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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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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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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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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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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Life Goes On.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시나리오가 완성된 날부터 류지호가 바쁘게 움직였다.


“방학 때 찍으면 안 돼?”

“이걸 2주 만에 찍겠다고?”

“난 재미있을 거 같아.”

“하기 싫은 사람은 빠져.”


류지호가 중편내지는 장편으로 찍겠다고 하자, 친구들이 우려를 드러냈다.


“일부러 내 영화에 매달리지 마.”


친구들에게 영화를 찍는 행위는 소중한 경험이다.

다만 학업 역시 때가 있는 법.


“너희가 할 일을 해. 아쉬워하지도 마. 이번 영화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앞으로 많은 영화를 함께 찍을 테니까.”


더스틴이 못내 아쉬운 듯 입을 열었다.


“너도 마찬가지잖아.”

“난 3년간 이 재미있는 걸 못한다네, 친구.”


군대에 가야 하니까.

낸시가 류지호의 손을 잡고 결연하게 말했다.


“난 안 빠질 거야. 무조건 Jay와 함께 하겠어.”


류지호가 웃는 얼굴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고마워. 낸시~”


부모님이 수원병무청에 직접 가서 류지호의 카투사 합격을 확인했다.

영장은 빠르면 올 12월, 늦어도 내년 봄에 나올 예정이란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군대를 가야 하는 것이다.

그 전까지 원 없이 영화를 찍을 생각이다.

1,2학년 친구들이 이번 작업에서 빠졌다.

그 자리를 3~4학년 전공학생들이 채웠다.

비록 비전공 학생의 영화작업이라 실습수업으로 인정받을 순 없지만, 많은 전공생들이 류지호의 영화작업에 참여했다.

모두가 영화 찍는 걸 좋아하는 이들이다.

경험에 목말라있기도 했고.


“그런데, 제작비는 어떻게 할 거야?”

“파라맥스에 기획서와 스크립트를 보냈어. 곧 투자 여부를 알려줄 거야.”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내가 한국에서 찍은 <Help Me, Please>라는 단편영화가 있어. 클레르몽-페랑 필름마켓에서 아톰 필름에 TV·케이블 판권만 팔았던 모양이야. 이번에 찍을 중편과 묶어서 파라맥스에 비디오 판권을 팔아보려고.”


파라맥스 측에서는 워킹타이틀 <그림자>를 러닝타임 60분 이상으로 만들어오라는 조건을 붙였다.

그래야 비디오로 출시할 최소 러닝타임에 맞출 수 있다면서.

보통 러닝타임 60분부터 장편영화로 본다.

그런데 류지호는 이번 작품으로 장편 데뷔할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대안으로 생각을 해낸 것이 <Help Me, Please>를 파라맥스에 판권을 넘겨주면서 투자를 받아내는 방식이다.


❉ ❉ ❉


사우스웨스턴 애비뉴와 인접한 플로렌스 빈민가.


뚝딱뚝딱.


UCLA 영화과 학생들이 잡화상 진열대에 물건들을 세팅하고 있다.

휴업 중인 이 상점을 류지호가 단기임대했다.

이 상점 주변이 메인 촬영장소가 될 예정이다.

그 외에 주택 한 채와 철거가 예정된 아파트를 섭외했다.

한 달 간 그곳들을 돌며 촬영을 진행할 계획이다.

흑인형제가 아닌 이들이 이곳 흑인밀집 지역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따라서 지역의 흑인 지도자를 통해 갱단에게 양해를 전달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Pinkerton Corp. LA지사와 경호계약도 맺었다.


“수고들 해.”

“응. 캡틴!”


미술을 책임지고 있는 3~4학년 전공생들을 뒤로 하고 류지호가 상점을 빠져나왔다.

길가에는 C-스탠드와 텅스텐 라이트, HMI라이트가 일렬로 각이 잡혀 정렬되어 있었고. 조립되지 않은 크레인 장비들이 한쪽에 놓여있다.

발전차 한 대, 배우들이 분장하고 휴식을 취하게 될 캠핑카 두 대, 장비 차량이 도로가에 늘어서 있다.

촬영장 분위기만 봐서는 도저히 학생작품이 아니다.

도로 양 끝부분에는 경찰의 모습도 보였다.

경찰관 숫자보다 많은 사설경호원들이 촬영장 일대를 통제하고 있다.

이곳은 플로렌스에서도 대로변과 인접해 있어서 비교적 안전한 편이다.

그럼에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돈이 들더라도 경호원을 고용하는 것이 맞았다.


"저 놈은 영화만 찍었다 하면 평범하게 작업하는 법이 없어."

"낸시, 이번 영화에 얼마나 쓴데?"

"60만 달러."

"휘유."


참고로 태런티노의 <저수지의 개들> 순제작비가 120~150만 달러다.

그 절반 예산으로 중단편 영화를 찍을 예정이다.


"이 앞 도로는 언제까지 쓸 수 있대?"

"도로 전체는 주간·야간 포함 총 5일."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드는 거 아냐?"

"괜찮아. 이 영화에는 스타가 나오지 않으니까."


미국에서는 스튜디오 내 야외세트가 아닌 공공지역에서 촬영할 경우 시청과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한다.

또한 도로와 공공재 사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그런 후 관계당국의 허가를 받게 되면 경찰관이 촬영현장에 파견된다.

경찰관 외에 관계당국 직원도 촬영현장에 상주한다.

직원은 촬영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행정적인 부분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공공 시설물 훼손을 감시하기도 한다.

정확한 사용시간에 맞춰서 경찰이 도로 전체를 통제해 준다.

학생 경우에도 이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당연히 비용적인 부분에서 상업영화가 지불하는 가격보다 훨씬 저렴하다.

류지호가 주요 촬영지인 거리를 둘러봤다.

실제 이 거리에는 한국인, 히스패닉, 이탈리아인이 운영하는 가게들이 다수 존재했다.

촬영할 때 상호가 노출 되서는 안 되는 제약이 있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식료품점에서 낸시가 달려왔다.


“캡틴!”

“준비된 모양이네?”

“스탠바이.”

“출동!”


류지호가 낸시가 들어 올린 손바닥에 자신의 손바닥을 힘차게 부딪쳤다.


짝!


류지호가 식료품점에 도착하자, 로이 캠벨이 스테디캠 조끼에 암(arm)을 달고 대기 중이다.

한국인 부부로 출연할 한국계 남녀 배우가 대본을 보며 대사를 맞춰보고 있다.


"가게를 정리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좋은데 너무 난잡하지 않게 해주세요.“


특별히 배우들에게 디렉션을 줄 것도 없다.

프로 연기자들이라서 ‘척 하며 착’이다.

거의 모든 장면을 스테디캠으로 촬영할 예정이다.

류지호가 바라보는 빈민가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 멈춰선 것 같았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은 역동적이다.

이곳 빈민가 지역에 살고 있는 여러 인종 가운데 한국인들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역동적이다.

일단 부지런하다.

돈을 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반면에 흑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의욕이 없다.

흑인들은 기본적으로 흥이 많다.

그들끼리는 유쾌하다.

빈민가라고 해도 사람 사는 곳이다.

죽은 동네일 리가 없다.

범죄율이 높고 마약 중독자가 많다고 해서 의욕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망감.

마치 과거로 돌아오기 전 반지하방에서 류지호가 좀비처럼 살아갈 때처럼....

그렇게 지역 전체가 착 가라앉아 있다.


후우.


류지호는 최대한 감정이입하는 장면 연출을 하지 않을 예정이다.

스테디캠으로 끊임없이 다양한 군상들을 옮겨 다닐 것이다.

만약 똑같은 시퀀스를 핼드헬드로 촬영한다면 불안, 흥분 같은 감정이 실리게 될 것이다.

반면에 스테디캠은 안정적으로 물 흐르듯이 움직일 수 있다.

관객은 연출자가 의도하고 보여주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스테디캠이 움직이며 자연스럽게 함께 보이게 되는 흑인 빈민가의 다양한 모습을 풍부하게 함께 구경할 수가 있다.

또한 영화 <버드맨>에서 보여준 스테디캠 활용과 원 씬 원 커트(싱글 쇼트 기법)를 응용하기로 했다.

류지호의 중편영화와 <버드맨>이 다른 점은 명확한 주인공이 없다는 것이다.

삶은 분절되지 않고 연속적이다.

마치 스테디캠으로 촬영하는 원 씬 원 커트 롱테이크처럼.

단순한 롱테이크가 아니다.

원 씬 원 테이크!

한편을 통째로 커트 없이 하나의 연속적인 쇼트로 완성하는 싱글 쇼트 영화다.

그를 통해 사실성과 연속성을 함께 담아내고자 했다.

류지호는 한 화면에서 다양한 군상을 보여줄 예정이다.

시점이 이동할 때 끊지 않고 이어지며 보이는 현실에 대한 감상은 철저히 관객의 몫으로 남겨둘 생각이다.


“레디. 카메라. 액션!”


첫 촬영이 시작 됐다.

잡화점 카운터에서 흑인 아줌마와 한국인 부부가 실랑이를 벌인다.

흑인 아줌마가 악다구니를 쓴다.

그녀는 말을 속사포를 쏟아내면서도 욕설을 절묘하게 섞는다.

마치 랩을 선보이는 것 같다.


[한국, 중국 어디서 왔던 간에 여긴 너희 나라가 아냐!]


한국인 부부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손님의 물건을 봉지에 담고, 가격을 계산할 뿐.


[빌어먹을 한국인들! 불친절하고 돈만 아는 탐욕스러운 것들!]


한국인 부부는 마치 로봇 같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기계적으로 잔돈을 거슬러준다.

구매한 물건을 챙겨 가게를 떠나면서도 흑인 아줌마는 한국인 부부에게 저주와 욕설을 빼먹지 않는다.

한국인 남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린다.


[돈이 필요한 것은 지들도 마찬가지면서....]


아내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하루 빨리 돈을 벌어 이 동네를 떠나든지 해야지 원....]


“컷!”


아무리 원 씬 원 커트 촬영이라고 해도 끊어서 촬영할 수밖에 없다.

매거진에 담긴 필름 길이의 한계 때문이다.

영화의 순서대로 촬영하면 쉬울 법도 하건만, 류지호는 장소별로 모아서 찍었다.

류지호가 경험이 풍부하기에 가능한 것도 있지만, 프로덕션 기간 및 예산 문제로 인해 최대한 스케줄을 빡빡하게 가져가야 했다.

때문에 촬영을 끊은 후에 이어가야 할 부분을 정확하게 계산해야 했다.

콘티가 세밀하지 않으면 못한다.

그 어려운 것을 류지호는 가볍게 해내고 있다.


"액션!"


식료품점 한국인 부부가 저녁 재료를 사가는 할머니에게 푸념한다.


[할머니, 왜 검둥이에게 잘 대해주십니까? 그냥 돈 받고 물건을 파세요. 할머니 때문에 저희 부부만 표적이 되지 않습니까?]


아내 역시 할머니에게 하소연한다.


[할머니, 저 놈들은 예의라곤 도저히 찾아볼 수도 없고, 언제 총질을 해댈지 모를 정도로 난폭한 놈들이라고요.]


할머니는 부부와 달리 조근한 어조로 말한다.


[1977년 7월 13일이었을 거야. 가게를 닫으려 준비하는데 갑자기 전기가 나가더라고. 처음에는 우리 가게만 불이 나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시 전체가 불이 나갔어. 경찰차, 소방차, 응급차 온갖 사이렌이란 사이렌은 모두 울려댔더랬지.]


할머니가 이야기한 날은 뉴욕에서 일어난 최악의 정전사태 날이다.

대규모 정전으로 인한 피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당시 25시간 동안 퀸스 지역 일부를 제외한 뉴욕시 전역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집에 가기가 겁이 나서 가게에 남아있었던 것이 실수였어. 앞문 전면 유리를 통째로 부수고 흑인 청년 몇이 침입해 들어왔지. 눈앞에 손전등과 총을 들이대며 돈을 내놓으라 하는데, 정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시커먼 총구 밖에 없더라고. 그날 번 돈 모두 털어 줬지. 그런데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어. 동네 건달이란 건달은 죄다 우리 가게로 몰려들더니 술병을 훔쳐가기 시작하는 거야. 깜깜한 와중에도 도둑질하는 이들을 쉽게 알 수 있었어. 매일 가게를 이용하는 손님들이더라고. 행여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봐서 필사적으로 나와 큰애는 몸만 빠져 나왔지. 다음날 아침에 돌아와 본 가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지. 그리고 나와 큰애는 그 날 밤에 남편을 잃었어. 몇 년 동안 그 시커먼 총구멍이 꿈에 나타나 악몽에 시달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야. 그때 이후로 뉴욕이 무서워서 이곳 LA로 이사를 왔는데, 이곳도 별반 다르지 않았지. 헌데 말이야.... 나는 남편을 잃고 깨달은 것이 있어. 내가 먼저 저들에게 다가가지 않으면 절대 난 저 사람들의 이웃이 될 수 없다는 거야.]


“컷!”


류지호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할머니를 연기하는 한국계 배우의 연기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먼저 캐스팅했던 일본계 배우 대신 새롭게 합류한 배우다.

한막례란 이름의 미국 이민 1세대 배우다.

TV·영화보다는 주로 연극 무대에 오르는 배우다.

파라맥스 쪽에서 추천을 받은 배우로 인디영화에도 간간이 출연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식 메소드 연기를 할 줄 알고 조금 걱정했던 것도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류지호로서는 다행이다.

미국식 메소드 연기는 양날의 검이다.

잘못 쓰면 안하느니만 못하고,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니다.


“액션!”


아내가 남편을 채근한다.


[여보, 얼른 저 사람 끌어내요!]


흑인 남자가 행패를 부리고 있다.


[나 돈 냈어! 내가 이곳에 갖다 바친 돈이 얼마인데, 나한테 이래! 이제부터 이 가게 불매운동 할 거야!]


길길이 날뛰는 청년을 보며 아내가 카운터에서 권총을 꺼내 겨눈다.


[빨리. 가게에서 나가. 그렇지 않으면!]

[쏴 봐! 그럴 용기나 있고?]


강도, 날치기, 협박.

우범지대에서 영업하는 한국계 주인들은 후환이 두려워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

일부 흑인 불량배들은 이런 한국인들의 습성을 악용해 물건 값을 지불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벌어진다.

강력 범죄를 한번 겪어 본 이는 이 악몽을 다시는 잊지 못한다.

특히 총기가 난무하는 미국에서 강력범죄를 겪어 본 한국계들의 경우 평생 치를 떨게 마련이다.


[진정해!]


그때 점원으로 일하는 흑인이 나서서 행패를 부리는 청년을 데리고 가게 밖으로 나간다.

스테디캠의 시점이 점원으로 향한다.


[르윈! 내 형제!]

[네가 확인시켜주지 않아도 난 흑인이야.]


친구를 돌려보낸 점원이 식료품점으로 돌아온다.

한국인 사장이 점원을 다그친다.


[네 친구 맞지? 왜 말을 못해?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해 봐!]

[내 친구 맞아요.]

[앞으로 똑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여기서 더 이상 일 못해.]

[방금 전 일 때문에 그래요? 이 나라는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자유? 여기는 내 가게야. 여기서 자유 같은 건 없어. 왜? 내가 사장이니까.]

[......]

[자유롭고 싶으면 저기 포장해 놓은 물건 배달이나 하고 와. 얼른!]

[재수 없는 돈벌레.]


점원이 구시렁대며 배달할 물건을 챙긴다.


[뭐라고 그랬어?]

[당신들이 저주스러울 정도로 얄밉지만, 내게 월급을 주니까 참는 거야.]

[왜 너희들은 우리 한국인들을 미워하지?]

[......]

[왜 이 동네 주민에서 우리를 소외시키는 거냔 말이야?]

[당신들은 검둥이가 아니잖아요.]

[피부색은 다르지만 우리도 이 동네에서 2년을 살았어. 우리 한국인도 너희 이웃이라고.]

[글쎄요. 당신들이 진짜 우리의 이웃인 줄은 전혀 모르겠네요.]


스테디캠은 식료품 가게를 나서는 점원을 따라간다.

그의 뒤로 한국말 소리가 들린다.


[게으르고 무식한 검둥이 자식들.....]


점원은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만약 알아들었다면 뭔가 사단이 나도 날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다.

류지호는 어떤 인종의 편도 들고 싶지 않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들의 말과 행동은 분명히 오늘 이 시기의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생각이고 일상이다.

UCLA 사회학과 교수가 그랬다.

한국의 중산층은 한국의 소외계층을 전혀 이해하지도 이해하려하지도 않는다고.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군사정권, 온통 경제개발에만 매몰된 기간을 거치며 남들보다 오로지 자신과 가족을 지키려는 생존본능이 지나치게 발달했단다.

그리고 한국인 미국 이민 1세대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한국에서 지식인이나 중산층이었다.

미국 이민법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려면 고학력과 어느 정도의 재력이 필수였으니까.

한국사회에서 이미 중산층인 사람들이 미국 이민자 대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민 생활에 첫발을 내딛은 곳이 유색인종이 가득한 게토(ghetto), 우범 지역이다.

피부색깔과 문화가 다른 것에서 오는 인종문제도 문제지만, 한인들은 경제 계층의 차이에서 오는 극심한 정체성 이탈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즉 한인 이민자들은 한국에서도 거의 접촉이 없던 소외계층과 미국에서 날마다 씨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 계층적 차이가 한국계와 타 인종간의 갈등을 유발시키는 시작일 수도 있다.

미국 사회의 단편만 경험한 류지호로서는 그의 주장을 모두 인정할 수 없었다.

다만 두 인종 사이에 소통이 안 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무시하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시점 바꿀 거야!”


연출을 전공하는 3~4학년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복잡하게 끊어 찍는 과정과 콘티로 인해 머리가 어질어질했으니까.


“원테이크 영화를 찍겠다는 것도 황당한데 이렇게 찍어서 붙이면 이어질 수 있나?”

“Jay는 자신만만하던데?”

“괴짜라니까.”


점원을 따라가던 스테디캠의 시점이 또 다시 아파트에 살고 있는 흑인 여성으로 옮겨간다.

앳되어 보이는 그녀는 아이를 안고 있다가 점원을 맞이한다.

그녀와 점원은 부부다.

흑인 여자는 점원을 향해 돈을 벌어 와라, 게으름 피우지마라, 자신과 아들에게 애정이 있느냐 온갖 바가지를 긁어댄다.

점원은 식료품을 냉장고에 넣어준다.

마음 같아서는 여자를 번쩍 안아들고 침대로 돌진하고 싶은 것이 점원의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그녀가 넘어올 것 같지 않다.


[난 돈 없어. 음식재료 값은 네가 치러.]


흑인 여자는 점원에게 배 째라는 투다.

점원은 하는 수 없이 여자의 억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만약 한국인 사장이 뭐라고 한다면 자신은 일을 그만 둘 작정이다.

이 동네에서 자신처럼 말썽부리지 않고 일할 사람을 구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한국인 사장은 자신을 절대 해고하지 못할 터.

점원이 집을 떠나간 후로 전화벨이 울린다.

흑인 여자의 엄마다.

그녀는 엄마의 잔소리에 복장이 터진다.


[엄마나 그 개자식이나 다 지겨워 죽겠어.]


그녀는 잠든 아기를 품에 안으며 화를 토해낸다.


[네 애비라는 작자도 마찬가지야. 똑같아. 아빠 노릇도 못하는 놈팡이 같은 병신이야. 술집이나 전전하는 놈팡이 부랑자.]


탕탕탕!


창문 너머에서 총소리가 들려온다.

흑인 여자는 재빨리 아기를 침대 밑 안전한 곳으로 밀어 넣고, 창가로 향한다.

흑인 여자는 겁도 없이 창밖으로 몸을 빼고 고래고래 악을 질러댄다.


[이 개자식들아! 사람을 죽이려면 딴 데 가서 하란 말이야!]


스테디캠이 창문 밖으로 빠져나간다.

밖에는 크레인이 대기하고 있다.

크레인 발판으로 이동한 스테디캠이 2층 창가로 몸을 내밀고 있는 흑인 여자를 잡다가 크레인 발판과 함께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앉는다.

길거리에서는 갱단원끼리 총격전을 벌이고 있다.

대단할 것 없는 총격전이다.

몇 발 쏘고는 차량 뒤에 숨어, 권총만 차 너머로 내밀고 쏘는 총싸움.

총성이 멈춘다.

갱단원 하나가 자동차 뒤에서 배꼼 얼굴을 내민다.

상대는 저 멀리 달아나고 있다.

차량 뒤에서 어린 갱단원 몇 녀석이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용감함을 떠들어댄다.

이번에 스테디캠은 갱단원을 따라 붙는다.


“컷!”


이 장면을 찍을 때는 할리우드의 노련한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았다.

스테디캠을 장착한 오퍼레이터는 실내 장면을 찍고, 창밖에 대기하고 있던 크레인에 올라타야 한다.

그런 후 크레인 발판이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앉는다.

완전히 크레인 발판이 땅에 붙으면 스테디캠 오퍼레이터는 그곳에서 내려 지상을 또 다시 훑어야 하는 촬영이다.

이 모든 촬영이 끊어지지 않고, 한 번에 이뤄져야 했다.

류지호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촬영기법은 아니다.

현재도 할리우드 영화에서 종종 시도하고 있는 촬영기법이다.

때문에 할리우드 장비 업체에는 크레인 끝부분에 장착하는 발판, 즉 카메라와 촬영 오퍼레이터가 탑승하는 부분이 다양한 크기로 준비되어 있다.

특히 할리우드 상업영화가 사용하는 파나플렉스(Panaflex)는 독일의 ARI 시리즈보다 액세서리를 달면 조금 더 크고 무겁다.

이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그립 장비도 상당히 육중하고, 튼튼해야만 했다.

불안하다면 70mm 파나플렉스 카메라를 올릴 수 있는 크레인을 부르면 된다.

다만 시간 단위 렌탈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다는 것.

류지호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그런 문제를 개의치 않고 영화를 찍고 싶어서 돈을 벌고 있는 거다.

원테이크 영화가 아니라면 크레인과 스테디캠의 결합대신 지미집을 쓰는 편이 좋다.

지미집은 크레인이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장소에도 들어가고, 직부감과 360도 회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계산만 잘하면 스테디캠과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레이먼드 교수가 맥도웰 교수에게 말했다.


“어시스턴트로 당장 할리우드에 취직해도 되겠다는 말은 취소해야겠습니다.”


두 사람은 류지호가 어려운 장면을 촬영한다고 해서 조언도 해주고, 프로들과 의견조율을 지원하기 위해 촬영현장을 방문했다.

헌데 두 사람이 나설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두 시간. 그 안에 무조건 해결하십시오.”


크레인에 올라타야 하는 스테디캠 오퍼레이터가 망설이자, 류지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여러분이 불안해할까 싶어 특수효과팀을 불렀습니다.”


안전 때문에 망설여진다면 와이어를 메주겠다는 말도 보탰다.


“위험하지 않습니다. 내 조국 코리아의 촬영기사들은 이 정도 스킬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냅니다. 자신 없거나 망설여진다면 돌아가십시오. 내가 찍어도 됩니다.”


류지호가 최후통첩을 날렸다.

그가 말한 코리아의 스태프는 저 미래의 촬영기사들을 말한 것이다.

현재는 류지호가 하고 싶은 걸 구현해줄 충무로의 촬영기사는 없다.

작년 처음 스테디캠이 영화진흥공사에 들어왔으니까.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촬영기사가 충무로에 있을 리가 없다.

어쨌든.


“크레인이 지상에 내려오고, 자동차 쪽으로 이동한 다음 한 번 끊을 겁니다. 지상에서 카메라 워킹은 나의 팀이 이어 받을 겁니다. 당신들은 이 부분만 완벽하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류지호는 할리우드 스태프들과 의견을 조율하고, 그들의 아이디어를 수용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밀어붙였다.


“로이!”

“불렀어?”

“오퍼레이터의 동선하고, 스테디캠 이동 속도 좀 모니터링 해줘.”

“맡겨두라고, 캡틴!”


이번 작품 전체를 촬영하고 있는 로이가 카메라 워킹의 감을 가장 잘 알고 있다.

굳이 할리우드 DP(director of Photography) 시스템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촬영을 맡겼으면 의견조율만 책임지고 감독은 뒤로 빠지는 게 맞았다.

레이먼드 교수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지호군은 감독입니다.”


멕도웰 교수가 류지호에게서 시선을 거둬들여 레이먼드 교수에게 향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보십시오. 오늘 촬영장에 나온 사람들의 절반은 프로들입니다. 그들이 지호군의 요구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


멕도웰 교수 역시 동의했다.


“감독이 찍을 장면을 명확하게 알고 있고, 그 장면을 찍기 위한 메커니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호군은 이 촬영현장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호군이 스무 살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군.”

“영화과 학생들도 덩달아 프로들에게 기가 죽지 않습니다.”


류지호는 프로들에게는 다소 냉정했다.

그들은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다.

받은 만큼 또는 그 이상을 해내야 하는 게 프로다.

반면에 친구들은 영화학도다.

아마추어가 아니다.

학문을 닦는 이들이다.

따라서 친구들의 실수는 배움의 과정이다.

누군가 종용하거나 다그치지 않아도 친구들은 스스로 충분히 괴롭다.

그러니 류지호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결과물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믿어주고 이해해주고 포용하고 기다려주어야 했다.

설령 류지호가 기대한 만큼의 결과를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때때로 그조차 미처 생각하지 못한 데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올 것이기에.

그런 리더의 믿음이 조직력을 더욱 단단하게 키우는 법이다.


하하.


멕도웰 교수는 촬영준비가 끝나 본격적으로 슈팅에 들어가는 자신의 학생들을 바라봤다.


“똑똑한 사람보다 남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하는 법이지.”


간혹 함께 일하는 사람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고 애를 쓰면서 그것이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매니저와 리더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을 수족처럼 움직여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리더가 아닌 그저 사람 부리기를 좋아하는 매니저일 뿐이다.

진정한 리더는 자신의 의견보다 남의 의견에 먼저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편견 없이 그 중 가장 나은 것을 선택한다.

그것이 리더의 능력이다.

남의 의견이 나의 의견보다 더 낫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나의 실력과 입지가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올바른 결정으로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그로 인해 더 큰 인정을 받게 된다.

영화는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과의 협업이다.

각 파트의 책임자들은 감독의 명령에 복종하고 시키는 일만 해오는 하청업자가 아니다.

좋은 감독은 함께 일하는 창작자들이 자신의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고취시킨다.

맥도웰 교수가 UCLA에 머물며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 바로 그런 리더십이다.

그것을 전공생도 아닌 어린 학생이 실제 보여주고 있다.


“준비는 완벽합니다. 아주 좋아요. 이번에 진짜 죽여주는 커트를 찍어 봅시다!”


류지호의 흥에 겨운 목소리가 촬영현장에 힘차게 울려 퍼졌다.


작가의말

연휴 잘 마무리 하시고. 즐겁게 한 주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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