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그림자를 딛고 서다 - 2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과거의 그림자를 딛고 서다 - 2
무진은 여인의 앞에서 한참을 그대로 서 있다. 마치 망부석처럼.
“그럴 리가 없다. 절대로.”
무진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걸 보는 태민 사형제의 표정이 굳어진다.
“상태가 심각합니까?”
“.....”
무진은 태민의 물음에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아저씨!”
“.....”
보다 못한 명수가 나서지만 마찬가지다.
“소협! 누님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그냥 두세요. 아저씨는 뭔가에 빠지면 원래 저래요.”
태운이 다시 말하자 명수가 가로막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벌써 반 시진 이상 저러고 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이냐?”
태운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다. 그러자 무진이 반응을 보인다.
“너희랑 무슨 관계냐?”
“관계는 무슨.... 누..누님은 괜찮은 겁니까?”
태운은 무진이 입을 열자 화들짝 놀란다.
“중요한 분입니다. 무당까지 안전하게 모셔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후후후! 살려야 한단 말이군.”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십시오.”
태민 사형제는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한다.
“수야!”
“예, 아저씨! 준비는 끝났습니다.”
“일각 후에 시작한다.”
“지금이 아니고요?”
“잠시 나가 있어라.”
“예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무진의 말에 태민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아니다. 잠시 정리할 게 있다.”
“알았어요. 자, 자. 나가시죠.”
명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두 사람과 함께 밖으로 나간다.
“무슨 일이냐?”
“갑자기 왜 저래? 바로 치료할 것처럼 하더니, 원래 저렇게 변덕이 심하니?”
“아니에요. 몸이 좀 안 좋은 모양이에요.”
“하긴 백 명이 넘는 지옥방 무사들을 혼자 다 상대했으니 힘들겠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꼭 뭐에 놀란 사람처럼 오늘 따라 왜 저러지?’
명수는 방안을 돌아보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그건 그렇고. 사숙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겠소?”
“태원이랑 태수도 있으니... 네 생각은 어떠냐?”
태민 사형제는 사숙과 사형제 둘을 잃었다.
“마음 같아선 무당으로 모시고 싶지만, 우린 지금 누님조차 안전하게 모시기 힘든 상황입니다.”
“화장해서 유골만 무당으로 보내자는 거냐?”
“사형의 마음은 알지만, 현실적으로 시신을 무당까지 모시는 건 불가능합니다.”
“으음! 하긴 지금 무당에 연락해도 최소 한 달 이상은 지나야 사람이 도착할 거야. 그때까지 시신을 보관할 방법이 없다.”
“그럼 그 문제는 화장하는 걸로 하고, 누님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이 상태에서 우리 힘으로 무당까지 모시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기다리는 것도 한계가 있고.”
“지옥방도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게다가 사파들까지 개입하면 무당에 도착하는 건 고사하고 살아남기도 어려울 테고.”
“가까운 곳에 부탁할 데가 없을까요?”
“인근 백 리 이내에는 우리를 도와줄 곳이 없다. 더구나 누님에 대해서 알고서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
“그러니까 지옥방 같은 놈들이 설치겠죠. 혹시 은거한 고수도 없을까요?”
“너도 알지 않느냐?”
“으음!”
두 사람의 표정은 갈수록 어두워진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명수가 나선다.
“쯧쯧, 형아들은 진짜 바본가 봐.”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한다.
“명수야, 혹시 좋은 방법이라도 있니?”
“주위에 아는 고수들이 있어?”
“참 이상한 양반들이네. 그런 걸 왜 멀리서 찾아요?”
“인근에 무림고수나 우릴 도울 문파가 있는 모양이구나.”
“있지요. 그것도 확실하게 처리해줄 사람이죠.”
“누군데?”
“어떤 문파냐?”
명수는 손가락으로 집안을 가리킨다.
“우리 아저씨가 있잖아요? 부탁해보세요.”
“아저씨?”
“예, 무진 아저씨 말이에요.”
태민 사형제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하지만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몸이 굳어진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 때문이다.
“아...아저씨!”
무진은 명수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한다. 그렇게 한참을 일하더니 입을 연다.
“뭘 보고만 있어?”
“아, 예!”
“오늘 따라 피 냄새가 역겹구나.”
바닥에 흘린 피를 닦으란 말이다. 피는 그의 다리와 옆구리에서 흐른 것이다. 아마 지옥방의 무사들과 싸우면서 다친 모양이다.
“어떻게 저런 부상을 당하고도 살 수가 있지?”
“한 사람의 몸에 저렇게 많은 상처가 있는 건 처음 봅니다.”
태민 사형제의 목소리에는 놀라움이 담겨 있다. 그들을 놀라게 한 건 피가 아니다.
“저도 처음 저걸 보고 기절할 뻔했어요.”
명수의 말대로 웃통을 벗은 무진의 등에는 수십 개의 상처가 나있다. 물론 지금은 흔적만 남은 오래 전의 것이다.
“상처도 그냥 상처가 아니다. 하나의 상처만으로도 능히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그런 것들이다.”
그들의 말에도 무진은 아무른 대꾸도 하지 않는다. 대신 바늘로 자신의 상처를 깁는다. 중지(中指) 만 한 침으로 직접 상처를 봉합한다.
“아저씨 말로는 몸에 난 상처도 모두 직접 치료했대요. 그 덕분인지 지금은 인근에서 우리 아저씨만큼 뛰어난 의원은 없어요.”
“의원이라고?”
“의원이 별건가?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병을 치료할 수 있으면 되지. 준비됐니?”
“예.”
명수가 대답하자 무진은 여인이 누워있는 침대 옆에 자리를 잡는다. 침대 옆 탁자에는 각종 치료 기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시작한다!”
무진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여인을 뒤집어 눕히는 것이다. 그런 다음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른다.
“뭘 하려는 걸까요?”
“난들 어찌 알겠냐? 머리를 치료하기 위해 자르는 거겠지.”
머릿속이 보일 정도로 머리카락을 자른 다음 오른 손을 내민다.
“대침!”
무진의 지시에 따라 명수가 굵고 긴 침을 건넨다.
파파파팟!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침으로 여인의 뒷머리 부분을 찌른다. 순식간에 머리엔 수십 군데의 구멍이 생기고, 그 속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린다.
“지...지금 뭐하는 겁니까? 누님을 죽이려는 거요?”
“당장 멈추세요. 사람의 머리를 그렇게 하면 어떡합니까?”
무당 제자들은 기겁하며 소리친다.
“머저리들, 계집을 살리고 싶으면 찌그러져 있어! 개뿔도 모르는 것들이 잘난 체는.”
“하..하지만.”
“방해할 거면 나가!”
그 말에 두 사람은 입도 벙긋 못하고 뒤로 물러난다.
“쭈우웁!”
무진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피를 입으로 빨아낸다.
“으음!”
“우욱!”
그의 행동에 태민 사형제는 신음소리만 낼 뿐 아무 말도 못한다.
‘죽은피를 입으로 빨아내고 있다. 그 중에는 고름도 있을 것이다. 과연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의원이라지만 대단한 사람이다. 과연 모든 환자에게 저렇게 헌신적일까? 그렇다고 누님과 인연이 있는 건 아닐 텐데....’
태민 사형제는 화를 내다가 무진의 행동을 보고는 금방 감탄한다. 일각 정도를 그렇게 뽑아내자 피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상처에 약을 발라라.”
“예!”
명수가 가루약을 뿌리는 동안 무진은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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