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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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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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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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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보법(3)

DUMMY

그로써도 처음 시도해보는 기예였다. 이미 한번 내뿜은 경파 조각을 다시 잡아채 자아내는 것. 생각보다 쉬웠다.


‘발끝으로 그림을 그리는 기분인데.’


두번째 걸음에 얽혀든 바람 줄기가 그의 심상대로 휘어진다.


몸에서 흘러나온 내공을 완벽히 통제하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유로웠다. 운연동공으로 모은 내공은 그를 쉬이 따랐다. 언제나처럼.


파바박!


어느새 뒤편으로 스쳐가는 검격. 유걸의 검은 텅 빈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백연이 서 있었던 자리건만, 인식하기도 전에 그는 자연스레 유걸의 뒤편을 잡고 있었다.


“흡!”


짧게 들려오는 기합성. 과연 명문 정파의 움직임다웠다. 빈틈을 내준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무리하게 몸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그대로 앞으로 한걸음을 더 움직이는 모습. 이런 싸움을 자주 겪은 듯 했다.


뒤를 잡힌적도 한두번이 아닌 듯 했고.


‘좋은거 맞나?’


멍하니 생각하는 사이, 순식간에 다시 간격을 벌린 유걸이 돌아서서 백연을 노려보았다.


“......왜 출수하지 않소? 뒤를 잡았으면서.”

“아.”


백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거기서 검을 뽑아 내쳤으면 아마 공세의 주도권을 잡았겠지. 그러나 지금은 그런게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그냥?”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다른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을 뿐이니까.


“후......그 오만이, 당신이 지는 이유가 될 것이오.”


유걸의 눈에 일순 분노가 스쳤다. 그러나 그의 표정과 달리 기세는 점차 날카롭게 벼려졌다. 전까지는 마구 흘러나오던 기파가 점차 갈무리되고 있었다. 검객다웠다.


‘저건 마음에 드는데.’


어쩌면 나중에 매화를 피워낼 인재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백연 자신을 더욱 강하게 벼려줄 시금석이었다.


‘좀 더.’


더 강하게 치고 들어와야 한다. 그의 보법이 어디까지 나아갈지 보아야 했다.


“칠매검(七梅劍)이오. 화산의 상승 무공은 살기가 짙으니 조심하시오.”

“잘 하는걸 쓰는게 낫지 않습니까? 낙화검(落花劍)의 조예가 더 깊은 듯 한데.”


칠매검은 화산에서도 나름 성취가 있어야 배울 수 있는 검법으로 알고 있다. 그 변칙적인 공격이 강맹하여 몸이 받쳐주지 않으면 쓰기 어려울 것일 터. 저번에 종남과 비무할때 쓰던 낙화검이 차라리 나을 것인데 왜 바꾸려 하는 것인지.


“......”


순간 유걸의 눈에 화가 치솟는 것이 보였다. 감정의 동요가 심한 사람인 듯 했다.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일순 사그라들었던 기파가 순식간에 발출되었다. 가벼운 발놀림과 함께 암향표의 향이 허공을 채웠다.


휘익!


허공을 가르는 검격. 칠매검은 강맹했다. 내리치는 검격과 횡으로 가르는 검격. 허초의 수가 줄어들고 검의 힘이 증가했다. 그가 허초에 잘 속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백연은 가볍게 기파를 일으켜 대응했다.


‘세 걸음째.’


스륵.


그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칠매검의 연격을 전부 피해냈다. 옆에서 관중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눈에는 백연이 검격 사이로 뛰어든 것 처럼 보일 터.


실상은 달랐다. 검격이 닿기 전에 그가 움직였다. 기파의 발출은 유걸이 먼저였지만, 백연의 속도가 압도적으로 빨랐다.


동시에.


그의 걸음 끝자락에 엉켜든 바람이 다시 한번 주변을 감싸고 휘돌았다. 점차 느낄 수 있었다. 주변의 대기가 그의 기운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을.


‘이런 느낌이구나.’


신기했다. 주변 공간을 자신의 기운으로 채워 나간다는 것은 생소한 감각이었다.


‘무형지기를 발출하는 기분이야.’


고수들이 사용하는 강한 기의 발출. 가장 잘 활용하는 무공이 제왕검형(帝王劍形)이라 알았다.


그가 만든 보법도 일견 비슷한 면모가 있었다. 급작스럽게 주변을 찍어누른다기 보단, 천천히 잠식해간다는 차이가 있긴 하다만.


‘영역을 구축하라 했지.’


어떻게 하는지 감이 잡혔다. 눈을 빛낸 백연이 미소를 지었다.


“또 출수를......!”


어느새 그를 스쳐간 유걸이 입술을 짓씹으며 재차 공격해 들어왔다. 검에 실린 기세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에 내친 검격의 허초는 백연으로써도 쉬이 구분하기 어려웠다. 살기가 정말로 짙어진 탓이다.


백연이 눈을 날카롭게 떴다. 더 이상 출수를 하지 않고 도망치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휘돌듯 내치는 검격에 걸린 경파가 꽃잎처럼 이지러졌다. 그에 백연은 사선으로 보법을 밟으며 손바닥을 내쳤다.


터엉!


맑은 소리와 함께 검격의 궤적이 비틀렸다. 백연의 손바닥이 검날의 옆면을 정확히 가격한 것이다. 동시에 검날에 휘감겨있던 꽃잎같은 경파가 부서져 비산했다. 바람을 타고 낙화하듯이.


잠시 흔들리는 유걸의 신형.


그 사이 백연은 발끝을 디뎠다. 그의 걸음을 따라 바람이 재차 일었다. 두 번의 걸음. 그로 인해 주변을 채운 바람은 점차 짙어지고 있었다.


아직 부족했다. 지금까지 다섯 걸음.

백연은 그대로 한 걸음을 더 내딛었다. 이번에는 상대의 선공을 기다리지 않았다.


오른발에 걸린 바람을 그대로 이어내듯 끌면서 주먹을 틀어쥐었다. 동시에 그것을 추진 경파로 삼았다. 소리없이 진각을 밟으며 그대로 왼 주먹을 내질렀다.


파앙!


다급히 기운을 끌어올린 팔로 방어하는 유걸. 하지만 주먹에 실린 힘이 강했다. 단숨에 뚫고 들어간 주먹이 그대로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주먹 마디에 닿는 감촉이 선연했다.


“큭!”


신음을 흘리면서도 유걸은 뒤로 진각을 밟았다.


암향표. 전후좌후 움직임이 자유로워 후퇴도 용이했다. 순식간에 뒤로 멀어지는 바람에 주먹에 실린 힘이 충분히 파고들지 못했다. 유걸은 힘을 흘리는 방어초에 상당히 능숙했다. 자주 맞고 다녔는지.


백연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왼발은 이미 바람을 잡아챈 상태였다. 경파가 양 다리를 따라 번갈아 휘감기며 사방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의 걸음을 따라 이어진 기의 흐름이 복잡했다.


즉시 왼발로 보법을 밟으며 백연의 신형이 따라붙었다. 민첩하게 상대에게 달라붙는 움직임. 월영신공의 그것과 같았다.

맨손 박투의 간합. 짧다면 보법으로 달라붙으면 그만이다.


틀어쥔 백연의 주먹이 내질러졌다. 이번에는 오른 주먹.


하지만 유걸도 이번에는 대응하고 있었다. 그의 검이 허공에서 바르르 떨리더니, 순식간에 분열했다. 환상을 보는 것 같았다.


주먹이 그의 복부에 당도하기 직전 유걸이 검을 내리쳤다. 늘어난 검격이 쏟아지는 꽃잎의 비처럼 백연을 향해 쇄도했다.


‘낙화검.’


궁지에 몰리자 본래 잘 쓰던 무공을 꺼내든 것이다.


‘다만.’


백연의 보법이 더 빨랐다. 왼발이 땅을 디딤과 거의 동시에 오른발로 균형을 옮겼다. 사선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인 그가 내뻗던 주먹을 회수하지 않고 그대로 팔을 꺾어 휘둘렀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간합. 백연의 팔꿈치가 유걸의 오른편에 틀어박혔다.


“커헉!”


신음 소리가 한층 컸다. 제대로 먹혀든 공격이었다.

그러나 유걸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면서도 몸을 회전시켰다. 그의 검끝을 따라 채 흩어지지 않은 낙화검의 검격 경파가 흩날렸다. 악착같은 움직임. 그 모습이 보기 기꺼웠다.


‘의지가 좋아.’


공격을 얻어 맞으면서도 검을 휘두르기를 멈추지 않는 모습. 좋은 자세였다. 그 광경에 즐거움을 느끼며 백연은 걸음을 옮겼다.


앞이 아닌, 뒤로.


“!”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하는 표정이 재미있었다. 오른발로 한보 뒤를 밟으며 몸을 당겨내는 백연의 움직임.


가볍고 날랬다. 직전 유걸이 보여준 암향표의 모습과 흡사했다. 전후좌우 움직임이 자유로운 것이.


“......후.”


하지만 백연이 뒤로 물러섰다는 것은 유걸에게 간합이 주어졌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검을 바로 세운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백연을 노려보았다.


“검을 꺼내시오. 승패를 냅시다.”


백연이 미소지었다. 보면 볼수록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도 더 이상 봐주면서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홉.”


중얼거린 백연이 허리춤의 검파를 잡았다. 그의 발끝에 실린 감촉. 아직 붙들려 있었다. 다리를 따라 진동하는 경파가 사방을 따라 꿈틀거렸다. 이미 수련장 내의 기파는 자신의 흐름에 붙들린 상태였다.


다음 순간.


백연이 보법을 내딛었다. 그의 발걸음을 따라 한줄기 선이 길게 이어졌다.

추진 경파. 몸을 휘감은 바람이 한차례 솟아올라 사방을 휘돌았다. 무공이 전혀 없는 관중들도 순간 느낄 정도로. 부드러운 바람이 사방을 휘감고.


“열.”


후우욱!


유걸의 코앞에서 진각을 밟음과 동시에 경파가 일어났다. 그와 함께 백연이 지금까지 자아놓은 거대한 바람의 진이 깨어났다. 방점이었다. 그와 함께 발 끝에서 이어진 반탄력이 종아리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허리에 이르러, 몸의 회전과 더해 등과 척추를 타고 어깨의 근육에 전달되었다.


손끝에 매인 검이 섬전처럼 검집에서 뽑혀나오고.


휘익-!


일순 번뜩인 은빛 검광이 모두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검 끝은 정확히 유걸의 목덜미에서 한뼘 떨어진 허공에 멈춰 있었다. 눈을 부릅뜬 유걸은 제자리에 못 박힌듯 움직이지 못했다.


이윽고,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내가 졌소.”


가벼운 손목 놀림으로 검을 거둔 백연이 손을 모으고 포권했다.


“많이 배웠습니다.”

“......마지막에, 뭐였소?”


복잡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유걸. 그의 물음에 백연이 미소지었다.


“비밀입니다.”


그가 마지막 일격을 내치는 순간 유걸은 암향표로 거리를 벌리려 했다. 동작이 컸기 때문이다. 누가 보아도 발검을 하려는 자세. 하지만 유걸은 그러지 못했다.


‘완성했어.’


보법. 열번째 걸음을 내딛는 순간 주변의 기파가 일시적으로 자신에게 동했다. 마치 수련장 전체가 자신만을 위한 술법진이 된 것 처럼.


그로 인해 짧은 순간 유걸의 암향표는 봉쇄되어 버린 것이었다. 상대방이 느끼기에는 마치 물 속에서 움직이는 감각이었겠지.


‘열 걸음은 너무 많긴 한데.’


아직 성취가 낮아서 그랬다. 보법을 완성했으니 이제 수련을 통해 그 성취를 올려야 할 터. 유걸보다 강한 이들의 걸음까지 완벽히 봉쇄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상대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을터다.


그리고 아직 더 나아갈 방향도 많이 남았다. 이것은 기초 보법. 더 상승의 무학으로 발전시킬 가능성이 잔뜩 남아 있었다.


“와, 방금 엄청난데?”

“저거 뭐야?”

“저 소년이 화산파의 무인을 상대로......!”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수련장이었다. 그들 사이로 만면에 웃음을 띈 사람들이 관중들을 헤치고 달려나왔다.


“야, 너 방금 뭐야?”

“완성했구나!”


황급히 달려와 그를 살피는 무진과 단휘. 뒤따라 미소를 짓고 있는 청율이 다가왔다.


“비급, 또 만들어야겠네요.”

“......이번에는 처음부터 사숙이 만들어주세요.”


또다시 그 글씨로 엉성한 비급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야 영광이죠. 무궁각이 한층 풍성해지겠군요.”


즐거워 보이는 청율. 백연은 마주 웃었다.


“이름, 정했어?”


그 사이 다가온 소홍이 물었다. 그에 백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이번에는 내가 안지을건데.”


그에 네 쌍의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눈에 가득 담겨있는 의문들. 백연은 전부터 생각했던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번 무공 이름은 사형들이랑 사숙 보고 지어달라고 하려고.”

“보법 이름을?”

“우리가?”

“응.”


소란스러운 와중에 각각의 얼굴에 여러가지 표정이 섞인다. 신난 듯이 눈을 반짝이는 무진과 단휘. 여전히 졸려보이는 눈매의 소홍. 그리고 약간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청율까지.


“진심인가요?”

“네.”

“무공의 창시자가 지어야 하는게 맞지 않을까 싶은데요.”


백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맞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이번 경우는 조금 달랐다.


“다들 도와줬으니까요.”


그의 말에 청율이 수긍한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모여든 사형과 사숙들. 은근 슬쩍 그를 밀어내곤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댄다.


“정하고 알려줄게.”


그 말에 백연은 잠시 그들을 뒤로 하고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표정의 유걸이 자신의 검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옆에 선 진무가 뒷짐을 지고 그를 위로하는 중이었다.


“내 출수도 한 손으로 받아내는 아이이다. 상심할 일이 아니지.”

“......”

“좋은 경험을 했다 생각하거라.”


고개를 젓는 유걸.


“죄송합니다, 사숙. 화산파의 이름을 걸고 경거망동 해서......”

“되었다. 재능이 넘치는 아이를 상대로 몇 수 손을 섞은 것 부터가 훌륭한 일이다.”


그렇게 말하는 진무의 표정도 복잡해보였다. 재능에 욕심을 내는 것과는 별개로, 삼대 제자들은 잘 챙기는 모양이었다.


“저기.”


조용히 다가간 백연이 입을 열자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백연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비무를 하며 느낀 점들, 말해줄 것이 있었다.


“유걸이라고 했죠. 당신은 나중에 다시 만나면 매화에 닿아 있을것 같군요.”

“......그 무슨?”

“중간부터 허초를 구분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손대중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실제로 유걸의 검은 도중에 더 강해졌다. 처음에 봤을 때보다 훨씬. 여러모로 실전에 가까울수록 강해지는 사람인 듯 싶었다.


“좋은 비무였습니다. 그럼 이만.”


가벼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데 뒤편에서 유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하오. 조언 새겨두겠소.”


다시 만났을때 정말로 매화에 닿아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스스로가 부족한 점을 찾아 수련을 거듭하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경지이나, 그렇지 않으면 평생 가도 안된다.


‘눈빛은 괜찮았으니까.’


그래서 한마디 얹어준 것 뿐이었다.


“다 정했어?”


돌아오자 사형들과 사숙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법의 이름은 화신풍(花信風)이라 하기로 했어요. 괜찮나요?”


백연이 눈을 깜빡였다.

화신풍. 생각하지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꽃이 필 무렵에 부는 바람?’


“네가 곤륜을 피워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무진의 말. 저렇게 감성적인 사람이었나? 게다가 저게 다같이 지어낸 이름이라니.

그러나 그를 쳐다보는 사형들은 모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왠지 갑자기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귀를 매만진 백연이 한숨을 뱉으며 웃었다.


“좋네요. 화신풍.”


나쁘지는 않았다.



※※※



다음날.

그들은 하오문 서안지부의 정문 앞에 서 있었다. 보법을 완성했어도 할일은 남았다. 때문에 암야서고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 안 돌아오셨습니다.”

“아직도요?”


문을 지키고 선 하오문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주께서 돌아올 때까지 안에서 기다리셔도 됩니다. 다만 언제 올지는 저희도......”


곤란한 일이었다. 하령이 없으면 암야서고의 문은 열 방법이 없었다. 그 기예를 따라하는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백연의 감각이 뛰어나다 해도.

설령 따라할 수 있다고 쳐도 시도하다 실수하는 순간 땅속에 매장이다. 굳이 할 이유가 없었다. 기다리면 되는 것을.


“안에 수련장도 있고, 귀빈을 위한 휴게실도 있습니다. 방주께서 언제나 극진히 대접하라 명하셨으니 편하게 쉬셔도 됩니다.”


백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할까. 사형들.”

“나는 기다려도 괜찮다.”

“무진 사형은 수련하기 싫어서 그러는거 아니야?”

“그럴 리가. 애초에 여기 수련장 있지 않느냐. 들어가면 시킬거면서.”


피식 웃은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네. 나가서 할 것도 없으니 안에서 기다릴까.”

“그럼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하오문도가 문을 열고, 그들이 안으로 들어서는 때였다.


‘음?’


백연이 먼저 반응했다.

동시에 대기의 기파가 찌그러지듯 일렁이고, 한줄기 하얀 빛줄기가 쇄도했다. 그들이 발을 들이고 있는 서안지부의 장원 안으로.


쿠웅!


빛줄기가 내려앉은 자리에서 둔중한 기파가 울렸다. 거친 경파가 주변을 훑으며 퍼져나갔다. 일순 불어닥친 바람이 머리칼을 마구 흩날렸다. 착지의 여파만으로 주변 전각이 몸을 떨며 비명을 질렀다. 그야말로 괴력난신.


“방주님?”


하오문도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윽고 먼지가 걷히며 안에서 익숙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체구의 소년. 언제나와 같은 모습이었는데, 그가 입고 있는 옷은 그렇지 못했다.


“조금 늦었네. 미안.”

“하령님? 대체.”


바닥까지 질질 끌리던 기다란 소매는 반쯤 찢어져 있고, 옷자락도 군데군데가 너덜너덜했다. 깊게 찢어져 있는 것이 검에 베인 듯 했다.

더해, 새하얀 피부 위로 흩어진 피가 유난히 선명했다.


“괜찮으십니까?”


백연의 물음에 하령이 의아한 눈빛을 했다. 이윽고 그가 시선을 내려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괜찮아. 내 피 아니야 이거.”

“그럼 무슨......”

“그나저나 너희들한테 줄게 있어.”


하령이 허공에 가볍게 손짓하자 뒤편에 둥둥 떠있던 물건들이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허공섭물이었다.

이때까지 저런걸 들고 있는 줄도 몰랐는데.


“그거 확인해봐.”


하령이 건넨 것을 본 백연. 순간 그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이거, 대체 어떻게 찾은거지?


“너네가 찾던거 맞지?”

“어디서 구하신겁니까?”


하령이 그에게 건넨 것은 병장기들이었다. 제각기 다른 형상과 모습을 띄고 있었지만 전부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이거 백철 아닙니까.”


그것은 백철로 만들어진 병장기들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찾고 있던.


“맞아.”

“이렇게 많은 양을 어디서.”

“......백철 야장이 있어. 섬서에.”

“정말인가요?”


놀라운 소식이었다. 이때까지 흔적도 찾을 수 없던 백철을 다루는 야장이 섬서에 있다니. 그야말로 천운에 가까운 일이다. 거기에 성화방주가 위치까지 알고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


그렇게 말하는 하령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어린 소년의 고운 미간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좁혀져 있었다.


“무슨 문제죠?”


소매로 피를 닦아낸 하령. 그가 깊은 한숨을 뱉으며 질문에 답해주었다.


“수라궁이 노리는게 바로 그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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