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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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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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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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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8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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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224. 부부단장, 히베

DUMMY

*


속으로 침을 삼킨 건, ‘히베Hebae’ 역시 마찬가지였다.


짙고 무거운 갈색 눈동자. 제냐가 본 눈의 주인이 그였다.


검은 늑대단은 어쨌거나 대공가를 대표하는 삼색 늑대단, 기사단의 일각이었다. 유명하지 않다고해서 실력이 떨어지는 건 결코 아니었다.


일국의 기사단으로서 타국에 내세워도 될 정도의 수준이다. 삼색 늑대단은 모두. 기사단원들의 평균적인 수준 역시 휘하 다른 세력가의 기사단들과 비교하기 어렵다. 운트 작힘 백작의 기사단에서, 조장이나 부단장 급의 인원들이 모두 평단원이었으니까, 이곳에서는.


그리고 다시 이 늑대단에서 간부직을 맡고 있는 이들은, 훨씬 월등한 실력을 보인다.


초인으로서 수준이 높아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수가 줄어들지만, 괴물같은 이들이 여기저기에 존재하는 콘란드 대륙이었다. 언제 어디서 그런 작자들을 만날 지 모른다.

원래, 히베 역시 그런 놈 중 하나였다.


플레이어가 고수급이 된 이후에, 멋모르고 설치다가 만나게 되는 천재지변같은 존재.


100레벨을 훌쩍 넘은 실력이고, 검은 늑대단에서는 부부단장의 직위를 갖고 있었다. 단순한 계산으로 무력 서열을 따진다면,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든다.


단장이 제1위고, 부단장이 2위이다. 부부단장은 둘이었고, 조장 중에 별격인 놈이 하나 있었으니까. 그들을 모두 셈했을 때, 최소한 5위다. 같은 부부단장과는 엎치락 뒷치락 하는 사이였고.


‘수준 높은 기사단’이 그만한 수준인 점은. 상위에 위치하는 조직장이 압도적인 실력을 갖고 있음 때문이다.


어느 자리나 그러하다. 초인 중의 초인. 기력술사던 초상술사던 위로 그 경지를 높여갈수록 그 곳에 닿는 이들은 한없이 적어지지만. 그 위에 닿는 작자들은, 벽을 하나 뚫었으므로 그 아래 있는 수련자들과 별격의 경지에 오르곤 한다.


히베를 플레이어처럼 레벨로 나누자면, 170 정도는 되리라. 100레벨을 넘기고, 중후반 대에 도달한 인물이다. 이제 막 고수급에 발을 디딘 플레이어라면,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하고 목이 베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제냐는 분명하게 반응을 해냈다. 그 점이, 히베가 침을 삼키는 이유이다.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 줄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그의 검을 피할만한 실력자는 결코 많지 않다. 산슈카 국내 모든 기사들을 합해 센다고 해도.


최근 들어서 출신을 알기 어려운 떠돌이들이 이 나라에 많이 들어와 있다고는 들었는데. 그리고, 비단 산슈카 뿐만이 아니라 전 대륙적으로 그러한 작자들이 모험가 길드와 용병 길드를 통해서 많이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기는 했다.


그런 소식을 듣기야 했다만···. 갑자기 이런 수준의 인간을 적으로 만날 줄은 몰랐다. 대체 왜 저만한 솜씨이면서 떠돌이 행세를 하고 있다는 말인가.

히베는 대공가 기사단의 필두로 설만한 인간이었다. 곧 산슈카 모든 기사들의 정점 근처에 있다는 뜻이다. 검은 늑대단이라 드러나는 권위는 덜하지만, 그것만으로 대단한 명예이자 권력이었다.


원한다면 귀족의 작위를 받을 수도 있으리라. 특히 기사던 뭐던, 초능력자가 귀한 이런 변방의 소국이라고 한다면 더욱.

명예욕도 없는가, 저 치는.


히베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표현해봐야 좋을 게 없다. 전장에서는 더욱이.


암살의 일격으로는 절기絶技라고 할 수 있는 게 그의 검술이었다. 기형적인 형태의 단검은 늘 무수한 초인들의 목숨을 끊어왔고, 과반수 이상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피해내는 건, 그로서도 각별하게 신경써야 하는 수준의 목표물들이다.


일단은 움직이는 사냥감 A, ‘제냐 킴’을 쫓는다.


암살조는 원래 유기적으로 사냥을 해야 했다. 서서히 상대를 옥죄어 몰고, 힘이 다 빠졌을 때 그 목덜미에 칼날을 박아넣는 게 정석이다. 물론 들키지 않았을 때라고 한다면 번거롭게 몰이 사냥을 할 필요 없이 일격에 죽이는 게 최선이고.


지금은 이미 들켰으니, 이쪽의 수와 합격으로 상대를 곤경에 빠트려야 한다.


알렌과 숀, 페이트. 세 기사는 늑대단 내에서도 나름대로 합이 잘 맞는 자들이었다. 선봉으로 서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었고. 고작 몇달 전에 그들과 호각을 다투었다던 사냥감이라면, 견제구로서 충분했으리라.

그러나 ‘투수’의 역할을 하는, 암살조장 히베의 계산을 아득하게 벗어났다. 사냥감이.


늑대단 열과 전술사단의 워메이지 다섯이 왔다. 그들도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대공가의 터전에서 전면전을 벌이는 것도 우스운 짓거리다. 입막음을 하자면 못할 것도 없기는 하지만. 대놓고 시민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주어봐야 좋을 게 없었다.

어쨌건 대공령에 살고 있는 이들은 알사드 가家의 지지기반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시끄럽게 굴진 않는 게 좋다. 그들이 보는 근처에서는.


아예 거리가 먼 외국에서의 일이거나. 혹은 산슈카 국내에서도 대공령과 거리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차라리 살계殺計를 펼쳐서 무마할 수도 있겠지만은.

알사드 대공은 병적으로 관심을 받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요 경향이 있었다.


프린스 알사드의 내모內謀를 다 아는 건 아무도 없었지만. 적어도 근처에서 수족이 되는 작자들은 짐작 정도를 한다. 무슨 일인 지는 몰라도 그는 주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고. 왕실과 타 귀족들과의 관계를 맺지 않는 편이었다.

아마 산슈카 전체를 범위에 두고 있는 계략일 확률이 높았다. 그 진상이 무엇인 지는 다 몰라도.


아마 세르게이 알사드 대공이 벌이는 일이니, 정상적인 일은 아니리라.


어쨌든 그러다보니, 암살조들이 할 일이 늘 많았다. 검은 늑대단과 전술사단은 가장 많이 차출되는 집단이었고. 히베는 이미 자신이 기사인지, 암살가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후.”


짧게 복면 바깥으로 숨을 뱉었다. 얇은 천은 검고 짙다. 그러나 소재 자체는 두텁지 않아 호흡을 많이 방해하지 않았다. 암살자들의 용도로 대공가의 직물공과 아티팩트 메이커들이 짜낸 물건들이었다.


천 옷 내부에 방호용의 장구를 차고 있었지만. 천만 하더라도 일반적인 칼날에는 쉽게 상하지 않는 재질이다. 기사들과 싸울 때는 큰 의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작업복’으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다.


멀리 제냐가 달린다. 히베의 뒤에는 페이트가 붙었고. “휘이이.”


그가 짧은 휘파람을 불었다. 고음이었고, 중반부 이상부터는 사람의 귀에 잘 들리지도 않는 수준의 음이었다. 그러나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작자들에게는 무엇보다 확실한 신호다. 히베의 휘파람은.


부부단장의 신호에 움직이지 않고 있던 기사단원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제냐’가 움직이는 범위를 중심으로, 반경 수 백 여 미터 정도에 퍼져 있었다. 다들 제냐를 포위하기 위해 거대한 원형을 그린 뒤,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돌격대의 역할로, 몇 명이 들어가 제냐를 뒤흔들고. 뒤이어서 히베와 같이 숙련된 간부 급들이 나서서 목줄기를 끊을 셈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사냥감이 훨씬 거칠었다. 시간 벌이를 위해서 보냈던 부하들을 전부 도륙을 냈으니. 그대로 놔두었으면 페이트까지 죽을 판이었다.


어쩔 수 없이 기사들 중 최선임자인 히베가 곧장 나서야 했다.


초상술사들도 타겟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야밤에 쓸 수 있는 초상술은 한정적이다. 시민들을 다 깨울 수도 없었고. 사소한 소음이야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라며 대공가의 위세로 덮을 수 있겠지만은.


대포를 쏘듯한 공격들은 지양해야 했다. 암살조의 목숨과 바꿔서까지 지켜야 하는 규칙이냐, 고 묻는다면. 히베는 고개를 젓겠지만. 돌아갈 수 있는 길목이 남아 있다면 그렇게 시늉을 해야 했다.


여긴 대공가의 앞마당이다. 시민들의 눈총도 피해야 할 것이었지만. 프린스 알사드의 따가운 시선도 곧장 받게 되는 장소였다. 공작의 손바닥 위에 있으면서, 그의 명을 거역하는 건 미친 짓거리다.


검은 늑대단에서 나름대로 핵심부까지 올라간 히베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누구보다도.

그는 프린스 알사드가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죽인 이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알고 있다. 심지어, 대공은 부하들까지 ‘해낼 수 없는’ 작전으로 밀어넣어 죽인 일이 허다했다.


그런 작자를 대체 왜 따르느냐, 고 하면 달리 할 말은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가진 피붙이, 딸이 대공의 손아귀에 있기는 했는데. 이제와서는 그것도 희미해진 이유였다. 어느덧 장성한 딸은 이미 성인이 되어 산슈카 어느 도시에서 가정을 꾸리고 잘 살고 있었다. 대공도 그의 딸을 알고 있었고. 아마 알사드 가문에 큰 해를 입힌다면. 대공은 주저없이 그의 딸을 희생시키리라.


어여쁜 년이었고. 안타까운 일이겠지만은. 히베의 감정은 이미 한없이 희박해진 상태였다. 더 이상 무언가를 느끼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그의 딸만이 소중하겠는가, 말이다. 물론 잘 살았으면 좋겠고, 예전에 먼저 떠난 어미를 생각한다면 면목이 없는 생각이겠지만.


그의 손으로 죽인 대공가의 적이 백 단위였다. 어쩌면 천 단위가 될 지도 몰랐고.

거기에 알고 있으면서, 죽을 곳으로 밀어넣은 부하와 동료들이 얼마나 되었던가.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움직였고, 이미 너무 많은 피를 묻혀버렸다. 히베는 후회라는 단어조차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여긴다.


“흡.”


전투 중에 상념은 칼끝을 무디게 만든다.

그러고도 아직까지 살아남을 정도로 단련된 기인伎人이기는 했다만.


넓게 퍼져 있던 원형이 좁혀진다. 암살조 인원들과 서로의 위치는 완벽하게 공유하고 있었다. 기사단원들이 다가온다. 초상술사들은 내부에서 작은 원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도리어 바깥으로 빠진다. 제냐의 움직임에 맞추어서 두 개의 원이 따라가는 중이었다.


사냥감에게 붙어오는 여섯 명의 기사들. 히베와 페이트를 합친다면 여덞이다.


초상술사들은 넷이 남았다. 가여운 맥기.

전술사단의 어린 녀석이 죽어버렸다. 무덤덤해졌다가, 그저 상념으로라도 위로를 했다가. 히베는 자신의 감정을 이미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할 일을 해야지, 할 일은.


한탄같은 생각과는 달리.


실제 그의 몸은 질주를 하듯 내달린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빈 공간들을 아주 짧은 시간만에 통과한다. 쏘아진 화살처럼. 아니, 유도되어 그대로 움직이는 마법의 화살처럼. 히베가 제냐를 찾았다.


제 나름대로 빠르기를 자랑했던 제냐이다. 그러나 히베를 완전히 떨쳐내기는 어려웠다. 그도 다가오고 있는 다른 기사들의 기척을 느꼈을 테니까. 서서히 몰아넣는 건 이런 식으로 하는 거다. 애초부터 이래야 했는데. 괜한 목숨 둘을 버렸다.


‘조장’은 늘 선택을 해야만 한다.

끝까지 갈 것인지, 아니면 도중에 포기를 할 것인지.


암살을 포기할 거면 빨리 하는 게 좋다. 동료들의 목숨이 당연히 공짜는 아니다. 히베도 그 정도로 사이코패스는 아니었으니.

사냥감을 잡을 거라면, 목숨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했다. 암살조원들, 팀의 목숨을 말이다. 물론 베스트는 아무도 죽지 않고, 사냥감만 잡는 것. 이미 그건 실패를 했고···. 죽은 목숨을 초석 삼아서 더 진행하기로 한다.


동료들의 목숨을 아끼기 위해 히베가 나섰지만. 순간순간 그의 판단이나 전략 미스로 인해서 더 죽을 지도 몰랐다. 몇 명까지를 마지노 선으로 보아야 하는가. 전멸은 잘 선택하지 않는 수법이었다. 히베로서는. 말했듯, 그는 이미 너무 많은 피를 묻힌 인간이니까 말이다.


그의 유일한 딸도 그다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동료들의 목숨 역시 딸과 비슷할 정도로는 중요했고. 히베 자신의 목숨도 역시 그렇다. 누군가가 죽을까봐 벌벌 떨면서, 대공의 눈치를 보지는 않을 셈이었다. 그런 식으로 굴어도 여태까지 잘만 살아남았고. 그건 아마 대공의 마음이 너그러워서가 아니라, 그가 제법 임무를 잘 수행하는 간부였기에 살려둔 것일 테다.


한 번은 실패를 해도, 결국 조원들을 살려와 재정비를 한 뒤 다음 임무를 성공으로 끝마치니까, 늘.


히베는 일단은 마음 속으로 숫자를 정해두었다. 검은 늑대단 셋.

그 이상이 목숨이 날아가면, 미련없이 오늘 밤의 사냥은 접는다.

대공가 근처라는 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성격 나쁜 주인, 대공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머리를 굴려야 하기는 하지만. 일이 잘못되었을 때 일단은, 살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눈 앞의 사냥감이 아무리 미친 놈이래도, 대공가 본영으로 도망치는 자신들을 쫓지는 않을 테니까. 지금 사냥을 하려다 되레 잡아먹히고 있는 기막힌 상황이기는 해도.


‘검은 늑대단’은 인적 자원이 나름대로, 풍부한 편이었다. 대공은 아주 부지런한 작자였다. ‘게으른 대공’이라니. 그것만큼 웃기는 별명을 히베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가 대공을 알고 나서부터는, 그는 언제나 열심이었다. 자신이 수족으로 삼기 위한 기사 후보군들을 계속해서 채워넣는 것이다.


전국과 인접국 각지에 여러 병력들이 파견을 나간 상태에서도, 계속 기사단이 유지되는 이유는 그것이다. 이 나라에는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나, 고아 따위가 아주 많았고. 주변 나라에까지 눈을 돌린다면 더욱 많았다.


그런 것들 중에서 자질이 있어 보이는 녀석들을 발탁해오고. 혹은, 히베 자신처럼 모종의 사연이 있는 기사들을 끌어모아 검은 늑대단으로 삼기도 한다.


히베가 이곳에 몸을 담은 것이 십 수 년 전의 일이니까. 당시에도 활발하게 이어지던 대공의 ‘후보군 모집’ 사업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었고. 당시의 아이들은 충분히 성장을 해서 훌륭한 대공의 수족이 되었다.


당장 동원 가능한 검은 늑대단의 인원들이 일정 수 이하로 떨어지면, 후보군에서 곧바로 충원을 해서 수를 맞추고 있는 중이었다.


개중에서 오래 살아남는 베테랑들은, 실력을 쌓아 간부급이 되거나 한다. 히베도 처음부터 간부는 아니었다. 살아남았고, 아득바득 수준을 높였기에 지금에 이른다. 정 뭐하면, 그러니까 더러우면.

모든 걸 버리고 떠나버릴 수도 있을 정도의 실력은 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대공이 아마 딸을 겁박하거나 죽일 테지만.


‘딸의 목숨도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다’라는 히베의 마음가짐은 그래도. 딸의 목숨과 비슷한 무게감의 무엇이 반대편 조건에 붙어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저 기분에 따라 그렇게 움직일 수는 없다. 적어도 함께 움직이고 있는 팀들이 몰살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거나, 그럴 때나 극단적인 항명을 선택하겠지.


캉!


히베의 상념은 꼬리를 물었고.


그의 검은 제냐의 뒤를 물었다.


제냐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박도를 들어 히베의 검격을 막았다. 쇳소리가 대포 소리와 같았다.

실력을 쌓은 기력술사들끼리의 경쟁에서는 늘 이렇다.


국소 범위에서는, 초상술사나 다를 바 없다. MP의 폭탄. 그것이 검격 하나하나에 모두 실려 있는 셈이다.


카카캉!


히베는 마구 양 손을 휘둘렀다. 짐승, 늑대류의 무엇이 마구잡이로 제 앞발을 할퀴는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기형적으로 생긴 검, 무언가 그 끝에 걸어서 당기면 그대로 베일 것 같은 단검이었다. 화살촉처럼 끄트머리가 생겼다. 온전한 화살표 모양은 아니고, 반절로 뚝 떼었다. 낫과도 비슷해 보이고.


꺾인 부분의 안쪽이나 바깥이나 모두 바짝 날이 서 있었다. 기형검을 휘두르며 비스트 슬레이어를 밀쳐낸다.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제냐는 그것 때문에 몸이 밀리고, 자세가 무너져서 발톱 대거를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했다.


비스트 슬레이어를 이리저리 펼쳐대며 그의 검격을 마주 대하고, 상대의 빈틈을 열심히 찾아볼 뿐이다. 빈틈을 찌르지도 못했다.


“큽.”


히베의 반대쪽. 제냐 역시 신음을 흘린다. 히베는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예 감당 못할 수준의 적은 아니었다. 히베 류트 역시 놈을 잡아둘 수 없었다면. 여기서 놈을 죽이지도 못하고. 그저 농락만 당하다가 도망칠 뻔했다.


언제나 강력한 힘을 가진 소수 정예는, 집단을 뒤흔들기가 좋은 법이다. 1:1 상황이나, 국지전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만치 강하다고 한다면. 그 기동력을 상대하기가 거대 집단으로서는 어려우니까.


지금은 15대 1이었는데, 근접전에서 상대를 묶어둘만한 유닛unit이 없었다면 그 수가 무용지물이 될 뻔했다. 잘 짜인 검은 늑대단 열은 가히 어떤 괴물이라도 상대할 자신이 있기야 했다만. 상대는 괴물 이상이다.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이 민망스럽기는 하지만. 히베 역시 그렇다.


평야든 산맥이든. 산슈카 내에 존재하는 어느 거대한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히베는 그것을 상대하고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당연히 그게 흔한 수준은 아니다.


부하들에게 맡기기에는 확실히 부담스러운 실력자였다. 눈 앞의 제냐 킴은.


흑발의 청년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그의 빈틈을 노렸다. 히베는 안광을 빛내며, 자신의 선 자리 역시 제냐의 움직임에 맞추어 계속 바꾸었다. 초근접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한 채 검격을 나눈다. 상대는 비스트 슬레이어만을 사용하며 그의 검을 막았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익숙해졌는지, 반대편 손의 대거까지 활용하여 그를 노린다.


망할 놈.


히베는 그리 생각했다.


히베가 아니었다면, 초상술사들도 근접전이 어려우니 아마 반토막이 났으리라. 이런 놈일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맥기를 앞에 세우지도 않았으리라.

아니 그리고, 여관에서 쳐자고 있을 시간인데 대체 왜 바깥에 있었던 거람. 설마 대공가의 움직임을 꿰뚫고 있을만한 정보원이 있지도 않을 텐데.


이게 우연이라는 말인가. 그도 아니면, 매일 밤 제냐는 이럴 셈이었을까.


휘이이.


복잡한 움직임, 근접한 자리에서의 칼춤 가운데 부부단장은 다시금 휘파람을 불었다. 아까와는 미세하게 다른 음과 길이였다. 전술사단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넷 밖에 없었지만, 대공가의 전술사단 넷이라면 가히 막강한 전력이다.


멀찌감치서, 큰 소리는 나지 않아도 MP가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기력술사던 뭐던, 경지가 올라갈수록 주변에 대한 민감성 역시 높아지는 법이다.


야심한 시각이다. 대공령의 주민들은 일찍이 잠드는 편이다. 새벽녘의 시간은 대공이 무슨 짓거리를 할 지 모른다. 은연 중에, ‘밤은 위험하다’라는 메세지를 주민들에게 늘 퍼뜨리고 있는 대공이었다.


직접 나와서, 이 광경을 관찰하지 않는다면 알 수는 없으리라. 평범한 주민들이 MP의 파동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 같지도 않고.


소리도 그리 크지 않은 ‘암살류’로 준비를 시켜두었다. 전술사단들의 거리는 제냐가 있는 곳에서 2, 300여 미터 정도씩 떨어져 있었다. 어둔 밤, 눈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 흑색 복장이라 있는 지도 알기 어렵다.


그러나 MP의 기척은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제냐를 둘러싸고 있는 네 방위였다. 동서남북처럼. 네 방향에서의 투사체가 정확하게 제냐를 노리고 날아들리라. 기사단이 어지럽게 굴며 제냐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지만. 타이밍은 늘 칼날처럼 철두철미하도록 맞춰둔다. 저들의 캐스팅Casting 과정이 끝나면, 알기 쉬운 사인sign이 온다.


히베는 그것을 기다렸다.


히베 혼자 제냐를 묶어두지는 않았다.


“우오.”


페이트는 둔하고, 멍청한 소리를 기합으로 내지르면서 히베의 옆구리 근처에서 창을 찔렀다. 히베는 그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합격술은 검은 늑대단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능력 중 하나이다. 암살이라는 건 정확한 전략을 세워 상대를 없애는 일이다.


정확하게 머릿수를 맞춘 싸움은 환상이나 동화에나 나오는 일이었다. 명예를 드높이는, 낮과 군중 앞에서의 전투가 아니었다. 검은 늑대단이 하는 싸움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뒷그늘의, 처절하고 지저분한 싸움이지.


히베는 딱히 그것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가 싫어하는 건, 불필요한 죽음 뿐이다.


대공의 그늘 아래 있으면 언제든 많이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히베는 대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관성에 따라 섬기고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하면, 히베의 딸은 관성에 의해 살아남고 있을 뿐이었고.


언제고 완벽한 타이밍이 와서, 합법적으로 대공을 배신해도 좋은 순간이 온다면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

히베 류트는 늘 그런 순간을 고대한다.


페이트의 창이 그의 옆구리를 지나 제냐를 찔렀다. 정확히는 제냐의 옆 허공을.

놈의 반응은 상당히 빠르다. 페이트의 동작도 보고 있으면서, 자신의 검도 제대로 피한다. 젊은 나이에 보기 힘든 성취이고 능력이었다. 이런 괴물같은 새끼가 어디서 나왔을까.


히베는 기형검 두 자루를 교차해서, 비스트 슬레이어의 중단 부분을 세게 쳤다. 쾅! 기력을 실어 밀어버렸고, 제냐의 손이 그대로 뒤로 빠졌다. 몸이 열렸다. 히베는 자신의 발로 석조 바닥을 툭 밀며 움직인다. 열린 가슴이다.


페이트의 창날이 다시금 날아든다.


제냐의 뒤쪽으로는, 어느새 다가온 기사단의 다른 인원 둘이 각기 검을 겨누고 있었다. 보편적인 모양새와 길이의 검들이다. 제식 무기를 사용하는 놈들끼리는 합격진을 짜기가 더욱 쉬운 면이 있다. 마치 한 놈처럼 움직이는 묘기도 가끔 보여주고.


동료들이 다가오는 걸 보고, 제냐의 호흡을 빼앗으려 세게 친 것이다. 검은 머리 청년. 세시앙인. 대공의 심기를 거스른, 어느 모험가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여기가 아마 놈의 마지막일까.

긴 시간이었다. 히베가 제냐를 보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의 부하들이 여럿 죽어 나갔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


직접 본 지 금방이었고. 헤어지기 딱 좋은 정도의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암살자와 암살 대상이 서로 마주할 시간의 길이로는, 이 정도가 적당하다.


쇄애액.


하면서 밤공기를 가르는 기력술의 칼날들이 여럿이었다.


비스트 슬레이어에 맺혀 있던 검기가 조금 균열이 가 있다. 히베 역시 고수급 중에서 완숙한 경지의 인물이었으므로. 순간의 강격에 고농도의 검기를 사용해 때렸으니까. 다른 부하들이라면 제냐의 검기를 깨거나 흐트러뜨리는 일조차 어려웠으리라.


그가 빈틈을 만들었고, 나머지는 팀원들의 몫이다.


“아.”


제냐가 문득 소리를 흘렸다. 히베는 옆으로 빠지면서 그의 표정을 계속 보았는데.

썩 아쉽다거나, 두렵다거나. 비통에 차 있다거나. 그런 얼굴이 아님을 이상하게 여겼다. 제냐의 표정은··· 글쎄. 약간의 짜증과, 조금의 웃음기?


히베는 순간 뛰어난 동체 시력으로 사냥감의 얼굴을 분석했다.


무슨 수가 있는 건가.


그가 양손을 강하게 틀어쥐었고. 예상 외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마음을 먹었다.


쐐애애액.


어느새, 은밀하게 다가온 화살 두 발이 원래 제냐에게 없던 살 길을 만들어주었다. 그건 히베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쾅!


귀따가운 소리와 함께, 뒤에서 제냐를 노리던 두 검사의 검이 밀려났다. 두 명은 그대로 자세의 중심을 잃고 넘어지듯 옆으로 간다.


제냐는 페이트의 움직임만을 주시했고, 이를 악물며 제 몸을 틀어 간신히 창격을 피했다.


아쉬운 일이었다.


히베는 멀리를 처다보았다.


이 근처 거리에서 가장 높은 건물. 호텔Hotel. 대공령의 손님들이 간혹 묵고는 하는 곳.


그 옥상 위에 누군가가 있었다. “······.”


흰 빛의 거대한 활을 든 인물. 그 근처로 다른 작자들도 모습을 나타냈다.


‘다섯입니다.’


히베에게 사냥감의 인적 사항을 전달할 때 부하가 했던 말이었다.


어느새 남은 놈들이 전부 깨어나서, 전장에 합류했다.


히베는 인상을 구겼다.


휘이이이이.


그가 한 번 더 휘파람을 그냥 길게 불었고.


각지에서 제냐를 저격하기 위해서 움직이던 전술사단의 워메이지들은, 멀리 나타난 그의 동료들을 견제하기 위해 공격의 방향을 틀었다.


*

tuesday-temptation-WFe96xvzmI8-unsplash.jpg


작가의말

후딱 씁시다 후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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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233. 쟈섹의 고민 24.03.22 13 1 16쪽
233 232. 달밤의 요란 24.03.20 18 1 14쪽
232 231. 비극, 누군가의 입장 24.03.20 11 1 12쪽
231 230. …아직도? 24.03.20 13 1 12쪽
230 229. 좋은 밤 24.03.19 13 1 16쪽
229 228. 괴물의 위용에 대하야 24.03.19 15 1 13쪽
228 227. 구조하러 온, 괴물 24.03.19 17 1 16쪽
227 226. 대립 24.03.19 14 1 14쪽
226 225. 술사조 조장 24.03.19 12 1 11쪽
» 224. 부부단장, 히베 24.03.18 15 1 24쪽
224 223. 작게 숨을 내뱉었다. 24.03.17 16 1 23쪽
223 222. 누구의 끝, 그 다음 24.03.15 17 1 16쪽
222 221. 누구의 끝 24.03.14 18 1 10쪽
221 220. 두려움이 이빨을 갉아먹다 24.03.14 16 1 19쪽
220 219. 떨어지듯 달리다 24.03.14 13 1 12쪽
219 218. 제냐는 미리 준비했다. 24.03.13 16 1 13쪽
218 217. 다이스Dice, 릿샤, 흑각 24.03.12 16 1 22쪽
217 216. 밤을 꿰뚫어보는 까마귀는 누구일까 24.03.12 23 1 11쪽
216 215. 살수조 모집 24.03.11 17 1 16쪽
215 214. 사냥감 A 24.03.10 18 1 12쪽
214 213. 이미 따라진 와인, 근처로 달려온 골칫덩이 24.03.10 16 1 16쪽
213 212. 조금 시간이…. 24.03.10 15 1 17쪽
212 211. 한 번 불꽃처럼(악의) 24.03.08 15 1 21쪽
211 210. 미치광이는 그네를 거꾸로 탄다. 24.03.07 16 1 21쪽
210 209. 이동移動 24.03.06 14 1 20쪽
209 208. 지루한 옮김, 라이엔의 상념 24.03.05 19 1 21쪽
208 207. 지루한 옮김 24.03.05 17 1 14쪽
207 206. 퍼레이드parade 24.03.04 16 1 19쪽
206 205. 거북이 사냥 24.03.03 19 1 36쪽
205 204. 따스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24.03.01 1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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