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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록 님의 서재입니다.

텔룸(Tel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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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록
작품등록일 :
2020.05.11 10:01
최근연재일 :
2020.06.30 10:45
연재수 :
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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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07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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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21,209

작성
20.06.03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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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3

DUMMY

8년 전, 숨어 지내던 골목길이 재개발 바람으로 뒤집힐 무렵, 나도 머무르던 차에서 쫓겨나 떠돌던 무렵이었다.


몇 없던 생필품이고 옷이고 전부 날아가 버린 마당에, 나는 도시를 적시는 회색 빗줄기 사이사이를 방황하고 있었다.


비 내리는 역사 벤치에 앉아 쪽잠에 들었다, 깨었다, 그리고 다시 잠드는 것을 반복할 때, 나에게 우산을 걸쳐 두고 떠난 소녀가 있었다.


'사라' 라는 이름이 적힌 우산의 주인, 나는 그 사람을 찾기 위해 밥도 거르면서 몇 시간을 내달렸다.


손잡이에 묻은 희미한 잔향 한 줌을 쫓으니, 마침내 그것이 배어든 손잡이의 현관문과 마주하게 되었다.


비에 젖은 우산을 꾹 움켜쥐고, 문 앞을 서성이며 그것을 두드리기 위해 몇 번이나 고민했던가.


마침내 문을 두드렸을 때, 그 잔향, 그 달콤한 정취를 흩날리는 주인이 그의 아비의 손을 잡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움켜 쥔 손을 펼치고, 우산을 놓으면서..


"제발 얼굴만 때리지 마."


문 앞에 선 나는 초라한 수인이었고, 눈 앞의 남자는 꽤나 부유해 보였다.


그때까지의 부유한 인간들은 모두들 내 얼굴을 앞에 두고 욕지거리를 내뱉곤 했다. 그 또한 아니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알 수 없는 두 명의 표정을 눈 앞에 두고는, 수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느꼈을 두려움을 느끼며 속으로 몇 번이고 떨고 또 떨었다.


우산을 돌려 주었으니, 일은 끝났다.


그렇게 내가 자리를 피하려 뒷걸음질치는 순간, 건조하고 부드러운 섬유 조각-수건-이 내 가슴에 닿았다.


동시에 온기를 품은 투박한 손이 차가운 비늘을 미세하게 쓸어내리며 내가 누구인지 시험하고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며 잔뜩 긴장된 심장의 맥동이 점차 잦아드는 것을, 분명 그 손은 빠짐없이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들어와."


그 말에 무심코 집 안에 발을 들이자, 우산의 주인은 욕실 문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아, 잔향은 그 손가락에 감긴 반창고로부터 풍기고 있었다.


"일단 씻어라. 옷도 좀 갈아입고."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남자는 나를 욕실에 넣은 뒤 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건들 때문에, 나는 어리둥절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틈으로 흘러들어오는 그 잔향이 신경쓰였지만, 우선은 주위의 것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하얀 욕조와 샤워기, 우선은 그것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샤워.


오랜만에 떠올리게 되는 단어였다. 그 무렵에 제대로 씻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조심스럽게 수도꼭지를 열자 뜨끈한 온수가 곧바로 터져나왔다.


세상에,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되다니. 고아원이나 길바닥에서는 꿈도 못 꾸었을 샤워기, 그

것도 온수가 나오는 것을 혼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윽..."


깨끗한 물과 향긋한 비누 냄새가 흐르는 욕실은 나에게서 풍기던 짐승의 체취를 더욱 힐난하는 것 같았다.


허락을 받았으니, 쓸 수 있겠다. 나는 어깨 끈 하나가 끊어져 버린 민소매 셔츠, 그리고 목욕탕에서 훔쳐낸 질긴 군복 바지를 조심스럽게 벗었다.


이 곳의 옷은 빌리는 것이다. 나갈 때는 다시 입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휴."


빗물과 땀이 섞여 흐르는 천 조각을 보니 탄식이 절로 흘렀다. 그러기에 눈 앞의 샤워기는 씻을 것을 더욱 종용하고 있었다.


몸을 씻기에 앞서 벗어둔 옷가지들을 온수에 적시고 비누를 묻힌 뒤 여러 차례 문질렀다.


골목에서 얻은 하수의 악취와 타들어가는 고무의 그을음은 이윽고 넓은 배수구 너머로 흘러가 버렸다.


그 다음으로는? 당연히 온수를 한가득 뒤집어썼다. 얼마 없는 목욕의 기회를 놓칠 수 있으랴, 지느러미와 아가미 깊은 곳까지 정성을 들여 씻었다.


쏟아지는 물, 그 뜨겁고도 깨끗한 것이 빗줄기에 차갑게 식은 비늘 틈새로 가차없이 파고들며 나를 함락시켰다.


오염된 비늘을 부드럽게 휘감던 물줄기. 물에는 냄새가 없다고들 하지만, 그 정결함은 어느 꽃과도 비교할 수 없이 향기로웠다. 그렇게 목욕을 마친 뒤 욕실의 문을 열자, 큰 목욕용 가운이 손잡이에 걸쳐진 것을 느꼈다.


젖은 몸에 가운을 걸치고 거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니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남자-집주인으로 보이는 이-가 앉으라고 손짓했다.


"집은 있나?"


나의 깨끗해진 모습에 만족한 것일까, 그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없어."


조금 풀어졌지만 여전히 긴장 섞인 목소리로, 나는 화답했다.


"가족은?"


이번에는 조금 진지해진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없어."


멀쩡한 인간관계가 거의 없었던 시절, 나의 대답은 항상 경계로 충만한 상태였다.


대답을 들은 그는 말없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것은 계약서였다.


일정 기간 동안 403호에 무료로 머무르며, 의식주를 제공해준다는 계약.


왜, 어째서? 나에게 그런 호의를 베푸는 눈 앞의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토록 홀로 서기 위해 수많은 피를 뒤집어썼는데, 어째서 나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인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이 사람들에게 조금은 기대도 좋겠다는 생각이, 이제 따스한 벽난로 앞에서 몸을 녹일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어느 순간, 나는 계약서에 피 고인 엄지손가락을 누르고 있었다.



내가 다시 직업을 구할 때까지, 그들은 가족의 일원이라도 되는 듯 알게 모르게 나를 보살폈다.


아침이 되면 달걀을 묻혀 구운 토스트와 치즈를 문 앞에 두었고, 밤이 되면 깨끗한 담요를 보냈다.


처음으로 느낀 온정. 그들이 나를 받아들인 순간부터, 그 보금자리는 내가 지켜야 할 장소들 중 하나가 되었다.


나에게 제대로 된 관습을 가르치고, 사회에 조금이나마 녹아들 수 있도록 도운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내가 그곳을 떠나지 않았을 때 찾아올 위협을 간과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점차 진퇴양난의 수렁으로 빠져든다.


그렇게 고뇌하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주문한 마가리타가 나왔다. 우아한 유리병에 담긴 신선한 연두색 음료, 가운데를 둥둥 떠 다니는 둥그런 얼음 한 덩어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테두리에 있었다. 가니쉬로 올라간 청록색 라임이며, 테두리를 따라 가득 묻은 소금은 자기를 핥아달라며 조르는 듯했다.


"좀 마시고 얘기해, 시간은 많으니까. 아저씨, 이번에는 크랜베리 시럽으로 한 잔 더 줘." 유지니아는 먼저 마시던 탄산수를 끝장내고 다음으로 넘어가려는 모양이다.


슬슬 한잔 걸칠 때가 온 것 같다.


테두리에 걸린 라임을 살짝 빼낸 다음 한 조각을 혀에 올렸다.


톡 쏘는 향과 강렬한 신 맛이 입 안을 자극하자 군침이 가득 돌았다.


그렇다면, 다음은 소금이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혀를 스르륵 뻗어 테두리에 발라진 소금을 핥는다. 새콤한 라임 즙에 이어지는 짭짤한 소금, 가장 좋아하는 풍미 중 하나이다.


"으음.."


그리고 음료를 한 모금 빨아들이자 비로소 마가리타를 마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차갑게 식은 선인장 술과 오렌지 증류주, 그리고 라임과 소금...


향긋한 술이 목구멍을 적시자 이야기를 꺼낼 준비를 마쳤다.


"..그거라면 일단 안톤 씨 가족과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 좋겠어. 문제는 그 피의 주인인데.."


뒷내용이 궁금하긴 했지만, 괜히 위험 속으로 뛰어들 생각은 없다.


상대는 마피아다. 자칫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크라켄 밥이 되리라.


"정말로 계속 조사할 거야? 연합경찰 수사부 쪽에 지인이 있긴 한데. 연락해 봐?"


썩어도 준치라는 것일까, 역시 불법이라도 의사라는 신분은 믿음직하다. 맡겨만 두라는 듯 당당하게 다리를 꼬는 그녀를 보니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한 발 물러서야 한다. 더 깊이 들어가서 신변에 이득이 될 일은 없었다.


"괜찮아. 일단은 잠자코 있는 게 좋겠어."


"역시 그게 좋겠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나는 예전에 이야기했던 심장에 붙은 폭탄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가 도와줄 수 있다고는 하는데...걔가 좀 멀리 있어." 유지니아가 슬쩍 머뭇거렸다.


"얼마나?"


"노드: 감마."


세상에나. 그렇게 먼 길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을 게 분명하다.


"육로로 12일, 배 타면 일주일은 걸릴걸? 요즘 비행기도 못 뜨고 있잖아."


마르셀로가 주황색 술을 홀짝거리더니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카르카 대양 상공으로의 항공기 운행이 중단된 것은 석 달 전의 일이었다.


200명 가량의 승객을 태운 팔콘급 여객기가 거대한 번개구름 속으로 종적을 감춘 사건.


몇 일에 걸쳐 뇌우를 관찰하던 조종사가 경비행기를 훔쳐 구름 속으로 날아들다 낙뢰를 맞고 바다 한가운데에 흩뿌려진 사건.


석 달 전, 상공에 나타난 칠흑의 구름은 지구의 하늘을 정처 없이 달리고 있다.


조류 계통의 위험수들은 구름이 나타난 지역에 얼씬도 하지 않으며, 세이렌의 고혹적인 선율조차 쥐 죽은 듯 멎을 정도이니 그 악명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토록 비상한 두뇌를 가졌다는 뉴 메갈로폴리스의 기상학자들도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는, 그런 존재이다.


어찌되었든, 그 이상한 구름 때문에 근방의 항공사들은 언제나 죽을상이다.


나야 물론 그 양반들이 죽든 말든 상관 없긴 하지만, 그래도 비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상당히 거슬리는 제약이다.


"좋아. 일이 잠잠해질 때 까지 감마에 다녀오도록 할까."


"나도 따라갈게!"


마르셀로가 외쳤다.


"벌써 네 명 모였네. 오랜만에 가는 여행이 되겠어."


발상지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지루했던 것일까, 여행을 생각하는 우리들은 미묘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옆에서 주스를 마시던 소어는 무엇을 느꼈을까, 꼬리깃을 짧게 파닥거렸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지금은 너무 춥잖아."


발상지에는 부동항이 없다-아니, 유빙이 주기적으로 해류를 타고 몰려온다. 적어도 3월 중순까지는 기다려야 유빙이 녹고, 여객선도 운행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 동안은 어떻게 버텨야 하나? 산 속에 텐트라도 쳐야 하나?


그렇게 다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유지니아가 해답을 꺼냈다.


"당분간 병원에서 지내는 건 어때?"


오호라, 병원이라.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길 때마다 신세를 졌던 병원. 그 곳의 병실은 너무나도 익숙하다. 게다가 그런 외딴 곳이라면 신원을 숨기기도 안성맞춤일 것이다.


소어도 병원에 갈 일이 많기 때문에 가장 적합한 장소들 중 하나이리라.


"자리만 있다면, 당연히 머물고 싶다만."


"후후." 그녀는 이유 모를 웃음을 터뜨리고,


"당장 짐 싸. 언제나 열려있으니까."


곧바로 잘 곳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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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Bloody Mary(블러디 메리) - 3 +18 20.06.16 297 21 9쪽
38 Bloody Mary(블러디 메리) - 2 +26 20.06.15 277 27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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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3 +26 20.06.13 304 27 9쪽
35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2 +34 20.06.12 300 29 8쪽
34 Preacher of fools(우민들의 연설가) - 1 +28 20.06.11 289 28 11쪽
33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3 +38 20.06.10 304 31 12쪽
32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2 +28 20.06.09 313 27 7쪽
31 Guide in Madness(광기에 빠진 길잡이) - 1 +34 20.06.08 316 3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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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Lost in White(백색의 방황) - 2 +32 20.06.02 266 34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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