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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록 님의 서재입니다.

텔룸(Tel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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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록
작품등록일 :
2020.05.11 10:01
최근연재일 :
2020.06.30 10:45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6,393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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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21,209

작성
20.06.0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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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8쪽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2

DUMMY

살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혈액의 근원을 파악할 수만 있다면, 장막 뒤에 숨겨진 실마리가 드러나리라.


"갑자기 일이 생겨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영문을 모른 채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세 분께 인사드리고, 곧바로 나의 거처로 올라와 외출 준비를 했다.


필요한 물건들을 잡낭에 담고 장비를 챙겨 입은 뒤 현관문을 열 무렵이었다.


작은 손이 내 다리를 지그시 잡아당겼다. 소어였다.


별안간 아이에게 이런 위험한 여정을 보여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의 답이라면? 물론 긍정이었다. 이미 디스폴리더스에서 볼장 다 본 그에게 더 이상 숨길 것은 없었다.


"영차."


소어를 꼬리로 슬쩍 감아올려 어깨에 앉히자, 비로소 나갈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가득 쌓인 눈을 마저 치우는 안톤 씨와 마주쳤다.


"외출인가? 소어라면 맡아줄 수 있는데."


언제나 친절한 어투로 권유하는 그 얼굴, 결코 잊을 수 없는 초상들 중 하나였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오늘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정중하게 거절하자.


"아이와 함께 하는 외출인가...봄 오는 대로 우리 집도 한 번 나가 봐야겠군. 다녀오게!"


가볍게 미소하며, 그는 눈삽을 들고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길로 운전석에 앉아 열쇠를 꽂으며-


세상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구만. 깨진 전조등을 떠올리며 들어줄 이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제설차량으로 그것을 부순 인부에게 배상을 기대할 여지도 없었다.


전조등은 나중에 고치고, 친구들부터 볼 생각에 주점으로 모이자는 연락을 넣었다.


"그 쪽의 안전벨트는 꼭 차야 해."


뒤쪽 좌석에 앉은 소어는 벨트를 잠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렇게 하는 거야."


벨트에 달린 금속 고리를 잡고 홈에 끼우는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 주자 그는 그것을 다시 풀더니 알맞게 끼웠다.


"좋아, 준비는 끝났다."


가속 페달을 밟자 묵직한 차량이 나아간다. 서서히 가속도가 붙자 천장에 가득 쌓인 눈은 풀썩 무너지고, 이윽고 와이퍼가 움직이며 시야를 가리는 싸락눈을 밀친다. 전날 밤 감아 둔 체인이 효과를 발휘하는 모양인지 밤새 쏟아지는 폭설을 버틴 녀석치고는 퍽 순조로운 승차감이다.


주점으로 향하는 길. 하얗게 나부끼던 눈은 도시의 진부한 잿빛 경관에 섞여 유리창에 달라붙는 듯 흘러내린다.


밟히고 밟혀 검은 먼지로 만신창이가 된 얼음 덩어리들을 다시 타이어로 내리밟고, 그렇게 살얼음판 같은 커브를 몇 번 돌다 보니 십 분 정도가 걸려 주점 입구에 도착했다.


정오에 가까워지는 아침이지만 하늘은 구름에 가려져 마치 우유를 탄 듯 희끄무레하다.


"..소어, 어깨에 올라와."


몽롱하고 어스름한 한낮. 골목길로 들어가는 이들이 정처 없는 연기가 되어 하늘로 흩어지는 시간이다.


어깨에 올라앉은 소어를 데리고 작은 문을 열자 익숙한 공기가 나를 맞이했다. 아주 밝지는 않아도 아늑한 분위기를 내는 전등, 그리고 다양한 크기의 의자와 식탁들이 눈에 들어왔다.

길다란 테이블 너머로 커피를 내리던 주인장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사방의 빛이란 빛은 남김없이 반사하는 듯 보름달처럼 밝게 빛나는 머리, 그것을 돋보이게 하는 거대한 체구와 밝은 피부. 그는 예약실을 향해 묵묵히 검지와 중지를 뻗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마가리타 한 잔. 소금도 많이 발라서 줘."


메뉴를 주문하고 가볍게 목례한 뒤 낡은 문을 열자, 방 한구석에서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손목이라도 꺾였냐? 진짜로 꺾기 전에 빨랑 뒤집어 까...어, 왔나 보네."


한창 포커를 즐기다가 관절 모양새로 트집을 잡기 시작한 유지니아, 그리고...


"에이, 까긴 뭘 깠다고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내가 좆으로 밤송이를 까도 여긴 절대로 안 깐다고."


진짜로 까 놓고 -밤송이 이야기는 물론이다- 시치미를 떼는 마르셀로였다.


"운전은 내가 할 테니까 오늘은 원하는 대로 마시자. 그나저나 오늘도 모임이네. 일감이라도 주려고?"


평소라면 사족을 못 쓸 위스키는 어디로 갔는가, 그녀는 그레나딘 시럽을 섞은 탄산수 한 잔을 휘젓고 있었다.


진홍색으로 물든 음료 때문일까, 컵 안에서는 구형 얼음이 석류석과 같은 자태를 한껏 뽐내며 휘돌았다.


"귀여운 까마귀 친구도 왔잖아?"


품에 안은 소어를 내려놓기 위해 몸을 굽히자, 그는 옆에 세워져 있던 작은 의자를 내 쪽으로 밀어 주었다.


새하얀 털이 돋은 손이 뻗은 곳에는 반쯤 마신 마타도르가 오렌지색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 이야기 들으면서 마셔."


사과 주스 한 잔을 주문하고 소어의 부리에 빨대를 물렸다. 달콤해 보이는 연두색 주스가 빨대를 타고 아이의 목 너머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할 이야기가 뭐야?"


그가 가니쉬로 올라간 체리의 꼭지를 가볍게 따며 물었다.



"맞아. 진짜배기 혈서야."


돋보기로 글자를 살피던 유지니아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검 관리용 기름, 그것도 아주 고급품의 냄새가 섞였네. 아마도 장식용 카타나 같은 물건에 당한 거야."


말라붙은 글귀에 주둥이를 대고 킁킁거리던 마르셀로 역시 설명을 덧붙였다.


폭력적인 여경, 버려진 까마귀 수인, 상상도 못한 버섯, 천체 마법을 날리는 위험수...그리고 오늘은 혈서다.


정말이지, 요즘 들어서 이상한 일이라는 일은 나에게 모조리 들러붙는 것 같다.


"하, 진짜..원래 꼬인 인생이 더 꼬이게 생겼네."


피로감이 섞인 어투로 한 마디를 던지며 양 손으로 두 눈을 덮었다.


"에이, 그래도 우리가 도와주면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있겠지 뭐."


그는 나를 격려하는 와중에도 종이 속에 숨겨진 냄새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이렇게 노력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잠깐 봉투를 살펴보는 게 좋을까."


봉투를 장식하는 부착물들을 토대로 머리를 굴려 무엇이든 떠올려 볼 의향이었다.


내 예상대로, 뜯어진 봉투의 날개 부분에 들러붙은 인장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예사의 붉은 왁스와는 달리, 그것은 탁한 황색을 띠고 있었다.


허나 이미 꺼내는 과정에서 조금 찢어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인장이라..이걸 수복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은데."

"아, 수복이라면 나한테 맡겨 봐."


그녀가 해부용 바늘을 꺼내 인장을 조금씩 다듬기 시작했다.


"자. 우선 이렇게, 유추할 수 있는 부분부터 모으는 것이 중요해..."


두꺼운 선, 자잘한 선, 그리고 알파벳. 눈에 파묻히고 찢어졌던 그것들이 섬세한 손길 아래 서서히 재생되기 시작했다.


십 분, 이십 분...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고, 인장을 다듬는 두 손에도 속도가 붙었다.


마침내 삼십 분이 지났을 때, 작업은 끝났다.


"좋아...일단 최대한 복원했는데 말이야. 뭔가 떠오르는 거라도 있으려나?"


그녀는 라이터로 바늘 끝을 지진 뒤 그것을 거즈로 가볍게 닦아내고, 파우치로 안전하게 감싸 두었다.


"어디 좀 보자.."


탁한 황색. 흔히 사용하는 붉은색을 제치고 이것을 사용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납작한 인장의 표면을 가로지르는 테두리는 월계수의 광륜, 귀금속에 필적하는 사치품인 과거의 식물이다. 황금빛 월계수는 중심부의 장총과 깃털 문양을 향해 가지를 흐드러지게 뻗었다.



「M.F.B.」



마누엘 가족사업.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는 문장 한 줄. 답은 나왔다. 아침에 온 편지는 그들이 보내는 무언의 경고 같은 것이었다.


수인 하나를 상대로 혈서까지 쓰다니, 아마 올백머리 꼬마의 입김이 확실하게 들어간 모양이었다.


어찌되었든, 이 이상 다가가는 것은 위험하다. 한때는 떠나야 하는 상황이 올 때를 위한 대비책을 세워 두기도 했다만, 지금은 소어가 함께 있기에 멀리 떠날 수 없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기꺼이 받아들여 비를 피할 지붕을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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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Bloody Mary(블러디 메리) - 3 +18 20.06.16 297 21 9쪽
38 Bloody Mary(블러디 메리) - 2 +26 20.06.15 277 27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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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3 +26 20.06.13 303 27 9쪽
35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2 +34 20.06.12 300 29 8쪽
34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1 +28 20.06.11 289 28 11쪽
33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3 +38 20.06.10 304 31 12쪽
32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2 +28 20.06.09 313 27 7쪽
31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1 +34 20.06.08 316 31 10쪽
30 Side Chapter - Golden Rule(황금률) +31 20.06.06 360 33 9쪽
29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5 +29 20.06.05 277 3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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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3 +34 20.06.03 291 34 11쪽
»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2 +32 20.06.02 266 34 8쪽
25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1 +30 20.06.01 310 36 9쪽
24 Under the Violet sky(보랏빛 하늘 아래에서) - 6 + Malice(악의) +35 20.05.30 301 3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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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Under the Violet sky(보랏빛 하늘 아래에서) - 4 +44 20.05.28 314 39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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