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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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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6.19 19:30
연재수 :
26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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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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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68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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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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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8쪽

23

DUMMY

“어머니. 일단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주세요!”


스윽.


찬크에르를 노려보던 필리아는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거부권은 없다. 리아는 찬크에르와 함께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


이스카르도 그녀의 지시에 문을 닫고 근처에 대기했다. 아마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으로 보인다. 용왕을 상대로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준비를 마치자 바로 맞은편 의자에 필리아가 거칠게 앉았다. 그러고는 눈발이 설듯한 눈초리로 찬크에르를 째려봤다.


평소 그녀답지 않게 조신하지 못한 행동.


리아는 더 이상 일이 커지기 전에 손을 번쩍 들었다.



“어머니,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찬크에르는 무죄입니다!”


어디 말해보라는 듯 필리아가 눈짓했다.


바들바들 떤 리아는 침을 삼키고 말하였다.



“차, 찬크에르! 당신과 저는 어제 무엇을 했나요! 말씀해주세요. 전부 사실대로요!”

“음. 리아와 나는 어제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다만 너무 길어져 리아에게는 미안하게 됐지.”


리아는 손가락으로 척, 가리켰다.



“그겁니다! 어제 저희는 대화를 나눴습니다!”

“으흥~ 얼싸안고?”

“그, 그건 아니에요! 안긴 안았는데, 제가 좀 격해져서 먼저 안았어요! 찬크에르는 저를 달래주었을 뿐이고요!”

“그건 아니다, 리아. 나 또한――”

“――쉿!! 음음! 저희에겐 불순한 일 따윈 전혀 없었습니다!”


잠시 예리한 눈매로 쳐다보던 필리아가 물었다.



“······무슨 대화를 나눴길래?”

“그, 조금 상담을 했습니다.”

“상담? 무슨 상담을······ 서, 설마?!”

“아, 아닙니다! 어머니가 무슨 상상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결코 그러한 내용은 아닙니다!”

“그럼 무슨 상담이니? 찬크에르 씨는 네가 말하지 않는다면 이야기할 수 없다고 했는데.”


깜짝 놀란 리아는 찬크에르를 올려다봤다.



“찬크에르······”

“리아가 마음을 쓰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면 내가 함부로 입을 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역시 찬크에르는 자상해. 어머니에게 쫓기면서도······ 내가 이런 말 하기도 뭐하지만, 정말 멋진 용 님이야. 진지한 표정과 눈빛도 참 멋져.’


금세 꽃밭으로 물든 리아. 찬크에르도 미소를 지으며 애틋한 분위기를 풍겨왔다.



“둘 다 그만하고. 하아······ 그래. 내가 오해했다는 건 알겠어. 그래서, 리아? 마음 쓰고 있다는 일이란?”

“그건. 그게······”


머릿속의 꽃밭이 금세 사라진 리아는 얼굴을 굳혔다.


말은 나오지 않는다.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 대비하고 싶다는 말이 잘 나올 리도 없으니.


그리고 찬크에르에겐 말하지 않았으나, 어느 정도 대비가 가능하기 전까지는 마을을 잠시 떠날 생각이었다.


만일 자신에게 위험이 닥치는 거라면 떠나는 편이 좋으니까.


마을도 마법으로 이변을 알 수 있게끔 찬크에르에게 부탁해놓을 예정이었다.


너무 예민해 보일지라도 상관없다. 가족들이 휩쓸리지만 않는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하지만 매번 폐만 끼치다 8살―― 이제는 9살이 되어가는 아이가 마을을 떠난다고 하면 누구라도 반대하겠지.’


근심 가득한 모두의 얼굴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그러나 그런 착한 가족들이니 더더욱 양보할 수 없다. 어떻게든 최소한의 안전만큼은 반드시 확보해두고 싶다.


······다만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리아······”


차분하게 부른 찬크에르가 리아의 손을 잡아줬다.



“난 리아의 걱정을 모두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앞에 있는 필리아와 이스카르, 이 둘은 그대의 부모다. 리아의 행복을 가장 바라고 걱정하는 존재이지. 그것은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이고, 만약 리아가 마음 아파하면 도와주기 위해 반드시 힘을 보탤 거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오히려 아무런 힘도 보태줄 수 없다면 그것만큼 더 괴로울 일도 없을 거야.”

“그렇지만 이건 내 망상일 뿐이지, 꼭 일어난다고는······”

“그렇다 하더라도 리아의 의견에 보탬이―― 리아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러하다.”

“찬크에르······”

“리아야.”

“아버지, 어머니.”


추궁하기 위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걱정스레 보는 부모님들.


리아는 마음이 크게 흔들렸지만 역시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까지 키우는데 얼마나 지극정성을 쏟아줬는지를 알고, 사랑도 듬뿍 주었던 부모님에게 도저히 집을―― 마을을 떠난다는 소리가 나올 리가 있겠는가.


미안하고 슬퍼져 울상이 되어가던 리아.


그런 딸을 두 부모님이 조용히 안아줬다.


‘아아. 몇 번이나 생각했었지만, 아이의 감정 그대로인 것은 정말 참으로 불편하네.’


겨우 안아주고 위로해줬을 뿐이건만 이리도 행복해지기에. 너무나 쉽게 감정이 요동쳐 눈물이 쏟아지기에······


정말로 번거롭다.






얼마나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목도 얼얼하고 부모님의 품도 축축해질 정도로 맘 놓고 울어 재꼈다.


그래도 마음만은 따뜻하니 썩 괜찮은 기분이다.


리아는 눈가를 훔치고 둘을 떼어놨다.



“아버지, 어머니. 말씀드릴 게 있어요. 아이리스와 찬크에르도요.”


치유마법으로 얼얼한 목을 달랜 리아는 차를 마시면서 한밤에 찬크에르와 나누었던 상담을 차례차례 이야기해갔다.


전세에 대한 부분만은 뺐지만, 그래도 지레짐작한 부분들은 빠짐없이 전부 했다.


이스카르와 필리아는 놀라면서도 말을 끊지 않고 하나하나 진지하게 들었다. 아이리스도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가만히 옆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모든 이야기를 다 말하고, 리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감정을 차분히 하였다.


이제 마지막······ 가장하기 힘든 앞으로의 일만이 남았다.



“그래서 저는 잠시――”

“――집을, 마을을 나가겠다는 거지?”

“아, 아버지, 어떻게?”

“내 딸이야. 착하고 예쁘기까지 한 내 딸이라면 우리와 마을을 위해 떠날 거라는 건 안 들어도 훤하다. 그렇지? 필리아.”

“그럼요. 저를 닮아 심성이 고운 우리 리아는 반드시 그러겠지요. ······응? 뭔가요, 당신.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아, 아니. 아무것도······”


작게 헛기침을 한 이스카르는 밝게 웃었다.



“어쨌든 그런 거야. 리아가 그리 생각하고 있다면 다녀오렴. 아직 8살인데다, 그런 일이 생기긴 할까 의심은 들어. 하지만 옆에는 그 대단하신 용왕님도 있을 거잖아? 안 그래, 찬크에르?”

“우문이다, 이스카르. 리아가 가는 곳 어디라도 나는 곁에 있을 것이다.”

“들었지? 리아야. 그러니까 우리들은 신경 쓰지 말렴.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바라는 대로 하려무나.”

“아버지. 고, 고마워요. 정말······ 언제나 폐만 끼쳐서 죄송해요.”

“폐를 끼치는 게 아니야! 의지하는 거지. 딸이 부모에게 의지하는 게 뭐가 나빠! 그러니 마음에 두지 말거라, 리아야.”

“정말 고마워요······”


8살 아이의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다. 나 자신도 아직 과대망상이나 피해망상으로만 여겨졌다.


그럼에도――



“솔직히 성인도 안 된 딸이 출가한 느낌이라 영 편치는 않지만, 기껏 나가보는 거다. 리아야, 몸이 안 좋았던 만큼 넓은 세상을 더 많이 보고 오거라.”

“리아! 기왕 가는 거니 확실하게 하렴. 어중간한 건 용서하지 않는다. 알겠지?”


환히 웃으며 지지해주는 가족들.


진심으로 자랑하고 싶었다. 내 부모님은 이리도 멋진 분들이라고······



“그래도 한가지! 이건 따라주거라.”


리아는 슬쩍 눈가를 훔치며 대답했다.



“네. 어떤 건가요? 어머니.”

“마을을 떠나는 건 봄으로 하렴. 너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어. 이건 부모로서―― 아니, 엄마로서 양보할 수 없단다. 알겠지, 리아?”

“엄마······”

“에휴. 그만 울고. 완전 울보가 돼 버렸네, 우리 리아······. 후후. 꼭 건강하게 잘 지내야 한다?”


평소와 다름없이 말하는 듯했으나 필리아의 눈가도 촉촉하게 젖어갔다.


참지 못한 리아는 결국 다시 흘러넘치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필리아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불평을 늘어놨다.


정말 아이의 감정은 자기 멋대로라서 불편하다고. 이 행복한 마음을 숨길 수도 없어서 진짜 창피하다고.









그날 저녁은 성대하게 차려진 요리를 먹으면서 하루를 보냈다.


이후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주민들 모두가 집으로 왔다.


그들은 제각각 건강하게 잘 지내야 한다며 말해주었는데, 어느 한 사람도 떠나는 이유를 묻거나 만류하진 않았다. 그저 찬크에르에게 여러 당부를 해주고, 아이리스에게도 안부를 염려해주기만 했다.


그렇게 한동안 찾아오는 주민들을 맞이하는 게 일과가 되었다.


다만 루데릭만은 한 번도 오질 않았다.


리아는 너무 마음에 걸려 찾아가려고도 했으나, 부모님과 찬크에르, 모두가 잠시 시간을 주라며 말려 무산됐다.


끝끝내 찾아가진 못했고, 시간은 흘러 봄이 되었다. 필리아와 약속한 그 날이다.


날씨도 화창하기 그지없는 가운데, 마을은 축제를 열었다.


축제를 연 이유는 단순했다. 오랜만에 타지로 나가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과 자신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이었다.


집안 식구들과 생일을 보낼 줄 알았던 리아는 어느새 준비된 축제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말씀이라도 미리 해주시지.”

“알면 놀라움도 덜 하잖아. 그보다 이거나 받아라.”

“어, 잭 아저씨······ 읏.”


어느새 다가온 잭이 건넨 건 사슴 고기로 만든 꼬치로, 리아는 순간 움찔했다.



“걱정하지 마. 여기 있는 음식들 전부 일반 동물들로만 준비했어.”

“아, 알고 계셨어요?”

“네가 사냥 나가는 걸 몇 번이나 봤잖냐. 마수를 사냥하지도, 먹지도 않길래 꺼리는가 싶었지. 아, 물론 이해는 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니 아무래도 주저되겠지. 나라도 죽기 전에 저주라도 퍼부은다면 식욕이 뚝 떨어질 거야.”

“고마워요, 아저씨.”

“됐으니까 재밌게나 즐겨라. 네 생일이니까.”


리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떠난 잭은 그길로 곧장 술잔을 부딪치는 주민들에게 향했다.


왁자지껄 활기찬 그 모습을 잠시 보던 리아는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혼자 앉아 식사를 하는 루데릭이 있었다.


바로 말을 걸고 싶었다. 그러나 들었던 말도 있어 그러진 않고, 축제가 끝나 집으로 돌아가는 부모님의 뒤를 조용히 쫓아갔다.


리아는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 천장을 쳐다봤다.



“실감은 안 나지만 내일 떠나는 거구나.”


그리 중얼거린 리아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역시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어.”


영원히 안 돌아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이대로 말도 없이 헤어지긴 싫다.


벌떡 일어난 리아는 내일까지 안 찾아오면 쳐들어가려고 했던 계획을 뒤집고 황급히 문으로 달렸다.


똑똑.


문 앞에 서자 타이밍 좋게 두들겨졌다.


리아는 의아해하면서도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루데릭!”

“잠깐 따라와 봐.”


반갑게 인사한 것도 마다한 채 쌀쌀맞게 대꾸한 루데릭은 바로 몸을 돌렸다.



“어어. 저기, 어머니!”

“그래, 다녀오렴.”

“잘 이야기하고.”


응원해주는 부모님과 말은 없었지만 듬직하게 고개를 끄덕여주는 찬크에르.


리아는 빠르게 손을 흔들고는 서둘러 빠르게 루데릭을 쫓았다.


그렇게 천천히 걷는 루데릭을 따라가니, 최근에는 함께 가는 일이 드물어진 훈련장―― 인근 숲 공터로 오게 됐다.


도착하고 나서 루데릭은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궁금했던 리아는 슬쩍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루데릭은 손을 잡더니 뭔가를 쥐여주고는 떨어졌다.


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쥐여준 뭔가를 봤다.


손 위에는 초승달처럼 생긴, 뭔가의 뼈를 깎아 조각한 것이라 여겨지는 알맹이가 있었다.



“장식품······인가?”

“처음으로 혼자 사냥한 동물의 뿔로 만든 거야. 시간이 없어서 그거밖에 못 만들었어.”


‘다행이다. 뼈는 아니구나······’


찝찝함을 덜고 리아는 물었다.



“나한테 주는 거야?”

“그럼 누구한테 주는 걸로 보이냐?”

“엥?!”


마을에서는 선물을 준다는 행위가 없었다. 생일 때에도 그러했다.


그래서 놀랐지만, 딱히 불만이 있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생에 첫 선물에 기쁘기만 했다. 여동생처럼 아껴주는 루데릭에게 받은 것이라 더욱.



“고마워! 정말 소중히 간직할게. 몸에 떼지도 않고 매일! 정말 멋진 생일 선물이야!”

“리, 리아. 야, 임마, 좀 떨어져. 응? 알았으니까 진정 좀 해라. 정말 너는――”


뭔가 달라진 분위기에 리아는 껴안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머리 하나는 더 커진 루데릭은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올려다본 리아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기 시작했다.



“나가서도 아프지말고 건강하게 지내. 난 이곳에서 리아―― 내 동생이 돌아올 이곳을 지키면서 기다리고 있을게. ······보고 싶을 거야, 리아.”


정말 애정이 가득한 음성이었다.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쓰다듬어주는 손길도 너무나도 다정하였다. 루데릭도 이럴 수 있는가 놀라울 뿐이었다.


‘아니······ 루데릭은 원래 다정했어.’


떠올려보면 태어나 기억하고 있는 모든 장면에는 언제나 루데릭이 있었다. 정말 그 어느 때나.


그런 루데릭은 여러 군데를 데려가 줬다. 숲과 개울 등등. 당시 잘 만나주지 않았던 주민들의 집까지 데려가주며 이것저것을 보여주고 알려주었다.


또 언제나 힘들지는 않나 신경 써주며, 혹여나 다치지 않도록 보살펴주기도 했다. 귀찮았을 것이 분명한데도 전혀 싫어하지도 않고.


당시에는 그저 몰랐을 뿐이었다.


――루데릭이 얼마나 상냥하고 멋진 오빠인지를.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지금은 부모님과 함께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기분이다. 내 오빠는 이렇게나 근사하다고.


리아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루데릭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나도 보고 싶을 거야, 오라버니.”









마을을 떠나는 날의 아침이 돌아왔다.


잠은······ 당연히 잘 오지 않아 뒤척이기만 했다. 보다 못한 아이리스가 오랜만에 같이 자준 덕분에 어떻게든 눈을 붙일 수는 있었지만.


리아는 침대가 아닌, 몸을 말고 자는 걸 좋아하는 아이리스를 따라 누웠던 바닥에서 일어났다.



“찬크에르는 괜찮아요? 계속 지켜봐 줬잖아요.”

“날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하루 안 자는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오히려 둘을 지켜보는 내내 행복하기만 했어.”

“저, 정말 요즘은 자주 부끄러워지는 말들을 해주네요. 별로 나쁘진 않지만······”

《잘 잤어, 엄마?》

“아. 응.”

《정말?》

“그럼, 물론이지. 그, 근데 아이리스는 정말 괜찮니? 갑작스럽게 떠난다고 해서······ 나야 다 함께 가면 기쁘기야 하지만.”


자식은 부모와 함께 있는 것이 좋다 둥, 잘난 척한 전적이 있던 터라 리아의 목소리는 기어갈 듯 작았다.


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부정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상의도 없이 떠나기로 한 것이다. 마치 자식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멋대로 구는, 강압적인 엄마가 된 것 같아 리아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난 괜찮다니까. 그보단 둘만 보내는 게 더 신경 쓰여. 뭔 일이 벌어지기 딱 좋잖아?》

“응? 아, 아니야. 나와 찬크에르 둘이 있다고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그래? 그렇죠, 찬크에르?”

“······.”

“찬크에르?”

“그, 그렇다, 아이리스! 난 사랑스러운 리아의 손을 잡거나 껴안아주고 싶을 뿐이다. 다른 의도 따윈 한 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충분히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보이는데요. 찬크에르씨?”


갑자기 끼어든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필리아가 가늘게 뜬 눈으로 의심스럽다는 듯 찬크에르를 보고 있었다.



“어, 어머니?”


허둥대는 리아를 슥, 쳐다본 필리아는 냉철하게 말하였다.



“리아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절조를 지키시길 부탁해요.”

“물론이다. 리아가 싫어할······ 지탄받을 만한 짓은 결코 하지 않는다. 맹세하지.”

“저도 믿고는 있어요. 아직은. ······아이리스, 잘 지켜봐야 한다?”


필리아의 말에 답하듯 아이리스는 살짝 불까지 내뿜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과 드래곤의 기묘한 우의가 느껴지는 모습이다.


‘둘 다 과민하시네. 이러면 내가 아이리스에게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찬크에르도 말했듯 손만 잡고 안아줄 뿐인데······ 에헤헤.’


정말 유난스럽다. 같이 침대에서 자기도 하는 사이인데 새삼스럽게.


‘맞아, 맞아. 거기다 찬크에르는 매번 거리를 많이 둬서 자는걸? 물론 내가 품으로 파고 들어가지만······ 으음. 지금 생각해 보면 꽤 과감한 행동이었을지도. 헷.’



“하아. 정말 걱정되네. 아이리스, 꼭 좀 부탁한단다. 리아도 그만하고. 짐은 다 챙겼니?”

“핫. 네! 준비는 다 됐어요.”


집에서 가져갈 물건은 옷 몇 벌과 속옷 정도가 전부다. 원래 가져갈 짐도 별로 없었지만, 어지간한 건 찬크에르가 다 지니고 있기에 더욱 줄어들었다.


빈손인 찬크에르가 짐이 많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는 마법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찬크에르, 그는 무려 다른 공간에 물건을 수납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바로 게임이나 만화 등 여러 소재에서 등장하는 그것이다.


전생에서도 아들과 게임을 하며 “쟤네들은 도대체 저 많은 것들을 어디에다가 넣고 다니는 거야? 가방도 없는데.”라고 고증을 문제 삼았는데, 이를 타파하는 바로 그 마법이다.


하지만 아들이 보고 있던 만화와 똑같이―― 허공에서 물건을 마음대로 넣고 꺼내는 그것을 찬크에르가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목격한 당시는 너무 흥분하여 바로 찬크에르에게 달라붙어 잔뜩 물어봤을 정도였다.


이해는 고사하고 외국어는 아닌지 의심밖에 안 됐지만······


그나마 꾸역꾸역 이해한 내용을 정리하자면, 우리가 있는 이 공간을 세로로 되어있다고 치고, 같은 위상의 가로로 된 공간에 물건을 수납한다는 것인데······ 그냥 영문 모를 소리였다.


아직도 이해되지는 않지만, 어찌 됐든 덕분에 편히 짐을 옮길 수 있게 되어 좋긴 했다.



“그러면 이제 슬슬 밥 먹으러 나오렴.”

“네에~”


재차 떠올리니 흥분하는 자신을 진정시키고 리아는 거실로 나갔다.



“아버지, 잘 주무셨어요?”

“그래. 잘 잤단다.”


방에서 나오다 마주친 이스카르는 그리 대답하고는 잠시 쳐다봤다.



“음······ 떠날 준비는 다 됐니? 도와줄 건 없고?”

“네. 자기 전에 끝내뒀어요.”

“그래. 그렇구나······”

“자~! 다들 얼른 식사하세요. 아이리스,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고기를 듬뿍 넣어놨단다. 맛있게 먹으렴.”


활기차게 말한 필리아는 가라앉는 분위기인 리아들을 식탁으로 내몰듯이 데리고 왔다.


아이리스도 필리아를 따라서 일부러 신나 보이는 걸음걸이로 식탁갔다.


‘가족들이 우울해지니까 자기 한 몸 희생해서 분위기를 띄우려고 하다니······’


정말 착한 아이였다. 결코 저기 잔뜩 쌓여있는 고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맛있게 먹으렴.”

“매번 고맙다.”


감사를 전한 찬크에르를 마지막으로 다들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도 어머니의 요리는 정말 맛있네.’


분명히 맛있지만······ 당분간 못 먹을 거란 생각에 향수병에 걸린 듯 벌써 그리워졌다.


한입, 한입 음식 맛을 기억하듯 요리를 다 먹은 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준비하러 갔다.


이것은 이쪽의 일이었다.


식사의 준비는 언제나 필리아가 도맡아서 했고, 그건 찬크에르가 같이 살고 나서도 변하지 않았다. 도와주려고도 했지만,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는 건 그녀 본인이 느끼는 최고의 행복이라면서 강하게 거절했기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다못해 차를 내려오는 건 자신이 했었고, 오늘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이 무겁다.


힘겹게 준비하고 있으니 필리아가 다가왔다. 그리고 놀랄 틈도 없이 뒤에서 안는 모양새로 도와줬다.


그렇게 잠시 손을 놀리고 있던 필리아가 찬찬히 말하였다.



“리아, 나도 우리 사랑스러운 딸이 떠나는 건 걱정되고 쓸쓸해. 그래도 리아가 열심히 고민하고 정한 일이잖니. 그렇다면 그게 무엇이든 당당하게 자신이 정한 길을 나아가도록 하렴. 그편이 우리도 마음이 놓일 거야.”


‘어머니도 이렇게 믿고 응원해주는데 이러면 안 되지.’


리아는 뒤를 돌아봐 활짝 웃고 있는 필리아에게 똑같이 미소지었다.



“알겠어요! 어머니의 말씀대로 할게요!”

“그래. 그래야 내 딸이지. 우리 귀여운 딸~ 가기 전에 실컷 안아볼까?”

“꺄하하하. 자, 잠시만요. 간지러워요! 히힛~!”


필리아의 방해로 결국 차의 준비는 못 하게 됐지만, 리아는 행복한 기분을 듬뿍 만끽하였다.


그렇게 한참을 하하호호 장난을 치다 차는 포기하고, 식탁으로 가 모두와 시시껄렁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아. 이제 시간이 되었구나.”

“그러네요.”


필리아의 말대로 즐겁게 웃고 떠들다 슬슬 출발할 시간이 됐다.


자리를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빠뜨린 것은 없나 확인한 리아는 집안을 스윽, 천천히 둘러봤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자던 방부터 거실. 이스카르가 밤늦게 올 때 쓰던, 이제는 자신과 찬크에르가 지내게 된 방.


추억이 가득한 집을 리아는 기억에 새기듯 보고 밖으로 나섰다.


조금 걷다가 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위치에서 리아는 뒤를 돌았다. 그리고 앞으로 잠시 볼 수 없을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이제 괜찮나?”

“네.”


찬크에르에게 고개를 끄덕인 리아는 남은 미련을 떨치고는 발걸음을 옮겨, 다시 돌아보는 일 없이 마을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에는 아침부터 주민들 모두가 마중하러 나와 주었다.


리아는 무사 안전을 기원해주는 주민들의 손을 모두 잡아주며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답례했다.



“리아야, 조심히 다녀와야 한단다.”

“할아버지도 건강하게 계셔야 해요?”

“당연하지. 이 할아버지는 언제나 건강하단다. 그러니 내 걱정은 말고 리아의 몸부터 잘 챙기거라.”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잭 아저씨도 잘 지내셔야 해요?”

“나보단 너나 잘해라. 마을은 촌장님과 내가 있고, 루데릭도 앞으로는 도움이 될 테니 아무런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고마워요, 아저씨.”


마지막으로 에이브안과 잭을 꼭 끌어안는 것으로 리아는 인사를 마치고 자리를 비켜줬다.


그 뒤를 이어 둘은 찬크에르에게도 눈짓으로 인사를 나누고, 아이리스의 머리도 쓰다듬어주며 다정하게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답례를 말하는 아이리스를 뒤로 하고, 리아는 좀 떨어져 있는―― 이제는 자신의 오라버니가 된 루데릭에게 다가갔다.



“오라버니! 다녀올게.”


“너! 그, 그거 그만······ 아니다. 마음대로 해라. 에휴······ 뭐, 일단 조심히 다녀오고. 네가 돌아왔을 때는 몰라보도록 달라져 있을 테니 놀라지 않도록 해.”

“헤헤. 알았어. 기대하고 있을게. 그리고 이거 어울려?”


리아는 옆 머리카락을 넘겨 한쪽 귀를 보여줬다.



“어. 귀걸이?”

“응. 어제 오라버니가 줬던 걸로 만든 거야.”

“하루도 안 돼서 잘도 만들었다?”

“찬크에르가 해줬어. 부탁하니까 즉시 몇 가지의 금속을 꺼내더니 마법으로 뚝딱 만들어주더라고. 영구 보존해야 한다면서 여러 마법도 잔뜩 걸어줬어.”

“꺼냈다는 건 또 뭐냐. 영구 보존은―― 아, 됐다. 그나저나 귀는 뚫은 거야?”

“아, 응. 마법으로 고정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그냥 내 귀에 꼭 달고 싶어서. 별로 아프진 않았어.”

“흐응······”


뭔가 건성으로 대답한 루데릭은 빤히 초승달 모양의 귀걸이를 째려봤다.



“안 어울려.”

“어? 이렇게 이쁜 귀걸인데?”


루데릭에게 보여주려고 급히 만든 것이었지만, 완성도는 정말 훌륭해서 흠잡을 데가 분명 없었다. 찬크에르의 센스도 나쁘지 않아서 디자인 측면으로도 아주 세련되다 못해 명품 그 자체였다.


그러나 재차 쳐다본 루데릭은 혀를 찰 뿐이었다.



“잘 만들긴 했어. 그건 인정해. 하지만 너에게는 별로 안 어울려.”

“에에? 정말······? 오라버니가 줘서 열심히 귀까지 뚫었는데······”

“윽. 나, 나중에! 나중에 크면 그땐 어울릴 거 같아.”

“정말?! 헤헤. 나중에 크면 꼭 이쁘다고 말해줘야 해?”


방실방실 웃은 리아는 잘 다녀온다는 인사와 답례를 겸해 루데릭을 확 끌어안았다.


루데릭은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도 피하지 않고 마주 안아줬다. 곧 떼어 놨지만······


‘우······ 조금만 더 안아줬어도 안 잡아 먹는데. 오라버니는 부끄럼쟁이구만!’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쭉 내밀고 있으니 머리에 턱, 손이 올라왔다.



“리아, 잘 다녀와.”


루데릭의 청색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리며, 그 사이로 보이는 금빛의 눈동자가 따스하게 빛을 냈다.


올려다 본 리아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밝게 입가를 올렸다.



“응. 다녀올게, 오라버니.”


이것으로 루데릭과도 인사를 마치고 리아는 부모님에게로 갔다.


이날을 위해 슬픈 마음이 들지 않도록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렇지만 막상 마지막이 되어 울 수도 있기에 리아는 일부러 더욱 텐션을 높여 말하였다.



“이제 출발할게요! 예쁘게 커서 올 테니까 놀라지 마시구요.”

“후후. 루데릭이 한 말이잖니.”

“헤헤.”

“잘 다녀와, 우리 딸.”

“리아야, 긴말은 안 하마. 잘 다녀오렴.”

“네! 다녀올게요, 어머니, 아버지!”


질질 끌지 않고 부모님을 살며시 안아주는 것으로 끝낸 리아는 아이리스와 함께 찬크에르에게 갔다.


이제 출발이다.


이동은 미리 정한 대로 찬크에르의 마법으로 날아가기로 했다.


찬크에르는 다가온 리아를 팔에 앉히는 형태로 조심스럽게 안고는 그대로 날아올랐다.


아직 날 수 없는 아이리스는 마법으로 띄워 올렸다. 이는 아이리스 본인이 희망한 것으로, 찬크에르에게 업히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목적지는······ 바깥을 잘 모르는 리아였기에 이것도 모두 찬크에르에게 맡겼다.


선정 포인트는 용왕이나 정령이 안 올 만한 곳으로, 그가 지내던 심소라는 곳은 바로 제외됐다.

한 번쯤은 가보고 싶었기에 아쉬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곳이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때 가자며 위로해줬기에 참을 만했다.


신중히 며칠을 고민하던 찬크에르가 최종으로 결정한 곳은 인간이 사는 곳과는 멀지만, 한순간에 날아갈 만한 산속이 되었다.


산속에서의 생활은 불만이 없지만 왜 그곳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찬크에르가 알려주기로는 숨기가 좋다는 게 첫 번째로,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주변에 피해 또한 적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훈련하기에도 안성맞춤이라 주변의 눈치를 안 봐도 될 거라고 했다.


두 번째로는 여차하면 인간들 사이에 숨어서 도주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만약 그의 동포나 정령과 전투가 벌어진다면 많은 인간은 방패가 되어 함부로 전력을 다하지 않을 거란 기대도 약간 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는 최대한 인간들의 마을에서는 멀지만, 한순간에 도주는 할 수 있는 곳으로 선정했다고 하는데······ 자세한 건 모르겠다.


‘이제 와 생각한들 의미는 없겠지. 그보다는 제대로 새겨놓기나 하자.’


리아는 잡념을 멈추고 서서히 멀어지는 마을을 둘러봤다.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숲이 펼쳐지고, 루데릭과 갔던 호수도 보인다.


――그리고 그 속에 작은 우리 마을이 있다.


리아는 이를 꽉 깨물어 감정을 억누르고는 손을 크게 흔들었다.



“모두! 정말 고마워요! 다녀오겠습니다!!”


마주 손을 흔들어주는 가족들을 보며 리아는 생각했다.


이게 정말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고.


분명 걱정과 달리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으면 자신의 과민반응―― 그저 웃기는 해프닝으로 전락하겠지. 이후에 마을에서 술안줏거리 정도로 웃으며 떠드는 모습까지도 그려진다.


‘그래도 모두를 지키기 위해 강해지려 훈련하는 거고, 위험이 많은 오엘문리아이니 마냥 쓸모없진 않을 거야.’


――그 ‘만약’이 진짜로 발생해 가족이 휘말려 다치거나 죽는 것보단.


단박에 모든 의구심을 정리한 리아는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는 찬크에르의 품에서 빛나는 광채를 보이며 재차 각오를 다졌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입니다!


덥습니다!

정말 덥습니다!


이런 더운 날씨와 보러 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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