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게임

새글

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6.30 02:56
연재수 :
358 회
조회수 :
9,040
추천수 :
771
글자수 :
3,405,694

작성
24.06.28 03:38
조회
5
추천
1
글자
25쪽

355. 좌담의 결론

DUMMY

“그래도 뭐, 가야 할겁니다.”


제냐는 덤덤하게 이야기를 했다. 오후의 햇살. 나무 그늘 아래. 좌담회를 나누고 있는 다섯 명의 개성 넘치는 사람들. 많은 것을 빼놓고 본다면 그냥 평화로운 일상의 이야기처럼도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


릿샤는 입을 다물고 제냐를 처다본다. 그녀 역시 조금 풀이 죽은 기색이었는데. 기분이 안좋은 것은 아닐 테였고. 게임 내에서 지나치게 집중력을 소모한 탓에 나오는 자연스런 표정이었다. 피곤하다는 얼굴이다.


제냐는 덤덤하게 이야기를 했다.


“가지 않는다고 산슈카가 멸망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얽혀든 사태라. 가야만 해요. 도망칠 거라면 아예···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는 게 나을걸요.”

“다른 대륙까지.”


콘란드 대륙은 하나의 거대한 초超대륙으로 이루어져 있는 땅덩어리다. 대륙 내에 내해內海라고 부를만한 것이 여러 개 형성되어 있기도 하고. 수원이 부족한 땅은 아니었으나. 어쨌거나 기본적으로. 현실의 지구를 상상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환경이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누구도 그런 땅에서 살아본 적은 없으니. 유라시아 대륙의 심부에 살고 있는 민족이라면 뭐, 흡사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어쨌건 ‘다른 대륙’이라는 건. 중부 대륙이 아닌 동서남북 다른 지방의 대륙을 의미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한 개의 대륙이지만. 각 문화권, 역사권, 국가의 권역이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어 동서남북과 중앙부의 대륙으로 구분해서 말을 하곤 한다.


가로막고 있는 것은 단지 거리에 불과하고. 수천 키로미터에 달하는 길목이 그 사이에 있기에 각 대륙 사이의 전쟁은 기나긴 콘란드 대륙의 역사 속에서도 그리 많이 시도되지 않은 것이었다.


아,


온전한 거리 때문에 사람들의 교통과 왕래가 막혀있는 것만은 아니기는 했다. 콘란드 대륙의 사정은 현실과는 달리. 몬스터Monster가 존재를 하고, 초상 스킬이라는 게 버젓이 드러나는 세계였으니까.


사람들이 문화권으로 만들어둔 지역을 넘어 이동한다는 건, 현실에서의 일보다 조금 더 어려운 난이도의 일이 될지 모르겠다.


아무튼 다른 대륙으로 간다는 건. ‘다른 세상’으로 간다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런 고로.

평범한, 일반인에게는 거의 그 정도의 규모일 테였다. 물론 헌터즈 길드원들 정도 되는 고강한 초능력자들에게는 일반적인 여행이 되겠지만은.


“예 뭐···. 아예 손을 놓을 거면 그렇게 하는 게 나을 거에요.

어차피 이건 연계 퀘스트인데다가 지역간間 급이 확실하고···. 일이 잘 무마되어서 아무렇지 않게 덮힌다면 모르겠지만.

조금 엇나가고 빌런Villain이 승기를 잡으면···. 지나치면 중부 대륙 전체를 초토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아이고야.


그렇게 말을 하면서 라이엔은 이마를 짚었다. 제법 귀여운 제스쳐였다. 그녀 역시 아주 미인은 아니었지만. 제법 귀여운 상이다. 미인이라고 말을 하자면 못할 것도 아니었고.


호아킨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사람들의 기분은 대체로 착 가라앉아 있었다. 따스한 오후의 햇살과는 대비되는 이야기의 분위기였지만 어쩔 수 없다.


“하하하.”


이야기를 나누던 릿샤가 웃었다. 허망한 웃음이었다.


“그래 뭐···. 어차피 짐작은 계속 하던 거지만. 그렇단 말이지. 중부 대륙 전체라···.”

“예. 중부대륙 역사가 바뀌면 또 어차피 콘란드 대륙 전체의 역사랑 퀘스트의 줄기도 바뀔 거고···. 나아가서 대륙급, 메인 퀘스트급 시나리오에도 영향을 주겠죠.

······음.”


제냐 킴은 수염이 조금 나고 있는 턱매를 쓰다듬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게임에서 수염이 얼마나 빠르게 자랄지, 는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놀랍게도 말이다.


초기에 계정 등록을 하고 캐릭터를 만들 때 설정할 수 있는 점이었지만. 제냐는 세부 설정을 귀찮아서 거의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으로 정해져 있었다. 이따금씩 수염을 밀지 않으면 조금씩 난다.

드물게 수염이 자라는 정도가 일반적인 수준이었다. 어지간해서는 게임 내의 모습이 플레이어의 현실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도록 만드는 게 이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의 의도였기에 말이다.

지나치게 현실과 같은 그래픽과 온갖 감각 체현 기술을 구사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배려가 없다면 사람들은 게임 내의 자신의 모습과 바깥의 모습 사이의 이질감을 지나치게 크게 느낄 수도 있었다.


최대한 정신적인 부분에서 잔상이 남지 않도록 하고는 있었지만. 혹시 모르기에 시스템 적으로 정해져 있는 다양한 디테일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지금 우리가 깨고 있는 이 퀘스트의 줄기가, 전 콘란드 대륙적으로 보더라도 상당히 선도적인 위치에 있다고 봅니다.”

“흠.”


호아킨이 소리를 냈다. 집중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최태현 역시 대단한 말을 하고 있지 않지만 나름대로 잘 듣고 있었다.

어차피 게임 시스템에 대한 말들을 지껄여봤자 잘 들어가지도 않을 테였다. 지금의 그는 임시 AI가 관장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냥 흘러가듯 사라지는 정보들이겠지.


“우리가 랭커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어차피 콘란드 대륙이 하나이듯 퀘스의 줄기, 흐름도 하나로 엮여가게 마련일 거고···.

게임의 시스템적으로 ‘중심’이라고 여겨질만한 퀘스트를 깨느냐, 마느냐가 이제 우리의 선택입니다.

뭐 꼭 비련시를 1등으로 클리어 하고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니까 어떻게 되도 상관은 없긴 하지만···.”


킁.


제냐는 코를 먹었다. 중요한 말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괜히 부담스러워서 말이다.


“굳이 고르라면···. 저는 클리어하고 싶네요. 어차피···. 할 것도 없고.

게임이니까. 한 번 갈 데까지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고요.”


제냐의 말에 릿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 역시 공감한다는 의미였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 행위였다. 이렇게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는 말이다.


다시 한 번 다잡는다는 건, 이전에는 이미 결론을 한 번 내렸던 부분이라는 말도 된다.


헌터즈 길드는 게임을 바라보는 시각이 같기에 모여서 함께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게임은 게임일 뿐이다. 현실도 아니고.

그 말은, 이게 아주 어려운 난이도를 자랑하고. 또 한 번 게임 오버를 당하면 그대로 탈락하고 마는 게임이라지만. 어차피 즐거움을 위해 하는 것이었으므로. 까짓 게임 오버, 당하면 당하고 말지, 라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애초에 즐거움을 위해 모인 것이었고.

그네들은 모두 현실의 삶이 있었다.

도전이라는 건 또 끝없이 달려가볼 때 의의가 있는 것이었고.

게임 속이라고 한다면 더 많은 조건들을 따지지 않고. 간단하게 생각해서 결정을 내려도 좋다는 의미가 된다.


“죽느냐 마느냐. To be or Not to be."

"오호.”


릿샤는 문학에도 나름대로의 취미가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정도는 교양으로 읽어둘만한 것이기도 하다. 어떤 분야를 파고드는 천재는 이따금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분야에서도 자신의 전공과의 연관성을 발견해낸다.

다양한 분야에 깊은 조예를 가지는 천재들이 종종 있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이라는 건. 셰익스피어가 쓴 가장 유명한 대사 중 하나일 테였다.


제냐는 허허, 거리면서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조금의 장난기도 서린 모습이었다. 릿샤는 그동안 제법 많은 시간 제냐 킴, 이라는 인물을 지켜보면서. 우울증이라도 걸린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종종 하고는 했다. 말수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고.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 한다 해도 그러기 어려운 게 사람인데.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어울리면서 자신의 현실의 삶과 신변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도 않고.


또 잘 웃지도 않았으며. 주로 보는 표정은 무표정한데다가,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지만 어딘가 슬퍼 보이는 기색을 늘 비추는 놈이었으므로 말이다.


그런 모습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드물었다. 제냐가 보이는 장난기 어린 표정은 자주 보여주는 건 아니었다.


“게임 오버냐, 아니냐가 뭐 다들 문제라고는 하지만···. 그리 크게 미련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여긴 다들.”


허허허.


호아킨이 제냐의 말에 웃음을 지었다. 과격한 말일 수 있겠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미련이 있는 것처럼 플레이를 해오지는 않았다.

언제 떨어져나가도 괜찮은 것처럼 굴었고, 그런 길을 걸었고. 그렇기에 즐거웠다. 그게 현실이다.


“그렇기는 하지.”

“지금 이대로 대공령으로 쳐들어간다라···.”


최태현이 말을 얹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개멋진나 최가. 태현은 바깥에서 일을 보고 있다.

제냐는 사람들의 표정을 둘러본다. 그다지, 심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역시나 말이다.

게임에서 끝난다고 해서 인생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저 가지고 있던 취미 하나가 끝날 뿐이지.


“일단 분위기에 휩쓸리듯···. 대공령으로 가죠. 뭐 얼마나 거기서 활약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만큼은 해봐야겠죠. 일단 저는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당연히 강요는 아니고.”


제냐의 말에, 다른 이들도 이견은 별로 없었다. 릿샤가 툭툭, 옷자락을 털면서 나무 그늘 아래서 일어섰다. 그녀는 키가 그리 크지 않았다. 갑자기 서더라도 위압감이 있거나 하지는 않다. 그러나 작은 체구와는 상관없는 카리스마라는 게 사람한테는 있다. 릿샤는 언제나 당찬 인물이다. 제냐 킴. 그러니까, 김서원은 그녀를 보면서 그렇게 느낀다.


자신도 저런 면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하기도 한다. 서원은.

그가 느끼기에 릿샤 애드윈, 바르샤 애드윈은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이고 있는 인물이니까. 나이도 그리 많이 차이가 나지 않고. 고작해야 20대에 불과한 인물이지만 그녀는 천재였고. 기초 과학 계열의 연구소에서 일을 하고 어린 나이임에도 발언권에 힘이 실리는 편이었다.

나이를 뛰어넘는 성취는 언제나 쉽지 않다. 1년을 앞질러 가는 것도, 사실은 말이다. 그러나 남들이 아주 오랜 기간 노력해서 할만한 일을 월등한 속도로 해내는 사람은 사실 자주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릿샤 애드윈은 분명 천재의 한 종류이리라. 지적이며, 망설임이 늘 적다. 자신감에 찬 듯한 언변도 매력적이고.

제냐 킴, 김서원은 반면 바깥에서 그리 대단한 성취를 보인 적이 없었다.


중앙대는 나름대로 명문 대학교이기도 하고, 공부를 하는 것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을 한 적은 없다. 대학교에 들어온 이후로도 전공 공부는 꾸준하게 해왔고.

그러나 자신의 삶에 관해서 서술을 해보라고 한다면. 김서원의 인생은 망설임 투성이의 그것이다. 스스로의 가장 큰 트라우마를 적으라고 해도. 마땅히 도전하지 못한 순간들이 떠오를지 모른다.


김서원은 이룬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보잘 것 없고. 늘 머뭇거리고. 망설이고. 우둔하게 굴고 있다. 앞으로 벌써 걸어 나갔어야 했는데. 아직까지 제자리를 걷고 있는 것 같아서. 인생에 대해 말을 하자면 항상 입을 다물게 되는 것이 그였다.


릿샤만이 그런 건 아니었고. 뭐, 같이 지내고 있는 길드원들을 보자면 모두들 배울 점들이 많은 사람이었다. 제냐는 그리 생각을 한다.


그리고 우울증에 걸린 것처럼 늘 구는 청년이, 호쾌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하자 반대로 사람들은 그를 따르게 된다.

어쩌면 측정할 수 없는 정신적인 강함 같은 것이 있고, 또 그걸 느낄지도 모른다.


항상 우울한 면상을 하고 있는 인간은 그 속에 슬픔이나 정신적인 나약함, 트라우마, 구덩이가 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간이 웃을 수 있다면. 반대로 그 구덩이를 뛰어 넘을만한 튼튼한 마음이 있다는 뜻이니까.

어찌보면, 제냐 킴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잘 떠올리지도 못하는 점이지만. 나름대로의 장점이나 카리스마가 있어서. 그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여러 사람들이 그를 잘 따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헌터즈 길드는 잘 어울리는 팀이었다. 팀 워크가 잘 맞는다.


그 팀 워크를 잘 살려 도전한다면. 뭐 이번에도 어떻게 잘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쟁 중에서 몇 명이 게임 오버를 당한다거나. 혹은 전부가 목숨이 날아갈 지도 모르지만.


제냐로서는, 일부만 게임 오버를 당하는 것이 차라리 더 최악인 경우였다.


애초에 솔로 플레이를 염두에 두고 시작했던 게임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함께 하는 게임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재미있는 건. 좋은 사람들. 그러니까-

친구들과 함께 즐길 때 가장 재미있는 법이었다.

협력 게임을 헤쳐나가면서, 동료를 잃어버린다면 차라리 할 의미가 사라지는 걸지도 모른다.


어설프게 몇 명만 게임 오버를 당하는 것보다는. 그냥 길드가 통째로 날아가버리는 것이, 차라리 후련하고 훨씬 더 즐거운 마무리일지 모른다. 분명 그럴 것이다.


“뭐, 강요를 한다고 따를 사람들은 아니지.”


라이엔이 말했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마음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개성적인 인물들이었다. 제냐는 그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최태현 역시 올곧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나무의 잎사귀. 바람이 불고 평야의 풀들이 눕는다.


그리 머지 않은 곳에는 전쟁이 벌어졌던 참상의 연출이 아직도 그대로이다.

그러나 그 곁에서는 이처럼 평화로운 오후의 한 때가 있기도 하다. 삶이라는 건 그런 법이었다. 아이러니로 이루어진 어떤 기묘한 예술작품같을 때가 참 많았다.


“그래 뭐, 가자고. 게임 오버를 당해봐야 별 일이겠어···. 최고로 재미있게 플레이를 한 거지.”


최태현이 말했다. 제냐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게임 오버, 에 대해서 말을 하는 건 임시 AI는 아니다. 개멋진나 최의 캐릭터를 움직이고 있던 AI가 사라지고, 어느새 최태현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캐릭터가 로그인을 하는 순간은 다른 이들이 달리 알 방법이 없었다.

아는 유저 인터페이스 창같은 걸 켜두고 확인하고 있지 않은 이상은 말이다.


자연스럽게 움직이다가, 어느새 최태현이 들어왔고. 그는 또 좌담회의 분위기에 어울렸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새인가부터.


“일 끝났나 보네요.”

“그래, 자식아.”


최태현이 시익 웃었다. 정겨운 웃음이었다.

결국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게임을 한다. 그런 법이었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더불어서 사니까 말이다.

사람같지 않은 인간들도 많지만.

그렇기에 ‘사람다움’이 무엇인가 더욱 깊이 고민해보게 되고.

또 다시, ‘사람다운’ 것에 대해 고민하며 걸어가는 이들과의 인연이 참으로 소중해진다.


삶이라는 건 귀하다. 귀하고 아름답다. 그저 건네받은 것이기에 함부로 할 수도 없다. 그런 순간들이 없었더라면, 진즉에 고층 빌딩에서 몸을 던졌을지 모를 일이다.

김서원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잔인한 생을 살았다. 뭐, 남들이 절대로 하지 못할 그런 비극을 겪은 건 아니었다. 그는 나름대로 좋은 나라에 태어났고. 잘 자랐다. 먹고 살면서 딱히 굶어본 적도 많지 않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어디 사지가 끊어진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으며 장애를 앓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뭐, 몸만이 아니라 정신이 괴로운 일 따위는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법이다.

자신의 순수성이 훼손되었다고 느꼈을 때 사람은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아무튼.


어쨌든 아주 먼 길을 돌아가는 것 같지만. 사람은 결국 그 단순한 인연 따위를 소중하게, 가꾸기 위해서 산다는 이야기였다. 게임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결국 다 도구에 불과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예술 작품들도 말이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서로 소통하기 위해 있는 도구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술과 작품들은, 그런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가지에 불과하며.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그 가지가 뻗어나간 사람의 심금에 있는 순수성, 일 뿐이다.


아무리 위대한 기술이나 작품이 발전하고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결코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단순한 감상을 읊자면,


제냐는 지금 이 순간이 좋았고,


재미있었고,


기뻤다.


게임을 즐겁게 한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래, 뭐든 말이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즐겁게 사고를 치면서 이리저리 도전을 하는 것도, 세상에서 손꼽을 정도로 재미있는 일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하하.”


김서원은 아주 드물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렇게 웃어보는 게 아주 오랜만인 것처럼 스스로 조금 느껴졌다. 감정을 티없이 드러내고 느끼는 게 말이다.

속이려고 해서 감추는 건 아니었고. 그냥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러는 것이었는데.


“그래 뭐, 그러면 언제. 다들 회복하는대로 그냥 가는건가?”


최태현이 물었다. 일이 끝나고 금방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의 표정이 이전까지 게임 내의 일에 의한 피곤함이었다면. 지금의 피곤함은 조금 더 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임시 AI가 아니라 최태현의 표정이라고 생각을 하고 보기에 그리 느껴지는 걸지도.


제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이 늦어져봐야 좋을 건 없다. 속전속결.


결국 대공의 허점을 노리고 찔러야 한다는 건 이 연계 퀘스트에서 계속해서 변하지 않는 부분이다.


참으로 긴 시나리오 퀘스트였다.


뜬금없이 산슈카 국에 드리운 암운이 있다나, 어쩌나. 그런 소리를 퀘스트 창에서 보기 시작한 이후부터. 암살 위협을 받는다거나, 계속해서 고난과 장애물이 다가와 게임 플레이를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막후의 근원은 발견을 했다. 산슈카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가장 강력한 악의惡意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세르게이 알사드.

그에 대해 아직까지도 모든 걸 알지는 못하지만. 거대한 맵을 자신의 머릿속에 담고 수많은 NPC들을 거느린 천재적인 악인이라는 것 정도는 분명 알 수 있었다.


그런 인간과 싸움을 하면서, 그가 편하게 계산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건 안될 일이다. 계속해서 정신없이 움직여서 그를 몰아치는 게 차라리 나으리라. 알면서도 막지 못하는 수, 가 머리만 좋은 헛똑똑이들을 상대할 때 가장 괜찮은 방법이었다, 늘.


그들이 캐릭터로써 회복해야 하는 수치들은 여럿이 있겠지만. 일단 가시적인 HP와 MP가 있었고. 또 비가시적인 ‘피로도’를 회복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를 위해서 계속해서 포션을 들이키고. 회복용의 아티팩트들을 사용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절대적인 시간은 어쩔 수 없이 약간은 필요하다.


완벽하게 피로감을 없애고 다음 전투에 돌입하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전투에 대한 피로도는 누적되게 마련이었고. 첫 교전에 들어설 때의 상태를 계속해서 만드는 건 꿈같은 일이었으니.


어쨌건 상대를 자신보다 더 힘들게 만들고. 최악의 컨디션으로 꾸며서 전투를 이기는 것밖에는 수가 없었다.


MP가 그래도 수치 중에서는 가장 빠르게 회복을 한다.

보통의 수순은, 회복술을 갖고 있는 이의 MP를 우선해서 회복한다. 그렇게 MP의 회복분을 회복술로 돌려서, HP의 완전 회복을 해낸다. 그 다음에 파티원의 모든 체력과 정신력이 회복되면 그저 최선의 상태와 자세를 찾아 탈력감을 이겨내고 스테미나를 회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잘 먹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었다. 전날 밤에 제냐와 호아킨은 계속해서 싸우면서, 건량식 따위를 인벤토리에서 틈틈이 꺼내어 씹기까지 했다. 물을 마시기도 하고.


피튀기는 전장의 한복판이었지만. 어느 정도 칼로리를 보충해주지 않으면 초인의 육체라고 하더라도 결국 결손이 생기고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평소에 어마어마한 양의 칼로리를 축적해뒀다가 장기전에 돌입하는 부류의 전사들도 있기는 했지만. 제냐나 호아킨이 익히고 있는 스킬 트리 쪽의 기술은 아니었다.


“일단 저녁이 되기 전에는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그것도 어찌될 지 모르는데···.”


제냐는 그렇게 말하면서 먼 곳을 처다보는 시늉을 했다. 달리 보이는 건 없었다. 주변엔 그냥 넓은 평야. 지난 날 싸웠던 전투의 흔적이 한켠에 보이고. 또 쉬고 있는 왕국군의 막사들이 어른거리게 보일 뿐이었다.


“산슈카국에 있는 다른 지원군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으니. 꼭 저희만 힘 낼 필요는 없겠죠.”

“다른 플레이어들도 있을 테고 말이야.”


호아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릿샤의 대답이었는데.


확실히, NPC들은 플레이어들에 대해서는 생각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산슈카국에 벌어진 내전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하고 있었다.

플레이어들로서는 당연한 일이겠다. 전투 클래스의 유저들이라면. 이런 류의 전쟁을 반기기까지 한다. 어쨌든 적극적으로 콘란드 대륙 내의 사건에 참여하는 것이, 여러가지 포인트를 벌기 쉽다.


유니크 퀘스트가 거대하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곁가지를 파고들어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퀘스트 경험치를 많이 얻을 수도 있었고. 또 운이 좋다면 전공을 세워 명예 점수를 크게 벌 수 있기도 하다.


유니크 퀘스트라는 건 그 자체로 큰 가치를 지니며. 꼭 경험치 따위가 아니더라도 평소에 얻기 어려운 보물을 전리품으로 얻기도 하고.

격변하는 시대적 변화의 양상은, 이 콘란드 대륙을 거니는 유저들에게는 가장 반길만한 것이었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도태되기도 하지만. 결국 이 세상에 머물렀다가 떠나가는 나그네, 가 모든 유저들의 본질이었으므로. 위험을 회피하고 안전주의적인 플레이를 하기보다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리턴을 노려보려는 도박사적인 성향을 갖는 것이 대부분의 유저들이었으니 말이다.


모든 유저가 그렇다는 건 아니었지만.

산슈카를 근거지로 하고 있던 수많은 전투 클래스의 플레이어들이 퀘스트에 참여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각지에 있는 귀족들의 병사들도 열심히 달리고 있었고.


말인즉슨,


결국 시간을 오래 끌고 자신의 숨겨둔 수를 드러내지 않을수록 대공에게 불리해지는 판세였다. 사실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이미 세르게이 알사드 대공의 야욕은 무너진 셈이고. 그가 왕실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하는 결론이 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냐는 안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련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낸 개발진들에 대한 이상한 신뢰감이기도 했다.


제냐 킴이 스스로, 몸으로 겪어본 이 놈의 게임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흘러가는대로 맡겨두었더니 모든 일이 잘 되었더라, 하는 식으로는 결코 되지 않으리라. 거기에 지금 산슈카에 적籍을 둔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발버둥을 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유니크 퀘스트의 키플레이어는 제냐 킴 자신이었고. 그렇다면 자신의 역량과 선택, 움직임이 아무래도 다른 이들의 행동과 선택보다는 큰 보정치를 받아, 시나리오에 큰 영향을 미칠 테였다.

제냐 킴이 시스템이 상정한 결과 이상의 퍼포먼스Performance를 보여야만 아마 일이 잘 풀릴 확률이 높다,


고 그는 예상했다.


거대한 세계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듯한 비련시 온라인이었고. 어쩌면 한 개인의 멍청한 착각일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아무튼 쉴 수 있을만큼 충분히 쉬고···. 그대로 대공령으로 갑니다. 다들 일정이 어찌될 지는 모르겠지만···.

살아남으면 보자고요.

다들 게임 오버를 당하면 뭐···.

챗피ChatP(대화용 가상현실 프로그램)에서라도 보겠습니까, 다들 아이디 있어요?”

“···하나 만들지 뭐.”


릿샤가 눈을 좁게 뜨며 이야기를 했다. 시작하기도 전에 게임 오버를 상정하는 헛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기라도 한듯.


“일단 가능한한 몰입을 하고···. 로그아웃을 해야 하면 이야기하는 걸로 하고···. 그럽시다.”


시나리오 퀘스트를 온전히 플레이어가 다 치러낼 수는 없다. 일정이 완벽하게 비어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사람이 정말 콘란드 대륙 내에 옮겨진 게 아닌 이상. 현실의 몸도 휴식과 영양 섭취가 필요하다. 일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바깥에서 보내야 하고.


임시 AI가 해야 할 역할이 클 것이다. 그것을 위해 평상시에 하드 모드로 일부러 플레이를 해둬야 하는 법이었고.


길드원들은 각자의 의지를 다졌다.


한가한 오후.


산슈카는 국운을 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계속해서.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심심해서 24.01.01 69 0 -
358 357. 평행行 NEW 19시간 전 6 1 20쪽
357 356. 교점 24.06.29 5 1 19쪽
» 355. 좌담의 결론 24.06.28 6 1 25쪽
355 354. 좌담坐談 24.06.26 9 1 11쪽
354 353. 간신히 24.06.26 7 1 25쪽
353 352. 기둥들은 하늘로 오르고 24.06.23 14 1 23쪽
352 351. 주룡走龍 24.06.19 12 1 15쪽
351 350. 상황 24.06.19 13 1 18쪽
350 349. 합류 24.06.18 14 1 22쪽
349 348. 재로그인 24.06.09 13 1 15쪽
348 347. 고심 24.06.09 10 1 13쪽
347 346. 왕도의 사정 24.06.06 13 1 11쪽
346 345. 왕도王都, 아침 24.06.06 8 1 11쪽
345 344. 마늘에 미치다 24.06.06 13 1 18쪽
344 343. 잠깐, 잠 24.06.06 8 1 13쪽
343 342. 로멜리아는 24.06.06 9 1 17쪽
342 341. 제어기지 24.06.06 9 1 13쪽
341 340. 광기어린 웃음을 지었다. 24.06.03 11 1 20쪽
340 339. 요드먼. 돌격 24.06.03 11 1 17쪽
339 338. 말리 24.06.03 11 1 12쪽
338 337. 쉴더Shielder 24.06.02 10 1 12쪽
337 336. 폭격 세례 24.06.01 14 1 14쪽
336 335. 전장의 한복판, 제냐 24.06.01 9 1 16쪽
335 334. 아무도 없었다. 24.06.01 9 1 12쪽
334 333. 제어 기지 24.06.01 9 1 11쪽
333 332. 집중 24.05.31 7 1 12쪽
332 331. 무수한 게임 오버Game Over 24.05.31 9 1 15쪽
331 330. 착탄 24.05.30 12 1 22쪽
330 329. 계획, 본격적(2) 24.05.29 9 1 2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