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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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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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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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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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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오랜 약속(2)

DUMMY

※※※



서안(西安).


압도적인 크기의 도시이다. 중원 전역을 통틀어서도 가장 부유하며 거대한 규모의 성도. 과거 장안(長安)이라 불리며 여러 왕조의 수도가 되었던 곳이니만큼, 명대에 이르러서도 그 위세는 여전했다.


당연히 명에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이다. 일전에도 느꼈지만 하루에 서안을 오가는 사람과 물류의 양은 중원의 가장 중요한 혈도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북쪽에 치우친 북경보다도 중원의 중심에 가깝다.


화산과 종남, 무당과 소림까지도 서안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그를 방증한다.


그런 곳이 포위당했다.


“......공방전을 하고 있는건가?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한데.”

“가만히 있어. 포위하고.”


백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서안의 전경을 살폈다. 양측 모두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는데, 그것이 이른 새벽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상황이 그런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서안이 이 지경인데 관군이 안움직였다고? 북경에서는 무엇을 하는거지.”


극히 이상했다. 서안은 나라에서도 쉬이 놔두지 않을 도시. 이리 포위당했다면 즉각적으로 군을 움직여 폭도들을 쓸어버려도 이상하지 않다. 관이 무림에 개입하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무림인들의 충돌에 한해서다.


서안을 포위한 것은 그 범주를 한참 넘어간 일인 것이다. 역모로 보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데, 그 어디에도 관군의 깃발은 보이지가 않았다.


“북방 장성이 뚫렸다 하더니......”


어쩌면 그쪽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인가.


백연은 입술을 베어물었다. 난세라는 말이 이토록 실감나게 다가올 줄이야.


군문의 도지휘사는 사라졌고, 검왕은 그를 찾으러 북방으로 향했다. 북방 오랑캐들이 장성을 넘어섰다는 소식이 개방주의 입에서 나왔는데, 서방과 남방의 사파 문파들 또한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아직까지 마교가 직접적으로 움직였다는 소식이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라 봐야 할 것인가.


‘그것도 곧.’


신강에 갔을 당시 우호법이 움직이고 있던 것을 보아 마교가 움직일 날도 머지않은듯 보였다. 동시에 백연은 깨달았다.


“......맹은 필연이었어.”


맹의 구축. 역모니 뭐니 할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정파무림이 하나의 머리 아래 뭉치지 못한다면 제각기 찢어져 붕괴할 뿐이었다.


‘유왕. 현명한건가.’


그 과정에 개입함으로써 맹에게는 역모가 아니라는 명분을, 자신에게는 세력을 챙겼다. 난세에 이르러 늦건 빠르건 일어날 것이었던 일에 슬쩍 끼어들어 말을 얹는 것이 뛰어난 움직임이다.


처음 비무제전에 참관을 결정한 순간부터 이러한 것을 계획하고 있었을까.


‘다시 만나면 물어볼게 많겠는데.’


허나 그것도 앞으로의 여정에서 살아남아야 할 일이다.


소년은 검파에 손을 올리고 숨을 들이쉬었다.


“사형, 뭐라도 보여?”

“......신주흑림. 강해보이는 사람.”


그렇게 말한 소홍이 손을 쭉 뻗어 한쪽을 가리킨다.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분주히 움직이는 장소였다. 백연은 즉각 안법을 일으켜 그편을 응시했다.


펄럭이는 거대한 깃발 아래였다. 분주히 오가는 거칠게 생긴 무인들 사이, 독특하게 생긴 월도(月刀)를 비끄러맨 남자가 있었다. 길쭉한 키였으나 그리 크지 않은 덩치. 호피(虎皮)를 엮어 만든듯한 장포가 눈에 띈다.


“저자가 녹왕인가?”


백연이 상산의 마을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소년이 말끝을 흐렸다.


거리가 멀어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서 있는 자세나 걸음걸이에서 느껴지는 균형이 있었다. 마도에서 칼잡이로 구르면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눈썰미가 중요하다.


반박귀진의 영역에 다다른 무인들도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인데, 그런 이들조차 움직임에서 태가 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허허실실 웃으며 별것 없는 삼류 무인마냥 꾸미고 다녀도 빈틈이 없는 괴물들이 존재하기에.


이곳에서 녹왕의 기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고수의 반열에 다다른 인물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방주급? 금원방주 정도는 안되려나.”


직접 코앞에서 붙어보기 전까지 자세히는 모를 일이다.


잠시간 포위된 서안의 상황을 가늠하던 백연이 이윽고 안법을 거두었다.


“어떻게 할지가 고민이네.”

“......”


선택지가 몇가지 존재했다. 우선 신주흑림과 만금장이 서안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닌듯 보였다. 사방에 널린 시체나 전투의 흔적이 별로 없었고, 서안 내에서도 급박한 움직임은 없다.


다만 저들은 지금 넓게 진을 치고 앉아 서안으로 오가는 길목을 틀어막고 있는 중이었다.


“이대로 밤까지 기다리는 것도 방법인데.”


야음을 틈타 진입하면 위험도가 훨씬 줄어든다. 그와 소홍 두 사람 정도가 빠르게 진입하면 붙잡을 사람이 별로 없을 터.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성문을 통과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거기다가 벽을 넘는 것은 어불성설. 서안은 그리 녹록한 성도가 아니었다.


소소한 변수로 녹왕이 성문 근처를 틀어막고 있다는 점도 있었고.


“......아무래도 써야되겠네.”


잠시간 고민을 하던 백연이 한숨과 함께 품에 손을 넣어 종이 한장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일전 서안에 왔을때 하령에게서 받아들었던 종이. 이런 상황에서 쓰게 될 줄은 그도 전혀 몰랐으나, 지금은 가장 최선의 수였다.


“후우.”


숨을 들이쉰 백연이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슥 그어내렸다. 손에서 일어난 진기가 하얀 피부를 부드럽게 가르며 핏물을 뚝 떨궈내었고.


툭.


종이 위에 백연의 핏물이 닿는 순간-


촤라라락!


그 표면이 바르르 떨리더니, 붉은 물결이 툭 번지듯 휘도는 것과 동시에 종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직후였다.


[......백연? 너야?]


한껏 지친듯한 앳된 소년의 음성이 사방에서 귓가를 파고들었다.


“맞습니다.”

[무슨 일이야? 내 힘이 필요한 일이 있어?]

“아니요, 그것보단......”

[잠깐만, 너 어디야? 힘이 생각보다 덜 드는데, 왜 이렇게 진기 소모가......]

“하령이 오라고 했으니까요. 지금 서안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그닥 안좋아 보여서 말이죠.”


그 말과 함께 잠시 내려앉는 침묵.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종이가 소리를 토해내었다.


[서안? 서안에 왔다고? 지금 정확히 어디야?]

“성문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인데, 저 앞에 신주흑림이 진을 치고 있군요.”

[아아, 그쪽? 이제 알겠다. 기운의 방향이 가깝네.]


갑작스레 확 밝아진 목소리에 백연이 피식 웃었다. 하령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반가움이 진했다. 아이같은 몸을 지녀서 그런지 몰라도 감정을 확실히 드러내는데, 듣고 있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저기 녹왕이라는 작자도 있는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 떨거지가 아직도 있어?]

“서안은 공격받지 않은겁니까?”

[그게......아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 일단 빨리 들어와.]


종이 너머로 눈을 반짝이는 하령이 연상되는 목소리. 하지만 백연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어떻게 들어갑니까? 저 군세를 뚫고 가야하는데. 혹시 뒷문이라도......”

[그냥 달려.]

“네?”

[다 무시하고 펼칠수 있는 경공을 최대 속도로 펼쳐서 성문 앞으로 달리라고.]

“그럼 죽기 딱 좋아보이긴 하는데요.”

[걱정 말고 나 믿어. 언제 달리냐면......지금 바로 출발!]


그 말을 끝으로 종이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삽시간에 힘을 잃고 바스라지는 종이자락을 보며 백연이 눈을 깜빡였다.


직후 백연이 소홍과 시선을 교환했다.


“......가야겠지?”

“응.”


헛웃음을 흘린 백연이 기운을 끌어올리며 한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후우우욱!


한순간 시야가 길쭉하게 일그러진다. 저편 멀리 있던 커다란 깃발이 순식간에 큼직하게 눈앞에 현현. 언덕 위에서부터 벌판까지 시린 백광이 길쭉한 꼬리를 끌며 이어졌다.


진을 치고 있던 무인들 사이로 주욱 이어지는 경공 여파. 시린 뇌기가 사방을 휘감으며 그 기운을 마음껏 터트렸고.


콰르르르릉!


우렛소리와 함께 경로에 있던 신주흑림의 무인 수십이 피를 흩뿌리며 튕겨나갔다.


경공 비룡축전. 그 공능은 단순하고 간단했다. 압도적인 속도의 일직선 경공이며, 동시에 뇌기를 흩뿌리는 공간 장악의 묘리를 지니고 있는 걸음. 용형보와 같은 뿌리를 지닌 탓이었다. 진기를 사방으로 흩뿌리는 까닭에 다른 경공에 비해 극히 장거리를 달리는 것에는 불리하지만, 이리 공격초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 여파로 인해 난 커다란 균열. 그 뒤를 따라서는 유령같은 걸음의 소홍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그렇게 두 소년의 신형이 진을 치고 있던 무인들 사이를 직선으로 가르며 삽시간에 성문의 코앞까지 도달.


“이제 어떻게......?”


백연이 뇌까리던 그 순간이었다. 큼직한 기척이 별안간 등 뒤에서 훅 솟아올랐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큼직한 호피를 두른 중년 사내. 코앞에 다가온 얼굴은 지독하게 예민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덥수룩하게 자란 흑발이 늑대마냥 뻗어 있었고, 꼬나쥔 월도의 날은 자세히 보니 톱날처럼 쪼개져 있었다.


쿠웅.


일순 백연의 코앞에 진각을 내리찍으며 월도를 치켜든다. 그와 함께 모여든 막대한 진기가 웅웅거리는 월도의 날 위에서 푸르스름한 빛으로 화한다.


“......!”


그것을 인지함과 동시에 백연의 사고가 급가속. 처음부터 검파에 손을 올리고 있던 백연이 그대로 발검을 하려던 순간.


[천주(天柱).]


웅혼한 울림과 함께 시야가 찬란한 백금빛 광채로 물들었다. 찰나지간 호흡을 앗아갈 정도로 막대한 진기가 돌연 상공에 현현. 여의금고봉(如意金箍棒)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기둥 모양의 기파가 그대로 벼락처럼 백연의 코앞에 낙하했고.


콰아아아아앙!


진기 파동의 여파가 해일처럼 터져나오며 눈앞의 대지가 뒤집히고 터져나갔다. 거대한 진기가 내리찍힌 여파로 땅거죽이 반뼘 가까이 내려앉았는데, 정작 그 바로 앞에 있던 백연과 소홍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오지 않았다.


땅에 내려찍힌 직후에도 잠시간 그 형체를 유지하던 거대한 백금빛 진기의 기둥.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수천개의 빛 조각으로 변해 흩날린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광경.


백연 앞의 대지는 반원으로 큼직한 반경이 패여 있었고, 월도를 휘두르던 녹왕은 시체 한 조각 찾아볼 수 없이 짓이겨 사라졌다.


압도적이고 아름다운 무공의 위용에 백연조차도 잠깐 넋을 잃고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던 사이.


[내가 그냥 달리라고 했지? 어때.]


사박.


흩날리는 백금빛 진기 파편 사이로 길다란 소매를 펄럭이며 착지하는 인영. 언제나 똑같은 외양의 어린 아이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 스승님의 힘이. 멋있지?]

“엄청나네요......스승님.”


백연이 피식 웃으며 장난스레 답했다. 그에 화답하듯 손을 내미는 하령. 웅웅거리며 울리던 진기가 사그라들고 앳된 육성이 그를 반겼다.


“서안에 돌아온걸 환영해, 제자님.”



※※※



“간만입니다.”


하오문 서안지부였다. 그를 알아보고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는 성화방도들의 얼굴이 익숙했다. 백연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여긴 여전하네요.”


막 성문에서부터 여기까지 걸어온 참이었다. 바깥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서안의 성벽 안쪽은 그리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많이 줄긴 했지만, 그럼에도 평화롭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모습.


그 와중에 간간히 그들을 향하는 눈길에는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정확히는 그들이 아니라 하령을 향한 것이었지만.


“서안을 공격하고 있는건 아닌가봅니다?”

“처음에는 시도했지.”


하령이 어깨를 으쓱이며 문을 열었다. 전각 안으로 들어서며 가볍게 손짓하는 것과 동시에 주변의 문이 여닫히며 새로운 길이 드러난다. 일전에도 겪었던 미궁같은 전각의 내부.


쿠구구궁-


문이 제멋대로 열렸다 닫히며 새로운 길을 이루고, 진입하면 또다시 회전하며 다른 길을 드러내는 광경이 다시봐도 신기했다. 기억하려고 해도 쉽지 않은 양이었다. 무엇보다 저 문들을 저리 동시에 움직이는 것 자체가 하령이 아니면 어렵겠지.


“그러다가 몇번 두들겨 맞고 물러난거고.”

“하령이 막은건가요?”

“겸사겸사. 종남파의 무인들 몇도 여기 있어. 종남산 본산이랑 이곳에 전력을 나눠 상주시키고 있지.”

“본산 방비보다 서안을......”

“그만큼 중요한 도시니까.”


하령이 중얼거렸다.


“물론 저 포위를 완전히 붕괴시키기에는 수가 너무 많지만, 적어도 성도가 뚫리는 일은 없을거야.”

“단단하군요. 하지만 그렇다면 왜 저리 진을 치고 있는겁니까?”


의문이었다. 서안이 중요한 도시라곤 하나 사도 문파가 반드시 점령할 필요는 없다. 외려 관군의 개입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기에 한번에 큰 세력으로 단기 결전을 보는게 아니라면 손해가 클텐데.


“뭐 서안에 중요한거라도......”


그렇게 말하던 백연이 문득 말끝을 흐렸다. 소년의 시선이 하령을 향했다. 앳된 아이의 시선이 백연을 향하며 생긋 웃고 있었다.


“중요한거 있지. 여기.”


그렇게 말하며 손을 펼친 하령이 박수를 짝 치는 순간.


쿠궁.


마지막 문이 열리며 세 사람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길다란 계단이었다. 밑으로 끝없이 이어진 계단의 아래 자리한 것은, 성화방주가 수호하고 있는 거대한 서고.


“설마, 암야서고 때문인건가요?”

“아마 그럴거야. 추측이긴 하지만.”


하령이 허공을 향해 가벼이 손짓하자 허공을 따라 빛무리가 두둥실 솟아올랐다. 벽을 따라 줄지어 박힌 수많은 야명주의 불빛이 일제히 드러난 것이었다. 저 아래까지 이어지는 은은한 빛무리 속에서 하령이 걸음을 내딛었다.


“포위를 시작한지가 오래되지는 않았어. 앞으로 또다시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할지도 모르지.”

“......상황이 좋진 않군요.”

“그렇게 나쁜것도 아니야. 내가 알기론 사천쪽이 훨씬 위급한데.”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잖아도 그쪽으로 곧바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저만 이곳에 잠시 들렀다 가려고 빠져나오긴 했는데, 일이 끝나면 합류해야겠죠.”

“내 연락 때문에 먼저 온거구나? 이런 상황이 될거라곤 나도 예상하지는 못했는데. 당장 서주로 갔어도 뭐......”


말하며 백연을 힐끗 돌아본 하령이 미소지었다.


“그래도 기쁘네. 먼저 와줘서.”

“......”


백연은 철야방주의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기뻐 보이는 하령의 미소를 망칠 생각은 없었기에.


대신 그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비무제전은 끝나고 맹이 결성되었습니다. 종남과 화산의 검들이 섬서로 향하면 좀 나아지겠죠.”

“맹? 맹이라고?”

“네. 무림맹이라는 연합이 탄생했습니다.”

“그건 많이 놀라운 일인데? 이따가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해보자. 하지만 지금은......”


타닥.


그들의 걸음이 멈춰섰다.


한참을 걸어 내려온 그들의 앞에 나타난 거대한 묵빛의 문.


계단 앞에 자리한 드높은 철문이 여전한 위압감으로 사방을 묵직하게 내리누른다. 일전 드나들때 자주 봤음에도 여전히 압도적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게 만든다.


그 앞에 선 하령이 뒤를 돌아보았다.


“할 일이 있으니까.”

“......”


하령이 손을 뻗는다. 새하얀 작은 손을 철문에 올린채로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일전에 말했었지? 누군가와 약조를 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오랜 세월을 버텨왔다고.”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흐리게 미소지은 하령이 말을 이었다.


“이 암야서고 자체가 그 약속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

“서고 자체가......?”

“아주 오래전.”


하령의 음성이 담백하게 깔렸다. 동시에 그의 시선이 살풋 흐려졌다. 아주 잠깐, 기억 너머 먼 과거를 바라보듯이.


“무연이라는 사람과 맺었던 약조야. 그의 이야기를 후대에 이어받을 사람이 나타날때까지 보존하겠다고.”

“......”

“그 뒤로 오랜 세월동안 나는 그것을 이어받을 자질을 지닌 사람을 기다렸어. 누구를,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말이야.”


하령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늘어졌다. 과거의 대상을 원망하듯 중얼거리는 음성.


“무연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지. 네가 만나보면 알게 될거라면서.”


직후 하령의 눈매가 휘어졌다. 그의 시선이 다시 또렷하게 백연을 향했다.


“왜 너라고 느꼈을까. 네가 보여줬던 검? 네 안법? 그 성정? 내가 무공을 가르쳐주기로 결정한 녀석이라? 아직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여러가지 이유가 섞여서 내 마음이 동했고.”


그 순간이었다.


하령의 손끝에서 강대한 기운이 파도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막대한 기운의 자락이 손끝에서 하얀 빛으로 화하며 철문 위를 타고 내달린다. 일곱 갈래로 갈라진 기운을 자유자재로 엮어내며 문을 열기 위한 문양을 그려내는 하령.


동시에 희게 일어나는 빛무리 사이로 나직한 목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너를 선택하고 믿기로 했어. 무연은 내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니까.”


직후 사방을 채우던 하얀 빛이 사그라들었고.


쿠구구궁-!


거대한 철문이 느릿하게 열리기 시작했다. 그 앞에 선 하령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지금껏 지키고 있던 것은 무연의 이야기와 그 무공의 뿌리.”


쿠웅!


둔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멈춰섰고, 내려앉은 적막 위로 앳된 하령의 음성이 노래처럼 내려앉았다.


“세간에서는 천마(天魔)라 불리는, 한 청년이 이 땅에 남긴 잔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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