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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록 님의 서재입니다.

텔룸(Tel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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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록
작품등록일 :
2020.05.11 10:01
최근연재일 :
2020.06.30 10:45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6,425
추천수 :
1,625
글자수 :
221,209

작성
20.06.26 10:35
조회
288
추천
17
글자
21쪽

Finale. Downburst(하향격풍) - 1

DUMMY

///


Finale. Downburst


///


"....젠장할. 그래서, 자네 친구와 그 어린것이 저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지?"


나는 우울하게 구름 낀 표정으로 묵묵히 수긍했다.


"...안 돼. 이대로는 위험해. 저 놈들은 자네를 찾기 전까지는 몇 날 며칠이고 물러서지 않을 거야."


그제서야, 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물러나게 될 겁니다."


"뭐...?" 그는 동요했다.


"...간발의 차로, 제가 탈출하는 모습을 놈들에게 들킨 것 같습니다. 그러니 특별한 일이 없다면 놈들은 저를 찾기 위해 잔뜩 몰려 나오겠지요... 물론 시민들은 안전해지게 될 거고."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계획이란 말인가?"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나는 이야기를 재차 이어나갔다.


"경계령이 풀릴 때까지, 즉시 발상지를 떠나서 알파 근교에 체류할 생각입니다. 연료와 보존식도 충분하니, 야외에서 머물기에도 별 문제 없을 겁니다. 다만, 그 전에..."


아저씨가 내 생각을 예상했다는 듯, 우리의 대답은 같았다.


"...소어를 구할 것."


"...소어를 구할 것입니다."


내 대답에 만족한 모양이었을까, 그는 공황 속에서도 조용히 웃었다.


"아주 좋아. 이래야 내가 집으로 들인 보람이 있지."


사라를 위한 응급처치를 지켜보던 로즈 아주머니가 약간이나마 안도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정말...정말로 다행이야.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생님들 말로는 골절만 제외하면 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아. 납탄은 병원으로 가서 제거해야 해."


반쯤 열린 구급차는 이미 사람 여러 명이 들어찬 듯 신음소리가 뒤엉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 되겠네, 일단 보내는 게 좋겠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먼저 병원으로 가시죠. 두 명은 제가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 때였다.


"로즈!"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내 딸을 부탁해."


아주머니 쪽이 말없이 수긍하고 운전석에 올라탄 뒤, 구급차는 빠른 속도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사라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병원으로 갈 것이다. 내가 감히 병문안을 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빠르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일단 그렇게 구급차는 떠났고, 주차장에는 아저씨와 나 두 사람이 남겨졌다.


멀리 보이는 정문에서는 상황이 안정되어 가는 듯 경찰 몇 명이 밖을 향해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렇다면...내가 먼저 들어가서, 사람들의 훈방조치를 요청하는 게 좋을 텐가?"


안톤 씨가 권유했다.


오호라.


조금 전의 영상통화에서, '이성적이고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는 경찰이 그나마 누그러진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나타난 뒤로 시민에게 함부로 총격을 가하는 일은 없었다....아직까지는.


때마침 상황도 얼추 진정된 모양이니 나는 그 권유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예...아마 조금만 더 기다렸....'


하지만, 그 안일한 예상은 순식간에 울려 퍼진 총성을 기점으로 산산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



한편, 유지니아와 소어가 위치한 로비의 대치 상황은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시민과 경찰 양 측의 충돌을 막겠다고 나선 두 사람들은 의외로 효과적이었는데, 상황을 담당하는 지휘관과 면식이라도 있는 듯 즐거운 꾀꼬리마냥 떠드는 것이었다.


"후후, 두 분 모두 오랜만입니다. 지난 주 미식회 이후로 처음 인사드리는군요!" 지휘관의 가식적인 미소가 찢어져 두 귀에 걸렸다.


"저야말로 진심을 다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어서 바퀴벌레들을 남김없이 퇴치할 수 있길 바랍니다! 하하!" 부유한 남자는 계단 위로 손가락을 뻗으며 익살스럽게 받아쳤다.


잦아든 상황 덕분에 경찰 인력들은 '검사 키트'라고 불리는 것들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있었다.


부티나게 입은 사람들에게는 미소와 함께 두 손으로 건네는 한편, 부상을 입은 채로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의 주변에는 눈대중으로 계산한 수량을 대충 던져 두었다.


바리케이드 너머에 자식을 넘긴 어머니는 그것들을 신경 쓸 새 없이 벽에 등을 기대어, 드높은 천장을 텅 빈 눈으로 그저 올려다 볼 뿐이었다.


계속된 긴장으로 피로가 쌓인 것은 진 또한 예외는 아니었기에, 그녀는 벤치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소어가 들어 있는 가방을 올려 두었다.


'무슨 낮짝인지...'


그렇게 중얼거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발 주변에 일회용 검사 키트 하나가 툭 던져졌다.


"빨리 끝내고 나갑시다? 우리도 한가롭지는 않다고."


제압팀에 속한 경찰이었다.


진은 대답 한 마디 없이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집어들더니 부착된 라벨을 유심히 살폈다.


'여기서 독감 검사 키트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몸 좋고 감자칩 상표 따위 정도를 읽을 머리만 있으면 죄다 경찰로 받아주는 제도는 놀랍게도 아무 불평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나마 정석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강당으로 올라간 마당에, 로비에 남아 있는 이들은 부족한 인력을 충당하기 위해 끼워넣은 용역들이었다.


불평이 없는 건지, 너무 흔해서 묻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발상지 경찰이란 후원 기업들의 용역업체 직원들에게 사격술만 가르치면 완성되는 것이다.


실적에 눈이 멀어 사전 조사도 없이 달려드는 오합지졸에 질린 나머지 그녀는 재차 한숨을 내뱉었다.


어차피 음성으로 나올 결과, 어서 끝내고 나가는 게 옳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그것의 밀봉을 뜯을 때였다.


순간, 모두가 관심을 끄고 있던 엘리베이터가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곧 강당과 로비를 연결하는 엘리베이터가 긴급 운행 모드로 전환한 채 굉음을 울리며 내려앉았다.


내부에서 난동이라도 부리는 듯 철문을 쾅쾅 두들기는 소리가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이윽고, 철문은 충격에 못 이긴 듯 너덜거리며 천천히 내용물들을 내보였다.


벤치에 앉아 있던 그녀의 시선도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삐걱거리며 벌어진 문 너머로부터 시작된 불길한 기운이 로비 전역을 스멀스멀 감싸기 시작했다.


내부의 전등은 이미 파손되어 찰나의 순간마다 점멸하는 것으로 그 상태를 증명하고 있었고, 그 순간의 대부분은 붉게 칠해진 벽을 비추는 데 쓰였다.


하지만 그들이 벽에 집중하기 전 바라본 것은 전투복 차림의 비틀거리는 제압팀 한 명이었다.


-만세! 이제 돌아갈 수 있겠어!


영 눈썰미 없는 사람 한 명이 소리쳤다.


누군가는 그를 경멸의 눈초리로 쏘아보는 사이, 어떤 이들은 미약한 기대감이 차오른 눈빛으로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기대와는 달리, 전투복을 입은 남자는 벨트에 엉성하게 매달린 소총을 바로잡거나 지휘관에게 무전을 남길 생각도 않고 그저 영혼 없는 시체처럼 밖을 향해 느릿느릿 걸었다.

그의 다른 부위에는 한 치의 미동도 없었고, 그저 두 다리만이 자신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착각하는 양 움직이고 있었다.


-뭐...뭐야, 저 사람! 왜 저렇게....


은빛으로 화려하게 빛나던 흉갑은 피칠갑이 되어 제 멋을 잃었고, 소총의 강선은 위험수의 아가리에 뜯긴 듯 흉하게 이지러진 쇳덩이로 변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가린 헬멧 아래로는 시뻘건 핏줄기가 불길하게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지휘관이 잠시 대화를 멈춘 뒤 다가가려는 찰나, 그는 곧 균형을 잃고는 맥 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마침내 간신히 걸려 있던 헬멧이 충격으로 벗겨졌고, 그 뒤에 숨어있던 처참한 몰골을 본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충격의 도가니에 빠지고 말았다.


남자의 얼굴에는 아랫턱이 없었다.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뽑힌 모양인지 뺨이 있었던 자리에는 심각한 열상이 자리잡았다.


목에서 빠져나온 피투성이 혀 한 줄기는 이제야 쉴 곳을 찾았다는 듯 차가운 타일 바닥을 편안히 핥았다.


"신이시여..."


지휘관은 그의 유해를 살핀 뒤, 빠르게 무전기를 꺼내 강당의 인력과 교신을 시도했다.


"에이브! 랜달! ...잭! 무슨 일인가!"


돌아온 것은 심각한 노이즈가 낀 전언이었다.


"보...드립니다! 현...괴수....활하여 엘리...터를..."


하지만 얼마 안 가 노이즈는 이상하리만치 격렬해지더니, 결국 무전은 강제로 종료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점차 동요하는 기류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 괴물 아직도 있는 거 아냐? 우리 다 어떡해!


-죽을 거야. 우리 다 죽어버릴 거야. 가만히 있다간 전부 죽을 거라고!


몇몇 사람들은 이미 피할 수 없는 위협을 감지하고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옆에 있는 경찰 하나를 붙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모두 안전한 거 맞죠? 제발 그렇다고 해 줘요!


난데없이 붙들린 경찰의 얼굴은 권태감과 짜증을 숨길 생각이 없었고, 귀찮으니 썩 꺼지라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턱을 까딱거렸다.


지휘관은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시신을 두고 부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성의 없는 태도를 보인 경찰에게는 시민 두명이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5분이라는 짧은 시간이 무의미한 난리통 속에서 소모될 무렵, 엘리베이터에서 큰 파열음이 재차 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깜짝 놀라 죽을 둥 살 둥 비명을 질렀고, 무장경찰들은 다시 소총을 장전하며 불길하다는 듯 볼멘소리를 냈다.


"모두들 진정, 진정들 좀 하세요! 우리 경찰 여러분을 못 믿는 겁니까?! 잘 해결해주겠다고 몇 번을 말해야 이해하겠냐고!"


지휘관과 이야기꽃을 피우던 상류층 남자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전원 사격 준비!" 그 악에 받친 외침을 들은 지휘관은 기다렸다는 듯, 전 대원에게 엘리베이터를 향해 조준할 것을 명령했다.


그렇게 파열음은 점점 커졌고, 다시 한 번 기다려 왔던 순간-발포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는 공포를 느끼며 바깥의 바리케이드로 쭈뼛거리며 물러서는 동안, 어떤 멍청한 이들은 리얼리티 예능이라도 보는 듯 신이 나 응원을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끝장내 버려!


-위험수에게 죽음을!


끔찍하리만치 진부한 응원이 이어졌다. 승강기의 입구를 겨누는 검은 총구들의 행렬은 발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탕.


때 아닌 총성이 울렸다.


모두의 응원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잠잠해졌다.


입구의 철문이 강제로 벌려지는 와중에도 그 소리는 결코 파묻히지 않았다.


한창 열성적인 연설을 늘어놓던 남자는 옆에서 울리는 둔탁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는 이마에 구멍이 뚫린 익숙한 사람 하나가 죽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식회를 추억하며 담화에 한창 참여하던 그의 부인이 생기 없는 짚단처럼 바닥에 엎어져서는 차갑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그 곳의 모두가 새롭게 생겨난 주검으로 눈길을 돌렸다. 많은 이들은 멋진 사냥 다큐멘터리의 한 컷을 원했으나, 인간 표적이 피를 쏟는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자는 주저앉았다. 애절한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었을까? 어쩌면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극적으로 흐느낄 여유라고는 없는 듯 경악한 얼굴로 식어 가는 주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휘관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남자의 주변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일단 저희 대원들의 소행은 아닌 것 같..."


하지만 그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가까운 곳에서, 얄팍한 총성이 다시 한 번 공기를 찢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납덩이 한 조각이 그의 앞니 사이를 뚫고 연수를 가로질러 짓뭉개며, 반대쪽 두개골에 정확하게 틀어박혔다.


그는 지휘관의 인중을 겨눈 자동권총을 벌벌 떨리는 손으로 수납했다.


남자는 어느 새 경멸에 찬 얼굴과 함께 입술을 달싹거렸다.


"짭새 새끼...피 같은 세금이나 빌어먹는...짭새 새끼가!"


그렇게 다가가던 지휘관은 뜬 눈으로 철퍽 쓰러지며 핏빛 웅덩이를 머리맡에 질펀하게 쏟았다.


재차 고조되던 상황 속에서, 갑작스럽게 죽은 두 사람은 절정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지켜보는 모두의 눈이 공포와 경악으로 떨렸다. 경찰들의 든든한 총구가 그들의 이마를 향하는 최악의 사태를 직감한 듯 동공이 조여졌다.


안전한 도시 속에서는 감히 겪어 보지도 못한 광경과 마주한 탓일까, 사람들 사이에서 역병처럼 번지던 공황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야, 경감님 죽었는데 이제 우리 잘리는 거 아니냐? 인터폴에서 우리 자르려고 간 보고 있잖아."


"아니야...아니야..실적만 잘 올리면 될 거야...어서 저 놈만...!"


상황은 당연하게도 그들의 예상과 별반 다를 것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결국 흥분한 경찰 한 명이 남자를 향해 소총을 겨누는 순간, 그 또한 멀리서 들려 온 총소리와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저격수다!'


지휘관이 주검으로 변하기 전, 이미 상황을 파악한 유지니아는 재빨리 고개를 들어 높은 곳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높이 뜬 천장과 바닥 사이의 허공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굵은 기둥 위에서, 어떤 가냘픈 인간의 형상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형상이 총을 재차 장전하는 것을 확인한 뒤, 폭약이 내장된 볼트를 꺼내어 허리에 매달린 크로스보우에 끼웠다.


마음만 먹으면 상황에 개입하거나 언제든지 그것을 격추시킬 수 있었지만,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가는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 자리의 누구도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자 말할 수 없는 허탈감이 몰려왔다.


소어가 들어 있는 가방을 안아든 뒤, 그녀는 모두의 눈을 피해 기둥 뒤로 숨었다.


-지갑만 두꺼운 바나나 새끼! 니들 이럴 줄 알고 부른 거지? 아가리 똑바로 안 놀리면 뒤질 줄 알아!


-아니...아니, 도대체 왜 나한테 따져? 나는 그냥...


경찰과 시민 사이에서 시작된 대립은 어느 새 극도로 심화되었고, 마침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지경까지 오고 말았다.


선제 사격을 가한 측은 경찰도 시민도 아닌 어느 누군가였다. 그러나 쌓일 대로 쌓인 공포에 의해, 어느 누구도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내 아들부터 돌려 내!


벽에 기댄 여인이 신이라도 들린 듯 벌떡 일어나더니, 파우치에서 장전된 리볼버를 꺼냈다.


-아줌마, 진정 좀 해요! 이러다가 진짜 총 맞는다니까!


권총을 꺼내들지 않은 남자 하나가 다급하게 만류했다.


-당신도, 거기 당신도, 발상지 경찰들은 죄다 살인마야!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첫 한 발을 당긴 것은 그녀였다.


탕, 탕, 탕.


이어진 세 번의 사격은 비록 어느 누구도 적중시키지 못했으나, 경찰들이 품고 있던 증오를 고취시키기에는 충분한 행동이었다.


얼마 안 가 모든 경찰-복을 입은 용역-들의 주의가 그녀에게로 쏠렸고, 그들은 '법적 절차'에 따라 집중 사격을 행했다.


또 다른 목숨이 명을 다했다. 엘리베이터를 울리는 소음은 더욱 시끄러워진다. 시민들은 곧바로 떨리는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살인마다! 저것들 죄다 우리 죽이러 온 살인마 새끼들이야!


이윽고 시민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고, 결국 모두가 주저 없이 총을 뽑아들고 말았다. 소총과 권총이 잇따라 불을 뿜었고, 총성과 비명이 귀를 찢었다.


한편, 바리케이드 너머의 경찰들 역시 폭력적이고 이성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이것들 다 어떻게 처리해! 자꾸 발에 걸리잖아!


-병신 새끼 같으니! 그냥 다 죽여서 한구석에 처박으라고! 사장님이 다 해결해 주겠지!


곧이어 부상자들이 있는 곳에서도 불길한 총성이 하나 둘 들려오기 시작했다.


유지니아는 기둥 뒤에 숨어서 그 모든 광경을 보고 들으며, 혓바닥을 면도칼로 벗기듯 유린하는 긴장을 맛보고 있었다.


이것은 공포다. 아니, 공포를 넘어선 광기에 가깝다. 끔찍한 공황 속에 빨려들어간 사람들은 '편리한 죽음'을 마구잡이로 뿌리고 다녔다.


더 이상 그녀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이제 은신에서 벗어나는 것은 명을 재촉하기 위한 쉬운 방법일 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기둥 위의 형체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실루엣은 발 밑에서 벌어지는 광경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듯, 마네킹처럼 같은 장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 태연한 모습에 분노를 느낀 그녀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고, 어느 새 크로스보우의 조준경은 기둥을 겨누었다.


"내려와!"


폭약을 품은 볼트가 빠르게 날아들어 검은 실루엣의 주변을 스치는 순간, 큰 폭발이 일어났다.


기둥의 일부분과 함께 형상의 종아리 부분이 터져나갔고, 그것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짧은 순간, 유지니아는 그 생김새를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여자..?'


그렇다. 쉽게 지나쳤지만 분명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인상의 여자였다.


'아...!'


얼마 안 가, 강당을 급하게 빠져나가던 검은 머리의 고등학생과 닮았다는 것..아니,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박살난 종아리에서 흘러나온 붉은 액체가 이미 검붉게 물든 바닥에 후두둑 쏟아지고, 얼마 안 가 그 속에는 허벅지가 달린 상반신의 잔해가 자리잡았다.


그러던 중, 유지니아의 눈초리가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날카로워졌다.


분명 종아리가 날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성형을 띤 상반신은 뭔가 당황한 듯 두 팔을 휘적거렸다. 하지만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마치 전원이 꺼지는 듯 그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굳어 버리는 것이었다.


'저건 생명체가 아닌...'


안전한 상황이었다면 샘플을 챙기기 위해 다가갔을 그녀였으나, 눈 먼 총알들이 빗발치는 곳을 뚫을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주변을 살핀 뒤, 몇몇 사람들의 주의가 잔해를 향해 쏠린 틈을 타 구석진 곳에 놓인 수유실을 향해 달렸다.


어쩌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그저 사람들이 죽고 죽이다가 모두가 침묵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성공적으로 문 앞에 도착한 찰나,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어디선가 날아온 소총탄 한 발이 옆구리에 적중했다.


"..허..?!"


방탄복 덕에 중상은 피할 수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충격 탓에 일순간 균형을 잃었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손잡이를 당기고, 정강이로 소어가 든 가방을 밀어넣으며 딸려 들어가 문을 닫았다.


숨을 고를 틈조차 아깝다는 기세로 문을 걸어잠근 뒤에야, 그녀는 문에 등을 기대고 앉아 정신을 가다듬었다.


참극으로부터 고립되어 조용하기 짝이 없는 수유실의 공기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차가운 먼지 냄새로 두 사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역시 멀쩡한 사람이 없어.' 그녀는 신물난다는 듯 다시 한 번 짧은 상념에 빠졌다.


문 밖의 사람들은 만인의 처절한 투쟁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용병업, 도축업, 건설업...그들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동반되는 '누추한 뒷바라지'는 모두 도시 바깥으로 추방한 뒤, 모니터 너머로 그들을 단편적으로 감상하며 귀족층 지식인이라도 된 양 비난과 조롱을 뱉는다.


결국 '안전한 도시'라는 이름의 새장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바깥 세계의 폭력이란 한낱 코미디와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돌발상황이 벌어졌을 때, 박식한 학자 흉내를 내던 이들은 모두 가식을 버리고 추악한 본성을 드러낸다.


당장 어떤 일이든 자기 손으로 해 본 적 없는 주제에 직접 욕하고 밀어 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바라다니, 지독하고도 염치 없는 짓이다.


...그러던 순간, 그녀는 큰 가방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기척을 느꼈다.


'...!'


지퍼를 열기 위해 가방을 붙들자, 안에 들어간 소어가 격렬하게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이미 상황은 늦었다. 그는 총상의 고통을 알릴 수 없었고, 비명을 지르듯 벌어진 부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단단히 붙들고 놓지 않았던 봉제인형은 주인의 감정을 대변하듯 품에 눌려 찌그러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소어의 오른쪽 허벅지에 큰 혈전 덩어리가 종양처럼 굳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설마...재생 인자가?"


그녀가 알고 있는 재생 인자는-적어도 대학 연구실에서 개발되고 있던 것은-이런 부작용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상처를 덮은 청바지를 잘랐다.


"...조금만 참아. 곧 괜찮아 질 거야."


지혈대가 허벅지 주변을 감쌌다.


짧은 시간 안에 검붉은 베타딘 스프레이가 환부를 적셨고, 얇은 바늘의 주사기를 통해 마취제가 들어갔다.


어린 까마귀는 주사기를 찌르는 순간까지도 통증으로 몸을 떨었다. 두 눈은 눈물이 말라 버린 듯 그저 붉게 충혈된 흰자위를 드러내고 있었다.


유지니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등 뒤에 위치한 문을 바라보고는 마스크를 쓴 뒤 조심스럽게 장갑을 착용했다.


'아직...아직이야. 살아서 돌아갈 수 있어.'


그를 최대한 안심시키려는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 역시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술 도구가 담긴 파우치가 열렸고, 날카로운 가위가 상처에 매달린 육아조직을 절개하는 섬뜩한 소리가 고요를 갈랐다.



저 먼 곳으로부터 말을 걸어 오는 목소리가 점차 농염하게 짙어지며, 가위 소리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저항할 수 없는 무아경이 서서히 다가올 때, 소어는 결국 목소리에 순응하고 말았다.


작가의말

바나나(Banana). 사람들은 흔히 과일을 떠올리겠지만, 이는 ‘겉은 노란색이면서도 속은 흰색인’, 즉 백인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을 지칭하는 인종 차별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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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Quarantine(격리) - 2 +22 20.06.22 265 18 8쪽
42 Quarantine(격리) - 1 +24 20.06.19 289 22 10쪽
41 Side Chapter - Cripple Them(놈들을 불구로 만들라) +18 20.06.18 328 18 14쪽
40 Bloody Mary(블러디 메리) - 4 +25 20.06.17 279 22 10쪽
39 Bloody Mary(블러디 메리) - 3 +18 20.06.16 297 21 9쪽
38 Bloody Mary(블러디 메리) - 2 +26 20.06.15 277 27 8쪽
37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4, Bloody Mary(블러디 메리) - 1 +25 20.06.14 289 25 7쪽
36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3 +26 20.06.13 304 27 9쪽
35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2 +34 20.06.12 300 29 8쪽
34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1 +28 20.06.11 289 28 11쪽
33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3 +38 20.06.10 304 31 12쪽
32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2 +28 20.06.09 313 27 7쪽
31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1 +34 20.06.08 316 31 10쪽
30 Side Chapter - Golden Rule(황금률) +31 20.06.06 360 33 9쪽
29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5 +29 20.06.05 279 34 9쪽
28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4 +41 20.06.04 280 35 8쪽
27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3 +34 20.06.03 292 34 11쪽
26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2 +32 20.06.02 267 34 8쪽
25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1 +30 20.06.01 310 36 9쪽
24 Under the Violet sky(보랏빛 하늘 아래에서) - 6 + Malice(악의) +35 20.05.30 303 37 14쪽
23 Under the Violet sky(보랏빛 하늘 아래에서) - 5 +44 20.05.29 318 42 8쪽
22 Under the Violet sky(보랏빛 하늘 아래에서) - 4 +44 20.05.28 315 39 10쪽
21 Under the Violet sky(보랏빛 하늘 아래에서) - 3 +36 20.05.27 316 38 10쪽
20 Under the Violet sky(보랏빛 하늘 아래에서) - 2 +37 20.05.26 347 38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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