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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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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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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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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356. 교점

DUMMY

*


로멜리아 가의 기사. 갈렙 페이브는 빠르게 내달렸다.


마침 상황이 좋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작금의 정국에서 좋은 일이라는 건 거의 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사소한 행운을 따지자면 말이다.


로멜리아 가문은 산슈카 전체가 어수선해지기 전에도 계속 위험스런 상황들을 겪었다. 전 로멜리아 남작이 암살을 당하고. 가문에 남은 아가씨들을 이끌고 긴 여행을 떠났던 일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 여행이 다행스레 끝난 뒤 영지로 돌아와 평안함을 누리려 할 때도 위험은 계속되었다. 로멜리아 가문에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것인지. 주변의 귀족들이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감사하게 왕실의 명에 의해서, 로멜리아 가문을 돕는 그레이 자작의 손길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그래도, 우군이라고 할만한 그리턴 자작가로 갈렙 페이브를 보냈던 참이었는데.


갈렙 페이브가 자작가를 향해서 한창 달리고 있던 여정 중의 어느 날 밤.

허공에 거대한 빛의 매가 치솟았다.


오랜 역사, 전통, 전설 따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자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것이 빛나는 매의 형상이었다.


전설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누락되는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오랜 역사를 가진 가문의 기사가 알게 되는 정보는 충분한 것이었다. 사슈나 가, 왕가王家에 변고가 생겼을 때. 그리턴 가에서 그 위험을 알리는 신호였다.

오래도록 평화기를 유지해 온 산슈카에서 나타나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형상이었지만.


갈렙 페이브는 산슈카가 그리 평화롭지만은 않다는 걸 온 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사내였다. 당장 로멜리아 가문이 겪은 위기만 하더라도 그렇잖은가.


그리턴 가에게 원군을 지원받기 위해서 가던 길이었지만. 결국 현재 산슈카의 상황에 대해 알기 위해 가는 여정도 되어버렸다.

가는 길에 겸사겸사, 여러가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갈렙 페이브는 가문에서 받은 특제의 말을 혹사시키면서 달렸다. 일반적인 말은 아니었고. 가문의 기사들이 사냥을 해서 온, 몬스터에 가까운 녀석이었다. 지치지 않는 정력, 각력, 주력走力을 갖고 있는 녀석이었고. 일반적인 말에 비해서 다리가 훨씬 길기도 하다.


본디 위험한 일이 생기면 로멜리아 남작, 즉 헤슈나 로멜리아가 타고 움직여야 할 말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영 좋지 않고 또 특수한 때였기에, 그가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한달음에 데슈칸 산맥의 초입에 도착을 했고. 로키 산의 그리턴 자작가에 들렀다. 이미.


자작가에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었고, 다시 로멜리아 가문으로 한창 향하고 있는 길이었다.


그의 아래에서 붉은 색의 털을 가진 말은 덜그덕거리며 움직인다.


어느 정도 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보더라도 이상해 보일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적마赤馬는 기이한 움직임을 보이며, 황야를 겅중거리며 뛰어넘는다.


햇살을 받는 갈렙 페이브의 얼굴로 땀방울이 흐른다. 먹고 마시는 것까지 말 위에서 해결하며 계속해서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적마가 아니었고. 또 기사인 갈렙이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강행군이요 고행이다. 자고, 쉬는 것만 말에서 내려 해결하고 있었다.


사내는 어수선한 산슈카의 황무지를 홀로 내달렸다. 아니, 말과 함께 말이다.


*


갈릭갈릭 한이라는 사내는 주룡을 타고 달린다.


황무지와 평야 지대가 번갈아서 나오는 것이 산슈카의 영토였다. 대체적으로 평야가 많았다. 만약 이 나라의 병력들이 몬스터를 완벽하게 정복하고 난다면 농사용지地로 쓸만한 땅이 아주 넉넉할 것이다.


콘란드 대륙의 발전상은 결국, 몬스터를 잡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류 역사의 발전 양상을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일정 지역에 몬스터가 얼마나 있는지, 였으니까 말이다.

몬스터는 사실 마기魔氣라고 부를만한 에너지의 가시적인 표현에 불과했다.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악마가 뿌려대는 마기라는 종류의 유독한 MP가 문제인 것이었다.


대륙의 마기들을 정화시키고, 결국 인간이 살만한 땅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콘란드 역사의 가장 중요한 과업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들이 이 세상에 오면서 그런 과업의 진척도는 분명 빨라진 면이 있다.


사내 역시 산슈카의 발전에 상당히 기여를 한 이이기는 했다. 분명 말이다.


치렁한 금발은 주룡이 달리며 위 아래로 그 몸을 날릴 때마다 같이 흩날린다. 거추장스럽지 않게 어느새 질끈 묶어둔 상태였다. 뒤로 묶은 머리의 끝이 길게 흔들거린다.


주룡走龍은 달리기에 특화된 종이다. 용Dragon종의 아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황무지에 서식하는 지룡地龍들이었는데. 개중 한 종류였고, 서식지와 개체에 따라서 플레이어들이 체감하는 위험도는 천차만별인 놈이었다.


얼굴에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려넣은, 선이 굵은 동양인 사내. 게임 내에 ‘갈릭갈릭’이라는 이름을 캐릭터 아이디로 정한 남자는 레벨이 깨나 높은 전투 클래스의 플레이어였고. 그가 잡은 주룡은 레벨 5-60정도는 되는 제법 강한 개체였다.


덕분에 일반적인 기승동물들의 한계를 거뜬히 넘어 계속해서 질주할 수 있었다. 그 위에 타고 있는 사내 역시 초인적인 체력을 갖고 있었기에 버틸 수 있는 경주이기도 했고.


황무지를 지나치며 여러 사람들의 무리를 보았다. 산슈카는 변방을 향해 달릴수록 정비된 도로 따위는 거의 없다시피 한 곳이었다.

내비게이션Navigation에 많이 익숙해진 현대인들로서는, 사실 길을 잃지 않고 목적지를 찾아가는게 거의 불가능 하다시피한 곳이기도 했다.


목적지를 정해두고, 해당 퀘스트 지점의 방향을 일러주는 유저 인터페이스가 없었다면 말이다.


게임을 딥Deep하게 즐기는 유저들은 유저 인터페이스들을 모조리 끄고, 완벽하게 판타지 세계에 온것마냥 플레이를 하기도 하지만. 그렇잖아도 불편하고 지나치게 현실적인 가상현실 세계에서 그런 식으로 구는 이들이 많지는 않았다. 갈릭갈릭 한도 당연히 아니었고 말이다.


사내는 들썩이는 몸을 주체하느라 고생을 하고 있다.


내달리는 주룡의 속력은, 어림잡아 전력질주하는 말의 1.5배에서, 순간적으로 2배까지 될 것이었다. 가속도를 받아서 경사진 길을 질주하거나, 언덕에서 세게 뛰어 아래로 처박힐 때의 속도를 재면 그렇게까지 나올지도 모른다.


“크르렁.”


용 역시 나름대로 거친 숨을 토해내면서 질주를 하고 그 뒤로 뿌연 먼지가 올라와 흔적을 만든다.


표지판도 눈으로 뚜렷이 보이는 도로의 경계도 없는 세계에서. 허공에 보이는 시스템의 표시 하나만 바라보고 가고 있었다. 마름모꼴, 평평한 다이아몬드 형태의 표식을 따라가는 중이었다. 대략적인 거리도 얼추 가늠은 가능했다.

그리 멀지 않았다.


유저들은 대부분 NPC들에 비해서 몸을 혹사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죽을 정도로 혹사를 시키면, 게임 오버를 당하고 말기에 어느 정도는 자제를 해야겠지만.

아무래도 그들에게 이곳은 게임 속이지 않은가. 실제로 고통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고. 그러다보니 NPC들에 비해서 유저들은 캐릭터의 신체를 험하게 다룬다.


그런 고행이, 아이러니하게 이 게임에서는 풍부한 보상을 불러오고. 캐릭터를 강화시킨다. 실제의 삶이었다고 한다면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현실의 사람의 몸은 무한하게 강해질 수 없고, 물리적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게임 내에서는 그런 고행들이 의도적인 고된 훈련으로 여겨져, 경험치로 돌아오곤 한다. 캐릭터는 그 이유로 다시 강해지고, 플레이어들은 더욱 혹독한 고난에 자신의 캐릭터를 몰아넣는다.


갈릭갈릭도 간신히 영양분만을 섭취하면서 내리 달리고 있었다. 롤러코스터마냥 다이나믹하게 움직이고 있는 주룡을 타는 일이었기에. 그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만으로도 사실은 상당한 체력 소모가 있을 일이었지만. 고강한 경지의 기력술사였으므로 견딜 수 있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해내지 못했을 강행군으로, 곧 순식간에 로멜리아 령 근처까지 올 수 있었다.


멀리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주룡을 타고 달리는 와중에 많이 보았다. 다양한 방향으로 오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갈릭 한과 같은 방향으로 가는 무리들은 달리 없었고. 대개는 수도, 사르삿을 향해 가는게 아닐까 싶었다.


NPC가 되었든 플레이어가 되었든. 콘란드 대륙은 시스템적으로 PK를 막는 게임은 아니었다. 도시에서, 관군官軍이 있는 앞에서 상해를 입히거나 살해를 하면 물론 패널티를 받게 되기는 하지만. 물리적으로는 일단 가능하다.


도시 바깥 황무지에서는 더 얼마든지, 빈번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고.

나름대로 오랜 시간 플레이를 하고, 콘란드 대륙에 익숙해진 베테랑 플레이어들은 늘 사람을 조심한다. 몬스터나, 다양한 환경에 의해서 게임 오버Game Over를 당하는 유저들도 아주 많았지만. 사람에 의해서 게임 오버를 당하는 일도 만만찮게 많이 일어난다.


자위를 위해서 최소한의 안전 거리를 유지하는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어느 정도 정신감정이 게임에 접속할 때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이 게임은 본질적으로 플레이하고자 하는 이들을 막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이 세계에 와서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것을 보고자 하기에 말이다. 물론 세계를 만듦에 있어 의도를 투영하기도 하고. 선악 수치 따위를 넣어 보편적인 악행자들을 더욱 괴롭게 만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현실의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이상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만큼. 게임 속에서도 똑같은 정도로 이상한 이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인간은 그리 신뢰할만한 존재가 못된다.

인간을,

신뢰하는 것만이 사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어려운 법이었다. 사람을 옳게 대하고. 자신의 길을 올바르게 간다는 건 말이다.


인간의 악행까지 모두 용인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바른 길을 가기 위해 애써야 하기에 말이다.


어쨌든 갈릭 한은 베테랑이었고. 그건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한국. 세상에서 가장 치안이 좋은 나라이자 땅이라고는 하지만. 그 치안 속에 숨어 있는 세세한 위험과 위협들이 깨나 많았다.


그는 현실에서건 게임 속에서건 이상한 인간들을 깨나 많이 겪었다.

어쩌면 그 자신이 이상한 놈일지도 모르겠다만.


“후우.”


모래바람 속에서 간신히 한숨을 토해내며 질주를 한다.


따가운 땡볕은 그를 목마르게 했다.


그는 근접전을 주특기로 하는 전사였고. 신체적인 강인함에 있어서는 자신이 있는 편이긴 했다. 단순히 HP가 높기도 하고. 그 외 갈증이나 배고픔 따위를 오래 견딜 수 있는 패시브Passive 스킬을 여럿 익히고 있었다.

다양한 환경에서 얼마나 생존이 가능하냐, 는 이 서바이벌 장르 게임에서 제법 중요한 요소였다.


‘낙타의 등’이라거나. ‘곰의 체질’ 따위를 익히고 있는 게 그였고. 평소에 수분이나 칼로리를 과량 섭취해두면. 체내에 저장분을 머금고 있다가 부족할 때 조금씩 끌어다 쓰는게 가능했다. 애초에 그런 식의 활용이 가능하게 이미 지어진 것이 인간의 신체이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경우보다 비상식적으로 훨씬, 더 드라마틱한 효과를 보이는 게 스킬의 효용이었다.


나름대로 고증이 있는 시스템이었기에. 그런 스킬을 익히고 있는 갈릭갈릭 한은 평소 몸무게가, 익히지 않았을 때에 비해 더 많이 나갔다. 몸이 수분과 영양분을 더 오래 붙들어둘 수 있게 되는 셈이었고. 굶는 것만으로 체중이 현실적인 경우에 비해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초인적인 수준의 육박전을 하게 되면. 이미 인간의 힘이라고 보기 어려운 수준의 근력으로 난투전을 벌이게 되므로. 몸무게가 조금 더 늘거나 줄어드는 게 절대적인 영향까지 미치지는 않게 된다. 온갖 무기를 쓰고 기력氣力이라는 형이상학적 힘을 다루는 순간 이미 현실의 전투와는 아예 다른 일이 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체중에 미세한 변화를 주는 게 전투에 있어 약간의 영향을 끼치는 건 사실이었다. 어쨌든 기력과 게임 내 스탯Stat 포인트의 보정치로 인한 괴랄한 위력의 힘 역시 캐릭터의 신체를 기반으로 발휘되기는 하니까.


갈릭갈릭 한은 테이밍Taming 류의 스킬을 써서 질주에 박차를 계속해서 더한다.


테이밍 스킬군群은 스릴을 즐기기에 좋다.


정설이기는 했다.


날아다니는 것이던. 뛰는 것이던. 이 세계의 짐승들은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거대한 몸집으로, 비현실적인 속도를 내고는 하니까 말이다.

물론 변신술이나 그 외 이동 계열의 초상술 등. 다양한 부류의 이동 기술들이 있기는 했지만. 테이머는 가장 안정적으로 오래 이동할 수 있는 클래스였다, 분명.


일반적인 몹mob의 힘과 속도에 테이머 스킬을 더하면 더욱 기세를 돋울 수 있었으므로. 이동 계열의 기술만 파고드는 테이머들도 적잖이 있었다. 라이엔 핑도 사실 그런 부류였고.


눈을 가늘게 뜨고 황야를 질주하던 갈릭갈릭의 시야에, 만만찮게 사나운 기세로 달려가는 누군가가 들어왔다.


시계視界는 너른 평야를 담고 있었으므로. 멀리, 먼 각도에서 접근하는 이들까지 어렵잖게 볼 수 있었다.

산슈카의 변방 인근에 다다랐으므로. 달리 다른 이들을 보지 못하고 달려온 지 제법 오래 되었었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가 기이한 말을 타고 질주를 하고 있었다.


위에서 바라본다면 갈릭 한의 동선을, 6시 방향에서 12시 방향으로 쭉 뻗는 하상향의 직선으로 그릴 수 있겠고. 이상한 말을 탄 누군가는 3-4시 방향 즈음에서 10시 방향으로 곧장 오고 있었다. 시계판의 중심부에서 만나게 될듯한 둘의 궤적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멀어서, 언뜻 보이는 게 다였지만.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갈릭 한은 눈매에 기력, MP를 집중시켜 시야를 강화시켜서 식별해냈다. 사내였다. 얼굴마저 보인다. 머리칼은 뒤로 길게 흩날리고 있었다. 입을 앙다물고 있는 것도 같았다. 고집스럽게.


사내가 타고 있는 말의 털 색은 붉었고. 그가 사로잡은 주룡에 거진 뒤지지 않는 속력으로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일반적인 말이라고는 볼 수 없는 속력이었다.


아마 적마赤馬라는 이름의 몬스터일 것이다. 주룡과 마찬가지로 서식지, 개체에 따라서 그 강함이나 위험도는 천차만별이다. 어느 정도의 적마인지는 모르겠지만. 길들여서 타고 있다면 일단 최소한 능력자이기는 할 테였다.


플레이어인가, NPC인가.


갈릭갈릭 한은 눈매를 좁혀 뜨며 집중했다.


어차피 달릴수록 만나게 되어 있었기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몇 분인가를 더 달렸고. 머잖아 상대도 갈릭갈릭을 눈치챈 것 같았다. 시선이 맞았다고 느껴졌다.


황무지에서 만나는 타인이라는 건 제법 위험스러웠다. 적인가, 나그네인가를 알 수 없다. 나그네였다가도 한 순간 의견이 틀어지면 얼마든지 강도나 살인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이 시대의 길이었다. 초상공학이라는 기술은 그래도 과학을 대체할만한 수단으로써, 콘란드 대륙의 삶의 질을 높여주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의식 수준은 전근대의 것이다. 사실 삶의 질 역시 일부 대도시의, 제한된 공간들을 제외하면 중세나 심지어 고대의 생활상이 펼쳐져 있었고.


기본적으로 먼 거리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자구책이 필요했다. 최소한의 전투 능력이 없다면 긴 여행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목숨을 지키는 현명한 방법이었고.


대부분의 여행자라면 봇짐에 칼이나 단궁短弓 정도는 챙겨두는 게 일반적인 일이다. 능력자가 아니라면 갈릭갈릭 한에게 어떤 상해를 입히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수준이 낮던 높던, 일단 능력자라면 방심의 틈을 찔러올 가능성 정도는 충분했다.


이 게임은 아무리 레벨과 스탯이 올라도. 결국 급소에 치명상을 입으면 단숨에 게임 오버를 당하게끔 되어 있었으니까.


낯선 사내라는 건 누구에게나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존재다. 각도가 다른 직선은 어느 지점에서건 닿게 되어있었고.


거대한 평야 지역에서 결국 두 사람은 근처에까지 오게 되었다. 서로의.


띠링.


약간의 긴장감이 고조되어가던 와중에.


플레이어인 갈릭갈릭 한에게 시스템 인터페이스의 알림음이 울리면서, 윈도우Window가 켜졌다. 반투명한, 유색의 네모난 형상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는 퀘스트 인터페이스 창의 알림음이라는 걸 알았고. 주룡의 어깨와 가슴팍으로부터 이어지는 고삐를 놓고 제 이마를 문질렀다. 퀘스트 창이 온전하게 켜졌고, 시스템 로그Log의 문장들이 나타났다.


[산슈카의 위기


#남부 변두리, 로멜리아 령을 향해 가서 가문의 사연을 들어주어라.


당신은 로멜리아 령 근처에 닿았고, 황무지에서 알 수 없는 사내를 발견했다.


처음 보는 기사騎士의 등장에 고민을 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니 그가 입고 있는 로브에 박힌 문장이, 당신이 찾아가고 있는 남작가家의 그것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로멜리아 가문의 사람임을 안 당신은, 그와 가는 길이 같을 것이다.

합류하여 미리 말을 듣거나, 혹은 그 외의 행동을 하라.

만일 이전 퀘스트에서 로멜리아 가문의 사정을 듣고 그들을 돕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면. 당신을 알아차릴 수단이 아무것도 없는 가문의 기사에게 먼저 다가가 경계심을 풀어주는 것이 앞으로의 퀘스트 진행을 위해 좋을 것이다.]


“······.”


갈릭갈릭은 뚱하니 입을 다물었다.


그의 인상은 언뜻보면, 물론 무척 무서워보이는 편이기는 했다.


건장한 체격이었고, 게임 내에서는 여러가지 패시브 스킬을 익히고 스탯을 키워놓았기에 더욱 커졌다.

얼굴도 굳이 따지자면 선이 굵은 편이었고. 조금만 입을 다물고 있어도 사나워보인다. 눈매 근처에 대문짝만하게 박아놓은 유려한 문신은 그런 인상의 위험스런 분위기를 더욱 부추기는 효과가 크다.


수십 여 년 전에 죽은 유명한 권투 선수의 얼굴 문신을 따라한 것이었다. 큰 의미는 없었고. 그냥 멋있어 보였고, 게임 속이라 해보았다.


갈릭갈릭은 눈썹이 짙은 편이었다. 머리칼은 금발이 된 데에 비해 다른 곳은 생김새대로 검었다. 동양인답게 말이다.


눈매를 꿈틀거리면서 잠깐 생각하던 그는, 저 멀리 좁혀지고 있는 각도의 모르는 사내를 향해서. 조금 더 속력을 내서 가깝게 다가갔다. 그가 움직이는 방향에 맞춰 천천히 같이 달리면서, 측면에서 다가갈 셈이었다. 옆 차선을 달리는 차량마냥 말이다.


“으랴.”


키히히히힝.


주룡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거대한 파충류. 현실에 있는 무엇과도 닮지 않은 기이한 생물은 말과는 조금 다른, 걸걸한 괴성을 내면서 그의 운전을 따랐다.


야생에서 금방 포획한 몬스터의 경우에는 테이밍 스킬의 효과가 아직 잘 파고들지 않아서. 세밀한 컨트롤이 어려울 때가 많았다. 그러나 갈릭갈릭은 나름대로 베테랑이었고. 테이머로서의 경지가 대단하지는 않아도. 기초적인 스킬의 숙련도가 높았다. 또한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기력술사로서, 마스터로서의 위압감을 보이며 짐승을 이끌 수도 있었고.


주룡은 금세 주눅이 들었었고, 그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다.


내달리는 황색 용의 네 발이 경쾌하게, 메마른 바닥을 긁어대고 또는 박찼다.


*

jeanne-rouillard-txVwsCuWC94-unsplash.jpg


작가의말

내달리는 두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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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 357. 평행行 24.06.30 8 1 20쪽
» 356. 교점 24.06.29 6 1 19쪽
356 355. 좌담의 결론 24.06.28 7 1 25쪽
355 354. 좌담坐談 24.06.26 9 1 11쪽
354 353. 간신히 24.06.26 8 1 25쪽
353 352. 기둥들은 하늘로 오르고 24.06.23 14 1 23쪽
352 351. 주룡走龍 24.06.19 13 1 15쪽
351 350. 상황 24.06.19 14 1 18쪽
350 349. 합류 24.06.18 14 1 22쪽
349 348. 재로그인 24.06.09 13 1 15쪽
348 347. 고심 24.06.09 10 1 13쪽
347 346. 왕도의 사정 24.06.06 13 1 11쪽
346 345. 왕도王都, 아침 24.06.06 8 1 11쪽
345 344. 마늘에 미치다 24.06.06 13 1 18쪽
344 343. 잠깐, 잠 24.06.06 8 1 13쪽
343 342. 로멜리아는 24.06.06 9 1 17쪽
342 341. 제어기지 24.06.06 9 1 13쪽
341 340. 광기어린 웃음을 지었다. 24.06.03 11 1 20쪽
340 339. 요드먼. 돌격 24.06.03 11 1 17쪽
339 338. 말리 24.06.03 11 1 12쪽
338 337. 쉴더Shielder 24.06.02 10 1 12쪽
337 336. 폭격 세례 24.06.01 14 1 14쪽
336 335. 전장의 한복판, 제냐 24.06.01 9 1 16쪽
335 334. 아무도 없었다. 24.06.01 9 1 12쪽
334 333. 제어 기지 24.06.01 9 1 11쪽
333 332. 집중 24.05.31 7 1 12쪽
332 331. 무수한 게임 오버Game Over 24.05.31 9 1 15쪽
331 330. 착탄 24.05.30 12 1 22쪽
330 329. 계획, 본격적(2) 24.05.29 9 1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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