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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ya 님의 서재입니다.

촉법소년은 보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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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ya
작품등록일 :
2023.12.25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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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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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끊긴 필름

DUMMY

인영이 이런 속사정을 알 리 없었다.

단순히 오해가 있다고 생각했겠지.

진실만 안다면 모조리 풀리고 말 오해가.


“도대체 왜요? 이유 정도는 말해줘요.”

“여러모로 유용해서 말이야. 신앙심이라는 건, 의리보다는 더 끈끈해. 오죽하면 한국에서 사업을 한다면 교회를 다니라는 말이 있을까?”

“겨우 그거라고요? 저 불안 요소와 엮여 드는 이유가요? 다른 교회도 있잖아요?”

“뭐, 이것저것 다른 이유도 많아. 설명하긴 곤란하지만 말이야.”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유용하다는 말도, 말하기 곤란한 부분이 있다는 말도 모두 진실이다.

심지어 덧붙여서 한 제안은 호의적이기까지 했다.


“실망했다면 가도 좋아. 옷이나 가방도 안 뺏을게. 괜찮은 조건이지?”


옷이나 악세사리를 다 합친다면 족히 1000만 원은 되겠지.

겨우 두 번 따로 대화하고서 받는 돈치고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지금 인영이 할 수 있는 일로는, 넉 달은 꼬박 뛰어야 벌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원하는 건 겨우 그 정도가 아니기도 하지.


“뭐가 그렇게 유용하길래···”

“왜? 알면 망가뜨리려고? 더 이상 김예현이 나한테 유용하지 못하도록?”

“······.”

“그건 의리 같지 않은데?”


인영이 입을 다물었다.

정곡을 찔리고 말았다.

아무리 의리를 말한다고 한들, 그에는 우선순위가 있었다.

무슨 짓을 하고 말더라도 가족 다음이라는.


“뭐, 당장 가기 민망하면 식사까진 해도 좋아. 오늘 헤어지고 자연스럽게 끝내는 거지.”


그 말을 마치자마자 점원이 음식 카트를 끌고 다가온다.

차곡차곡 테이블 위에 내려두는 요리.

하나 같이 고급이었고, 두 명이 먹어도 남을 만큼 양이 많았다.


점원은 이내 와인 코르크도 뽑아냈다.

포도 향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보랏빛 액체는 주르륵 유리잔에 몸을 맡긴다.

교양이 넘치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인영은 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포기할게요.”


녹호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목사가 맘에 안 들지만···, 내버려 둘 수 있죠. 중요한 건 이모니까요.”

“······.”

“의리를 져버려서 미안하게 됐어요.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더 잘할게요.”


복수와 가족.

두 가지 중 인영은 후자를 선택했다.

예현을 징벌한다면 잠깐은 통쾌할지 모르지만, 현실을 망치고 말 터였다.

서주를 잃으면서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


“고작 최선을 다한다? 그건 기본이잖아?”

“그럼 그쪽이 뭔가 잘못해도, 저도 한 번쯤은 봐 드릴게요.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잖아요?”


녹호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이 사과를 받아들일지 말지 고민되는 모양이다.

몇 번을 실망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래, 유용하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두오까지 받아들인 인간이 용서에 야박하게 굴 리는 없었다.

이익이 된다면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었다.


“백화점에 처음 갔을 때 시선은 어땠어? 다들 널 어떤 식으로 봤지?”


한 모금 와인을 마시고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글쎄요. 당신···, 녹호 씨가 가지고 노는 여자쯤으로 봤겠죠. 옷차림도 차이가 심했고, 계속 선물 받는 처지였으니까요.”

“추측으로만 느꼈어?”

“아뇨, 눈빛도 그랬어요. 차 키 건네줄 때나, 점원이 물건을 추천해줄 때나.”


멸시라고 부를 감정까진 아니었겠지.

하지만 두 사람을 그런 사이라고 지레짐작한 순간부터 태도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VIP가 누구인지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인영은 다음 방문에서 갈아 끼워질 지위라고 생각했겠지.


“그럼 이 세팅이 끝나고, 길거리를 나왔을 때부터는?”

“그때부터는···.”


그 짧은 시간.

딱히 기억하기 어렵진 않을 텐데, 말끝을 흐린다.

이 경우 대부분 두 가지로 나뉜다.

한 가지는 말하기 곤란한 대답이기 때문이고, 다른 한 가지는···,


“딱히 뭐가 없었는데요?”


말할 것도 없을 때다.


“그것뿐?”

“네, 그냥 다 자연스러웠어요.”


녹호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말하면 이제야 나랑 신분이 비슷해진 느낌이지. 하층민에서 평민이 된 거랄까?”

“그 말은 조금···.”

“정말 그렇게 생각해? 만약 그 옷차림 그대로 여기 왔더라도 지금이랑 별 다를 바 없을 거라고?”

“···그건 아니겠죠. 여긴 그래도 꾸며서 오는 곳이니까.”

“맞잖아, 신분제.”


밖을 향하던 시선이 다시 음식에 꽂힌다.

그리고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어간다.


“겸상이라도 하려면 제대로 차려입어야지. 안 그러면 끼워주지도 않을 테니까.”


반대로 이젠 인영이 창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밖에선 인파가 길거리를 거닐고 있다.

명품을 두른 이는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간다.

그 반면, 추레한 몰골로 있는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선 빠르게 움직인다.

당사자는 모르겠지만 꼭 죄인 같아 보였다.


“허영이잖아요, 명품이란 건.”

“맞아. 쓸데없는 짓이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그냥 깔끔하게 차려입고 깔끔한 곳에서 식사하면 되잖아요? 사치 부릴 필요 없이.”


허영은 낭비.

다들 자제하는 편이 세상에 이롭다.

사회 비용이 그만큼 내려갈 테니까.


“그것도 맞는 소리지. 그런데 꼭 허영을 돈 많은 사람만 부리는 건 아니잖아.”


인영이 녹호를 바라보았다.


“다들 마찬가지지. 대한민국에 커피숍이 이렇게 많이 있을 필요는 없어.”

“하긴. 아무리 봐도 돈 낭빈데···.”

“그 깔끔한 차림이면 된다는 말도 평범하게 하는 갑질이지. 만약 그마저도 없으면 어떻게 하라고? 아무리 공손해도, 돈이 없으면 불량아가 되는 건가?”


사회에서 벌어지는 딜레마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유지되고 있다는 얘기였다.

각자가 각자 가능한 만큼 고개를 뻣뻣이 세우는 탓에.


“그래. 다들 그렇다면야, 그게 맞는 거겠지. 웃기는 일이지만.”

“···겉모습이 진실이고, 영혼이고 또, 전부네요.”


사회가 발가벗은 모습.

다들 쉬쉬하는 추한 민낯이다.

도플갱어에게는 그런 세상이 너무나 와닿는 일이었다.

직접 파고 들어가야 하는 틈이기에, 외면하지 않고 직시해야 했기에.


“어때? 지금껏 이런 명품, 한심하다고 생각했지? 미친 듯이 쏟은 돈으로 허영심만 증명한다고.”

“······.”

“그런데 봐봐. 명품을 걸쳐야 조금이라도 더 높은 위치를 점할 수 있어. 천쪼가리는 그래서 경영자한테 훌륭한 무기가 되는 법이야.”


인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한테 경영학 수업이라도 해주시는 건가요? 편견을 버리고 실리를 택하라고?”

“뭐, 겸사겸사. 사이비라도 품고 가는 이유도 납득시킬 겸.”


녹호는 드물게도 친절하게 설명했다.

어쩌면 그만큼 인영이 마음에 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눈치채진 못했겠지만, 두 사람은 단편적으로나마 닮은 구석이 내비치곤 하니까.


“교회는 훌륭한 고객 양성소가 될 거야.”

“아···, 확실히 초기 고객은 중요하죠. 텅 빈 가게엔 아무도 안 들어오니까요.”


커다란 손으로 유리잔을 들었다.

그리고 건배라도 하자는 듯, 앞으로 주욱 내밀었다.

인영은 그 모습에 다급히 와인잔을 마주 들었다.


“어떤 사업이 가장 좋을지 고민해봐. 앞으로 도맡아 할 일이니까.”


와인이 찰랑, 박수를 쳤다.

두 사람은 곧 마주 웃으면서 유리잔을 입에 가져갔다.



***


인영이 일어났다.

산발이 된 머리를 주무르며 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어제 마신 와인 때문에 두통이 있는 모양이다.


“···여기가 어디지?”


주위를 둘러보는 시선.

그러자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인영을 반겨준다.

따뜻한 색으로 된 벽지와 가구가 포근함이 가득했고, 조명도 햇볕처럼 내리쬔다.

보일러가 사정없이 돌아가는지, 코트까지 입은 몸은 땀에 살짝 젖어 있다.


“깨어나셨습니까?”

“누구세요?”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다급히 대꾸한다.

아마 자신이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겠지.


“네, 들어오세요.”


인영은 매무새를 가다듬고 말했다.

다행히 크게 흐트러진 부분은 없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어? 분명 녹호 씨···.”

“예, 김유송이라고 합니다.”


다행히 알아보는 기색이다.

여기가 어딘지도 명확해졌다.

녹호의 저택, 많고 많은 손님방 중에 하나겠지.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신 모양입니다.”

“이상하네요, 별로 안 취했었는데.”

“녹호 씨가 말하시길, 좋은 술일수록 숙취가 더 심한 법이라고 합니다. 맛과 향은 풍부하다는 건, 알코올 외에도 부산물이 많다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아···. 그래도 제가 이렇게까지 술이 약하진 않은데···.”


인영이 민망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두 번째로 덧붙이시길, 싸구려 소주만 생각하고 마셨다면 더 감당 안 됐을 거랍니다. 취기는 약한데 간에서 먼저 한계가 올 테고, 한방에 필름이 끊어진다고 합니다.”

“어···, 음···. 알겠어요. 그런데 최소한 코트는 벗겨주시지···.”


유송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벌렸다.

딱히 말하고 싶진 않은 기색이다.


“그···, 세 번째로 덧붙이시길, 괜히 옷에 손대서 오해받기 싫으시답니다. 그놈의 의리는 계속 탈부착이 되는 것 같다고···.”


말만 전할 뿐인데 둘 다 분위기가 서먹해졌다.

녹호는 아주 친절하게 여러 설명을 남겨두고 갔다.

인영이 투덜댈 것 같은 부분만 골라서.

그렇기에 그 친절은 들으면 들을수록, 사나운 얼굴이 한심함이나 짜증을 내뱉는 것만 같았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유송이 다급히 방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어색함도 있지만, 더 말을 섞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만요. 혹시 더 덧붙인 말이 있나요?”


인영이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녹호가 했던 예상이 계속 적중하는 탓에, 궁금함이 도졌나 보다.

마주 보는 얼굴에 망설임이 피어오르는데도 두 눈에 호기심이 피어오른다.


“···굳이 들으셔야겠습니까?”

“아니, 뭐···. 일단 녹호 씨가 말해줬다면 저한테 전해줘도 된다는 뜻 아닌가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덜렁 있는 버튼.

혹은 벌칙 상자.

작동시켜봐야 좋을 일은 없는 것들이다.

그냥 덮어두는 편이 가장 좋겠지.


하지만 인영은 그 뒷모습을 구태여 붙잡는다.

오로지 호기심 때문에.

그리고 그 감정은 오늘도 고양이 한 마리를 죽이고 말았다.


“마지막 네 번째로 덧붙이시길, 문과라서 많이 보충 설명해주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동시에 이 덧붙인 사항을 모조리 다 듣게 된다면, 능력 면에서 많이 의심할 것 같으시다고···.”


인영이 오묘한 표정을 짓다가 곧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개구멍에 끼인 고양이처럼 망연자실한 얼굴이다.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걸, 괜히 들쑤셔서 부스럼을 만들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문과, 의심병 말기 환자, 말만 번지르르하고 의리는 없는 인간···. 대충 그렇게 보겠죠?”

“그···, 따로 보고는 안 하겠습니다.”

“이렇게 세심하게 덧붙인 걸 보면, 엄청 캐묻지 않을까요···.”

“녹호 씨도 혹시나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아마 덧붙인 말을 정말 다 들었다고는 생각 못 하실 겁니다.”


위로 삼아 뱉은 말이다.

하지만 들은 당사자는 한 번 더 몸을 움찔댔다.

안심은커녕, 양심만 찔려오는 대답이다.


“그런데 오늘 일정은 없으십니까?”

“···네?”

“갑자기 외박하시고 늦게까지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생각해보니, 지나가는 말로 이런 것도 덧붙이셨···”

“아!”


인영이 다급하게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긴다.


“급한 약속이 있다면 제가 직접 모셔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옷을 집에 가져가기 부담스러우시다면 여기에 두고 가셔도 된답니다. 진짜 마지막으로 덧붙이신 말입니다.”


그 말에 인영은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서주에게 보이면 설명하기 곤란한 부분이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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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화. 끊긴 필름 +1 24.02.05 43 1 13쪽
35 35화. 선물 무더기 +1 24.02.02 42 1 12쪽
34 34화. 인영이 주는 선물 +1 24.02.01 47 1 11쪽
33 33화. 맛있네요? +1 24.01.31 39 1 12쪽
32 32화. 캐비어 알탕 +1 24.01.30 44 1 12쪽
31 31화. 빚 +1 24.01.29 46 1 12쪽
30 30화. 모텔 +1 24.01.26 54 1 12쪽
29 29화. 이상 +1 24.01.25 46 1 12쪽
28 28화. 엄벌주의 +1 24.01.24 46 1 13쪽
27 27화. 욥 +1 24.01.23 53 1 12쪽
26 26화. 고래 사이 새우 +1 24.01.22 51 1 12쪽
25 25화. 사이비 목사가 될 준비 +1 24.01.19 56 1 12쪽
24 24화. 벌이가 괜찮은 사이비 +1 24.01.18 62 1 12쪽
23 23화. 가정 파탄 +1 24.01.17 64 1 12쪽
22 22화. 창세기 +1 24.01.16 64 1 12쪽
21 21화. 세뇌의 시간 +1 24.01.15 73 1 13쪽
20 20화. 독대 +1 24.01.12 77 1 12쪽
19 19화. 쥐와 고양이 +1 24.01.11 77 2 14쪽
18 18화. 없는 사람 +1 24.01.10 82 2 13쪽
17 17화. 목을 조르다 +1 24.01.09 89 2 12쪽
16 16화. 천선분식 +1 24.01.08 93 2 13쪽
15 15화. 악마를 낳았다 +1 24.01.05 104 2 12쪽
14 14화. 달동네 +1 24.01.04 99 2 12쪽
13 13화. 훌륭한 사람 +1 24.01.03 109 2 13쪽
12 12화. 죄를 지었으면 +1 24.01.02 111 2 12쪽
11 11화. 의심 +1 24.01.01 112 2 12쪽
10 10화. 게임 +1 23.12.29 131 2 12쪽
9 9화. 장난감 만들기 +1 23.12.28 148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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