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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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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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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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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309. 가쁜 숨을 편히 내쉬며

DUMMY

*


가쁜 숨을 제어했다.


“하아, 하악.”


상반신만 남아서, 원래도 괴물이었지만. 흉측함까지 추가가 된 검은 늑대였다. 놈을 피해서 500여 미터 즈음 전진을 하다가, 적당한 고목 하나를 발견해서 그대로 위로 올라갔다. 놈은 아직도 빨랐다.


‘아직도’ 말이다.


늑대는 이제는 앞 발만 남았다. 두 다리로 거칠게 땅을 헤짚으면서, 엉성한 꼴로 질주를 했다. 제 엉덩이, 등허리의 아랫 부분이 원래 있었던 곳은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스스로 끊어낸 몸뚱아리였다. 제냐의 눈에는, 흰 빛, 혹은 무지갯빛으로 이루어진 입자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모습으로만 보였다. 검은 늑대가 지나가는 길에 마치 먹을 진하게 먹인 붓이 그러하듯, 길고 선명한 흔적이 남았다. 서예를 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피로 이루어진 서예라는 건. 참으로 끔찍한 발상이고 모습이기는 하다. 제냐를 비롯해, 플레이어가 목도하기에는 실로 그러해서. 그냥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고. 제냐가 보기엔 그 피의 흔적이 오래도록 보이지 않아서. 흰 빛의 입자가 늑대의 동선을 따라 짧게 그려졌다가, 증발하듯 사라지는 꼴로만 보인다.

피가 그렇게 빠르게 기화될 리는 없지만. 플레이어적 연출의 허용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나름대로, 공포스럽기도 했다. 상반신만 남은 검은 늑대가 빠르게 자신의 뒤를 쫓는 것은. 놈의 표정은 여전히 흉흉하고, 또 기세가 살아 있었다. 살기 어린 두 눈. 적색의 안광을 빛내면서 으르렁거린다. 아가리를 쩌억 벌렸고, 제냐는 결국 그 하반신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는 별다른 상처를 내지 못했다.


저대로 있어도 검은 늑대가 죽지는 않는다. HP 47만이라는 건 그런 의미였다. 재생력이나 회복력이 없다면 아마 회복이 이루어지진 않겠지만. 혹 긴 시간 이 최심부에서 흑마력을 모으면서 지낸다면 완전재생이 이루어질 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 제냐와의 전투에서 수복이 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데슈칸의 검은 용과 비교해서 더 강한 놈인가, 묻는다면 당연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으리라. 당시보다 제냐의 칼날은 훨씬 날카로워졌다. 단순하게 비스트 슬레이어와 흑색장도 역시 강화가 되었다. 아이템의 강화는 꾸준하게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스탯과 스킬의 숙련도도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고.

단테스 도노반이라는 명장은 더 많은 소재, 더 많은 돈을 보상으로 줄수록 확실하게 아이템을 업그레이드 해내는 인간이었다. 아이템이 본디 갖고 있는 성장 한계치까지가 결국 강화의 한계였지만.


다행히 흑색장도도 깨나 높은 한계치를 갖고 있는 아이템이었다. 레어, 유니크로 분류되는 아이템들이 대개 그러하다. 그리고 그런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는 높은 보상치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높은 보상치는, 거듭 말하듯 고된 전투나 씬Scene을 치러내야만 얻을 수 있다. 씬이라는 건. 모든 플레이어가 전투 클래스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장공인이라거나. 혹은 아주 어려운 협상을 해낸 정치, 외교 클래스의 플레이어라거나.

그런 다양한 특기와 직종의 플레이어들은 한 씬Scene을 지날 때마다 마치 전투가 종료된 것처럼 보상치를 얻게 된다.


보통 전투만으로 얻는 이들은 아주 드물었다. 인간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몬스터만이 존재하는 어느 험준한 필드Field에 들어가서 사냥만을 하는 작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퀘스트를 하고, 다양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여러 군데서 보상치를 얻게 된다. 전투직이라면 전투 상황이 가장 큰 보상치 수급처인 건 부정할 수 없겠으나.


“후.”


콰득!


강렬한 소리와 함께, 선 자리가 흔들렸다. 늑대는 순식간에 제냐가 오른 고목 바로 아래에 닿았다. 늑대의 가슴팍 아래에 깔릴뻔한 때에서. 3, 4초만에 제냐는 속도를 회복했다. 10여 초가 지났을 때는 늑대의 속도와 비교해서 제냐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그러나 늑대 역시 비척거리며 몇 번을 절더니, 나중에는 빠르게 쫓아왔다. 곧.

제냐가 500여 미터를 주파하고 고목에 오르는데 30여 초가 채 걸리지도 않았다. 거의 날아왔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리라. 기력을 한계까지 끌어다가 낭비한 직후인 터라서. 탈력감이 오락가락했다. MP포션의 작용으로 일단 차오르고는 있었는데.


MP고갈의 증상은 초상술사들만이 겪는 게 아니었다. 기력술사들 역시 얼마든지 겪을 수 있다. 다만, 기력술사들은 견고한 MP를 다루며. 그것을 기氣라고 한다. 초상술사들처럼 자신의 의지력 한계보다 더 많은 양을 쏟아부으면서 무리하게 운용하지는 않기에 거의 당할 일이 없기는 하다.

그야말로 극한의 장기전 따위가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제냐는 극한의 장기전을 치른 것이나 크게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다. 늑대의 배때기 속은 지독한 구렁텅이였다. 주변이 철보다 단단하고, 또 세상에서 가장 질긴 고무보다도 훨씬 탄력적이고 유동적인 무엇으로 가득 찬 상황에서. 바닥을 뚫어내며 탈출을 한 직후였다. 검은 늑대의 마력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보호막 스킬이라거나, 여러 군데 낭비를 한 것 역시 영향이 있다.


숨 몇 번 고를 시간이 주어지자 그래도 호흡이 돌아오기는 했다. 검은 늑대는 그런 제냐를 봐주지 않았고. 곧장 따라와서 수십 미터는 될만한 거목의 밑둥을 제 앞발로 걷어찼다. 늑대는 한 발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체력이 깎이면 MP역시 떨어진다. 꼭 정비례를 해서 날아가게 된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었지만. 체력이 줄어들면 사람의 정신력도 한계를 맞이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다.

정신력이 떨어지면, 체력도 서서히 떨어지기도 하고. 궁극적인 관점에서 보면 두 종류의 스탯은 결국 상호보완적이며, 연결되어 있는 구조와 관계였다. 따로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늑대는 자신의 몸의 반신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많은 흑마력을 낭비했으리라. 아까처럼 폭발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곧장 쫓아와서 괴력을 선보이는 것 자체에 많은 기력을 소모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MP 말이다. 늑대가 고목의 위로 튀어 올라와 제냐를 노리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최초의 온전한 상태였다면 쓸데없이 고목을 부술 필요 없이. 그냥 자신이 날아 올라와서 때렸을텐데.


늑대는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듯 굴지만. 역설적으로 지치고 나약해졌음을 증거하고 있었다. 어쨌든. 나무가 박살이 난 건 사실이었다. 늑대의 앞발치기로 거목의 밑둥이 사라져버렸다. 평범한 물리력으로 보기엔 어렵다. 기력술사들이 칼날에 검기를 싣듯이. 검은 늑대 역시 자신의 직접적인 공격에 MP, 곧 기력을 실어서 때리고 있는 것이다. 아래에서 굉음과 함께 목질이 터져나갔다.


제냐는 지진에라도 당한 인간처럼, 펄쩍 뛰었다. 보통 펄쩍 뛴다고 지진을 피할 수 있지는 않다. 다만 제냐는 초인이었다. 대퇴부에 기력이 서렸고. 발목에 힘이 들어갔다. 나무가 기울면서도 받침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 마음을 먹는다면, 허공에서도 한 두 번 고속 방향 전환 정도는 가능할 테였다.

강한 물리력을 발휘할수록 MP는 많이 소모된다. 그리고 ‘근거’없이 어떤 큰 현상을 일으킬수록 기력술사에게는 부담이 되게 마련이다. 이미 움직이고 있는 방향으로 가속도를 더한다거나. 혹은 관성을 제어해서 조금 기이한 움직임을 만든다거나, 하는 정도가 가장 깔끔한 사용법이었는데.


본격적으로 난다거나, 허공의 발판을 만들어낸다거나 하는 건 조금 다른 부류였다. 그건 초상술에 더욱 가까운 방식이었고. ‘기력술’의 운용법으로 그러한 스킬을 구현한다면 MP의 소모가 조금 크다. 초인들은 물리적 상식에 위배되는 현상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작자들이었는데. 그들에게도 부담은 있다는 이야기였다. 물리적 상식을 많이 거스를수록, 그들의 초인적 힘의 근원이 많이 소모된다.

MP말이다.


어쨌든 제냐는 한 번 크게 뛰었다. 거진 날듯이. 비행을 하듯 먼 거리를 뛰었고. 수십 여 미터는 족히 뛰어서 옆에 있는 다른 고목의 나뭇가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따가운 침엽수의 잎사귀들이 그의 몸을 긁었지만.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현실의 김서원이었다면 분명 상처를 입었으리라. 제냐는 아니었다. 강력하게 일구어낸 스탯들이 그의 몸을 괴물에 가까운 강도로 바꾸어주었으니. 나뭇잎사귀 따위에 긁히지는 않는다.


거슬리는 촉감은 있었다. 짙은 암녹색의 나뭇잎들 사이로 뛰어들었고. 적당히 걸리는 나뭇가지 하나를 밟았다. 밟음직한, 마침 두꺼운 가지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비스트 슬레이어를 칼집에 넣었다. 철컥.


"IV."


빠르게 인벤토리의 약어를 읊었다. 눈앞에 곧장 반투명한 창이 켜졌고. 제냐는 왼손에 들고 있던 흑색장도를 인벤토리 창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그 근처의 리스트에서 활을 꺼내들었다. 전통은 이미 날려먹었지만. 그래도 하나가 더 있었다. 중中거리 정도에서. MP의 소모를 억제하면서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화살이 최고였다. 중, 원거리의 전투에서. MP의 여력을 계산하지 않고 마음껏 퍼부을 수 있다면 초상술을 남발하는 게 가장 좋았고.


기력술은 코어Core를 필요로 한다. ‘화살’이라는 물질이 코어였다. 그 위에 기력을 덧씌워 강력한 위력을 추가하는 것이고. 화살이라는 매개가 지나친 MP의 소모를 막아준다. 대신, 그 소재를 낭비하는만큼 돈이 많이 든다.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늘. 당장 검은 늑대를 잡아서 죽이면, 그로부터 나올 아이템이 또 상당한 값어치를 지니게 되리라. 정 재정 상황이 악화되면 레벨업 시 받는 가상점수를 소비해서 환전을 해도 좋았고.

제냐는 보통, 명예점수와 젠Jen, 그리고 스탯 성장속도 가속 중 스탯에 모두 투자하고 있는 중이었다. 젠은 계속해서 반복하는 사냥으로 충당할 수 있었고. 명예점수는 조금 부족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아쉬울 일은 없었다. 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무력이 조금 더 필요하다. 물론 명예점수가 높은 길드원이 있었다면 더 일을 쉽게 해결하기는 했겠지만. 길드원, 플레이어 캐릭터 중에서 명예점수가 아주 높은 이가 있었다면 그리턴 가문을 통해서, 왕실에 보고를 올릴 필요가 없었으리라. 그냥 정당한 명예와 권위를 가지고 왕실에 가서 고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겠지.


그러나 헌터즈 길드원들은, 모두 그런 성격들이 아니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편들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선봉에 서는 무리들. 상황이 벌어지면. 그 상황의 최선두에 서서 자신들이 무언가 역할을 감당해야만 성이 차는 인물들이었고. 짧은 시간 안에 무력과 명성 중에서 한 가지를 골라 키울 수 있다고 한다면. 무력을 모두 고를만한 성격들이었다. 그 성격대로 플레이를 실제로 했고.


어쨌든. 지금은 늑대를 잡아 죽이는 일이 급선무다. 없는 것을 가지고 한탄을 해봐야 소용은 없으리라. 인벤토리에서 장궁과, 전통을 꺼내들었다.

전통이 물체화가 되어 나오자마자, 제냐는 그것에 기력을 실었다. 그리고, 쾅, 하고 나무에 박아넣었다. 나무 몸통에 말이다. 목질은 단단했고, 거목은 오랜 세월 어둠숲에서 자생하며 일말의 MP역시 머금고 있었지만. 제냐는 마스터였다. 굵은 전통이 그대로 나무를 뚫고 박혔다. 화살을 뽑아들기 딱 좋은 각도였다. 45도 정도. 조금 아랫단, 오른쪽에 박아넣은 상황이었고. 제냐는 곧장 몇 개를 뽑아들어 장궁의 시위에 걸었다.


최초에 검은 늑대를 괴롭히던 화살이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늑대 역시 온전한 몸뚱이를 가졌고. 온전한 MP를 발휘하고 있었으니까. 놈의 방어력이 100퍼센트였다는 말이다. 지금은, 시간을 끌기만 하면 천천히 괴사하리라. 검은 늑대는. 가만히 놔두는 것만으로는 죽지 않겠지만. 적절한 데미지를 주면서 상처를 덧나게 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제냐가 놈을 죽음으로 인도할 것이었고.


대충 무더기로 뽑아든 화살이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걸려서, 장궁에 적당히 걸었다. 그래도, 대부분 맞으리라. 제냐는 궁술가로서 달인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초 장궁술1의 경우에는, 레벨 11을 달성하기까지 했다. 쉽지 않은 경지였다. 그만큼 갖은 전투에서 늘 틈틈이, 활을 애용했다는 증거이기도 했고.

활대를 눕혔고, 화살들은 활대 위에 올랐다. 차분하게 명중을 기다린다. 검은 늑대는 눈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놈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제냐가 빠져나가면서 제 MP를 감추었음 역시 효과적이었다. 가만히 숨을 고르면서, 제냐는 저 아래에 있는 검은 늑대를 겨냥했다. 침엽수의 울창한 잎사귀들이 전부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상관은 없었다. 고수 이상의 기력술사가 쏘아내는 화살은, 화살보다는 그냥 미사일에 가까운 물건이었으니까 말이다.


제냐가 화살을 날린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현악기가 연주되듯 시위가 울었고.


허공을 찢으며 화살 넉 대가 날아갔다.


제각기 제냐의 MP가 서려 있다. 백색의 기운이 발출된다. 검은 늑대는 확실히 몸의 여러가지 기능이 떨어져 있고. 감각 역시 민감함이 줄어든 게 틀림 없었다. 허공을 찢으며 날아드는 화살이, 늑대와 제냐 사이의 거리를 절반즈음 가로질렀을 때 눈치를 채고 반응을 했으니까 말이다.

어지간한 권총탄보다도 빠른 화살들이었다. 삽시간에, 수백 여 미터 정도의 거리는 가로지른다. 검은 늑대는 그르렁거리면서 화살들을 노려보았고. 검은 연기를 운용해서 제 앞을 가로막는다. 연기들이 방어막을 형성했다. 파도처럼 움직이는 것들이었다. 기체였으나 아주 진득한 액체처럼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마주하면, 그런 액체보다도 훨씬 강력한 탄성과 강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벽이다.


쾅!


화살들이 검은 벽의 와류에 부딪혔다. 그러면서 폭발을 일으켰고, 일대를 떨어 울렸다. 폭발시矢이다. 버스트 샷. 아마 최태현이 훨씬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기술이리라. 제냐는 태현보다는 세밀함이 조금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보우 마스터이기는 했고. 검은 늑대를 견제할 수단으로 충분하다.


검은 늑대가 만들어낸 연기의 파도에 폭발들이 막혔다. 그러나 제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통에서 화살들을 덜그럭거리며 거칠게 뽑아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활대 위에 올려놓는다. 시위에 걸고, 당긴다.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였다가 뒤로 빼는 특이한 자세였다. 활대를 눕혀놓은 꼴이니 어쩔 수 없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과하게 체중을 실었다가는 그대로 부러질 위험이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등은 거목의 몸통에 기대어 둔다.


퉁, 다시금 화살들이 날아갔다. 제냐는 현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와 비슷한 심정이 되었다. 악보를 따라, 끊임없이 화살을 날려야 하는 처지이다. 악보의 박자는 가쁘다.

실상은 악보도 뭣도 없고. 지휘자도 뭣도 없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 자체가 지휘자라고 할 수 있었다. 검은 늑대의 기력이 간당간당하다. 놈을 계속해서 풀어놓았다가는, 아주 죽지는 않을 테였고. 지금 전투 상황에서 확실하게 목숨줄을 끊어 놓으려면 확실한 끝장을 보아야 하는데.

최초에, 검은 늑대가 온전한 몸뚱이를 가지고 있을 때도 화살을 다량으로 날리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 전력이 있다. 그 화살만으로 검은 늑대의 몸에 치명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으나. 동작을 억제하는 정도의 위력은 충분했다.


검은 늑대는 힘이 줄어들었고. 제냐는 잠깐의 탈력감은 있었으되 전체적으로 봤을 때 기량이 떨어진 부분은 없다. 제냐로서도 속이 타들어가는 상황이다. 잠깐 쉴 틈을 주면 놈은 다시 달려들 테다. 충분하게 쉬고 검은 늑대를 다시금 사냥하는 것 역시 방법이기는 한데. 놈한테도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주었다가는, 지금 곧장 잡는 것보다는 어렵게 될 테다.

제냐가 처음의 화살, 네 발을 쏘아낸 상황에서 이미 그의 위치는 들켰다. 곧장 거목을 부수기 위해 달려들지 못하는 건 제냐의 화살에 실린 기력이 놈의 집중력을 빼앗고 있기 때문이다. 아예 멀어져서 제냐가 풀 컨디션으로 회복을 하고. 천천히 검은 늑대를 잡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지금 당장 끝내는 것보다는 오래 걸리는 일일 테다.


제냐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대공이 당장 무언갈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모든 상황이 타임 어택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놈의 괴랄한 게임의 악명에 대해서는, 제냐 역시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막말로 일국의 대공을 건드렸고. 또 그 대공이 사이코패스이며 인근 지역의 전쟁을 도모하려고 하는 정신나간 새끼인 상황이다. 조금 시간이 늦어지는 것만으로 산슈카 전역이 불길에 휩싸일 수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강해지는 게 중요했고.

검은 늑대는 그런 수행의 경험치에 불과하다. 빠르게 잡고 넘어가야 하는 먹잇감이다.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그 뱃속에 있을 때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기는 했다만. 이미 빠져나온 지금은.

검은 늑대를 얼마나 빠르게, 또 안정적으로 잡을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되었다. 퉁, 퉁, 퉁. 제냐는 급박한 속도로 현악기, 아니 활 시위를 연주하듯 당기고 놓았다. 계속해서 화살이 날아갔다. 전통에 담겨 있는 수십 발이 다하기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제냐의 화살은 하나같이 강력한 기력이 실려 있었고. 검은 늑대가 자신이 만들어낸 검은 안개의 파도로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처음 날린 것까지 포함해 모두가 동력을 잃지 않고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미사일을 중간에 막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뒤에 로켓 추진체가 있어서 계속 밀고 나아가려고 하지 않겠는가. 정반대의 입장이 되었다. 이제는 검은 늑대가 막는 쪽이고. 제냐가 쏘아내며 그 보호막을 깨려고 하는 쪽이었다.


검은 늑대는 머리가 좋았다. 제냐 역시 과감한 결단을 내렸었고. 놈의 몸뚱이 속으로 파고들어서 내부에서 끝장을 내겠다는 건 확실히 좋은 전략이었는데. 검은 늑대가 자신의 반신을 포기하면서까지 제냐를 죽이려고 들줄은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보스 몹에게 배정되어 있는 AI 메모리는 상당한 양이었고. 때로 플레이어들의 계산을 뛰어넘는 행동을 보여주곤 한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그렇고. 가끔은 레벨이 높지 않더라도 기행을 보이는 놈들도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끝이다. 제냐는 그런 생각으로,


“IV."


라고 중얼거렸다. 화살 대수를 세면서 쏘아 날리고 있었다. 마지막 것을 날리자마자 인벤토리 창을 열었고. 내부에 있던 화살 무더기를 꺼내어, 이미 나무의 몸통에 박혀 있는 자리 위쪽에 박아넣었다.

콰직! 소리를 내면서 거목에 구멍이 뚫렸다. 제냐는 딱 닿기 좋게 잘 파고 들어간 전통에서 화살을 뽑아들며, 계속해서 사격을 실시한다.

시간당 데미지나 물리력, 폭발력으로 본다면 기관총을 쏘아대는 것보다 더할 테였다. 화살 하나하나에 실려 있는 파괴력이 만만치 않았으니까.


검은 늑대가 자신의 앞, 허공에 만들어낸 검은 연기의 막 바깥에 화살들이 계속해서 꽂혀가고 있었다. 꽂힌 채로 멈춘 게 아니라 보호막을 계속해서 꿰뚫으려고 애를 쓴다.

검은 늑대의 핏발 선 눈이, 그 광기를 잃을 때까지.

제냐는 계속해서 화살을 쏘아댔다.


*


”아따.“


힘든 싸움이었다.


지겨운 싸움이기도 했다.


제냐는 엉망이 되어 죽어버린 검은 늑대의 시신 앞에 섰다.


”후우우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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