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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록 님의 서재입니다.

텔룸(Tel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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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록
작품등록일 :
2020.05.11 10:01
최근연재일 :
2020.06.30 10:45
연재수 :
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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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96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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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21,209

작성
20.06.0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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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5

DUMMY

그녀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아...그래. 아까 그 놈은 노드: 카파 주립 의대에서 외과 교수를 맡는 놈이야. 몇 년간 얼굴 본 적도 없었는데, 오늘 갑자기 불쑥 나타나서는 이걸...어라, 깔고 앉아 버렸네."


진은 슬쩍 일어나 의자 바닥에 깔린 납작한 봉투를 주워들었다.


"어디...이번 달 28일에 '성 소피아 기념관'에서 열리는 컨퍼런스라. 이번에는 또 뭘 한다고 부르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교수치고는 입에 걸레 꽤나 물었네. 그리고 몰래 듣는다는 건 또 뭔 얘기야, 대학생활은 잘 모르겠지만 그런 일도 있나?" 나는 의구심에 가득 차 입을 열었다.


질문을 받은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어쩌겠어. 그 과에서 내가 뛰쳐나갔는데."


뛰쳐나가다니, 기껏 의대를 가 놓고 무슨 이유로?


그녀가 말하는 이야기들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노드: 카파에 위치한 의대라니, 의사 중에서도 상당히 고학력자라는 이야기다.


그것을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아, 눈알 떨리는 소리 다 들린다. 더 듣고 싶잖아?"


예상 외로 순순히 이야기 주머니를 풀었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간단한 거랑 자세한 것, 두 가지 중 골라 봐."


"간단한 걸로." 근무 중인 사람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


"그럼 시작하자고. 십 분 안에 끝나니까 똑똑히 들어 둬. 어디 보자, 그게 어디에 있더라.."

그녀가 서랍장에서 곰팡내 나는 종이 뭉터기를 집어들었다.



「의료직에 입문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약한다.



-나는 신인류의 안녕에 봉사하는 데 일생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


-나는 마땅히 나의 스승에게 무한한 존경과 감사, 그리고 복종과 애정을 바친다.


-나는 양심과 위엄, 그리고 이해관계를 가지고 의료직을 수행한다.


-나는 환자의 건강과 금전적 형편을 고려하여 치유를 행할 것이다.


-나는 알게 된 환자의 비밀을 환자가 사망한 이후에라도 동업자 외에게는 누설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능력이 허락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의료직의 드높은 명예와 위엄 있는 전통을 지킨다. 동업자는 나의 영원한 형제이자 자매다.


-나는 환자를 위해 내 의무를 다하는 데 있어 나이, 질병 / 장애, 교리, 인종, 성별, 국적, 정당, 종족, 성적 성향, 사회적 지위 등에 따른 당위적 대우를 시행한다.


-나는 위협을 받더라도 신인류의 생명을 그 기원으로부터 최우선으로 존중하며, 신인류를 위한 완전무결의 법칙에 반하여 나의 의학지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이 모든 약속을 나의 명예를 걸고 온전한 자유의지로서 서약한다.



-갈레노스 선언, [의료] 편」



"들어가자마자 이딴 물건을 읽게 시키더라니까, 그래서 당장 뛰쳐나와 버렸어. 저딴 사이비 종교 같은 물건에 어울려 주기 싫었거든. 그런 바람에 수업은 여기저기에 카메라를 깔아서 녹화본으로 들었어."


내가 선언서를 듣고 있던 중 그녀는 진절머리가 났는지 그것을 꾹꾹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대머리 노친네는 홍두석이라고, 아까 봤듯이 지위에 안 맞게 교양 없는 놈이야. 언제부터인가 원래 있던 유능한 분을 갑자기 밀어내더니 제가 교수 행세를 시작한 거야. 이유야 뭐겠어? 다 사과상자 때문이지. 암튼 8년 전까지만 해도 머리카락이 멀쩡해서 미중년 소리를 들었는데, 나에게는 외모고 실력이고 그냥 별로였단 말이야. 근데 내가 과에서 나가버린 뒤로 볼 때마다 치근거리길래 한 대 때린 뒤로 쭉 저 꼴로 돌아다니더라고. 그리고 요즘에는 이런저런 행사를 다니면서... 저렇게 얼굴을 팔고 있다니까. 저딴 건 의사가 아니라 그냥 방문판매원이야."


진이 청산유수처럼 열변을 토했다. 역시 싫어하는 사람 욕하는 일이 가장 즐겁다는 말은 백 번 옳다.


나는 잠시 뒷통수를 긁적거린 뒤 호응했다.


"굳이 너에게 강요하는 이유가 있을까?"


"하!" 그녀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가 꼬시지 못한 몇 안 되는 여학생들이라 그렇지. 이렇게 협박하면 내가 고양이처럼 아양이라도 떨면서 빌빌 기어다닐 거라고 생각했나 봐. 이제는 웃기지도 않는다니까."


변태 교수라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류들이다.


"그래도 대단하네." 내가 말했다.


"뭐가?"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으며 옆으로 손을 뻗었다.


"힘들게 들어간 외과를 서약서 하나 때문에 포기하다니, 나라면 못 할 일이라고."


"그렇다고 대학을 포기한 건 아니고, 학과를 옮겼거든. 나는 내키는 일만 하면서 사니까. 그리고-"


어느새 그 손에는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액체가 든 바이알이 들려 있었다.


"이 일은 최고니까."


약인가? 아니면 새로운 연구 자료?


"..그건 뭐야?" 내가 물었다.


"내가 이 일을 최고로 치는 가장 큰 이유야."


그러더니, 그녀는 짙은 보랏빛 물질이 담긴 시약병을 보였다.


마소, 그것도 고농도로 축적된 마소였다.


마소로 뭘 할 거냐고 내가 묻기도 전에, 그것은 정교한 기계 속으로 사라졌다.


"똑똑히 봐 둬. 앞으로도 자주 쓰게 될 물건이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요한 기계음이 몇 번 들렸고, 곧 보랏빛 마소는 황색, 녹색, 회색의 유동체로 분리되어 바이알에 담겼다.


"으음, 딱 원하는 대로 나왔네."


"저건..."


세 가지 색상의 유동체는 주변의 자극 없이도 조금씩 떨리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하, 나는 그것과 매우 비슷한 현상을 떠올렸다.


마법, 조형 마법을 쓸 때와 비슷하게 은은하면서도 격정적으로 진동하는 빛이었다.


"외부 기술자들에게 의뢰해서 만든 거야. 마소를 포집한 뒤 투입하면, 본래 속성을 띤 마나로 전환하거나 아예 소각시킬 수 있다는 것 같아.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의학적으로도 꽤나 쓸모 있다구."


그녀의 입가에 웃음기가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의대에서 나간 이유도 이것 때문이야?"


바이알을 몇 번 흔든 뒤, 그녀는 내 물음에 답했다.


"가장 큰 이유들 중 하나지. 요즘에는 명문대에서도 성형외과처럼 돈 되는 분야만 밀어주거든. 수부, 신경, 흉부, 난치병 연구...뭐 이렇게 진짜 필요한 분야는 뒷전이라는 거야."


정녕 학회라는 것도 돈 맛을 알아버린 것일까, 생각해 보니 학생들도 큰 대학 나와서 궂은 일로 먹고살 생각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아에게는 아예 관심도 없고. 사람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기대할 수 없어."


그녀의 시선이 텅 비어 버린 시약병을 향했다.


"저 교수 일이나 내 목적이나 의대의 추세와는 꽤나 어긋나는 바람에...그냥 옮겨 버린 거야. 서적이나 강의도 참고하긴 했는데, 요즘에는 밖으로 나와야 멀쩡한 걸 얻을 수 있더라고."


십 분 정도 걸렸을 이야기는 어느 새 우리들을 깊이 끌어들였고, 시간은 그 너머로 흘러가고 있었다.


"한때는 혼자 움직이기 좀 뭐하다 보니까 용병들이랑 몰려 다니며 연구한 날도 있었어. 어쩌다 수인 용병들을 치료해 주면서 친해지기도 했고, 생존술도 어느 정도 배웠지.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병원도 냈고...어쩌다 보니 용병들만 모이는 장소가 되어버렸지만, 싫지는 않아."


어느덧 긴 이야기가 끝을 보였다. 몇 년간 알고 지낸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대화한 적은 거의 없었다.


"..신념 한번 대단하네."


"그래서 나는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지금이 좋아. 이렇게 실용적인 것이 진짜 의학이지."


유지니아의 의학적 신념이 무엇인지 감은 잡았다.


'멀쩡하게' 배운 의사들에게는 지금 모습이 같잖게 보이더라도, 이것이 그녀가 선택한 길이다.


틀에 박힌 교육에서 벗어나는 것이 스스로에게 내린 진단일 것이다.


그녀는 유달리 독특한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스스로 의대에서 나간 것도, 인간이 수인에게 의학을 베푸는 것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렇다면, 컨퍼런스는 어떻게..."


이렇게 특별한 사고를 갖고 있다면, 늙은이가 강요한 컨퍼런스는 가지 않-


"갈 거야. 그 문어대가리도 발상지까지 기어왔으면 신고식을 치뤄야지."


..을 이유가 없겠지. 그녀는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사람이니까.


"정말이지..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열심히 해 봐, 의사양반."


"그런 의미에서, 조금 도와주는 건 어때? 가서 냄새만 맡으면 바로 느낌 올 텐데."


잠깐, 나도?


정말 무슨 계획을 꾸미는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일단 계획을 들은 이상 나도 방관자로만 있을 수는 없다.


"어떻게 할래? 내 계획. 절대로 후회 안 할 거야."


솔직히, 나를 발정 난 짐승으로 매도한 이가 된통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무엇부터 시작하면 돼?"


이번에는 계획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적어도 마피아의 심기를 거스를 일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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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2 +34 20.06.12 300 29 8쪽
34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1 +28 20.06.11 289 28 11쪽
33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3 +38 20.06.10 304 31 12쪽
32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2 +28 20.06.09 313 27 7쪽
31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1 +34 20.06.08 316 3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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