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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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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5.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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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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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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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그날의 이야기(2)

DUMMY

무연의 눈을 통해서 보는 세상이다. 백연은 그의 몸 속에 갇혀 감각을 공유하고 기억을 엿볼 뿐, 그의 감정까지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왜......”


흐르는 듯한 음성에 서린 고통이 너무나도 선연했기에. 백연은 그 감정에 동화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목이 메여오고, 눈가가 아릿하게 아파온다.


붉게 물든 눈밭 위에 검을 쥐고 선 사내의 모습을 보는 것이 무연에게 있어서 더없이 큰 고통임을 백연은 이해했다.


‘태조 주원장.’


당시의 연호는 홍무제. 명을 건국하고 황위에 올라 수없이 많은 사람을 학살했다고 하던가. 나라를 뒤집어 엎을 역도의 무리들을 죽인 것이라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저게 모반을 획책한 무리란 말인가.’


백연은 생각했다.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무연이 서 있는 이 자리에서부터 지평까지 닿는 광대한 기감.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 한 터럭조차 놓치지 않는 압도적인 감각의 권역.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 중, 무공을 익힌 자는 소수였다. 내공 한자락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손발은 고된 일로 부르텄고 옷은 비단은 커녕 해진 거적이 전부였다.


사이사이 조금 더 신분이 높아 보이는 이들이 있었으나 그들도 겁에 질린채로 떨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백연은 속으로 입술을 베어물었다.


저들이 민초이자 백성이 아니라면.


“저들이 반역도로 보인다면, 당신은 대체 누구를 지키려 검을 들었습니까......”


툭.


발치를 따라 흐르는 물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것을 닦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대신 무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볍게 그러쥐었고.


화악.


돌연 그의 손아귀 안에 쥐인 투명한 허공이 한차례 크게 일그러졌다. 그것을 뜯어내듯 주먹을 쥐는 순간, 일그러진 빛살에 삽시간에 색채가 깃들며 실체화된 검(劍)이 눈앞에 현현.


무연이 쥔 투명한 백색 검신 위로 눈송이가 하나씩 내려앉았다. 백연에게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천마의 검?’


놀라움을 삼키고 있는 사이, 허공에서 검을 뽑아낸 무연이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때였다.


“......!”


저 아래에서 무언가 큰 외침이 일었다. 동시에 군문의 병사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치켜들며 진을 형성했다. 그 앞에 주저앉은 사람들을 향해 번뜩이는 검광이 떨어져 내리려던 그 순간.


사박.


무연이 저 아래의 눈밭을 향해 한걸음을 내딛었고,


쩌억.


옅은 소리와 함께 시야가 쪼개졌다.


아무런 전조도, 진기 발경의 흔적도 없었다. 무공을 일으켰다는 흔적은 커녕 옷자락이 펄럭일 정도의 여파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연은 어느새 병사들의 앞에 서 있었다. 한순간에 아득한 거리를 뛰어넘었는데, 그의 몸에서 감각을 공유하고 있던 백연조차 변화의 전조를 느끼지 못했다.


‘어떻게?’


그의 움직임에는 오로지 결과만이 존재했다. 무연은 한 걸음으로 병사들과 사람들의 사이에 나타나 그 중간을 가로막았다.


허나 그 묘리에 대해 오래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한순간에 시야 코앞으로 떨어져 내리는 수천명 병사의 창과 검이 시린 빛을 내며 번뜩인다. 각기 진기를 휘감고 떨어지는 수천개의 일격은 말 그대로 일국(一國)의 군문이 지닌 거대한 힘.


그 앞에 홀로 선 무연의 신형은 한없이 쓸쓸하고 가냘퍼 보였다.


그러나 무연은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쏟아지는 검격을 응시했다. 그 순간이었다.


‘......?’


하늘에서 흩날리던 눈발과 무연을 향해 떨어지던 검격. 병사들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허연 숨결. 쉼없이 눈가를 타고 흐르던 투명한 눈물 마저도.


전부 멈춰섰다.


아득할 정도로 쪼개진 찰나. 한순간 무연은 홀로 다른 시간에 서서 느릿하게 검을 치켜들었고.


직후.


쩌억.


옅은 소음이 귓가를 스쳤다. 그것은 낡은 나무토막이 쪼개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말라붙은 대지가 갈라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한없이 미약한 소음. 그러나 백연은 멍하니 그 여파를 응시할 수 밖에 없었다.


‘시야가.......’


탁 트인 지평이 바라보인다. 직전까지 사방을 가리고 휘몰아쳐 오던 군문의 진격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수천에 달하는 거대한 군세. 이제는 아니었다.


무연의 앞으로 달려들던 군세의 남은 흔적이라고는 넓다란 평원을 따라 늘어선 다리와 발목 뿐이었다. 그 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주 찰나동안 공간을 짓눌러 우그러뜨리는 듯한 거대한 압력이 현현했던 것이다. 무연의 검이 가볍게 휘둘러진 것 하나로 벌어진 일이었다.


일순 그들의 앞에 흐리게 하늘을 메우고 있던 구름마저 소멸했다. 무연의 앞으로 거대한 원구형의 영역 안에 있는 모든것이 사라진 것이다. 누군가가 소매로 슥 문대어 지워버린 듯이.


평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주 잠깐동안 한없이 지독한 적막이 허공을 메웠다.


이윽고 느릿하게 흔들리는 검을 쥐고 무연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고, 직후 눈발이 다시금 제 속도를 찾고 허공을 따라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무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원장......아니, 덕유.”


당혹감과 경악성이 서린 얼굴을 한 범같은 사내를 향해 무연이 시선을 던졌다. 목소리에 담겨있는 것은 탁한 슬픔과 고통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주십시오.”



※※※



흐린 하늘 아래 밤을 녹여낸 것 같은 흑발이 휘날렸다. 언뜻 사내인듯, 여인인듯 가는 선을 지닌 청년은 맨발로 눈밭에 서 있었다.


그의 뒤로 다치고 쓰러진 수만의 사람들을 두고서.


“무연.”

“......”

“이들은 반역도였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투명하게 빛나는 시선을 들어 주원장을 응시한다. 그의 눈동자에서 별빛처럼 반짝이는 것은 슬픔이었다.


주원장의 뒤를 따라 아직 남은 황군이 일제히 창을 치켜들었지만 주원장은 손을 들어올려 막았다.


“그만. 내 친우다.”


그 말에도 무연의 시선은 여전했다. 지그시 주원장을 바라보다 이내 탁한 음성으로 중얼거린다.


“반역도란 말입니까. 이 사람들이?”


그러며 힐끗 뒤를 돌아본다.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다치고 아픈 사람들 뿐이었다. 수만에 달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깃든 것은 공포심과 두려움, 체념과......미약한 희망이었다.


“역모를 획책하고 있었다. 주동자가 이 속에 섞여들었으니......”

“죽이기로 한 것이군요.”

“너도 이해할때가 되지 않았나. 작금의 명(明)은 불안정하다. 지금의 치세에는 희생이 필요할진저. 이 중원을 위해 뿌려지는 작은 피가, 앞으로의 천년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주원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범처럼 으르렁대는 목소리에는 옅은 절박함마저 묻어있었다. 그를 잠시 응시하던 무연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변했군요. 당신은.”


툭.


맨발치에 방울진 물이 떨어져 내렸다. 눈동자를 타고 고여든 물이 붉게 물든 눈밭에 섞여 사라졌다.


“무연. 누군가는 이런 일을 처리한다. 네 심성에 맞지 않는 일인것은 나도 안다. 허니 못본걸로 하거라. 네가 황군을 죽인것은 묻고 넘어가줄테니......”

“친우가 민초의 피를 손에 묻히는데 눈 감고 넘어가란 말입니까.”

“네 친우이기 이전에 나는 일국의 황제다. 내 손은 피로 물들어있고, 앞으로도 물들일 것이다.”


강인한 호랑이와 같은 외양의 사내가 주먹을 쥐었다. 주원장의 눈빛은 단호한 광채로 형형히 빛을 내었다.


“내 손은 피투성이나, 제국은 번창하리니.”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무연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래 전. 당신은 홀로 잠들던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었습니다.”

“......”

“스스로를 덕유(德裕)라 소개하던 그의 손을 붙잡아 저는 구원을 받았지요.”


툭.


무연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순백의 검신이 붉게 물든 눈밭 위에 선명하게 나뒹굴었다.


“허나 지금 이것이 당신의 결정이라면......”


파악!


“무연!”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무연의 눈가를 타고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윽고 그가 눈을 떴을때, 그의 한쪽 눈은 공허하게 비어있었다.


“저는 더 이상 당신의 친우가 아닙니다.”

“무연. 눈, 눈이......!”


당황과 절망이 뒤섞인 주원장의 외침 위로 시리도록 투명한 무연의 음성이 내려앉았다.


“한 눈은 목숨을 바쳐도 좋을 친우에 담았고, 한 눈은 고통받는 만백성에게 담았습니다. 둘을 위해 일어섰고 푸른 하늘을 쟁취해내었지요. 그런데 약속은 잊혀지고, 남은것은 또다시 고통받는 이들뿐이니.”


무연의 한쪽 눈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반대쪽에서는 핏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이 자리에 놓고 가겠습니다. 친우와의 시간을.”

“못 간다. 황군. 길을 내어주지 말도록. 무연을 다치지 않게 생포하거라. 내 친우를 해하는 이는 죽음으로 벌할 것이다.”


스릉. 주원장이 검을 들어올렸다. 으르렁거리는 음성 속에 섞인 막대한 공력이 그의 의지에 감응해 해일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연은 그런것이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모두 고개를 드시지요.”


사박.


무연이 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맨발을 따라 붉게 물든 눈이 눌렸다. 동시에 아직 남아있는 수천의 황군이 일제히 창을 겨누었다. 허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곳은 그대들이 쓰러져 죽을 곳이 아니니.”


다음 순간.


쿠웅.


대기가 떨며 진동했다. 한순간 지저에서부터 창공까지, 세상을 뒤덮고 있는 진기가 일제히 흔들렸다. 무연의 일보(一步)와 함께였다.


“일어나 제 뒤를 따르십시오.”


스륵.


무연의 뒤를 따라 쓰러져 있던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온통 성하지 않은 이들. 몸에서 핏물이 줄줄 새어나오는 환자들. 무연의 걸음에서 새어나온 거대한 진기의 여파가 그들의 몸을 어루만진다.


그의 뒤로 광활한 대지를 따라 기운이 휘돈다. 겨울의 눈틈 사이로 푸른 새싹이 움트고, 다친 사람들의 피가 멎으며 생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 비틀거리며 일어선 군중이 무연의 뒤를 따라 도열했다.


“막아라. 무연을 제외한 이들은 전부 죽여도 좋다!”

“백성은 하늘이며 당신들은 땅입니다. 나라 위에 백성이 있음을 모르는 무지한 자여. 작은 피라 했습니까. 이들이 피를 흘리는 것이, 곧 나라가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쿠웅.


이보(二步)에 세상이 몸을 떨었다. 한순간 시야의 지천이 기우뚱 흔들린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그와 함께 창을 겨누었던 병사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떨어뜨렸다. 주원장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무연......!”


악을 쓰듯 외치는 주원장의 외침을 무시하며 무연이 삼보(三步)를 내딛었고.


쿠웅.


그 순간 무연의 앞에 선 모든 이가 일제히 땅으로 무릎을 꿇었다. 곧게 서 휘날리던 황군의 깃발조차 반으로 꺾여 고개를 숙였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 사이로 무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단 세 걸음으로 세상을 뒤흔든 여파일까. 어느새 흑단같던 머리칼은 희게 물들어 흩날리고 있었다.


맨발은 피투성이였고 눈처럼 새하얗게 새버린 머리칼은 거친 바람에 흩어져 휘날렸다. 뚫린 눈구멍으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지만, 병사들 중 그 누구도 감히 고개를 들어 초라한 행색의 무연을 마주하지 못했다.


주원장을 제외하면.


“......무연. 후회할 짓을 하지 말아라!”


초인적인 힘으로 고개를 치켜든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무연을 애타게 불렀다. 허나 하나 남은 그의 눈은 결코 황제를 다시 담지 않았다.


무릎꿇은 수천의 황군 사이를 따라 끝없는 행렬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당신의 곁에서 긴 꿈을 꾸었습니다.”


투명한 무연의 목소리가 울렸다.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은채로 흘리는 음성이었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행복한 꿈......이제는 깨어날 때가 된 것 같군요.”


그 말을 끝으로 무연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떼었다. 더 이상 주원장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걷던 무연은 황군의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하고 멈춰섰다.


“......삼봉.”

“무연.”


깊게 눌러쓴 죽립 아래 흰 수염이 휘날렸다. 늙수레한 음성에는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었다.


“가는겐가.”

“막으려 들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노부도 자네의 결정을 막을 생각은 없네. 다만......”


나직하고 털털한 어조로 툭 던지듯 말한다.


“언제고 다같이 다시 차 한잔이라도 나눌 수 있으면 좋겠군 그래.”


백발 아래로 무연의 입매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투명하고 붉은 눈물 사이로 걸린 미소는 금방이라도 지워질듯 가냘펐다.


“새겨두겠습니다.”


죽립을 눌러쓴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는가?”

“......서쪽으로.”


무연이 중얼거렸다.


“서쪽으로 갈겁니다.”



※※※



희미한 중얼거림. 그것을 귀에 담으며 백연은 눈앞의 삼봉을 살폈다. 죽립을 푹 눌러쓴 노검객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그날의 이야기.’


눈가를 타고 흐르는 피와 눈물의 온기가 따스했다. 비어있는 한쪽 눈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백연은 생각했다.


무연은 이 자리에 무엇을 놓고 떠난 것일까.


아직 알지 못했다. 주원장과 천마가 어떠한 관계였는지, 이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하지만 몇가지 만큼은 확실했다.


‘이것이 마도 무림이 탄생한 이유였나.’


지금 이 순간 무연의 뒤를 따르고 있는 이들이 곧 마도 무림에 처음으로 발을 들일 사람들이겠지. 역사에서 지워진 순간을 목도하고 있는 기분이 묘했다. 동시에 마음 한켠이 일렁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연의 안에서 그의 이야기를 겪고 들으면서 백연 자신마저 천마의 감정에 동화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에.


그는 이 자리에서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내딛었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세간에서 천마(天魔)라 일컬어지던 삶의 이야기일 터.


모든것을 등진 사내.


‘무엇을 위해.’


백연은 물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그 대답은 백연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까.’


그것이 무고한 민초들의 죽음 때문이건, 아니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친우가 손에 무고한 이들의 피를 묻히는 것이 싫어서건.


천마는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고자 위해 움직인 것이었다.


‘이제는 어디로......?’


그렇게 생각하며 백연이 다시 무연의 감각에 집중하려던 그때.


“이날.”


투명한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그제서야 백연은 깨달았다. 어느 순간 세상이 멈춰섰다는 사실을.


어느새 주변은 온통 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흡사 눈보라의 한 가운데 들어온 것만 같은 풍경이었는데,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언제?’


자리를 이동하는 것이 느껴지지도 않았는데.


그러나 그런 문제는 곧 백연의 생각에서 사라졌다. 귓가를 파고드는 무연의 목소리 탓이었다.


“한 아이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어조.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음에도 그러했다. 그러나 백연은 곧 알아차렸다. 그 대상이 다름아닌, 백연 자신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아직도 꿈에 머물고 있는 소년이 있습니다. 끝없는 굴레 속에서.”


사박.


어디선가 나타난 호수 앞에 무연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핏물과 눈물이 엉겨붙은 하얀 얼굴이 물 위로 일렁이며 비쳤다. 한없이 아름다운 미색을 지닌 청년. 성별을 구분하기 어려운 가냘픈 외양이 눈에 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듯한 외모.


그러나 그 속에서도 유달리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하나였다.


“미안합니다.”


흐리게 웃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 너머. 일렁이는 물의 표면 위에 시리도록 투명한 자색 눈동자가 비치는 순간.


촤르르르륵-!


귓가를 스치는 종이 소리가 울렸다. 사방을 따라 거대한 울림이 공명하며 퍼져나간다. 직후 백연이 크게 눈을 한번 감았다 뜨는 순간이었다.


서걱.


옅은 소리와 함께 낡은 책장이 넘어갔다. 눈을 깜빡이자 어둑한 공간 안에 일렁이는 불빛이 보였다.


낡디 낡은 종이의 향취가 코끝을 간지럽히는 작은 방.


어느새 백연은 암야서고의 방 안에 돌아와 있었다. 작은 책상 위에 펼쳐진 일기를 앞에 둔 채로.


[오국공(吳國公)과의 인연의 실타래는 그렇게 매듭지어졌다. 다치고 아픈 이들을 모아 나는 명(明)을 떠나기로 했다. 서방 신강(新疆) 지역에 살만한 장소가 있다. 일전 원의 잔당들을 소탕할때 가본 적이 있으니. 그곳은 핍박받고 미움받는 이들을 위한 땅이 될 것이다.]


[얼마나 긴 여정이 될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가야만 하는 길이니까.]


[밤이 깊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잠에 들지 못할 것 같다.]


마지막 어절 끝자락에 옅은 자욱이 남아 있었다. 종이 위에 떨어진 피나 눈물이었을까.


잠시간 그것을 응시하던 백연은 천천히 일기장을 덮었다.


더 많은 이야기를 알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쉬이 펼칠수가 없었다. 파도처럼 몰아치는 생각 탓도 있었고, 직전 경험한 일 탓도 있었다.


그만큼 압도적인 영성으로 이야기를 새겨넣은 천마라면, 모든 이야기가 그렇지 말라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 이곳에 앉아 천마의 일생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지금은 멈춰야 할 것이었다.


“......그는 대체.”


무엇을 남기고자 했는가.


천천히 손을 뻗은 백연이 일기장을 옆으로 밀고 다른 한권의 책을 집어들었다.


무연이 일기와 함께 남겨 전하고자 했던 것.


‘무학의 뿌리라고 했지.’


단정히 엮어진 비급을 책상 위에 내려놓은 백연이 그 표지를 응시했다. 소년의 음성이 비급의 겉표면에 새겨진 글씨를 천천히 읽어내렸다.


“북명신공(北冥神功).”


천마가 이 땅에 남긴, 무학의 잔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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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그날의 이야기 +5 24.04.16 1,451 5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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