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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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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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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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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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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 평행行

DUMMY

*


“음.”


다가오는 사내를 보며 갈렙 페이브는 눈살을 찌푸렸다.


황무지에서 먼저 거리를 좁혀 오는 나그네를 본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콘란드 대륙에서 진정으로 위험한 건 때로는, 괴물보다는 사람이었다.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는 느낌은 받았다. 근처에 여러 영지가 있으나 멀리 있는 사내와 자신이 달려가는 방향은 정확하게 일치한 곳을 바라본다.

로멜리아 령에 볼 일이 있는 사내라고 한다면 짐작이 가는 바가 없었다.


로멜리아 남작가는 한미한 집안이다.

가문의 종복으로서 입에 올릴 수는 없는 평가였지만. 사실이 그러하다. 전통이 아니었더라면 그다지 내세울 것은 없었고. 일부러 찾아올만한, 호의를 가진 객은 찾기가 아주 어렵다.


이름만이 남은 가난한 가문에 무엇을 얻기 위해 객들이 찾아오겠는가.


그나마 남아 있는 별 것 없는 재산, 영지를 강탈하기 위해 오는 강도들 정도가 그나마 이해할 수 있을만한 손님들이다. 손님이라고 하기엔 입에 가시가 돋힐 정도로 흉악스런 작자들이기는 했지만.


최근에 가문을 노렸던 적들에 관해서는 갈렙 페이브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용龍을 타고 움직일만한 사내에 대해서는 도무지 아는 바가 없었다.


로멜리아 가문같은 변방의, 작은 영주를 노리는 이들이라면. 그들조차도 그리 대단한 신분은 아닐 경우가 대부분이다. 용병을 고용했다고 하더라도. 능숙하게 저런 괴물을 탈 것으로 부리는 자라면 상당한 실력자임에 분명하다. 가문의 기사보다도 뛰어난 이를 돈으로 부리기가 쉽겠는가.


로멜리아 가문을 치기 위해서 그런 대단한 실력자를 돈으로 고용한다면. 돈을 얻기 위해서 큰 돈을 쓰는 일이나 마찬가지일 테였다.

혹은 로멜리아를 노리는 악의의 본체가 움직였다거나.


세르게이 알사드 대공. 프린스Prince 알사드에 대한 인지는 갈렙 역시 하고 있었다. 세슈칸, 사르삿, 그리고 데슈칸 산맥을 오갔던 여러 여정 중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으니까 말이다. 사대고가라는 이름으로 묶여있기는 했지만. 알사드 가문과 로멜리아 가문이 처한 처지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인격에 대해서도.


게으른 대공이라고 불리는 기인奇人과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어본 적이 없었다. 가문과의 교류도 없었고. 전통에 의해 엮여 있지만 아예 상관이 없는 작자라고 하는 것이 정확했는데. 그에 대한 소문들은, 깊이 파고들어가보면 그리 좋은 것만 나오지는 않았다.


속모를 괴인이라는 건. 좋게 생각하면 호인일 수도 있겠지만. 아차하고 수가 틀리면 악인이 됨직한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운트 작힘 백작의 최후에 대하여 대공이 베풀었던 후의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대놓고 로멜리아 가문을 적대하며 말살하려 했던 이에게 선처가 가해지도록 힘을 쓴 것이 그였으니까. 산슈카에서 흔하게 알 수 있는 정치적 파벌의 이해관계와도 전혀 상관이 없이 말이다.


대공이 운트 작힘 백작이 움직이도록 사주를 한 인물이라고 한다면. 그만한 권력가이자 재력가라면 대단한 실력의 최상급 용병을 고용하는 것도 말은 되리라.

시국時局은 흉흉했고,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국난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대공이라는 소식 또한, 그리턴 가를 통해서 듣고 오는 길이었다.


그리턴 가문은 로멜리아 가문이 사건의 중심부에서 빠져나온 이후로도 계속해서 닿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냐 킴’과, 그 일행들과 말이다.


어쨌거나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이들의 안위를 어지럽히는 악의적 의도의 미치광이는 존재를 했고. 그에 대해서 그들은 계속 파고들었다. 이따금씩 건너건너, 소식을 전해듣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여러 방면에서 얻은 정보들을 토대로. 현왕現王 벨케임 7세 또한 용단을 내리고 곧바로 움직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제냐 킴 일행의 이야기와 현 시국에 관한 설명은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네들이 대공의 근처를 맴돌면서 얻어낸 정보 또한 국왕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했으니.


그리턴은 국난의 때를 선포했고. 수도부部에 있는 요드먼 백 대장군은 여러가지 절차를 건너뛰고 곧장 대공령을 향해 군사를 일으켰다.

사르삿의 현황에 대해 실시간으로 전해 들은 건 아니었지만 요란스런 사고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로멜리아 가문 또한 갈 바를 정해야 하기는 했다.


가문을 위한 선택이라면, 그렇잖아도 적은 군사는 모조리 영지에 틀어박혀 들끓는 승냥이들을 피하는 게 나을 테지만.


결국 어찌해야 할까, 는 로멜리아 현 남작에게 달린 일이니. 그는 소식과 정보를 전해주고. 그 결정에 따를 뿐이다.


그러기 위해 가고 있는, 중요한 여정의 마무리였다.


갈렙 페이브는 자신에게 접근하고 있는 황야의 주룡을 바라보았다.


대놓고 들이받으려 오고 있지는 않았지만, 서로 큰 각으로 각자의 길을 가던 것이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와서, 나란히 가려는 듯 굴고 있었다.


주룡의 모양새는 요란스럽고, 위협적이다. 그 위에 타고 있는 사내의 생김새까지 말이다. 자신이 타고 있는 건 적마였고, 붉은 터럭을 지닌 짐승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사납다. 그 각력에 차이면 맹수라고 할지라도 절명을 한다. 적마 역시 야생에 있는 것을 따지자면 결국 몬스터였으므로. 어지간한 괴물까지도 말이다.


산슈카에 서식하는 적마들 중에서 가장 강하고 위험한 종류를 테이밍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타고 빠르게 달리는 용도로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런 적마 역시 주룡에 비하면 한결 색이 바래는 것이 사실이었다. 탈 것은 기승자의 위엄을 표현하기도 한다. 용에 타고 있는 기사가 있다고 한다면. 어지간한 빈 수레가 아니라면, 상당한 능력을 지닌 강자라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런 생각이었다.


최악의 수를 상정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주룡에 타고 있는 금발의 건장한 사내가 아주 강대한 기사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물론 상대가 강하다는 것만으로도 최악의 상황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적의가 있는가, 없는가. 그게 더 중요할 것이다.


수백 여 미터 정도 거리, 까지 다가오자 갈렙 페이브는 상대의 얼굴과 표정에 대해서 자세히 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기력술사들은 늘 자신의 신체 여러 기관에 대한 강화술을 펼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기본적으로 시력이 좋기도 하고. 또한 눈에 MP를 집중시켜 더욱 안력을 돋우기도 한 덕분이다.


상대의 표정은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만일 활짝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고 한다면, 갈렙은 상대에 대해서 더욱 의심을 품기는 했으리라.

아무 이유도, 면식도, 이력도 없이 웃고 있는 사내라는 게 얼마나 위험스러워 보이겠는가. 황무지에서 살아남고자 할 때. 이유없는 호의를 베푸는 자를 만난다면 일단 경계를 하는 것이 나았다.


거기에 먼저 칼을 뽑아들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미치광이처럼 웃으며 다가온다고 한다면. 정신적으로던, 물리적으로던 상당히 위험한 인간일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이코의 한 부류이거나. 혹은 자신의 경지를 역으로 파악하고. 스스로는 절대 위험하지 않다고 확신하는 강자일 테였다.


갈렙 페이브는 다가오고 있는 사내를 빤히 바라보면서, 서서히 적마의 속도를 늦추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확연하게 저 멀리서 거리를 좁히고 있는 상대였다. 다른 방향으로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따라올 가능성이 높았다. 달리 피할 데가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낫다. 적마에 비해 주룡은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탈 것이고. 상대의 경우. 자신이 타고 있는 적마보다 더 빠르고 강해보이기까지 했다.


터그덕,


하는 말발굽 소리를 갈렙 페이브는 들었다.


계속해서 질주를 하던 와중에 말발굽의 템포를 바꾼 시점이었다. 적마는 갈렙의 인도에 따라 능숙하게 페이스를 조절했고. 서서히 늦춰 나가며 멈추기 위한 준비를 했다.


*


“여보시오.”


갈릭갈릭 한은 이 게임이 더럽게 어려운 종류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 말하면서 말이다.


자신의 인상이 상대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고민하면서 이야기를 해야 했다.


이 게임의 AI는 실제 인간과 같다.

아니,

절대적으로 말해 인간과 같은 AI를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사람의 감각을 완벽에 가깝게 속일 수는 있었다. 사람은 불완전하니까.


사람이 한 번에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양의 대화, 반응용의 데이터를 NPC AI 한 개체가 품고 있고. 상황에 맞춰 완벽히 적절한 수준으로 구사를 한다면. 그건 사람이나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진지하게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 게임은, 사회성에 문제가 있는 이들을 위한 심리, 정신 치료 용도의 프로그램으로 쓰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갈릭갈릭은 NPC들을 대하는 게 조금 어색스러웠다. 그 자신에게 있는 쑥스러움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을만큼 먹고, 일자리를 갖고 일을 하고 있음에도 변하지 않는 부분이었다. 모난 부분은, 천천히 다듬어 깎아 나가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제법 많은 세월 다듬어왔다고 생각하는데도.


이따금씩 그런 부분은 현실에서 고객을 대할 때나. 커뮤니케이션의 디테일이 중요한 퀘스트를 해결할 때. NPC의 앞에서 고민이 되고는 했다.


많은 생각을 하다보면 말이던 행동이던, 멍청하게 나가게 된다. 지나친 생각은 사람을 늘 어눌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


상대는 영 달갑잖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의심하는 얼굴이다. 그런 얼굴을 하는 사람의 곁에 다가가는 건 많이 힘든 일이다. 누구라고 해도 말이다.

사내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다.


멈춘 말.


크르르르릉.


적마赤馬는 초식 동물인 주제에, 자신이 맹수라도 된 양 그르렁거리고 있었다. 고양이과의 짐승이 낼만한 소리가 아닌가.


붉은 털을 가진 짐승이 운다.


붉은 말은 말없는 주인의 심정을 대변하는가.


사내는 갑자기 다가온 사내를 향해서, 여전히 인상은 풀지 않은채로 일단 물었다.


“···반갑소. 그래서, 누구시오?”


갈렙 페이브. 적마를 타고 돌아오고 있던 사내. 로멜리아 령을 향하던 이는 다가온 자의 신원을 확인한다.


고아한 적막함.

높고 한적한, 하늘 아래 땡볕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고. 두 거친 짐승의 숨소리가 차량의 모터 엔진음마냥 으르렁거리며. 대놓고 서로를 적대하지는 않으나 소리없는 눈빛으로 몇 번 칼부림을 일으킨 두 사내가 있었다.

로멜리아의 영지를 그리 멀리 두지 않은 황무지에 말이다.


자신의 본령本領, 본가를 근처에 두고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멈춰서 낯선 이의 속내를 알아보아야 했다.

적이 된다면 영지에 들어가기 전에 죽이는 것이 나았다.

아군이 될 자라면 더할 나위없이 반가운 일이겠으나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다.


말言과 칼刀을 맞대었는데 죽는 건 갈렙이 될 수도 있었지만. 충신이라면 위험한 적을 영領 내에 들이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갈렙.

말총머리로 금빛이 옅게 도는 검은 머리를 뒤로 묶은 사내의 물음에, 반대편에 선 인간은 또 한참 고민을 했다.


갈릭갈릭 한이라는, 실소가 나오는 농담처럼 이름을 지어버린 사람은 말이다.


말했듯 갈릭 한은 자신의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하고.

어떤 단어가 가장 좋은 타개책이 될 지 고민을 한다. 자주 있는 일이다. 인간은 어렵다. 사내는 그렇다.


‘음···.’


갈릭 한의 고민이었다. 그는 단어를 뱉는다. 가장 좋은 것으로.


“싸우러 오지도 않았고. 죽이러 오지도 않았소. 당신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던. 아마 이것보다는 못할 테지.”


위이잉.


하는,


소리가 났다.


재빠르게 돌아가는 날, 날개翼, 바퀴살, 뭐 그런 것이 공기를 예리하게 갈라대는 듯한 소음이었다.


소리는 묵직하다. 경박한 의성어로는 담기 어려울만치 말이다.

콘란드 대륙은 여태껏 없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다. 판타지라는 걸, 가장 명확한 오五감적 체현으로 보여준다.


갈릭 한은 말을 하면서, 이게 좋겠다, 싶어 품 속에서 작은 날 하나를 꺼내어 든 참이었다.


자신이 뱉은 말의 말미에는, 그 손바닥만한 나이프Knife에 의기意氣를 실어 내비쳤다.


그는 마스터Master다.

플레이어 레벨 100을 의미하는 말이었고.

NPC들의 기준으로는 경지에 이른 기능력자를 이른다.


의지를 비추자 과도로도 쓰일법한 작은 칼에 색채 선명한 검기가 눈에 잡히게끔 뚜렷이, 서렸다.


약간의 갈색빛, 이 돌았다. 검기에는.


마스터 이전의 칼잡이들도 검기를 쓸 수 있기는 하다. 어지간한 기능력자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분명 한 분야의 주인장Master이라는 칭호가 붙을만한 인간의 기예는 보기에도 그 끝단이 다르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서예가가 와서 그어도 잘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깔끔한 외곽선이 증거다. 흔들림 없이 균일한 기력의 분포와.


갈렙은 칼의 주인이라고 어디가서 자처할만한 실력은 못 된다. 그 역시 검술 계열의 스킬을, NPC라 볼 수는 없지만 수치로 따진다면 달인과 같은 레벨까지 익힌 몸이기는 했다.

허나 기력술사로서 완성적 단계에 닿는 건. 그와 또다른 위대한 성과임이 분명하다. 적어도 그는 그런 실력자를 알아볼만한 실력은 되었다.


콘란드Konland의 세계. NPC의 입장에서. 현실에서의 싸움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마스터와 싸운다는 건 이미 몇 수 정도를 지고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갈렙은 일단 상대가 정신적으로 이상하거나. 혹은 물리적으로 절대적인 자신이 있거나, 의 경우 중 적어도 후자를 만족시킨다는 걸 알았다.


갈렙을 상대하고 있는 맞은 편의 남자, 갈릭갈릭 한은 NPC의 표정을 보고 그의 사정을 짐작했다.

마스터 급의 검기를 보여주었는데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다면 그에 견주거나, 더 나은 실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상황이 참 쉽지 않게 되는 셈이었는데.


다행히, NPC는 변방의 국가, 산슈카의 평균적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솜씨의 기력술사였던 모양이다.

검기를 보여준 건 자신의 정보를 솔직하게 일러준다는 속셈이었다. 언제나 가장 두려운 건 ‘모르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최악의 경우라 할지라도 그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다면. 차라리 인간은 공포가 가실 것이다. 대부분은.


“···뭐. 그렇소.

······로멜리아Romellia 영지로 가는 길이시오?

······.

영지에 해를 끼칠 생각은 없소. 말로 뭐가 증명이 되겠냐만은···.

나도 일단 영지에 볼 일이 있어 묻는 거요.”


갈릭갈릭 한은 갈렙의 얼굴을, 아니 그의 입장에선 이름도 뭣도 모르는 NPC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이 게임이 가장 어려운 점은 현실의 인간을 고증해서 표현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여러 번 말하듯이. 그리고 인간이라는 건. 자유의지가 있어, 간단한 생각으로 억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힘의 강약과는 상관도 없이 말이다. 약자라 할지라도 뜻이 곧고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걸 온전하게 잡아내는 건 극히 어렵거나, 혹은 불가능하다. 차라리 누군가를 죽일 수는 있어도 말이다.


이곳의 NPC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 게임이 이처럼 쓸데없이 불편하고, 귀찮고, 지독하게 어려울 때가 많고. 번거로운 건.

현실에서도 삶과 세상, 인간과 감정을 그렇게 다루어야만 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시대가 지나고 기술이 발전하고. 삶의 겉면이 풍요로움으로 덧칠될수록 인간은 멍청하게, 진정한 가치들을 쉽게 잊어버리니까 말이다.


요즘 애들일수록 영 사상이 불건전하고 버릇이 좋지 않을 확률이 높다,


라는 뻔한 이야기였다.


“······맞소.”


갈렙은 순순히 인정을 한다.


갈릭 한은 어느새 순식간에 손목을 움직여, 빼들었던 나이프를 다시 품에 감춘 뒤였다. 갈렙은 눈앞에서 보고 있었으면서도. 그가 언제 칼을 넣었는지 알지도 못했다.

뛰어난 검사劍士는 심리전에도 능하다. 마술 따위에나 쓰일 법한 노하우, 제스쳐들이었다. 상대의 시야를 빼앗는 와중에 자연스레 몸의 다른 부위를 움직여 자세를 바꾼다거나 하는 건. 뛰어난 운동 선수, 그것도 인간을 상대해야 하는 부류의 경기 선수라면 아마 이해할 테였다.


몸의 이런저런 부위를 분리해서, 상대가 자신의 다음 움직임을 예측하지 못하도록 구는 것이 단단히 습관으로 배어있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 부류의 선수들에게. 검술가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시합의 승점 대신 목숨을 거는 게, 이 중세 시대 배경의 세계에서는 유일한 차이였고.


“영지로 향하는 적마의 기수騎手라고 한다면···. 영지의 기사일 확률이 높겠군.

······.

나는 사르삿에서 활동하던 금강 급의 용병, 갈릭갈릭 한이라고 하오.

지금 산슈카 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고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많소. 변방의 영지라고는 하지만···. 내 직관이나 경험에 따르자면··· 그런 곳에서 이따금씩 중요한 일이 벌어지거나 정보가 오가기도 한다고 생각하오.

······왕도 사르삿에서 사달이 난 걸 피해 아예 국외로 갈까 하다가······”


갈릭갈릭 한은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이 게임에서 가장 번거롭고 까다로운 부분이 이런 것이었다.

퀘스트는 비현실적인 정보를 플레이어들에게 줄 때가 있다. 마치 신의 계시인마냥 말이다. 그건 논리를 벗어난 인도引導였고, 결국 게임의 개발사가 정한 시나리오를 진행시키기 위함이었다.

플레이어들은 게임 바깥의 사정을 아니 그런 인도를 이해하지만. NPC들은 다르다. 플레이어들은 퀘스트를 풀어나가기 위해서, 늘 그럴싸한 말들을 자아내서 NPC들의 이해와 공감을 사야만 했다.

롤 플레잉Role-Playing 게임의 진수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들한텐 가끔 고역이다. 갈릭 한도 그러했고.


그래도 간신히 게임 내의 정보나 상식 중에서 쓸만한 단어를, 찾아 변명으로 댈 수 있었다.

로멜리아 가문은 지방에 있는 한미한 가문이지만, 엄연히 사대고가의 일각이었고. 전통과 역사를 중시하는 이 고국古國에서 특별한 위치를 갖고 있다. 실제로 그렇게 여기거나 대우하는 자들은 NPC건 플레이어건 별로 없다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지금의 상황에선.


“······마침 변방에 있는 사대고가. 로멜리아 가문이 있는 걸 알아서 안전한 곳에서 조금 소식을 들어보려던 참이오.

······. 맨입으로 정보를 달라는 건 아니고··· 만일 도움이나 일손이 필요하다면 금강급 용병으로서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으니 혹 아는 바가 있다면 알려줄 수 있겠소?”


갈릭 한은 강자임에도 공손하게 굴었고. 그 점이 갈렙 페이브의 의심 한 켠을 약간이나마 누그러뜨리는 부분이 되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을 영지에 데려가는 건 충신으로서 가장 하지 못할 짓이기는 하다.

그러나 가문은 늘 위기를 맞이해 왔고. 지금 역시 녹록한 상황은 아니었다.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도움이 될만한 손길이라면 붙드는 게 맞는 걸지도 모른다.


아무런 리스크도 지지 않고 올바른 선택만을 하고 싶기는 했지만. 현실이 그렇게 지어져 있지 않다는 걸, NPC인 갈렙 페이브는 인격 데이터의 심금 부위에 새기고 있는 인물이었다.


“······.”


갈렙은 완전히 풀지는 않은 표정을, 천천히 끄덕이면서 이내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만한 마음이 되었고.


두 사람은 그렇게 황무지에서 만나 나란히 달리기 시작하며, 서로의 사정에 대해 말하고 영지를 향했다.


*

bence-boros-0EbjEKZP8-4-unsplash.jpg


작가의말

나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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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 356. 교점 24.06.29 6 1 19쪽
356 355. 좌담의 결론 24.06.28 7 1 25쪽
355 354. 좌담坐談 24.06.26 9 1 11쪽
354 353. 간신히 24.06.26 8 1 25쪽
353 352. 기둥들은 하늘로 오르고 24.06.23 14 1 23쪽
352 351. 주룡走龍 24.06.19 13 1 15쪽
351 350. 상황 24.06.19 14 1 18쪽
350 349. 합류 24.06.18 14 1 22쪽
349 348. 재로그인 24.06.09 13 1 15쪽
348 347. 고심 24.06.09 10 1 13쪽
347 346. 왕도의 사정 24.06.06 13 1 11쪽
346 345. 왕도王都, 아침 24.06.06 8 1 11쪽
345 344. 마늘에 미치다 24.06.06 13 1 18쪽
344 343. 잠깐, 잠 24.06.06 8 1 13쪽
343 342. 로멜리아는 24.06.06 9 1 17쪽
342 341. 제어기지 24.06.06 9 1 13쪽
341 340. 광기어린 웃음을 지었다. 24.06.03 11 1 20쪽
340 339. 요드먼. 돌격 24.06.03 11 1 17쪽
339 338. 말리 24.06.03 11 1 12쪽
338 337. 쉴더Shielder 24.06.02 10 1 12쪽
337 336. 폭격 세례 24.06.01 14 1 14쪽
336 335. 전장의 한복판, 제냐 24.06.01 9 1 16쪽
335 334. 아무도 없었다. 24.06.01 9 1 12쪽
334 333. 제어 기지 24.06.01 9 1 11쪽
333 332. 집중 24.05.31 7 1 12쪽
332 331. 무수한 게임 오버Game Over 24.05.31 9 1 15쪽
331 330. 착탄 24.05.30 12 1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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