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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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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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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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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용의 머리(17)

DUMMY

※※※



“창이요? 하지만 백연이 어떻게......”


의문을 표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본디 무인의 장병기는 섬세한 물건. 단순히 일반적인 검과 똑같이 주조하는 것이 아닌, 내공을 주입해도 잘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좋은 무기이다.


그 탓에 기본적인 강도는 보통의 철제 무구보다 떨어진다 해도, 내공을 주입하는 순간부터 사용자의 무공에 따라 갖가지 기능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하는게 무림인들의 무구.


경지에 오른 무인은 갈댓잎으로도 검격을 펼친다 하고,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표현에 불과할 뿐.


갈댓잎으로도 지고한 무공을 펼치는 이가 천하제일의 신검을 손에 쥐면 어찌될까.


그런 까닭이었다. 무림인들이 다른 것에는 인색해도 병장기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이유가.


당장 도가 문파이기에 청빈함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을 무당이나 화산도 각자 문파의 무인들의 장병기에만큼은 금전을 문자 그대로 쏟아붓는다. 운현의 철야방이 쉴새없이 돌아가는데, 그곳에서 생산하는 질 좋은 장병기의 대부분을 무당파에서 매입하는 것만 봐도 쉬이 알 수 있는 일.


도문도 그러한데 하물며 속세의 무인들이라 할 수 있는 세가는 어떠할까.


그것도 다른 세가도 아닌, 천하에 비슷한 위세를 지닌 것이 다섯밖에 없는 거대한 세가의 고명딸이자 막내가 쥐는 무기라 하면.


‘모르긴 몰라도 금전적인 가치로 환산이 불가능하겠지.’


심지어 악예린의 무기는 그 연원도 있다. 악가주가 직접 얻어낸 만년한철로 오직 악예린을 위한 창을 만들어주었다고.


‘그걸 내가 잘라먹었고.’


다시 생각하면 반으로 갈라버릴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을까. 문득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그때는 눈앞의 일격을 전력으로 받아치고자 했을 뿐이었는데.


뭐,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수가 없었다. 물론 악가주의 상심이야 크겠지만 그건 백연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악예린이 어찌 생각하느냐였다.


“무인들의 무기는 단순히 무기로 치부할 것은 아니니까요. 특히 예린의 무기에 대한 연원은 유명하고......”

“백연도 그걸 알아요? 조금 부끄러울지도 모르겠는걸요.”

“자식에게 건네는 사랑이 부끄러울 이유는 없죠. 다만 그 창을 잃었으니 예린도 상심이 있지 않을까 해서.”

“없다고 말하면 거짓이겠지만, 그렇게까지 연연해하지는 않아요.”


스륵.


자리에서 일어난 악예린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창을 쥐듯 손을 그러모으고 그것을 허공으로 뻗었다. 장난치듯 가벼운 몸짓이었지만, 그 사이에 뛰어난 창격 묘리가 섞여있다는 사실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백연과 겨루는 것은 즐겁고, 얻어가는 것도 많은걸요. 이미 창보다는 훨씬 큰걸 얻었으니까요.”

“깨달음이라도?”

“하나는 확실하게 알았죠. 모든 공격을 방어할 수는 없다는 것이라거나.”


악예린이 웃음을 흘렸다. 뒤이어 나온 말은 좀 더 날카롭게 스스로의 단점을 짚었다.


“규모가 큰 초식이라 해서 시간을 너무 쏟으면 안된다는 것이나.”

“......”

“맞는 말이죠?”

“제가 지적하지 않아도 알고 있으면서 뭘 묻습니까.”


그녀의 화광충천이 일검에 파훼당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였다. 간극을 쪼개는 것에 있어서 백연이 압승했다. 실제로 진기를 압축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 평범한 이들이 보아도 휘몰아치며 모여드는 초식이 인지되었을 정도겠지. 적어도 두 호흡 이상.


“그 정도면 죽기 충분한 시간이죠.”

“실전에서 백연에게 그렇게 틈을 줬다면 한번도 아니고 세네번은 죽었을 것 같아서.”

“제가 그 수준은 아닙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조만간......”


고개를 살풋 기울이며 웃는 악예린. 백연은 가벼이 어깨를 으쓱였다. 적어도 지금 당장의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필요 없다는건가요?”

“으음, 뽐내려는 것은 아니지만, 악가의 자제에게 다른 무기가 필요할지 의문이네요. 저를 생각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제가 그걸 받으면 백연에게도 부담일테니 마음만......”

“그럼.”


그때였다.


백연이 생긋 웃으며 허리춤의 검을 쥐어 뽑았다. 순간 옅은 소리와 함께 흐린 빛이 풀려나왔고.


“......그건.”

“백철 무구는 없었던 일로 하는 것으로.”


악예린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녀의 시선이 백연의 검에 딱 달라붙은듯 멈춰섰다.


“그 검. 혹시 또 만들 수 있는.”

“그럼 어디서 얻었겠습니까.”

“백철검인건 알고 있었어요. 다만 만들었을리는 없고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이 좋으시군요. 대부분은 백철이 뭔지도 모르는데.”


백연이 생글생글 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혹시 선아라고 아십니까?”

“당연히 알죠. 인상깊은 무위였으니까. 심지어 상체의 외공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어?”


천천히. 악예린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반신반의하는 감정과 경악을 가득 담은채로.


“설마 그게 야장 일을 해서?”

“맞습니다. 무공도 나쁜 편은 아닌데, 하나는 단언할 수 있겠군요.”


백연이 여휘를 비스듬히 들어올려 햇살에 비추며 말했다. 검신 위로 빛살이 쪼개지며 아롱진다. 지금 세상에서 단 한명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이었다.


“선아는 제가 아는 한 가장 뛰어난 야장입니다. 어쩌면 전 중원을 통틀어서도.”



※※※



“실례합니다......?”


사박.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무언가에 훅 끌린듯 이쪽을 향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흠칫 돌아간다. 길을 오는 내내 그러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무당파 경내를 걷는 두 사람은 그날의 경기로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백연과 악예린이었으니까.


그러나 악예린은 다른 이들의 시선은 느껴지지도 않는듯 보였다.


익숙한 까닭일까.


외려 조심스레 곤륜파의 전각 안으로 걸음하는 그녀의 몸짓에서는 언뜻 긴장한 것 같은 기색마저 비쳤다.


“사람이 없네요?”

“다들 수련하고 있을겁니다. 오늘은 바깥쪽 연무장을 쓰러 갔나본데요.”

“수련을? 오늘요?”

“경기를 본 뒤라 그런가 평소보다 더 의욕이 넘치더군요.”


백연이 답했다.


오늘따라 유달리 고요한 장소였다. 아마 지금 여기에 남아있는 사형들은 거의 없겠지. 경기가 끝나자마자 검을 휘두르러 가는 것들이 참으로 바람직했다.


그때였다.


“백연, 왔어?”


전각의 마루였다. 바깥에 다리를 달랑거리며 앉아있던 여인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묘하게 초첨이 맞지 않는 모습.


“응. 눈은 괜찮아?”

“아직은 좀 흐려.”


설향 사저였다. 그녀의 모습을 알아본 악예린이 곁에서 숨을 헉 들이키는 것도 느껴졌다.


“백화......?”

“......뇌룡인가요? 반갑습니다.”

“몸은 괜찮나요? 그때 심히 무리한 것 같았는데.”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상태는 만전이에요.”

“만전은 무슨. 영단은 먹었어?”

“아직.”

“그럼 기다려. 내가 시간 나면 진기 도인을 해줄게. 아무래도 눈 혈도를 살펴봐야 할 것 같아.”


백연이 말했다.


옅은 한숨이 섞인 음성이었다. 본디 빠르게 회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설향의 눈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이제 막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진전이 그다지 없는 상태. 소청단 진기를 이용해 혈도를 살필 생각이었다.


축기량을 단번에 늘리면 운연동공으로 몸을 회복하는 속도도 가속될 확률이 높았다. 하물며 그 기운이 소청단만큼 투명하고 맑은 영단임에야.


‘만약 호전이 안되면.’


그때야말로 운현에 내려가 약선객에게 염치 불구하고 머리를 박을 생각이었다. 적어도 그 정도 실력이라면 확실한 진료를 해주겠지.


“눈이 안좋으신......?”

“무리했습니다. 특히 안법을.”


백연의 짤막한 대답에 악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설향과 직접 손을 나눈 당사자였기에 쉬이 이해했다. 역시 그 감각이 아무런 대가 없이 단번에 얻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에 설향이 입술을 비죽였다.


“괜찮다니깐.”

“퍽이나. 일단은 푹 쉬고 있어. 장문인이랑 사숙은?”

“나가셨어. 사숙은 애들이랑 같이 수련장에. 장문인께선 상회랑 이야기 할 것이 있다 하셨거든. 전에 제안받은 철을 한덩이 정도 미리 건네받기로 했나봐.”

“돈은?”

“그쪽에서 대가 없이 주는 선물이래. 지금 네 위명이 어떤지 모르는거야?”


설향의 말. 그러나 그에 대답한 것은 악예린이었다.


“음, 제 생각에 백연만의 위명은 아니지 않을까 싶은데요. 백화의 명성도 자자하니까요. 이제는 못 들어본 이가 더 적지 않을련지.”

“......”


설향이 침묵했다. 무언가 말할듯이 입을 열었다 닫은 그녀의 얼굴이 이윽고 옅게 달아올랐다. 긴장이라도 한 듯이.


“......그나저나 뇌룡께서 여기는 갑자기 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아서요.”

“내가 창 한자루 날려먹어서 갚으려고. 선아는 안에 있어?”

“응.”

“고마워. 사저는 회복에만 전념하고.”


설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가만히 안에 발을 들인 두 사람.


“그......분은 어디 있어요?”

“벌써 그분입니까?”

“철야방주도 존경을 표했다 했는데, 무구를 얻고자 하는 무림인이 어찌 함부로 행동하겠어요.”

“상당히 들떠 보이는데요?”

“그렇네요. 저도 결국에는 무림인인지라.”


생긋 웃는 악예린. 그때였다.


후우욱!


화끈한 열기의 파동이 퍼져나왔다. 불어오는 바람에 옅게 실려 있었는데, 단박에 평범한 온기가 아님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백연이 펼치는 적양공보다 배는 짙은 진기의 물결.


그 자체로 오랜 기간 수련을 해 얻어낸 내가기공의 성취. 드높았다. 악예린조차 놀란 표정을 지을 정도로.


직후.


카앙!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다. 소리와 진기 파동을 이정표 삼아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눈에 확 띄는것이 있었다.


자그마한 흙더미로 만든 임시 화덕. 그 형태가 지극히 협소해 열을 가두는 용도로나 잠깐 쓰고 말 크기다. 동시에 왠 돌덩이가 모루라도 되는 양 바닥에 놓여 있었고, 한구석에는 자그마한 쇳조각이 뿌려져 있었다.


그야말로 너저분한 광경. 어디 누가 봤다면 야장 놀이라도 하려는 거냐며 비웃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백연과 악예린은 그것을 보고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 앞, 속이 비쳐 보일만큼 가벼운 백의 한장만을 입고 망치를 휘두르는 소녀가 있었다. 찰나지간 허공으로 솟았던 망치가 한치의 군더더기도 없는 호선을 그리며 떨어졌고.


까앙!


불티가 별가루마냥 튀어올랐다. 그 형태가 한없이 정갈했다. 시선을 앗아가고 호흡을 뺏을 만큼.


뒤이어 망치가 재차 허공으로 치솟는다. 그와 함께 한쪽 손에서 한없이 차갑고 묵직한 기운이 일며 쇠를 식히기를 반복.


치이이이-


수기가 옅은 증기로 화해 허공을 적시는 순간, 다시금 망치가 낙하하며 불티를 흩뿌린다. 밤하늘을 수놓는 은하수의 심상이 언뜻 뇌리에 스칠 정도의 광경.


‘장인은 도구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어쩌면, 눈앞의 소녀에게 만큼은 통용될지도 모르는 말이겠다. 백연은 그리 생각했다.


그렇게 망치질을 가만히 지켜보길 잠시.


“받아.”


휘릭.


그때까지 슬쩍 돌아보지도 않고 망치를 휘두르던 선아가 쥐고 있던 것을 던졌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아챈 백연이 눈을 깜빡였다.


“이게 뭐야?”

“손풀려고 만든거. 백철은 다루기 전에 준비가 필요하니깐.”

“으음.”


백연이 받아든 쇳조각을 유심히 살폈다. 직전까지 선아가 매만지던 쇳덩어리. 열기가 남아있을 법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수기의 통제까지 완벽에 가까운 탓이었다.


쇠를 다루는 것이 경지에 이른 장인.


잠깐의 몸놀림 만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지금 백연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은 손바닥 크기의 칠흑같은 단검이었다. 검파도, 아무것도 없이 오직 통짜 철로 이뤄진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손에 쥐기가 편했다.


조금의 불편함이나 어긋남도 없었다. 마치 백연의 손 크기에 정확히 맞춰 만든것 마냥.


“고마워. 검명은?”

“손풀기용에 무슨 검명이야......”

“뭐 전에는 다 붙여야 한다느니 뭐라느니 했으면서.”


쿡쿡 웃은 백연이 말했다.


“묵령단검(墨靈短劍)이라고 할까. 흑색이니까.”

“쓸데없이 거창하잖아.”


툭 뱉은 선아. 하지만 미소가 걸린 입은 그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백연은 어깨를 으쓱이곤 단검을 갈무리해 품에 넣었다.


그때쯤 소매를 걷어붙인 선아의 시선은 옆으로 옮겨가 있었다. 악예린을 훑듯이 위아래로 스치는 선아의 눈길.


경외나 감탄이 담겨 있지 않았다. 악예린이라는 사람의 배경이 아니라, 오직 그녀의 무구에 대해서만 집중하고자 하는 듯이.


직후 선아가 인사같은 것도 한마디 없이 툭 말을 뱉었다.


“창을 주로 사용하시죠? 단창과 장창을 섞어쓰고, 단창은 주로 투창술과 임기응변용으로, 그리고 장창이 주 무구. 길게 늘여잡는 것을 선호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짧게 잡을수도 있어야 하고.”

“네. 정확하시네요.”

“균형은 전체적으로 비슷하게......아니다. 날이 더 무거운걸 선호하는군요. 그러면 쉬이 피로해지지 않나요? 음. 아예 날의 무게로 투로를 이끄는 것을 좋아하나봐요.”

“그걸 대체 어떻게 아는......?”


그제서야 선아가 생긋 웃었다. 그녀가 악예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선아라고 해요. 제 재주가 이것뿐이라.”

“악예린입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하기엔 비무제전때 활약하는 것을 봤는걸요. 물론 이렇게 뛰어난 야장이리라곤 생각도 못했지만요.”


악예린이 말했다. 뒤이어 진심으로 감탄한듯 덧붙였다.


“경지에 오른 무인들이 몸짓만 보고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알아챌 수 있다는 소리야 많이 들었고, 그것이 사실이지만 이런건 처음이네요. 어떻게?”

“마찬가지에요. 자세, 걸음, 근맥이 잡힌 형태는 전부 그 사람의 습관을 의미하니깐요. 물론 저는 그것에 더불어 뇌룡께서 치르는 경기를 몇번 보기도 했고.”


그에 옅은 감탄을 흘리는 악예린. 백연은 잠시간 둘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되겠어?”

“가능하지. 창대는 흑단목까지 공수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지금 올라와 있는 상행에서 뜯어볼게.”

“그러고보니 장문인께서 무슨 특수한 철을 가지러 갔다 들었는데.”

“그것도 내가 부탁드린거야. 새로 시도해보고 싶은게 있어서.”


가볍게 답하는 선아. 이어서 그녀가 악예린에게 다가가 그녀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정말로 창을 만들어주실 수 있는건가요?”

“제 일이니깐요.”

“그......백철로요?”

“당연히 가능하죠. 혹시 다른 금속으로 하기를 원하면 그것도 가능하고요.”

“백철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뭐라도 대가를 드려야 하지 않을련지.”


조심스레 묻는 악예린. 백연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는 악예린에게 뭔가를 받아낼 생각은 없었다. 그가 창을 날려먹은 장본인이었기도 하고, 친구에게 건네는 제안이었으니까.


하지만 야장은 선아. 그녀가 뭔가를 받고싶다 하면 그가 말릴 일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이번 일은 선아가 호의를 베푸는 것이니까.


그때 선아가 잠시 고민하듯 눈을 데구르르 굴리다가 백연을 쳐다보았다.


“백연.”

“응?”

“잠깐 가서 산책이라도 하고 올래? 어차피 오래 걸릴거고. 어쩌면 밤새 만져야 될 것 같아서.”

“나도 여기서 도와줘도......”

“아니야.”


단호하게 끊어지는 말. 백연이 픽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아가 집중하고자 공간이 필요하다면 비워줘야지.


“그럼 갈게. 필요하면 부르고. 예린은 늦게까지 여기 있어도 괜찮은건가요?”

“네. 연이가 아버님께는 말씀드릴거에요.”

“아......그렇군요.”


잠시간 고생할 시비의 얼굴이 머리에 스쳤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럼 우선 몸 길이부터 확인할테니 팔 좀 뻗어주세요. 그리고 전에 쓰던 창. 부서진 것이 남아있으면 그것도......”

“아, 바로 여기로 가져오라고 시킬게요.”


어째선지 호흡이 잘 들어맞는 두 사람을 놔두고 백연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루에 앉아 조용히 운기를 하고 있는 설향을 지나쳐 바깥으로 나서자 느릿하게 가라앉고 있는 해가 눈에 들어왔다.


늦은 오후였다. 비무제전의 마지막 저녁을 알리는 빛이기도 했다.


이제 내일이면 결판이 나는 까닭이었다.


이제 비무제전에 살아남은 사람은 단 둘.


“유성.”


결국에 여기에서 만나게 되었다. 내일 녀석이 무엇을 보여줄지가 궁금해진다. 같이 지내는 동안 했던 대련에서는 서로 한번도 끝까지 검을 펼친적이 없었는데.


가능하다면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리 하늘을 일별한 백연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사박.


“여기 있었군요.”


옅은 발소리와 함께 갑자기 일어난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번쩍 고개를 들어올리자 비스듬히 가면을 내려쓴 검객이 눈에 들어왔다. 허리춤을 따라 비끄러맨 이검이 유독 눈길을 잡아끌었다.


“풍백?”

“인사를 하러 왔어요. 잠시 자리를 비울 일이 생겼는지라.”

“예? 왕의 호위를 맡으신것 아닙니까. 자리를 비운다니.”


유왕 주재후의 호위다. 함부로 나다닐 수 없을 것인데.


그러나 백연의 물음에도 검성은 살풋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가면에 가려 보이지 않는 표정이 희미한 미소를 그린 듯도 했다. 가면 너머로 비치는 연하늘빛 눈동자가 길쭉하게 휘어지는 것이 그랬다.


“이미 허락을 받았습니다. 불가피한 상황인지라.”

“무슨 일이기에......?”

“사냥을 나가야 해서요.”


마른 목소리가 깔렸다. 그가 하늘을 흘깃 응시했다. 무언가 다가올 재액을 경계하기라도 하듯.


“혈선(血仙) 추혼(追昏)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이 근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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