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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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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5.2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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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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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약속(2)

DUMMY

※※※



바깥은 깊은 밤이었다.


‘그저 일기장을 들여다본 것으로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흐른 건가.’


북명신공의 구결을 익히는 것에 걸린 시간은 그의 감각으로 따졌을 때 한시진이 조금 넘는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면 일기를 들여다본 것만으로 거의 한나절을 소모했다는 이야기인데.


‘......함부로 열어보는 것도 안 되겠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슬쩍 들춰보는 것조차 위험하다. 다시금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시간을 어느 정도 더 소모할지 모르기에.


백연은 품에 들어있는 일기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천마의 일기는, 어쩌면 그 이름값을 하는 위험한 물건인지도 모르겠다고.


“자, 여기.”


탁.


생각하는 사이 백연의 앞에 둥실 떠오른 찻잔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향긋한 향취를 맡으며 백연이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뭘. 그나저나 많이 지쳤나 보네? 얼마나 열심히 달려온 거야?”

“나흘 걸렸습니다.”

“......무당산에서 여기까지?”


하령이 입을 벌렸다.


“잠을 아예 안잔거야?”

“잤습니다. 다 합쳐서 세시진 정도......?”

“곯아떨어질만 하네. 저 아이도 대단한 녀석이구나?”


하령의 시선이 힐끗 가벽이 쳐진 옆방을 응시했다. 그곳에서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히 잠든 소홍의 기척이 얌전했다.


“그럼 너도 한숨 자야하는 것 아니야? 아니면 하루 정도 쉬고 간다거나......”

“아니요. 새벽에 출발할겁니다.”


백연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사흘 가량을 허비했다. 이대로 바로 합류해도 하루에서 이틀 정도의 시간이 더 날아간다. 전투에서는 전황 자체가 뒤바뀔 수도 있는 긴 시간이다.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이곳에 온 것도 현궁진인을 비롯한 사람들이 배려해준 덕이 크니까요.”

“무당검선? 그 녀석이 나왔어?”

“네. 알고 계신......?”

“알지. 근데 검선까지 별동대에 합류했다니. 네가 말한 그 무림맹이라는거, 생각보다 본격적인 모양이네?”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맹한 문파와 세가들은 각 본파의 방비를 우선시 하되, 앞으로는 여유가 있는 모든 무인들이 맹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지금 사태가 끝날때까지는요.”


그 말에 하령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로써도 놀랄만한 소식이었는지.


“그건......전례가 없는 힘인데. 대체 몇개의 문파와 세가가 합류한거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전부. 그리고 곤륜파를 포함한 군소 문파가 열댓개, 중원 각지의 가문들이 열개 정도 합류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출발할 때까지는 그 정도였지요.”

“뭐?”


하령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런 거대한 무력집단의 탄생이라니.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위험하죠.”

“맞아. 황실의 눈은 신경쓰지 않는거야? 어쩌면 황군의 견제를 받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유왕이 비무제전을 참관했다는 사실은 들으셨지요?”

“들었지......잠깐만. 설마 그가?”

“예. 황가의 일원이 입회한 하에 맹이 출범했습니다. 일차적인 명분을 손에 쥐었으니 황실에서도 곧바로 역모로 규정할 수는 없을겁니다. 유왕 주재후를 등에 업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작금의 대명에서 두번째로 존귀한 사내. 사실상 황위의 유일하고도 적법한 후계인 유왕이다. 그가 무림맹의 출범에 인가를 내린 이상 그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황제다.


그리고 황제조차도 무림맹을 쉬이 역도의 무리로 규정하기는 어렵겠지.


“유왕을 등에 업었다면......그렇구나. 지금의 상황에서 무림맹이 내건 기치는 뭐야?”

“무(武), 의(義)지요.”


무로써 의를 행한다.


정도 무림을 대표하는 말이었다. 그에 하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좋네. 무림맹이 철저히 민생을 위해 움직이는 이상 명분이 없어. 특히 유왕의 이름까지 함께한다면 말이야. 외려 황실에서도 의견이 갈릴 일인데?”

“유왕이 그를 모를리는 없겠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왕 주재후의 행동. 자칫하면 황제와 대립까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인데, 그만한 사내가 그것을 모르고 움직였을리가 없다. 즉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일어날 수 있는 분쟁에 대해서도 이미 인지하고 있겠지.


“......위험한 사람이네. 어쨌든 이해했어.”


하령이 차를 홀짝이곤 중얼거렸다.


“무림맹(武林盟). 중원 무림에 유례가 없는 거대한 힘이 탄생했구나.”

“그렇죠.”

“그렇다면 지금 맹의 지휘를 맡고 있는 사람은?”

“선극입니다.”

“무당파의 장문인이자 무림맹주(武林盟主)가 되는건가. 작금의 상황에서는 이해가 되는 일이야. 하지만 너도 알고 있지?”


하령이 시선을 들어 백연을 응시했다.


“지금의 혼란이 끝나면 다시금 정리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그렇지요. 아무래도 특정 문파에 종속된 연합은 올곧게 서기 힘드니.”

“문파와는 별개의 집단으로 구성하는게 좋아보이는 방향이네......하지만 내가 뭐라고 이걸 고민하고 있담.”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흘리는 하령. 그에 잠시 그를 쳐다본 백연이 입을 열었다.


“걱정되면 나중에 가서 한번 자원이라도 해보시죠. 성화방주 하령 정도면 맹에서도 두팔 벌려 환영할 인재......”

“에잇. 그 무슨 소리야. 이제서야 문지기 노릇좀 그만두고 쉬는건데. 그리고 하오문은 정사지간에 걸쳐있긴 하지만 엄연한 사도육진의 일원이라고.”

“만일 맹이 진정으로 그 기치를 지키고자 한다면.”


무의.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검을 들었다. 각기의 이해관계가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기치는 드높다. 대의로써 묶인 검은 쉬이 무뎌지지 않으니.


“사마외도의 무인이라 해도, 그 마음이 맹의 대의와 함께한다면 출신에 상관없이 받아주겠지요.”


적어도 그런것을 지향해야 할 일이다. 백연은 그리 생각했다.


그에 하령이 흐린 웃음과 함께 고개를 갸웃 기울이곤 말했다.


“여튼 알겠어. 무림맹의 변수, 우리 하오문으로써도 인지하고 있어야 할 일이네.”

“아마 철야방은 맹에 힘을 더할겁니다. 방주가 그리 말하더군요.”

“나쁘지 않아. 아예 문주의 이름으로 연락을 취해 도움을 주고 받는것도 좋겠다. 우리측도 지금의 상황은 매우 곤란해서.”

“그렇잖아도 개방의 세가 많이 약해졌습니다. 무림맹도 천라방의 정보망이 필요할겁니다.”


백연의 기준에 천라방이 수집하는 정보의 질은 개방보다도 몇 수 위였다. 그 방대한 조직과 정보의 취합 및 분류 체계 덕분이었다. 물론 개방의 장점은 세상 곳곳에 깔린 개방도들이 가져오는 압도적인 양의 정보지만, 지금의 개방은 그 힘을 크게 상실했다.


막 출범한 무림맹에 하오문 천라방의 힘은 큰 도움이 되겠지.


“나도 바빠지겠네. 이제는 서안에서 일어날 때가 되었나.”

“암휘군의 위명이 세상을 떨게 하겠군요.”

“농은.”


하령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백연은 담담히 덧붙였다.


“반쯤은 진심입니다. 항상 궁금했던건데, 하령은 초월의 위에 이미 닿은것이 아닌가요?”

“......초월이라.”


하령이 볼을 긁적였다. 어린 소년의 눈매에 찰나지간 옅은 감정들이 스쳤다. 허나 백연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인지할 수가 없었다.


“너는 그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는건데?”

“저는 벽을 깨본적이 없어 알지 못합니다만.”

“그럼 질문을 바꿀게. 네 생각에 초월의 기준은 뭐라고 예상하고 있는데?”


백연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저같은 경우에는 검객이니 검에 빗대어 말하자면.”


초월의 위. 수많은 사람들이 입에 담는 절세지경이다. 허나 작금의 무림에도 그 벽을 뛰어넘었다 인정받는 무인은 거의 없다. 그만큼 아득한 것이다. 검귀조차도 죽기 직전에나 간신히 그 너머를 엿보았을 정도로.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은 알지 못했고, 넘어선 이들은 벽을 어떻게 넘었는지 쉬이 입에 담지 않는다.


허나 적어도 백연은 그것에 대한 단서를 지니고 있었다.


“제 일검(一劍)이.”


죽기 직전 검귀가 내질렀던 마지막 한 호흡. 그에 반으로 갈라졌던 세상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 삶의 모든 궤적을 온전히 압축시켜 담을 수 있다면. 그것을 초월의 위에 이르렀다고 하지 않을지......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검에는 그의 모든것이 담겼었으니까.


백연의 말에 하령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틀리지 않아. 어쩌면 네 표현이 초월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

“그걸 알고 계신다는건 하령도......?”

“음, 네 말대로 나는 초월의 벽을 넘었었지. 지금은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손을 펼쳐 스스로의 몸을 툭툭 두들긴다.


“나름의 제한이 걸려있다고 해야할까.”

“아......”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 들었던 혼백전이의 술법에 걸려있는 세가지 제약. 그것이 하령의 무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럴법했다. 상승의 경지는 한쪽만 크게 발달한다고 해서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정기신 합일(合一)에 이르지 않으면 어렵다.


달리 말하면 삼화취정(三花聚頂)의 격이다. 셋중 하나라도 받쳐주지 않으면 균형이 깨지는데, 간혹 그런 상태에서조차 상승의 경지에 도달하는 이들은 대게 둘중 하나다.


주화입마에 들거나, 아니면 압도적으로 발달한 하나의 재능으로 더없이 이질적인 무위를 손에 넣거나.


“물론 조건 여하에 따라 전력을 내는것이 불가능하진 않지만......”


하령이 말끝을 흐렸다. 뒷말을 속으로 삼키듯이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침묵에 빠져들었는데, 백연은 그것을 못본 척 했다.


하령이 설명하지 않은 사정이 존재하겠지만 그것을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각자의 이유라는게 있는 법이니까.


“뭐, 그 이야기는 되었고.”


하령이 손을 모으며 짝-박수를 쳤다. 어린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이만하면 급한 이야기는 끝난건가?”

“그런 것 같군요.”

“아쉽네. 비무제전이 끝나고 돌아오면 잠시라도 시간내서 술법무공이라도 조금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진심으로 아쉬운 듯 표정을 짓는 하령에 백연이 웃음을 흘렸다.


“마음은 감사합니다. 저도 별일 없었으면 머물다 가고 싶지만......”

“알아. 수라궁은 재해에 가까운 집단이지만, 네 정도 힘이라면 분명 도움이 될거야.”


하령이 차를 홀짝이곤 덧붙였다.


“홀로 틀어막고 있는 당가의 저력도 엄청나네. 하지만 역시 지원이 없으면 밀릴거야.”

“그렇죠. 한시빨리 서주에 도착해 힘을 보태야 합니다. 사천은 뚫리면 아니되니.”

“그렇지. 날이 밝는대로 길을 뚫어줄게. 그럼 이른 새벽에 출발하는 것으로 하고......”


하령이 백연을 올려다본다. 눈을 데구르르 굴리는 소년 방주의 표정에서 두가지 감정이 읽혔다.


“그, 슬슬 휴식을 취해야 하는 것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못내 아쉬운 눈치. 피식 웃은 백연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새로 익힌 무공의 덕인지 피로감이 없군요.”


북명신공과 태허의 묘리를 엮어내어 펼쳤기 때문일까. 한순간 사방의 모든 진기를 흡수했었는데, 그 여파가 그대로 몸에 잔존한 모양이다. 본래라면 지독히 피로했어야 할텐데, 지금은 거의 만전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 말에 하령이 눈에 띄게 반색했다.


“정말?”

“예.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 가도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생글거리는 것이 유독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다.


“그럼 궁금한것 물어봐도 될까?”

“당연하죠.”

“비무제전은 어땠어? 막, 대진이나 경기 결과도 그렇고. 아참, 칠룡들도 성장했겠지?”

“재밌었습니다. 특히 뇌룡과 검룡의 무공이......”


쏟아져 나오는 질문에 답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설향 사저는 백화라는 별호도 얻었죠.”

“멋있는데? 창염이라는 무공......곤륜파 애들은 어쩌다 천하의 기재들만 모인거야?”


주변 사람들의 성장과 발전. 그리고 새로운 인연의 만남까지도.


“구음절맥? 그 나이에 힘들었겠네......”

“이제는 괜찮을겁니다. 무엇보다 그 자질이 여태껏 한번도 본적 없는 것이라. 제 움직임을 한번보고 그대로......”

“......너 혹시 다음대 천하제일인을 만난거 아니야?”

“뭐, 시간이 좀 흐르면 곤륜파에서 천하제일인이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중간에 일어났던 사건 사고들까지.


“아하핫. 너하고 다니면 지루할 틈은 없겠다. 온갖 일들이 너한테 몰려드는데?”

“하아. 나중에 직접 겪어보시렵니까?”

“나야 좋지. 어디로 갈까 우리?”

“아까 바다를 못본지가 기백년이라 하신거 아닙니까? 동녘 바다가 그리 별세계라던데. 듣기로는 남경(南京) 근처의 소주(蘇州)가 물의 도시로 유명하다더군요. 혹자는 중원의 무릉도원이라고까지 하던데. 바다도 멀지 않은 거리에 있으니 좋지요.”

“좋아. 약속했으니까 나중에 딴말 없기다?”


담소를 나누며 차를 홀짝인다. 그 사이 마치 역으로 간극에 접어들기라도 한 듯이 시간은 성큼 사라져갔다.


“결승전은, 결승은 어떻게 된건데?”

“일전의 그 검. 다섯번째 초식까지 꺼내들어서 이겼습니다.”


생긋 웃은 백연이 말했다.


“약속 드렸듯이 우승하고 왔죠.”

“믿고 있긴 했지만, 정말로 해버렸구나.”

“분광뇌풍검을 완성하지 못했다면 조금 힘들뻔도 했습니다.”

“완성하고도 다섯 초식이라......”


고개를 저은 하령이 중얼거린다.


“검룡도 범상치 않은 녀석이긴 해. 하지만 나는 역시 네 검이 완벽히 완성되었다곤 생각 안해. 그랬다면 발검하는 순간 이겼겠지.”

“그렇습니까?”

“네가 보여준 그 지향점 대로라면......음. 네 말대로 분광뇌풍검은 역시 초석이 맞겠다.”

“아하하. 아직은 이걸로도 벅차긴 합니다. 여섯 번째 초식부터는 펼치는 것도 쉽지가 않아서.”

“처음부터 터무니없는걸 마음속에 품고 있으니까 그렇지. 다음 검법을 완성하는건 아마 네가 초월에 닿을때나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일은 아닐 터.


“여하간 그렇다면 우승 상품도 받았어?”

“삼봉진인의 무흔을 보았습니다. 아, 경공 묘리도 하나 하사받았고, 그리고 이 검도......”


천마의 검을 슬쩍 내보였지만 하령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굉장히 좋은 신검이라며 놀랄 뿐.


“혹시 이전에 보신적은 없습니까?”

“응? 이 검? 없는데.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검이야?”

“아닙니다.”


무연이 정말로 짧게 사용했던 검인 것인지. 하령과 만난 시점에는 이 검을 패용하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창을 타고 어슴푸레한 햇살이 깃들었고.


타악.


찻잔을 내려놓은 하령이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갈 시간이네.”

“그렇군요.”


그 사이 잠에서 깨어나 운기를 마친 소홍과 백연을 바라본 그가 훌쩍 몸을 돌렸다.


“따라와. 길을 열어줄게.”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걸어나가는 하령.


그의 뒤를 따라 이른 새벽의 서안을 가로지른다. 아직은 서늘한 기운이 짙은 바람을 맞으며 드높은 성벽에 올라서기까지가 금방이었다.


“여전히 많군요.”


하령이 챙겨준 행낭을 걸쳐든 채로 성벽 위에 곧게 선 백연이 중얼거렸다.


성벽 바깥을 따라서는 펄럭이는 깃발들이 한가득 늘어서 있었다. 여전히 강대한 군세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전날 하령이 녹왕을 격살한 뒤로도 크게 변함이 없었다.


조금쯤은 뒤로 물러난 것 같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했다.


거대한 진을 치고 서안으로 오가는 길을 막고 있는 모습. 쉬이 벗어나기 어려운 군세다.


허나 백연의 말에도 하령은 어깨를 가벼이 으쓱일 뿐이었다.


“나 믿지?”

“언제나 믿죠.”

“그럼 경공 준비하고 있어. 지금부터 시작할거니까.”


생긋 미소지은 하령이 한손을 들어올렸다. 그에 백연과 소홍이 살풋 옆으로 물러나 진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두 소년이 그리 경공을 준비하며 숨을 가다듬던 그 순간.


우웅-


귓가를 울리는 옅은 진동소리가 스쳤다. 시야 가장자리, 한 손을 여상히 들어올린 하령에게서 흘러나오는 진기의 여파였다.


처음에는 극히 옅었다. 터럭마냥 흘러나오는 진기가 허공을 맴돌며 하령의 손끝으로 수렴한다. 가느다란 실처럼 흩어지는 것이 미약했다.


허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계속......?’


아주 옅은 기운으로 시작한 진기의 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점차 커지며 끝도없이 뽑혀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하령의 손끝에서 물결처럼 퍼지기 시작한 그 진기의 실은 어느 순간 성벽 위 허공 전체를 메우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실타래가 되었고.


키잉-


하령이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이는 순간, 실타래가 일제히 팽팽하게 당겨지며 알 수 없는 문양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마치 대기를 종이 삼아 하나의 커다란 진(陣)을 슥슥 그려내는 듯한 신기.


그와 함께 하령이 백연과 소홍을 힐끗 돌아보며 웃었다.


“잘 다녀와. 두 사람 다.”

“조만간 다시 보죠.”

“그랬으면 좋겠네.”


웃음기 섞인 소년의 음성이 흘러나온 직후.


화아아악-!


하령의 몸을 따라 한줄기 미풍이 몸을 부풀리며 터져나왔다. 진기 발현의 여파. 그와 동시에 하령의 눈을 따라 시린 안법 광채가 삽시간에 깃들었고.


[오라.]


한없이 앳된 음성이 육합전성으로 화해 사방에 내려앉는다. 그 속에 깃든 막대한 진기가 휘몰아치는 해일마냥 뇌리를 강타.


[술식. 개(開).]


어느 순간 백연의 시야 너머로 찬란한 백금빛 광채가 엿보였다. 한순간 지평선을 타고 막 얼굴을 비추기 시작한 태양보다도 배는 밝은 거대한 빛의 군집체.


하령의 손끝에서 풀려나온 거대한 진기의 실타래였다. 어느새 성벽 서편의 상공에서 시린 빛을 내며 회전하는 모습. 거대한 사각의 진 안에 수없이 복잡한 문자와 술식이 깃들어 각기 발광하며 구결을 엮어내는 것이 백연의 눈에도 엿보인다.


동시에 저편에서 이상을 알아챈 신주흑림과 만금장의 무인들이 벌떡 일어나며 대응하려던 그 찰나.


[홍영금쇄진(紅楹金鎖陣).]


앳된 소년의 음성이 울렸고.


콰아아아아아아아!


일순 백연의 시야에 또다른 태양이 현현했다.


백금빛으로 발광하던 거대한 진법. 하령이 손을 까딱인 순간 작열하는 붉은 빛으로 물들더니 그대로 낙하한다. 어떤 원리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거대한 화염의 기둥과 사슬이 지상을 향해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그 강대한 열기가 한순간 성벽 위까지 후끈한 바람을 몰고 왔다.


작열하는 화염의 기둥이 눈이 멀것처럼 강렬한 빛을 흩뿌린다. 그 광경 앞에서 백연은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은 제한이 걸려 있다더니.’


이것을 보고 초월의 위가 아니라 말할 사람이 있을까.


작열하는 화염이 지상을 휩쓴 시간은 짧았다. 허나 그 여파는 막대했다. 하령의 진법이 현현했던 자리 위로 남은것은 잿더미와, 호신강기를 펼쳐 살아남은 몇몇 무인들 뿐.


서안의 서편을 틀어막고 있던 군세가, 일순 궤멸한 것이었다. 포위망의 한 축을 진법 하나로 완전히 붕괴시켜버린 하령이 백연을 향해 생긋 웃었다.


“이제 가.”


그 말을 듣자마자 백연은 그대로 성벽을 박찼다. 한순간에 백연과 소홍의 신형이 성벽의 아래로 급가속. 두 무인의 신형이 이지러지며 서편을 향해 길쭉한 경공 여파를 그려낸다.


그 사이에 남아있는 몇몇 무인이 정신을 차리고 검을 치켜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백연은 여상히 검파에 손을 올렸다.


본래라면 그저 평범한 검법으로도 충분히 베고 지나갈 수 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왠지-


‘보여주고 가고 싶은데.’


그가 얻어낸 것을, 하령에게 보여주고픈 마음이 스친다.


마음을 먹고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는 찰나였다.


비룡축전의 기파가 희끄무레한 선을 그리며 잿더미의 잔해 사이로 죽 이어지는 순간, 백연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후욱.


신공절학의 묘리가 극히 찰나지간 소년의 몸에 깃들며 막대한 자연지기를 육신에 부여.


직후 소년의 허리춤에서 흐린 빛살이 풀려나왔다.


꺼지지 않을 벼락을 검신에 휘감은 채로 백색의 광채가 일순 흐리게 명멸했고.


콰르르르르르릉!


대지 위를 거대한 벼락이 갈랐다.


단 일검에 하령의 진법을 맞고도 살아있던 무인들의 몸이 전부 갈려나갔다. 바닥을 따라 새겨진 검흔에 시린 뇌광이 깃들어 분분히 튀어오른다.


그렇게 여뢰(餘雷)의 빛을 뒤로하고 서편으로 이어지는 경공 여파를 보며 하령이 웃음을 흘렸다.


대지를 따라 새겨진 거대한 검격의 흔적은 성벽 위에서도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 위를 따라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발광하는 벼락의 기운마저도.


“......대단하네. 백연.”


하령이 중얼거렸다. 기특함과 감탄이 섞인 목소리였다.


“어쩌면 조만간 암화의 새로운 별호가 생길지도 모르겠는걸?”


생글거리며 뱉은 하령. 그 순간이었다.


우웅-


그의 가슴께에 무언가 붉은 보석이 둥실 떠올랐다. 직후였다.


화르르륵!


붉디 붉은 보석 위로 강렬한 열기와 함께 피처럼 시뻘건 불꽃이 피어올랐다. 단숨에 보석을 집어삼킨 화염이 맹렬하게 타오른다.


“.......”


이윽고 화염이 사그라들자 보석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보석이 사라진 자리를 잠시 응시하던 하령이 중얼거렸다.


“또 다 써버렸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후두둑.


성벽 위에서 막 몸을 돌리던 하령의 발치에 붉은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눈을 깜빡인 그가 코를 매만지자 붉은 액체가 손에 묻어나왔다.


잠시 손에 묻어나온 피를 바라보던 하령이 흐리게 웃었다.


“......이제 좀 부족해지고 있나.”


근래 과도하게 힘을 연속해서 써댄 탓이었다. 무영방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만 쓰고 힘을 축적하라고 뭐라 한소리 했겠지.


“그래도.”


백연을 안전하게 보냈으니, 그걸로 이미 충분한 효용을 보았다. 미소지은 하령이 가볍게 성벽의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그 뒤를 따라 나풀거리는 백색 소맷자락이 허공을 타고 길게 흩날렸다. 하얀 나비처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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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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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후원인명록(後援人名錄) 23.07.06 1,288 0 -
공지 연재주기 공지-주 6일 오후 18시 10분(12/04자로 변경)입니다 23.05.11 22,213 0 -
267 천라방 NEW +4 20시간 전 586 30 15쪽
266 천독(3) +5 24.05.20 842 38 15쪽
265 천독(2) +6 24.05.18 1,108 43 18쪽
264 천독 +6 24.05.17 1,026 45 15쪽
263 무극(無極)(3) +9 24.05.16 1,096 47 19쪽
262 무극(無極)(2) +5 24.05.15 1,146 44 22쪽
261 무극(無極) +7 24.05.14 1,162 50 20쪽
260 권마(拳魔)(5) +7 24.05.13 1,161 48 17쪽
259 권마(拳魔)(4) +8 24.05.11 1,296 48 18쪽
258 권마(拳魔)(3) +7 24.05.10 1,185 47 15쪽
257 권마(拳魔)(2) +5 24.05.09 1,212 46 16쪽
256 권마(拳魔) +5 24.05.08 1,275 47 16쪽
255 서주(4) +5 24.05.07 1,290 50 16쪽
254 서주(3) +6 24.05.06 1,322 49 14쪽
253 서주(2) +7 24.05.03 1,549 51 17쪽
252 서주 +6 24.05.02 1,448 50 17쪽
251 푸른 별(9) +7 24.05.01 1,375 54 16쪽
250 푸른 별(8) +5 24.04.30 1,411 50 16쪽
249 푸른 별(7) +8 24.04.29 1,427 54 20쪽
248 푸른 별(6) +6 24.04.27 1,521 51 20쪽
247 푸른 별(5) +5 24.04.26 1,381 49 18쪽
246 푸른 별(4) +6 24.04.25 1,437 51 18쪽
245 푸른 별(3) +7 24.04.24 1,417 57 14쪽
244 푸른 별(2) +5 24.04.23 1,464 55 19쪽
243 푸른 별 +5 24.04.22 1,581 52 14쪽
» 약속(2) +8 24.04.20 1,604 51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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