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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록 님의 서재입니다.

텔룸(Tel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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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록
작품등록일 :
2020.05.11 10:01
최근연재일 :
2020.06.30 10:45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6,385
추천수 :
1,625
글자수 :
221,209

작성
20.06.2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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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Finale. Downburst(하향격풍) - 2

DUMMY

아주 잔인하고도 놀라웠다.


비슷한 사례를 들어 본 적은 있지만, 그 광경을 직접 목도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총성이 울린 것을 시작으로, 기념관을 둘러싼 경찰들은 더 이상 숨바꼭질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더니 무슨 문제라도 발생했는지 저들끼리 총격전을 벌이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빌어먹을, 저놈의 민중의 지팡이 여러분 덕에 진과 소어가 위험해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객기를 부려야 이 정신 나간 분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까? 주변을 잠시 걸어 다닌 결과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지금까지 해 온 대로, 온갖 수단을 아낌없이 활용하는 것.


좋아, 좋아.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타고 온 차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행에 앞서, 잠시 눈을 감고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런...'


떨어지면 돌아올 수 없을 듯한 공허감이 일순간 정신을 휘어잡았다. 격렬한 정사를 마친 뒤 찾아오는 말할 수 없이 허탈한 기분도 이에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잔류 마나가 절반도 남지 않았다. 고출력 마법을 여러 차례 사용한 탓이다. 마법사들 중 유달리 독신자가 많은 게 이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우선 외투 가슴팍에 달린 주머니에서 조그만 푸른색 약병 하나를 꺼냈다.


재빨리 뚜껑을 열고 그것을 들이키자, 굉장한 고양감이 마음 속 공허를 꿰차고 들어갔다.


다시 한 번 혈관을 달리는 마나의 충만함을 느낀 뒤, 빗물투성이 보닛에 양 손을 올리고 주문을 시전했다.


"Ventus in Murus..."


불안정한 바람의 벽이 차량의 보닛을 단단히 감쌌다. 가벼운 충격이라도 받을 경우, 조금 전의 망치와 마찬가지로 강한 폭발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아니, 훨씬 더 강한 충격이 필요하다. 곧바로 운전석에 오른 나는 키를 꽂고 엔진을 예열했다.


옆에서 내 행동을 지켜보고 계시던 길버트 아저씨를 바라보고, 나는 인사를 건넸다.


"돌아오겠습니다."


그는 입을 여는 대신 고개를 불안하게 끄덕였다.



나는 그 길로 액셀을 강하게 밟아 로비의 정문을 향해 돌진했다.


속력이 급하게 상승한다. 목덜미를 뒤로 강하게 잡아끄는 반동이 등과 꼬리를 통해 생생하게 느껴진다.


돌로 된 계단을 튼튼한 바퀴로 밟고 올라갈 무렵, 유리로 된 현관문을 등진 경찰들과 바리케이드가 시야에 들어왔다.


계획대로였다. 내 경험은 틀리지 않았다. 보닛으로 유리문을 들이받자, 그것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났다.


모두의 시선이 유리문으로 쏠릴 무렵,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닥칠 또 다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내 차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순간, 보닛을 둘러싼 바람이 충격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곧 격렬한 풍압이 보닛으로부터 터져나왔다. 바로 옆에 선 경찰들은 그대로 날아가 벽에 부딪혀 정신을 잃었고, 먼 곳에 있던 시민들은 바람에 밀려 넘어졌다. 나를 제외한 로비의 모든 이들이 그 여파를 벗어날 수 없었다.


마력 저항이 있는 이라면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다행스럽게도 그 자리의 모두는 이런 분야에 있어서는 모르쇠였다.


얼마 안 가 서로에게 증오를 쏟아 내던 사람들은 전부 뜬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기절했고, 누군가는 적어도 기운이 빠진 듯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대리석 바닥은 사람들이 쏟은 선혈이 흥건하게 고여 발걸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 짧은 번민을 가볍게 짓밟을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놈이..!"


엘리베이터에서 금속을 찢어버리는 굉음이 울리더니, 이윽고 사람 얼굴을 붙이고 다니는 그 놈이 튀어나온 것이다.


경찰들이 뒷처리를 제대로 못 할 정도로 강한 녀석이었나? 나는 곧바로 놈을 마무리할 준비를 시작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결코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재빠르게 창을 뽑으려 하는 사이, 놈의 옆구리를 향해 자그마한 누군가가 달려들었다.


둘은 짐승이라도 된 듯 맹렬하게 바닥을 굴렀다. 인면수는 작은 존재의 팔을 물어뜯었고, 그렇게 뜯겨나간 단면에서는 살덩어리 같은 팔과 함께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돋아나 놈의 미간을 찔렀다.


미간을 깊이 찔린 괴수는 진정으로 고통을 느낀다는 듯, 두 앞발로 상처에 박힌 손톱을 부여잡고 몸부림쳤다.


나는 눈에 힘을 준 다음 그 작고 검은 존재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결국에는 확인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소어였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전투를 계속할수록 본래의 형상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결국 손톱이 뽑힌 채로 먼 곳에 던져졌을 때, 나는 점차 위험수를 닮아 가는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은 부리에는 날카로운 치열이 자라고 있었고, 재생된 팔은 기괴하게 뻗은 혈관에 점차 파묻히고 있었다.


그렇게 둘 순 없었다. 절대로! 저 둘을 떼어놓기만 한다면 기회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나는 손에 들려진 뜨거운 무언가를 느꼈다.


어째서였을까? 그 때 손에 붙들린 화염의 형태를 기억할 수 없었다. 오로지 본능에만 의지한 채, 그것이 날 선 무기라는 사실을 인지할 뿐이었다.


다음 동작을 생각하기도 전에 상체가 숙여지고, 두 손으로는 무기의 끝을 전방을 향해 겨누었다.


눈으로는 소어가 노리던 약한 옆구리를 주시한다. 피부로는 공기를 가득 채우는 꺼림칙한 습기를 음미한다. 코로는 놈의 비릿하고 톡 쏘는 피냄새를 맹렬히 쫓는다. 귀로는 순간의 정적을 규칙적으로 깨는 내 심음에 집중한다.


전신의 순수한 감각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전방으로 향하는 가속도를 온전히 경험한다.


피에 젖어 미끄러운 곳을 밟지 않도록 내 모든 감각은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었다.


단단한 밑창이 바닥을 수어 차례 딛더니, 곧 타오르는 칼날이 놈의 복부를 뚫었다.


"Secare!"


영창이 끝남과 동시에, 칼날로부터 불규칙한 참격이 터져 나오며 내장을 호쾌하게 찢어발겼다.


하지만 곧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재빠르게 머리를 숙이자 피비린내를 풍기는 앞발이 머리 위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붉은 실선이 이마를 가로질렀다.


젠장, 놈의 타점이 무식하게 높아졌다. 저 묵직한 발길질과 날카로운 발톱을 직격으로 맞는다면 희생자들과 같은 육편이 될 것이 뻔하다.


나는 회피와 동시에 복부에 박힌 무기를 힘껏 당겨 뽑았고, 잠깐이나마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본래 내장이 있어야 할 곳에는 붉은 종양들이 가득 들어차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분노를 불렀던 것은, 무기를 뽑을 때 함께 떨어져 나온 끈적한 검은 덩어리였다.


바닥을 구르는 그것은 짐승의 위액보다도 더한 악취와 마소 냄새를 풍겼다. 마치 썩어들어가는 위험수의 내장에서 나는 암모니아 냄새와 흡사...아니, 그보다도 심한 물건이었다.


문제는 그 지독한 기류 사이로 무척이나 그리운 피냄새가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형을 붙들고 있었던 작고 부드러운 손가락들이 기괴한 종양에 먹혀들어가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화가 났다. 증오가 복장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듯 끓어올랐다.


나는 순식간에 놈의 후방을 향해 달려들며 다리와 꼬리로 바닥을 딛은 뒤, 어림잡아 내 목 높이 정도로 무기를 휘둘렀다.


괴수가 귀를 찢는 비명을 지른다. 길고 두꺼운 꼬리가 잘려나간 단면에서 붉은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멈추지 않았다. 토막내고 다져서 죽여야 한다. 모가지 끝에 달린 얼굴이 나를 자극하는 듯 헤실헤실 웃어제낀다. 그래. 죽일 수 있다.


죽여라.


나를 이끌어 온 본능이 놈을 끝장낼 것을 종용했다.


잘린 꼬리가 바닥을 치는 순간, 내 무기는 왼쪽 뒷다리를 파고들어 연골을 갈랐다.


비명을 지르던 괴수의 쉬어 터진 목청이 꺽꺽거리며 신음한다. 벌어진 연골과 찢어진 힘줄 너머로 피부가 덜렁거린다.


괴수도 얌전히 죽어 줄 생각은 없었으니, 멀쩡한 뒷발이 다시 한 번 내 꼬리를 노리며 날아왔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놈의 복부 아래쪽으로 몸을 날리며 다음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격으로 찢어진 옆구리에 미늘을 걸친 뒤, 의족으로 반대 쪽 옆구리를 강하게 밟았다.


"죽어라아!"


날카로운 미늘이 복부를 가로지르자 시뻘건 종양과 악취를 풍기는 송장 파편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어서 나는 외투 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작은 용기를 열어젖힌 뒤, 한 발자국 물러나 내용물을 세게 흩뿌렸다.


자극적인 휘발유 냄새가 풍길 무렵 파괴의 주문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빛나는 균열이 생기며 붕괴되어가는 무기를 움켜쥔 뒤, 휘발유 범벅이 된 복부를 겨누고...


그대로 찔렀다.


순간, 놈은 지금까지 들어 본 적 없는 괴성을 지르며 피바다가 된 바닥을 굴렀다.


불길에 휩싸인 살점 덩어리들이 사방으로 튀고, 대마초처럼 허하고 역한 탄내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내가 물러나는 일은 없었다.


시전하는 순간을 기억할 수 없었는데, 오른손은 어느 새 뜨거운 불덩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작열하는 덩어리는 검이 되었고, 나는 다시 한 번 그것을 휘둘렀다. 놈의 불타는 모가지에서 피거품이 끓어올라 칼날을 적신다.


다음으로는 도끼의 차례다. 피투성이 해골을 쪼개는 중독적인 진동이 팔을 타고 흘러든다.


뜨뜻한 한숨이 혀와 입술을 간지럽힌다. 하지만 이번에는 철퇴다. 강하게 내리쳐 척추와 갈빗대를 부순다.


창.


낫.


화살.


단검.


방패.


안 돼, 소어를 돌보러 가야 하는데.


나는 놈을 자르고 뜯어버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만. 제발 그만.


조금 전까지 사냥에 목을 매던 상황과는 정반대로, 나는 억지로 무기를 뽑아내려는 몸을 진정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다행스럽게 통제가 돌아온 왼팔로 오른팔을 붙들고 엎어졌다.


'ㄸ...뜨거워!'


스스로 전의를 억누르려 들자, 무기를 휘두르는 순간에는 느끼지 못한 열기가 나를 덮치기 시작했다.


오래 전 짓물러 터진 왼쪽 손바닥의 거친 감촉이 팔을 휘감자, 오른손의 불덩이 역시 공포를 느끼는 듯 흩날렸다.


그래, 조금만 더, 더. 악력이 점점 올라가며 감각이 무뎌질 즈음, 불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하...'


나는 그대로 바닥에 이마를 붙인 채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마나를 과도하게 써서 그런가 머리를 쇠파이프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살다 살다 이렇게 심한 마나 멀미를 겪은 적은 없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못해 구토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도대체 방금 폭주로 얼마나 썼길래 이 모양이 된 건가? 아니, 그보다도 방금 전의 불덩이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어떤 질문을 꺼낸다 한들 대답할 기운이 없었다. 젠장, 어째 숨 쉬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았다. 공기가 나를 거부하는 것이 피부로 와닿는다.


하지만, 나는 그저 소어가 내던져진 방향으로 천천히 기어 갈 뿐이었다.


아, 보인다. 붉고 하얀 대리석 바닥 위로 드리워진 이질적인 검은색 깃털이 보인다.


피 냄새가 짙어진다. 그에게 가까워지고 있다.


아니,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뭐?


이상한 혼잣말이 정신을 깨우자, 나는 모든 신경을 후각에 집중했다.


그리고 알아차리고 말았다.


냄새. 내가 알던 소어의 냄새가 없었다.


내 눈은 쓰러진 소어를 바라보고 있는데, 내 코는 그 존재를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안 돼. 다가가면 안 돼.'


본능이 다급하게 속삭인다. 나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이성은 여전히 그를 향해 기어가고 있다.


한 걸음, 두 걸음, 후각은 이미 포기한 듯 마비되어 버렸다.


세 걸음, 네 걸음, 끔찍한 피로에 눈이 감기는 와중에도, 나는 마지막으로 그 작은 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


그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냐..."


소어는 죽었다. 진짜로 죽었다.


나는 텅 빈 눈으로 스테인드글라스를 응시했다.


무지개색 유리가 점차 뿌옇게 번져 가기 시작했다.


"..."


슬펐다. 하지만 감정조차 흐리는 과부하가 밀려 오며 눈물이 말라 버렸다.


얼마 안 가 저항할 수 없는 졸음이 눈꺼풀 너머로 쏟아졌다.


"...룸!"


...익숙한 목소리다.


"텔룸!"


누군가가 땀에 젖은 얼굴을 닦아 주고 있었다.


축축한 목에 조금 억센 손가락이 닿았고, 곧 미지근하고 축축한 물수건이 아가미를 적셨다.


부스스 눈을 뜨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길버트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옆으로는 다급하게 손을 움직이는 유지니아가 보였다.


그녀는 다행스럽게도 살아 있었지만,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평소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둬..'


나는 더 이상 소어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옆에 있는 존재는 이미 소어가 아니라는 것을 외치고 싶었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살아난 모든 감각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텅 빈 껍데기가 되었다. 더 이상 소어는 없다.


하지만 그런 나 역시도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기회를 주기를 바랬다.


분명 어렵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가능성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적은 일어났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형태로.



갑자기 죽은 듯 움직이지 않던 그가 눈을 떴다.


변이된 두 팔이 경련하듯 떨렸다.


붉은 고깃덩어리 같은 왼팔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향하자, 진은 한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그녀의 두 눈이 공포에 질려 떨리고 있었다.


색을 입힌 유리를 향해 뻗은 살덩어리가 꿈틀거리기를 한 번, 두 번...


내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놀라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릴 때였다.


소어의 왼팔이 이상하게 뒤틀리더니, 이윽고 새햐얀 깃털이 수북하게 돋아난 날개가 되었다.


나는 날개가 된 팔에서 그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검은 깃털이 돋은 뺨에 균열이 생기며 흰 깃털이 그 틈을 메우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경악에 찬 시선들 속에서, 별안간 몸통이 강하게 튀어올랐다.


얼마 안 가 갈비뼈가 뜯어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피범벅이 된 하얀 몸통이 드러났다.


내 감각은 그의 인간성이 꺼져 가고 있음을 조용히 알렸다.


어떤 추악한 짐승이 그를 안에서부터 먹어치우고 있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없을까? 저 짐승을 죽일 수는 없을까? 하지만 더 이상의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그 짐승은 일용할 양식을 끊임없이 탐하기 시작했다.


나는 등의 촉각으로, 바닥에 고인 피바다가 그 존재를 먹이기 위해 서서히 모여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액체에 젖어드는 느낌 외에도 다른 것이 있었다.


피에 깃든 마나, 여러 사람들이 흘린 그것이 한 자리로 모여들었다.


죽은 듯 벌어진 소어의 부리는 모여드는 피바다를 쉴 새 없이 삼켰다.


자양분과 마나를 한껏 들이킨 뒤, 그 존재는 오른쪽 날개와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꼬리깃을 얻고 일어났다.


흰 깃털이 바람에 가볍게 진동하자, 몸에 잔뜩 묻은 핏자국이 점차 스며들며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얼굴과 몸통에 매달려 있던 소어의 잔해가 몸 속으로 빨려들어가자, 깃털이 새하얀 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치켜 뜬 두 눈에는 눈동자가 없었고, 창백한 흰자위는 우유 같은 안개를 흘렸다.


그리고 마침내, 놈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듯 날개를 펼치며 높은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천사다.


천사가 나타났다.



순간, 그것의 왼발이 파르르 떨리며 나를 애타게 불렀다.


물론 발이 말을 하는 경우는 없지만, 나는 분명 그것이 속삭이는 그리운 울림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에 다가가기 전, 주변을 잠시 둘러보았다.


"...길버트..?"


아저씨는 넋을 놓고 천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경외심이 담긴 눈길로 천사를 영접하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분명 그 천사는 아름다웠지만, 어떤 생리적인 거부감과 익숙한 기척이 나를 불러들이고 있었다.


멈출 수 없었다. 적어도 나 혼자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천사의 발치에 다가가자, 가장 큰 발톱이 내 얼굴을 향했다.


새하얀 깃털만큼 먼지 한 톨 없이 매끈한 발톱이 내 눈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거울 같은 발톱에 비친 왼눈을 바라보고, 그 동공 속에 비친 발톱의 상을 재차 응시했다.


그러자, 내가 바라보던 발톱...거울 같은 발톱과 화상 입은 얼굴이 새햐얀 빛에 휩싸였다.


오른쪽 눈으로 아래를 바라보자 붉은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왼눈을 감쌌지만, 어째서인지 통증을 비롯한 어떤 감촉조차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왼쪽 눈에 박힌 커다란 발톱과 뺨을 흐르는 피의 온기를 맛볼 수 있었다.


잠시 후, 눈에서 발톱이 빠져나갔다. 게다가 시야를 가리던 뿌연 빛도 점차 흩어졌다.


그리고 나는 목격했다.


맨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천사의 실체와 마주했다.


마치 마법이라도 쓰는 듯, 천사가 가진 모든 신체 기관들의 세세한 구조까지도 똑똑히 바라볼 수 있었다.


가만히 그 광경을 응시하자, 결점 하나 없이 완벽해 보였던 모습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얀 깃털은 한 줌도 보이지 않았고, 인면수의 그것보다도 시뻘건 피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엔진처럼 각지게 변한 심장은 정신 사납게 날뛰며 전신에 동력을 넣었다.


뼈로 만든 톱니바퀴들은 서로를 지탱하며 빠르게 돌았고, 혈관과 내장은 배전반이나 수도 파이프처럼 어지럽게 꼬여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이 천사라는 건...


생물을 뒤틀어 만든 기계에 가까운 것 같았다.


판단을 끝마칠 무렵, 나는 유독 이상하게 여겼던 발목을 살펴보았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왼쪽 눈을 감은 소어의 얼굴이 종아리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향해 손을 뻗어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소어는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며 말을 걸었다.


"두 사람을 지켜 줘."



말이 끝나는 순간, 천사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르며 그 얼굴도 까마득히 높은 천장으로 올라갔다.


눈 깜짝할 새 북쪽을 향하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산산히 부서지며 색색의 유리조각을 흩뿌렸다.


짙은 회색의 구름이 흐르는 가운데, 반쯤 새하얗고, 반쯤 시뻘건 천사가 거대한 공기청정기를 향해 날았다.


날개가 일으킨 바람이 주변의 잔해를 감싸며 작은 먼지 구름이 일었다.


잠시 후, 바닥에 부딪히는 유리의 날카로운 소리는 얼마 안 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곧 찬 비바람이 이마와 어깨를 때렸다.


하지만 나는 부탁을 들어 줘야만 했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어째서인지 그 한 마디는 결코 거역할 수 없는 힘을 품고 있었다.


나는 옆에 앉은 채로 텅 빈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감쌌다.


따뜻하다.


소어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따뜻한....기분 좋은 온기다.


조금 더 힘을 줘서, 그들의 머리가 텅 빈 하늘을 향하지 않도록 깊이 끌어안았다.


좋다.


이대로라면 충분하다.


그렇게 시간은 점차 느려졌다.


바람은 점차 거세게 불어 오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시간은 빨라지지 않았다.


"..."


나는 가만히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시간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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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Bloody Mary(블러디 메리) - 2 +26 20.06.15 277 27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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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3 +26 20.06.13 303 27 9쪽
35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2 +34 20.06.12 300 29 8쪽
34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1 +28 20.06.11 288 28 11쪽
33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3 +38 20.06.10 304 31 12쪽
32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2 +28 20.06.09 313 27 7쪽
31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1 +34 20.06.08 316 31 10쪽
30 Side Chapter - Golden Rule(황금률) +31 20.06.06 360 33 9쪽
29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5 +29 20.06.05 277 34 9쪽
28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4 +41 20.06.04 277 35 8쪽
27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3 +34 20.06.03 291 34 11쪽
26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2 +32 20.06.02 265 34 8쪽
25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1 +30 20.06.01 310 36 9쪽
24 Under the Violet sky(보랏빛 하늘 아래에서) - 6 + Malice(악의) +35 20.05.30 301 37 14쪽
23 Under the Violet sky(보랏빛 하늘 아래에서) - 5 +44 20.05.29 316 42 8쪽
22 Under the Violet sky(보랏빛 하늘 아래에서) - 4 +44 20.05.28 314 39 10쪽
21 Under the Violet sky(보랏빛 하늘 아래에서) - 3 +36 20.05.27 313 38 10쪽
20 Under the Violet sky(보랏빛 하늘 아래에서) - 2 +37 20.05.26 344 38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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