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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 님의 서재입니다.

유사인간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SF

jinos73
작품등록일 :
2018.03.19 17:52
최근연재일 :
2018.05.11 12:00
연재수 :
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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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글자수 :
234,389

작성
18.04.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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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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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도피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세계는 질문으로 이루어진 시공간이다.




DUMMY

유선은 안절부절 재영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가까스로 놈들의 추격을 뿌리치는데 성공하고 그들은 성수동 인근의 소규모 가죽공장들이 즐비한 곳에 몸을 숨겼다. 이곳은 전통생산구역으로 특별 지정된 구역으로 최대한 인간의 힘으로 각종 가죽 제품들을 만드는 곳이다. 작은 공장들이 아주 복잡하게 구성되었고 네트워크 감시장비들도 최소화된, 인공적으로 조성된 인간의 구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역은 HN이 극찬하는 곳으로 기계해방구역으로서 최우선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그들이 정치권에 강력하게 청원을 넣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옛 방식대로 운영되는 커피숍에서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주인장 한 사람과 점원 한 사람이 분주하게 오가며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수제(수제)특별구역답게 커피도 주인장이 직접 손으로 내리고 있었다. 이미 인공지능에 의한 커피 드립이 사람들에게 더 맛있게 느껴지고 있다는 뉴스도 이제 식상한 시대이지만 주름이 깊게 팬 주인장은 길고 뾰족한 주전자 주둥이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물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잘생긴 점원은 아마도 장인 주인장의 제자 같아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근사한 데이트 장소였을 거라고 유선은 생각했지만 도착하자마자 말을 잃은 재영 덕에 아늑하고 편안한 카페는 턱이 덜덜 떨리는 냉골 같이 되어버렸다. 섣불리 말을 걸기 힘들었다. 자신의 우악스러운 폭력 때문일까? 사실 그녀 자신도 이렇게 압도적인 폭력이 자신의 팔과 다리에서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다급한 마음에 밀쳐버리면 여지없이 두 다리가 공중에 떠서 날아가던 놈들과 가로막던 문이란 문은 그녀의 몸에 닿으면 모두 활짝 열려버렸다. 괴물이 되어 버린 걸까? 아니 애초에 괴물이었던 것일까? 그녀는 문이란 문은 모두 부숴버린 왼쪽 어깨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유선 아픈 거야?”


통증보다 남자친구가 입을 연 것이 더 반가운 그녀였다. 동시에 인생의 고뇌를 혼자 짊어진 척 입을 다물고 있던 그에게 심통이 났다.


“오만상을 다 쓰고 나니 이제 봐주는 거야? 뭐 나야 워낙 튼튼하니까 이해해야겠지?”


“미안해. 그냥 너무 혼란스러워서. 대체 내가, 아니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걸까 생각했어. 그냥 존재할 뿐인데 뭐가 그렇게 미울까? 물론 이해가 되지. 자기들이 설 자리를 뺏었다고 생각할 테니깐. 그런데 그게 우리 죄는 아니잖아? 자신들이, 자신들이 그렇게 만들었잖아. 그렇게 만든 사람들한테 그 분노를 쏟아 붓는 게 맞지 않나? 왜 자신들이 창조주들인 주제에 피조물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거야? 아, 미안 너는 피조물이 아니지. 내가 흥분했어.”


그녀는 그의 마지막 말이 거슬렸다. 잠깐 사이에 벽이 생겨버린 느낌이었다. 아니지. 지금 그는 혼란스러운 거야. 누군들 그렇지 않겠어? 평범한 대학생이 갑자기 인류의 불구대천 죄인이 되어버린 격이니.


“하아. 건장한 남자들을 종이비행기처럼 여기저기 날려버리는 내가? 툭 밀치면 문짝이 아니라 문짝을 붙들고 있던 벽까지 부서지는데? 나한테 청초한 신입 여학생이란 표현이 어울릴까? 아니 애초에 내가 인간이긴 했던 걸까? 나도 너처럼 다른 사람의 기억이 삽입되었을 수도 있잖아. 그렇지 않아? 처음에 리미트를 풀고 이 힘을 느꼈을 때 좋더라고. 더 이상 나약해서 누군가에 의지하지 않아도 될 만한 충분한 안정감이 생기더라. 남자들은 이런 기분으로 살까? 그 이상이지. 인간이라면 더 이상 내 상대가 아니잖아? 쇠젓가락을 엄지 하나로 휘어버리는데 쾌감까지 느껴졌어. 이게 힘이고 권력이라는 것이겠지? 하지만 금방 슬퍼졌어. 난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무엇이더라고. 누구나 초인을 꿈꾸지만 막상 초인이 되고 보면 외톨이가 되어 버리는 거지. 괴물같이 강한 힘을 가진 자에게 두려움을 느낄지언정 같은 동류라 여길 사람이 있을까? 심재영. 너까지 그러면 곤란하지 않겠어?”


재영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녀의 슬픈 눈앞에 가슴에는 깊은 통증이 느껴졌다.


“미안하다. 내가 잠시 돌았나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생각이 조금 정리되었나 싶었는데 서울에 들어서자마자 쫓겨 다니면서 너무 몰려 버렸나봐. 내가 원래 그래. 어렸을 때도, 아니지, 이건 내 기억이 맞나? 궁지에 몰리면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문제를 피하거나 상황을 탓하거나 남 탓만 했어. 그래 그렇지. 하지만 이건 내 기억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다른 재영이의 기억일지도 모르겠네.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아. 내가 내 기억을 하나도 믿질 못하겠어. 내 존재 자체가 허구일지도 모르잖아. 멀쩡히 이렇게 사고하고 고뇌하는데 내 존재 자체를 느낄 수가 없어. 대체 이게 뭐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고 돌이키기나 할 수 있는 건가? 미칠 것 같아.”


유선은 가만히 그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대었다. 다시 한 번 그녀의 따스한 온기에 재영의 요동치던 가슴이 진정되었다.


“넌 참 신비해. 왜 네가 다가오기만 해도 불안과 냉기가 사라지는지 모르겠어.”


“또 닭살 멘트. 손 오그라든다. 뭐 어쨌거나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네. 그리고 나도 너 여행하는 동안 계속 생각했어. 너라는 남자 나한테 대체 무슨 의미일까? 왜 이렇게 내 마음을 흔들어놓는 걸까? 내가 원래 좀 단순한 여자거든.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 딱 질색인데 이번엔 고민을 했지. 표면이 아니라 심연 깊숙이 잠들어 있던 나한테 말을 걸어 봤거든. ‘야, 또 다른 유선. 넌 대체 뭐냐?’라고 말이야.”


“뭐래?”


“그게 참 건방지게 대답하더라고. 내가 그렇게 하나? ‘낸들 아나?’라고 하데? 좀 열받더군.”


“흐흐흐. 너 다운데?”


“이게 죽을래? 또 다른 유선이 그랬어. 너 답지 않게 무슨 자아성찰이냐고. 너답게 현실에 충실하게, 솔직하게 살면 된다고 하더라. 기억? 그까짓 거 아무 것도 아니라고, 동영상 공유사이트에 올라가 있는 수많은 동영상 중의 하나일 뿐인데다가 현재의 내가 현재의 관점으로 재편집했기에 과거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니깐 잘해봐야 참고사항이라고 하더라. 애초에 우리의 기억 자체가 시각 및 감각장치가 받아들인 정보를 편향된 뇌에서 편집한 것이라 그것 또한 진실이라고 할 수 없다는 거지. 현재의 나를 인정하고 현재를 감당하고 감내하는 것 외에 나머지는 허구에 가깝다는 논지로 나를 설득했어. 말이 되긴 하는 거겠지? 난 뭐 받아 들였어. 결국엔 내가 한 소리니깐.”


“와. 또 다른 유선은 엄청 똑똑한데?”


“뭐가 어째? 이게 정말. 남은 생각해서 엄청 긴장하고서 얘기하는데.”


“아야, 아야야.”


유선은 재영에게 헤드락을 걸고서 주먹으로 눈을 비벼주었다. 힘이 세진 그녀였기에 실제로 아프기도 했지만 더 과장되게 소리를 지르던 재영은, 그러나 그녀가 힘을 풀고 하얀 이를 보이며 밝게 웃자 옅게 핑크빛 립스틱을 바른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입을 떼었다.


“야 너 뭐야. 지금 무슨!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재영은 다시, 이번엔 두 팔로 그녀를 품안으로 뜨겁게 끌어들여 그녀의 입술을 사랑했다. 그녀는 부드러웠고 따뜻했다. 유선은 놀란 토끼눈을 했으나 이내 감았고 그녀도 그를 두 팔로 힘껏 안았다. 그의 가슴은 넓었고 뜨거웠다. 미칠 듯이 몰아치던 시간은 사랑이라는 강력한 중력파 앞에서 한없이 늘어지더니 멈추어 버렸다. 적어도 두 사람에게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유선은 갈증으로 현실세계로 돌아왔고 배꼽 시간표가 ‘너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 수는 있어도 밥 때를 건너뛰는 것은 불가능한 사람’이라고 확인해주었다.


“재영아. 배 안 고파?”


“뭐 별로. 네가 같이 있는데 배가 고플 리가, 헉!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거짓말.”


“그러게 시간이 제 맘대로 움직이는 것 같네.”


“상대성이론 그런 걸까? 배고프지?”


“난 밥 때를 건너뛰면 곤란해. 꽤 난폭해져.”


“진짜? 그건 곤란하지. 자 어디 가서 먹을까. 아! 질문 하나만 할게. 그게 너 아까 낮에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뭘? 아 괴력 발휘한 거?”


“아니 아니. 그건 전에 리미트 해제하는 것 얘기해 줬잖아. 그런데 너 단순히 힘만 해방한 걸로 설명되지 않게 너무 능숙했어. 마치 격투기선수? 아니 SF영화 여주인공처럼 막 붕붕 날아다니고 무술을 구사하는데 현실 같지가 않았어.”


“아, 그거. 많이 이상했어? 보기 흉했지?”


“그런 얘기가 아니고, 일단 정말 너 너무 멋졌어. 영화 속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니깐. 내가 궁금한 건 대체 어떻게 그런 퍼포먼스를 네가 할 수 있는 거야?”


“내가 아직 얘기 하지 못했구나. 중1때 사고 난 후부터 얘기해줬지? 나 초등학교 때까지 태권도 국가대표였어.”


“뭐? 국가대표? 진짜? 거짓말!”


“진짜야. 내가 꼭 무술을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아빠 때문인데 아빠는 격투기 프로선수였어. 롱런하지는 못했지만 잠시나마 세계 웰터급챔피언도 하셨어. 부상 때문에 그만 두셨는데 미련이 남아서 날 격투기 선수로 키우려고 하셨어. 태권도 외에도 주짓수, 유도, 권투도 배웠어. 무술을 특별히 좋지도 않았지만 싫지도 않아서 별 생각 없이 유치원 가기 전부터 계속 이것저것 배웠어. 아마 사고가 없었으면 지금쯤 프로에 데뷔했을껄?”


재영은 입을 떡 벌렸다.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는 건 네가 사고로 인해 안드로이드 몸이 아니더라도···”


“네가 날 이길 수 있냐?”


“응.”


“불가능하지.”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초등학교 때이긴 하지만 남녀 초월한 통합챔피언이었어. 그건 그렇고 남친님. 여친이 배가 많이 고픈데 어쩌지?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유선은 주먹을 딱 들이댔다. 장난인줄 알지만 장난같이 느껴지지 않는 재영이었다.


“어 빨리 식당 찾자.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 사줄게.”


호들갑을 떨며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재영의 모습에 유선은 활짝 웃으며 따라 나섰다. 하지만 아무리 네트워크 감시시스템이 적은 곳이지만 대부분의 상점들은 자체 감시시스템을 갖추고 있기에 결국 찾아낸 곳은 포장마차를 겨우 면한 가건물 구석에 초라하게 차려놓은 분식점이었다.


세상에 제일 맛있다고 하기엔 많이 부족한 떡라면, 김밥, 떡볶이와 튀김 구성이었지만 둘에겐 진수성찬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훌륭한 만찬이 되었다. 서로를 알아가는 대화들이 최고의 에피타이저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다시 시간은 변덕을 부려 멈춘 듯 하다가 순식간에 흘러가버렸다. 해가 떨어지자 어둑해진 골목길엔 인간의 낭만을 찾아온 연인과 친구들이 간간이 지나갔다. 재영과 유선이 깔깔깔 웃고 있는데 할머니에 가까운 분식점 주인이 두 사람 사이에 군만두가 담긴 플라스틱 접시를 툭 던졌다. 둘은 눈을 크게 뜨고 군만두의 뜻을 헤아려보려 했다. 주인은 퉁명스럽게 얘기했다.


“둘이 하도 깨소금 튀기며 쉬지도 않고 떠들어서 먹은 거 다 소화되었을까 싶어 서비스하는 거야. 뭐가 그렇게 좋아?”


다시 둘은 깔깔깔 웃었다.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근심 걱정 없을 때 신나게 놀고 열심히 사랑해. 나중에 그 추억으로 사는 거야.”


유선은 주인 할머니의 말에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낮에 죽을 뻔 했던 사람들이 이렇게 웃고 떠들고 있다니 마법에라도 걸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우리 이렇게 웃고 떠들고 있어도 되는 걸까?”


“뭐 우리가 살짝 미친 것 같기도 하네. 묘하게 현실감이 없는 것도 같고. 우리가 알던 현실이 거짓말처럼 다 부숴져 버렸잖아. 내가 유선을 사모하는 이 마음 외에는 다 꿈같아.”


“어허 이 남학생 또 닭살 돋는 멘트를. 기회만 생기면 작업성 멘트를 날리는구만. 너 사실 선수(?) 아냐?”


“그러는 여학우께서는 그야말로 싸나이 같으시오. 우리 서로 바뀐 건가?”


“됐고요, 그래 이제 우리 뭘 할까?”


둘은 현실로 돌아왔다. 미소는 곧 사라졌다. 재영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확실치는 않은데 나도 리미트 해제가 가능하다고 들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숨겨진 힘이 있다는 것이지. 하지만 네가 하듯이 신체 일부분에 자극을 줘서 하는 것이 아니고 유사인간 전문병원에 리미트를 해제할 수 있는 장비가 있다고 했어.”


“그래? 그거 잘됐네. 무슨 힘인지는 모르고?”


“몰라. 이걸 말해준 교수는 유사인간 프로젝트가 워낙 극비로 진행된 데다 이게 DNA 조합에 의해 랜덤으로 능력치가 생겨서 일단 리미트 해제를 시켜봐야 알 수 있다고 하더라고. 프로젝트가 아직 안드로이드처럼 능력을 콘트롤 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했어. 최악으로는 아무 능력도 발현되지 않고 오히려 몸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다고 겁도 주던데?”


“아 그게 뭐야? 위험하잖아? 하지 마. 내가 지켜줄게.”


“하하. 듣기만 해도 든든하네. 하지만 내 몸은 내가 지켜야지. 명색이 남잔데 내 여자는 내가.”


“그만! 또 시작이네 버터남. 눈도 깜짝 하지 않고 어떻게 그런 말들을 하냐? 흰소리 그만하고 어떻게 할지나 궁리해보자.”


“낭만은 일절도 없지. 물론 그 톡 쏘는 매력이 더 달콤하기는 해.”


유선은 이 남자의 느끼함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으나 또한 너무 즐거웠다. 시간이 이대로 이 공간 안에서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보았지만 시간은 무표정하게 흘러갔다. 둘은 재영의 리미트 해제를 시도하기로 합의했다. 부득이하게 유선의 무력을 다시 한 번 사용하기로 했다. 계획은 담당 의사를 찾아가 부탁을 해보고 관철이 되지 않으면 힘을 사용한다였다. 재영은 유선이 걱정이 되었다.


“유선. 다시 한 번 생각해봐. 이건 불법적인 일이 될 수도 있고 정말 생명을 걸어야할 수도 있어. 난 네가···”


대답 대신 유선은 홀로그램을 열어서 뉴스 속보를 보여주었다.


“네가 아까 고민에 빠져있는 동안 나온 소식인데 우리 이미 멈출 때는 아닌 것 같아.”


홀로그램에는 대문짝만한 글자로 ‘괴력의 소녀와 소년, 그들의 정체는?’이란 타이틀이 떠 있었고 엄청난 조회수를 올린 동영상의 조회 카운터가 계속해서 실시간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동영상에는 유선이 놈들을 허공으로 날려버리며 전진하는 모습이 전파되고 있었고 엄청난 댓글이 자극적인 소재에 반응하며 달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 전체에 사각(사각)을 허용하지 않는 지능형 감시네트워크에 의해 일반 범죄율도 크게 떨어졌지만 강력범죄는 찾아보기 힘든 세상에서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고 부서진 문이 날아다니고 벽이 무너져 내리는 장면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온라인상에는 벌써 ‘괴력소녀’ 팬클럽이 생겨났고 동영상을 공유하고 숭배하는 등 이상열기까지 느껴졌다.


“이게 대체?!”


“너하고 나, 특히 나는 이대로 물러날 수 없게 되어 버렸네. 그러니깐 기사도 발휘는 다음 기회를 노려 봐. 아, 그리고 일단 리미트 해제를 시도해보고 그 다음에 가볼 곳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래? 저런 위험해 보이는 동영상을 보고도 우릴 도우려는 사람이 있을까?”


“어렸을 때 같이 태권도 했던 오빠가 있어. 내가 다쳤을 때 진심으로 같이 슬퍼해주고 위로해줬어.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했는데 세계선수권 대회 나갔다가, 독일이었을 거야. 거기서 국내 HN보다 더 과격한 반유사인간 무장투쟁 조직인 HLU(Human Liberation Union)의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났고 관광차 그저 거리를 걷던 오빠와 일행들이 직격탄을 맞았어. 전도유망했던 국가대표들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거지. 오빠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파편이 온몸에 박혀서 결국 나처럼 안드로이드로 몸의 대부분을 교체하게 되었어.


난 전에 그렇게 위로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위로할 엄두도 나지 않더라고. 아무튼 그 후에 운동을 그만둔 오빠와는 한동안 소원했는데 어느 날 연락이 와서 만나보니 유사인간의 사회적 권리를 주장하는 무슨 운동을 한다고 들었어. 나한테도 거기 가입하라고 했는데 뭔가 과격해보이기도 하고 내 상처를 남한테 드러내야 하는 게 싫기도 했어. 좀 위험한 느낌도 들고 그래서 일단 거절했지.”


“아 그 테러는 나도 기억이 나네. 난 상상도 가지 않지만 정말 끔찍한 일이었겠네.”


“그렇지. 내 가진 것을 다 잃어버린 데다 존재 자체가 흔들려버리는 건 정말 잔인한 일이거든. 내가 좀 더 위로해주고 함께 해줬어야 하는데.”


“그래. 그건 그런데 오빠라고 하는 거 보니 많이 친했었나 보지? 혹시...”


“응? 혹시 뭐? 그냥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오빠야. 가족들도 서로 잘 알아. 그냥 가족 같은 사람이야. 그런데 왜 질문이 그러냐? 꽤나 공격적이다 너. 설마···”


“설마는 무슨 설마. 아무튼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리미트 해제부터 시도하자.”


유선은 알지도 못하는 오빠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재영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한다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재영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고가 나고 기계가 몸을 차지하고 그녀는 스스로를 고립시켜 왔다. 엄마도 일정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금속성의 냉기가 영혼까지 차오르고 스스로에게 무너질 것 같은 공포에 몸서리쳐 왔는데 남자 따위(?)에 이렇게 무장 해제될 줄은 몰랐다. 그렇게 견고하던 강철의 벽이 촉촉한 노란 카스테라 같이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사랑은 그 자체로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될 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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