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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록 님의 서재입니다.

텔룸(Tel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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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록
작품등록일 :
2020.05.11 10:01
최근연재일 :
2020.06.30 10:45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6,391
추천수 :
1,625
글자수 :
221,209

작성
20.06.0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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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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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글자
8쪽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4

DUMMY

"신변과 관련된 일이라면...우리도 말릴 생각은 없네."


"어디를 가든 안전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안톤 부부에게 전황을 설명하자, 다행스럽게도 나의 결정을 이해하셨다.


"문제가 해결되는 대로..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돌아오겠습니다."


나를 받아 준 성의를 잊을 수는 없으니, 세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미소를 띄운다.


그러나 놈들의 경계가 잦아드는 때를 가늠할 방도는 없었다.


어쩌면 몇 년은 숨어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자리를 뜨기 위해 현관으로 향할 무렵, 사라가 방문을 열었다. 조소 작업을 하는 중이었던 모양인지 손에는 석고 가루가 묻어 있었다.


부드러운 가루가 묻은 손으로 꼬리를 잡고, 나만 들을 수 있도록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잘 말씀드렸어요. 그러니까 텔룸도 죽지는 말라고요?"


결국 무사히 돌아올 것을 다짐하고야 말았다.


집으로 올라와 필요한 생필품을 가방에 넣고, 장비와 옷가지를 챙긴 뒤 보일러를 껐다.


뭐, 그래도 필요할 때마다 돌아오게 될 것이다.


딱히 걱정할 일은...없겠지.


짐을 챙겨서 현관으로 나오자 난간 너머로 손을 흔드는 친구가 보였다.


그렇게 트렁크에 짐을 싣고, 차를 몰고 또 몰고...


익숙한 병원으로 들어가 친구의 안내를 받으며 짐을 풀었다.


자주 쓰던 병실이 아닌, 남향에 자리잡은 깨끗한 다락방이었다.


내가 사용하던 컴퓨터와 TV를 옮겨 둘 자리도 충분했고, 침대도 소어와 함께 누울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으음, 아주 좋아. 이제 아침마다 냉동식품 안 먹어도 되겠네."


"너만 좋다면야.."


입원비나 월세 같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유지니아는 나에게 아침 식사를 만들 것-내 몫에서 한 접시 챙기는 거지만-을 부탁했다.


아침은 원래 스스로 만들어 먹는 게 흔한 일이라 특별한 문제점은 없었다.


"뭐, 나는 일단 내려가서 업무 좀 볼 테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 해. 참, 그리고 여기에는 목욕탕이 없어서..."


병원 내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들은 뒤, 편의를 해결할 수 있는 주변 시설이 적힌 약도를 받았다.


짐 정리와 전자제품 설치를 마치자 시간은 어느덧 두 시에 접어들었다.


나와 소어가 어묵을 먹으며 늦은 점심을 해결하던 도중, 아랫층에서 어떤 남자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뭐야..?"


캔 음료를 마시며, 우리들은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흥! 기껏 아득바득 가르쳐 놓았더니, 이런 구질구질한 폐허에 틀어박혀서 거지새끼나 짐승 떼거리들이랑 병원놀이나 하고 앉았구만! 위대한 기술을 이딴 곳에서 낭비하다니, 네년은 카파 최악의 수치다!"


"우리 지긋지긋한 문어대가리가 7년만에 행차하셨네. 그리고 가르치긴 뭘 가르쳐. 청강권도 안 줘서 몰래 들은 걸로 지랄하려고 온 거면 당장 꺼지라고. 그딴 졸업장 따위는 트럭으로 퍼 줘도 싫으니까."


상황은 점점 살벌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돕는 게 좋을까?


"소어, 얌전히 기다릴 수 있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곧바로 계단을 달려내려갔다.


점심시간이 끝나자 모여든 환자 몇 명을 앞에 두고, 처음 보는 남자는 유지니아에게 삿대질을 하며 훌러덩 벗겨진 머리에 핏대를 바락바락 세웠다. 어찌나 심하게 흥분했을까, 남자의 금테 안경은 귀에서 흘러내려 간신히 걸려 있었다.


그녀도 유독 심기가 거슬렸는지 환자를 상대하면서도 중간중간 머리를 돌려 욕설을 퍼부었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두 명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차 버리기 전에...아, 신경 쓸 것 없어. 별 볼 일 없는 노인네니까. 잠깐 접수 좀 봐 줄래?"


"원하는 대로. 자, 접수 받겠습니다. 불편한 곳이라도..."


이상한 남자는 그녀에게 맡긴 뒤, 부러진 팔을 부여잡고 신음하는 사냥꾼에게 말을 걸려던 찰나였다.


그 놈의 시선이 내 뒤통수를 향했다.


"퉷, 이제는 진짜 발정난 생선까지 들였군! 아하, 짐승새끼들 좆물 처먹은 돈으로 굴리는 병원이냐? 더럽고 추잡스런 년, 카파에 어울리지 않는 잡것 같으니라고!" 남자는 깨끗한 바닥에 찐득한 가래침을 탁 뱉으며 추잡스러운 폭언을 던졌다.


순간, 실랑이로 달아오르던 공기가 차갑게 식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발정난 짐승, 수간...하도 많이 들어서 진절머리가 나는 단어들이다.


물론 나에게도 발정기 비슷한 게 오긴 하지만, 여름철에 잠깐 지나가는 특이한 경험일 뿐이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서 다른 여자와 몸을 섞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내 눈 앞에서는 생명의 은인이 꼴사납게 희롱당하고 있다. 수인과 어울리는 인간 역시 모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눌러두었던 증오가 타오르며 속을 끓였고, 나는 어느 새 들고 있던 캔을 납작하게 찌그러트리고 있었다.


눈 앞의 환자로 온 사냥꾼도 기분이 심히 언짢았던 모양인가, 그의 멀쩡한 손 역시 주머니를 향했다.


"..처리해야 하지 않겠나?" 사냥꾼이 나에게 속삭였다.


"아직." 나는 작은 목소리로 화답한 뒤, 놀아날 바닥을 잘못 찾아온 멍청이 쪽으로 성큼 다가갔다.


진의 시선이 나를 향했고, 그녀는 눈치챈 듯 공간을 내 주었다.


"왜...왜 이래!"


내뱉을 수 있는 욕이라는 욕은 전부 쏟아 낸 뒤에도 주눅들지 않는 수인을 처음 봤다는 듯, 그는 주춤하며 입구 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애들은 데려왔냐?" 내가 물었다.


"뭐라?"


"하, 설마 했는데 진짜로 혼자 왔나 보네." 유지니아가 깔보듯 비웃었다.


그렇다. 이곳은 인적이 드문 슬럼이다. 보통 돈 좀 만질 줄 알고 눈치가 좋은 사람이라면 경호원 없이는 털끝도 들이지 않는 장소라는 것이다.


게다가 자경단이 세운 규칙에 의해 의료 시설 일대는 중립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즉, 눈 앞의 이 양반이 발 붙일 여지는 없다는 것이다. 홈그라운드에서 싸움을 걸다니, 허구언날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느라 눈치 하나는 더럽게 없는 모양이다.


"늙은이, 이렇게 대책 없이 들어오면..."


나는 삼 미터나 되는 몸을 남자가 기댄 벽 쪽으로 천천히 드리웠다.


"어...어어..뭐야..뭔데!"


그 놈의 동공이 진동했다.


반쯤 벗겨진 두피에 개기름이 볼썽사납게 흐르기 시작했다.


그가 나의 머리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올리는 순간,


"카아악!"


눈을 뒤집어 흰자위를 내보이고, 입을 크게 벌린 채로 그 얼굴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으하아악! 하아..하아아.."


늙은이는 볼썽사납게 주저앉아 발랑 까진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당신만 손해야."


말만 그렇게 했지, 죽이지는 않는다.


적당히 겁을 주면 되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다.


"하아...씨...아무튼, 네년도 컨퍼런스에 오지 않으면 이딴 매음굴 따위는 아주 개박살을 내 주겠어!"


다시 유지니아를 향해 몇 번 삿대질을 한 뒤, 남자는 비틀거리며 떠났다.


그녀의 손에는 깨끗한 종이 봉투가 들려져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니까."


그녀는 봉투를 휘두르며 몇 번 부채질을 한 뒤, 안을 열어 내용을 훑어 읽고는 접수대 너머로 가볍게 던져 버렸다.


"저 놈은 뭐야?" 내가 물었다.


"나중에. 일단은 환자들 좀 보자."


어느새 네 명으로 늘어난 환자들이 의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좋아. 내가 거드는 편이 좋겠지?"


나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러면.."


환자를 여러 명 돌본 뒤 잠깐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고, 나는 남아 있는 세탁물을 처리한 뒤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를 들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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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Quarantine(격리) - 3 +22 20.06.24 258 19 11쪽
43 Quarantine(격리) - 2 +22 20.06.22 264 18 8쪽
42 Quarantine(격리) - 1 +24 20.06.19 288 22 10쪽
41 Side Chapter - Cripple Them(놈들을 불구로 만들라) +18 20.06.18 326 18 14쪽
40 Bloody Mary(블러디 메리) - 4 +25 20.06.17 279 22 10쪽
39 Bloody Mary(블러디 메리) - 3 +18 20.06.16 297 21 9쪽
38 Bloody Mary(블러디 메리) - 2 +26 20.06.15 277 27 8쪽
37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4, Bloody Mary(블러디 메리) - 1 +25 20.06.14 288 25 7쪽
36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3 +26 20.06.13 303 27 9쪽
35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2 +34 20.06.12 300 29 8쪽
34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1 +28 20.06.11 289 28 11쪽
33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3 +38 20.06.10 304 31 12쪽
32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2 +28 20.06.09 313 27 7쪽
31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1 +34 20.06.08 316 31 10쪽
30 Side Chapter - Golden Rule(황금률) +31 20.06.06 360 33 9쪽
29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5 +29 20.06.05 277 34 9쪽
»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4 +41 20.06.04 278 35 8쪽
27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3 +34 20.06.03 291 34 11쪽
26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2 +32 20.06.02 265 34 8쪽
25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1 +30 20.06.01 310 36 9쪽
24 Under the Violet sky(보랏빛 하늘 아래에서) - 6 + Malice(악의) +35 20.05.30 301 37 14쪽
23 Under the Violet sky(보랏빛 하늘 아래에서) - 5 +44 20.05.29 317 42 8쪽
22 Under the Violet sky(보랏빛 하늘 아래에서) - 4 +44 20.05.28 314 39 10쪽
21 Under the Violet sky(보랏빛 하늘 아래에서) - 3 +36 20.05.27 313 38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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