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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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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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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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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349. 합류

DUMMY

까득.


한 손으로도 딸 수 있는 포션병의 뚜껑을 돌려서 깠고. 내용물을 벌컥이며 마셨다. 격전을 벌이면서 계속 포션을 들이켰고. 피로도 역시 많이 올라와 있는 듯했다. 물리적인 피로도와 MP와 관련한 피로도가 있었는데. 둘 모두 상당하게 찼다. 포션을 마셔도 효과가, 영 시원찮다.


계속해서 고강도 운동을 계속하다보면. 잠시 쉰다고 하더라도 그 피로가 누적되어 결국은 길고 확실한 휴식이 필요해지는 것처럼. 몸이 그러하듯 MP를 쓰는 작업도 비슷했다.

결국 장기전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컨디션을 잘 파악하고. 그 낙차를 잘 다루어서 균형을 잡아가야 했다. 하루종일, 수 만 대군의 속에서 미친듯이 칼을 휘두르는 건 정말로 미친 짓거리였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아마 대공군에 포함되어 있던 병사들 중에. 기사나 워메이지같은 초인 병력들이 조금만 더 있었대도 힘들었을 것이다.


일단 쉬기는 해야 하니까 과감하게 로그아웃을 했다가 다시 들어왔지만. 까딱하면 재접속을 하지 못할 뻔했다.

밥을 먹고, 잠깐 눈을 붙이고. 김서원이 편하게 쉬는 동안 제냐 킴이 죽지 않은 건 순전히 운의 영역이었다.


허공으로 붕 떠오르며, 주변을 살핀다.


상공으로 날아오른 것 역시, 대공가의 워메이지들이 보이지 않아서 한 일이었다.


하늘은 맑고, 밝다.

태양이 대지의 어두움을 걷어내고 지난 밤의 참상을 비추고 있었다.


격전이 일어나던 것은 지상 뿐만이 아니었는데. 지상의 소란은 거의 잦아들고 있었고. 상공에서의 격전은 이미 모두 다 끝난 것 같았다. 하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투사체를 날리는 식의 본격적인 초상 스킬들은 상당한 MP를 잡아먹는다. 아무리 MP 포션을 계속해서 들이킨다고 하더라도. 워메이지 개인의 피로도 역시 존재를 했다.


일반적인 NPC들의 경우보다, 플레이어 캐릭터들의 경우에는 그런 피로도로 인한 한계가 훨씬 더 높았다. 보통 어떤 운동을 하더라도 더 잘 견뎌내는 체질들이 있지 않은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강한 신체를 타고나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플레이어들이 기본적으로 제공받는 신체는, 온갖 무술과 운동에 적합하며 재능 한계가 높은 몸뚱이였다. 초상술로 분야를 바꾸어도 마찬가지였다.


천재의 육신, 이라고 하는 게 나으리라.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튼튼해질 수 있었고. 애초에도 다양한 특혜들을 재능으로서 갖고 있는 몸이다.


그런 신체를 기본적으로 주어야, 그나마 플레이어들이 콘란드 대륙이라는 세계에서 활약을 할 수 있으리라는 개발진들의 계산 때문에 주어지는 재능들이었다.


세계는 거칠고, 험하며, 엄격하다.

자연계의 무수한 현상들. 재해들은 플레이어들을 결코 호락호락하게 봐주지 않는다. 또한 NPC들 역시, 플레이어들에게 의미없는 친절을 결코 베풀지 않았고.


민낯 그대로의 세계를 구현해내는 것이 개발진들의 일이었으므로. 개발진들은 콘란드 대륙에서의 환경적 난이도를 낮추는 대신 최소한의 자생 능력을 플레이어들에게 부여했다.

그것으로도 완벽히 충분하지는 못했는지. 많은 플레이어들이 이미 게임 속에 들어왔다가 게임 오버를 당해서, 바깥에서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고.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생존의 조건을 모두 채울 수 없었다.

타고난 것을 갈고닦는 인간만이 계속해서 차오르는, 삶의 역경이라는 파도의 수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법이었다.


제냐는 평균적인 수준에서 제법 뛰어난 성취를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플레이어들 기준으로 보아도 월등한 성취이기는 하리라. 이 게임은 재능이라는 것에 아주 큰 영향을 받는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타고난 무언가도 있기야 하겠지만. 정신적인 부분도 크다.

게임 오버를 당할 지도 모르는 고난의 순간에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 걷는지, 아닌지. 뭐 그런 부분들이었다. 게임을 쉽게 하려고 플레이해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지점이었고. 그 게임 오버의 근처에서. 보다 뛰어난 성장을 해내며 계속 한계를 넘는 이들만이 랭커를 노려볼 수 있었다.


랭커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게임은 결코 아니기는 했다만. 일단 개발진들이 준비한, 놀이의 방향성은 레벨업을 하고 전대륙을 정복하는 것이었으므로 말이다.

‘정복’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제냐와 같이 검과 활, 초상술을 익혀 무술가가 되고. 수많은 전쟁에서 공을 세워 정복 군주가 될 수도 있겠고. 혹은 전세계를 지배할만한 뛰어난 아티팩트를 만들어내서 기술적 대국을 세워 대륙을 정복할 수도 있겠고.


혹은 어떤 나라도 넘보지 못할만큼 아득한 수준의 문화적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정복의 한 종류였다. 전대륙의 금전적, 경제적 흐름을 통제하는 것도 가능했고.


“후읍.”


제냐는 숨을 들이켰다. 찬란한 아침, 오전의 상공에서 말이다. 숨이 조금 턱 막히는 느낌이 들고 답답했던 탓이다.


알사드슈트령 근처의 평야.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NPC라고는 하지만. 썩 보기 유쾌한 광경은 당연히 아니다. 제냐는 플레이어였으므로, 그네들의 시체와 피와 살의 조각들이 오롯이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서 비쳐진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흰 빛, 혹은 무지갯빛의 입자들이 빛을 받아 더욱 반짝거리고 있었으므로.

거대한 평야는 보석으로 이루어진 바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언뜻 보자면 말이다.


그러나 이 게임 내에서 그 ‘보석과 같은’ 연출이 가장 잔혹한 그림을 덧칠하는 염료라는 걸 알고 있는 제냐였고.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이 광경을 현실적으로 분석해내고 있었다.


수 만이 가뿐하게 넘는 사람들이 스러졌다.


십 만은 될법한 수다.


하룻밤에 그만한 수가 죽는 것이 가능한가?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제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십 만 여 명이 같은 공간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모두 건장한 장정으로 이루어져 있고. 칼과 창과 활을 들어 서로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거기에 현대전에서 쓰일법한 화력 병기가 있다면 가능하다. 콘란드 대륙에는 현대 지구에서 쓰이는 온갖 첨단 무기들은 없었지만. 대신 이 세계를 발전시켜온 초상술과 기력술이 있었다.


정신 에너지라 불리는 힘, 은 물질 세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초자연적인 힘이었고. 방대하며 날카롭게 갈아진 힘들은 그대로 칼과 같이 휘둘러져,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는데 사용되었다.


제냐 역시 일조를 했고, 심지어는 최선을 다했다.


장관일지 가관일지. 아무튼 경악스러운 꼴이었다. 산슈카 국이 나름대로 휘청거릴만한 손실을 입었다는 건 자명했다.


산슈카국은 대국大國이었다. 현대의 역사에 비춰보자면 말이다. 수십 만이 넘는 정병을 보유하고 있었고. 또 그들을 확실하게 백업할만한 막대한 위력의 초인병들이 있었고. 현대전의 화력병기라 할만한 강력한 아티팩트들 역시 여럿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 콘란드 대륙 내에서는 소국이며, 중부 대륙 필리아의 그저그런 변두리 국가에 불과했음에도 말이다.


이 세계는 일반적인 역사와 견준다면 기준이 여러모로 다른 곳이었다.

내전으로 거대한 회전을 치르고도 여력이 남아 있었다.


제냐는 상공에서 끝없이 펼쳐진 듯한 대륙을 바라보며 새삼 콘란드의 거대함을 다시금 확인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륙. 육대주를 하나로 붙여놓은 크기인 것이 콘란드 대륙이었고. 그 거대한 내륙 지방에서 온갖 희귀하며 비현실적인 자원들이 채집되고 쓰이며. 수천 여 년 넘는 시간동안 일구어져 형성된 게 지금의 콘란드였다.


일차적으로 알사드슈트 령 근처에서 벌어진 회전은 끝났다고 봐도 좋으리라. 아직까지 소규모의 교전들이 일어나고는 있는 것 같았지만.


거진 결론이 정해진 싸움이었다, 이미.


십 수만 대 수만.


두 배에서 세 배 사이의 전력차였다.

대공가의 초인전력이 훨씬 더 수가 많았기에 초반에는 비등한 싸움을 이어나갔지만. 헌터즈 길드가 적극적으로 끼어들면서 전선 이곳저곳에 불균형을 만들어냈다.


애초에 막대한 병력차를 간신히 막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난데없이 강력한 초인들이 등장해서 공격을 가하자 대공군의 입장에서는 엎친데 덮친 격이었고. 눈덩이가 산맥 위에서 굴러 종래에는 눈사태가 되어버리듯. 거대한 전황이 왕실군에게 유리한 쪽으로 굴러가고 말았다.


또한 왕국군을 총괄하고 있던 요드먼 대장군이 뛰어난 전공을 세운 것도 무시 못 할 일이리라. 왕실군 역시 발전 없이 세월을 보낸 것은 아니었고. 알사드 대공이 초인 전력들을 충실히 갖춰왔던 것처럼 왕실군에도 풍부한 물자에서 나오는 아티팩트와, 그걸 이용하는 아티피서들이 상당수 있었다.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지는 MP유저, 초인들 중에서 아티피서가 그나마. 초반에 물자의 지원만 있다면 안정적이고 견고한 전투력을 확보할 수 있는 부류이리라. 초상술사나 기력술사는 그 경지와 상관없이 개인의 역량에 따라 능력의 편차가 심하게 달라지는 편이었고.


중앙에서는 요드먼 백이 기병대를 이끌면서 날뛰었고. 대공군을 야금야금 집어삼키는 기마대의 계속되는 돌격은 분명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전선 일부를 마비시킬 정도의 위력이었다.


대공군의 심부에 곧장 쳐들어가서 위력 과시를 해댔던 호아킨과 제냐의 역할 역시 상당한 공로이며.

전장의 상공에서 워메이지들을 묶었던 릿샤, 라이엔, 개멋진나 역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지독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고.


왕국군은 수 만 정도가 여전히 남아있는데 반해, 대공군은 살아있는 것이 천 단위가 될 지, 안 될지 알 수 없는 수준이었다. 거기에 멀쩡히 일어나 아직까지 싸울 수 있는 수는 더욱 적었고.


전장의 결과는 참담했고.


제냐는 반짝거리는 평야를 살펴보며 바람을 맞고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눈물이 조금 새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잘 자고 일어나 밥먹고. 게임에 로그인을 해서 드는 심정이라기엔 지나치게 생뚱맞지만.

사실 전장의 참상은 그냥 오브제이고, 핑계에 불과하다. 누구나 조금 울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세상을 살아가지 않겠는가. 김서원도 그럴 뿐이었다.


냉병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리 치열한 소음은 아니다. 점차 잦아들고 있었고.


제냐가 떠 있는 허공의 시야에서. 왼편은 왕실군이 아직도 군대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오른쪽 평야에는 그저 빛무리만이 가득하고, 띄엄띄엄 사람들이 서 있었다.


지난 밤동안 왕실군이 참으로 성실하게, 적군을 모조리 죽였다.


눈을 들어 먼 곳을 훑어보았다.


기나긴 평야는 끝없이 펼쳐져 있다. 고도를 높이면 전쟁의 흔적이 닿지 않는 땅들도 금세 볼 수 있다.


저 멀리 알사드슈트가 있었다. 거대한 도시. 세슈칸이나 사르삿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규모 있는 대도시이며, 이방인들이 제법 찾는다. 제냐 일행 역시 한동안 신세를 지기도 했고.


대공은 알사드슈트에 있으리라.


왕실군의 사정에 대해서는, 아직 완벽하게 알지 못했다.


지난 밤 떠올랐던, 거대한 빛의 매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빛의 매가 사라진 건지. 아니면 아침이 되어 햇빛에 가려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요드먼 백작, 대장군이 벨케임 왕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던 것이라고 한다면. 그들의 진격 방향과 싸운 이유도 이해는 간다.

퀘스트 상에서는 그저 산슈카에 큰 변고가 일어났고. 요드먼 백작이 멋대로 대군을 일으켰다고만 설명을 했다. 그런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는 상황은, 대장군의 쿠데타이다.


퀘스트 로그는 언제나 정돈된 정보를 말한다. 어설픈 NPC의 발언보다는 훨씬 믿을만한 기록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의도된 거짓말’이나 ‘오해’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섞일 수 있었다.

작가, 혹은 검수관이 한 번 훑어보고 오탈자를 점검한 편지와 같았다. NPC들은 사람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언제든지 실제 사람이 그러하듯 사실을 헷갈릴 수 있지만.


퀘스트 로그는 헷갈려서 오보를 전달하진 않는다. 단지 플레이어에게 퀘스트 시나리오의 한 갈래를 전해주고, 인도하기 위해서 그럴 뿐.

결국 플레이어는 시스템 인터페이스 내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와. 콘란드 대륙을 여행하며 스스로 직접 얻는 정보들을 종합해서 대륙 내의 진실을 알아내야 했다.

그런 사고방식이 기본이 되지 않는다면 이 세계에서 살아남고, 훌륭한 업적을 세우는 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본디 모험가라는 건 그런 존재여야 했을 테다. 그렇지 않은가. 누구를 믿어야 할 지. 무엇을 이정표로 삼아야 할 지 알 수 없는 망망대해를 떠도는 것이 모험가이고. 누구보다도 온갖 상황에 능숙하게 대처해야 하고.

단지 물리적인 전투력만이 아니라 온갖 지혜를 다 짜내어서 헤쳐나가야 하는 게, 대륙을 여행하는 일이다.


현대의 게임 플레이어들에게는 잘 요구되지 않는 점이기는 하지만.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어설픈, 여타의 게임들과는 조금 궤를 달리 하고 있었고. 여러 종류의 장르를 한데 엮어 묶어버린 스케일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게이머Gamer로서 피지컬적 재능이 뛰어나고. 반응 속도가 좋고. 전투시의 감각이 훌륭하다고 해도. 사소한 문맥 하나를 파악하지 못해서 게임 오버를 당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홀로 이 게임을 온전하게 클리어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고. 언제나 동료들과의 협력과. 여러 사람들과의 협응이 중요하다. 그게 보다 쉽게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을 클리어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홀로 플레이를 하고 메인 스토리의 클리어를 이루어내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가능했고, 그렇게 설계된 게임이다. 난이도에 관한 문제였다. 단순히.


제냐는 건틀렛을 벗었다. 특수한 섬유와, 고위 몬스터의 가죽을 엮어 만든 장갑이었다. 방열, 방한 기능이 있었고. 금속 장식이 달려 있지 않았지만 어지간한 철제 건틀렛보다 든든한 장비이다. 기력술을 사용할 때의 반응성 역시 괜찮았고.


하도 검을 휘두르고, 수많은 이들의 체액에 닿았다보니. 피로 얼룩져 있었다.

본디 플레이어들에게는 피와 내장 따위가 모자이크 처리가 되게 보이고. 또 플레이어 입장에서 그런 모자이크된 광자들은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대학살 수준의 일을 한다면. 혹은 지금과 같은 장기적 전쟁에 참여해서 계속해서 핏물을 뒤집어쓰게 된다면. 장비에는 그 흔적이 남게도 된다.


무수한 적을 베어낸 검이 핏물이나 내장에 걸려 조금의 부식이나, 마모가 없다면 그것 역시 우스운 일이었으므로 말이다.


방금 막 누군가를 베어 터져나온 피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공통적으로 모자이크의 대상이었지만. 오래되어 굳거나 변색된 피 정도는, 성인이며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지 않은 플레이어들에게 평범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제냐는 대공군의 피로 흠뻑 젖은 장갑을 벗었고. 인벤토리에 처박았다. 인벤토리 내부는 초현실적인 원리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 물품들이 서로의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무언가 오물이 묻은 아이템을 넣는다고 해서 다른 아이템들이 더럽혀지지 않는다.


맨손을, 전투복 안쪽의 안감에 대충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그냥 눈을 좀 가리며 잠시 허공에서 그러고 있었다.


지나치게 피로해서, 현실에서 쉬다가 게임에 들어왔는데.

어마어마한 광경을 보고 있자니 조금 어질거리는 것도 같고. 혹은 캐릭터, 제냐 킴이 느끼는 피로감에 연결되어 김서원 역시 그런 감을 느끼는 지도 몰랐다.


현실의 플레이어가 지나친 영향을 받을 정도가 아니라고 한다면. 온갖 감각들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세계였다.


“아.”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곳, 평야에서의 대회전大會戰은 끝이 났지만. 아직 대공의 모가지는 멀쩡하게 붙어 있을 테였다. 퀘스트 인터페이스에도 변화는 없다. 키 플레이어가 제냐인 만큼, 대공의 신변에 지대한 영향이 있다거나.

지금 산슈카 국내 판도에 어떤 이상이 생긴다면 그가 알 수 있을 확률이 높다.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왕실군 쪽의 지휘관들. 그리고 대장군도 아마, 살아 있는 것 같았고. 말을 타고 평야를 누비고 있는 기병대의 모습과, 승전을 자랑하는 듯 깃발을 들고 있는 기수들. 그네들의 앞장을 서며 달리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그것만으로 대장군이라고 가늠하기는 어려웠지만. 아무튼.


사르삿은 어떻게 되었는가. 한 국가가 당하고 있는 재난은 현재 진행형이었고. 그 재난에 함께 다이빙을 하듯 달려들은 동료들도 있었다.


길드 인터페이스를 열었다.


아는 유저, 친구 목록처럼 등록된 유저들의 로그인-아웃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HP가 어느 정도 남았는가. 심각한 상태인지 아닌지도 파악할 수 있었고.


달고 있는 연락용의 아티팩트는 여전히 기능하고 있었다.


제냐가 오래 버틴 편이었던 것 같았다.

모두가 그 긴 시간 계속해서 게임 내 컨트롤을 했으리라 생각하는 건 조금 무리한 일이다.


“크흠.”


일단 최태현, 개멋진나 최는 로그아웃 상태였다. 라이엔도. 릿샤··· 가 로그인 상태다. 호아킨도.


“릿샤, 호아킨.”


다른 플레이어들도 일단 전음이 들리기는 할 테였다. 제냐가 그랬던 것처럼. 로그아웃 상태여도 이 전장에서 이탈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서 평소에 플레이를 다소 하드한 모드로 해두는 게 중요하다. 평소 난적들을 상대하고, 어려운 위업들을 달성해두면. 이런 식으로 로그아웃을 해야만 하는 때 걸리는 임시 AI의 퍼포먼스가 더 좋아지니까.


보다 강한 적과 싸워 상처없이 이겼던 전적이 많을수록. AI로 인해 움직여지는 캐릭터의 전투력도 강해질 확률이 높아진다. 그렇게, 얻게 되는 연계 퀘스트의 난이도보다 더욱 어려운 도전들을 평소에 하고 거기에서 살아남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고난이 닥쳐도 쉽게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길드 인터페이스에서 캐릭터들의 생존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로그아웃된 이들도 게임 내에 캐릭터로서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임시 AI들의 상태도 말이다.

죽은 이는 다행히 없었다. HP도 많이 떨어져 있었고. 다들 그리 좋은 꼴은 아니었지만. 치명상이나, 곧 죽을 것 같은 사람도 없다.


제냐의 물음에 릿샤와 호아킨이 다행히 곧 대답을 했다.


[“어, 왔어.”]


릿샤가 무심하게 대답을 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이공계의 천재 여성이다. 그런 티는 별로 내지도 않고. 같이 지내다보면 그런 줄도 모르지만. 그녀가 발휘하는 초상술의 위력이나 난이도를 보면 현실에서도 어지간히 집중력이 좋고, 지능이 뛰어난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 반갑지 않은, 무정한 듯한 말투가 참으로 정겹게 느껴졌다. 릿샤 애드윈의 평소 성격을 알기에 느껴지는 정다움이다.


[“왔는가.”]


호아킨도 말을 주었다. 상공에서 사실 호아킨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변신 폼Form에서 평소, 인간형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보다 큰 도끼를 든 괴인의 모습은 눈에 쉽게 띄었다. 이 거대한 평야에서 말이다. 지인들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그렇게 찾을 수 있었는지도. 릿샤는 당장 둘러보는 시야 내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상공에 적이 없고 회전이 거의 소강상태라, 어딘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제냐가 허공에 뜬 채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예. 지금 막이요. 그··· 회전은 대충 끝난 것 같고. 지금 사르삿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네요.”


제냐는 멀리, 대공령이 있는 방향을 처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왼쪽 뺨을 손가락 두 개로 지긋이 눌렀다. 퀘스트 인터페이스 창을 제스쳐로 열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계 퀘스트의 내용을 훑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단순했고,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음···. 대공은 알사드슈트에 그냥 있는 모양입니다. 가서,”


우우우우우웅.


기이한 떨림과 소리가 났다.


하늘.


제냐가 떠 있는 상공보다 더욱 높은 곳에 무언가가 지나가고 있었다.


밝은 아침 햇빛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어떤 궤적이었다.


MP로 이루어진 거대한 탄환이, 알사드슈트 방면에서부터 날아오고 있었다. 제냐가 있는 평야 지점을 향해서는 아니었다. 그것을 가뿐하게 넘어서, 멀리 다른 곳으로 간다.


“······.”


대공이 무언가 괴랄한 짓을 벌이고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제냐가 퀘스트의 본론을 팀원들에게 다시금 주지시킨다.


“대공을 족치죠.”

[“그래야지.” “좋은 생각이네.”]


두 사람의 대답이 시원스럽다. 제냐는 일단 호아킨이 있는 쪽으로, 비행을 해서 날아가며 말했다.


“일단 최대한 컨디션을 되찾는 게 우선입니다. 호아킨이 있는 곳으로 날아갈게요. 릿샤, 어디에 있어요?”

[“나도 그리로 가지. 어차피 아티팩트가 있으면 알 수 있고.”]

“아.”


릿샤는 길드원들에게 나누어준 여러 개의 아티팩트들이 있었다. 언제나 그녀는 다른 동료들의 위치를, 누구보다 정밀하게 알아챌 수 있다.


길었던 밤은 끝났지만.


간밤에 시작된 소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공은 아직도 모가지가 떨어지지 않았고, 여전히 웃고 있을 테였다.


괴물의 목을 따러 가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미치광이의 꿈은, 단지 백일몽으로 끝나는 편이 좋으리라.


모두를 위해서.


단지 게임 속에서의 일에 불과하지만,


책 속의 이야기라 할 지라도 좋게 끝나는 편이, 좋은 법이었다.


“모이고 나서 생각하죠.”

[“그래, 금방 가.”]


제냐가 바람을 가르며 움직이면서 말했고, 릿샤가 답하며 그녀 역시 멀리에서 날아오기 시작했다.


로그아웃을 한 라이엔과, 개멋진나 최와 같이 있는 상황이었고.


라이엔은 로그아웃을 한 상태여도 멀쩡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썬더스를 몰아서, 릿샤와 최태현을 태운 채 평야의 한 지점으로 날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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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 346. 왕도의 사정 24.06.06 13 1 11쪽
346 345. 왕도王都, 아침 24.06.06 8 1 11쪽
345 344. 마늘에 미치다 24.06.06 10 1 18쪽
344 343. 잠깐, 잠 24.06.06 8 1 13쪽
343 342. 로멜리아는 24.06.06 8 1 17쪽
342 341. 제어기지 24.06.06 9 1 13쪽
341 340. 광기어린 웃음을 지었다. 24.06.03 11 1 20쪽
340 339. 요드먼. 돌격 24.06.03 11 1 17쪽
339 338. 말리 24.06.03 11 1 12쪽
338 337. 쉴더Shielder 24.06.02 9 1 12쪽
337 336. 폭격 세례 24.06.01 14 1 14쪽
336 335. 전장의 한복판, 제냐 24.06.01 9 1 16쪽
335 334. 아무도 없었다. 24.06.01 9 1 12쪽
334 333. 제어 기지 24.06.01 9 1 11쪽
333 332. 집중 24.05.31 7 1 12쪽
332 331. 무수한 게임 오버Game Over 24.05.31 9 1 15쪽
331 330. 착탄 24.05.30 12 1 22쪽
330 329. 계획, 본격적(2) 24.05.29 9 1 22쪽
329 328. 계획, 본격적 24.05.29 9 1 12쪽
328 327. 작업, 한창 24.05.28 12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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