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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룸(Tel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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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록
작품등록일 :
2020.05.11 10:01
최근연재일 :
2020.06.30 10:45
연재수 :
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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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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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21,209

작성
20.06.1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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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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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1

DUMMY

///


Chapter 8. Preacher of fools


///


상실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는 원칙은 간단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지 않는 것이다.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결국 어떠한 방식으로든 떠나가게 된다.


속사정을 나눌 사람이 없어서 외롭지 않느냐, 그렇게 사회성이 부족하냐.


원하는 대로 지껄여 보라지.


모든 이들은 서로에게서 멀어져 홀로 나아간다. 메신저 계정을 가득 채운 구독자들도 당신의 장례식에는 그림자 한 올 드리우지 않으리라.


살아가는 나날들도 혼자, 죽는 순간에도 혼자다.


그렇게 생각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방관자의 입장에 설 수 있기를 그토록 열망했다.


누군가가 죽어도 눈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태연히 등을 돌리고 걸어갈 비정함을 갈구했다.


하나 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차라리 쓰레기들과 함께 분쇄기에 던져졌다면.


생일을 맞기 전 그 경찰에게 죽었다면.


해안으로 향하는 의뢰를 수행하지 않았다면.


버섯의 비료가 되었더라면.


친구의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계획의 전날 밤, 잠드는 듯 숨을 거두었다면.


감정도 버리고, 미련도 머나먼 바다 저편으로 보내고,


조용히 심연으로 가라앉을 수...


아니, 이제는 누구를, 무엇을 원망하더라도 부질없는 짓이다.


나를 위한 심연 아래의 낙원 따위는 없다.


나는 실패했다.


실패했다.


실패했다.


실패했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



뉴 메갈로폴리스 건국 이후 185년, 서리의 달 28일.


「금일 오전 11시, 발상지 전역에 진눈깨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뉴스는 머지않아 찾아오게 될 악천후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준비는 끝났다.


USB도 챙겼고, 만약에 대비하여 장비들도 손을 봐 두었다.


"이거면 되겠지?" 내가 물었다.


"충분해. 현장 조사도 어제 끝냈고."


이제 성 소피아 기념관으로 향해, 컨퍼런스가 열리는 곳으로 숨어들기만 하면 된다.


"본 기기...본 기기도 데려가 주십시오! 기념관! 기념관!"


오늘도 저 고철 덩어리는 광기 어린 개소리만 지저귀고 있다.


"안 돼. 멋대로 떠들다가 우리까지 들키면 큰일이라고."


나는 간단히 묵살했다. 인원은 적을수록 좋았다-그런데 저런 것도 인원으로 치는 게 맞을까?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은, 바로 소어였다. 바쁜 일이 생겼는지 안톤 씨에게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르셀로에게 맡기기에는 조금 불안할 따름이라 난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사실 마르셀로의 전화기도 묵묵부답이었다. 개인적인 일이 생겼나 짐작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선택지는 없었다. 일단 그를 기념관에 데려가기로 했다.


"그래도 좋은 경험은 되겠지. 안 그래?"


소어를 차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채웠다.


"별 문제는 없을 거야. 그 영감이 놀라서 걸려 넘어지지만 않는다면."


장애물이라, 환경을 생각한다며 온갖 자재들을 뜯어고친 기념관에 그런 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걱정을 접어두며 시동을 걸었다.


지루한 일상을 조롱하듯 라디오에서는 블루스가 흘러나왔지만, 나름대로 즐거운 날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성 소피아 기념관에 도착하니 오전 일곱 시가 되었다.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터라, 창 밖은 아직 검푸른 비단 망토를 펼친 듯 어스름이 도사리고 있었다.


"곧 문어대가리가 올 시간이야. 서둘러야겠어."

우리는 차에서 내려 기념관의 전경을 가볍게 둘러 보았다. 이렇게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들은 앞다투어 주차 자리를 두고 언쟁을 벌였다.


기념관은 디스폴리더스 방주를 올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차가운 돌기둥들이 완고한 직선을 그리는 본관의 아름다운 자태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예술에 둔감한 나라고 해도, 그것이 크고 웅장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철근에 콘크리트를 가득 부어 만드는 현대적인 흐름을 비웃듯, 기념관은 400년 전에나 볼 법한 양식을 채용했다. 콘크리트를 덕지덕지 발라 만드는 모조품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외벽과 기둥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분명 품질이 우수한 대리암이었다.


상아색 바탕에 연한 갈색과 회색의 줄무늬가 질서와 혼돈을 넘나들며 달리고 있었고, 지붕 아래로는 녹색의 전등이 은은한 반딧불 무리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후문 쪽으로 향하려던 찰나, 전화기가 울렸다. 안톤 씨였다.


"아, 미안하네. 외출 준비 때문에 바빠서 확인을 못 한 모양이야. 무슨 일인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전화로 물을 필요도 없이,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저씨, 오른쪽에 제 모습 보입니까?"


멀리서 안톤 씨가 손을 흔들었다.



"이야, 여기서 만날 줄이야."


그 분과 악수를 나눈 뒤, 나는 조수석에 앉은 사라를 발견했다.


"세상에, 무슨 일로 왔나요?"


그녀는 화들짝 놀라더니 밝게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조금 사적인 일이 있어서. 어째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그러게요. 병원밥은 먹을 만 해요?" 그녀가 쿡쿡 웃으며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밥 맛은 언제나 최고니까, 싸게 해 줄 테니 예방접종이라도 맞으러 와. 사실 얘를 주방장으로 고용할까 생각 중이라니까."


유지니아가 가볍게 끼어들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사라와 함께 전시회를 보기로 약속했다네. 로라는 출장인 모양이라, 대신 온 걸세."

안톤 씨가 대답했다.


로라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쉽지만, 나름대로 봄 맞이 여행을 즐기려는 모양이다.


"그런데 아쉬운 건..." 사라가 말했다.


가벼운 초조함이 그녀의 눈가에 스쳐 지나갔다.


"하필 오늘 봉사활동이 잡혀 있어서, 오전 동안은 어린이용 도서관 신세에요."


나는 그 한 마디로부터 기회를 잡았다.


"어린이용 도서관이라...소어를 잠깐 맡아 줄 사람이 필요한데 말이야."


우리의 계획은 꽤 발칙하게 흘러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소어가 그것을 보면 어떠나 걱정이기도 했다.


"혼자 일하는 건 심심하니까, 제가 맡아 줄게요."


설득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오래는 안 걸릴 테니까 조금만 부탁해. 소어, 말 잘 들을 수 있지?"


옆에 선 소어가 고개를 기쁜 듯 끄덕였다.



"일이 잘 돌아가는데?"


복도를 수놓은 기묘한 곡선, 인위적으로 정돈된 담쟁이와 같은 철제 난간들이 시야 너머로 빠르게 사라졌고, 적막한 실내의 후텁지근한 공기가 코 끝을 스쳤다.


거대한 공기청정기를 향하고 있는 북쪽의 천장에는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장식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런 풍경을 뒤로 한 채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입구를 넘어 강당으로 달렸다.


"우연이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3층에 위치한 난간에 사다리를 던져 타고 올라, 강당 복층 좌석으로 이동했다.


특이하게도, 팔걸이에는 와인 잔과 작은 테이블이 비치되어 있었고 좌석마다 은은한 꽃 향기가 풍겼다.


"킁...이거 제라늄 맞지?"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벨벳 의자를 손으로 가볍게 쓸었다.


"내가 듣기로는, 이 자리에는 VIP들이 앉게 될 거래."


"참 좋은 구경들 하시겠네."


아직 강의가 시작되기 전이었기에, 우리는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가방에 넣어 둔 고출력 프로젝터가 검은 자태를 드러냈다. 이런 걸 준비할 여력이 된다니, 역시 돈이란 건 일단 벌고 봐야 하는 것이다.


유지니아가 스피커를 숨기는 동안, 나는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프로젝터를 설치해 두었다.


"잠깐, 그렇다면 계획이란 게..."


"그래. 놈의 발표를 완전히 죽 쑤게 만들 거야. 준비하는 동안 하나 보여줄까?"


그녀가 곧 작은 노트북을 꺼내 연결한 뒤 그것을 커튼 뒤로 숨겼다.


나는 전달받은 영상을 재생했는데...오, 이런.


상상 이상으로 역겨운 장면에 입을 슬쩍 가렸다.



시간은 흐르고, 강당 하층에 나타난 홍두석은 무대에 올라 자신의 개똥철학을 쏟아 낼 생각에 몸 둘 바를 모르는 듯 했다.


어디서 가지고 온 건지는 몰라도, 웬 시뻘건 음료를 벌컥 들이키고는 누가 보기에도 괜히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로 리허설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네. 항상 이런 겉치레에만 열정적이야."


우리는 입구의 구석진 곳에 숨어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곧 머리 위로 헬리콥터 여러 대가 착륙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젠장할, 요즘은 집 앞까지 헬기로 날아다니는 게 유행인가."


"발상지 귀족들도 유행이라면 사족도 못 쓰잖아."


멀리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와 발소리가 들렸고, 온갖 지독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슬슬 사람들이 모이는 것 같아."


우리의 예상대로, 부티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2층 좌석에 모여 앉았다.


베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수행원들이 귀빈들의 유리잔을 고급 와인으로 채웠다.


사람들의 웃음 소리, 허황되고 진부한 이야기들이 붉은 와인 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무르익어 갔다.


"뭔가가 이상해."


유지니아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뭐가?" 내가 물었다.


"초대장에는 분명 의학 컨퍼런스라고 적혀 있었는데, 손님들을 보면...어째 연관성이 없잖아. 잘 봐, 지금 들어가는 사람은 슬럼에서 유명한 포주에다가, 저 멀리 있는 사람은 지난 주 퀴즈 대회 우승자고..."


TV를 즐겨 보는 그녀는 손가락으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신분을 알아맞혔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큰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그냥 돈 많은 사람들 모이는 거 아닐까?'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고등학생 서너 명이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정정했다.


"..글쎄다."


어쩌면 그 고등학생들도 돈 좀 있는 학교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귀빈들이 초대 받은 목적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지막으로 어떤 모자가 실랑이를 벌이며 달려 오고 있었다.


"아아앗! 안 늦었다!"


굽 낮은 구두가 바닥을 긁으며 날카로운 끼익 소리를 울렸다. 그러자 먼저 온 귀빈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두 사람에게 꽂혔다.


"엄마, 나 이거 꼭 봐야 돼? 나도 놀이방 보내 줘!"


그런 시선 따위 상관 안 한다는 듯, 원치 않는 모임에 불려 나온 아이는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이것만 듣고 나가면 돼. 무려 추첨으로 뽑혔다고! 어쩌면 정말 노드: 파이 여행 티켓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니? 자, 조금만 참자!"


여자 쪽이 입은 새하얀 블라우스에 달린 브로치가 정신 없이 흔들렸다.


그 사람은 다른 귀빈들과는 달리 살집 있는 외모에 아이까지 데리고 오며 이질적인 분위기를 흘렸다.


일단 모자까지 입장하고 난 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특이하구만. 우리가 아는 컨퍼런스가 아닌 건 확실해."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대답했다.


"어쩌겠어. 그냥 지켜보다가 일 끝내고 나가자."


어느 새 사람들은 밀물처럼 몰려들었고, 그 넓은 강당 안에 수인이란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전 9시, 스피커는 컨퍼런스를 가장한 홍두석 단독 발표회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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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2 +28 20.06.09 313 27 7쪽
31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1 +34 20.06.08 316 3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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