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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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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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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2.06.2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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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9시 뉴스를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청주 우암아파트 상가 붕괴사고 속보부터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고가 난지 36시간, 산자도 죽은 자도 아비규환 악몽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시간이건만, 사고가 난 현장에는 붕괴된 건물의 잔해만이 어슴푸레 보이고 있습니다. 검게 피어오르는 연기, 마치 쓰레기 더미처럼 널브러져 있는 콘크리트 부스러기들, 그리고 주변의 앙상한 전봇대.... 한 눈에 보아도 전쟁을 치른 뒤에 폐허를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모든 9시 뉴스의 오프닝이 청주 우암아파트상가 붕괴 사고 속보로 시작했다.

1993년 1월 7일 새벽 1시 13분 청주시 우암동 우암상가아파트가 붕괴되어 28명의 사망자와 48명의 부상자 및 37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사고가 발생했다.

근현대를 통틀어 사실상 대한민국 최초의 대형 참사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는 1970년 4월 8일 서울 마포구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가 있었다.

이 역시 부실공사로 무너진 사고였다.


“후우!”


사업이 너무 잘나가서 한숨이 나온다.

이놈에 나라는 사건사고로 바람 잘 날 없어서 또 한숨이 나온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는 신나게 영화를 찍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헌데 군대에 오고 나서 정신 시끄러운 일들이 류지호를 괴롭혔다.

차라리 모르고 넘어가면 나으련만....

뉴스와 신문마다 사고를 다루다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그나저나 삼봉백화점 역시 골칫거리다.

보고 받는 내용만으로도 탐욕과 비리가 얽힌 복마전의 산물이다.


“원래 백화점이 건설된 부지가 아파트지구로 묶여있어 신축 허가를 받을 수 없는 곳이었다고요?”

“1986년 5월에 지구중심지역으로 용도 변경되면서 신축이 가능해졌지. 그 당시에도 항간에 여러 추측들이 나돌았는데 서초구청 또 서울시청 담당 공무원들 다수가 뇌물을 받아 처먹었더라.”


어떻게 알아냈냐고 묻진 않았다.

사실 알아보지 않아도 능히 예상할 수 있는 비리구조다.


“누구한테 뇌물이 전해졌는지 정황도 포착해 놨어. 도시정비국장, 건축과 과장, 계장 그 외 말단직원까지....”

“그 부분은 넘어가고. 설계와 감리를 우원건축사무소란 곳에서 했네요?”

“나는 그 큰 건물을 짓는데 이렇게도 할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어. 시공도면을 완성하지도 않고 공사를 시작하질 않나 층별로 그때그때 설계도를 만들었대.”


90년대인 현재도 그런데 80년대까지는 오죽했을까.


“수도권정비심의가 까다로우니까 그 조건 맞추려고 요리조리 설계도면을 바꾸다보니까 건축허가 때 설계도면하고 다른 별도의 시공도면을 가지고 백화점을 올린 거지.”

“시공사인 우성건설은 나름 대기업 아닙니까?”

“대치동, 개포동 같은 지역에 아파트 단지를 지어 돈을 많이 벌었지.”

“그 정도 회사가 건물을 그렇게 개판으로 공사했다구요?”

“애초에 지상 4층에 지하 4층으로 설계됐대. 공사가 시작되자 삼봉에서 매장을 한 평이라도 늘리기 위해 끊임없이 설계변경을 요구했나봐. 그러다가 4층으로 설계됐던 건물구조를 5층으로 하자고 한 거지. 우성건설은 처음에는 설계를 바꿔서 하려고 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89년 1월에 시공권을 삼봉건설에 넘겼어.”

“삼봉백화점 계열사인가 보죠? 이름이 똑같네.”


끄덕.


“결국 자기 식구끼리 짬짜미해서 전문가 검토도 없이 불법적으로 5층으로 설계를 변경한 거지. 그렇게 해서 열 달 만에 백화점이 완공됐어. 아무리 빽이 좋다고 해도 애초 설계와 달리 지어진 건물에 준공승인이 날 리가 없잖아. 열심히 공무원들 기름칠해서 가사용 승인을 받는 편법을 쓴 거야. 그리고 백화점 문을 열고 영업을 하다가 얼렁뚱땅 9개월 지나서 준공승인이 떨어졌지.”


그것이 끝이 아니다.

백화점 개관 후에도 매장 확대를 위한 건물 구조변경이 계속됐다.

공간의 확대를 위해 수시로 벽을 헐었다.

설계에 없던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기 위해 각층 바닥을 뚫었다.

그 결과 백화점 건물의 안정성은 날이 갈수록 취약해지고 있었다.

사실 증축과 구조 변경에 따른 처벌이 약했다.

벌금 몇 푼을 내면 그만이다.

담당 공무원들은 뇌물로 입막음했고.

그렇듯 총체적인 비리와 불법 위에 지어진 건물이 멀쩡할 리 없다.


‘자신들도 백화점에서 근무를 하면서 걱정도 안 됐나?’


당연한 의문이다.

개장 직후부터 원인 모를 미세한 진동이 발생했고, 천정에서 물이 새는 등 위험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났다.

당연히 안전진단이나 문제해결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회장을 비롯한 백화점 경영진은 돈벌이에만 몰두할 뿐.

안전은 관심 밖의 일인 모양이다.

자신들도 위험할 텐데.

본래 우원건축사무소가 설계한 대로 건설되었다면, 삼봉백화점은 비록 온갖 비리로 얼룩진 더러운 돈으로 건설되었을지언정 결코 무너지는 일은 없을 터.

단 몇 년 영업하고 접을 생각이 아니라면, 이런 무개념의 건물을 지을 수 없다.

게다가 삼봉그룹은 건설회사까지 보유하고 있다.

부실시공이 뉴스에서 다뤄져도 건설사 신뢰에 심대한 타격을 받을 텐데, 부실시공을 넘어 비리시공을 저질렀으니.


“처음에는 백화점이 아니라 삼봉건설에서 건설한 바로 옆 아파트단지 주민들을 위한 대단지 종합상가로 설계되었다고 합니다. 그 설계로 우성건설에서 시공을 맡는 것으로 최초 발주가 되었고 말입니다.”


박성규의 말을 다시 장문식이 받았다.


“거의 완공될 무렵 건축주, 그러니까 삼봉 회장이 건물 용도를 백화점으로 급작스럽게 변경한 거야. 그리고 원래 4층이었던 설계에 1층을 더 얹으라고 시공사를 닦달한 거지.”

“시공사인 우성건설이 그 억지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네요.”

“대가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그런 걸 할 리가 없잖아. 우성하면 알아주는 건설사인데.”

“그래서 계열사인 삼봉건설산업에 시공을 넘긴 거네요. 근데 이런 복합 건물은 설계 변경 하면 무조건 구조 전문가의 검토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중정출신이잖아. 회장이..... 장사 하루 이틀 해봤겠어?”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요. 아무리 멍청하더라도 증축할 때 관련 분야의 전문가가 하자는 대로 했으면 건물이 이렇게 부실하게 지어질 리가 없잖아요?”

“돈은 탐나고, 그러려면 매장 수를 늘려야 하고, 그러려니 4층 가지고는 안 되겠고, 시공사는 자기 말을 안 듣고, 에라 그냥 내 꼴리는 대로 하자. 설마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그런 거지.”

“그 회장이란 사람이 땅 부자에다 엄청난 알부자라면서... 아예 깨끗하게 다 헐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짓지.”

“돈에 환장했는데, 그런 착한 짓을 할 리가 없지. 내가 백화점 도면을 아는 설계사한테 보여줬거든. 근데 걔가 뭐라는 줄 아냐? 이게 아직도 안 무너지고 서있는 게 용하대. 빨리 영업 못하게 해야 한단다.”

“도면도 구했어요?”

“진행비 좀 많이 깨졌다. 그건 좀 이해해주라.”

“삼대 방송사 시사고발 프로그램에 제보하는 건 어때요?”

“여기저기 약을 엄청 발라놨을 텐데.... 꿈쩍도 안 할 걸?”


박성규의 걱정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때그때 문제가 생기면 땜빵으로 버티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러다가 우암아파트상가처럼 뭔 사단이 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영업시간이 아닌 시간에 잘 못되면 차라리 다행이게. 문제는 바로 옆에 삼봉아파트 단지가 있다는 거야. 만약 그거 무너지기라도 하면 진짜 X돼는 거야.”

“경찰, 검찰에도 뇌물 받은 이들이 있겠죠?”

“여태 탈 없이 영업하는 거 보면 답 나오지 뭐. 이런 양아치들에 비하면 나 같은 건달은 법 없이 살 놈이야, 그치?”

“장난하세요?”

“류 감독, 우린 그래도 민간인은 안 건드려. 소소하게 밥그릇 싸움하느라 한두 명 골로 보내기는 해도 이렇게 수백 명 골로 보내는 미친 짓거리는 안 한다고.”

“이제 건달 아닙니다. 언제까지 개나리 떨라고 그럽니까? 이제 어엿한 중소기업 이삽니다. 이사. 제발 자각 좀 하세요.”


장문식이 투덜거렸다.


“이런 뒷조사나 시키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한다....”

“이 조사하면서 누구 다치거나 손해 본 사람 있어요?”

“없지. 그래도 가오가 있는데 심부름센터 아그들처럼 뒤나 캐고 다니면 쓰겠냐?”

“안기부도 장 이사가 하는 똑같은 조사업무를 합니다.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세요.”

“걔들은 공무원이고, 우린....”


류지호가 장문식의 말을 끊었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착한 샐러리맨이죠. 폭력조직의 조직원이 아니고.”

“나래가 중견기업은 아니지.”

“곧 되요.”

“언제?”

“임 사장하고 박 이사가 대전엑스포 경비업무 수주 땄잖아요. 그런 국제행사를 문제없이 해내 봐요. 단숨에 의뢰가 쏟아질 겁니다.”


정부가 국제행사에 처음으로 민간경호업체에 외주를 맡기기로 했다.

따라서 나래안전시스템은 다른 업체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93대전엑스포 민간보안 외주 수주전에 뛰어들었다.

결국 민간보안 외주를 따내서 행사기간 시설물 관리와 경비, 안내, 질서유지 등의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다.

참고로 대전엑스포는 한국의 민간 보안업이 몇 단계 성장하는 중요한 행사다.

민간 보안업체들이 93대전엑스포를 무리 없이 소화해 내자, 이후로 대규모 행사에서 더 많은 경비경호 업무를 민간에서 수행하게 된다.


“아무튼, 이 정도로는 부족해요.”

“도면까지 구해왔는데 부족하다고?”

“회장 일가나 경영진의 비리는 더 이상 알아볼 필요 없어요. 대신 백화점 영업, 시설물 변경, 입주 점포 업종과 위치, 옥상의 에어컨 냉각탑, 건물에 균열이 간 증거 사진 등등. 알아볼 건 다 알아내세요.”


장문식이 귀찮다는 듯 대번에 발을 뺐다.


“엑스포 준비하기도 바빠.”

“장 이사는 본래 업무로 돌아가세요. 대신 조사부 몇 명만 붙여줘요.”

“지금 정보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영화 시나리오를 쓸 생각이에요.”

“삼봉 비리를 까발리는 영화를 누가 봐?”

“<타워링> 봤어요? 아니면 <포세이돈 어드벤처>나.”

“건물에 불나는 영화?”

“네.”

“봤지. 테렌스 맥퀸이 죽여줬지.”

“어땠어요?”

“재밌었어. 거 실감나데....”

“그런 영화처럼 건물이 실감나게 무너지는 영화 한 번 만들어 보려고요.”

“우리나라에서 그런 영화를 만들 수나 있나? 그런 영화는 미국 밖에 못 찍는 거 아냐?”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고. 일단 몰래카메라 좀 찍어본 조사원으로 몇 명 붙여줘요.”


류지호가 말하는 몰래카메라는 작년에 예능프로그램에서 선보인 개념과 다르다.

탐사보도 PD들이 잠입취재 시에 몰래 촬영하는 걸 말한다.

맨즈백에 초소형 핸디캠을 넣어두고, 렌즈부분의 지퍼를 살짝 열어놓은 상태로 몰래 취재대상을 촬영하는 것을 말한다.

미래에는 명백한 불법행위이다.

현재는 일부 탐사보도 PD를 제외하고는 이런 촬영행위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PD들도 영업비밀이랄 수 있는 몰래카메라 촬영기법을 절대 외부에 드러내지 않고 있으니까.

나래안전시스템의 조사부는 예외다.

류지호가 요령을 알려줬다.

때문에 국가에 소속된 정보요원들이 사용하는 고가의 초소형 카메라가 없더라도 나래안전시스템의 조사부원은 핸디캠만으로 동영상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어쨌든 두 명의 조사부 직원이 류지호에게 붙었다.

류지호는 직원들과 함께, 때로는 홀로, 뻔질나게 삼봉백화점을 들락거렸다.

매주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세 달이 지나면서 웬만한 매장의 위치는 눈감고도 찾아갈 경지에 올랐다.

5층 식당가의 주방이나 사무실, 지하의 일부를 빼고, 모두 돌아봤다.

백화점을 방문하는 일반 고객들 속에서 영화 캐릭터의 단서도 몇 개 건졌다.

발로 쓰는 시나리오를 몸소 실천했다.

그러나.


“건축에 관해 전문지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백화점을 들락거렸죠?”

“겨울에 시작해서 벌써 봄입니다.”

“감독님, 이제 웬만한 곳은 다 촬영한 것 같습니다.”

“이제 철수하죠. 대신 두 사람은 완전 발길을 끊지는 마세요. 인근을 지나갈 일이 있으면 한 번씩 들러서 변동된 것만 확인해주세요.”


회장의 지시라 거부도 못하고 조사부 직원들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옛. 회장님!”


류지호는 그 동안 모은 정보들을 조합했다.

뇌를 쥐어짜가며, 백화점 붕괴 순간을 묘사해 봤다.

시나리오가 아니라 일종의 트리트먼트의 일부분이다.


매일 4만 명이 방문하는 강남의 최고급 백화점.

명품 매장이 즐비하다.

강남의 부유층 고객들이 아이쇼핑을 즐기다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아낌없이 지갑을 연다.


우르릉.


갑자기 건물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사고 발생 불과 7분 전.

백화점 경영진들이 아닌 직원들의 고함이 5층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모두 긴급히 대피하라!]

[빨리 건물을 나가요!]

[밖으로 도망쳐!]

[아악! 사람 살려!]


몇몇 고객들은 영문도 모른 채 대피한다.

안타깝게도 지하에 있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직원들의 고함을 듣지 못한다.

지하 식품관에서 할인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백화점 대부분의 고객이 몰려있다.

비상벨을 울리고 직원들이 고객들을 뒤늦게 대피시키기 시작한다.

무슨 수로 이 넓고 복잡한 백화점에서 1,000여 명도 넘는 사람들이 고작 7분 안에 무사히 탈출할 수 있겠는가?

그 순간부터 약 5분간 백화점 안에 있던 고객과 직원들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수라장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을 헤매야만 한다.


꽈과과광!


5층을 지탱하고 있는 천장이 요란한 파열음을 내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사방에서 찢어진 비명소리와 공포에 질린 절규가 터진다.

5층 천장에서 쏟아져 내린 콘크리트가 아래층을 차례로 무너뜨린다.

분홍색 백화점 건물이 지하 4층까지 완전히 주저앉는다.

건물의 남쪽 A동의 옥상이 무너진다.

그 곳에 있던 에어컨 실외기가 5층으로 떨어지며 이 거대한 충격으로 인해 나머지 아래층들의 상판들이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무너지면서 순식간에 모조리 붕괴된다.

백화점 안에는 직원과 고객 포함 1,500여 명.

붕괴와 함께 그대로 매몰되어 사망하거나 다치고, 그 중 일부만이 건물이 내려앉는 도중에 겨우 빠져나와 목숨을 건진다.

지은 지 만 6년이 되지 않은 지상 5층, 지하 4층 고급백화점.

백화점이 폭삭 주저앉는데 걸린 시간은...

20초도 걸리지 않는다.

붕괴의 순간, 굉음과 강풍이 일면서 먼지와 파편이 허공으로 튄다.

사고의 현장은 아비규환이다.


[여기! 누가 여기 좀!]

[도와주세요!]

[으아앙!]

[아악! 아파!]


건물 잔해 더미 속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아우성친다.

피투성이가 된 부상자들의 비명과 신음소리가 가득하다.

사람들의 생사가 엇갈리는 참사의 순간에도 건물 잔해를 뒤적이며 백화점 상품을 훔치는 사람도 목격된다.

거대한 먼지 구름은 서초구, 강남구 전체와 잠실 일대까지 휩쓸고 지나간다.

하필 초저녁 시간대라서 놀이터에 아이들이 많이 나와 놀고 있다.

하늘 멀리서 웬 먼지 폭풍이 날아오더니 아파트 단지 전체를 휩쓸자, 놀란 엄마들이 황급히 달려 나와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전쟁이 터진 것 같기도 하고.

화산이 폭발해 화산재라도 날리는 것 같다.

사고현장은 물론이고 백화점 일대가 큰 충격에 빠진다.

백화점 지하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과 함께 주변을 지나가던 차량 수백 대가 무너진 콘크리트에 깔린다.

생존자는 대부분 지상 1~2층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대다수의 사망자는 지하 1층 식품관에 있었던 사람이다.

지하 2층과 3층은 주차장이라 사람이 있을 일은 드물다.

뽀얀 연기가 걷히며 드러나는 폐허!

건물이 무너져버린 거대한 잔해 더미.

승강장과 비상구가 있던 건물의 일부분만이 묘지의 비석처럼 우뚝 서있을 뿐.


“....음.”


그런데 미묘했다.

물론 트리트먼트다.

구체적인 아이디어보다 전체적인 느낌만 잡아봤다.

텍스트로 보면 뭔가 거대한 일이 벌어지는 인상을 받게 된다.

문제는 전문적으로 고증을 받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머리로만 썼기 때문일까.


“공학자와 건축 전문가에게 보여주고 자문을 받아야겠어.”


고증을 받는다는 것은 시대물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전문영역이 포함되는 영화에서는 반드시 고증과 자문을 받고 써야 한다.

작가나 감독이 전문적인 지식을 완벽하게 숙지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인 건 알고 있어야 한다.

가능하면 전문가 수준까지 알고 쓰면 좋다.

특히 고증을 무시한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면 더욱 고증을 받아야 한다.

고증을 깨기 위해선 그에 해당한 전문지식을 알고 있어야 하니까.


“모두 상상으로만 쓰인 겁니다. 고증은 신경 쓰지 마세요.”


라고 작가가 말한다면.

할리우드에서는 그 시나리오가 곧장 쓰레기통으로 향하게 된다.

스스로 게으르고, 아마추어라고 실토한 셈이니까.

류지호는 시놉시스니 트리트먼트니, 집어치웠다.

일단 영화의 방향을 구상했다.

재난영화는 결국에는 두 갈래로 귀결된다.

첫 번째 방식은 소영웅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재난의 현장을 볼거리로 가득 채운 후에 모든 갈등을 봉합한 뒤 관객으로 하여금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방향.

다른 방식은 그 재앙과도 같은 상황에 맞닥뜨린 군상들의 모습에서 휴머니티란 무엇인가를 성찰하고 되돌아본 뒤 결국 생과 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방향.

70년대 만들어진 <타워링>, <포세이돈 어드벤처>는 볼거리 가득한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 같지만 의외로 두 번째 방식에 가깝다.

당시 관객들은 가능한 모든 특수 촬영과 효과를 총동원한 볼거리에 열광했겠지만, 영화를 몇 번 보면 재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태도, 그들의 대사, 행동 등에서 작가와 감독이 관객에게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는 걸 알게 된다.

2시간 40분 러닝타임의 <타워링>은 소방관, 건축가 등 다양한 인물들이 최선을 다해 살려고 노력하면서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침착하게 뛰어다닌다.

가끔 롱테이크로 응시하는 등장인물들의 살고하자 하는 몸부림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류지호는 <타워링>, <포세이돈 어드벤처>, 가장 최근 영화인 <분노의 역류>를 수십 번 봤다.

그 영화들이 재난상황과 그 처지에 놓인 인간군상을 어떻게 다루는지 연구했다.

고전이 괜히 고전이 아니다.

세 편 모두 뛰어난 상업성과 함께 캐릭터성 또한 풍부했다.

지금 할리우드에서 <트위스터>와 <데이라잇>이란 재난영화가 기획되고 있다.

두 편 모두 흥행에는 성공할 것이 확실했지만.


“70년대 만들어진 두 편의 재난영화에 비하면 손색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


재난 영화의 기획 포인트는 재앙을 맞이한 인간들이 겪는 공포를 극장에서 관객들이 대리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과 살아남은 자의 안도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가족을 지키고, 재산을 지키고, 가치를 지켜야만 한다는 그 생존의 정서.

소위 재난물은 평범한 일상이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인해 모조리 박살나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각종 위기상황에서 견뎌내고 살아남는 것이 주된 전개다.

관객에게 남의 고난을 훔쳐보며 대리체험을 하고나서, 극중 누군가가 자기희생이라는 영웅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우리는 안전하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류지호의 쓰고 있는 시나리오에서는?

소영웅주의?

배금주의 탐욕에 대한 비판?

문제의식을 드러낸 후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사회참여적인 태도?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성에 대한 탐구?

이를 뛰어넘는 어떤 창조적인 변용이나 새로움?

상업영화는 전자의 두 개를 잘 섞으면 된다.

문제작이 되려면 후자 두 개를 섞어 창조적인 변용을 추구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보고, 대중적으로 이슈를 만들려면 아무래도 전자여야겠지.”


쉽고 간단한 스토리 라인.

풍부한 볼거리.

쫄깃한 연출과 편집.

평범했지만 결국 불굴의 의지로 영웅적인 행동을 선보이는 주인공.

양념처럼 슬쩍 뿌려놓은 주제의식.


“쯧. 공식이지....”


가볍게 혀를 찬 류지호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책상에 오래 앉아 있다고 해서 좋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 같지 않았다.

미국 시간을 확인하고 미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데본, 내가 보낸 자료들을 검토해 봐요. 그리고 건축공학자 섭외해서 한국으로 보내줘요.”

- 건축공학자....?

“건물붕괴 재난영화 스크립트를 쓰려는데,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해서요.”

- 한국에서 섭외하면 되지 않습니까?

“비밀리에 진행하려고요.”


데본 테럴은 로니드 킹 사건으로 촉발된 흑인 빈민가의 폭동 위험성을 인지하고 그걸 막기 위해서 노력했던 류지호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번에도 뭔가 위험한 사안에 연루되려고 하는지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타워링>에 <다이하드>를 섞은 영화를 써보려고요.”

- 재난영화를 보스의 데뷔작으로 할 생각입니까? 의외로군요.

“뭐가 의외죠?”

- 좀 더 파격적인 영화를 할 줄 알았습니다. 쿠엔 태런티노처럼.

“나는 욕심이 많답니다.”

- 하하하. 뭔들 못하겠습니까?

“칭찬이죠?”

- 당연히 칭찬입니다.

“그런 줄 알고 넘어갈게요.”

- 급합니까?

“천천히 알아보세요. 7월 쯤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 알겠습니다.


류지호는 데본 테럴과의 통화 이후로 삼봉백화점 출입을 끊었다.

대신 영화를 보고, 소설이나 건축 관련 서적들을 찾아 읽었다.


작가의말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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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우리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리죠! (2) +6 22.07.07 6,100 174 24쪽
214 우리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리죠! (1) +3 22.07.06 6,302 171 22쪽
213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6 22.07.05 6,225 174 29쪽
212 제대를 명 받았습니다! +7 22.07.04 6,167 161 21쪽
211 위험한 아이들! (2) +6 22.07.02 6,033 172 23쪽
210 위험한 아이들! (1) +6 22.07.02 5,968 165 24쪽
209 게임의 법칙. (3) +5 22.07.01 6,055 175 28쪽
208 게임의 법칙. (2) +10 22.06.30 6,273 179 29쪽
207 게임의 법칙. (1) +12 22.06.29 6,216 172 26쪽
206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자. (2) +8 22.06.28 6,091 167 25쪽
205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자. (1) +9 22.06.27 6,134 167 23쪽
204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5) +5 22.06.25 6,066 180 29쪽
203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4) +5 22.06.25 5,788 152 24쪽
202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3) +17 22.06.24 6,005 179 27쪽
201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2) +8 22.06.24 5,874 156 21쪽
»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1) +7 22.06.23 6,176 170 22쪽
199 리더가 꼭 완벽할 필요는 없지.... +7 22.06.22 6,100 182 28쪽
198 반 발자국만 앞서 가라. (3) +7 22.06.21 6,166 186 30쪽
197 반 발자국만 앞서 가라. (2) +7 22.06.20 6,149 177 29쪽
196 반 발자국만 앞서 가라. (1) +9 22.06.18 6,187 202 27쪽
195 내 친구 많이 컸네! +4 22.06.17 6,270 187 27쪽
194 사고를 치려면 언질이라도 주고 쳤어야지.....! (2) +12 22.06.16 6,017 195 29쪽
193 사고를 치려면 언질이라도 주고 쳤어야지.....! (1) +6 22.06.15 6,014 192 25쪽
192 앞장서서 뭘 하려들지 말고 중간만 해. (3) +9 22.06.14 5,971 179 21쪽
191 앞장서서 뭘 하려들지 말고 중간만 해. (2) +4 22.06.13 6,124 188 25쪽
190 앞장서서 뭘 하려들지 말고 중간만 해. (1) +8 22.06.11 6,120 191 22쪽
189 Life Goes On. (6) +7 22.06.10 6,061 180 25쪽
188 Life Goes On. (5) +22 22.06.09 5,903 219 21쪽
187 Life Goes On. (4) +5 22.06.09 5,672 174 26쪽
186 Life Goes On. (3) +7 22.06.08 5,910 186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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