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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 님의 서재입니다.

유사인간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SF

jinos73
작품등록일 :
2018.03.19 17:52
최근연재일 :
2018.05.11 12:00
연재수 :
44 회
조회수 :
6,331
추천수 :
92
글자수 :
234,389

작성
18.03.28 06:00
조회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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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22쪽

인간의 조건(2)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세계는 질문으로 이루어진 시공간이다.




DUMMY

해발 1,600미터의 고원은 쌀쌀했다. 봄이 오는 길목이었지만 여기저기 녹지 않은 눈이 하얀 계절을 붙들고 있었다. 겨우내 화려하게 피었던 눈꽃은 주목 줄기 끝에 아직 살짝 녹아 더 화려하게 반짝였다. 재영은 재빨리 카메라에 처음 보는 풍경을 담아내었다. 덕유산 고원 여기저기 제법 많은 등산객들이 계절의 접합점에서 빚어내는 절경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연신 사진을 찍고 포즈를 취하며 즐거워했다. 더군다나 하늘까지 검도록 푸른빛으로 가득해서 누구나 작품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운 좋은 날이었다.


재영은 산악드론(생태형 관광용으로 정숙함과 관찰용 고성능 망원경, 그리고 구조장비를 갖추었다)을 타고 1,100미터 고지까지 오를 수 있다는 것을 몰라 새벽부터 걸어 올라오느라 땀범벅에 기진맥진이었지만 아름다운 고원의 풍경은 고생했다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로를 따라 걷다보니 아직 눈이 많이 쌓여있는 곳에 이르렀다. 부부는 아닌 것 같은데 과도하게 몸을 밀착하며 산행의 스릴(?)을 즐기며 사진을 찍어대는 몇몇 커플을 보며 피식 웃는데 이마쪽에서 땀 한 방울이 눈가와 코 언저리를 스쳐 턱에서 떨어져 내렸다. 아래를 보니 그의 땀이 만들어낸 눈구멍이 선명하게 보였다.


산을 오르고 땀을 흘리고 자연이 빚어낸 작은 현상에 감동하고 어중간한 외도를 즐기는 성인들의 응큼한 속내를 이해하는 나는 ‘인간’이 맞지 않는가? 아직 부족할까?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뻔뻔하게도 선정적인 커플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셀카용 사진 드론을 가져왔는데 추워서 그런지 작동이 되질 않는다며 당당하게 부탁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사진기를 들었다. 얼마 전 마산 할머니를 위해 사용했던 황금분할의 미장센은 접어두고 무릎 아래를 자른 채 정면 샷으로 대략 찍어주었다. 하지만 의도와는 달리 눈꽃이 핀 주목을 잘 담아 주었다고 느끼한 커플은 고맙다고 활짝 웃어보였다. 하기야 사진이나 풍경 따위가 무슨 상관일까? 위험한 관계가 생산하는 전류가 뇌를 마비하고 있을 텐데. 갑자기 수고비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외람되지만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좀 엉뚱한 질문인데, 학교 과제와 관련된 것인데 도무지 풀리지가 않아서요.”


“그래 학생 괜찮아. 뭔데?”


“요즘 유사인간의 지위에 대해서 논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잖습니까? 그에 대한 것인데 인간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뭘까요? 그게 아니면 유사인간과 대비해서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만한 결정적인 근거가 있을까요?”


자신만만하게 질문을 요구하던 남자는 일순 당황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더니 슬쩍 여자에게 떠넘겼다.


“김교수 당신 전공이네?”


“그런 거 양선생님이 대답 못해요?”


“뭐 할 수는 있는데 아무래도 김교수님이 대답하는 게 훨씬 낫지. 학생이 궁금하다는데.”


“어유. 능글 맞어. 거기 학생도 이런 데까지 올라와 과제 걱정을 하고 있어? 그래도 사진도 잘 찍어줬는데 내가 대답은 해줘야지. 추운데 아까 양선생님 얘기하신 그 뭐라도 했더라?”


“아 쉼터? 우리 갈까요? 김교수님 춥구나?”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대답을 해줘야 하니깐. 학생 같이 가요. 여긴 좀 춥네.”


양선생은 호들갑스럽게 바람막이 옷을 꺼내 그녀에게 덮어주며 은근슬쩍 몸을 더듬었다. 김교수는 학생이 본다며 양선생의 손을 쳐냈지만 그 힘은 너무나 미약해보였고 손은 곧 민망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재영은 천박하기 짝이 없는 늙은 손을 피해 신이 빚어낸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바람과 눈과 고목이 만들어낸 작품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쉼터는 통나무집의 외양을 가졌지만 내부는 평범한 플라스틱 내장재로 덮여 있는 흔한 휴게소였다. 단열이 잘되어서인지 다소 더웠다. 쉼터 안에는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무인매점에서 커피, 과자, 라면 등을 사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인공지능, 유사인간에게 일자리를 내주고 기본소득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산은 숨 쉬며 인간의 정과 한계를 느끼게 해주는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특히 기계와 동기화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산을 자주, 많이 찾았다.


얼마 전 유명한 AI앵커인 ‘랍비’가 등산을 해보겠다며 태백산에 올라 등산객들을 인터뷰하다가, 힘들다며 엄살을 떠는 장면에 화가 난 일부 인간 등산객들이 랍비를 때려죽이는(정확히는 부수었다) 사건이 있었다. 랍비는 안드로이드형의 생체로봇으로 재영 같은 완전한 생체형 유사인간과는 말할 것도 없고 최신형 안드로이드와 비교해도 인공의 냄새가 물씬 나는 구형타입이었다.


가감 없이 실시간으로 방송된 이 사건은 큰 논쟁을 유발시켰다. 살인에 준하는 처벌을 해야 한다는 쪽과 인간과 유사한 외양을 가졌다고 해도 로봇은 로봇이라는 쪽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양측의 시위가 주말마다 벌어지는 진풍경이 발생하기도 했다. 시사방송들에서는 이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이 하루 종일 저마다의 논지를 내세웠다. 랍비가 일하던 방송사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특집방송을 내보내고 야외 문화제를 열었다. 의도대로 랍비와 로봇에 대한 동정여론이 크게 높아졌지만 종래에는 결국 법원이 등산객들에게 재물손괴죄를 물으며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물론 랍비의 가격과 방송사와 맺은 프로계약금이 워낙 비쌌기 때문에 가해를 한 등산객들은 전부 파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등산이라는 가장 인간적인(생존이라는 문제와 전혀 연관성이 없는) 일에 유사인간이 침략자처럼 끼어든 사건으로 대중들에게 인식되며 유사인간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양선생은 거품이 가득한 따뜻한 카페라떼를 김교수의 손에 쥐어주었다. 굳이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으며 흘러넘칠 것 같은 다정함을 뽐냈다. 느끼할만도 하건만 그녀 또한 야릇한 곁눈질로 그의 다정에 화답했다. 남의 애정행각 사이에 애매하게 끼는 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


그래도 서울 어느 대학에서 재직하고 있다는 김교수는 사실 성가시지만 얘기해보자며 잔뜩 다리를 꼬고 새끼손가락을 치켜든 채 커피를 홀짝 마시며 고개와 눈을 치켜뜬 채 온몸으로 도도함을 표현했다. 확실히 조금 전 양선생과 교감을 나눌 때 풀어진 모습과는 달랐다. 그런 모습에 양선생은 새삼 감탄하며 사랑받는 강아지마냥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래 얘기를 시작해보지. 아, 그리고 난 이런 곳에서 이런 대화는 사실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우리 스피디하게 진행해보도록 해요. 괜찮겠죠?”


“네 저도 좋습니다.”


“자 그래서 학생은 유사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 인간? 기계? 논쟁적 주제에 대한 레포트라면 당연히 작성자의 의견이 들어가야 할 테니 거기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재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래도 교수는 교수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의 의견부터 물을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면 그 자신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혹시 나는 유사인간도 인간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와서 애먼 사람들의 시간을 뺏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혼란스러웠지만 답을 재촉하는 김교수의 손톱이 의자 나무 손잡이를 점점 빠르게 두드렸기에 생각에 빠져있을 수는 없었다.


“저는 유사인간을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을 규정하는 기준점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 인간이어야 인간이냐, 무엇을 충족하면 인간이냐? 는 합의점이 없기도 하지만 그건 합의할 수도 없고 합의한다면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서나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반면 유사인간과 인간의 교집합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계획과 의도에 의해 유전자를 조합한 정자를 난자에 결합했다 뿐이지 인간이 형성되는 세포분열 과정을 똑같이 겪게 됩니다. 네 물론 인공자궁 안에서 보통 인간보다 훨씬 빠른 속도의 성장과정을 거치고 인공신경망을 삽입할뿐더러 목적에 따라 청소년기까지 성장시켜 내보낸다는 것은 ‘제조 또는 상품’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지요.


그렇지만 이제 세상에 나오고 나면 보통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생활하고 똑같이 어울리게 됩니다. 그 생각을 통제하지도 않고요. 제 여자친구가 있는데요, 사귄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만 이 친구는 어렸을 때 사고로 몸의 대부분이 기계입니다. 스스로도 자신의 정체성에 큰 혼란을 느끼고 있지요. 분명히 자연 상태에서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자기 자신도 자신이 인간인지 기계라고 해야 하는지 확신하지 못하더군요.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기계에게 인간의 자리를 빼앗겼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과연 인간에 대해 규정할 수 있을까요? 혹자는 남녀 간의 사랑(성행위)의 결과로 태어난 것이 인간이라고 하지만 최근엔 그 정상적인 관계에서 착상된 배아에도 더 똑똑하고 우월한 아이를 얻기 위해 유전자 조작을 위한 성장형 콘트롤 나노칩을 심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는 인간일까요? 저는 정말, 뭐라고 할까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유사인간을 몰아내야 한다며 감별사를 자처하는 이들이 돌아다니는데 그들은 그 적의를 정당한 곳에 쏟아내는 걸까요? 이제 도태되기 일보 직전인 인간들의 마지막 몸부림일까요? 과제 때문에 시작한 질문이지만 정말 모르겠더라고요. 답이 있긴 할까요?”


김교수는 약간 놀랐다는 듯 턱을 괴고 있던 팔을 내리고 꼿꼿이 몸을 세우고 재영의 대답을 경청했다. 그러더니 양선생을 보며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녀가 사라지고 양선생은 몸을 기울여 재영에게 속삭였다.


“김교수가 얘기 도중에 화장실에 간다는 건 자네 얘기에 흥미를 느꼈다는 거야. 뭔가 진심으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화장을 고치고 머리를 만지고 옷매무새를 칼같이 반듯하게 하더라고. 학생이 대단한데 그래? 내가 하는 말은 대부분 무시하던데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라며 말이야. 흐흐. 너무 멋진 여자야”


김교수가 다시 나타나자 양선생은 다시금 애정이 흘러넘치는 눈빛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과연 김교수는 옷깃 하나 하나가 반듯하게 정열 되어 있었고 흐트러졌던 머리카락은 한 올도 보이지 않았고 화장도 번짐 하나 없는 것이 원색의 팝아트 속에서 ‘행복한 눈물’을 흘리던 그녀처럼 모든 선이 정확했다. 그녀는 재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옅은 미소가 보였다.


“음, 솔직히 조금 놀랐어요. 우리 학생들도 학생처럼 진지하게 생각이란 걸 해야할 텐데 말이야. 걔들은 도무지 생각이란 걸 하지 않아. 그냥 멍하니 앉아 있다가 시험에 나온다면 그제야 뇌를 조금 쓰지. 최소한도로 쓰는 거야. 그리고 그 대부분의 여력은 놀거나 네트워크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데에 쓰고 말지. 얼마나 한심한지. 그런데 그런 한심한 애들이 또 좋은 회사에 취직되고 공적인 분야에 진출하는걸 보는 내 심정은 정말, 아이 참 흥분하면 안 되는데.”


“아아 김교수 흥분하면 피부에 좋지 않아요.”


둘은 잠시의 틈도 놓치지 않고 애정행각을 벌였다. 참다못한 재영이 헛기침을 하지 않았으면 자리 펴고 누웠을지도 모른다. 문득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회적 통념이 어떻든 사랑에 - 쾌락이라고 불러도 되겠지만 - 거칠 것 없이 자기 자신을 던지는 그들이 대단해보였다. 서울에 있을 유선이 생각났다. 그녀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원하는 답을 들으려고 나그네 흉내 따위나 내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그녀가 몸서리치게 보고 싶어졌다. 당장 산을 내려가고 싶어졌다. 김교수는 그런 재영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챘다.


“흐흥 우리가 너무 했나? 학생도 누군가가 생각났나 보네.”


“아, 아닙니다.”


“아니긴. 그래 그럼 피차 바쁘니 얘기를 빨리 진행시켜 보지. 내가 놀란 건 첫째 학생이 매우 열정적으로 이 주제에 임하고 있다는 거야. 요즘 세상에 진정한 열정 같은 건 거의 화석화 되었거든. 레포트 같은 건 돈만 주면 구할 수 있고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고 금전적인 문제도 풍족함을 추구하지만 않으면 나라에서 기본소득으로 주고 사랑마저도, 이게 끔찍한 건데 AI 따위와 사랑하는 인간들이 그렇게 많다니 이건 정말 재앙과도 같은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이렇게 순도 높은 열정을 드러내다니 아주 신선했어. 마치 문제의 당사자 같이 말이야.”


마지막 말에 재영은 예리한 어떤 것에 베인 것 같았다. 당사자의 분노이니 실감 날만도 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말을 놓은 김교수는 계속 이어나갔다.


“물론 이 주제는 이미 모든 사람이 관련되어 있으니 누구나 당사자라고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또 놀란 건 학생이 이 주제의 핵심을 꿰뚫는 질문을 하고 있다는 거야. 내 학생이었으면 그 질문 하나로 A+를 주었을 텐데. 내 학생들은, 뭐라고 하기가 괴롭군. 차라리 AI를 대상으로 가르치는 게 낫지. 물론 지금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시간도 없고 말이야. 산에는 밤이 빨리 오는 법이지.


그래 학생은 핵심을 잘 봤어. 인간의 경계에 대해 규정을 하는 문제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무엇이고 어디까지, 또는 무엇을 갖추어야 인간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다는 거야. 종교론자들은 영혼의 문제를 들고 나오지만 그건 어떻게 규명할 길이 없잖아? 논외로 치면 결국 하드웨어와 경험론적인 측면에서 규정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건 지금까지 누구도 완벽하게 정의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야. 수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이 주제를 논했지만 명쾌한 것은 하나도 없어. 오히려 회피하고 지엽적인 문제들로 학문적 성과를 쌓아올리고 명성을 누렸지.


유사인간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메리 셸리가 창조해내었던 것처럼 인체조직을 짜깁기 한 괴물이 진짜로 우리 앞에 등장을 한 것이잖아? 오랜 시간 로봇은 기계, 즉 쇠로 대변되는 금속성의 하이테크롤러지의 산물 정도로 여겨졌지만 불과 몇 년 사이 인간을 복사, 붙여넣기한 존재가 나타나 버렸지. 다른 것은 인위적으로 ‘제조’되었다는 뿐이야. 순수한-이런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인간의 경우 DNA의 룰렛에 의해 태어나는 우연의 과정을 거치지만 유사인간은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DNA를 통제해서 만들어지고 있어. 딱 하나 다른 거지.


*메리 셸리 : 영국의 소설가.극작가.수필가.전기 작가. <플랑켄슈타인>으로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얼마 전에 자신이 유사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남자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믿을 수가 없더라니까? 유사인간이 받는 특수한 진료표를 보여주는 데도 눈앞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모습과 행동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뇌를 얘기하는 그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이 관계를 규정하고 대해야 할지 정말 혼란스러웠어. 오 세상에. 사람들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아무런 윤리적, 정치적, 사회적 대책과 규정도 없이 덜컥 그런 존재들을 창조하다니!


그 남자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었어. 35살의 외모였지만 실제로는 8살 밖에 되지 않았지.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을 돈 많은 부인이 살려낸 케이스였는데 정작 남편은 큰 혼란에 빠져버리고 말았지. 사고가 나고 바로 병원에서 남편의 기억을 백업해 두었고 새로 만든 뇌에 정확하게 동기화 시켰어. 물론 약간의 로스가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어. 알다시피 인간의 뇌는 말도 안 되게 복잡하고 저장량도 엄청나고 게다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메커니즘들이 많기 때문이야.


아무튼 이렇게 모든 걸 다 갖추고 새로운 인생을 얻은 그가 기뻐하기는커녕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며 깊은 정체성 문제에 빠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어. 그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신의 모든 일들이 모두 허상처럼 느껴졌다고 하더군. 아내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하루아침에 어머니의 자궁이 아닌 생산라인에서 만들어진 상품으로서의 자신이 용납이 되지 않는다고 괴로워했어. 종래에는 죽고 싶다고 했고 상담이 끝나서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어. 비록 그의 혼란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아픔은 절절했지. 여자치고는 냉정하다는 소리를 듣는 나지만 그의 고통은 충분히 전해져 왔어.”


재영은 그 남편의 고통이 가슴으로 이해되었다. 답답하게 죄어오는 통증이 심장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세상엔 유사인간의 메커니즘을 이용해서 생명연장을 하려는 일부 부유층들도 있다고 하던데 그 남편은 원래 너무 민감하거나 근심, 걱정이 많았던 건 아닐까요?”


“원래 예민한 성격이지 않냐는 거지? 음,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긴 했어. 하지만 최근 조사에 의하면 유사인간으로 분류되는 생체복제형 인공지능들은 대부분 그 남편과 비슷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고 하더군. 유사인간에 반대하는 비토세력 때문에 더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유사인간의 본래적인 문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인간이 대개 사춘기를 겪으며 정체성을 확립하고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유사인간에게 있어도 비슷하게 진통의 시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입장이 되어볼 수 없으니 정답을 알 수는 없지만 그렇잖아? 인간이냐 물건이냐의 갈림길에서 방황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그야말로 실존적 고민이지.”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닐까요? AI가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노출되었던 2016년 - 구글의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혈투 - 이후 그 잘 난 과학자들, 권력자들, 언론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 아무런 대책도 없이 또 다른 인간을 만들어낸 걸까요? 뭐라도 예상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음··· 그렇지 맞아. 그래야 했지. 역시 좋은 질문이야.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는 법. 인간은 애초에 인간 자신의 운명을 감당할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해. 인간을 인류라는 하나의 테두리 안에 묶어서 보면 언제나 어린애였어. 사리분별이 부족하다보니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거야. 문제가 발생하고 본인이 곤란하게 되면 그때서야 생각 해. 대책을 마련한다고 온갖 부산을 떨고 인류애니 고귀한 희생이니 하며 자신들의 실수를 감추어왔어. 안타깝게도 그것은 인간 세상의 본질에 가까운 일이지. 경솔함이 인류의 기본 품성이라고 상정한다면 사실 중요한 것은 예방보다는 문제가 일어난 후의 대처가 훨씬 중요하다고 할 수 있어.


그리고 유사인간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거든.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일전에 모 정부연구기관 관계자에게 들은 것으로는 유사인간은 인간과 같은 외모에 인간과 같은 DNA와 체질을 가지고 있어서 얼핏 그냥 인간이 아니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기실 본질적인 면에서 다르다고 했어. 원래 목적은, 내가 학생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것 같기도 하지만 알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하니 알아도 큰 문제는 없을 거야. 하지만 어디 가서 막 얘기하지는 말아. 내가 얘기했다고도 하지 말고. 알았지?”


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이라고 하지만 별 게 있을까 싶었다. 기껏해야 병원이라 불리는 정비소에서 성장조절 같은걸 하는 것 정도 일게다. 물론 담당의사가 떠들던 리미트 해제 같은 나름 비밀스런 얘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김교수는 주변에 누가 엿듣는지 둘러보더니 헛기침까지 하며 한참 뜸을 들이더니 크게 속삭였다.


“비밀은 유사인간의 정체성이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르다는 거야. 겉으로는 정상적인 시민이며 인간의 동반자로서의 면모를 하고 있지만 진짜는 정부의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전략자산이라는 거였어. 특히 일부 유사인간은 그야말로 전략 병기(병기)라는 거야. 애초에 각국이 군사적 목적으로 서로 비밀리에 경쟁적으로 연구하고 생산하던 것이 과열 양상을 보이자 UN에서 제동을 걸게 되었어. 엄청난 논쟁 끝에 글로벌 군사적 균형을 현저히 깨뜨릴 수 있는 전략병기의 탄생을 금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어.


그 이면엔 천문학적인 연구개발비를 감당할 수 없는 국가들이 연대가 있었다고 해. 그렇지만 이런 일이 이렇게 끝날 수 없다는 것을 예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 각국은 표면적으론 인간의 동반자로서 인도적인 유사인간의 개발을 한다고 했지만 이미 전략병기로서의 유사인간 개발의 무한경쟁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 버렸어. 들은 바로는 ‘리미트 해제’라는 일련의 방법으로 유사인간에게 걸려있는 제한장치를 풀면 각 유사인간은 고유한 전략병기로서의 능력을 발현한다고 하더군. 놀랍지?”


재영은 크게 기침을 했다. 한모금 입에 물고 있던 따뜻한 우유가 사방으로 튀었다. 김교수의 소매에도 튀었다. 그녀는 인상을 잔뜩 썼고 양선생은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그녀에게 묻은 오물을 제거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유 조심해야지. 놀랐나보네. 호호 남자들은 이런 얘기 좋아하지 않아? 그건 그렇고 어디 보자. 그럼 우리 얘기는 여기까지 하지. 시간이 많이 지났네.”


“아니 저 조금만 더···”


“학생. 열정은 높이 사지만 난 강의하러 이 높은 산에 오르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 정도면 사진을 찍어준 값은 다 치른 것 같은데?”


“아 네. 그건 그렇죠.”


“그리고 내가 아는 건 어차피 이 정도까지야. 더 얘기하면 사족일 뿐이지. 그리고 당부하는데 마지막에 얘기한 건 나도 내가 확인한 것이 아니고 전해들은 얘기일 뿐이니까 어디 가서 내가 얘기했다고 하면 안 되는 것 알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물론이죠.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호한 그녀의 말에 더 이야기를 진행할 수는 없었다. 재영은 고개를 크게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양선생은 재영이 돌아서기 무섭게 김교수의 지적능력을 크게 찬양하며 몸을 밀착시켰다. 둘은 재영이 쉼터를 나서기도 전에 벽난로의 장작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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