에 선 백연을 향했는데,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다.


고뿔에 걸려 고생하던 녀석은 어디가고 금새 나아와서는 검끝 하나 스치지도 못하게 다 막아내다니.


“봐줬는데도.”


상냥한 사제 녀석은 정확히 소홍 자신이 펼친 무공의 힘만큼만을 돌려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홍의 전부를 받아내보고 싶어하는 듯이.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첫 몇합에 백연의 승리로 끝났을 경기였다.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쉬우니까-하고 낮게 중얼거린 소홍이 그대로 걸음을 내딛었다. 전진 보법에 실린 기파가 한없이 미약했다. 이미 내공을 끌어올리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수준이었지만 상관 없었다. 이건 백연이 가르쳐 준적 없는, 그만의 마지막 한수니까.


사박.


시야가 이지러진다. 사방이 뭉개지며 정신이 일점으로 수렴한다. 의식이 꿈결마냥 흔들리는데, 이상하게도 시야의 정중앙만은 또렷하게 인지된다.


본디 살수들은 정면 승부를 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목적이 싸움에 있지 않기에. 천살문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도주를 위한 보신경과 몸을 숨기기 위한 은잠행술.


그리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의표를 찌르는 살검.


살행 대상의 어떠한 허점이라도 찾아서 검을 비틀어 박는것이 살수들의 목적인 까닭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수들이 도주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때, 정면으로 승부를 봐야하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온다. 그때 펼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검(一劍).


‘동귀어진의 수.’


눈앞의 대상이 무력화되었다 생각할때 사람들은 가장 크게 빈틈을 드러내기 마련이기에.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배운 일격.


화아악-


소홍의 신형이 유령처럼 쇄도했다. 일보에 내딛는 간합이 커다랬는데, 직선으로 질주하는 속도가 한없이 쾌속했다. 보법이라 칭할 수 없는 걸음이었다. 몸 사방이 드러나 있는 까닭이다. 상대방이 검을 내친다면 곧바로 급소에 틀어박힐 만큼.


그러나 그 대가로 살수들은 단 한번의 기회를 얻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지금.’


타악.


백연조차 찰나라 느낀 순간, 유령처럼 다가온 소홍이 그의 코앞에 걸음을 디뎠다. 동시에 몸 전체를 열어주며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한순간 백연의 눈에 당황이 깃들 정도였다.


‘무슨......’


소홍이 비틀거리며 내딛은 걸음은 여태까지의 보법중에 가장 쾌속했다. 백연 자신도 잠깐이나마 그 신형을 놓쳤을 정도로. 특유의 옅은 존재감 때문일까.


쏘아진 화살마냥 일직선으로 전진해 와 그대로 검을 내친다. 지금 이 순간 눈에 보이는 소홍의 허점만 수십군데. 그러나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소홍에게 검을 휘두르는 순간, 자신의 몸에도 검이 틀어박힐 것이라고.


백연의 입매가 비틀렸다. 동시에 그의 눈매가 샐쭉하게 휘어졌다.


‘하여간 말은 더럽게 안들어서.’


스스로의 몸을 아끼지 않는 꼴이 그랬다. 저번에도 그러지 말라고 했건만. 도무지 들어먹을 생각을 하지를 않는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각자 스스로의 안위보다는, 곁의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크기에. 백연도 그것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리 몸을 내던져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면 될 일이겠지.


후욱-


시야에 가득 차오르는 소홍의 신형. 그를 마주하며 백연은 손을 펼쳤다. 찰나지간 호흡과 동시에 경혈을 가득 채우는 기파를 손끝에 담아 휘어내면서였다.


‘밤하늘을 수놓는 별무리를 비단 삼아.’


분분히 흩어진 진기 하나 하나를 기감하에 두어, 한줄기의 기파로 엮어 붙들어맨다. 선아의 어두운 대장간 속에서 망치를 두드리며 얻어냈던 심상은 이제 청휘의 비급에 담겨 있던 의념의 가닥위에 실체화되었다.


‘별그물로 옷자락을 엮어내니.’


찰나지간, 소년의 손을 따라 밤하늘 은하수 같은 기막이 펼쳐졌다. 시린 백색의 광채가 올올이 빛나며 흘러내린다. 그러나 저번처럼 거기서 멈추지는 않았다. 꿈결처럼 움직인 소년의 손이 그대로 소홍의 어깨를 짚어냄과 동시에.


화아아아악!


물결처럼 퍼진 기파가 그대로 소년의 몸을 휘감았다. 한순간 길쭉하게 늘어진 별빛의 옷자락이 소홍과 백연의 신형을 감싸주었다.


직후 두 소년의 검이 서로를 스쳤고.


쩌저저정!


벼락같은 광채가 분분히 튀어올랐다.


서로 방어를 포기하고 상대의 몸에 검을 박아넣은 격. 급소를 피해 찔렀음에도 극히 위험한 검격들이었다. 허나 핏물은 한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어?”


검을 찔러넣은 자세 그대로 백연의 품에 닿은 소홍이 얼떨떨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가 멍한 시선으로 눈을 몇번 깜빡이더니, 아래를 내려다보곤 눈을 크게 떴다.


보이는 것은 흐르듯 은은하게 빛을 뿌리는 광채. 몸 전체를 뒤덮은 안개같은 빛이 희미하게 일렁인다. 은하수를 그대로 뜯어와 몸 위에 덧씌운것 마냥 신비로운 모습.


“하지 말라고 해도 매번 똑같을 것 같아서, 다른 방도를 강구해봤어.”


백연의 음성이 귓가를 치고 들어온다. 시선을 들어올리자 눈매를 휘며 웃고 있는 사제의 모습이 보였다.


“성라기단(星羅氣緞). 사형들을 위한 옷자락이야.”



※※※



승리자는 백연이었다.


숨겨놨던 마지막 일격까지 소진한 소홍은 미련없이 패배를 선언했다. 그를 휘감은 옷자락의 구결을 전수받는 것은 뒤로 미뤘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거의 곯아 떨어지듯 쓰러진 까닭이었다.


후회나 아쉬움은 없어 보였다. 보여줄 수 있는 모든것을 보여줬기 때문일까.


‘훌륭했어.’


백연은 생각했다.


소홍의 무위는 크게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이제는 그가 태청신공을 전수해줄 방법을 찾아야겠지. 남은 성취는 축기량을 늘리는 것과, 각 무공 구결을 대성하는 것이었는데 모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적어도 지금의 소홍은 그가 닿을 수 있는 한계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성라기단은......’


그가 얻었던 심상을 다듬어 엮어낸 호신기. 태청신공과 별개의 무공이었다. 운연동공만 익혔다 해도 펼칠 수 있는 호신무공인데, 외려 자령안을 빠르게 배우는게 중요하다.


통상적으로 호신기가 지닐 수 있는 것 이상의 방어력이 부여된 무공이기에 그랬다. 본래라면 막대한 내공과 무위가 있어야만 펼칠 수 있는 호신강기 수준의 방어력을, 그보다 한없이 낮은 무위에서도 얻을 수 있도록 다듬은 곤륜의 옷자락.


몸 전체에 펼친 기막을 항시 유지하기보단 공격이 들어오는 순간 그 자리에 진기를 집중해 막아내는 형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감각이 중요했고, 자령안을 익혀야만 원활히 펼칠 수 있는 것이었다.


전부 지금의 사형들에게는 문제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청율 사숙이 언급한 발상은 담지 못했다.


호신강기로 하여금 태청신공의 막대한 반발을 해소한다는 생각. 여기에 닿으려면 다른 무언가가 더 필요할 일이었다.


그렇게 백연과 소홍의 경기가 마무리되고, 곧이어 설향의 경기가 치뤄졌다.


검봉 공손월과의 일전이었다.


수백합이 넘는 싸움이 극히 길었는데, 검봉은 그 별호의 자격이 충분하다 생각되게 만드는 무위를 지니고 있었다.


허나 놀라운 것은 공손월의 무위가 아니었다.


“......쟤, 나보다 강해진거 아니냐?”


지켜보던 단휘가 문득 물어왔다. 백연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럴지도?”

“미치겠네.”

“생사결이면 사형이 이길 것 같긴 한데......”


그렇지 않다면, 과연 어떨까.


백연조차 이제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설향이 보여주는 검이 뛰어났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침착하고 차분하게 검을 전개한다. 수백합이 넘는 싸움에도 결코 선을 넘는 상황이 없었다. 급해지지도, 빨라지지도 않았다. 누가 보면 수없이 실전을 겪은 노회한 검객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적화검류를 다루는데, 불꽃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독특하기도 했다. 극공의 검을 다루면서도 차분하다 느껴진다.


그것을 보며 백연은 생각했다.


하얀 불꽃은 저 길의 끝에 있겠다고.


그렇게 수백여 합이 지난 끝에, 설향의 검이 공손월의 머리칼을 싹둑 베어냈고.


또다른 구봉의 일각이 꺾였다. 이번에는 창염조차 꺼내지 않은 승리였다.


그리 곤륜파에서 두 명의 무인이 비무제전의 마지막 여덟명 안에 남았다. 놀라운 성과였다. 그리고 마침내.


“축하해, 사저.”


경기를 마친 설향에게 다가간 백연이 미소를 지었다.


“결국 뇌룡의 앞에 서게 되었네.”

“......고마워.”


설향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깃들었다. 하지만 이내 기쁨은 사라지고 결연한 눈빛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아직이야.”

“그렇지. 일합에 지면 좀 그렇잖아? 만약 그러면 어디가서 나한테 배웠다곤 하지 말고......”

“......백연.”

“농담이야.”


백연이 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그도 모른다. 정말로 예측이 되질 않았다. 과연 사저는 악예린으로부터 얼마만큼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다음 경기는 언제냐?”


그 사이 툭 치고 들어오는 무진의 목소리.


“이틀 휴식이래. 다음 칠일동안 결승까지 전부 한다고.”

“둘 다 고생해라.”


가벼운 어조다. 일말의 부러움도 섞여 있는 듯 했다.


“그나저나 탈락한 놈들끼리 운현에서 잠깐 놀다가 오는건......”

“놀기는 무슨. 수련이나 하죠, 무진 사형.”


무연봉에서 내려오는 걸음들 사이에 사형들의 웃음이 스며들었다. 그렇게 곤륜파의 전각에 다다를때 쯤이었다.


“......누구지?”


문득 느껴지는 거대한 기척이 있었다. 익숙한 기세였다. 은은하게 흐르는 기파가 무위를 짐작하기 어렵게 만드는 거구의 사내.


회백색 머리칼이 늦은 오후의 노을 아래 흐리게 물든다. 직후 백연의 기척을 인지했는지 동굴같은 목소리가 내리깔렸다.


“암화. 드디어 왔군.”

“철야방주께서 여긴 어쩐 일로?”

“급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걸음했네.”


철야방주가 입을 열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새겨져 있는 것은 미미한 불안감이었다.


“성화방주로부터 답신이 왔네. 자네가 직접 들어야 할 이야기가 좀 있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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