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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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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6.19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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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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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쪽

18

DUMMY

깊고 진한 칠흑의 아름다운 비늘을 가진 드래곤―― 아니. 용이 있었다.


엄청난 거구를 자랑하는 그 용은 찬크에르레이로, 신들에 의해 사명을 부여받고 세상에 태어난 다섯 용 중의 하나였다.


그들의 사명은 이 별에 사는 존재들의 관리. 그 주어진 명에 따라 다섯 용은 세상을 지켜봤다.


세상일에는 깊게 관여하지 않았다. 수많은 종의 근절이나, 세계 멸망 단위의 사태가 아닌 한 방관하는 게 기본적인 행동 지침이었다.


――다만 그만한 일들은 어지간해선 발생하지 않는다.


아무리 신들이 내린 사명이라지만 영원히 사는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무료한 날들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시간에 질린 그의 동포 중 한 명이 ‘알’을 만들었다.


물론 단순한 호기심으로 만들었기에 애정 따위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방치된 알은 아무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렇지만 남기고 간 게 있었으니······


그 일이 무료할 뿐인 일생에 자극을 주었는지 또 다른 동포들이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본인들도 알을 만들기 시작했다.


알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했다. 마력으로 껍질을 만들고 그 안에 마력을 채워놓으면 그만이었다. 마력은 차고 넘치는 이들에겐 일도 아니다.


그렇게 각자 알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알에는 생명이 깃드는 일은 없었다.


당연했다. 가장 중요한 혼이 채워지지 않았으니.


그렇지만 결과가 어떻든 오랜만에 얻은 생의 자극이다. 내용물이 담기든 말든 모두 껍데기만으로 만족하여 멈추지 않고 계속 알을 만들었다.


찬크에르레이는 그러한 동포들이 이해가 안 됐지만, 조금이라도 지루함을 달래기만 하면 되기에 동포가 하는 일을 지켜봤다.


물론 성과는 전무했다. 쏟은 시간에 비해 허탈할 정도로. 동포들도 그저 반복될 뿐인 일에 슬슬 흥미가 떨어졌다.


그러던 때에······ 한 개의 알에 혼이 깃들었다.


그 알은 동포 중 하나인 볼사레이가 최고의 걸작이라며 긴 시간 공을 들였던 것이었다.


놀란 찬크에르레이는 다른 동포들과 살폈다.


틀림없었다. 알에는 정말 볼사레이의 혼이 조금이지만 깃들어 있었다.


어째서 그의 혼이 깃들었는가?


당시의 찬크에르레이는 물론 다른 동포들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알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명을 관리하는 게 사명이지,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은 담당 외였기 때문이었다.


답을 찾지 못한 상태였지만, 잃던 흥미가 타오른 그들은 혼이 깃든 알을 내버려 두고 다시 알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방치된 혼이 깃든 알은 마력을 흡수했다. 주변에 용이 다섯이나 있었기에 떠도는 잔류마력만으로도 성장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알은 부피를 키워, 마침내 그 속에서 생명이 태어났다.


다만 알에서 나온 것은 지성이 조금도 깃들지 못한 동물로, 겉모습만은 그들을 작게 축소한 모습이었다.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던 그들의 눈에도 이 결과는 상당히 실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처리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죽이는 것은 쉽다. 그러나 존재를 관리하는 자신들이 가볍게 생을 없애는 행위에 거부감이 들었다.


무수히 많은 대화가 오갔지만, 결국 죽이지 않고 강한 존재가 드문 숲에 방생하기로 결정됐다.


이 당시에는 그들도 이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지만, 이 일로 대륙에는 훗날 드래곤이라 불리는 생물이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훗날 이들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만, 이때는 이 일 이후로도 알을 만드는 데에만 치중했다. 목적도 어느새 단순히 알을 만드는 행위에서 제대로 지성을 갖춘 존재의 탄생으로 바뀌었다.


재차 수많은 시도가 있었고, 어떤 때는 그들의 혼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의 혼이 깃들기도 했다.


그리고 매번 지성이 전혀 없는 존재들만 탄생했다.


물론 마력레벨을 올리면 결과적으로 지성이 조금 생기긴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는 건 자신들과 같은 일정 수준 완성된 존재다. 지금의 결과에 만족하기란 힘들었다.


다시 근방 숲에 놓고 오기를 되풀이하는 나날.


계속되는 실패에 그들은 드디어 이 별에 사는 존재들은 어떻게 생명을 탄생시키는지 관찰하기로 했다.


각자 다른 곳을 보고 있었기에 관찰한 존재가 생명을 낳는 방식 자체는 달랐으나, 공통된 점은 오랜 시간 태어날 때까지 정성껏 보살폈다는 것.


그렇게 태어난 자들은 확실히 지성을 갖춘 존재들이었다. 혼도 명확하게 많았고, 깨끗하기까지 했다.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혼이 깃든 생명을 방치하면 지성이 깃들지 않는 존재들이 태어났다. 정말 가끔 멀쩡하게 지성을 가질 때도 있었지만, 그 경우는 대부분 혼도 적고, 탁한 불안전한 존재였다.


문제점을 깨닫게 된 그들은 전략을 바꿔 한 개의 알에 정성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마침내 태어난 생명은 혼도 적고 조금 탁하기까지 했으나······ 그럭저럭 지성은 갖추고 있었다.


신난 찬크에르레이의 동포들은 이 존재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이 역시 마찬가지로 강자가 그다지 없는 숲에 보내기로 정하였다.


그로부터도 몇 번이나 지성을 갖춘 존재의 탄생을 시도했다. 정말 아득한 새월을. 하지만 암만 해봐도 이 별의 사는 존재들처럼 명확한 혼을 가진 생명을 탄생시킬 순 없었다.


이렇게 해선 끝이 나질 않는다는 것을 느낀 그들은 다시 한번 오랜 시간 관찰했다.


그리고 마침내 알게 됐다.


여태 그들은 말 그대로 성정을 쏟은 것이었지 애정을 준 게 아니라는 걸.


만든 알은 흥미 위주였고,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물건 정도였다. 거기에 정성을 쏟는다 한들 약간의 애정이라도 생기면 다행이었다.


혼은 그리 쉽게 깃드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과 문제점을 알고 나니 그들의 흥미는 거기서 끝을 고했다. 알을 만드는 행위도 전혀 하지 않게 되었다.


이전처럼 다시 무료한 나날이 돌아오고, 그 지루함에 찌들었을 때쯤 그의 동포 중 하나가 말했다.



“이 땅에 사는 존재들이 늘었다. 그들 속에서 지내보는 건 어떤가?”


본인도 단순히 심심해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듣고 나니 이야기를 꺼낸 자도 그렇고, 다른 동포들마저도 이 말에 끌렸다.


유일하게 동포들을 중재할 권한을 가진 오올르오레이조차도 수긍하며 찬동했다.


‘그가 찬동했다면 할 말은 없다.’


그리 생각한 찬크에르레이는 딱히 이견을 말하지 않았다.


몇 가지 사명에 어긋날 일을 하지 않도록 정하고 그의 동포들은 다른 존재로 변하여 떠나갔다.


관심이 없던 찬크에르레이는 혼자 남아 모두를 배웅했다.


또다시 돌아온 무료한 나날.


이번엔 동포들도 없기에 찬크에르레이에게는 더욱 지루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이곳까지 찾아올 손님은 당연히 동포로, 그는 다른 존재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동포는 다른 대륙에 갔었다는데, 그는 흥분하여 정말 많은 것을 보고 왔다며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토록 흥분하는 동포를 보긴 처음. 알이 태어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동포의 새로운 일면에 찬크에르레이는 놀라면서도 한참을 떠드는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기껏 말해주는데 듣지 않으면 아까우니.


그렇게 즐겁게 떠들던 동포는 돌아가고······ 얼마 후에 다른 동포가 찾아왔다.


이번 동포는 먼저 왔던 동포와는 다른 대륙에 갔다고 했다.


의아한 찬크에르레이는 모두 같이 간 것이 아니었나 물었더니, 흩어져 각자 다른 대륙으로 갔고, 오올르오레이만이 정처 없이 떠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이후 그 또한 한참을 신나는 듯 밝게 웃으며 떠들었다.


저번도 그렇지만 이 동포가 웃는 것도 찬크에르레이에겐 처음이었기에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가끔씩 돌아오는 동포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찬크에르레이의 소소한 낙이 되었을 때쯤, 인간이라고 하는 작은 존재의 모습으로 볼사레이가 찾아왔다.


찬크에르레이도 인간의 모습은 멀리서만 보았기에 흥미롭게 관찰했다.



‘특이하게 생겼군.’


그런 심플한 평가를 내린 찬크에르레이에게 볼사레이는 손에 안고 있던 물체를 머리 위로 들어 보여줬다.


뭔가 싶었던 거체의 찬크에르레이는 고개를 내려 실실 웃는 볼사레이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볼사레이가 머리 위로 든 것은 백색의 비늘을 가진 생명체로―― 무려 볼사레이의 영혼이 깃든 존재였다. 그것도 깨끗한 혼이 가득 들어찬 상태로.


혼은 결코 쉽게 깃들지 않는다. 그랬었기에 동포들은 알을 잔뜩 만들었음에도 매번 실패했던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알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저 볼사레이가 알 같은 것에 애정을 쏟을 거란 상상이 잘 되지 않았기에 찬크에르레이는 믿기 힘들었다.


매우 놀라는 그를 본 볼사레이는 한참을 웃더니 들고 있던 아이를 본인의 자식이라고 소개해줬다.


그에 따라 볼사레이의 품 안에서 자신을 솔르사라고―― 현재는 드래곤이라 부르는 모습을 한 작은 존재는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어설프게 대꾸했던 찬크에르레이, 그도 이때까진 놀라움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그 뒤로도 점차 찾아오는 횟수가 많아지던 볼사레이와 솔르사가 자신의 몸을 장난감 삼아 올라타고 놀았지만, 신기하게도 찬크에르레이는 영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솔르사가 성장하여 인간으로 변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찾아오는 게 드물어졌다.


찾아올 때는 귀찮았지만 막상 안 오니 또 적적하다.


그런 새로운 감정을 느끼며 시간은 흘러, 다른 동포가 찬크에르레이를 찾아왔다.


그는 무척이나 오랜만에 온 동포로, ‘다른 존재에 섞여 살아보자’라고 제안했었던 아주르레이였다.


다만 아주르레이는 언제나 밝았었던 그 모습과 달리 처음으로 보이는 침울한 표정이었다.


걱정이 된 찬크에르레이는 무슨 일이 있었나 물어보았는데, 자신의 자식이 죽었다는 믿기 어려운 말이 돌아왔다.


‘볼사레이처럼 자식이 있는 것도 놀랍건만 죽었다고?’


찬크에르레이는 혼란스러웠고, 한 가지 이상했다. 아주르레이가 붙어 있음에도 그의 자식을 죽일 수 있는 존재 따윈 동포를 제외하면 정령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지만 예상과는 달리 양자였고, 그 양자는 물리적이 아닌, 단순 수명에 의한 죽음이었다고 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찬크에르레이는 침울한 그를 위로해줬다.


아주르레이는 그 후로 잠시 머물며 심신을 위로하다 자식이 죽은 대륙에 머물겠다며 떠났다.


다시금 혼자 남게 된 그는―― 찬크에르레이는 떠나간 동포들에 대해 생각했다.


동포들은 많은 존재들과 만나며 확실히 달라졌다.


감정이 풍부해졌다고 여겨지는 모습은 확실히 무료함에 사무치던 시절과 비교하면 절대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동포들은 잘 지내고 있구나, 안심되기까지 했다.


그런 동포들을 떠올리다가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어찌 저리도 행복해하고 침울해질 수도 있는 걸까? 나도 이곳을 떠나 다른 존재들을 만나봐야 그 답을 알 수 있는 것인가?


고민은 많았지만 정해지지는 않았고, 그렇게 또 시간은 흘러만 갔다.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흘렀을까, 잠을 자고 있던 그에게 볼사레이가 오랜만에 또 찾아왔다.


그리고 인사도 없이, 어느 때에도 보이지 않았던 행복한 미소를 띠고는 대뜸 다가와 그의 몸을 찰싹찰싹 때렸다.


인간으로 변해있고 힘도 별로 안 줬기에 아픔 따윈 없었지만, 기분이 나빠진 그는 낮은 음성으로 용건을 물었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한참을 저 홀로 좋아하던 볼사레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손주가 태어났어.”

《손주?》


손주라는 개념은 알고 있지만 볼사레이가 이토록 좋아할 만한 것인가. 이해하기 어렵다.



“아아. 이해받고 싶은 게 아니야. 그냥 지금 이 심정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을 뿐이지.”


생각을 읽고 하는 말에 그는 묵묵히 혼자 떠드는 볼사레이를 보았다.



“손이 조그마한 것이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생김새를 솔르사를 닮아 분명 나중에――”


손짓까지 하며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볼사레이.


솔직히 전혀 이해가 안 되었지만 그래도 동포가 이렇게나 좋아하니 말리긴 싫어 그는 가만히 놔두었다.


하지만 적당한 대꾸하고 있자니 끝이 안나 물었다.



《그렇게 좋은가?》


그 질문에 볼사레이는 눈을 크게 뜨더니 한참을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한순간에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어. 정말로 행복해. 밖으로 나가보자고 이야기를 꺼낸 아주르레이에게 감사할 정도로.”


매사 적당적당한 볼사레이가 이토록 진지한 건 처음이었다. 결코 가볍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놀람이 가시질 않은 채 다시 실실거리며 손주와 자식 자랑을 하고 떠난 볼사레이를 배웅하고, 그는 자신도 자식을 한 번 낳아볼까 고민했다.


그만큼 이날의 볼사레이는 그에게 너무 큰 충격을 주었었다.


‘저 볼사레이가 저리도 진지하게 행복을 논할 줄은······ 과거의 나에게 말해도 절대 믿지 않겠지.’


그렇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현실이었고, 볼사레이가 느낀 기분을 자신도 느껴보고 싶었다.


이번에야말로 고민은 짧았다.


그렇게 언제나 동포가 무얼 해도 잘 끼지 않았던 찬크에르레이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알을 만들었다.


기왕 태어날 생명이다. 서툴게 만들어서 어디 하나 부족함이 있으면 태어날 생명에 대한 모독이다.


처음 만드는 알이었기에 그는 더욱 신중을 기하고, 어디 부족한 부분은 없나 확인하면서 정성을 다했다.


생각보다 긴 기간이었지만 어떻게든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완성된 알.


그는 그 알을 조심스럽게 곁에 두었다.


상당한 정성을 들였던 탓일까, 그의 혼이 곧 무사히 알에 깃들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었으니 그는 좋아하지 않고 동포에게 들은 지식을 참고하여 알을 길렀다.


추워지는 날에는 품어서 따듯하게 해줘야 한다고 했다.


‘내 마력과 혼을 받은 이상 추위 따위에 약할 일은 없겠지만······’


만약을 위해 감싸 안고, 그것도 모자라 마법으로 냉기까지 차단했다.


날이 따듯해지고 나서는 서늘하게 해야 한다고 했었다. 다만 너무 춥지 않게.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어느 정도에 맞춰야 할지 그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곧장 근처에 있는 생물들에게 실험하여 적정 온도를 알아내었다. 물론 단 한 개체도 죽이지는 않았다.


실험에 응해준 이들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전한 그는 비 오는 날엔 젖지 않게 해줘야 한다는 등의 일들을 차근차근 실시해 나갔다.


그 노력은 결실을 맺어 알에는 그의 혼이 제법 들어가고 깨끗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변이 일어났다.


너무 알에만 신경을 썼던 것일까. 이대로 커서 무사히 태어나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을 때,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니 근처에서 마수와 마물이 싸우고 있던 게 아니겠는가.


자신의 주변에서 누군가가 싸우는 걸 처음 보긴 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이상 사태였다.


그들 사이에서 심소라 불리는 이곳은 현재 찬크에르레이 혼자 있지만, 본디 먼 옛날부터 다섯 용이 다 함께 머물던 장소였다.


어지간한 마수나 마물은 본능으로부터 느껴지는 이들의 기운에 두려움을 품고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이는 찬크에르레이 혼자라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강대한 마수나 마물조차도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그가 있는 장소에서 싸움을 벌인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고, 알에 혹여나 무슨 악영향이 끼칠지 몰라 마법으로 싸우는 그들 주변을 공격하여 다치게 하진 않고 적당히 흩어지게만 했다.


그리고는 알이 무사하나 살펴봤는데······


알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당황한 그는 서둘러 주위를 살펴 비행하는 마수가 알을 들고 날아가는 것을 찾아냈다.


그에게 몰래 접근해 알을 빼내 갈 수 있는 존재 따위는 손에 꼽지만······ 지금 저 마수는 분명 아니었다.


‘처음 있는 사태였던데다 위험을 제거해 긴장이 풀렸나? 놀랍긴 하지만 분석은 나중이다. 우선 알부터 되찾도록 하지.’


그는 서둘러 날아올라 쫓았다.


상당히 평정을 유지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본체 그대로 쫓아갔다.


사실은 처음부터 마법으로 마수의 움직임을 멈췄으면 됐다. 아니면 알 자체를 마법으로 가져왔어도 됐었다. 굳이 그가 직접 날아갈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던 거다.


하지만 그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고――


마수는 본능이 울부짖는 공포에 그대로 굳어 알을 떨어뜨렸다.


정성들여 만들었기에 분명 깨지진 않겠지만 제법 높은 위치였던 터라 무슨 영향이 갈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에게 난생처음으로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 몰아쳤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늦진 않았다.


자신을 다독인 그는 서둘러 마법을 사용해 받아내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마물이 떨어지는 알을 안고 저공으로 날아갔다.


어리둥절하면서도 그는 발동하려던 마법을 취소하고 빠르게 다른 마법으로 마물의 움직임을 봉하려 했다.


하지만 저 마물은 그리 약하지 않았다.


자신과 비교하면 미약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분명 생각 이상의 힘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만한 힘을 사용하면 알에 어떤 영향이 갈지 몰라 고민됐다.


‘그러나 이대로 잃는 것보다는 낫다.’


마음을 정한 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마법을 사용했다.


마법의 효과로 마물은 나는 상태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고, 그는 마물에게 다가가 알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이번엔 또 다른 마수가 등장해 뛰어올라 알을 품에 들고 내달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차례차례 나타나 알을 빼앗는―― 악의까지 느껴지는 황당한 상황에 그는 당혹스러웠다. 그렇지만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들고 간 마수의 마력을 추적해 위치를 알았다.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 뒤를 따라잡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아까 전의 마수가 보였다.


알이 사라진 상태로······


짧은 시간에 잘못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깨지지 않는 건 아니다.


알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훔친 마수나 마물에게 분노가 솟구쳐올랐다. 이대로 이 일대를 전부 불살라 버리고 싶었다. 찬크에르레이, 그 자신도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타오를 듯한 분노였다.


조절 따윈 없는 그의 열화와 같은 노성에 알을 훔친 마수를 포함하여 근방에 있던 모든 생명체가 그에게서 도망쳤다.


방향? 목적?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그에게만 멀어지기만 하면 됐다.


평상시에는 천적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상관없었다. 모두 다 함께 뛰었다. 날 수 있는 마수나 마물은 전력으로 날았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 저 절대자의 분노에서 멀어지기 위해. 저항 같은 건 생각조차도 할 수 없었다.


············.


바람조차도 소리를 죽인 듯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그는 자신을 차분히 진정시켰다. 정말로 이 근방을 다 불태워버리면 알이 다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사명에 반하는 행위라며 억지로 자신을 다독였다.


최대한 자신을 진정시키는 데 힘을 쏟고 어떻게든 냉정을 유지하게 됐을 때 그는 알의 수색을 시작했다.


바로 마력을 찾아보려고도 했지만, 알은 그에게서 마력을 받아 같은 파장을 띠고 있었다.


나중에야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현재는 그의 마력량이 너무 많아서 자신과 똑같은 마력―― 그것도 미약한 마력을 감지하기는 어려웠다.


못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에게 정신이 나갈듯한 공포가 생겨났다.


하물며 알은 이제 막 안정적으로 혼이 정착된 상태로, 앞으로도 더 많은 마력의 공급이 필요하다. 혼도 정작은 했다지만 그래도 정기적으로 나눠 받아야 했다.


시간이 없다.


다급히 날아오르는 와중에도 그는 생각했다. 커다란 모습으로 다니면 혼란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그 혼란에 알이 밟히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그는 작게 모습을 축소했다.


‘내 예상보다 먼 곳까지 굴러갔나.’


그는 근방을 이 잡듯이 들쑤시며 찾아다녔다. 마력에 예민한 존재들이 깜짝 놀랄 때도 있었지만 무시하고 계속 찾아만 다녔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마력이 느껴지면 당장 가서 확인해 보기도 했지만 모두 꽝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성장했다면 마력이 조금 늘어 알아볼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하면서 계속 수색했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흘러갔을까 하여, 먼 곳이라 있을 리가 없을 텐데도 사람이 사는 모든 나라를 찾아가 확인까지 해보았다. 그러나 이번엔 비슷한 마력을 가진 자조차도 없었다.


절망감이 가득하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찾았다.


이미 늦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포기하고 싶은 기분도 떨쳐내기 힘들었지만 그는 반년이 넘도록 계속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다.


냄새가 비슷했고, 마력은 미묘하게 다르지만······ 어쨌든 여러모로 비슷했다. 오차범위 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는 빠른 속도로 다가갔다. 마침 그쪽도 다가오고 있었기에 좋았다.


빠르게 날아가면서도 마력이 비슷한 경우는 적지만 있었기에 그는 내심 기대하면서도 꽝이 아닐까 우려됐다.


하지만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거리가 되었을 때 확신했다.


맞다. 그 아이다.


혼을 볼 수 있기에 틀릴 리가 없다.


‘내 혼을 물려받은, 나의 알에서 태어난 아이다.’


상당히 혼과 마력이 자신과는 다르게 됐으나 태아 땐 주위 환경에 따라 달라지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멀쩡히 성장까지 한 상태였다.


어디 하나 문제없는 상태의 아이를 보자 환희가 솟구쳤다. 그 아이도 자신을 눈치채고 눈도 마주쳤다.


기쁨으로 물든 그는 다가가려 했다. 그리고 알리려 했다. 자신의 아이라고.


바로 그 순간 아이의 뒤에서 어떤 존재가 나타났다. 갈색의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지닌 인간이었다.


알을 훔쳐간 범인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범인은 저 인간이 아니다.


알고는 있지만 마치 저 인간이 훔쳐 간 것처럼 느껴진다······


분명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느껴본 적도 없는 절망으로 반년이 넘도록 보낸 그는 정상적인 사고가 되지 않았다.


이윽고 아이를 찾은 환희가 분노로 바뀔 때, 더욱 불을 붙이듯 나타난 인간이 아이를 잡아끌었다. 아이는 그가 신기한지 버티며 구경하고 있었지만, 인간은 그런 아이를 계속 끌고 가려고만 했다.


그것이 도화선이 됐다. 그의 안에서는 이미 저 인간은 아이를 유괴하려는 파렴치한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모든 감정이 완전히 타오르는 분노로 바뀐 그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정체를 드러냈다.


거대한 그의 거체가 드러나고, 인간은 작게 울리는 진동에 주저앉았다.


분노로 흐려지는 이성속에서도 그는 최소한의 자비로 도망친다면 죽이지는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인간은 오히려 그의 모습을 보자 바로 아이를 잡아당겨 억지로 뒤로 숨겨버렸다.


‘감히 나의 아이를 내 앞에서 당당히 끌고 가려고 하다니······’


그런데다가 인간은 아이에게 크게 윽박지르는 게 아닌가.


어쩌면 여태 저 인간에게 좋지 못한 대우를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눈앞에서 본 광경은 그에게 그러한 생각이 들게 했다.


실제로 다른 대륙에서는 같은 인간끼리 노예로 삼아 가혹한 대우를 한다고 동포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저 인간은 근래의 인간치고는 마력량이 상당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가 저항하기엔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성을 잃게 된 그는 눈앞에 있는 인간의 존재를 지워버리기 위해 불을 내뿜었다.


‘아무리 마력량이 제법 많다고 해도 인간. 한낱 미물이 내 불을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없어지는 걸 그가 확신하는 순간―― 아이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분노로 인해 아이가 어디 있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근처에만 있어도 휩쓸릴 터인데 경솔했다. 그런데다가 지금은 앞으로 튀어나오기까지······


아이의 목숨이 위험하다.


그 생각과 함께 그는 다급하게 불을 멈췄지만······ 이미 나온 불은 바로 없어지지 않는다. 잠시 시간이 걸린다.


그 잠시를 아이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멈추는 듯했고, 그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바로 그때, 인간이 아이를 잡고 뒤로 내던졌다. 동시에 자신이 가진 모든 마력을 동원해 방어벽을 펼쳤다. 그러고는 아이를 감싸 안으며 무리하게 마력을 끌어와 아까보다도 더 견고한 방어벽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방어벽을 펼치더라도 저런 걸로는 내 불을 잠시라도 막기 힘들다.’


그의 생각대로 검은 불꽃이 닿자마자 폭발하듯 첫 번째 방어벽이 사라졌다. 두 번째 방어벽도 변변찮은 저항을 하지 못하고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정말 잠시라도 막기는 힘들었고, 불꽃을 사라지게 할 시간도 만들진 못했지만······


――덕분에 비껴가게는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저 인간이 아이를 감싼 거지?’


아이가 안전해지자 그도 안도로 머리가 식어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해 볼 수 있었다.


노예를 재산으로도 삼는다는 인간의 사고방식에 기인한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자기 목숨을 걸고 지킬 리 만무했고, 절박해 보였던 인간의 모습에서는 그런 느낌조차 들지도 않았다.


‘흡사······’


이상한 기분에 서둘러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려봤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었을지라도 망각 따위 하지 않는 그에게는 손쉬운 일이었다.


‘아이리스······ 그게 저 아이의 이름인가?’


더듬는 기억 속에서는 분명 저 인간이 아이를 아이리스라 불렀다.


그는 계속해서 기억을 더듬었다.


‘할아버지에게······ 마을로 돌아가라. 그리고······ 엄마?!’


그는 아직 불길이 지나쳐가는 속에서 웅크린 인간과―― 인간이 아이리스라고 부르던 아이를 봤다.


그때가 돼서야 그는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은 틀렸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도난당한 알은 아직 혼과 마력이 더욱 필요했었다. 분노로 알아차리는 게 늦었지만, 분명 저 인간이 마력과 혼을 나눠준 것이다.


다만, 혼을 나눠주는 일은 결코 애정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걸 입증했다.


‘나는 큰 실수를 저질렀고, 아이의 눈앞에서 엄마를 빼앗는 짓을 저지를 뻔했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저지를 뻔했다.


그래. 저지를 ‘뻔’했다.


용서받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아직 늦진 않았다. 아이―― 아이리스를 감싼 인간은 신체의 반신에 가까운 정도가 뼈만 남고 몽땅 사라졌지만 아직 살아있다.


‘나는 살릴 수 있고, 아직 되돌리기엔 늦지 않았다.’


그는 이 순간만큼 자신이 용으로서 신들에게 생을 부여받은 것에 감사한 적이 없었다.


명석한 두뇌를 부여받아 불길이 아직 지나고 있는 이 짧은 순간에도 늦지 않게 실수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 저 인간―― 아이리스의 엄마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에 신에게 감사했다.


빠르게 인간으로 변한 그는 사라지듯 뛰어가 아직 다 지나가지 않은 불길을 손으로 치워버렸다.


하늘을 뚫고 날아가는 불길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바로 반신이 사라진 인간을 조심스럽게 눕혀 치료를 시작했다.


그렇게 사라져 버린 반신과 더불어 열기에 문드러진 얼굴이 빠르게 치유되고 있는 가운데, 정신을 차린 아이리스가 쓰러진 인간을 보고 외쳤다.


엄마라고······


드래곤의 울음소리였지만, 그가 지성을 가진 존재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을 리는 없었다.


역시 잘못 파악한 것이 아님을 재차 알게 된 그는 큰 죄책감에 빠졌다.


‘이 인간은 분명 아이리스가 태어나서도 많은 애정을 쏟아주며 키워왔겠지.’


인간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울면서 미친 듯이 소리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누가 봐도 뻔한 이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멍청함에 화가 난다.


한동안 패닉에 빠져 소리치고 있던 아이리스는 뒤늦게 그를 알아채고 인간을 지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아무리 인간으로 변해있다지만 냄새, 마력, 혼 모든 게 그대로이니 못 알아볼 수가 없다.


그대로 팔뚝을 물고 늘어지는 아이리스.


자신의 아이가 화내면서 물고 있었지만, 그는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반신 가까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다가 무리하게 마력을 끌어와 마법을 시전해서 신체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극단적으로 말해 멀쩡한 신경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신중히 치료해야만 했다.


물론 아이리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갑자기 엄마가 공격당해 죽어가고 있는데 어찌 화나지 않겠는가.


아이리스를 낳지 않았으면 이해하지도 못했겠지만······ 지금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는 공격해도 불만하나 가지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일 요량이었으나, 부디 지금만은 넘어가 줬으면 했다.



“미안하다. 내 착각으로 너의 엄마를 다치게 했다. 용서해 달라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은 너의 엄마를 치료할 수 있게 해다오. 부탁하마.”


그는 진심을 다아 아이리스에게 호소했다.


그 호소에 아이리스는 방심하지 않고 물고 있는 채로 치료되어가는 인간을 곁눈질로 살폈다. 그러다 이윽고 살짝 경계를 풀더니 서서히 힘을 빼고 물러섰다.


고마움을 전하고 싶지만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은 이 인간을 살리는 게 최우선이다. 바로 잡념을 버리고 치유에만 전념했다.


긴 생을 존재하는 동안 그가 이토록 집중했던 적도 드물었다. 기껏 있다면 아이리스의 알을 만들고 키웠을 때밖에 없었다.


그렇게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치료는 상당한 시간을 소비했고, 어느 정도 생명의 지장이 없게 되었을 때는 날이 완전히 저물어 한밤중이 되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후유증이 남아서는 안 된다. 앞으로 조금만 더 치료해야 한다.’


인간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멈추지 않고 치료하던 그는 다른 공간에 수납하고 있던, 동포가 준 인간의 옷을 마법으로 한순간에 갈아입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여태껏 알몸이었었다.


아이리스의 알을 덮을 때도 썼던 푹신한 담요도 꺼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옷 대신 인간에게 덮어줬다.



“후······. 이제 생명에 지장은 없겠지만 만전은 아니다. 치료를 중단할 순 없으니 인간―― 너희의 집으로 안내해 줄 수 있겠나? 네 엄마를 안전한 곳에서 치료하고 싶다. 부탁한다.”


머리를 숙인 그의 부탁에 아이리스는 잠시 동향을 살피다 뒤를 돌았다. 그리고 짧게 따라오라고 말하였다.



“고맙다.”


그는 조심히 누워있던 인간을 들고 경계 어린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는 아이리스를 따라 이동했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가깝다고 할 정도도 아니었고, 치료하면서 조심히 걷기도 한 탓에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밝고 있었다.


마을은 제법 소란했는데, 이 소란은 아이리스와 인간을 찾기 위한 소동으로 보였다.


그런 마을에 그가 인간을 안고 들어서자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걱정스레 아이리스와 인간의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물었다.


이 모습에 그는 자신이 안고 있는 인간뿐만 아니라, 이 마을 전체가 아이리스를 잘 대해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금 몰려오는 죄책감에 씁쓸해졌으나······


‘내 감정 따윈 아무래도 좋다. 뒤로 미루어도 하등 상관없다. 그보단 경계하는 이들에게 자초지종을 알리는 게 먼저다.’


그는 소란을 느껴 황급히 뛰어오는 한 인간 남성을 보았다.


마을에서 상당한 강자로 보이는 남성은 이미 안고 있는 인간을 보고 경계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를 자극하지 않도록 유의하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상황을 먼저 설명하고 싶지만, 일단 이 인간······ 리아, 라고 했나? 여기 이 아이의 엄마를 안전한 곳에 눕히고 싶다. 설명은 그곳에 가서, 치료하면서라도 상관없으니 나중에 하겠다.”


노력이 무색하게 그의 말투는 딱딱했고, 태도도 매우 당당해 위압적이기까지 했다.


이래 놓고 경계하지 말라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


물론 그에게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다. 단지 대인관계가 매우 서툴렀을 뿐이다. 같은 용인 동포들 말고는 그다지 남과 대화한 적이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앞에 있는 남성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는데, 치료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눈을 부릅 떠 경계의 눈초리로 한층 격상하게 되었다.


상황은 최악. 그러나 남성은 리아라는 인간의 안위가 걱정되었는지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는 걸 우선하여 길을 안내했다.


주변의 사람들이 길을 터고, 앞장서는 남성을 따라갔다.


그러다 얼마 가지 않아 안고 있는 리아와 비슷한 혼을 지닌 여성이 나타나 앞길을 가로막았다.


‘아마 리아의 부모가 되는 자이겠지.’


자식을 안고 있는 그를 경계하면서 여성은 안내하는 남성에게 물었다.



“재, 잭 씨! 지금 어떻게 된 거예요? 저 남자는 누군데 왜 우리 리아를?”

“리아를 치료해야 한대. 지금 안내하는 중이었고.”

“어······어쩌다가 리아가!”


여성은 고개를 돌려 무서운 눈초리를 그에게 향했다.



“리아를 돌려줘!”

“그건 힘들다. 지금도 치료하고 있으니. 부모로 보인다만 이해해주길 바란다. 지금은 한시라도 치료를 멈출 순 없다. 부탁한다. 설명은 나중에라도 하겠다.”


상당히 차갑고 딱딱하게 들리는 말투지만 이게 그의 최선으로, 리아의 부모이기도 한 여성에게 경의를 담아 최대한 친절히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투가 부드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여성은 그의 말에 화가나 눈에 쌍심지를 켜고는 말까지 더듬었다.



“무, 뭐어?!”

“지, 진정해, 필리아. 저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리아는 지금 위험한 상태야.”

“잭 씨!”

“아아. 일단 리아를 너희 집으로 옮기자. 이야기는 나중이야. ······어이! 누가 촌장님 좀 불러줘!”


침착히 상황을 정리한 잭이라는 강자는 곧장 가던 방향을 바꿔 다른 곳, 리아의 집이라 여겨지는 곳으로 이동했다.


아마 자신을 경계해 마을 외곽으로 이동하다 리아의 부모가 나타나 진정시킬 요량으로 목적지를 변경한 것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몇 사람이 잭의 지시에 촌장이라는 사람을 데리러 갔고, 그는 다시 앞장서 걷는 잭을 따라갔다.


가면서 필리아란 리아의 부모에게 아이리스가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녀뿐만이 아니라 아무도 아이리스의 말을 듣지 못하였다.


지금만큼은 그것이 다행이었다.


리아를 상처입힌 장본인이라고 듣는다면 안내는커녕 바로 제지당할 테니 말이다.


그렇게 아무 방해도 없이 도착한 집은 그의 본 모습의 한쪽 발보다도 작은 흙과 나무로 만든 집이었다.


곧바로 들어서자 그 안에는 리아의 혼과 닮은 또다른 부모가 있었다.



“리아야!”

“이스카르, 미안하지만 설명은 나중에······ 필리아! 리아를 눕힐 곳은?”

“이쪽이요. 아이리스랑 지내는 방으로 와요.”


안내하는 필리아를 따라 방으로 들어간 그는 침대에 리아를 눕혔다.


확실히 이곳에서 리아와 아이리스가 지내고 있는지 집 근처부터 풍기던 둘의 체취가 더욱 진하였다.


짧게 방을 둘러본 그는 침대 옆에 앉아 리아의 상처를 계속해서 치료했다.


그 모습을 걱정스레 지켜보던 아이리스와 사람들은 방해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집으로 들이닥쳤다. 마력량과 상황을 고려해보면 촌장으로 생각되어진다.



“리아야! 괜찮니?!”

“아빠, 조용히······”


필리아의 제지에 촌장은 바로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저 남자는 누구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게냐?”

“우리도 아직 듣지 못했어요. 리아의 치료가 우선이래요.”

“어, 어딜 다친 게야?!”


촌장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봐, 당신······? 응? 아닛?! 당, 당신은······ 누구시오?”


필리아의 부모이자 리아의 조부인 이 인간은 제법 마력을 다룰 줄 아는 모양이다.


‘그래서 놀란 것이겠지. 나는 현재 인간이 느끼기에는 많은 마력을 사용하고 있으니.’


쉬지 않고 계속 이러고 있는 것이다. 마력을 느낄 줄 안다면 차이를 절감했을 터다.


‘잭이라는 자도 아마 느꼈기에 함부로 달려들지 않고 필리아를 막았던 모양이군.’


생각을 마친 그는 촌장에게 말했다.



“나에 대한 설명은 잠시 미루도록 양해를 구하지. 이 인간―― 리아의 치료가 끝난 다음에 말해주겠다. 그리고 아이리스라고 했지? 너에게도 다시금 부탁한다. 치료가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려주길 바란다. 찬크에르레이, 내 이름과 사명에 걸고 맹세하마. 반드시 너의 엄마를 구하겠다.”


아이리스는 지금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표정으로 리아에게 시선을 떼는 일 없이 조용히 침대 앞에 앉아 그의 행동을 용인해줬다.



“레이······?”

“어르신?”

“아, 아니, 아니다······. 그럴 리가······”


그는 뒤에서 중얼거리는 촌장을 힐끔 쳐다봤다.


‘어디선가 우리에 대해 들었을 수도 있겠군. 오랜 시간 대륙에 나가 있는 동포들도 있으니 전승이라든지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아.’


알든 말든 관심은 없지만 그것으로 방해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는 그걸로 좋았다.


정말 뭐라도 좋았다.


부디 리아의 치료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것이 지금 그가 바라는 유일한 소원이었기에······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입니다


화수가 꼬여 한 화가 늘어나버렸지만 너그러이 봐주시길 바라며 내일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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