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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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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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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1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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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0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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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2)

DUMMY


페루스라도 나타날 것 같은 삭막한 밤.

듀라트 영지 뒤 편 상공에서 독수리 한 마리가 공중을 배회하고 있었다.

만약 그 자리에 조류학에 얕은 조예가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장면에 의아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대륙의 거의 모든 독수리는 주행성이며, 설령 밤에 활동하는 독수리라 해도 의미없이 오랫동안 하늘을 선회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독수리가 낮과 밤을 착각한 것은 아니다. 그는 대륙에 얼마 남지 않은 밤독수리였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야행성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독수리들의 주된 활동은 주로 먹이를 찾거나 혹은 둥지를 짓는 일이다. 날개 없는 이들이 쉽게 생각하곤 하지만, 실제로 비행이란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다. 따라서 먹이를 낚아 채거나, 지역을 이동하는 때를 제외하면 공중에 체류하는 일은 그 자체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하지만 현재 그 밤독수리는 먹이를 쪼기 위해 내려앉는 일도 없이 숲 위를 빙글빙글 맴돌고만 있었다.

그는 잔뜩 허기진 상태였고, 슬슬 둥지의 보수도 해야 할 시기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감히 숲으로 내려 앉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는 날개를 최대한 넓게 펼쳤다. 바람을 최대한 이용해 체력을 아끼며 그는 숲을 내려다 보았다.

숲의 풍경은 몇 분 전과 다름 없이 여전히 기이했다.

언제나 그가 머물던 숲 안에는 또 다른 작은 숲 하나가 조성돼 있었다.

밤독수리는 조금 전 마찬가지로 어이없는 느낌을 받으며 더 낮은 고도로 활강했다.

가까이 내려가자 숲 속에 있던 또 다른 숲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 작은 숲은 갈색 흙바닥으로 이루어진 얇고 긴 띠로 에워싸여 있었다. 그리고 긴 띠 위에 숫자를 헤아리기 힘든 인간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밤독수리는 자연이 방종하다는 사실쯤이야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 때문에 잠시 굴 속에 들어가 있던 며칠 동안 숲이 그 정도로 변화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밤독수리는 인간들이 만든 띠를 따라 숲을 한 바퀴 빙 둘러 날았다.

곧 그는 인간들이 저마다 빛나는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음을 알아챘다. 잠시 기억을 더듬은 후에 밤독수리는 그것이 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은 위험하다. 밤독수리는 다시 고도를 높여 날았다.


어느 쪽이냐 하면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낯설거나 위험한 동물은 아니었다.

그는 인간들의 생태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흙과 돌을 이용해 넓고 높은 둥지를 만들고, 주로 그 안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동물이다.

둥지가 워낙 넓으니 낯설지도 않았고, 제 둥지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으니 위험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밤독수리는 자신이 평소에 알고 있던 상식을 의심했다.

지금 인간들은 제 둥지가 아닌 숲에 있었고, 그것도 낮이 아닌 한밤중에 그렇게 하고 있었다.


밤독수리는 혹시 완전히 새로운 종의 인간이 나타난 것은 아닌지 염려했다.

예컨대 자신들 중에도 주행성 독수리와 야행성 독수리가 있듯이, 인간들 중에도 다른 종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야행성 인간들이 바로 지금 숲을 제 둥지로 삼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계속 상상했고, 결과적으로 그 상상은 밤독수리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상상처럼 야행성 인간이 등장한 것이라면, 다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요컨대 그날까지 그가 인간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유는, 서로의 영역과 활동 시간 그리고 먹이가 겹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들만 겹치지 않으면 어떤 문제도 없었다. 인간이 실제로 얼마나 포악하건 애초에 마주칠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인간들은 부드러운 씨앗이 무더기로 있는 장소, 맛 좋은 청설모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길을 모조리 점령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그들은 그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었다.


초조함과 긴장 그리고 불안함을 느끼며 밤독수리는 다시 상공으로 날갯짓했다.

문득 극심한 허기가 그를 덮쳐왔다. 며칠 동안 비가 내린 탓에 그는 사냥에 나서지 못했다.

사실, 처음 비가 쏟아졌을 때 그는 기뻐했다. 비가 그치고 난 뒤면, 숲은 항상 그에게 많은 선물을 내어주곤 했다. 예를 들자면 땅을 뚫고 올라오는 통통한 지렁이나, 나무 껍질을 비집고 나오는 애벌레 같은 것들이 그랬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사냥하러 내려 앉을 수가 없었다. 대지가 마를 때쯤이면 그것들은 다시 땅이나 나무 속으로 파고 들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상상하자마자 그는 위장이 뒤틀릴 것 같은 기분을 받았다.


본능적으로, 그는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물론 인간들과 싸운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수가 너무 많았고, 더불어 불이라는 위협적인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지역에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밤독수리가 유일한 야행성 종인 이유는, 다른 개체보다 덩치가 훨씬 작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그중에서도 특히 덩치가 더 작았다. 다른 독수리, 혹은 밤독수리와 영역을 놓고 다투는 일은 가망이 없을 것 같았다.

다른 독수리와 싸울 자신도, 그렇다고 인간에게 덤벼들 자신도 없었던 그는 결국 하루만 더 참아 보기로 했다. 만약 내일 밤도 인간들이 숲을 밝히고 있다면, 그때는 터전을 버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활강하며 숲을 관찰하던 밤독수리는 머리를 좌우로 한번 거세게 털었다. 그 바람에 깃털 몇 가닥이 숲 위로 떨어졌다. 밤독수리는 숲의 한쪽 구석으로 가만히 날아갔다.


*


길버트는 자신의 발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래 맨들거렸을 숲의 바닥은 보기 흉한 자국이 가득했다.

흙바닥은 뒤집어지고 파헤쳐지고 어지럽혀져 있었고, 그 사이로 대지의 속살 같은 것이 슬쩍 드러나 있는 듯했다.

사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곳을 짐승이나 요괴들이 다니는 오솔길이라고 오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폭이 5큐빗에 달하는, 그리고 길이는 몇 천 큐빗에 달하는 오솔길은 없다. 그런 오솔길을 만들자면 성미 급한 페루스 다섯 마리쯤은 필요할 것이다.

언뜻 오솔길처럼 보이는 그 지형은 시민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길버트는 그 지형을 만들기 위해 뛰어다녔던 지난 며칠을 상기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고된 노동이었다.


벌거숭이처럼 드러난 맨 땅을 보며, 문득 길버트는 그곳에 화전을 일구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화전민들은 특정한 구역을 태우기 위해, 우선 땅을 파헤치고, 또 갈퀴 등으로 낙엽과 초목을 죄다 긁어 모은다. 그것이 소위 불금친다고 말하는 작업이다.

길버트가 보기에는 주변 지역은 그렇게 불금쳐 놓은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모든 일이 잘 마무리 되고 나면, 그 작은 숲을 경작지로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솔길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불은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을 재로 만들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숲의 재는 그대로 작물의 훌륭한 양분이 될 것이다. 마침내 경작이 끝나고 수확철을 맞게 되면, 내년 이맘때의 듀라트 영지는 그럭저럭 풍요롭게 겨울을 날 수 있다.

생각의 그 지점에서 길버트는 쓰게 웃었다. 영지의 다음 겨울철을 생각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그런 희망찬 미래는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에 고려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길버트가 시답잖은 생각에서 빠져나오는 것과 동시에 월렛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저희들이 밤독수리의 사냥을 방해한 모양인데요."


어느샌가 길버트 옆에 다가와 있던 월렛은 약간 아련한 표정으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버트는 월렛을 따라 고개를 젖혔다. 하늘 한 켠에서 밤독수리가 조용히 비행하고 있었다. 길버트는 월렛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챘다. 길버트는 미안한 투로 말했다.


"...그렇군요.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히고 말았습니다. 저 독수리에겐 아마 우리들이 자신의 집을 태우는 방화범이나 다름없을 테지요. 차라리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작전 도중에 숲에 들어온다면 저 밤독수리는 랑그의 말처럼 숲의 묘비가 될 테니까요."

"숲의 묘비요? 랑그가 밤독수리를 묘비에 비유했나요?"


월렛이 묻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길버트는 밤독수리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설명했다.


"밤독수리가 남부에서 신성한 취급을 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입니다. 그 전에는 정반대였지요. 밤독수리는 불길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아마 그전에는 랑그가 그의 수필에서 저것을 묘비에 빗댄 것에 영향을 받았겠지요. 어찌 됐든 그는 언제나 대륙에서 가장 존경 받는 시인이었고, 존경 받는 시인의 심상은, 일반적인 시민들의 심상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법이니까요."

"으음..."


뜻 모를 신음을 내뱉으며 월렛은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밤독수리의 꽁무니를 쫓던 월렛은 잠시 후 재차 질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 이해할 수가 없네요. 저렇게 우아한 생물이 또 어디 있단 말이에요? 게다가 저건 피오 교단을 대표하는 동물이잖아요. 랑그는 존경하는 시인이지만 그 비유는 도무지 와닿질 않네요. 대체 왜 저 멋진 생물을 무덤에 비유했대요?"


월렛은 거의 투정부리는 투로 얘기하고 있었지만, 그 자신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길버트는 그 격의없는 모습에 잔잔하게 미소지었다.


"그 얘기를 하자면 시대상을 먼저 말해야겠군요."


"시대상이요?"


"그렇습니다. 랑그가 저 짐승을 묘비에 비유했던 시절, 남부는 참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수 많은 제후들이 서로의 땅을 탐하던 때였지요. 그리고 월렛 당신도 알다시피 영지전이란 서로의 긴밀한 협의 하에 이루어지는 행사입니다. 그래서 영지 사이엔 독수리 마를 날이 없었지요."


"전서조로 이용되었다는 말이군요?"


"예. 맞습니다. 그런데 서로의 협의 하에 이루어졌다고 해도, 전쟁이라는 것은 수행 과정에서 서로 감정이 상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편지나 문서는 낮독수리들이 전했지만, 그중 다소 폭력적이거나 신사 답지 못한 내용의 편지들은 낮독수리들을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차마 낮에는 보내기 민망한 비신사적인 편지에, 제후들은 주로 밤독수리를 애용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랑그는 그 편지와, 그 편지를 놓아두는 밤독수리를 묘비에 비유했습니다. 상상해 보십쇼 월렛군. 당신이 자는 사이 머리맡에 놓여 있는 끔찍한 내용의 편지는, 꼭 무덤 머리맡에 놓인 묘비를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상상에 빠진 듯 월렛은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잠시 뒤 월렛이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월렛은 감탄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면 편지 내용이 묘비 내용처럼 불길하다는 점이나, 침대와 묘지 양쪽 모두 인간이 반듯하게 누워 있다는 점도 비슷한데요?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퍽이나 훌륭한 비유네요. 음. 역시 랑그는 세기의 시인이 맞아요. 인정할게요. 그런데 길 아저씨..."


월렛은 말하던 도중 흠칫 놀라며 자신의 입을 틀어 막았다. 그러고선 길버트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월렛의 걱정과 달리 길버트는 부하의 실수를 지적하지 않았다.

사실 지적하기에는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 월렛의 태도는 한참 전부터 군인이 상관을 대할 때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길버트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하십쇼. 어차피 이 작전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작전이 끝나고 나면 저는 더 이상 백인장이 아니게 될 테니까요. 작전이 성공하면 저는 영지의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갈 테고, 실패하는 경우엔 거름이 되겠지요. 그러니 편히 부르십쇼. 호칭 따위야 사실 아무것도 아니잖습니까?"


월렛은 당치도 않다는 얼굴로 사죄를 표했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에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떠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백인장이시니까요! 적어도 그 요괴 놈들을 전부 해치울 때까지는 상관으로 모셔야죠."


사실 그 말도 상관을 대하는 태도로는 적절치 않았다. 그러나 길버트는 푸근하게 미소 지었다. 길버트는 월렛이 차라리 지금처럼 영지의 이웃 아저씨처럼 대해주길 바랐다. 길버트는 그 편이 마음이 편했다. 월렛은 화제를 돌리려는 듯 다른 질문을 꺼냈다. 월렛은 다소 어색한 투로 말했다.


"크흠. 그보다 백인장님, 정말 이 구역만 태우면 요괴들을 싸그리 없앨 수 있는 겁니까? 혹시 저희들이 포위하고 있는 여기가, 사실 베르미와 스퀼라들의 서식지가 아니라 전혀 엉뚱한 곳이면 어떡하죠?"


길버트는 대답 대신 산 중턱으로 시선을 돌렸다. 산 중턱에 작은 불빛 하나가 일렁이고 있었다. 불빛의 위치를 가늠해 본 길버트는 리버 일행이 약속한 장소에 정확히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었다. 길버트는 자조하듯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멸망하는 수 밖엔."

"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해 놓았습니다. 남은 일은 신께서 알아서 하실 겁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평소부터 기도를 많이 해 놓을 걸 그랬네요."


월렛은 어느새 다시 원래의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길버트는 부하의 농담에 작게 웃은 뒤, 다시 산 중턱을 응시했다. 길버트는 그곳에 있을 세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새삼 그들의 등장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체감했다.

토비를 처음 마주쳤을 때, 길버트는 아돌프라면 어떤 식으로든 영지에 도움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길버트는 아돌프 옆의 어린 두 사람이 이토록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밤의 청량한 바람을 느끼며 길버트는 며칠 전 서재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


작업의 시작 단계에서 길버트는 흥미로운 관찰자에 가까웠다.

아무튼 무녀가 성물을 탐색하는 과정은 어느 누구도 한 평생 볼 수 없는 장면이 분명했다.

게다가 길버트는 그 작업에 직접 참여하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길버트는 드물게도 적잖이 흥분한 상태로, 또 무궁무진한 호기심을 그대로 드러내며 루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시작할 테니 가만히 있어. 긴장할 필요는 없어. 가벼운 산책을 하는 마음가짐이면 돼."


루나는 주의사항을 말한 뒤 지도 위에 한손을 올렸다. 곧바로 그녀의 앞머리 사이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길버트는 그 빛이 그녀의 이마에 있는 문양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머리카락에 가려진 탓에 문양이 정확히 어떤 모양인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길버트는 탁자로 시선을 내리 깔았다. 탁자 위에는 대륙 지도가 있었고, 루나의 손이 그 지도 위를 이리저리 훑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일련의 행위가 수탐이라고 부르는 작업인 것 같았다.


수탐의 시간은 잔잔하게 흘러갔다. 특별한 일은 일어날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작업이 너무 조용하고 잔잔했던 탓에 오히려 무료할 지경이었다.

슬슬 관찰이 지겨워진 길버트는 습관적으로 얇은 책 한 권을 펼쳐 읽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길버트는 손에 이질감을 느꼈다. 어느새 손이 축축해져 있었다. 길버트는 고개를 돌렸다. 루나가 거친 숨으로 헐떡이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루나양..!"


길버트는 일단 손부터 빼내려 했다. 하지만 리버가 길버트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리버는 검지를 세워 자신의 입술 앞에 곧게 세웠다. 도저히 오해할 수 없는 유서 깊은 행동이었으므로 길버트는 입을 다물었다.

진땀을 흘리던 루나가 마침내 지도 위 한 점에서 손을 완전히 멈췄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길버트는 루나의 손이 멈춘 곳의 지명을 중얼거렸다.


"무벤."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탐색은 완전히 끝난 듯 싶었다. 루나는 맥이 빠진 사람처럼 소파에 드러누웠다. 서재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루나의 호흡이 안정됐다. 루나는 평소와 같은 무뚝뚝한 태도로 돌아와 탁자 위를 정리했다. 지도를 접으려던 루나는 흘끔 자신의 손과 길버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고선 쌀쌀한 투로 말했다.


"탐색은 끝났으니 이제 그만 놓지 그래."


길버트가 황급히 손을 빼냈다. 루나가 이어 말했다.


"네 덕에 성물의 위치는 확인했어. 멀리 있군."

"...혹시 다음 성물은 무벤에 있는 겁니까?"

"정확하게 그 도시 안에 있다고 특정할 수는 없어. 도시 안에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도시 근처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을지도 모르지."


접은 지도를 리버에게 건네고 나서, 루나는 길버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다가 마지못해 꺼낸다는 얼굴로 말했다.


"도움을 받고 말았군. 좋아, 나도 널 도와주겠어."


길버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에게 거래를 제안한 것은 장난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루나양은 제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을 손에 넣게 해주었잖습니까. 그걸로 충분합니다. 당신이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나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십쇼. 저와 영감님들은 당신을 붙잡을 권리가 없습니다."

"남자들은 항상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군."

"예?"


뜬금없는 대답이어서 길버트는 다소 바보 같은 의문성을 내뱉고 말았다. 그러나 루나는 길버트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루나는 탁자 한 편으로 밀려난 서류들을 다시 제자리로 가져왔다. 소파에 앉은 루나는 서류를 하나하나 훑으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남자들은 대개 그렇지. 여자들이 조금만 친절한 태도를 보이면 그것을 애정으로 착각해버려. 그런데 반대로 여자들이 가끔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면 그 순간 버림받은 카니쿨라처럼 행동하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까 루나양?"

"그런 남자들처럼 너도 착각에 빠져 있다는 말을 하고 있어. 이걸 봐."


루나는 들고 있던 헤르바지를 길버트의 얼굴 앞에 디밀었다. 이어서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네 스스로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이 계획은 전부 엉터리야. 계획은커녕 소설에 가깝지."

"어떤 부분이 말입니까?"

"화전을 일구는 것처럼 숲을 분리시키려는 의도는 좋아. 하지만 너는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분리한 숲 안에 모든 요괴들이 잠자고 있을 거라 확신하는 거지? 만약 그것들의 서식지가 전혀 엉뚱한 곳에 있다면, 이 계획은 전부 수포로 돌아갈 거야."


길버트는 그 지적에 대해 차분하게 인정했다.

그녀의 말처럼 세부적인 모든 계획을 세우기 전에, 우선 요괴들의 구역을 재단하는 일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전혀 엉뚱한 곳에 불을 지르고, 나중에 가서야 그곳에 요괴들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것은 일종의 희극이나 다름없다.

루나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하지만 길버트는 억울했다.


"합당한 지적입니다만, 어차피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숲의 어느 구역을 태워야 할지 알기 위해서 요괴들이 자고 있는 땅을 전부 헤집어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럴 시간도 인력도 없지만 그것보다는 애초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 무능을 탓하려면 실제로 구역을 재단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불가해한 느낌을 받으며 길버트는 말을 멈췄다. 길버트는 루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루나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길버트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길버트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혹시 루나양은 그럴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어."


확고한 표정으로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움과 함께 길버트의 눈이 둥그래졌다. 루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루나는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무녀의 답례는 상당히 비싼 편이야. 그래서 우리들은 도움 받기를 꺼려하지. 그것을 몇 배로 갚아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원칙이니까. 너는 모르겠지만 방금 네가 수탐을 도와준 것은 작은 일이 아니야. 그렇다면 나는 갚아야 해."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루나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네 도움의 답례로, 나는 이 암울한 영지에 새로운 미래를 선물해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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