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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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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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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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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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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아이템들Items

DUMMY

화살에 꿰여 죽은 시신이었다. 물론 평범한 화살은 아니다. 갖가지 색깔의 화살들이었고, 부러진 놈들이 태반인데. 그것들은 부러지기 전에 보통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혹은 관통력을 갖고서 늑대의 몸 안에 들어가기도 했고. 그 안에서 독기나 냉기, 화염의 기운을 뻗치기도 했다.

늑대는 만신창이가 되어 죽었다. 검은 늑대의 숨이 끊어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가 않았다. 전통을 두 개쯤 소모했을 때까지. 늑대는 자신의 남은 MP를 모조리 소진해서 잘 막아내었다. 그러나 제냐도 필사적이었다. 지금 늑대를 살려보내면, 지루한 힘겨루기를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할 지 모르니.


검은 늑대는 감각이 빠른 놈이었고. 제냐가 특수한 초상술사가 아닌 이상. 초장거리에서 놈을 알지도 못한 때 암살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결국 중거리 정도에서 공격을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거리감인데. 검은 늑대가 가장 약해져있을, 아까가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제냐는 물고기를 놓치지 않고 낚아채는 낚시꾼마냥. 때를 놓치지 않았고. 결국 놈을 죽였다. 나름대로 성과라고 한다면, 성과라고 할 수 있으리라. 체감상 레벨 200에 근접하는 놈인 것 같았다. 몬스터 레벨이 200이 아니라. 레벨 200정도 되는 플레이어들이 여럿 모여야 토벌할 수 있는, 적정 사냥 레벨이 200언저리 되는 보스 몬스터 말이다.


체감으로 적당히 가늠한 것이었지만 얼추 맞기도 했다. 아마 그 즈음이었을텐데. 제냐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봐야, 레벨 200언저리의 플레이어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강할 수는 없었다. 슈페리얼 마스터, 라고 불리는 300 구간까지는 한참이나 먼 것이 사실이었고.

이 게임은 레벨이 오를수록 점점 더 성장하기가 어려워지는 구조를 갖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홀로 몇 명 분, 혹은 십 수 명 분 이상의 노동을 해낸 참이었고. 막대한 보상치는 덤이었다.


"스킬skill."


창을 열자 회색빛의 반투명한 막이 펼쳐졌고. 어지럽게 스킬명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걷기, 뛰기, 마라톤, 점프, 기초검술1, 기초장검술1, 기초외날검술1, 기초궁술1, 기초장궁술1, 투척술, 기초단검술1, 힐1, 파이어볼1, ...]


차마 다 세기 어려울 정도의 나열이었고. 어지러운 박스 위쪽에 항목별 분류가 있었다. 몇 번 달칵거리면서 이름들을 정리해가고, 최근에 가장 주력으로 사용하고 있는 부분들을 보았다.


'기력술'과 'mp운용', '외날검술', '썬더 인챈트', '파이어 인챈트', '뇌검술', '화검술', '검기-마스터' 따위의 스킬들이 있는 부분이었다.

고수급 이상의 시점에서 익히거나, 혹은 레벨업이 최근 자주 이루어진 것들만 따로 모아서 보는 중이었다. 최근에 익힌 스킬일수록 레벨업이 자주 있게 마련이었다. 스킬 레벨은 3, 4이상으로 올라가면서 곧바로 막대한 스킬 경험치를 요구한다. 제냐가 하는 마냥. 무식한 수준의 솔로 플레잉을 계속해서 벌이지 않는다면 스킬 레벨을 올리는 건 지난한 일이다.


무식한 짓거리는, 늘 그 나름대로의 보상이 따른다. 제냐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스킬 인터페이스 창을 껐다. 레벨이 오른 부분도 있었고. 대개 눈에 보일 정도로 스킬 경험치가 오른 걸 확인했다. 스킬 레벨이 오르는 건 정말로 쉽지 않다. 하나하나가 오를 때마다. 확실히 전투력에 큰 향상이 있으니까.

비련시 온라인의 전투력을 측정하는 삼대 요소가 있었고, 스탯 아이템 스킬이 그것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제냐가 보기에는 스킬이 가장 큰 요소라고 생각이 되었다. 스탯은 그 자체일 뿐이었고. 캐릭터의 체급을 높여주는 가장 큰 부분이었고. 아이템은 스탯이나 스킬이 모자랄 때 가장 빠르게 전투력의 체급을 올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있는 그대로의 힘에 불과했다. 아이템에 스킬이 포함되어 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건 본질적으로 '스킬'이라고 봐도 좋으리라. 엄밀하게 말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스킬은 그 자체로 힘이 되기도 하지만. 패시브 스킬의 경우에는. 캐릭터가 어디로 가야할 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일일이 알려주는 힘이었다. 이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낸 시스템 AI가 특별하게 길을 일러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글을 쓴 작가가, 그 책 속 세계에서 신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 비련시 온라인을 만들어낸 시스템 AI가 있을 때. 그건 곧 신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신을 믿느냐, 고 묻는다면. 그것에 대해서 깊이 알고 있지 못하는 제냐였고, 김서원이었지만. 어쩄든 비유를 해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부모님의 경우에는 교회를 다니고 계시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깊은 취미가 아닌 부분이다. 아무튼.


스킬은 '감'을 익히게끔 도와주는 가장 좋은 요소이다. 스킬은 길을 일러주고. 그 다음에 스킬을 빼더라도 캐릭터는 '감'을 익힐 수 있게 된다.

거기서 감이 좋은 플레이어와 아닌 플레이어가 갈리기도 한다. 감이라는 건 이 비련시 온라인에서 고수급으로 올라갈 수 있느냐 마느냐를 가르는 가장 주요한 점이기도 하다. 게임에 재능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그 부분이리라. 감이 있다면 어쨌든 바른 길을 찾아서 갈 수 있었고. 연습을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연습을 계속해서 반복하다보면, 어쨌든 사람의 몸은 자신이 느끼는 감각, 답에 가깝게 훈련이 되게 마련이었다.


근육이라는 건 반복 연습에 기민하게 반응을 하니까. 그리고 정신이 있기에, 또 몸이 움직이는 것이었으니까.

육신과 정신. 둘 중에서 어느 게 선행되어야 하느냐, 고 운동 선수에게 묻는다면. 대개는 정신력을 말할 테였다. 육신은 기본적인 것이었고. 그 이상의 한계를 넘어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 정신은 항상 육체 너머의 한계에 닿아 있어야 했다. 지향점이 먼저냐, 실행이 먼저냐 하는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유저, 플레이어들은 콘란드 대륙에서 롤플레잉을 하는데 별로 지식도 경험도 없는 이들이리라. 누가 이런 중세 판타지 월드에서의 삶이 익숙하겠는가. 그러나 스킬은 아주 높은 수준으로 먼저, 지도를 보여준다. 가야 할 게임 내 인생의 경로를 그려내는 지도를 말이다.

검술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AI의 가르침에 따라서 검술에 대한 감을 훌륭하게 익힐 수 있었다. 제냐 역시 그러고 있었고.

이런 감을 가지고, 현실에서 검을 다루는 건 또 다른 일이기는 하다. 실제의 김서원은 진검이라고는 한 번도 잡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진지하게 연습을 하고자 한다면, 문외한보다는 빠르게 익힐 수 있을 테였다.

보이지 않는 정신적 유산이라는 건 그런 법이었다.


그리고 그게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 내에서 유일하게 플레이어가 가지고 갈 수 있는 무엇이기도 했고.


제냐는 그 점을 깨달았기에, 빠른 성취를 보일 수 있었다. 한 번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말해주는 듯한 스킬의 관용은 그 어떤 학습법보다도 빠른 방식이었다. 배우려고 하는 인간이 정신만 바짝 차리고 있다면. 한 번 배우는 것만으로도 스킬의 근육 인도에서 뭔가 깨달을 수 있다면. 이미 재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는 했다만.

그런 면에서 보면 이 게임은 사용자의 재능을 개화시켜줄 수 있는 아주 좋은 학습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스킬 레벨은 쏠쏠하게 올랐고. 플레이어 레벨도 약간이나마 올랐다. 스탯은 바로 오르지는 않는다. 지연 시간이 조금 걸리는 편이었다. 신체가 큰 변화에 적응할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움'을 표방하고 있는 게임이었으니 말이다. 삽시간의 인간의 신체 기능이 어마어마하게 변화하는 건.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 내의 여러 연출 중에서는 조금 부자연스러운 쪽에 속했다.


보상치로 주어지는 변화 중 두 가지 종류는 확인을 했다. 나머지는 아이템이다. 검은 늑대의 크기는 거대하다. 상반신만 남아서. 어둠숲의 한 자리에 처량하게 쓰러져 있다. 제냐는 넘어진 놈의 아가리 앞에 있었다.

화살에 맞아서 등판이나 머리 위쪽 부근에는 커다란 구멍이 많이 생겨 있었다. 지금이라도 눈을 뜨고 제냐를 노려볼 것 같은 생생함이, 그 거대한 시신에는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압도감이었는데. 그건 흑마력에 기인을 한다.


MP라는 건 생생한 생명력을 갖고 있는 힘이었으므로. 실제 생명은 늑대의 시신으로부터 떠나갔을지언정. 그 의지의 여력이 남아서 아직까지 그럴싸한 분위기나 압도감 따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제냐는 한숨을 몰아쉬며. 피곤한 표정으로 늑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비들의 내구도 역시 많이 닳았다. 돌아가서, 수리를 좀 해얄 것 같았다. 이대로도 전투를 치르지 못할 건 아니지만. 굳이 장비의 내구도를 극한까지 깎아먹을 이유는 없었다. 배터리 역시 굳이 방전시키지 않는 게 좋은 것처럼. 배터리보다는, 일단 장비의 내구성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게 더 좋지 않은 상황이리라.

늑대의 핏물들 역시 장비를 상하게 한다. 그것에 흑마력이 진하게 담겨 있었으니까. 독극물을 뒤집어쓴 것이나 다름 없었는데. 기본적으로 제냐 역시 MP를 이용한 기력술의 달인이기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피'는 중요한 매개가 되고는 한다. 이 세계에서, 여러가지 스킬들을 발휘하는데 말이다. 초상술의 매개로 사용되는 여러가지 재료들 중에는 고레벨 몬스터의 피 역시 있었으니. 그대로 피를 섭취하는 건 독에 불과하지만. 어떤 스킬들 중에는 몬스터의 '피'를 먹는 것으로 일시적인 강화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레어, 혹은 유니크 스킬들도 있었다. '식혈'이니 뭐니 하는 스킬인데. 제냐는 일단 익히고 있지 않았다. 호아킨이 그런 계통의 유니크 스킬을 익히려고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변신술사로서, 괴물의 형상을 한 채로 싸울 때가 많으니까.


아가리를 사용해 상대를 씹는 게 유효한 공격 수단이고. 그러다보면 몬스터의 살이나 피의 맛을 불가항력적으로 알게 될 때가 있었다. 보통은, 더럽게 맛이 없는 느낌이었다. 제대로 된 피의 느낌은 아니었고. 그냥 형상을 시각적으로 모자이크 처리 해버리는 것처럼. 그런 피나 생살의 맛 역시 실제의 피, 생살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맛으로 바꿔둔 모양이었다. 호아킨은 늑대나 사자, 곰 등 여러가지 형태로 싸우면서. 상대의 몸을 물어 뜯을 때마다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았노라고 했는데. ‘식혈’ 스킬을 이용해서 차라리 그것을 버프Buff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


가만히, 죽은 놈을 바라본다.


그 놈 참.


잘 생기기는 했다.


늑대라는 동물은 가만히 보고 있다보면, 매끈하게 잘 빠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한 마리 외로운 늑대라거나, 뭐 그런 비유를 사내들이 종종 쓸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죽은 놈이었다. 지독한 새끼였고.


언제쯤 몬스터의 사체가 사라질까.


프린스 오브 고블린의 앞에서 기다리던 것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이 지나서 늑대의 몸뚱이가 사라졌다. 바람결에 연기나 먼지가 지워지는 것처럼. 늑대의 몸뚱아리는 곧, 있었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진다.

한 순간이었다. 어, 하는 사이.


반토막이 났어도 여전히 건물만한 몸뚱이였는데.


주변은, 거대형의 몬스터들과 싸울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초토화가 되어 있는 꼴이었다. 땅이 패이고. 구덩이가 생겨나고. 또 년수가 얼마만할지 알 수도 없을 거목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늑대의 기척이 사라졌고. 놈의 흑마력 역시 농도가 짙었으나 슬슬 사라져가고 있었다. 아래에서 보고 있노라면 2, 3층짜리 저택만한 공간감을 주는 놈의 시체는 이제 없다. 주변에 있는 다른 몬스터들은, 그래도 아직 이 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테였다. 약한 놈들이나, 강한 놈들이나 마찬가지이다.


어둠숲의 최심부는, 그 바깥과는 또 다른 기준으로 자기들만의 룰이 형성되어 있었다. 야생의 룰은 때론, 도시에서의 그것보다 더 엄정할 때가 있다. 목숨을 걸고 만들어졌고, 또 지키는 물건이다보니. 그럴 수도 있지, 라는 게 전혀 통하지 않는 룰이었다.

최심부는 이 곳에 거하는 최상급 몬스터들에 의해서.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정확하게 그 지도를 갖고 있지는 못했다. 제냐도. 그냥 플레이어들에 의해서 밝혀진 몇몇 구역을 알 뿐이었다. 개중 하나가 지금, 거대 검은 늑대의 땅이었고.

그 구역들은 제법 유서깊은 땅덩어리 구획들이었고. 몬스터, 터줏대감이 사라진다고 해서 곧바로 공석이 차거나 하지는 않는다. 공석 그대로 아마 시간이 조금 더 지날 테였고. 자연스럽게 몬스터가 리스폰Respawn(재생성되다, 리젠Regen;eration과 같은 의미, 게임 따위에서 쓰이는 단어)되거나 해서 빈 자리가 채워지리라. 혹은, 다른 곳에 있던 상급 몬스터가 우연한 기회로 레벨링이 되어서 최심부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이런 구역에는, ‘적당’한 기준 레벨이 있었고. 해당하는 레벨이나 전투력을 충족시키는 몬스터가 자리를 채우면 리스폰은 일어나지 않았다.


최심부 바깥에 있는 몬스터들, 보스 몹들 중에서 어떤 놈이 강력해져서 들어오게 되는 것도. 정상적인 자리채움의 한 방식이라 할 수 있었다.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는 최심부의 구획을 이미 존재하는 놈이 하나 더 차지하는 것은. 그만큼 강함을 증명해야 하는 일이었다. 더 넓은 땅이라는 건, 그만한 땅을 지키기 위한 힘을 요하는 것이었으니. 인간들의 생리와도 비슷할지 모르겠다.

몬스터들에게도 땅이라는 건 제법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흑마력의 밀도가 높고 풍부한 땅을 더 많이 가진다면. 단위 면적당 MP가 비슷할 때, 곧 더 많은 MP를 수급할 수 있다는 말이 되니까.


더 넓은 지역을 제 집으로 삼고 거닐면서, MP를 삼키고 그 체내에 모은다면 몬스터는 자연적으로 더 강해질 수 있으리라. 몬스터가 강해지는 방법에는 그러한 류가 또한 있었다. 다른 몬스터를 잡아 먹거나, 플레이어를 죽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기력술사나 초상술사들이 단순한 훈련을 통해서 강해지는 과정과도 사실은 비슷했다.

술사들, 초인 캐릭터들 역시 자연계에 존재하는 SP들을 자신의 체내로 끌어들이고 정제해서. 계속해서 강해지고 경지를 높여가는 중이었으니. 아주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그런 방식만으로 강해지는 플레이어는 없다고 해도 좋을만큼 말이다.


플레이어들은 늘 패스트 루트Fast route를 파서 따라가게끔 되어 있는데. 그건 시스템적으로 유도되는 점도 있었고. 플레이어들이 그런 방향성을 선호하는 탓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장단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성장을 하는 것이. 이후 최정상의 경지에 올라서는 단점이 될 수도 있었다. 어떤 분야의 기술을 익힐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빠르게만 여러 기술들을 습득하다보면. 그 분야의 기술의 기초적인 원리를 놓칠 때가 있었고.

결국 기본기가 부족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던 ‘기본기’라는 건 사실은 늘 가장 중요한 요소였으므로. 최정상급 위치에 가서 다른 경쟁자들과 다툴 때,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하는 법이었다.


‘쉬운 건 없다.’ 그런 문장은 분명 비련시 온라인의 모티브가 되는 문장 중 하나였고. 그렇게 플레이를 할 수 밖에 없도록 게임을 만들어둔 주제에. 최상위권 경쟁을 하는 위치에 가서는 다시 걸림돌이 되게끔 구조를 짜놓았다는 점에서. 개발진들의 악랄함이 더 엿보이는 면이기도 하다.


어쨌든. 교훈적이기는 했다. 한낱, 게임 속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저 쉬운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깨달음이 들어 있는 설정이니까. 실로 세상은 그러하다.


검은 늑대의 거대한 몸뚱아리가 다 사라졌다.


늑대가 있던 곳에는, 그저 움푹 파인 넓은 구덩이 하나만이 남았다. 시커먼 나무의 썩은 잔해나, 검고 부스러지는 흙들 따위가 지면을 이루고 있었다. 제냐는 천천히 다가갔다. 사실 멀리에서 돌멩이 하나만 던져도 되기는 하는데. 그냥 그러고 싶어서, 검은 늑대의 시체가 있던 자리의 중심으로 다가간다.

네모난, 푸른. 정육면체 박스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이런 박스나, 인터페이스 창을 볼 때면 늘 비련시 온라인이 확실히 게임이구나, 하고 인지할 수 있었다. 유저들이 말이다. 인터페이스와 관련된 모든 창들을 없애두고. 그냥 단순히 하늘을 올려다본다던가 할 때는. 도저히 현실이 아니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광경이었지만. 이런 식의 어정쩡한, 또 어설픈. 어색한 디지털 형상물은 이곳이 데이터로 이루어진 곳임을 분명하게 알린다.


푸른색의, 명암도 없는. 외곽선이 있어 각 면을 뚜렷이 구분할 수 있는. 빛나고 그림자가 없는 정육면체 박스를, 다가간 제냐가 발치로 툭 건드렸다. 장화의 코가 그것을 치자 곧, 쉬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아이템 박스 내부에 있던 것이 과도하게 큰 용량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 인벤토리에 들어가지 않고 현물화가 되어 나타났으리라. 그리 좋지 않은 소식이기도 했다. 일일이 손을 써서 들고 챙겨가야 한다는 말이었으니까. 제냐는 아이템 창을 열었다.


“IV."


푸른 색의 아이템 리스트 윈도우가, 시야 곧 앞에 나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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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 337. 쉴더Shielder 24.06.02 1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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