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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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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5.01 00:47
연재수 :
26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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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7,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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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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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20

DUMMY

상당한 파괴력을 지닌 찬크에르레이의 미소에 직격을 당한 리아는 한동안 어버버, 말도 못 하며 정신을 가누기 힘들었다.


결국 숨을 고르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아 치유마법까지 써서 진정하기에 이르렀다.



“조, 좋아. 이제 됐어.”


마지막으로 짝 소리를 내며 얼굴을 감싼 리아는 한숨을 깊게 토해냈다.


‘그나저나 다행이야. 아까 같은 자상한 미소로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는 게 더 슬퍼. 역시 아이리스와 같이 사는 게 모두 행복하잖아?’


조금만 방심하면 다시 날뛸 것 같은 심장을 의식하면서 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다시금 그의 얼굴이 보이고――


꽈악.


허벅지를 꼬집어 참아냈다.



“저기, 찬크에르레이 씨? 아니면 님?”

“찬크에르라 불러다오. 호칭 따윈 안 붙여도 전혀 상관없다.”

“알겠어요, 찬크에르. 앞으로 같이······ 응? 어어?!”


‘잠깐. 같이······ 살아? 누구 집에서? 우리 집에서?! 우리 집은 좁은데······가 아니라. 부모님은?! 어머니에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는 거야?!’


얼굴에 핏기가 사라진 리아는 두려움으로 가득해져 다급히 찬크에르를 올려다봤다. 잠시 피어올랐던 소녀의 마음 따윈 진즉에 사라졌다.



“찬크에르! 바로! 바로 부탁할 게 있어요!”

“뭐지? 어떠한 일이라도 해결해주지.”

“오오······ 드, 듬직해요! 믿고 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어머니를―― 아, 아니. 부모님을 설득해 주세요! 설명은 가면서 할게요.”

“······.”

“뭐해요. 어서 가요!”


리아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 있던 찬크에르의 손을 잡아끌었다.


왠지 당황한 기색인 듯도 했으나, 다급했던 리아는 무표정이기도 하니 착각이라며 넘겨버렸다.


‘그보다 역시 남자의 손은 크구나. 헤헤. 따뜻하기도 하고······ 아니. 정신 차려, 이스피리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정말로 헤실헤실 거리기엔 사안이 너무나도 중대했다.


리아는 마음을 다잡고 설득해야 하는 내용을 찬크에르에게 알려줬다.


유일하게 아이리스는 끝까지 엄청나게 싫어했지만, 웃는 얼굴로 열심히 압박하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줬다.


‘됐어. 아이리스는 아직도 툴툴거리지만, 승낙은 해줬기에 문제없어. 이제 제일 어려운 문제는······’


찬크에르 때와는 전혀 다른 두근거림을 느끼며 리아는 집 문을 열었다.


안에는 자신의 부모님뿐만 아니라 에이브안과 잭도 있었는데, 둘 다 굉장히 긴장한 상태였다. 특히 잭은 사냥 갈 때처럼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다.



“응? 모두 어쩐 일······ 아. 죄송해요. 또 걱정 끼치고 말았어요. 어······ 저기?”


에이브안과 잭. 그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오로지 시선을 찬크에르에게만 고정한 채 잔뜩 경계했다.


분위기에서 심각함을 느낀 리아는 서둘러 중재하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이스카르가 앞으로 나섰다.



“두 분 모두 진정하시고······. 자자. 리아야, 어르신과 잭 씨는 내가 불렀단다. 같이 이야기를 들어봐도 괜찮겠니?”

“네에?! 아, 아니, 괘, 괜찮기는 한데······”


‘두, 두 분도 내가 찬크에르랑 같이 산다는 걸 듣는 거야?! 어떡하지? 부, 부끄러운데.’


허락을 받게 되면 어차피 다 알게 되겠지만 눈앞에서 바로 알리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다.


그렇게 몸을 꼬고 있으니 찬크에르가 의욕 넘치는 표정――실제로는 무표정――으로 옆에 섰다.



“리아만 문제없다면 난 상관없다.”

“네?! 무, 물론 상관은 없는데. 그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리아. 정리할 시간은 충분했다.”


당당하게 포부를 밝히는 그의 든든한 모습에 리아는 몸을 비비 꼬면서 부끄러워했다. 걱정은 전혀 들지 않는다.


주위는 그런 리아를 내버려두고 자리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쪽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정 사항처럼 착착 의자가 준비되어 가는 현장. 리아는 몸을 비비 꼬는 것을 멈추고 빨개진 얼굴로 얌전히 얼마 전 성장에 맞춰 개량된 전용 의자에 앉았다.


에이브안과 잭은 앉아도 여전히 경계로 굳어있었다. 그래서 이야기의 진행은 이스카르가 했다.



“우선, 당신은 누구야? 어째서 우리 리아랑 같이 있었지?”


‘우리 리아’를 강조하는 이스카르.


이에 대한 답으로 찬크에르는······ 침묵했다.


아무런 말이 없자 정신을 차린 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찬크에르를 발견했다.



“응? 찬크에르,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대화하세요.”

“알았다.”


마치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제야 찬크에르는 입을 열었다.



“난 다섯 용 중의 하나인 찬크에르레이다. 아이리스의 알을 만든 자이기도 하다.”

“알을 만든 자가 아니라 부모예요! 그렇죠?!”

“리아야, 알았단다. 잠시 진정하렴.”

“읏. 네.”

“그······ 찬크에르레이? 용이라는 건 드래곤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고 봐도 무방하다. 현재 나의 모습은 인간으로 변했을 뿐이다.”


그 말을 듣고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는지 에이브안이 끼어들었다.



“그렇군······ 역시 레이라는 건 용왕을······ 말하는 것이었나?”

“인간들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더군.”

“저기, 할아버지. 용왕이라는 건 뭐예요?”


물으면서도 리아는 이상함에 고개를 꼬았다.


‘찬크에르가 용왕이라고? 용왕이라는 건 용들의 왕이라는 거잖아. 근데 찬크에르는 분명 다섯뿐이라고 했는데.’


왕이라하기에는 수가 적다. 우두머리나 리더쯤이면 이해가 되지만.


이리저리 고민해봤으나 알 수는 없었고, 에이브안을 올려다보니 그가 설명하기로는 동화나 신화 속에서 그 어떤 드래곤들보다도 강력한 드래곤이 있다고 한다.


세상의 위기일 때 악당을 심판하기 위해 나타난다고 하는 드래곤이······


말 그대로 동화에서나 자주 쓰일 소재로 등장하는 것이 그 용왕이라고 에이브안은 이야기해주었다.


리아는 옆에 앉아있는 찬크에르를 올려다보았다.



“그, 그런 거예요?”

“정확하진 않다. 우린 악을 심판하는 게 아니라 많은 존재가 멸종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니. 인간의 선악으로 판단하면 안 되겠지.”

“그렇군요······. 그리고 다섯이라는 건, 용왕은 다섯 분이 계신다는 건가요?”

“다섯이 존재하는 건 맞지만······ 용왕이라는 것은 좀 다르다.”


어떻게 이야기해야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던 찬크에르는 이내 이어서 말하였다.



“용은 나를 포함하여 오직 다섯만이 존재한다. 그런 우리를 사람들이 부르기로는 드래곤의 왕이라 하여 용왕이라 칭한 것이고. 레이라는 것도 최초 사명을 받고 태어난 우리들―― 용을 지칭하는 말로, 용왕을 칭하는 말이 아니다. 현재는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으니 여러 소문은 있겠다만은.”

“원래는 다 같이 사신 거예요?”

“그랬었지······ 나도 오래전에 만났으니 다들 어디에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서로 다른 대륙에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오올르오레이, 사람들이 금룡왕이라 부르는 그만이 각처를 떠돌고 있고.”


또 드래곤이라 부르는 존재들은 자신들의 피조물, 또는 자식 정도라고 보면 된다고 덧붙이기도 했는데······


이걸 말할 때의 찬크에르는 무척이나 꺼려졌는지 미간에 작게 주름이 잡혀 있었다. 무표정이라 그다지 알아채기는 힘들었지만.


‘동화에는 날뛰는 드래곤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으니 아마 자식들이 폐 끼친 게 미안했던 모양이네.’



“착각하면 안 된다, 리아! 내가 낳은 자식은 아이리스뿐이다. 다른 드래곤들은 동포가 만들―― 낳은 존재들이다.”

“그런가요? 아이리스의 형제들이 많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네요.”

“음. 그러한 자는 없다.”


어쩐지 필사적으로도 보이는 찬크에르의 모습이 귀엽게도 느껴져 리아는 미소 지었다.


뚜드득.


어디서 뭔가 힘이 잔뜩 실리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누군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서! 그 대단하신 용왕이라는 분이 어째서 다친 리아를 안고 나타난 거야?!”


이스카르였다. 그는 이마에 핏줄까지 세우고는 증오스럽다는 양 찬크에르를 노려보았다.



“아, 아버지! 그건······”

“리아, 마음 쓰지 않아도 괜찮다. 이건 나의 몫. 내가 사죄해야 할 일이다.”

“우으으으······”


할 말을 잃은 채 리아는 빠지고, 찬크에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런 그의 이야기를 모두 경청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그 한 명이었던 이스카르는 딸을 공격하였다는 부분에서 크게 분노하여 그대로 찬크에르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휘둘렀다.


같이 듣고 있었던 리아도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됐다.


사실 자신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외관은 치료가 끝나 있었다. 그러나 신경의 손상이 많았기에 치료를 지속해야만 했고, 겉으로 봤을 때 그 심각성을 알 수가 없었다.

엄청난 마력을 소비하여 치료하고 있단 걸 눈치챈 에이브안과 잭 말고는.


그래서 둘은 경계하고 있었고, 똑같은 사실을 지금 알게 된 이스카르는 용서할 수 없었던 거다.

어떠한 상황이든 아직 8살밖에 안 된 딸을 공격한 사실 자체가.


하지만 이스카르는 일반인. 그나마 조금은 나은 편이라지만 큰 차이는 없다. 찬크에르가 보기에는 정말 아무런 차이가 없는 수준일 거다. 그가 휘두르는 주먹 따윈 마치 정지한 것처럼 보일 터였다.


그럼에도 찬크에르는 피하는 일 없이 가만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한 정황을 이해하긴 했으나 놀란 건 놀란 거다. 말리기 위해 리아는 벌떡 일어났고, 주먹은 찬크에르의 얼굴에 직격하기 직전이었다.


바로 그때――


턱.


필리아가 팔을 잡아 멈춰 세웠다. 분이 풀리지 않는지 이스카르는 팔을 빼내려고도 했지만 꿈쩍하지도 않았다.



“필리아!”

“진정하세요. 딸아이 앞에서 함부로 폭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상당히 의외였다. 필리아라면 누구보다도 먼저 찬크에르의 뺨을 후려치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팔을 잡은 필리아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래. 그녀 또한 화를 참고 있을 뿐이었다.


이스카르도 이를 알아보고는 눈에 이성이 돌아왔다.



“후우······ 당신은 내가 보지 못한 뭔가를 봤겠지. 나중에 말 좀 해줘.”

“알겠어요. 고마워요, 당신.”

“나야말로. 덕분에 우리 리아 앞에서 못 보일 꼴을 보이지 않게 됐어.”


리아는 팔을 내리는 이스카르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안절부절 자기는 괜찮다며 떠들어댔는데, 곧바로 필리아가 조용히 시켰다.


어머니에게는 대들 수 없었던 리아는 얌전히 찬크에르의 곁으로 돌아가 대기했다.


여차하면 말리기 위해.


그러한 리아를 지긋이 쳐다본 필리아는 차분하게 말하였다.



“난 리아가 용서했다면 상관없어요.”

“······당신은 괜찮은 거야?”

“리아를 상처 입힌 건 용서 못해요. 하지만 어느 정도 마음은 이해해요.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만약 우리 리아를 누군가가 납치해간다면 그 심정이 어떨지.”

“뭐?! 리아를?! 아, 아니. 그건 그렇다지만······”

“촌장님은 어때요?”

“솔직히 납득하라는 건 말도 안 된다만······ 심정은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다가 당사자인 리아가 용서했다. 그렇지, 리아야?”

“네! 전 용서했고 말고요! 아이리스도 그래요. 그렇지?”


재빨리 대답한 리아는 동의를 구하듯 아이리스를 쳐다봤다.


아이리스는 삐친 듯 고개를 돌리긴 했는데 대답은 해줬다. 해주긴 해줬는데······ 정말 아무도 듣질 못해서 다행이었다.



“마, 맞다고 하네요.”


스스로가 봐도 거짓말이라는 게 티가 났지만, 자신 말고는 아무도 못 듣는다는 점을 노려 리아는 철판을 깔기로 했다.


역시 딴지를 걸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던지라 필리아는 곧장 이스카르를 보았다.



“그러니까 당신도요. 네?”

“하······ 알았어.”

“잭 씨도요.”


언제든 쏠 수 있게 화살을 메겼던 잭은 자세를 푸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직 분위기가 살벌했지만 조금은 누그러들자 필리아는 이번엔 찬크에르를 향해 물었다.



“찬크에르 씨라고 했죠?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것 때문에 염치없지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부탁이요?”


드디어 왔다.


긴장됐는지 찬크에르는 얼굴을 굳혔다. 원래도 무표정이었던 그의 얼굴은 더욱 딱딱해져 자칫 화를 내는 것처럼도 보인다.


살짝 맘을 놓고 있었던 리아도 조마조마해져 떨리는 심정으로 지켜봤다.



“리아······ 아니. 리아와 아이리스, 그 둘과 함께 이곳에서 살고 싶다.”

“············.”


실내는 단박에 찬물을 끼얹듯 조용해졌다.


물론 못은 건 아니다. 그저 다들 말하는 의미가 순간적으로 이해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윽고 예상치도 못한 그의 말이 머리가 해석되기 시작하고, 진정되었던 분위기는 다시 도화선에 불을 붙인 듯 활활 타올랐다.


이스카르는 다시 멱살을 잡을 듯 표정이 험악해졌고, 에이브안과 잭 또한 덩달아 경계하며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찬크에르는 그저 머리를 숙이며 부탁했다. 언제든 마법을 쏠 수 있게 준비하는 에이브안과 마력을 잔뜩 끌어올린 잭의 화살이 자신을 향해있음에도 결코 머리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모, 모두! 제가 찬크에르에게 부탁한 거예요! 진정해 주세요!”


당장에라도 전투가 벌어질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에 리아는 찬크에르의 앞으로 튀어나와 팔을 벌려 막아섰다.


그 모습을 잠자코 볼 수 없었나, 허락해주기 전까진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찬크에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마치 사선을 가로막듯.



“찬크에르······”

“――아니다, 리아.”

“네?”


찬크에르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게 아니다, 리아. 그대와 살고 싶은 것은 나의 의지다. 결코 그대의 부탁을 받았기에 함께 있고 싶은 것이 아니야.”


“후. 당신은······ 리아와 아이리스를 상처입히지 않을 건가요?”


머리가 하얘져 대답해야 할지 몰랐는데, 대신 다른 이들과 달리 침착하기만 했던 필리아가 물었다.


찬크에르는 시선을 떼고 앞을 보았다.


필리아의 강한 시선이 똑바로 자신을 향하자 찬크에르는 가슴을 폈다.



“다시는 그런 짓은 저지르지 않는다.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겠다. 약속하지.”


결연한 각오처럼도 느껴지는 대답.


조용히 듣던 필리아는 아무런 말이 없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같이 살도록 하죠.”

“필리아! 큭!”

“아버지!”

“리아야, 내가 따라가 보마. 잭 자네도······”


문을 박차고 나간 이스카르. 가장 설득이 힘들 거라 예상했던 필리아의 허락은 떨어졌것만. 더군다나 저렇게 화내는 그의 모습은 리아도 처음이었다.


미안함으로 머리가 내려갔는데, 아이리스가 다가와 위로하듯 얼굴을 비볐다.


찬크에르도 알아차렸는지 허리를 낮춰 조심히 손을 잡아줬다.



“고마워, 아이리스······. 찬크에르도요. 고마워요.”


둘의 온기를 느끼고 있으니 마음이 따듯해지며 리아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다.



“진정했으면 다들 앉아보세요. 잠시 할 이야기가 있어요.”

“네.”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고, 필리아는 차를 준비해 모두의 앞에 놔줬다. 이제는 커다래져 같이 앉기 힘들어진 아이리스는 새로 만들어준 탁상에 차를 그릇에 담아 준비해줬다.


뜨거운 차가 몸 속에 들어오니 더욱 진정되는 느낌이다.


그렇게 잠시간의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필리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리아―― 아니. 찬크에르 씨?”

“뭐지?”

“리아는 이제 8살이 됐어요. 같이 살기로 했지만 그걸 염두에 두시길. 그리고 절조 있는 행동을 부탁드려요.”


찬크에르는 눈을 부릅떴다. 여태까지의 그에게서 가장 알아보기 쉬울 정도로 ‘경악’이라는 감정이 뚜렷이 나타났다.



“리아가······8살. 인간이 사용하는―― 12개월을 단위로 세는 날로 이야기하는 것인가?”


믿을 수 없다는 양 그는 재차 물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변 따윈 없었다.



“네. 맞아요.”


확고한 대답과 진지한 필리아의 눈빛에 찬크에르는 이번에야말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용왕이라는 대단한 존재답게 멈춰 보였던 사고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찬크에르는 힘겹게 입을 움직여 말했다.



“······미안하군. 인간의 생김새는 알고 있었지만, 성장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난 리아가 영락없이 그저 작은 인간인 줄로만 알았다.”

“어. 저 평범해요. 그리 작지 않은――”

“――아이리스를 지키는 용감함과 나의 실수조차 선뜻 용서하는 넓은 마음을 가진, 내가 처음으로 마음을 빼앗긴 이 멋진 존재가 설마 그리 어렸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리아가 멋진 아이라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우리에겐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아이예요.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알겠죠?”

“알았다. 오히려 미안했다. 그러나 내 말을 철회하고 싶은 마음 따윈 없다. 나는 이 리아와 함께 살아가고 싶다.”

“알겠어요. 부디 리아를 잘 부탁드려요.”

“나야말로. 허락해줘서 진심으로 감사한다.”


대화를 마친 둘.


도중 자기 말이 무시당하고 잘렸지만 리아의 광대는 위로만 올라가고 있었다.


‘에헤헤헤. 용감하고 멋지대. 여성에게 하는 칭찬 같진 않지만, 기분은 좋으니까 됐어. 히히히. 매번 무표정이지만 이때는 더 멋있었어.’


머릿속이 완전히 꽃밭으로 물들어 해롱해롱했다.


하지만 그 좋은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쾅!!


거친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들어온 이스카르가 돌아왔다. 다만 뒤를 따라온 에이브안과 잭이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마음에 걸린다.


‘딱히 아버지를 말리려는 것 같진 않지?’


그 느낌 그대로 주변의 제지도 없이 이스카르는 씩씩대며 식탁으로 다가왔다.



“이봐! 찬크에르레이―― 찬크에르라고 했지?! 나와 말 좀 하자!”

“물론이다. 나도 그대와는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어, 어머니. 저기 아버지가······”

“리아, 아빠를 방해하면 안 된단다. 두 분도 차분히 이야기들 나누세요. 우리는 촌장님의 집으로 가 있을게요. 아이리스도 따라오렴.”


이견은 듣지 않겠다는 듯 필리아는 단호히 손을 붙들었다.


리아는 끌려나가면서도 불안한 심정에 뒤를 돌아왔다.


그렇지만 서로를 마주 본 찬크에르와 이스카르만 보일 뿐, 무엇이 벌어질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오직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졸졸 따라붙는 아이리스의 기분만이 짐작되기만 하였다.


표정이 어둡게 되어 에이브안의 집으로 향하는 가운데 주민들이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


뜻하진 않았지만 이 덕에 리아는 자신이 마을로 돌아오고 나서 하루 종일 잤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잠자는 공주도 아닌데 너무 잠만 자네.’


잭은 도중에 본인의 집으로 돌아가고, 이래저래 축 처진 리아는 에이브안의 집에 도착했다.



“괜찮단다, 리아야. 이스카르랑 찬크에르는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마 리아가 생각하는 그런 다툼은 벌어지지 않을게야.”

“어······ 왜요?”

“아빠는 부모로서 찬크에르 씨와 대화하는 거거든.”

“네? 어머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으음······ 딸을 달라는 자와 반대하는 부모의 대화랄까······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나······”

“날 보지 마라. 나도 어떻게 설명해야될지 모르겠다.”

“에? 자, 잠시만요!”


이상했다. 뭐가 어떻게 되면 이야기가 저렇게 진행된다는 말인가.


‘이러면 마치 내가 찬크에르랑······ 겨, 결혼한다는 말 아니야?! 아니, 그야······ 찬크에르는 잘 생기긴 것도 모자라, 멋지고 자상하기도 하지만······’


딱히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자신에게 당황하면서도 리아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일단 묻기로 했다.



“그, 그······ 어머니. 왜, 왠지 제가 찬크에르랑 그것이······ 겨, 결혼하는 듯한 말씀을 하셨는데요?”

“에휴. 여전히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지만 결혼이 아니라, 이미 결혼하고 결실까지 본 그런 상황이 아니니. 엄마도 모르는 새에 말이야.”

“에엑?!”

“뭘 그리 놀라니. 리아, 넌 아이리스의 엄마겠지? 그럼 찬크에르 씨는?”

“······아이리스의 아빠요.”

“그래. 엄마, 아빠. 이미 부부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잖니. 정말 내 딸이지만 누굴 닮아서 이러는지 모르겠네. ――뭘 그리 봐요, 아빠?”

“아, 아무것도 아니다. 갑자기 이 남자랑 살거라고 나간 누군가가 생각났을 뿐이다.”

“응? 그런 사람도 있었나요? 무책임하게 그런 말만 하고 나가다니 부모님이 고생이었겠어요.”

“············.”


이후로도 에이브안과 필리아는 대화를 나누었지만 리아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앉아있던 의자에서도 내려온 리아는 멍한 상태로 둘을 내버려 두고 마당으로 나가 화단에 쪼그려 앉았다.


단순한 느낌이겠지만 많은 약초로 도배되어있는 화단에서 불어오는 각종 향기가 붉어진 얼굴과 가빠오는 호흡을 가라앉히는 듯했다.


‘일단 정리해보면······ 상황적으로는 그럴싸해 보이네.'


게다가 실제로 아이리스는 자신과 찬크에르의 혼으로 태어났다. 그러니 필리아들이 골머리를 썩는 건 무리가 아니고, 되려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충분히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아! 싫은 건 아냐. 아니긴 한데······ 응? 어라? 있었구나, 아이리스.”


어느새 따라왔는지 옆엔 아이리스가 서 있었다.


뚱한 표정을 짓던 아이리스는 조용히 옆에 앉아 화단을 바라봤다.


재주도 좋게 사람처럼 앉는 그 모습을 보다가 리아는 기분 전환이나 할 겸 아이리스가 바라보는 화단을 가리켰다.



“저 화단 말이야. 할아버지가 날 위해서 만들어주셨대. 멋지지 않니? 물론 아이리스를 위한 거기도 하단다?”

《······.》

“응? 왜 그러니?”

《······엄마는 저 녀석이랑 같이 사는 거 아무렇지도 않아? 다치는 정도가 아니라 여차하면 잘못됐을 거라고.》


여전히 화단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이리스는 진지했다.


리아도 들떴던 기분을 가라앉히고 아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진지하게 대답했다.



“같이 사는 건······음. 솔직히 부끄럽긴 한데 싫진 않아. 아이리스의 마음은 고려하지 않아서 미안해. 하지만 난 이상한 부모만 아니라면 자식은 함께 있어야 좋다고 봐. 그리고 찬크에르는 분명 이상한 쪽이 아닐 거야. 몇 개월이나 아이리스를 찾아다녔는걸?”

《그러면 뭐 해. 우릴 죽이려고 했잖아.》

“응. 맞아. 우릴 죽일 뻔했지. 그건 사실이야. 그렇지만 그거 아니, 아이리스? 어떠한 사람―― 존재든 실수는 반드시 해. 한 번도 안 할 수는 없어. 용왕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야. 그도 기쁜 나머지 실수를 했을 뿐이지.”

《그래서 용서한다고?》

“물론 아이리스를 위험하게 한 건 너무 화나. 하지만 만회할 기회가 한 번도 없다는 건 무척이나 슬픈 일이야. 게다가······ 으응. 아니. 나도 찬크에르와 같이 살고 싶어.”

《······.》

“미안해, 아이리스. 잘난 듯이 떠들어 놓고는 결국 내 기분만 앞세워서.”


아이리스도 역시 기가 찼는지 조용히 일어나 등을 돌려 거실로 향했다.


차마 붙잡을 수 없었던 리아는 착잡한 기분으로 떠나는 아이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렇지만 그때, 작지만 귓가에 말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좋다면 나도 좋아.》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기습적이었던 그 말에 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또르르.


더는 참지 못하게 된 리아는 그대로 아이리스에게 달려가 끌어안았다.


뒤에서 붙잡힌 아이리스는 놀라면서도 딱히 밀치지 않고 꼬리로 등을 토닥여주었다.


더욱 감정이 복받친 리아는 꽉 끌어안은 상태에서 고맙고, 또 고맙다며 몇 번이고 되뇌었다. 역시 아이의 감정은 불편하다는 평을 남기며.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아 요즘 덥네요. 에어컨까지 틀게 되고 벌써 여름인가 싶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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